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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는 무엇을 깨달은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무엇을 깨달은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깨달음의 내용
경전에는 <①중도를 깨달아, ②계정혜를 깨달아, ③사성제를 깨달아>라는 셋만이 언급된다. 어떤 분은 ‘부처님께서 연기를 깨달으신 것이 아닌가?’라고 묻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한 언급은 경전에 없고, 단지 위 <①, ②, ③>이 <모두 ‘연기’와 관련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2) 깨달음의 길
위 <①, ②, ③>의 공통점은 <모두 ‘법(담마)’과 관련된 것들이다>는 점이다. 또한 위 <①, ②, ③>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팔정도’다.
(3) 깨달음에 길에 나타나는 오득과(五得果)
안지혜명광(眼智慧明光, cakkhu, ñāṇa, paññā, vijjā, āloka)이라는 다섯은 수행자가 깨달음의 길에 들어서면 나타나는 ‘법들(담마들)’이다. 언급되는 곳은 <ⓐ집(集)과 멸(滅)을 발견하였을 때, ⓑ사념처에서 ‘신수관(~법수관)’하는 경우[SN. vol.4. pp.178~179], ⓒ사성제를 깨닫는 과정에서>이다.
위<ⓐ, ⓑ, ⓒ>의 공통점은 <연기, 법(담마), 팔정도>다.
(4) 최초의 첫 단추
석존께서 깨달음을 얻기 이전에,
즉, 고행림을 떠나서 네란자라 강변에서
‘깨달음과 관련하여 첫 인연’이 된 수행은
‘올바른 작의(yoniso manasikāra)’였고 그 내용[=올바른 작의의 내용]은
‘제식연기(齊識緣起, 10支연기, 식과 명색의 호연연기)’였으며,
그 결과로 <ⓐ집(集)과 멸(滅)을 발견하였을 때> 오득과(五得果)가 생겨났다.
관련경문은 아래와 같다.
2. Pubbe me bhikkhave sambodhā anabhisambudhassa bodhisattasseva sato etad ahosi. Kiccham vatāyam loko āpanno jāyati ca jīyate ca cavati ca upapajjati ca, atha ca panimassa dukkhassa nissaranṇaṃ na pajānāti jarāmaraṇassa. Kudāssu nāma imassa dukkhassa nissaraṇaṃ paññyissati jarāmaranassā ti.
비구들이여, 과거 내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던 보살이었을 때, 이러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 世間은 실로 어렵게 태어나고, 늙고, 죽고, 사라져서는 再生한다. 그런데도 이러한 老와 死의 苦에서 벗어나는 방도를 모른다. 언제쯤 老와 死의 苦에서 벗어남이 잘 알려지게 될까?
3. Tassa mayham bhikkhave etad ahosi. Kimhi nu kho sati jarāmaraṇaṃ hoti kimpaccayā jarāmaraṇanti.
비구들이여, 그러한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이 있을 때 老死가 있고, 무엇을 緣한 老死인가?’
4. Tassa mayham bhikkhave yoniso manasikārā ahu paññāya abhisamayo. Jātiyā kho sati jarāmaraṇaṃ hoti, jātipaccaya jarāmaraṇanti.
비구들이여, 나의 ‘올바른 作意(yoniso manasikāra)’로 인해 반야로써 ‘生이 있을 때 老死가 있고, 生을 緣한 老死이다’라고 분명히 이해(abhisamaya)되었다.
5. Tassa mayham bhikkhave etad ahosi. Kimhi nu kho sati jāti hoti, bhavo hoti, upādānaṃ hoti, taṇhā hoti, vedanā hoti, phasso hoti, saḷāyatanaṃ hoti, nāmarūpaṃ hoti, kimpaccayā nāmarūpanti.
비구들이여, 그러한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이 있을 때 生이 있고, 有가 있고, 愛가 있고, 受가 있고, 觸이 있고, 六入이 있고, 名色이 있고, 무엇을 緣한 名色인가?’
6. Tassa mayham bhikkhave yonīso manasikārā ahu paññāya ābhisamayo, viññāṇe kho sati nāmarūpaṃ hoti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nti.
비구들이여, 나의 ‘올바른 作意(yonīso manasikāra)’로 인해 반야로써 ‘識이 있을 때 名色이 있고, 識을 緣한 名色이다’라고 분명히 이해(abhisamaya)되었다.
7. Tassa mayham bhikkhave etad ahosi, Kimhi nu kho sati viññāṇaṃ hoti kimpaccayā viññāṇanti.
비구들이여, 그러한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이 있을 때 識이 있고, 무엇을 緣한 識인가?’
8. Tassa mayham bhikkhave yonīso manasikārā ahu paññāya ābhisamayo. Nāmarūpe kho sati viññāṇaṃ hoti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nti.
비구들이여, 나의 ‘올바른 作意(yonīso manasikāra)’로 인해 반야로써 ‘名色이 있을 때 識이 있고, 名色을 緣한 識이다’라고 분명히 이해(abhisamaya)되었다.
9. Tassa mayham bhikkhave etad ahosi. Paccudāvattati kho idaṃ viññāṇaṃ nāmarūpamhā nāparaṃ gacchati, attāvatā jīyetha vā jāyetha vā māyetha vā cavetha vā upapajjetha vā yad idam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ṃ, vaññāṇapaccayā nāmarūpaṃ, nāmarūpapaccayā saḷāyatanaṃ saḷāyatanapaccayā phasso … pr … Evam 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비구들이여, 그러한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 識에서 돌아서는 것(paccudāvatta, 還歸)이고 [名色을 넘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齊識而還不能過彼] ‘名色을 緣한 識’이라는 단지 이것만 가지고도 ‘태어나고, 늙고, 사라져서는 再生하게 되는 것’이다. 識을 緣한 名色, 名色을 緣한 六入, 六入을 緣한 觸, … 이같이 해서 순전한 苦蘊의 集이 있다.
10. Samudayo samudayo ti kho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m udapādi ñāṇam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集(samudaya)이로다! 集(samudaya)이로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던 法들에 대한 ‘眼이 생겨나고, 智가 생겨나고, 慧가 생겨나고, 明이 생겨나고, 光이 생겨났다.’
11. Tassa mayham bhikkhave etad ahosi. Kimhi nu kho asati jarāmaraṇāṃ na hoti, kissa nirodhā jarāmaraṇanirodho ti.
비구들이여, 그러한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이 없을 때 老死가 없고, 무엇의 滅로부터 老死의 滅이 있는가?’
12. Tassa mayham bhikkhave yonīso manasikārā ahu paññāya ābhisamayo. Jātiyā kho asati jarāmaraṇāṃ na hoti, jātinirodhā jarāmaraṇanirodho ti.
비구들이여, 나의 ‘올바른 作意(yonīso manasikāra)’로 인해 반야로써 ‘生이 없을 때 老死가 없고, 生의 滅로부터 老死의 滅이 있다’라고 분명히 이해(abhisamaya)되었다.
13. Tassa mayham bhikkhave etad ahosi. Kimhi nu kho asati jāti na hoti, bhavo na hoti, upādānaṃna hoti, taṇhā na hoti, vedanā na hoti, phasso na hoti, sāḷāyatanaṃ na hoti, nāṃarūpaṃ na hoti, kissa nirodhā nāmarūpanirodhoti.
비구들이여, 그러한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이 없을 때 生이 없고, 有가 없고, 愛가 없고, 受가 없고, 觸이 없고, 六入이 없고, 名色이 없고, 무엇의 滅로부터 名色의 滅이 있는가?’
14. Tassa mayham bhikkhave yonīso manasikārā ahu paññāya abhisamayo, viññāṇe kho sati nāmarupaṃ na hoti, viññāṇañirodhā nāmarūpanirodhoti.
비구들이여, 나의 ‘올바른 作意(yonīso manasikāra)’로 인해 반야로써 ‘識이 없을 때 名色이 없고, 識의 滅로부터 名色의 滅이 있다’라고 분명히 이해(abhisamaya)되었다.
15. Tassa mayham bhikkhave etad ahosi. Kimhi nu kho asati viññāṇaṃ na hoti, kissa nirodhā viññāṇanirodhoti.
비구들이여, 그러한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이 없을 때 識이 없고, 무엇의 滅로부터 識의 滅이 있는가?’
16. Tassa mayham bhikkhave yonīso manasikārā ahu paññāya ābhisamayo, nāmarūpe kho asati viññāṇaṃ na hoti nāmarupanirodhā viññāṇanirodhoti.
비구들이여, 나의 ‘올바른 作意(yonīso manasikāra)’로 인해 반야로써 ‘名色이 없을 때 識이 없고, 名色의 滅로부터 識의 滅이 있다’라고 분명히 이해(abhisamaya)되었다.
17. Tassa mayham bhikkhave etad ahosi. Aghigato kho myayaṃ maggobodhāya yad idaṃ nāmarūpanirodhā viññāṇanirodho. Viññāṇanirodhā nāmarūpanirodho, nāmarūpanirodhā saḷāyatananirodho, saḷāyatananirodhā phassanirodho, … pe … Evam 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i.
비구들이여, 그러한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名色의 滅로부터 識의 滅’이라는 이 ‘깨달음의 道(maggobodhāya, 道에 대한 깨달음)’는 나에게 알려졌다(=도달됐다, 성취되었다, 이해되었다) ‘識의 滅로부터 名色의 滅, 名色의 滅로부터 六入의 滅, 六入의 滅로부터 觸의 滅, … 이같이 순전한 苦蘊의 滅이 있다.
18. Nirodho nirodhoti kho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m udapādi ñaṇam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滅(nirodha)이로다! 滅(nirodha)이로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던 法들에 대한 ‘眼이 생겨나고, 智가 생겨나고, 慧가 생겨나고, 明이 생겨나고, 光이 생겨났다.’
[Saṃyutta Nikāya vol.2. pp.10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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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경문은 석존께서 최초로 <①중도를 깨달아 ‘팔정도’를 걷게 되는 장면>을 설하신 경문이다. 우리는 흔히 <중도라는 것을 알면 불교를 안다>라고 말하지만 ‘중도에 대한 분명한 이해’는 사실상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중도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게 되면> 불교를 이해하는 우리의 수준은 높아질 것이다.
그래서 ‘아위자’의 <①중도를 깨달아>라는 것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팔정도’와 관련하여 ‘올바른 作意(yonīso manasikāra)’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은 ‘정견(正見)’이다. 그러한 정견(正見)은 혜온(慧蘊) 즉 반야(paññā, 慧)이므로 위 경문과 일치한다. 그리고 위 경문은 ‘연기적 사유를 한 것’을 ‘올바른 作意(yonīso manasikāra)’라고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 ‘깨달음의 道(maggobodhāya, 道에 대한 깨달음)’를 발견한 것은 ‘集(samudaya)과 滅(nirodha)’을 발견하고서이다.
결국 위 경문의 언급대로라면 <중도의 발견은 ‘集(samudaya)과 滅(nirodha)’의 발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팔정도’는 ‘선법들의 集(samudaya)’이라는 유위(有爲)>이다. 그러한 유위(有爲)들에 의하여 <‘팔사도’에 의해 ‘集(samudaya)했던 불선법들’이라는 유위(有爲)>가 <滅(nirodha)>했던 것이다.
‘팔정도’는 ‘nirodhagāminiṃ paṭipadaṃ(멸로 향하는 방법론)’이고 ‘중도는 중간의 방법론’이다. 여기에서 <‘팔정도’가 왜 ‘중간의 방법론’인가?>를 이해하게 되면 되는 것이다.
‘팔정도’도 ‘集(samudaya)과 관련된 막가’이고, ‘팔사도’도 ‘集(samudaya)과 관련된 막가’이다. 둘 다 ‘유위(有爲)의 막가’라는 뜻이며, ‘무위(無爲)를 의미하는 滅(nirodha)’의 직접적인 막가(magga)는 아니라는 말이다. ‘팔정도’를 ‘nirodha-magga’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다.
여기에서 중도인 ‘사념처’와 관련해서 <‘팔정도’가 ‘satipaṭṭhāna-bhāvanā-gamini paṭipada(念處修行을 向하는 방도)’임>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념처’가 ‘고짜라’라면 그 방도도 당연히 ‘고짜라에서의 수행인 것’이다.
나아가 경전이[Saṃyutta-Nikāya 제5권의 제47 Saṃyutta, Ananussuta-Vagga에 설해지는 Vibhaṅga(SN. vol.5. p.183.)의 전체 내용 참조.]
①satipaṭṭhāna(念處)와
②satipaṭṭhāna-bhāvanā(念處修行, 염처에서의 닦음, 사띠할 곳에서의 닦음)와
③satipaṭṭhāna-bhāvanā-gamini paṭipada(念處修行을 向하는 방도)
라는 셋을 각각 엄격하게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①satipaṭṭhāna란 ‘<身受心法>의 네 곳’을 의미하고,
②satipaṭṭhāna-bhāvanā란 身隨觀(~法隨觀)에서 공통적으로 설해지는 ‘法에 대한 隨觀(dhammānupassanā, =법수관(法隨觀))’을 의미하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Katamā ca bhikkhave satipaṭṭhānabhāvanā: Idha bhikkhave bhikkhu samudayadhammānupassī kāyasmiṃ viharati, vayadhammānupassī kāyasmiṃ viharati, samudayavayadhammānupassī kāyasmiṃ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 vedanāsu … citte …. Dhammesu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Ayam vuccati bhikkhave satipaṭṭhānabhāvanā.[SN. vol.5. p.183]
비구들이여, 염처수행(satipaṭṭhāna-bhāvanā)이란 어떠한 것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世間에 대한 욕심과 근심을 버리고서 · 열심히 하는 자 · 잘 아는 자 · 사띠를 갖춘 자’로서, 身(~法)에서 ‘集하는 法을 隨觀하고 · 사라지는 法을 隨觀하고 · 集하고 사라지는 法을 隨觀’하며 머무른다. 비구들이여, 그러한 것을 염처수행(satipaṭṭhāna-bhāvanā)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集(samudaya)과 사라짐(vaya)>이 언급된다. 그리고 ③satipaṭṭhāna-bhāvanā-gamini paṭipada의 그 내용인 ‘팔정도’는 <‘선법들의 集(samudaya)’이라는 유위(有爲)>이다. 결국 ‘아위자’의 견해로는 <‘사념처’(=고짜라)에서 集(samudaya)하는 법이란 ‘혜→계→정’>이고 그러한 ‘혜→계→정’에 의해 <‘사념처’(=고짜라)에서 사라지는(vaya) 법이란 ‘탐진치’>라는 말이다.
‘계정혜 삼학’도 고짜라(=內로)에 위치하는 법이지만, ‘탐진치’도 고짜라(=內로)에 위치하는 법이다.[☜경전에 그렇게 ‘內로’라고 설해짐] 그렇다면 <중도란 ‘고짜라’[=사념처]를 닦아서 ‘계온, 정온, 혜온’을 쌓아감[=유위]으로써 ‘탐진치에서 유래된 12연기의 제법들’을 滅(nirodha)하는 빠디빠다(paṭipada)인 것>이다.
이는 ‘깨달음의 내용’이 경전에는 <①중도를 깨달아, ②계정혜를 깨달아, ③사성제를 깨달아>라는 셋만이 언급되는 것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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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래와 같은 경문이 있다.
8. Jarāmaraṇam pajānanti, jarāmaraṇasamudayaṃ pajānanti, jarāmaraṇanirodhaṃ pajānanti, jarāmaraṇanirodhagāminiṃ paṭipadaṃ pajānanti. ⁄ jāti ⁄ bhava ⁄ upādāna ⁄ taṇhā ⁄ vedanā ⁄ phassasa ⁄ saḷāyatana ⁄ nāmarūpa ⁄ viññāṇa ⁄ saṅkhāre pajānanti, saṅkhārasamudayaṃ pajānanti, saṅkhāranirodhaṃ pajānanti, saṅkhāranirodhagāminiṃ paṭipadaṃ pajānanti, ime dhamme ppajānanti, imesaṃ dhammānaṃ samudayaṃ ppajānanti, imesaṃ dhammānaṃ nirodhaṃ ppajānanti, imesaṃ dhammānaṃ nirodhagāminiṃ paṭipadaṃ ppajānanti.
‘노사’를 꿰뚫고, ‘노사의 집(集)’을 꿰뚫고, ‘노사의 멸(滅)’을 꿰뚫고, ‘노사의 멸도(滅道)’를 꿰뚫는다. ⁄ 생(이하동일) ⁄ 유 ⁄ 취 ⁄ 애 ⁄ 수 ⁄ 촉 ⁄ 육입 ⁄ 명색 ⁄ 식 ⁄ 행 ⁄ ‘이러한 담마’를 꿰뚫고, ‘이러한 담마의 집(集)’을 꿰뚫고, ‘이러한 담마의 멸(滅)’을 꿰뚫고, ‘이러한 담마의 멸도(滅道)’를 꿰뚫는다.
9. Te kho me bhikkhave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samaṇesu ceva samaṇasammatā brāhmaṇesu ca brāhmaṇasammatā. Te ca panāyasmanto sāmaññatthañca brahmaññatthañca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ntī'ti.
비구들이여, 그들 사문들이나 성직자들은 사문 중에서 사문다움(=사문의 상태)을 갖춘 자들이며, 성직자 중에서 성직자다움(=성직자의 상태)을 갖춘 자들이다. 그리고 그 ‘사문다움이나 성직자다움’을 갖춘 존자들은 <견법에서(見法에서, diṭṭheva dhamme, =지금 보고 있는 담마에서) ‘스스로 아빈냐(abhiññā, 增智)로 진리를 봄’에 도달하여> 머문다.
[PTS Saṃyutta-Nikāya vol. 2. pp,15~16]
첫댓글 부처님의 6년고행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약간...^^
‘팔정도’는 <‘선법들의 集(samudaya)’이라는 유위(有爲)>이다. 결국 ‘아위자’의 견해로는 <‘사념처’(=고짜라)에서 集(samudaya)하는 법이란 ‘혜→계→정’>이고 그러한 ‘혜→계→정’에 의해 <‘사념처’(=고짜라)에서 사라지는(vaya) 법이란 ‘탐진치’>라는 말이다.
선법도 불선법도 모두 유위법이기 때문에 모두 集하는 순간 滅합니다. 다만 한 순간에는 하나의 법만 있으므로 선법이 생멸할 때 불선법은 없고 불선법이 생멸할 때 선법은 없습니다. 이 두 가지의 법은 모두 사띠의 대상이며 이 법들의 생멸을 통찰하는 분명한 앎도 유위법입니다.
이런 유위법의 흐름이 끊어진 무위법(열반)은 선법 불선법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철저하게 통찰하여 선, 불선에 집착하지 않을 때 도달합니다.
그래서 선법의 集으로 인해 탐진치의 불선법이 滅한다기보다, 두 법이 모두 다 유위법인 줄 알아 집착하지 않을 때 진정한 소멸, 열반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아위자님의 글을 오해를 했거나 이해가 부족했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제가 걸리는 부분을 표현함으로써 제가 다른 분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서 글을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무위인 열반에 들어가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유위가 '계온, 정온, 혜온, 해탈온, 해탈지견온'이고, 그러한 유위는 '팔정도와 위빠사나를 반복하여 닦음으로써 쌓이는 유위들'입니다. <------ 이 점을 많은 분들이 이해하시기 어려워 하시더라구요. 오해도 많으시구요. <팔정도----계정혜, 위빠사나----해탈과 해탈지견온>입니다.
고짜라가 텅텅 비어 '아무 것도 없으면' 예방주사를 맞지 않은 어린이와 같아서 <언제 어느 때 다시 '탐진치가'가 생겨날지>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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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법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정법이라고 해도 <집착하면 안된다>라는 말씀은 <선법들을 멸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그러한 해탈과 해탈지견'을 쌓으라는 말씀>입니다.
<탐진치가 集하는 순간 滅한다>라는 말을 들어 보신적 있으십니까? 그 비슷한 이야기라도 들어 보신적이 있으십니까? <무명이 集하는 순간 滅한다>라는 말을 들어 보신적이 있으십니까? 그 비슷한 이야기라도 들어 보셨다면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선법도 불선법도 모두 유위법이기 때문에 모두 集하는 순간 滅합니다>라는 것이 '남방불교의 찰라설'인데, 일단 니까야에 설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짜라에 담겨진 것>은 다릅니다. 예를 들어, <고짜라에 담겨진 것으로서 가장 유명한 '탐진치'>의 경우를 보면 <만만치 않지 않습니까?> 왜 그러할까요? 왜 탐진치를 '불선법들의 뿌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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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짜라에 담겨진 것들>은 '뿌리'가 되는 것이어서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제거가 쉽지 않고, 찰라설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찰라설에서는 주로 <심(心)의 경우>를 예로 많이 드느데요,
문제가 많은 <논장의 주장들>입니다.
제가 말하는 滅은 뿌리가 뽑힌 멸이 아니라 지금 법으로 드러난 것만 소멸하는 순간적인 멸입니다. 탐진치만 뿌리가 아니고 관용, 자애, 지혜도 뿌리입니다. 지금부터 선근을 반복해서 심으면 점차 탐진치의 뿌리가 자라서 과보로 올라와도 그것을 지혜롭게 해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생겨난 것은 사라지는 것이다>라는 '법안(法眼)'을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군요.
<集하는 순간 滅>이라는 표현에 제가 너무 집착하였나 봅니다. ㅋ. '순간'이란 표현이 '찰라생 찰라멸'을 의미하는 줄 알았습니다.
중생에게 고짜라는 텅빌 순간이 없습니다. 다만 고짜라를 대상으로 보지 못하고 내 것으로 집착할 뿐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중생의 경우 언제라도 탐진치는 발생할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때 일어난 탐진치를 없애려하지 않고 법으로 사띠할 때 자연스럽게 일어난 탐진치가 사띠에 의해 순간 소멸합니다. 그러나 사띠가 이어지면 탐진치는 일시적인 소멸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수행자는 불선법조차도 일어났다 사라지며 내 것이 아니고 실체가 없음을 통찰합니다.
그렇습니다. 아직 제가 '해맑은'님의 표현방식에 익숙지 않아서 '잘못 알아듣고서 엉뚱한 설명'을 한 것 같습니다.
그 다음 탐진치를 사띠한 그 마음조차도 일어났다 사라졌다는 사띠가 뒤를 이어야 선법조차도 집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선법들을 멸하는 것이 아니고, 선법조차도 생멸하는 이치를 깨달아 선법을 집착하지 않는 것이 될 것입니다.
'남방불교의 찰라설'인데, 일단 니까야에 설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군요.... 그러나 무상의 말씀은 수없이 하셨는데, 사념처에서 觀心無常, 마음을 보면 무상을 본다고 하잖아요. 이 마음을 생활 속에서 보면 정말 찰나 생멸하지 않습니까? 탐욕도 생하는 순간 멸하고, 관용도 생하는 순간 멸하고 그 다음 어떤 마음이 일어날지는 조건에 의한 것이라 미리 알 수는 없지만 마음이 끊어지는 순간이 없이 생멸하면서 흐른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먼저, 심수관은 '마음을 보는 것'은 아니고요, 그리고 <마음을 보고서 무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연기를 보고서 무상을 보는 것>이고요, <심의식의 생멸>이 '사념처'의 주제는 아니고요, <심의식의 집과 사라짐은 '명색의 집과 사라짐'에 의존적인 것>이고요, <'심과 명색'이라는 둘>에서 그 중 어느 하나를 독립적으로 취급하시면 안되고요, '그 둘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이고요.
마음의 대상인 법으로 드러난 거친 번뇌는 일어나는 순간 멸하지만, 중간 번뇌나 잠재된 번뇌는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소멸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남아서 때를 기다린다고 생각합니다. 사념처는 이 숨어있던 번뇌가 올라오는 순간을 포착하여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해맑은'님께서 <어디에서 니까야와 어긋나는 것인지>를 알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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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는 <심의식과 명색의 관계>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인데, 그 번뇌를 <유위법으로 보는 것>은 <그 번뇌를 알고, 그 번뇌의 집을 알고, 그 번뇌의 멸을 알고, 그 번뇌의 멸도를 알기>위한 것입니다.
번뇌를 <직접 대면하여 상대하거나 제거하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이 세상에 해탈하지 못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법안(法眼)의 용도는 <지집멸도를 아는 것>에 쓰는 용도입니다.
'해맑은'님께서 기왕에 닦아 놓으신 '법안'을 <번뇌에 대한 '지집멸도'를 꿰뚫는 방향>에 쓰신다면 니까야의 가르침에 일치하실 것으로 저는 봅니다. 그 방향에 '정견'이 있고요, 정견에 이어지는 팔정도가 있고요, 그 팔정도가 바로 <사념처 수행을 하는 빠디빠다>입니다.
사념처와 팔정도의 관계를 잘 파악하시는 것이 <막가를 발견하시는 것>입니다. 막가가 발견되면 그 다음 문제는 간단합니다. 걸어가든지 가지 않든지 선택의 자유가 있고요, 걸어 가게 되면 그 다음 문제는 '방일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걸어서 열반에 이르라는 말씀이십니다. 걸어가다가 도중에 '딴 곳에 정신 팔려서' 도중하차하시는 분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ㅋ.
일단 먼저 '정도(=올바른 길)'부터 찾아 놓고 볼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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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개인적인 견해이고, 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의 분들이 '동의하지 않는 견해'이지만, ㅋ. <사념처는 막가가 아닙니다.> '사념처'라는 용어 자체에 '막가'라는 용어가 붙어있지 않지 않습니까? <에까야나 막가>라는 말 밖에 없는데, 그 표현은 <사념처라는 네 곳>을 통과하여 '집과 멸'이 이루어 지는 것이고, 불선법의 집과 멸이나 선법의 집과 멸이 '사념처에서 그렇게 집과 멸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라고 저는 봅니다.
사념처를 <기반으로, 토대로, 시작지점으로> 그러하다는 것. 문제는 이러한 지적이 님께서 '처음 듣는 말'이라는 점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쏟아지던 '아라한들'[=심지어는 한 동네 사람들이 전부 동시에]이 지금은 어떻습니까? 일주일이면 가능하던 '아라한들'이 지금은 어떻습니까? 님을 지도하시는 분들이 '아라한들'이시던가요? 무엇이 잘못되었겠습니까? 길이란 '부지런히 걸으면 당연히 정해진 시간에 도착지점에 도착하여야 되는 것'아닙니까? 누구는 안되고 누구는 되는 것이 길입니까? 걷는 분은 무조건 다 되는 길이 바로 '막가'입니다.
현재까지는 <팔정도를 걸어서 열반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분>은 단 한 분도 계시지 않기에 <팔정도가 '고멸도성제'라는 진리인 것>입니다. 사념처가 막가라는 말은 없다니까요. 사념처는 그냥 사념처에요. 단지 모든 막가의 수행자가 모두 다 그 <네 곳>을 통과하는 것 뿐입니다. 거기에서 집과 멸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니까요.
저의 이러한 말이 '사념처'를 깎아내리는 말입니까? 아니면 사념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입니까?
수행자가 깨달음의 길에 들어서면 무조건 이유없이 안지혜명광(眼智慧明光)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경전에 의하면 그것들의 첫 등장은 <집과 멸을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그것이 처음입니다.
네... <집과 멸을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다른 말로 생멸을 통찰하는 순간입니다.
이 집과 멸을 통찰할 수 있는 장소가 신수심법, 다른 말로 12처, 현재의 몸과 마음입니다. 이런 장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정신적 현상을 단지 대상으로 분리해서 사띠를 확립할 때 그 대상들의 일어남과 사라짐(집과 멸)을 이해하고 법으로 수용하며 집착하지 않을 수 있지않을까요?
그래서 사념처를 <기반으로, 토대로, 시작지점으로> 팔정도의 길이 보이고 그길을 따라 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집과 멸>이라는 것이 .........<생로병사 우울, 비탄, 괴로움, 번민, 절망>의 집과 '그 멸'이라는 점입니다. 나아가 <신행, 어행, 심행>의 집과 '그 멸'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팔정도가 멸의 빠디빠다임을 뱔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고멸도성제>를 깨닫는 것임.
.........<생로병사 우울, 비탄, 괴로움, 번민, 절망>의 집과 '그 멸'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차이가나는군요.
<생로병사 우울, 비탄, 괴로움, 번민, 절망> 을 경험하는 장소가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이고, 12처이고, 오온이고,...
그래서 염처 수행이 팔정도를 발견하는 첫 단추이고, 지속적인 염처 수행은 팔정도를 걸어가는 빠디빠다라고 해석하면 제가 너무 너무 확대해석한 것인가요?
부처님께서는, 부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심지어는 자신의 직계 제자 분들에게도 <심각한 오해(=부처님의 입장에서는 '오해')를 받았던 이야기>가 바로 <경험하는 장소가 어디냐?>는 것에 대한 설명이셨습니다.
'마음이다'라고 하면 하나의 극단론이고, '몸이다'라고 하면 또 다른 하나의 극단론이지요.
'12처다[=명색]'라고 하면 정신 나간 소리고, '오온이다[=명색]'라고 하면 <모든 중생들이 그렇게 여기는 것>이지요. 답은 '사념처다'라는 것입니다. 그 말이 어렵습니다.
지금은 본 카페에 계시지 않지만, <'봉행'님의 도표>를 프린트 하셔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드려다 보십시오. 기가 막힌 도표입니다. 그 도표가. 그 도표가 바로 사념처의 구조이거든요. 거기에서 어떻게 오온이 연기되는 것인가?와 그러한 쌍카라들을 제거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어렵습니다.
'둑카'님께서 반복하여 <아자땅과 바히다>를 물으시는데, 그 도표에 적혀있다니까요. 그 도표에.
'그 도표'가
.........<생로병사 우울, 비탄, 괴로움, 번민, 절망>의 집과 '그 멸'이라는 것들을
설명하고 있다고 제가 말하는 이유도, 부처님께서 '그렇게 설명'하셨기 때문. '사념처의 구조'는 정말 묘한 구조입니다. 둘 씩 짝지어 보세요. <신과 수> 그리고 <심과 법>. 그리고 그 두 뭉텡이를 잘 비교해 보세요.
심행이 없는데도 신행이 성립할 수 있겠습니까? <계(다투)를 조건으로 산냐>가 연기되지 않았는데도 '심행'이 성립할 수 있겠습니까? <계(다투)를 조건으로 견(見)>이 연기되지 않았는데도 '신행'이 성립할 수 있겠습니까? <계(다투)를 조건으로 위딱까>가 연기되지 않았는데도 '어행'이 성립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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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들이 육육법의 흐름을 따라가며 끊임 없이 <나의 것이다, 나다, 나의 자아다>라고 아누빠사나(=見)하였기 떄문에 '유신(有身, 지금 현재의 이 몸뚱아리, =오취온, =苦蘊)'이라는 '신행(身行)'이 성립한 것이기에 <위빠사나 하라!>는 것인데,
그러한 <유신견(有身見)의 멸(滅)>이 <사실상의 유신(有身)의 멸(滅)>이라는 점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 과정에 대한 부처님의 설명 중에 '촉'이라는 것이 설해지기에 어려운 것입니다. '촉'을 해결하지 못하면 <촉수상사 사무색음>을 해결하지 못한 것입니다. 임시적인(=찰라적인) 사라짐을 보아서 무엇에 쓰시는 것입니까?
아위자님의 말씀은, 부처님의 말씀인 사념처에서 안으로가 고의 멸이고 고멸의 집이며, 밖으로는 고의 집이고 고멸의 멸이라는 말씀인가요?
'둑카'님 때문에 '아자땅 바히라'를 또 다시 한 번 더 설명하여야 할 것 같군요. 다시 설명해 보아도 같은 이야기인데. 벌써 여러 번 반복된 것이라서 ..................제 견해를 반복적으로 밝히는 것보다는 비판 받고 보다 더 경전에 가까운 답을 얻고 싶은 소망인데...........
'저'때문에 다시 한 번 더 설명하여야 할 수고는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확인'차 질문한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