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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5 강 - 疑問品- 1
三. 疑問品
一日은 韋刺使- 爲師하야 說大會齊하고 齊訖에 刺史- 請師升座하고 同官僚士庶로 肅容再拜하야 問曰, 弟子- 聞和尙說法하오니 實不可思議라 今有少疑오니 願大慈悲로 特爲解說하소서
師曰, 有疑卽問하라 吾當爲說하리라 韋公이 曰, 和尙의 所說이 可不是達磨大師의 宗旨乎이까 師曰, 是니라 公이 曰, 弟子- 聞, 達磨大師- 初化梁武帝할새 帝- 問云, 朕이 一生에 造寺供僧하고 布施說齋하였으니 有何功德이니이꼬 達磨- 言, 實無功德이라하시니 弟子- 未達此理이오니 願和尙은 爲說하소서
師曰, 實無功德이니 勿疑先聖之言하라 武帝- 心邪하야 不知正法하고 造寺供僧하고 布施說齋하니 名爲求福이라 不可將福하야 便爲功德이니 功德은 在法身中이오 不在修福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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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 세 번째 疑問品(의문품)이 되겠습니다. 이 의문품 이라고 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위 지사가 평소에 불교에 대해서 의문이 있는 것을 육조스님께 물어서 해결하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질문인데요. [서방정토]라고 하는 문제하고 공덕이라고 하는 문제. 달마대사와 양무제의 대화에서 있었던 복을 짓는 것이 공덕이 되는가 안 되는가 하는 그 문제하고 두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평소에 궁금해 했었는데 육조스님 같은 천하의 명 선지식을 만나서 한 번 후련하게 대답을 듣고 싶어서 질문을 하고, 육조스님이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三. 疑問品
一日(일일)은 韋刺使(위자사)가 爲師(위사)하야 說大會齊(설대회제)하고→ 대회제 라고 하는 것은 일개 고을의, 큰 고을의 자사가 돼서(지금의 도지사쯤 되는 벼슬이지요.) 설대회제라고 하면 큰 스님을 모시고 많은 사람들을 초빙을 하고, 또 일개 都(도)면, 한 개 고을이면 그 고을 원이나 자사가 주관을 해서 하는 그런 법회를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법회니까 상당이 경비도 많이 들었을 것이고, 또 그만큼 분위기가... 그 당시에는 불교가 성 하던 때 이니까, 국고를 기우려서라도 대회제를 베풀만한 계기가 되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大會齊를 베풀면 대개...
無差大會(무차대회)라고 하는 말을 우리나라도 가끔 쓰는데, 무차대회라는 것은 거기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자격에 대해서 또는 신분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제약이 없지요.
전혀 신분이나 성별이나 이런데 대해서 전혀 제한이 없이, 僧俗(승속)도 마찬가지고 남녀도 마찬가지고, 거기에 대해서 제한이 없이 누구나 다 모여서 그 법회에 참석할 수가 있고, 또 여기서는 식사도 같이할 수가 있고, 모든 자격을 공유할 수 있는 그런 법회가 옛날부터 부처님 당시부터 있어왔던 것인데 그것을 “무차대회”이런 말을 씁니다. 주관하는 사람이 어떤 주제를 가지고 대개 주관을 하지요.
여기 大會齊 라고 하는 것도 아마 그런 성격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일개 사찰에서는 어렵지요. 사찰의 힘으로선 어렵고, 官(관)의 公力(공력)을 빌려서 해야 많은 사람들이 동원이 되고, 여러 가지 교통편 이라든지 사용해야할 도구들에 대한 준비라든지, 이런 것들이 용이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자사쯤 되는 사람이, 스님을 위해서 천하의 이런 훌륭한 선지식이 오셨으니까 ‘한 두 사람. 또는 한 사찰의 대중만 법회를 들어선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동참을 하는 이런 대회제를 베풀었지요. 요즘은 녹음기도 있고 중계도 할 수가 있지만, 그 때는 일회로 끝났거든요. 그 때 놓쳐 버리면 안 된다고요.
그러니까 옛날에는 그런 어려운 사정이기 때문에...
梵網經(범망경)에 보면, 법회를 한다는 소문을 듣고 가서 듣지 아니 가면, 그것도 죄가 된다고 그렇게 됐습니다. 불자는 딱. 가서 들어야 불자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이지, 법회가 열린다는 소리를 듣고도 안 가서 안 듣는다면 불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輕垢罪(경구죄)를 범하는 것이니라.” 하고 보살계에 戒文(계문)으로서. 戒律(계율)로서 그렇게 못을 박아놨어요.
그 시기를 놓쳐 버리면 어렵거든요. 대회를 베푸는데 대개 보면 여러 가지 식전행사가 있을 것이고, 의례적인 식순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공양을 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참석한 사람들의 공양을 하게 되고 그렇습니다.
齊訖(재흘)에→ 재 가 마치매. 재흘하는 것은 그런 의례적인 행사와 공양이 끝났다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법문을 해야 되겠지요? 대개 그렇습니다. 지금도 사찰에서 행해지고 있는 법회의식이 대개 그렇습니다.
刺史(자사) 請師升座(청사승좌)하고→ 자사가 스님을 청해서 법상에 오르도록 그렇게 하고,
同官僚士庶(동관료사서)로→ 같은 관료. 또는 선비. 서민. 관료와 사와 서. 그런 사람들이 모두들
肅容再拜(숙용재배)라→ 아주 엄숙한 얼굴로 재배. 三拜(삼배)를 올리지 않고 재배를 하는 것은 유교식이지요. 여기는 모인 사람들이 모두들 아직도 불교적인 분위기는 아니니까요. 재배를 해서,
問曰(문왈)→ 묻기를 가로대,
弟子(제자) 聞和尙說法(문화상설법)하오니→ 제자가 화상. 큰 스님의 설법을 들으니,
實不可思議(실불가사의)라.→ 정말 이 불가사의라고 하는 것은 “정말 훌륭하시고 아주 대단하시고 의미 심장 하십니다.” 하는 그런 뜻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실불가사의라. 그런데, 今有少疑(금유소의)오니→ 지금 조그만 한 의심이 있는데,
願大慈悲(원대자비)로 特爲解說(특위해설)하소서→ 원컨데 대 자비로 특별히 좀 해설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마 육조스님이 이미 앞서 법문하신 것 같아요. 질문에 답하는 그런 형식으로 경문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師曰(사왈) 有疑卽問(유의즉문)하라→ 의심이 있거든 곧 물어라.
吾當爲說(오당위설)하리라→ 내가 마땅히 여러분들을 위해서 설명해 주겠습니다.
韋公(위공)이 曰 和尙(화상)의 所說(소설)이 可不是達磨大師(가불시달마대사)의 宗旨乎(종지호)이까→ 이거 상당히 중요한 질문인데요.
지금 육조스님께서 설하신 思想(사상). 또는 종지. 그 다음에 뭐라고 할 까요. 불교에도 여러 종파. 여러 학설이 있을 수가 있는데 이것은 선종이기 때문에, 또 선종이라고 하니까 이렇게 와서 모여서 듣고, 큰스님을 이해하게 되고 그러는데 스님의 어떤 사상적 전통이 달마스님 하고 同一(동일)합니까? 이 말입니다. 달마스님의 그 전통을 이어받은 그런 조사이십니까? 하는 그런 뜻입니다.
소설이 가히 달마대사의 종지가 아니십니까?
이 宗旨라는 낱말을 불교에서 쓰는데, “으뜸가는 취지” 그런 말입니다. “으뜸가는 취지” 글자대로 분석하면 그런 뜻입니다. 흔히 “종지” “종지”그래요. 이것은 불교적인 안목을 宗旨라고 표현합니다. “종지에 밝아야 된다.” 이런 말을 해요. 그렇습니다.
사실 교리적으로 삼보가 뭔지 모르고, 육바라밀이 뭔지 모르고, 육근 육진이 뭔지 설사 다 기억하지 못 한다손치더라도, 불교의 중심 되는 사상! 불교의 아주 근본 되는 취지가 무엇이다. 라고 하는 것.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근본이거든요. 나머지는 아주 지엽적인 것이라고요. 지엽적인 것은 사전 찾아보면 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宗旨! 이 문제는 사전에 나오지도 않고, 사전 가지고 될 일도 아니지요. 책을 본다고 해서 종지가 다 들어날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나 다 육조단경을 본다고 해서 육조단경의 근본 취지가 마음에 쏙 들어오는 것도 아니거든요. 이것은 개인의 문제이고, 개인의 어떤 지견. 내지 소견의 문제이기 때문에 종지를 불교에서는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소견이 제대로 되어야, 근본적인 정신이 바로 박혀야 다른 지엽적인 불교 이론이 바르게 설명이 되어질 수 있다는 뜻에서, 이 종지를 아주 중요시 여깁니다. “달마대사의 宗旨 하고 같으냐?” 이런 말이지요.
師曰(사왈) 是(시)니라→ 그러니라.
公(공)이 曰(왈) 弟子(제자) 聞(문)→ 제자가 들은즉, 달마대사에 대해서 있었던 이야기에 대해서 묻겠습니다. 그런 말입니다. 묻는 것도 아주 질서정연 하게 체계적으로 묻지요? 스님이 달마의 후손으로서 달마스님의 사상하고 같으냐? 해서 같다는 확신을 받고, 그럼 달마스님에 대해서 제가 묻겠습니다.
達磨大師(달마대사) 初化梁武帝(초화양무제)할새→ 달마대사가 양나라 무제라는 왕을 교화를 하는 그 무렵이지요. 인도에서 달마대사가 왔는데, 그 당시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오는 스님들의 행차가 빈번했어요. 중국에서 경전을 구하러 삼장법사와 손오공의 이야기처럼 가서 구해오는 경우도 있고, 또 인도에서 이 대륙. 그야말로 중국대륙. 인구도 많고 그 넓은 땅에 와서 불법을 펴겠다고 하는 큰 뜻을 품고 건너오는 사람들도 많고 그랬습니다.
달마대사가 양나라 무제 시절에 건너 왔는데, 그 때만 해도 벌써 불교가 한 200년 전에 이미 들어 와 있었어요.
그런데 그 불교는 경전이 한권씩 두 권씩. 또는 불상이. 또는 향이 이런 것들이 부분적으로 전해오고 해서, 불교가 제대로 체계를 잡지 못한 그런 시기였기 때문에,
이 양나라 무제가 治世(치세)할 무렵에 달마대사가 와서야, 禪宗(선종)의 입장에서 보면 비로소 불교다운 불교를 펴기 시작했다. 이렇게 禪宗 史(선종사)에서는 봅니다. 그래서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오자마자 큰 스님이라고, 생기기도 이상하게 생겼고, 보아하니까 비범하게 보이고 그래서 큰 스님으로 소문은 났어요. 그렇게 되면 그 당시엔 궁중에서도 불교 분위기니까, 일단 왕이 초청해서 법문을 듣는다든지 한 번 알아본다든지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다시피 되어있었지요.
마찬가지로 이 양나라 무제라고 하는 임금은 불교에 대한 신심이 대단 했어요. 일년에 절도 몇 채씩 짓고, 또 스님들이 출가해서 스님이 되고 승적에 올라가고 하는 이런 것들도 전부 국가에서 관장할 정도로 그 당시는 불교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포교가 되었거든요. 한 때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었습니다마는...
그래도 당나라 송나라를 거치면서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공산당이 들어오기 이전 까지는 상당 했어요. 사이사이에 불교가 조금씩 사태를 만나는 때도 물론 있었습니다만... 그래서 매년 예를 들어서 승려를...
지금 우리 조계종 같은 경우는 들어오는 사람. 지원자에 한해서 만들었는데 옛날에 중국 같은 데서는 숫자를 제한을 했어요. 예를 들어서 금년에는 만 명을 만든다. 하면 딱 만 명만 만드는 거예요. 그 이상은 지원자가 있어도 안 되고, 또 시험을 엄격하게치고 그렇게 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는 현수스님이라고...
현수법장이라고 우리 의상스님하고 지엄 문하에서 같이 화엄경을 공부했는데, 그 현수스님은 얼마나 뛰어났던지 그는 벌써 머리 깎기 전에, 화엄경을 통달하고 깨달은 바도 있고 그래서 화엄에 대한 논문 소초를 60화엄 소초를 썼는데, 벌써 그 때에 아주 빛을 발하던 그런 때였습니다.
그 당시 측천무후가 국가를 다스리던 때인데, 불교를 상당히 좋아했고 공헌이 많지요. 그런데 이 현수스님이 워낙 훌륭하고 머리 깎기 이전부터 벌써 도승으로 이름을 날렸기 때문에 머리를 깎은 것은 29세인가? 아무튼 상당히 늦게 깎았어요.
그 전에 벌써 자기할 것 다 했어요. 어떤 큰스님보다도 도가 높았고, 학문도 높았고 그래가지고 그래서 금년에는 현수스님 머릴 깎일 해다. 측천무후가 선포를 했어요.
올해는 누구도 중이 될 수가 없다. 오직 현수스님 한 사람만 중이 된다. 현수스님이 이렇게까지 큰 영광을 누렸어요. 그 당시 1년에 만 명 이상씩 됐어요. 중국에서 만 명이라고 해봐야 몇이 안 되지요 사실은...
1년에 만 명 이상씩 국가적으로 스님을 만드는데 그것을 전부 스톱시키고 현수스님 한 사람만 금년에는 스님이 될 수 있다. 이렇게까지 국가적인 추앙을 받으면서 스님이 됐던 분이 현수스님입니다. 대단한 분이지요. 뛰어났던 분 같아요. 그래도 그 분이 자기가 화엄경에 대한 무엇을 써가지고...
우리 의상스님과 동문수학 하다가 의상스님은 그 당시 당 나라에서 신라를 침범한다는 정보를 듣고는 유학간지 7년만엔가 얼른 건너왔어요.
신라를 지키기 위해서 그 정보 때문에 미리건너 왔지요. 그렇게 빨리 건너 왔는데 현수스님이 자기 저서를 신라에 보내가지고 의상스님한테 교정을 받고 그랬어요. 그 편지가 지금도 전해지지요. 그 편지 원문이 일본의 동경대학 도서관에인가 있어요. 당나라 때의 그 편지가...
우리나라에 삼국유사에도 그 편지글은 실려 있지요. 거기 보면 의상스님을 상당히 높이 생각을 했는데 의상스님은 또 그만치 현수스님이 존경할 정도로 뛰어났던 인물 같습니다.
양나라 무제라고 하는 임금은 임금의 권한으로 많은 스님들을 만들고 절을 짓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帝(제) 問云(문운)→ 묻기를
朕(짐)이 一生(일생)에 造寺供僧(조사공승)하고→ 절을 짓고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布施說齋(보시설재)하였으니→ 보시를 많이 베풀고 재 도 많이 베풀었으니, 이런 분들은 放生池(방생지)를 따로 팠어요. 방생할 수 있는 못을 따로 크게 곳곳에 아무 곳에나...
방생할 수 있는 물이 중국에는 흔치 않으니까요.
방생할 수 있는 못을 따로 파야 돼요. 그것이 放生池(방생지)입니다. 그래가지고 사람들에게 고기를 잡아서 먹지 못하고 방생하도록 하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그렇게까지 했지요.
보시설재하였으니 有何功德(유하공덕)이니이꼬→ 어떤 공덕이 있겠습니까? 스님도 많이 만들고 절도 많이 짓고, 보시도 많이 하고 재도 많이 베풀어가지고... “설재”라고 “재를 베풀었다.”고 하는 것은 스님들에게만 공양을 대접했다는 것이 아니고, 아주 불우한 사람. 많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몇 날 며칠 대접하는,
심청전에 나오는 전국에 있는 맹인들, 몇 날 며칠을 재를 베풀어가지고 음식을 대접을 했다고 하는 그런 것들도 역사적으로 그런 전통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도 신라 고려 때 飯僧(반승)이라고 해가지고 고려사에 보면, 500명을 공양을 올렸다. 1000명을 올렸다. 나중에 2000명. 3000명. 과장도 좀 있겠지마는, 10000명을 飯僧(반승)을 했다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그러니까 나라가 안 망하고 됩니까? 작은 나라에서... 너무 치우치다보면 폐단이 생기게 마련이에요. 매사에 치우치다보면 폐단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 재는 스님들뿐만 아니라, 누구나 다 동참할 수 있는 그야말로 “大齊(대재)” “무차대회” 같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 좋은 일을 많이 했는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라고 달마대사에게 물으니까
達磨 言(달마언)→ 달마대사가 말하기를
實無功德(실무공덕)이라하시니→ 어떤 데는 小無功德(소무공덕)→ 적을 소자를 써가지고 전혀 공덕이 없다. 여기서는 실로 공덕이 없습니다. “사실은 공덕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어요. 양무제가 어떤 공덕이 있겠느냐고 할 때는 상당이 칭찬도 좀 받고 “아! 당신은 부처십니다. 보살이십니다.
부처가 아니고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그렇게 큰 칭찬을 바랐었는데, 거기엔 이미 相(상)이 잔뜩 들어있지요.
좋은 일은 했지마는 상이 잔뜩 들어있으니까 달마스님 보기에는 참 가소롭지요. 우습지요. 좋은 일 한 것까진 좋지만 거기에 相이 그렇게 들어 있으니까 그거 뭐... 그러니까 아주 당연히 실무공덕이다→ 전혀 공덕이 없다.
弟子(제자) 未達此理(미달차리)이오니→ 그렇게 했는데 달마대사하고 양무제하고 그런 이야기를 했다. 여기는 기록이 안 되었지마는,
이 양무제가 화가 나고, 어리둥절하고, ‘이게 진짜 큰 스님인가? 진짜 중 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가지고 “내 앞에 있는 당신 누구요?” 그랬다고요.
“對朕者誰(대짐자수) 내 앞에 있는 당신 누구요?” 그러니까 달마스님이 “不識(불식) 모른다.” 그랬어요.
“내 앞에 있는 당신 누구요?” 하니까
“모른다.” “나는 모르요.” 이렇게 대답을 했어요. 달마스님도 어지간히 수준을 낮추어 가면서 대답을 할 것이지, 그렇게 얼토당토않은 차원 높은 禪門答(선문답)을 하니까 양무제 같은 이가 알아듣나요?
그런데 못 알아들은 양무제는 불쌍하지만, 또 그 선문답이 영원히 빛을 발하는 겁니다. 그것이 또 중요한 것이지요. 못 알아들은 양무제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계속 기록으로 남아가지고, 오랫동안 사람들이 공부하는데 禪의 귀감이 되고 그렇습니다.
小. 實無功德이라는 말이나 “대짐자수?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요?” 할 때, “나는 모른다.”라고... 그러니까 달마스님하고 양무제는 영 대화가 안 되잖아요? 달마스님은 왕궁에서 떠나고, 나중에야 이런저런 소문을 들어 보니까, 양무제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런 큰 그릇 이란 것을 알았지만, 그때는 이미 때가 늦어버렸지요.
그래서 사신을 보내가지고 “아! 그 스님 다시 청해 오라.”고 하니까 부탁을 받은 사람이 하는 말이 아주 가관입니다.
“擧國(거국)이, 온 나라 백성이 다 가더라도 돌아올 사람이 아닙니다.”그랬습니다. ‘사신들이 가고 왕이 가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온 나라 백성이 다 가서 모셔온다 하더라도 돌아올 사람
이 아니다.’ 그런 아주 豪快(호쾌)한 표현들이지요.
그래서 달마스님은 소림굴에 가서 그 때부터 9년을 묵묵히 말없이 지내기도 하고, 또 결국 이해가 안 되어서 사약을 받았다. 하는 역사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건 그렇고, 그런 복을 많이 지었는데 공덕이 하나도 없다니,
弟子(제자) 未達此理(미달차리)이오이다→ 제자. 위자사지요? 자사 이 사람이, “저로서는 이 이치를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통달할 수가 없습니다.”그랬어요.
“그러니까 願和尙(원화상)은→ 원컨대 화상께서는, 큰스님께서는,
爲說(위설)하소서→ 저를 위해서 이야기 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師曰(사왈)→ 육조스님이 말하기를
實無功德(실무공덕)이니→ 사실 내가 생각해 봐도 공덕이 하나도 없다. “그거 뭐 공덕이라고 할 것이 있는가? 복은 될지 몰라도 공덕은 안 된다.”
공덕과 복의 차이를 여기서 또 우리가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勿疑先聖之言(물의선성지언)하라.→ 선성의 말을 의심하지 말라. 달마대사가 한 그 말을 의심하지 말라.
武帝(무제)가 心邪(심사)하야→ 양무제가 마음이 삿 되가지고서, 여기서 삿되다고 하는 말은 相이 있다. 아직도 덜 떨어졌다. 라고 하는 뜻이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邪邪(사사)한 무당에 가까운 또는 마음이 온전치 못한 그런 뜻의 삿될 邪(사)자가 아닙니다.
正法에서 볼 때는, 정법을 깨닫지 못하면 다 마음이 삿되다고 그렇게 보는 것이지요. 무제가 마음이 삿 되가지고서,
不知正法(부지정법)하고→ 정법을 알지 못하고
造寺供僧(조사공승)하고→ 절을 조성하고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고,
布施說齋(보시설재)했으니→ 보시하고 재를 베풀었으니,
名爲求福(명위구복)이라→ 이것이 이름이 복을 구하는 것이다.
不可將福(불가장복)하야 便爲功德(변위공덕)이니→ 가히 복을 가지고서 공덕으로 여기지는 말라. 복 가지고 공덕이라고 하지 말라. 공덕과 복은 다른 것이다.
功德(공덕)은→ 공덕이라고 하는 것. 공덕에 대해서 쭉 여러 번 설명을 합니다. 공덕이라고 하는 것은,
在法身中(재법신중)이오→ 공덕은 우리 마음자리에 있는 것이고,
不在修福(부재수복)이니라.→ 복을 닦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문제다.” 이겁니다.
공덕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 우리 마음의 不思議性(부사의성). 마음으로서의 근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능력. 이것을 공덕이라고, 마음의 힘을 공덕이라고 하는 것이지, 좋은 일해서 거기에 대한 果報(과보)로 돌아오는 복. 이걸 가지고 공덕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묻기는 공덕을 물었으니까요.
복을 물었다면 복은 있다고 했을런지는 모르지만... 마음의 무한한 능력하고는 다르다 이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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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하 반야 바라밀, 마하 반야 바라밀, 마하 반야 바라밀, _()_()_()_
저~중간쯤에 ?? 를 해결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_()_
'60화엄소초'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현수 법장스님이 맞지 않나요? 다른 법우님들 의견 올려주셔요 _()_
맞아요, 현수법당이 아니라 현수법장 이네요, 그리고 ??표 해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功德은 在法身中이오不在修福이니라...공덕은 우리 마음자리에 있는 것이고 복을 닦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대원성님, 고맙습니다..._()()()_
우리 마음의 不思議性(부사의성). 마음으로서의 근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능력. 마음의 힘을 공덕이라 한다... 대원성님! 감사드립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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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성님, 감사드립니다_()()()_
좋은 일해서 거기에 대한 果報로 돌아오는 福을 功德이라고 할 수 없다...대원성님 수고하셨습니다.._()()()_
不可將福하야 便爲功德이니 功德은 在法身中이오 不在修福이니라 ...고맙습니다._()()()_
대원성님, 부지런 하신 분이십니다. _()()()_
감사합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_()()()_
대원성님!! 대단히 감사하옵니다..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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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대원성님_()()()_
마하반야바라밀()()()
감사합니다. _()()()_
불교의 중심 되는 사상! 불교의 아주 근본 되는 취지가 무엇이다. 라고 하는 것.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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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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功德은 在法身中이오 不在修福이니라. 住相布施는 無功德이라.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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功德 , 在法身中 , 不在修福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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功德 在法身中 不在修福 ...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不可將福 便爲功德 ...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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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공덕과 복 ...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
造寺供僧(조사공승)하고→ 절을 짓고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布施說齋(보시설재) 보시를 많이 베풀고 재 도 많이 베풀어...._()_ _()_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
마하 반야바라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_()_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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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