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자료는 "비지팅아트"(Visiting Arts) 제공 <캄보디아 컬추럴 프로파일>(The Cambodia Cultural Profile)의 내용 중, 해당 부분을 발췌하여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캄보디아 컬추럴 프로파일>은 "캄보디아 문화예술부"가 협력하고 미국 "록펠러재단"(Rockefeller Foundation)이 재정을 지원하여 만들어진 정보이다. |
캄보디아의 전통공예 (상)
오늘날 "캄보디아 공예"(Cambodian craft) 혹은 "캄보디아 미술"(Cambodian art)이라 불리는 상품의 생산활동은, 식민지 시대 이전에는 주로 두 가지 방식으로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즉 시골지역에서는 주로 실용적이고 사회적 사용 목적을 가진 물품들을 부업을 통한 수공업으로 생산했고, 반면 왕궁에서는 전문적인 예술가들과 장인들이 국왕 및 궁정에 필요한 작품을을 전업 노동을 통해 생산했다. (사진☞) Long Sophea의 작품 "Boat"
지난 10년간 캄보디아의 전통 공예는 새롭게 부활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기념품과 호텔 판매용품 시장의 성장에서 기인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정부와 NGO들의 노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석공예와 칠기를 비롯한 많은 공예들이 그 맥이 거의 끊긴 상태였지만, 오늘날에는 상당히 두터운 층의 장인들이 세계적 품질의 공예품을 생산하고 있다. |
역사적 배경
1900년대 이전의 시골에서는 의류(sampot 섬뽓)와 스카프(krama 끄로마)를 만들기 위한 천짜기가 가족 단위로 이뤄졌다. 또한 항아리, 바구니, 갈대로 만든 돗자리도 일상적 사용을 위해 생산되었다. 조각가나 화가로 알려진 부락민의 경우, 와트(사찰)에서 새로운 건물을 짓거나 축제 등이 있을 때 논일을 중단하고 조각이나 그림에 매달렸다. 따라서 물품을 생산하는 일은 주업인 논농사를 보충하는 몇몇 활동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자기 가족의 소모용이나 부락 공동체 수준의 수요를 넘어설만큼의 잉여 생산을 할 정도로 특화된 가정은 거의 없는 편이었다. (사진은 1960년의 비단직조 모습이다.)
물론 일부 예외적인 경우들이 존재했다. 이미 푸난 시대(1-6세기)에 벌써 따께우(Takeo) 지방의 비단 직조 기술자들이 솜씨도 훌륭하고, 그 천(ikat, 이카트)의 올이 고왔다는 기록이 나타나 있다. 또한 금은세공업의 경우 일찍이 상업적 기능을 인정받아, 비록 한정된 수긴 하지만 밧덤벙(바탐방 Battambang)이나 프놈펜(Phnom Penh) 같은 도시지역에서 전업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는 기록도 그 무렵에 나타나고 있다. |
왕궁에서는 1907년과 1912년의 국왕령을 통해, 식민지 시대 이전의 궁정 생산체제를 점차로 형식화시키는 과정을 겪었고, 1918년 "캄보디아 예술학교"(École des arts Cambodgiens: 현 "왕립 예술대학"[RUFA]의 전신)가 설립되면서 프랑스 식민당국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기존의 왕궁 수공업에 대한 프랑스 보호령 당국의 비판 중 하나는, 궁정 장인들이 잉여생산을 하지 않고 지나치게 국왕의 명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캄보디아 예술학교"는 규모의 시스템에 기반한 고도의 훈련과정을 만들어냈고, 상업적 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한 고도의 장인적 기술획득을 이끌어냈다. (☞ 캄보디아 실크) |
1930년대부터 보다 큰 사회적 변화에 따라 일부 공예는 쇠퇴하였다. 예를 들면, 시멘트와 주형틀이 발전하면서 와트들은 더 이상 조각공들을 필요로하지 않게 되었고, 지역 공동체 내의 수요도 크게 감소했다. 하지만 1955-1970년 사이의 "성꿈 리어스 니욤"(Sangkum Reastr Niyum: 대중사회주의공동체) 시대에는, 비단직조나 바구니 공예, 가면공예와 금은세공을 전통적이고도 크메르적인 것으로 인정해 널리 장려하고 소비도 촉진시켰다.
(☜ 사진은 1957년 개최된 공예박람회 포스터) |
("아티상 드 앙코르"의 내부 모습 ☞)
1990년대 초반 평화정착이 시작되면서, NGO 및 국제기구들의 지원 중 하나가 공예와 장인들의 훈련에 맞춰졌다. 그 목표는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 주로 관광객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것이었고, 지역 주민들이 상품 생산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었다. "아티상 드 앙코르"(Artisans d'Angkor)는 시엠립 시에 있는 "직업전문 샹띠에 에꼴"(Chantiers-Écoles de Formation Professionelle: CEFP)에서 파생된 기업으로, 570명의 장인들을 거느리고 예술품과 럭셔리한 기념품들을 생산해 연간 미화 300만불어치의 상품을 생산, 판매해, 그러한 노력들의 가장 성공적인 결실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한편 성장하는 관광시장도 공장에서 생산된 의류와 물품들로 인해 소멸 위기에 있던 전통 공예의 부활을 돕고 있다. |
1. 비단직조
캄보디아의 비단직조(silk weaving)는 그 역사가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앙코르 사원의 조각들을 보면, 직물로써 토지나 노예를 거래했고 신상들을 천으로 장식했음을 알 수 있다. 고대의 조각에 사용된 의상의 묘사는 이들 작품이 직조과정을 거친 비단에서 영감과 모티프를 차용했음을 추측케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고대의 전통은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그다지 문서화된 기록으로는 남아있지 않았는데, 20세기에 들어와서 1920년대의 쟝 스토켈(Jean Stoeckel), 1950년대의 쟝 델베르(Jean Delvert)와 이블린 포레-마스페로(Eveline Poree-Maspero), 1960년대의 베르나르 듀팡(Bernard Dupaigne) 등의 프랑스 학자들이 직조기술 및 디자인 상의 모티프들을 상세한 기록으로 남겨 오늘날에도 널리 보급되게 되었다.
(방적사 염색 모습)
오늘날 캄보디아에서 비단직조는 따께우 도, 밧덤벙 도, 번띠 미언쩌이 도, 시엠립 도, 껌뽀웃 도에서 주로 이뤄지고 있다. 이 중 껌뽀웃은 도내에 약 1만명의 직조공들을 갖고 있어, 가장 중심된 지역 중 하나이다. 이들 직조공 대부분은 자신의 집안에서 가내수공업 형태로 생산하고 있다. 한편 밧덤벙 도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누에고치 생산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이러한 토착적인 양잠업은 후에 맥이 끊겼고, 오늘날 캄보디아에서 생산되는 비단의 방적사와 염료는 모두 베트남에서 수입된 것이다. 지난 10년간 외부 지원자들은 양잠업을 복원하고 전통적인 염료를 사용할 수 있도록 그 지원방향을 성정해왔다. 현재는 전동식 베틀과 금속제 물레 등의 신기술들이 보급된 상태이다.
캄보디아 비단(실크)는 대부분 캄보디아 전통 복장인 섬뽓(sampot)을 만드는 내수용으로 사용된다. 전통적인 "섬뽓 홀"(sampot hol: 여성 전통의상 중 하의인 치마 부분)에는 약 200가지 형태가 있는데, 적어도 3-5종의 색상이 섞여서 사용된다. 주로 노랑, 빨강, 검정, 진고동색, 파랑, 초록 등이다. 전통적인 염료는 식물이나 곤충을 재료로 제작된다. 빨간색은 랙깍지진디(lac insect)에서 추출하며, 노란색과 초록색은 쁘로훗(prohut) 나무의 껍질에서, 파란색은 인디고(indigo)에서, 검정색은 마꿀루아(maklua: 에보니) 나무의 껍질에서 추출해 만든다. 오늘날에는 설치용으로도 비단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직조된 비단은 전통적인 "삐단"(pidan)으로도 사용된다. 이는 크메르식 장식용 천으로 사찰의 행사나 결혼식 등에서 장식용으로 식장을 장식하는 데 사용한다. 여기에는 공통적으로 압사라(apsara)를 모티프로 하는 그림이 들어가며, 붓다의 생애나 사찰의 모습, 나가(nagas)와 코끼리들의 모습, 앙코르와트(Angkor Wat)나 다양한 동식물들이 그려져 있다. "캄보디아 내전" 기간에는 오래된 삐단들이 해외로 많이 반출되었다.
시엠립 시에 있는 "크메르전통직물연구소"(Institute for Khmer Traditional Textiles: IKTT)는 보존을 위해 공동품 직물 샘플을 수집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약 200여점이 수집된 상태이다. 확인된 크메르 실크 샘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워싱턴에 있는 "미국자연사박물관"(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에서 소장한 것과 런던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 IKTT의 작업 모습)
직조의 방법에는 두 가지 형식이 있다. 이카트 기술(ikat technique: 그림이 그려짐)을 적용한 것은 일정한 퍄턴을 지니고 있다. 반면 능직직조직물(twill woven fabric: 사선형 무늬)은 단색 혹은 2가지 색이 희미하게 겹쳐지는 방식으로 짜여져 있다.
이카트 기술을 크메르어로는 "쫑 끼잇"(chong kiet)이라고 하는데, 직조하기 전부터 위사(weft yarn: 직조 시 가로로 들어가는 실)에 염색이 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대단히 복잡하게 완결되어 있다. 직공은 디자인을 종이에 그릴 순 없지만, 기억을 통해 위사에 직접 염색을 한다. 디자인의 모티프는 전통적으로 매우 다양한데, 그 중 일부는 지역마다 고유한 특징을 가지기도 한다. 격자무늬와 별문양, 그리고 반점무늬가 일반적이다.
능직직조는 52가지의 색상을 갖고 있다. 오늘날 캄보디아에서 가장 화려한 문양 중 하나인 "빠뭉 쪼라밥"(Pamung chorabap)은 22줄의 봉침(바늘)을 사용한다. 분균형한 능직기술은 캄보디아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세 땀이 하나의 직물조직을 구성하여 한쪽편의 직물조직에서는 한 땀의 색상이 우세하게 나타나고, 반면 반대편에서는 다른 두 땀의 색상이 주조를 이루는 형식이 된다.
캄보디아 "황 실크"(yellow silk)는 토종 누에가 곱슬거리는 방적사를 산출함으로써 가능한 것으로, 독특한 반사형 색상과 질감, 그리고 강도를 부여해준다. 이 방적사는 현재 널리 사용되고 있긴 하지만, 1970년경에는 캄보디아 바깥의 값싼 방적사로 대체된 적도 있다. 최근 양잠업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주효하여, 이 방적사로 자여진 실크를 프놈펜과 따께우의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다.
(사진☞) 캄보디아에서 가장 많은 생활공예품을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리우 사 엠(Liv Saa Em)과 그가 소장한 고 비단 견본.
2003년에는 "실크포럼"(Silk Forum)이 창립되었다. 이 포럼에는 주로 프놈펜에 근거를 둔 해외 실크 무역상들과 생산자들이 참여했는데, 캄보디아 실크의 잠재적인 해외시장 개척에 대단히 높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로터스 폰드"(Lotus Pond: "연꽃연못", "연당"[蓮塘]의 의미)와 "타비타 캄보디아"(Tabitha Cambodia)와 같은 NGO들은 시골지역의 직조공들이 현대적인 디자인과 고급취향의 시장지향적 상품을 만들도록 지원해왔다. 아직가지 캄보디아 실크는 태국이나 베트남의 실크에 비해 덜 알려진 편인데, 이는 달러화된 캄보디아 경제로 인해 생산비와 운송비가 상대적으로 비싼 데서도 부분적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비단의 부활은 캄보디아 공예계의 성공적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 지원 기구들의 강도높은 훈련에 대한 노력과 내수시장의 증대에 힘입어, 지난 10년간 생산량은 2배로 증가했고 많은 시골 여성들을 자택 내 가내수공업 형태로 고용할 수 있게 되었다.
캄보디아 실크는 여전히 완전한 수공예로 생산되며, 전통적인 자연색상도 복원하였다. 따라서 촌락의 재구성을 통해 수목과 식물, 그리고 곤충들을 전통염료의 원료로 공급하기 위한 노력이 배가되고 있다. 비록 아직가지는 내수시장이 가장 중요하지만, 캄보디아 실크는 국제 경쟁력 면에서도 대단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
2. 금은세공
캄보디아의 금은세공은 뽄히어 얏(Ponhea Yat) 국왕의 치세에 정착되어, 그 역사가 최소한 500년 이상이 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금은세공업은 왕실의 후원을 받았고, 15-19세기에 걸쳐 수도로 사용됐던 우덩(Oudong: "프놈 쁘레아 리엇뜨롭"[Phnom Preah Reachtrop]이라고도 불림) 근처의 껌뽕 루엉(Kompong Luong)에는 현재도 금은세공방들이 몰려있다.
금은세공 장인들은 병장기와 의전용구, 그리고 동전을 만들었다. 크메르어로 급료를 지칭하는 말에 "쁘락"(은)이란 단어도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캄보디아에서 은그릇들은 장례식이나 종교적 의식에 사용되었다. 크메르식 은제상자는 베텔(betel,蒟醬) 잎사귀와 열매를 보관하는 데 사용됐다.
19세기와 20세기의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는 "캄보디아 예술학교"의 아뜨리에가 활발한 활동을 하여, 자신들의 작품을 해외에서 전시하고 권위도 인정받았다. 1930년대 말경에는 600명 이상의 금은세공 장인들이 멀리는 이집트나 남아메리카에서 날아오는 주문에 맞추기 위해 일했다. 오늘날 인기있는 품목으로는 은제상자, 장신구, 소형 동물상, 기타 기념품들이 있다. 전통적인 디자인에는 과일이나 화염모양, 혹은 앙코르 사원군에서 차용한 모티프들이 사용됐다.
대부분의 세공장인들은 남성이지만, 아주 세밀한 작업이 요구되는 선형 부분 등은 부분은 여성들이 작업하기도 했다. 은세공품의 대부분은 90% 순도의 은을 사용하고 그 장인들의 숙련도와 기술도 높은 편이다. 현재도 은괘를 펼치거나 선형으로 만드는 모든 가공과정이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또한 캄보디아 왕가는 대부분의 고대 세공품들을 현재도 소장하고 있다. |
3. 도 예
캄보디아에서 발견된 크메르 도자기의 연원은 기원전 5,000년 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의 가마터들은 앙코르 구역에 가까운 "꿀렌 산"(Phnom Kulen)을 비롯하여, 현재는 태국의 영토가 된 시사껫(Sisakhet, 시사켓), 수린(Surin), 부리람(Buriram)에서 발견되었다. 최근에는 "킬링필드"(killing fields)로 더 유명한 쪼응 엑(Choeung Ek)에서, 20개 이상의 독립된 가마터들이 발견되었다.
크메르 도기들은 식수나 쌀을 보관하거나 음식을 담아두는 것과 같이 주로 일상적인 용도로 많이 사용된다. 10세기 이래로는 중국 등 외국에서도 도자기들이 수입되었다. 크메르 도기들이 외국으로 수출되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으며, 크메르인들이 청동으로 된 용기들이나 외국에서 수입한 도자기들을 사용할 수 있을만큼의 여력을 갖고 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11-13세기 사이에는 조류, 코끼리, 토끼 등등의 동물형 문양을 지닌 용기들이 출현했고, 이러한 문양들은 오늘날에도 목제상자나 은제상자를 제작할 때 사용된다.
크메르 도기는 2가지 기술을 사용했다. 하나는 녹로(pottery wheel, 물레) 위에 점토로 빚은 도기를 올려놓은 후 작업하는 방식과, 다른 하나는 모루 위에서 주걱으로 붙여나가면서 작업하는 방식이었다. 고대의 가마는 섭씨 1,000-1,200도가지 가열해 거의 석재에 가가운 강도를 가진 도기들을 만들 수 있었다. 또한 자연상태에서 말리거나 섭씨 700도 정도의 약한 열로 가열하기도 했다. 유약은 주로 녹색과 갈색을 사용했다.
지금도 시골지역에서는 전통적인 방식이 사용되고 있다. 많은 도기들이 여전히 손으로 만들어지고 유약을 바르지 않은 채 가열하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도기들은 조리용으로 사용되는데, 그 외의 용기들은 방수가 안 되거나 불을 가하면 깨지기 쉽다.
오늘날에도 전통적인 도기들(옹기들)을 소달구지에 실어 짚으로 쿠션삼아 보호하면서, 비포장 도로를 돌아다니며 판매하고 있다. 이러한 행상들은 한번 길을 떠나면 여러 주일 동안 떠돌아다닌다. 프놈펜에서 3시간 정도 달려가면 껌뽕 츠낭(Kompong Chhnang) 도가 나오는데, "츠낭"이 바로 "도기"라는 의미로 이 지방이 크메르 도기의 중심지이다.
"캄보디아 공예협력"(Cambodian Craft Co-operation: CCC) 및 여타 NGO들의 노력에 힘입어, 현재는 녹로(물레)와 가스 가마, 보다 정교해진 유약이 사용되고 있으며, 여러 새로운 디자인들이 예술품 및 관광기념품들에 도입되었다. 하지만 지방의 시장에서는 베트남과 태국에서 수입한 가정용 주방용기들이 판매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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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터넷 사정이 안좋아 사진은 내일 첨부할 예정입니다......
좋은자료 감사힙니다,. 캄보디아실크는 현재씨엠립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한 아티산공예학교가 운영중이며,, 이곳에서 약간의 제품울 생산 판매하고 있다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크메르루즈시대에 캄보디아를 일찌기 탈출한 소년이,,이후 유엔에 근무하게 되어서,, 로마에 있는 국제식량기구에 오랫동안 근무하다가,,정년이 되어서 캄보디아의 외무부로 귀국을 하게됩니다, 유엔에서는 그분의입장을 생각하여서 캄보디아의 양잠을 부활코져,, 약간의 기금을 마련하여서,,캄보디아의 양잠의 부활가능성을 조사하려 하고 있다합니다,
이프로젝트가 성공이 되면,, 유엔에서는 캄보디아르 5개지역으로 구분하여서,, 종묘장건설,, 뽕나무단지조성,실크실생산시험공장건설,,,등등,, 캄보디아여러곳이 골고루 혜택이 돌아갈수있도록 지원을 한다 하는데,, 문제는 이러한 좋은 일을 하려하는데도 공무원들이 금전을 요구한다는 그런 일이 있다 합니다, 또한 누에고치는 고온을 실어하여서,, 기후가 약간을 서늘한 곳을 좋아한다 합니다 씨엠립에서는 지금 노란 누에고치가 생산이 되고있지요,,
또한 프놈펜근교의 따께오지방에는 중국인들이 실을 공급하여,,캄보디아현지인들이 집에서 직조를 하고,, 다시 중국인들이 그 현물을 구입하여 중국으로 가져가고,,일부는 프놈펜의 오람삑시장들에서 썸뽓을 만드는 내수용으로 판매되고 있습니다,
현재 캄보디아의 실크산업은 라오스에 비하여 많이 뒤쳐져있는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곳저곳을 다녀보니까요,, 캄보디아 실크산업의 많은 발전을 기원합니다,
아, 꼬르님 역시 베테랑다우시게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아티상 드 앙코르"가 흔히 말하는 "아티산 공예학교"인가요? 이 기사의 내용을 보면 공예학교의 이름은 "샹띠에 에꼴"이고 이 학교 수료생을 중심으로 생산활동을 하는 기업이 "아띠상 드 앙코르"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NGO 성격에 가까운 기업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 혹시 이 2개의 조직을 뭉뜽그려 "아띠산 공예학교"라고 알려진 것은 아닌지요? 그리고 제가 역시 시엠립에 안 가봐서 그렇습니다만, "비단농장"이란 곳도 혹시 이 조직들과 연관이 있는지요?
많은 공부하고 갑니다. 본글은 물론이고,꼬르님의 댓글 또한 큰 공부가 되었습니다. 여담)캄보디아 결혼식에 입었던 옷이 비단인데 너무도 화려하고 예뻐 아들 돌잔치에 입을 여고 장모님에게 부탁했는데, 비단이 아닌 일반 천으로 만들어진 옷이 택배로 왔는데, 바느질이 형편없어 곤란했지만 그래도 장모님의 정성을 생각하여 아들 돌잔치에 입고 행사를 했습니다.
아마도 결혼식에 입는 섬뽓은 상당히 비싸지 않을까요.. 아마 대여일듯 합니다, 웨딩드레스처럼 말이죠.. 그리고 다른 한국어권 정보들을 보니, 마치 캄보디아의 실크산업을 근래에 새로 시작한 것처럼 썼고, "일본이 이것을 관리해서 한국인으로서 안타깝다" 모 이런 글을 저근 경우도 보이더군요.. 나름 그 분도 한국의 농업 분야를 좀 아시는 분ㅇ인듯 느낌도 들었는데 말이죠... 제가 일본의 교토에 좀 머무른 적이 있습니다만, 일본 기모노도 대단히 아름답습니다. 그 그림의 정교함이 엄청나고, 가격도 한국돈을 1천만원 정도까지도 합니다만, 여기 "크메르전통직물연구소"도 역시 일본인 전문가가 관리하는 것 같습니다.
하여간 들여다 볼수록 일본과 호주는 아주 깊이있게 캄보디아에 커미트먼트되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제가 이들 그룹을 캄보디아 외교관계에서 일단 한국보다는 확실히 한 등급 위의 관계를 가진 국가들로 보는 이유입니다.
지금은 이임한 신현석 주캄 대사께서, "프놈펜 외교가에서는 중국, 미국, 일본, 프랑스, 한국 대사가 대접을 받고 있다"(주간 캄푸치아 2009-2-26) 이런 발언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만, 하여간 우리는 더 냉정한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을듯 합니다. 미국-중국은 뭐 말할 것 없고, 태국이나 베트남 같은 주변국들 빼고나면, 적어도 호주는 확실히 거의 일본 및 프랑스와 제2그룹을 다투는 국가가 확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