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1953년 대구 교동시장서 탄생…현인이 불러 대히트
노래 인기 타고 영화, 드라마, 악극으로도 재탄생
부산 영도다리 부근에 노래비…이북 5도민 단골 곡
(1절)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메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 왔다
(2절)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달만 외로히 떴다
(3절)
철의 장막 모진 설음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에 너와 난데 변함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남북통일 그날이 되면
손을 잡고 울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춰보자
한해가 시작되는 1월이면 떠오르는 옛 가요가 하나 있다. 추억의 히트곡 <굳세어라 금순아>(김사랑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다. 6·25전쟁 이듬해인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해야 했던 그 무렵 노래로 지금까지도 중·노년층에서 곧 잘 불린다. 실향민의 향수, 북에 두고 온 누이동생을 걱정하는 노래로 전쟁과 추위, 외로움과 그리움이 연상된다. 우리 민족의 아픔이 오롯이 남아있는 가슴 아픈 노래다.
노래가 히트하면서 영화, 드라마, 악극, 리메이크음반으로도 재탄생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1960년대 같은 제목의 영화가 나와 눈길을 끈 적 있고 몇 년 전 MBC 일일드라마 ‘굳세어라 금순아’, 2002년 개봉영화 ‘굳세어라 금순아’(현남섭 감독의 데뷔작)도 노래와 같은 제목이다. 5년 전 개봉영화에선 배두나가 금순(인기 배구선수 출신)으로 나온다. 금순은 술값으로 술집에 잡힌 남편을 구해낸다. 그녀가 보이는 굳센 모습은 남자 못잖다. 건강한 체력으로 곤경에 빠진 남편을 구출하는 튼튼한 금순이다. 그녀가 헤매는 길은 노래 속 흥남부두 대신 서울 유흥가다. 오라비가 찾아주길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라 ‘오라비’라 부르는 남편을 구하겠다며 달리고 또 달린다. 여기에 주현, 고두심 등 브라운관 거목들의 기막힌 연기도 재미를 더해준다. 같은 제목의 DVD도 2003년 1월 7일 나왔다.
MBC드라마에서의 금순이는 탤런트 한혜진이 배역을 맡았다. 그녀는 영화 속 배두나와 다르다. 싸움을 잘 한다든가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많은 어려움을 굳건히 견뎌내는 내적으로 강한 모습이다. 외유내강 스타일이랄까. 영화, 드라마의 내용과 소재가 약간씩 다르긴 해도 한 여성이 굳센 의지로 삶을 헤쳐 간다는 중심주제만은 꼭 같다. 이 점을 강하게 나타낸 게 ‘굳세어라 금순아’란 제목이 가진 매력이라 여겨진다.
몇 년 전 부산 영도다리 부근엔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비가 섰다. 또 노래제목을 타이틀로 한 악극과 가수 한영애 등 여러 가수들의 리메이크음반도 나왔다. 영화, 드라마, 악극의 제목이 같이 붙은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뭔가 특별한 매력이 노래에 녹아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겪었던 세대들은 그 때 기억들이 생생할 것이다. 피난길은 생과 사가 갈리는 고단한 삶의 현실이었다. <굳세어라 금순아> 가사를 보면 북한 흥남부두에서 철수하는 배를 타기위해 아우성쳤던 장면에서부터 고생의 부산피난시절 모습이 주마등처럼 그려진다.
노래 1절에 나오는 흥남부두는 함경남도 함흥 부근의 항구이고 2절에 나오는 국제시장은 부산에 있는 큰 장터다. 물론 영도다리도 그곳에 있다. 3절까지 이어지는 노랫말이 한국전쟁 때의 장면 그 자체로 피난민들 아픔이 떠올려진다.
1·4후퇴 때 흥남부두의 생생한 전경과 실향민들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이 노래 태생지를 상당수 사람들이 부산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잖다. 결론부터 말하면 대구서 나왔다.
지금으로부터 54년 전인 1953년. 6·25전쟁 통에 나라는 엉망이었고 연예인들 주 활동무대는 서울보다는 지방이었다. 특히 대구시는 대중음악과 음반사들이 꽃을 피운 곳이다. 1946년 국내 최초로 고려레코드사가 세워진 지역으로 피난시절 가수, 작곡가, 작사가들이 모여들었다. 1920년 8월 20일 부유한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난 음악인 이병주 씨가 1947년 남선악기점(이후 화정악기점으로 바뀜)과 오리엔트레코드사를 설립한 곳도 대구다. 이 씨는 <이별의 탱고>(현인), <신라제길손>(백년설), <쌍가락지 논개>(남성봉), <아마다미야>(이남순)의 작곡·편곡자다. 그가 세운 오리엔트사는 6·25전쟁시절 한국가요의 산실이자 피난 연예인들 사랑방이었다. 서울서 럭키레코드사를 세워 <비 내리는 고모령>을 내놨던 박시춘 씨가 대구에서 한 때 전속작곡가로 있었던 회사이기도 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어느 날 작사가 강사랑, 작곡가 박시춘 씨, 가수 현인이 대구시 중구 교동 교동시장에 있는 한 냉면집에서 식사를 하게 됐다. 이들은 식당에서 북풍한설의 1·4후퇴 얘기, 피난민 얘기 등을 나눴고 직업이 음악인이라 악상이 떠올랐다. 자신들처럼 고향을 떠나 북한서 피난 온 사람들이 곳곳에 많았던 터라 누구랄 것도 없이 ‘그들을 소재로 한 노래 하나를 만들어 보자’고 했다. 정든 고향·집 떠난 서러움, 부모형제들과의 이별, 타관객지 삶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들이었다.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 하루 만에 노랫말, 악보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취입할 곳이 마땅찮았다. 어쩔 수 없이 오리엔트레코드사 2층 오리엔트다방에서 녹음했다.(지금의 대구시민회관인 KBS대구방송국 KG홀에서 가마니로 방음장치를 해 녹음했다는 설도 있으나 확인이 안 됨. 30여 평 남짓한 다방은 박시춘 씨 부인 김예비 씨가 운영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음반이 나오자 인기는 대단했다. 현인 씨의 특유한 바이브레이션, 흥겨운 멜로디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피난민들 가슴을 적셨다. 흥남부두, 1·4후퇴, 영도다리, 국제시장 등 시대를 상징하는 노랫말도 대중들에게 먹혀들었다. 현인 씨가 부산공연에서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르면 객석은 눈물바다였다.
세월은 흘러 휴전이 됐고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은 남에서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북에 두고 온 고향과 가족을 잊지 못했다. 피난상황을 고스란히 경험한 이북5도민들은 지금도 모이면 이 노래를 빼놓지 않고 부른다. 지난해 흥남철수작전에 참가했던 미국인 선원에게 재향군인회가 대휘장을 달아줘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가 또 한 번 뜨기도 했다.
[참고자료=사단법인 거리문화시민연대 발행 ‘신택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