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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3섬·쇠고기 100근·닭 45마리·달걀 후한 대접 했건만… | |
주변부 역사훑기 ‘개화기 지방사람들’서 사건 전말 담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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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군민, 제너럴셔먼호 불태울 만했다 140년 전인 1866년 9월2일 미국인 소유 선박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서 평양군민들의 공격을 받고 불탔다. 20~24명의 선원은 모두 참살당했다. 가까스로 가라앉는 배에서 탈출했던 영국인 목사 토머스와 중국인 자오링펑은 생포된 뒤 강 언덕에서 분노에 찬 군민들에 둘러싸여 뭇매를 맞고 죽었다. 5년 뒤인 1871년 미군의 강화도 침략(신미양요)에 빌미가 된 제너럴셔먼호 비극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당시 조선은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을 후하게 대접해 돌려보내는 유원지의(柔遠之義)라는 전통적 관행에 충실했고, 셔먼호 사건 불과 두달여 전인 1866년 5월에도 미국 선박 서프라이즈호가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가 관할하는 평안도 철산부 연안에서 난파했으나 선원들은 극진한 대접을 받고 안전하게 귀국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개화기 지방사람들〉 제2권 ‘양반·평민’편 가운데 ‘우리 역사 속의 사람들(5)’ 첫번째 글 제목이 바로 ‘관찰사 박규수, 평양 사람들과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 배경은?’(이헌주)이다. 셔먼호가 중국 정크선 4척의 수로 안내를 받으며 평안도 용강현 앞바다에 나타난 것은 그해 8월15일이었다. 16일 정크선들이 떠났고 그날 황주목사가 셔먼호를 찾아가 방문 목적 등을 탐문했다. 17일에는 용강현 관리가 구경꾼으로 위장하고 셔먼호를 찾았다. 황주목사는 국법상 외국 선박의 영해 항행은 금지돼 있다고 경고하면서도 쌀과 고기 등을 지원했다. 21일에는 중군(장군급 군사책임자) 이현익과 평양 서윤 신태정이 통역자 토머스 목사의 요청에 따라 쌀 1섬과 쇠고기 50근, 닭 25마리, 달걀 50개, 땔감 20다발을 줬다. 박규수는 쌀 2섬과 쇠고기 50근, 돼지 1마리, 닭 20마리, 달걀 50개, 땔감 20다발을 추가로 제공했다. 셔먼호는 “머지않아 돌아간다”고 했으나 가지 않았고 24일에는 토머스 등 선원 7명이 상륙을 감행했다. 25일 흡탄까지 거슬러올라간 셔먼호를 보고 중군 이현익이 작은 배를 타고 접근하자 셔먼호 선원들이 그를 올라오게 한 뒤 신분증을 빼앗고 강제억류했다. 26일 조선 관리들과 셔먼호 쪽은 이현익 석방 협상을 벌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셔먼호 쪽은 이현익 석방 조건으로 쌀 1천석과 금·은·인삼을 다수 요구하는 횡포를 부렸다. 28일 계속 대동강을 거슬러올라가던 셔먼호는 대포와 조총을 쏘며 무력시위를 벌였다. 강변에 모여 있던 주민들이 작은 배로 수심을 측정하던 선원 5명을 향해 중군 석방을 요구하자 그들은 불응했고 흥분한 주민들이 돌을 던지고 군사들도 합세해 활과 총을 쏘았다. 29일 셔먼호가 방수성 앞쪽에서 좌초했다. 박규수는 셔먼호를 바로 공격하지 않고 평화적인 사태수습을 꾀했다. 31일 셔먼호 선원들이 지나가는 상선을 약탈하고 대포와 총을 마구 쏴 평양군민 7명이 죽고 5명이 다쳤다. 마침내 박규수는 ‘초멸’을 명했다. 9월2일 관군은 포수와 궁수를 대거 징발해 강 하류 곳곳에 배치했다. 정오 무렵 셔먼호 포격으로 조선 군졸 1명이 전사하자 분노한 군민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공격했고 셔먼호는 땔감을 실은 화선들의 공격으로 불타기 시작했다. 사흘에 걸친 전투 끝에 셔먼호 쪽은 전멸했다. 〈개화기 지방사람들〉 2권은 출판사 ‘어진이’가 2년 전에 출간한 〈개화기 서울사람들〉 2권과 〈대한제국기 서울사람들〉의 후속편이다. 〈대한제국기 지방사람들〉과 함께 나와 형태도 꼭같다. ‘서울사람들’과 ‘지방사람들’ 각기 3권씩 총 6권은 모두 ‘우리 역사 속의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일련번호가 매겨졌다. 등장인물들은 다시 ‘왕실·중인·천민’편과 ‘양반·평민’편으로 2분했다.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기까지 한반도라는 시공간에 살았던 다양한 역사주체들을 조망”하는 이 시리즈 후속편 3권은 “주변부인 지방으로부터의 접근을 시도”함으로써 “기존 역사읽기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라고 강조한다. ‘지방 향리들, 양반 못지않게 살다’(류창규), ‘평민 의병장 신돌석의 활약 어떻게 펼쳐졌나’(김희곤), ‘지방 양반자제들의 서원교육은 어떻게 이뤄졌나’(윤희면), ‘관서지방의 기독교세력이 성장한 배경은 무엇이었나’(홍경만) 등 흥미로운 주제들을 역사적 변천과정과 구체적 사건 및 인물들을 통해 풀어간다. 양반들의 가세 속에 일본군을 괴롭혔던 신출귀몰 신돌석 의병장은 막판에 만주로 활동무대를 옮기려 했으나 1908년 12월12일 새벽 6촌뻘 되는 외가 집안 쪽 형제들한테 30살 나이에 살해당했다. 경상도에선 특정 지역 출신들이 감영 향리직을 독점했는데, 17세기 초 감영 향리의 절반 이상이 안동 출신자였으며 18세기 중엽 이후엔 안동 출신 비율이 3분의 2를 넘었다. 전라도도 비슷했는데 특정 지역 특정 가계들, 예컨대 고부 은씨, 김제 조씨, 나주 나씨, 정읍 이씨, 운봉 박씨, 영광 조씨, 부안 김씨, 용담 고씨 등이 대표적인 향리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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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15423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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