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 장례의 역사
1).구석기 시대
-장례의식은 중기 구석기 시대가 되면 전 세계에서 보편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 예로 프랑스의 무스티에 유적과 이라크의 샤니다르 유적을 들 수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청원 두루봉 동굴에서 발견된 4만 년 전의 흥수아이를 들 수 있다.
-흥수아이의 장법을 보면 맨 아래 넓고 편평한 석회함 낙반석을 깔고 그 위에 고운 흙을 뿌린 다음, 주검을 똑바로 펴 묻고 국화꽃을 뿌렸다. 그리고 다시 그 위에 고운 흙을 뿌려 살짝 덮은 다음, 넓적한 돌 판들을 이용하여 덮었다.
흥수아이에서 사용된 장법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여주는데 적어도 이 시대부터는 죽음과 주검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으며, 상당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 위를 보도록 반듯하게 펴 묻은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방법과 거의 같으며 바닥에 판 톨을 깔고 주검을 안치한 후에 다시 판석으로 덮어놓은 것은 마치 훗날의 돌널(석관)을 연상케 한다.
2).신석기시대-(장법의 다양화)
-기원전 1만여 년 전에 이르면, 수렵채집의 자연 경제에서 벗어나 원시적인 농사나 가축기르기 등 같은 신석기 시대 경제단계로 접어든다. 또 움집의 규조나 규모로 보아 4명 내외의 사람들이 한 가족을 이루었으며, 움집들이 모여 있는 형상으로 미루어 씨족사회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자연신앙(애니미즘)에 따라 산과 바위, 나무 등 모든 자연물에 영혼이 있고 그것은 불멸한다고 믿기 시작하였다. 사람도 영혼을 지니고 비록 죽더라도 영혼만은 멸하지 않고 살아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매장하는데 좀 더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즉 주검의 머리를 일정한 방향으로 놓고 얼굴은 위로 향하게 하고 몸은 꼿꼿이 펴서 뉘었다. 그리고 시체 주위에 빙 둘러 돌을 놓아 보호하려고 하였으며, 토기등을 부장하여 사후생활에도 불편이 없도록 배려하였다.
-우리나라에 신석기 시대의 분묘 유적은 부산 범방 패총과 통영 연대도, 욕지도, 울진 후포리, 춘천 교동 그리고 함경북도 웅기 등이 있다. 또한 신석기 시대 사람 뼈도 함경북도 회령과 황해도 해주 등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보고되고 있다. 이들은 일정한 크기의 흙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하고서 부장품을 함께 묻는 일종의 널무덤인데, 일부에서는 그 위에 돌로 덮어 돌무지를 만든 것도 발견되었다.
-장법은 일반적으로 신전장(伸展葬)이 많으며, 일부는 굴신장(屈身葬)도 있었고, 세골장(洗骨葬)도 있었다. 또한 가족묘지와 부부를 함께 묻는 합장(合葬), 한 무덤에 씨족이 차례로 묻히는 집장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장법 말고도 화장, 풍장, 수장, 그리고 토장 등이 있는데 주검의 다양한 처리 형태 가운데 가장 빨리 위생적으로 소멸 시키는 것이다. 특히 화장은 열대 지방에서 먼저 성행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무더운 인도 같은 나라에서는 신석기 시대에 이미 널리 사용되었을 것이다.
3).청동기 시대
이 시기의 무덤의 가장 큰 특징은 돌을 널리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은 다른 어느 나라와도 비교 되지 않을 만큼 많이 있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거의 전 기간에 거쳐 한반도의 모든 지역에서 이루어진 묘제(墓制)이다. 그 외에 청동기 시대의 매장방법에는 돌널무덤과 돌덧널무덤, 돌무지무덤, 화장무덤이 있으며, 늦은 시기가 되면 독무덤과 널무덤도 나타난다.
4).원삼국시대
원삼국시대는 대체로 서력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부터 서기 300년경가지의 약 3세기 동안을 이른다. 이 시대의 장례문화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는데 고인돌이 사라지고 돌덧널무덤이 발달한다. 고구려지역에서는 큰 돌무지무덤이 나타난다. 또 낙동강 유역에서는 판석이나 괴석을 이용하여 돌널무덤이 많이 보이며 전라남도 지방에서는 독무덤이 유행한다.
나무덧널무덤의 외형은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든 봉토분이다. 구조는 땅 속 깊숙이 판 구덩이 바닥에 나무로 된 각재를 이중으로 쌓고, 다시 각재를 방형(方形), 즉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쌓아올려 네 벽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내부 한쪽에 기둥을 세우고 판자로 칸막이를 하여 장방형 내곽을 만들었으며, 다시 두 겹 각재로 천장을 덮었다. 목관은 칸막이를 한 내곽 안에 놓이며 부장품은 내곽 바깥에 들어가게된다.
5).낙랑
한나라의 무덤문화를 들여온 낙랑 등의 고분들은 평안남도 대동군,안악군,중화군 등과 황해도 재령군,봉산군,신천군,안악군 등에 분포하고 있다. 이 지역의 고분들은 크게 나무덧널무덧(木槨墓)과 벽돌무덤의 두형식으로 나누어진다.
6).부여
부여의 장례풍습은 중국의 옛 역사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장례기간이 5개월에 이르러서 여름에 얼음을 써서 시신의 부패를 막았다고 한다. 장례를 치를 때 여자들은 흰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다. 상을 치르는 기간을 되도록 오래하는 것을 좋은 것이라고 여기고 상주는 시간을 더 끌려고 하고 다른사람은 이를 말리려고 서로 옥신각신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었는데 당시 상황에서 지배층의 큰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긴 장례 기간 동안 시신은 임시로 빈(殯)이나 가묘에 안치되었을 것이다.
7).옥저와 예맥
동옥저는 죽은 사람을 가매장했다가 뼈만 추려서 길이가 10장에 이르는 곽에 안치시키는 세골장 풍습이있었다. 이 나무덧널은 가족 공동이 었으며 여기게 각자의 생전 모습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나무덧널안에 와력(瓦礫)에 쌀을 담아 매달아 두었다고 한다. 이는 죽은 자의 새로운 삶을 위한 약식을 마련한다는 뜻이 있다.
예맥에서는사람이 죽어면 그 집을 헐어버리고 새로 집을 짓고 살았다.
8).고구려
-후장풍습(厚葬風習)이 있었다. 결혼하면서 장례에 쓸 옷을 준비하였고 장례는 매우 후하게 지냈는데 무덤은 돌을 이용하여 쌓았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3년간 집안에 관을 놓아 두었다가 길일(吉日)을 택하여 묻었다. 그리고 무덤 앞에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고구려인들은 죽은 조상이 자신들을 돌봐줄 것이라고 믿었고 죽어서도 현실세계가 계속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후장풍습으로 이어졌고 후대에는 고분벽화를 만들게 한 요인이 되었다
.
-장례 풍습은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식으로 바뀌기도 했다.
6세기 즈음 상복(喪服)을 입는 제도가 중국과 같았다는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는 고유한 장례 풍습이 계속 이어졌다. 집 안에 시신을 두었다가 3년이 지난 다음 장례를 치른다던가, 장롓날에 북치고 춤추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죽은 이를 저승에 보낸다든가, 장례를 치른 다음 죽은 이의 옷이나 노리개, 수레 같은 것을 무덤 곁에 놓아 두면 사람들이 다투어 가졌갔다는 것 등등은 고구려의 독특한 장례 풍습이다.
-영남지역만의 무수한 집단순장무덤들은 고구려.백제보다 후대(AD3-4세기)에 한반도남부지역에 출현한 신라. 가야세력의 실체가 흉노로 대변되는 북방 유목민들임을 알수 있는 거부할 수 없는 고고학적 근거입니다. 요하지역은 중국문명의 발원지가 되는요하문명지역이기도 합니다. 요하지역에는 이집트보다 1000년이 빠른피라미드의 무덤군들이 순장풍습과 함께 존재하고 있다.
9).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매지권이나 묘지를 통해 보면 무령왕이 523년에 죽은 다음 무덤에 묻힌 대가 2년 후인 525년으로 되어 있어 삼년상을 치렀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고분 형식은 도읍지의 위치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성시기에는 널무덤과 돌무지무덤, 웅진성시기에는 벽돌무덤과 냇돌로 무덤방을 만든 무덤, 사비성시기에는 석실묘와 화장무덤이 유행되었다.
①공주 무녕왕릉
-1970년 6월 29일 공주의 송산리에 분포한 일단의 고분들에 대한 배수로 작업을 하던 중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무녕왕릉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의 고고, 역사학사상 전례가 없는 대발견이
었습니다. 왕릉의 입구를 메우고 있는 밀폐석을 치우고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놓여있던 묘지석에
서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이라는 글귀를 읽는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사마왕이란 바로 무녕왕의 릉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일본의 일본서기 혹
은 중국의 고대 문헌에 글자 몇 자 씩으로만 모습을 보일 뿐인 무녕왕. 기록 속에서만 희미하게 존
재하던 무녕왕이 뚜렷한 모습의 실체가 드디어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니라, 모자를 쓰고 신발을 신고, 칼을 차고, 쓰던 물건을 고스란
히 가지고서
1,500여 년 전의 모습 그대
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완전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이 무녕
왕의 발견은 세기적인 발견이었다. 우리는 이 때 발굴된 무
녕왕릉을 통하여 서기 500년 경의 백제의 모습을 보고자 한
다.
②무령왕릉의 개요 및 의의
-개로왕 8년(462)에 태어난 백제 25대 무령왕은 40세 되
던 해인 501년 왕위에 올라 재위 23년 만인 523년 세상을 떠
났다.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고, 밖으로는 활발한 외교정책
을 통하여 고구려의 침입에 대한 방어망을 견고히 함으로써
백제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무령왕릉은 1971년 공주
송산리 6호분의 습기제거를 위한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발
견되었는데, 이 왕릉은 전축분으로 당시 중국과 백제와의 문
물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최고의 문화재들은 501년부터 526년이라는
절대년대를 가지고 있어, 백제는 물론 고구려, 신라, 가야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의 유물연구에도 결정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무령왕릉에서는 무덤의 주인공과 장례의식을 알려주는
지석을 비롯하여 왕의 신분을 알 수 있는 금은제의 화
려한 장신구들이 많이 출토되어 국내외의 다른 지역 유
물과의 비교연구에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③무령왕릉의 규모.형상
-현실의 길이는 4.2m, 너비는 2.7m, 높이는 2.9m이며, 벽체
의 경우 4매는 길이모쌓기, 1매는 작은모쌓기를 반복하였
다. 벽면은 북벽에 1개, 동서벽에 각 2개씩의 감(龕)을 만들
고 이곳에 백자 등잔을 밝혀 놓았다.
-무령왕의 지석(국보 제163호) 왕릉 안으로 들어가는 널
길 오른쪽에 있던 왕의 지석 표면에는무령왕이 62세 되던
523년 5월 7일 붕어(崩御)하여 525년 8월 12일에 대묘
[大墓·王陵]에 모시고 지상과 같이 기록하여 둔다 는 내
용이 새겨져 있고 그 뒷면에는 방위표(方位表) 또는 능(陵)
의 위치를 표시하는 묘역도(墓域圖)를 나타내 10간(干) 12지
(支)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터널형 천장의 벽돌무덤으로서 백제
시대의 벽돌무덤으로는 이 두 개만이 남아 있다. 6호분은 벽
네 면의 일부에 사신도를 그려넣은 벽화고분으로서 긴 배수
구가 널길을 향해 밖으로 뻗고 있으며, 벽돌의 무늬와 축조
방법상 무령왕릉보다 조금 앞선 6세기 초의 무덤으로 보인
다.
-6호분의 배수로가 5호분의 玄室 아랫부분을 지나고, 무
령왕릉의 배수로 상면에 5호분의 봉토 일부가 걸리는 점으
로 보아 무령왕릉 역시 5호분보다 일찍 축조된 것으로 생각
된다.
10).신라와 가야
-신라 고분의 특징은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과 굴식돌방무덤이라 할 수 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지상이나 지하에 상자 모양의 덧널을 놓은 다음 그 위에 냇돌을 둥글게 쌓고 다시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든 것이다. 대표적인 무덤으로 천마총과 황남대총, 서봉총, 금관총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런 무덤은 극소수 지배층의 전유물이었다. 사회의 다수를 점한 수많은 일반 백성들은 빈소를 오랫도안 차려하는 삼년상하기도 어려웠고 변변한 무덤도 만들기 힘들었다. 대개 땅에 구덩이를 파 그냥 묻거나 했기 때문에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민중의 무덤은 매우 드물다.
11).발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