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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해탈 부처님께서는 무엇을 깨달은 것인가?
아위자 추천 0 조회 258 13.02.23 04:20 댓글 35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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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2.24 08:50

    첫댓글 부처님의 6년고행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 13.02.24 20:06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약간...^^

    ‘팔정도’는 <‘선법들의 集(samudaya)’이라는 유위(有爲)>이다. 결국 ‘아위자’의 견해로는 <‘사념처’(=고짜라)에서 集(samudaya)하는 법이란 ‘혜→계→정’>이고 그러한 ‘혜→계→정’에 의해 <‘사념처’(=고짜라)에서 사라지는(vaya) 법이란 ‘탐진치’>라는 말이다.

    선법도 불선법도 모두 유위법이기 때문에 모두 集하는 순간 滅합니다. 다만 한 순간에는 하나의 법만 있으므로 선법이 생멸할 때 불선법은 없고 불선법이 생멸할 때 선법은 없습니다. 이 두 가지의 법은 모두 사띠의 대상이며 이 법들의 생멸을 통찰하는 분명한 앎도 유위법입니다.

  • 13.02.24 20:17

    이런 유위법의 흐름이 끊어진 무위법(열반)은 선법 불선법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철저하게 통찰하여 선, 불선에 집착하지 않을 때 도달합니다.

    그래서 선법의 集으로 인해 탐진치의 불선법이 滅한다기보다, 두 법이 모두 다 유위법인 줄 알아 집착하지 않을 때 진정한 소멸, 열반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아위자님의 글을 오해를 했거나 이해가 부족했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제가 걸리는 부분을 표현함으로써 제가 다른 분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서 글을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 작성자 13.02.25 00:07

    무위인 열반에 들어가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유위가 '계온, 정온, 혜온, 해탈온, 해탈지견온'이고, 그러한 유위는 '팔정도와 위빠사나를 반복하여 닦음으로써 쌓이는 유위들'입니다. <------ 이 점을 많은 분들이 이해하시기 어려워 하시더라구요. 오해도 많으시구요. <팔정도----계정혜, 위빠사나----해탈과 해탈지견온>입니다.

  • 작성자 13.02.25 00:14

    고짜라가 텅텅 비어 '아무 것도 없으면' 예방주사를 맞지 않은 어린이와 같아서 <언제 어느 때 다시 '탐진치가'가 생겨날지> 알 수 없습니다.

    -----------------------------------------

    선법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정법이라고 해도 <집착하면 안된다>라는 말씀은 <선법들을 멸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그러한 해탈과 해탈지견'을 쌓으라는 말씀>입니다.

  • 작성자 13.02.25 00:26

    <탐진치가 集하는 순간 滅한다>라는 말을 들어 보신적 있으십니까? 그 비슷한 이야기라도 들어 보신적이 있으십니까? <무명이 集하는 순간 滅한다>라는 말을 들어 보신적이 있으십니까? 그 비슷한 이야기라도 들어 보셨다면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 작성자 13.02.25 00:24

    <선법도 불선법도 모두 유위법이기 때문에 모두 集하는 순간 滅합니다>라는 것이 '남방불교의 찰라설'인데, 일단 니까야에 설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짜라에 담겨진 것>은 다릅니다. 예를 들어, <고짜라에 담겨진 것으로서 가장 유명한 '탐진치'>의 경우를 보면 <만만치 않지 않습니까?> 왜 그러할까요? 왜 탐진치를 '불선법들의 뿌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

    <고짜라에 담겨진 것들>은 '뿌리'가 되는 것이어서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제거가 쉽지 않고, 찰라설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찰라설에서는 주로 <심(心)의 경우>를 예로 많이 드느데요,

  • 작성자 13.02.25 00:28

    문제가 많은 <논장의 주장들>입니다.

  • 13.02.25 00:42

    제가 말하는 滅은 뿌리가 뽑힌 멸이 아니라 지금 법으로 드러난 것만 소멸하는 순간적인 멸입니다. 탐진치만 뿌리가 아니고 관용, 자애, 지혜도 뿌리입니다. 지금부터 선근을 반복해서 심으면 점차 탐진치의 뿌리가 자라서 과보로 올라와도 그것을 지혜롭게 해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작성자 13.02.25 01:43

    아~~ <생겨난 것은 사라지는 것이다>라는 '법안(法眼)'을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군요.
    <集하는 순간 滅>이라는 표현에 제가 너무 집착하였나 봅니다. ㅋ. '순간'이란 표현이 '찰라생 찰라멸'을 의미하는 줄 알았습니다.

  • 13.02.25 00:45

    중생에게 고짜라는 텅빌 순간이 없습니다. 다만 고짜라를 대상으로 보지 못하고 내 것으로 집착할 뿐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중생의 경우 언제라도 탐진치는 발생할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때 일어난 탐진치를 없애려하지 않고 법으로 사띠할 때 자연스럽게 일어난 탐진치가 사띠에 의해 순간 소멸합니다. 그러나 사띠가 이어지면 탐진치는 일시적인 소멸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수행자는 불선법조차도 일어났다 사라지며 내 것이 아니고 실체가 없음을 통찰합니다.

  • 작성자 13.02.25 01:49

    그렇습니다. 아직 제가 '해맑은'님의 표현방식에 익숙지 않아서 '잘못 알아듣고서 엉뚱한 설명'을 한 것 같습니다.

  • 13.02.25 00:34

    그 다음 탐진치를 사띠한 그 마음조차도 일어났다 사라졌다는 사띠가 뒤를 이어야 선법조차도 집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선법들을 멸하는 것이 아니고, 선법조차도 생멸하는 이치를 깨달아 선법을 집착하지 않는 것이 될 것입니다.

  • 13.02.25 00:53

    '남방불교의 찰라설'인데, 일단 니까야에 설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군요.... 그러나 무상의 말씀은 수없이 하셨는데, 사념처에서 觀心無常, 마음을 보면 무상을 본다고 하잖아요. 이 마음을 생활 속에서 보면 정말 찰나 생멸하지 않습니까? 탐욕도 생하는 순간 멸하고, 관용도 생하는 순간 멸하고 그 다음 어떤 마음이 일어날지는 조건에 의한 것이라 미리 알 수는 없지만 마음이 끊어지는 순간이 없이 생멸하면서 흐른다고 생각합니다.

  • 작성자 13.02.25 02:01

    일단 먼저, 심수관은 '마음을 보는 것'은 아니고요, 그리고 <마음을 보고서 무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연기를 보고서 무상을 보는 것>이고요, <심의식의 생멸>이 '사념처'의 주제는 아니고요, <심의식의 집과 사라짐은 '명색의 집과 사라짐'에 의존적인 것>이고요, <'심과 명색'이라는 둘>에서 그 중 어느 하나를 독립적으로 취급하시면 안되고요, '그 둘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이고요.

  • 13.02.25 00:58

    마음의 대상인 법으로 드러난 거친 번뇌는 일어나는 순간 멸하지만, 중간 번뇌나 잠재된 번뇌는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소멸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남아서 때를 기다린다고 생각합니다. 사념처는 이 숨어있던 번뇌가 올라오는 순간을 포착하여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작성자 13.02.25 02:12

    아~~~~~~~~ '해맑은'님께서 <어디에서 니까야와 어긋나는 것인지>를 알겠네요.

    -------------------------------------

    번뇌는 <심의식과 명색의 관계>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인데, 그 번뇌를 <유위법으로 보는 것>은 <그 번뇌를 알고, 그 번뇌의 집을 알고, 그 번뇌의 멸을 알고, 그 번뇌의 멸도를 알기>위한 것입니다.

    번뇌를 <직접 대면하여 상대하거나 제거하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이 세상에 해탈하지 못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법안(法眼)의 용도는 <지집멸도를 아는 것>에 쓰는 용도입니다.

  • 작성자 13.02.25 02:17

    '해맑은'님께서 기왕에 닦아 놓으신 '법안'을 <번뇌에 대한 '지집멸도'를 꿰뚫는 방향>에 쓰신다면 니까야의 가르침에 일치하실 것으로 저는 봅니다. 그 방향에 '정견'이 있고요, 정견에 이어지는 팔정도가 있고요, 그 팔정도가 바로 <사념처 수행을 하는 빠디빠다>입니다.

  • 작성자 13.02.25 02:21

    사념처와 팔정도의 관계를 잘 파악하시는 것이 <막가를 발견하시는 것>입니다. 막가가 발견되면 그 다음 문제는 간단합니다. 걸어가든지 가지 않든지 선택의 자유가 있고요, 걸어 가게 되면 그 다음 문제는 '방일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걸어서 열반에 이르라는 말씀이십니다. 걸어가다가 도중에 '딴 곳에 정신 팔려서' 도중하차하시는 분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ㅋ.

  • 작성자 13.02.25 02:29

    일단 먼저 '정도(=올바른 길)'부터 찾아 놓고 볼 일이지요.

    -----------------------------------

    제 개인적인 견해이고, 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의 분들이 '동의하지 않는 견해'이지만, ㅋ. <사념처는 막가가 아닙니다.> '사념처'라는 용어 자체에 '막가'라는 용어가 붙어있지 않지 않습니까? <에까야나 막가>라는 말 밖에 없는데, 그 표현은 <사념처라는 네 곳>을 통과하여 '집과 멸'이 이루어 지는 것이고, 불선법의 집과 멸이나 선법의 집과 멸이 '사념처에서 그렇게 집과 멸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라고 저는 봅니다.

  • 작성자 13.02.25 02:36

    사념처를 <기반으로, 토대로, 시작지점으로> 그러하다는 것. 문제는 이러한 지적이 님께서 '처음 듣는 말'이라는 점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쏟아지던 '아라한들'[=심지어는 한 동네 사람들이 전부 동시에]이 지금은 어떻습니까? 일주일이면 가능하던 '아라한들'이 지금은 어떻습니까? 님을 지도하시는 분들이 '아라한들'이시던가요? 무엇이 잘못되었겠습니까? 길이란 '부지런히 걸으면 당연히 정해진 시간에 도착지점에 도착하여야 되는 것'아닙니까? 누구는 안되고 누구는 되는 것이 길입니까? 걷는 분은 무조건 다 되는 길이 바로 '막가'입니다.

  • 작성자 13.02.25 02:41

    현재까지는 <팔정도를 걸어서 열반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분>은 단 한 분도 계시지 않기에 <팔정도가 '고멸도성제'라는 진리인 것>입니다. 사념처가 막가라는 말은 없다니까요. 사념처는 그냥 사념처에요. 단지 모든 막가의 수행자가 모두 다 그 <네 곳>을 통과하는 것 뿐입니다. 거기에서 집과 멸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니까요.

    저의 이러한 말이 '사념처'를 깎아내리는 말입니까? 아니면 사념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입니까?

  • 작성자 13.02.25 02:46

    수행자가 깨달음의 길에 들어서면 무조건 이유없이 안지혜명광(眼智慧明光)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경전에 의하면 그것들의 첫 등장은 <집과 멸을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그것이 처음입니다.

  • 13.02.25 10:52

    네... <집과 멸을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다른 말로 생멸을 통찰하는 순간입니다.
    이 집과 멸을 통찰할 수 있는 장소가 신수심법, 다른 말로 12처, 현재의 몸과 마음입니다. 이런 장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정신적 현상을 단지 대상으로 분리해서 사띠를 확립할 때 그 대상들의 일어남과 사라짐(집과 멸)을 이해하고 법으로 수용하며 집착하지 않을 수 있지않을까요?
    그래서 사념처를 <기반으로, 토대로, 시작지점으로> 팔정도의 길이 보이고 그길을 따라 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 작성자 13.02.25 12:22

    문제는 그 <집과 멸>이라는 것이 .........<생로병사 우울, 비탄, 괴로움, 번민, 절망>의 집과 '그 멸'이라는 점입니다. 나아가 <신행, 어행, 심행>의 집과 '그 멸'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팔정도가 멸의 빠디빠다임을 뱔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고멸도성제>를 깨닫는 것임.

  • 13.02.25 16:28

    .........<생로병사 우울, 비탄, 괴로움, 번민, 절망>의 집과 '그 멸'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차이가나는군요.

    <생로병사 우울, 비탄, 괴로움, 번민, 절망> 을 경험하는 장소가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이고, 12처이고, 오온이고,...
    그래서 염처 수행이 팔정도를 발견하는 첫 단추이고, 지속적인 염처 수행은 팔정도를 걸어가는 빠디빠다라고 해석하면 제가 너무 너무 확대해석한 것인가요?

  • 작성자 13.02.25 19:20

    부처님께서는, 부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심지어는 자신의 직계 제자 분들에게도 <심각한 오해(=부처님의 입장에서는 '오해')를 받았던 이야기>가 바로 <경험하는 장소가 어디냐?>는 것에 대한 설명이셨습니다.

    '마음이다'라고 하면 하나의 극단론이고, '몸이다'라고 하면 또 다른 하나의 극단론이지요.
    '12처다[=명색]'라고 하면 정신 나간 소리고, '오온이다[=명색]'라고 하면 <모든 중생들이 그렇게 여기는 것>이지요. 답은 '사념처다'라는 것입니다. 그 말이 어렵습니다.

  • 작성자 13.02.25 19:24

    지금은 본 카페에 계시지 않지만, <'봉행'님의 도표>를 프린트 하셔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드려다 보십시오. 기가 막힌 도표입니다. 그 도표가. 그 도표가 바로 사념처의 구조이거든요. 거기에서 어떻게 오온이 연기되는 것인가?와 그러한 쌍카라들을 제거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어렵습니다.

  • 작성자 13.02.25 19:26

    '둑카'님께서 반복하여 <아자땅과 바히다>를 물으시는데, 그 도표에 적혀있다니까요. 그 도표에.

  • 작성자 13.02.25 19:32

    '그 도표'가

    .........<생로병사 우울, 비탄, 괴로움, 번민, 절망>의 집과 '그 멸'이라는 것들을

    설명하고 있다고 제가 말하는 이유도, 부처님께서 '그렇게 설명'하셨기 때문. '사념처의 구조'는 정말 묘한 구조입니다. 둘 씩 짝지어 보세요. <신과 수> 그리고 <심과 법>. 그리고 그 두 뭉텡이를 잘 비교해 보세요.

  • 작성자 13.02.25 19:44

    심행이 없는데도 신행이 성립할 수 있겠습니까? <계(다투)를 조건으로 산냐>가 연기되지 않았는데도 '심행'이 성립할 수 있겠습니까? <계(다투)를 조건으로 견(見)>이 연기되지 않았는데도 '신행'이 성립할 수 있겠습니까? <계(다투)를 조건으로 위딱까>가 연기되지 않았는데도 '어행'이 성립할 수 있겠습니까?

    -------------------------------------------

    중생들이 육육법의 흐름을 따라가며 끊임 없이 <나의 것이다, 나다, 나의 자아다>라고 아누빠사나(=見)하였기 떄문에 '유신(有身, 지금 현재의 이 몸뚱아리, =오취온, =苦蘊)'이라는 '신행(身行)'이 성립한 것이기에 <위빠사나 하라!>는 것인데,

  • 작성자 13.02.25 19:48

    그러한 <유신견(有身見)의 멸(滅)>이 <사실상의 유신(有身)의 멸(滅)>이라는 점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 과정에 대한 부처님의 설명 중에 '촉'이라는 것이 설해지기에 어려운 것입니다. '촉'을 해결하지 못하면 <촉수상사 사무색음>을 해결하지 못한 것입니다. 임시적인(=찰라적인) 사라짐을 보아서 무엇에 쓰시는 것입니까?

  • 13.02.25 21:29

    아위자님의 말씀은, 부처님의 말씀인 사념처에서 안으로가 고의 멸이고 고멸의 집이며, 밖으로는 고의 집이고 고멸의 멸이라는 말씀인가요?

  • 작성자 13.02.25 23:12

    '둑카'님 때문에 '아자땅 바히라'를 또 다시 한 번 더 설명하여야 할 것 같군요. 다시 설명해 보아도 같은 이야기인데. 벌써 여러 번 반복된 것이라서 ..................제 견해를 반복적으로 밝히는 것보다는 비판 받고 보다 더 경전에 가까운 답을 얻고 싶은 소망인데...........

  • 13.02.25 23:23

    '저'때문에 다시 한 번 더 설명하여야 할 수고는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확인'차 질문한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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