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4일 이른 아침, 전국민을 충격에 휩싸이게 한 비보가 날아들었다. 정몽헌 현대아사회 회장의 자살이 그것. 그로부터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정 전회장 사후 그가 이끌던 현대그룹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현대그룹의 선장은 정 전회장의 부인인 현정은 회장(49)이 맡았다. 하지만 정 회장 사후 대북사업이 휘청거렸다. 금강고려화학(KCC)과의 경영권 분쟁도 일어났다. 일단 현 회장이 경영권 방어에 성공했지만 아직 종식된 상태는 아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로 작용했다. 최대 위기까지 내몰렸지만 이를 극복하고 그룹 계열사간 결속력을 높였다. 뿐만 아니다. '초보' 경영자였던 현 회장이 그룹을 조기에 장악했다. 핵심계열사인 현대상선이 호황을 누리는 등 안정적인 경영도 병행하고 있다. 정 회장 사후 1년의 성적표를 짚어본다.
'현정은 체제' 순항, 내분 위기 헤치고 재도약
6개 계열사 실적 상승 무드 타고 '재건' 박차 정 회장 유지 계승 대북사업, 정통성 확보가 변수
각종 변수 잠재, 끝나지 않은 경영권 분쟁은 시한폭탄 재계 19위 규모로 옛 현대그룹 명성 되찾기 '갸우뚱'
현대그룹은 지난 4년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재계 1∼2위를 다퉜던 현대그룹은 지난 2000년 일명 '왕자의 난'이 일어난 이후 재계서열(자산기준) 19위로 떨어졌다. 그룹이 자동차와 중공공업, 건설 등으로 분리된 것도 한 몫 거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7월4일, 정 회장의 갑작스런 자살로 혼란에 빠져들었다. 삼촌으로부터 경영권 위협을 받았는가 하면, 대북사업도 좌초 위기에 봉착했다. 그럼에도 그룹 계열사간 결속으로 거센 소용돌이를 벗어나 현 회장 체제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경영성적표 일단 '합격점'
재계에서 바라보는 현대그룹의 1년간 성적표는 일단 'OK'다. 현재 그룹은 현대상선,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증권, 현대택배, 현대아산, 경제연구원 등 6개사가 포진돼 있다. 여기서 근무하는 임직원은 8천여 명. 자산 기준으로는 재계 19위다.
처음 현 회장이 '현대그룹호'의 선장키를 잡았을 때 세간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경영 경험이 없는 가정주부'란 쓴 소리도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정상영 KCC 명예회장의 인수 시도에 노출되면서 고초를 겪었다. 그렇지만 이 같은 시련을 이겨내고 현대그룹 재건에 결실을 일궈내고 있다.
그 결실은 경영성과에서 엿볼 수 있다. 계열사들이 실적 호조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룹 지주회사 격인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우 1분기 사상 최대인 1천1백37억원의 최대 매출을 올렸다. 게다가 주차설비와 물류자동화, 지하철 승강장의 스크린 도어 등 신사업 진출을 시도 중에 있어 경영실적에 '청신호'를 보내고 있다.
현대상선 역시 1분기 역대 최대인 1천2백58억원의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지난해 전체 세전이익인 1백99억원 대비 8배 규모다. 올해 세전이익 기준으로 6천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대북사업을 맡고 있는 현대아산의 금강산 관광사업은 어느 때보다 성황을 누리고 있다. 육로관광 활성화로 적자폭이 빠른 속도로 줄고 있다. 7월의 금강산 관광은 월 기준으로 최대인 3만2천여 명을 기록하는 등 그룹 경영이 크게 호전되고 있다.
현대택배도 최근 각 기업의 공장에 협력회사 부품을 일괄 공급하는 공장 물류 사업에 진출했다. 개성공단에서 생산하는 중소기업 제품을 남쪽의 수출항구로 실어 나르는 물류 사업에도 참가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현 회장 체제 구축 성공?
때문에 재계에선 일단 '성공작'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현 회장 체제가 안착됐다는 게 재계의 중론이다. 재벌가 며느리에서 경영자로 변신하며 지난해 10월 말 취임한 그는 경영 경험이 없다는 주위의 우려와는 달리 큰 무리 없이 그룹을 이끌어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각에선 현대그룹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실제 현 회장은 지난 1년간 수렁에 빠진 현대그룹을 다시 살려냈다. 정 명예회장의 인수 시도에 노출되면서 법정 싸움과 상호 비난전, 경영진의 동요까지 나타났지만 경영권을 방어했다.
운도 많이 따랐다. 범현대가에서 중립을 유지해 줬다. 주주총회에서도 현 회장의 손을 잡아줬다. KCC가 '삼촌이 조카 그룹을 삼키려 한다'는 비난 여론과 금융당국의 지분처분 명령을 받은 것도 현 회장 체제에 힘을 실어줬다.
게다가 KCC에 비해 자금력이 부족했지만 국민주 공모 등 여론몰이를 통해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 와중에 그룹 계열사간 결속력을 높였고 가신그룹을 일부 퇴출시키는 등 경영권을 굳히는 성과도 거뒀다. 이런 정황들이 현 회장이 그룹 조기 장악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하지만 재계 일각에선 최근 계열사들의 실적이 호전되면서 현 회장 체제가 자리잡는 데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난관이 제거됐다고 보기엔 이른 감이 있다는 견해도 제기된다.
정 명예회장 쪽이 아직 22%의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지니고 있어 분쟁의 불씨는 남아 있다는 게 그 이유다. 6개 계열사에 재계 19위라는 규모란 것도 부담요소로 지적된다. 이 규모로 과거 현대그룹의 명성을 재현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돈 먹는 사업'에서 '돈 버는 사업'으로
정 전회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현대아산의 대북사업이 파행을 면하지 못할 것으로 전망됐으나 현재 이 사업은 낙관적인 관측을 낳고 있다. 오히려 1년이 지난 현재 과거보다 더욱 활기차게 진행 중에 있다.
사실 재계에선 정 전회장 사후 대북사업에 회의적인 견해가 강했다. 그의 유고 직전엔 '금강산 관광사업은 수천억원을 까먹고 퍼주는 사업'이란 지적도 받았다. 현대그룹은 이처럼 대북사업이 '돈 먹는 사업'이란 비난을 받는 등 최악의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돈 먹는 사업'에서 '돈 버는 사업'으로 바뀌고 있어서다. 실제 올 들어 육로관광 상품이 개발되면서 금강산의 사업 가치가 다시 부각되고 있다.
연일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상반기 8만5천여 명이 금강산을 찾았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의 6배다. 개성공단 조성사업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지난 6월 말 시범단지가 완공됐다. 때문에 일각에선 대북사업이 지난해 말 3천4백38억원의 누적적자를 내고 있지만 조만간 흑자를 낼 것이란 낙관적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물론 현대그룹이 대북사업에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년 3월까지 북한에 수억 달러의 사업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문제가 신경 쓰이는 부분이다. 이 때까지 현대그룹이 금강산 관광 대가로 북한에 지불하기로 한 금액은 9억4천2백만 달러.
하지만 현대그룹은 이에 대해 그다지 비관적으로 보지 않고 있다. 금강산 관광 대가는 형편과 능력에 따른 지불을 북쪽과 약속했다는 게 그 이유다. 그럼에도 국민적 염원에 바탕한 이 사업을 정통성과 경영실적으로 일궈내야 하는 부담을 갖고 있다. 이 부분이 향후 대북사업의 향방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대북사업의 다른 변수는 현대건설을 다시 품안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현대건설 되찾기는 현대그룹의 정통성을 찾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룹 정통성 계승이란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또 다른 의미도 있다. 대북사업과의 연계와 경영권 안정화란 실리적인 측면이 그것이다.
현재 재계에선 현대그룹의 모태인 현대건설을 인수할 것이란 소문이 돌고 있지만 현대그룹은 "인수할 의향도 자금도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그럼에도 재계 일각에선 쉽게 수긍하지 않는 분위기다.
당장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는 현대의 정통성을 찾기 위해서라도 현대건설 인수를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그룹도 이에 대해 "그룹 임원의 상당수가 건설 출신인데다 건설은 현대그룹에 있어서 고향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희망사항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입장을 표현, 여운을 남기고 있다.
제2 도약 준비 완료, 재건 위한 날갯짓
현재 현대그룹은 '정몽헌 회장 1주기'를 계기로 현대그룹 재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정 전회장이 생전에 이루진 못한 목표 중 하나인 '현대그룹 재건'을 이루기 위해서다.
당초 정 전회장은 지난 2002년 말 현대상선 대표이사를 맡으면서 그룹 재건에 나설 계획이었지만 대북 송금사건이 불거지면서 뜻을 접은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에선 이 같은 이유로 현 회장이 진행하고 있는 그룹 재건 노력은 이와 연장선상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실제 현 회장은 바쁜 행보를 보이고 있다. 1주기인 지난 4일 새벽 경기도 하남 창우리 정 회장 선영을 찾았다. 또 곧바로 금강산을 방문, 사장단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신입사원 수련회를 진행했다.
뿐만 아니다. 오는 18일에는 그룹의 중장기 비전을 공개할 예정이다. 공개되는 비전의 핵심은 당분간은 내실 다지기에 주력하지만 가까운 미래에는 미니그룹으로 전락한 그룹의 위상을 회복해 한때 재계를 주름잡았던 옛 명성을 되찾는다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재계 일각에선 이 작업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제기되고 있다. 계획대로 이뤄질지는 미지수란 얘기다. 주력사인 현대상선의 경우 실적은 좋지만 세계경제 상황에 크게 좌우되는 해운업의 특성상 장기 계획을 잡기 힘들고 대북사업도 남북 관계가 악화되면 좌초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경영권 분쟁 불씨도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것도 이 같은 시각에 동조하고 있다.
재계 한 고위 관계자는 "현대그룹의 수익창출은 현대상선과 현대엘리베이터에 있다"며 "두 계열사의 실적이 경영권 분쟁 전후 크게 변한 것이 없는 것을 볼 때 당분간 호조를 유지할 것으로 보이며 그룹 전체의 전망도 밝다고 생각한다"고 분석했다.
이어 "하지만 KCC가 여전히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22%를 보유하고 있어 현 회장이 경영상 미숙함을 드러내면 KCC가 이를 물고 늘어져 경영권 인수에 재도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취재/신건용 sgy@dreamwiz.com
故 정몽헌 회장 추모 인터넷사이트 오픈
잎사귀 클릭하면 추모의 글 읽을 수 있어
현대그룹이 고 정몽헌 회장 1주기를 맞아 인터넷 추모 사이트(www.chungmonghun.pe.kr) 를 열고 '추모의 나무 가꾸기' 행사를 시작했다.
현대그룹은 추모 사이트에 정 회장이 생전에 추구했던 민족의 공동번영에 대한 희망을 상징하는 '추모의 나무'를 세워놓았다.
네티즌들이 추모의 글을 올리면 잎사귀가 하나씩 생겨나 나무에 달리면서 추모의 나무가 점점 자라나게 되어 있다. 잎사귀를 클릭하면 네티즌들이 올린 추모의 글을 읽을 수 있다.
현대그룹 한 관계자는 "최근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남북경협사업의 개척자인 고인의 업적을 돌아보고 이를 우리 경제의 희망으로 발전시켜 나가자는 바람에서 추모의 나무를 인터넷에 만드는 행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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