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구철원시가지를 하나하나 돌아보기로 했 는데 어디부터 안내해주시겠습니까? 구철원이라고 하면 신철원이 있다는 얘기가 될터인 데... 철원을 처음 찾아가는 사람에겐 어디가 철원인지 혼 돈될 정도로 그 이름이 분단으로 산산이 흩어진 동 네이다. 구철원은 현재 민통선안에 숨죽인 채로 누 워있고, 새로 건설된 철원은 갈말읍에 있다. 그러나 군청등 관공서를 제외하면 철원의 실제 중심은 누가 뭐래도 동송읍이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철원자 체가 북과 남으로 갈라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분 단으로 이렇게 산산 조각난 동네도 없을 것이다. 구철원시가지는 한국전쟁때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상태로 남아 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뒤에 재건 축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남아 있다. 때문에 구철원시가지터는 근대도 시건축의 살아있는 전시장이 되었다. 특히 철원 제2 금융조합터와 농산물 검사소, 얼음창고, 철원 제사 공장터와 노동당사, 철원제일감리교회, 승일교등 현 재 그 잔해가 남아 있는 건물들을 중심으로 하나하 나 살펴보기로 하자 오늘은 우선 철원역에서부터 출발해보자. 철원의 민통선 관광코스에서 철원역은 보통 제외되 기 십상이다. 월정리역 만큼 볼거리가 없는 것이 그 이유일텐데, 철원역의 폐허야말로 전쟁의 상처를 더 아리게 전해주니, 월정리역이 보이는 것과의 만남이 면 철원역은 보이지 않는 것과의 만남이다. 철원역 은 월정리역에서 노동당사로 가다가 구철원시가지 로 꺾어지는 즈음의 지뢰밭 뒤에 위치해 있다. 용산역이 경원선의 시작이면 철원역은 경원선의 중 심역이다. 용산역으로부터 갈라져 한강전철을 따라 서빙고 왕십리 의정부 동두천을 거쳐 철원으로 이어 진다. 용산에서 원산까지 긴 여정을 15절의 절가로 그리고 있는 '경원철도가'는 경원선의 경쾌한 여정 뿐 아니라 당시의 풍광을 손에 잡히듯 그려주고 있 다.
한여울의 철교를 얼른 건느니 전곡리의 정거장도 등에 버렸고 연천대광 두정거장 잠간 거치니 철원색의 번화함이 눈을 흐리네.
철원색이라 일컬을 만큼 철원은 경원선에서 가장 번 화한 곳 중 하나였다. 현재 노동당사가 있는 관전리 에서 18세기부터 2일과 7일 열리던 철원 장은 인근 에서 최대의 시장으로 1930년대에는 거래액이 130 만원을 넘었다. 130만원을 지금 우리의 시세로 감 잡을 수 없으니 예를 하나들면 일제가 미국인 모스 로부터 경인선을 사들인 가격이 180만원이었다. 때 문에 철원장은 전국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시장이었 다. 그러나 이러한 시장의 풍요함은 식민지 지배에 의해 각팍한 빈부의 분열로 심화되어 간다. 동아일보 1931년 4월25일자에는 당시 궁농의 신세 를 다음처럼 묘사하고 있다. '조선소야전 시멘트공장이 있는 천내리에 모여든 궁 농민이 3월 초순부터 지금까지 60여호가 된다. 소 야전 시멘트공장이 있는 곳이라 행여나 공장에서 풀 칠이라도 할까하여 자꾸자꾸 모여드는데 그들은 오 도가도 못하는 중이다' 몰락 한 농민이 공장주변으로 몰려들어 노동자가 되 는 것이 자본주의의 역사지만 우리의 경우엔 수탈만 있을 뿐 자본주의적 투자가 없었다. 모든 부가 한국 에 투자되는 대신 일본으로 직접 빠져나갔기 때문이 다. 그 때문에 갈 곳 없어진 사람들이 급증하니, 이들 이 빈민이다. 1920년대 일본에서는 빈민의 규정이 월수입 20원인 자였다. 이런 기준을 조선에 적용하 면 당시 조선인은 90%이상이 빈민이었다. 소작농은 12원, 운 좋게 공장에 취직한 노동자조차도 16원 이 었다. 그러니 도시나 군에서 도저히 생활할 수 없어 원시 인의 상태로 돌아간 화전민, 움막에 사는 토막민, 걸 인, 부랑아등의 생활은 생활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이들의 주거환경은 '풀을 베어서 지붕을 덮었으나 바람과 비에 부대껴서 퇴폐 하여지고' 영락없이 선 사유적의 움집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토기대신 양은냄비 하나가 화덕에 걸쳐져 있는 것이 다른 점 이었다. 일제는 자신들의 침략적 정책으로 생겨난 이들을 한번 더 착취하게 되는데 그중 가장 큰 사업 이 바로 철도공사였다. 철원역에서 출발하는 금강산 철도 또한 다른 철도와 마찬가지로 이들 민중들의 수탈로 건설된 철도였다. 금강산 철도에 대해서도 얘기해주시죠. 철원역사내에 있었던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가 운영한 철도이다. 당시 역무원이었던 엄영섭씨의 증언에 따르면 1921년 착공하여 26년까지 창도까지 기차철도로 운행되었다. 철도를 부설한 회사는 철춘철도주식회 사로 일본인이 운영하는 회사였다. 이 철도는 당시 일본이 창도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유화철流化鐵의 지하자원을 흥남의 제련소를 경유하여 일본으로 반 출할 목적으로 한 운송수단의 일환으로 21년부터 26년까지 6년동안 주민들의 강제노력동원과 중국 인들을 고용하여 철원역으로부터 창도역까지 철로 를 부설하고 당시에는 기차철도를 운송수단으로 운 행해 왔다. 그후 일제는 1926년부터 1931년 7월1 일까지 창도로부터 내금강까지(50km)철로를 연장 부설하고 전기철도로 대체하면서 국내외인들의 금 강산관광과 자원수탈등을 병행하여 1945년 해방전 까지 운행하였다. 1936년부터 금강산전기철도주식 회사가 운영해오던 운영권을 1942년1월1일부로 경 성전기주식회사가 관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창도광산에서 유화철이 아닌 중정석을 수탈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중정석은 석고와 비슷하나 진공관, 광학용 렌즈, 화 학약품, 제지등에 용도가 많아 1924년부터 광산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 질이 세계 5위 안에 들어 지 금도 북에선 중요한 수출품중의 하나이다. 한편 한국철도사3에 따르면 1931년 전기철도로 전 환한 후 전력을 화천댐 발전소에서 충당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화천댐은 1944년에 완공된 댐이니 사 실과 맞지 않는다. 1934년 조선송전주식회사가 공동출자에 의해 설립 되는데 예정됐던 경성전기가 빠지면서 금강산전철 이 7%의 지분을 가지고 참여한다. 조선송전은 장진 강~평양간 송전간선과 평양~경성간 송전간선을 완 공하여 장진강수전주식회사에서 15만kw의 전기를 구입해 서선합동전기회사와 경성전기회사에 각각 반씩을 공급하였다. 경성전기는 당시의 배전체계에 서 중부지역을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금강산철도는 경성전기로부터 전력을 공급받았을 것이다. 1931 년 일제는 '발전송전망 계획'에 따라 조선의 전기사 업에 대한 통제를 시작한다. 처음엔 발전과 배전사 이의 송전선을 국영으로하여 발전,송전,배전사업 전 체를 통제하고자 했으나 막대한 발전소 건설비를 조 선총독부가 감당할만한 예산이 없었기에 민영에 의 한 전기사업을 적극지원하면서 전력사업에 대한 통 제는 배전사업을 통해 관철시키고 있었다. 일제는 1 차통제때부터 배전은 전국을 4개지역으로 나누어 서선합동전기회사가 서선지역을, 남선합동전기회 사가 남선지역을, 북선합동전기회사가 북선지역을 경선전기회사가 중부지역의 배전을 담당하는 체계 로 기존의 배전을 담당하고 있던 전기회사들의 통폐 합을 이루어갔다. 경성전기의 경우 1942년 통합이 완료되는데 금강산전철이 이때 경성으로 흡수된 것 이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으로 전쟁이 확대되어 전 력에 대한 필요성이 극대화되자 국가의 전면적 통제 형태로 전력통제가 강화된다. 1942년 경성전기가 금강산전철을 인수한 것은 일제의 전력통제정책의 결과였다. 이미 이시기 일본에서는 전력의 국가통제가 마무리 된 상태로 조선에 있어서도 전쟁확대에 따라 군수공 업과 직결된 전력에 대한 통제가 불가피해짐에 따라 1939년 10월 전력조정령(칙령708호)이 공포되었 다. 이로써 조선총독이 전력의 수급에 관한 일체의 명령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일본이 조선민중을 착취하여 건설하고, 그나마 민족 자본이 힘을모아 운영하고자 했던 금강산철도는 일 제의 가혹한 전시통제정책에 의해 결국 실패하고 만 다. 총독부가 키운 군수산업과 연결된 독점재벌에 의해 파행화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가 금강산전철에 서도 되풀이되게 되었다. 금강산전철은 어디를 경유하게 되어 있었나 24년 8월1일 개통 당시에는 철원과 김화 사이만 승 객을 운송했고 나머지는 구간은 창도 광산을 수탈하 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1931년 7월 1일이 되 어서야 내금강까지의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조선시 대 금강산 유람기에 등장하는 김화, 창도, 단발령, 내 금강의 노선이 그대로 적용된 것은 금강산 전철이 협궤 열차로 곡선 반경이 작아서 기존 지형을 활용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 4번을 왕복했고, 해방 과 더불어 운행이 중단되었다. 철원역에서 구시가지 쪽으로 갈라져 노동당사 가까이에 있는 사요역터를 지나고 월하리를 지나다 보면 작은 교각만 남아 있 는 작은 하천이 보인다. 여기서 동철원역과 동송역 터를 지나 한참을 가면 민통선 관광객들이 거쳐가는 제 2 검문소 앞 대위리에 '금강산 가는 철길'이라고 쓰인 대위교가 보인다. 검문소를 지나 직진하며 계 속 노반을 따라가면 관광버스는 좌회전하여 제 2 갱 도로 향하고, 금강선은 직진하여 양지리, 정연리로 이어진다. 이곳에 출입하려면 따로 군부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정연리 길을 따라가다 보면 왼쪽에 낡 은 건물터가 파괴된 채 넝쿨에 덮여 있는데 이것이 철원금융조합 정연리 지소의 금고방이다. 거기서 지뢰밭이 있는 숲의 군용도로를 지나면 한탄 강을 건너는 다리를 만난다. 여기서 오른쪽을 보면 '금강산 가던 철길' 이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금강 선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정연리 철교이다. 다시 검문 소를 통과하면 면회객들만 들어올 수 있는 전선휴게 소가 있다. 부부가 오랫동안 농사 지어가며 운영해 온 식당인데 근처 부대에 있는 장병들에겐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장소로 남아 있다. 이곳에서 계속 이어 지는 길이 이전 금강선의 노반이다. 왼쪽으로는 남 방한계선의 콘크리트 장벽이 이어지고 오른쪽으로 는 중간중간 검은 현무암이 널려 있는 벌판이 펼쳐 진다. 민들레 벌판이다. 민들레가 많아서가 아니라 현무암 검은 돌을 뜻하는 먹돌이 멍돌로, 멍돌이 민 들로, 민들이 민들레로 바뀌어 전해진 말이라 한다. 좀더 가면 백골부대 초소가 나온다. 계속가면 유곡 리. 금강선 노반은 유곡리의 철조망 앞에서 끊긴다. 여기서 암정리를 지나 너른벌판의 광삼리와 금강산 을 구경하기 위해 아침에 떠나는 동네라는 아침리로 이어진다. 유곡리에서 보면 북방한계선 너머 시선을 압도하는 우람한 산이 나타난다. 오성산이다. 오성산이라면 한국전쟁당시에 유명한 격전지 아닙 니까? 밴플리트의 김화공세는 바로 이산을 뺏기 위한 작전 이었다. 만일 우리가 1952년 이 철길을 지나왔다면 한국전쟁사상 가장 처절한 전장터인 철의 삼각지대 한가운데를 지나온 것이다. 백마고지이후 미군은 엄 청난 공세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패전으로 기울어 갔다. 이 기간중 미국의 주요 신문과 언론은 '한국전 선에서 명분도 없는 싸움에 미군이 쓰러져 가고 있 다'고 연일 보도하고 있었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아 이젠하워가 52년 12월 2일 한국을 방문한다. 이 방문은 현재까지 한국에 끼치고 있는 미국의 영 향력에 결정적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1977년 2월 27일 미국무성이 공개한 미기밀문서에 따르면 그의 목적은 겉으로는 전쟁을 하루빨리 종결하는 것이었 지만, 속으로는 핵무기 사용을 검토하기 위한 것이 었다. 이른바 아이젠하워의 '확전에 의한 우위 확보 전략' 에 의한 것인데, 이 이론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 덜레스 형제이다. 77년 4월 11일 미국무성이 해제한 기밀외교문서에 의하면 존 덜레스는 국무장관으로 이미 전쟁 전에 한국을 방문하여 북의 위협을 알면서도 '전쟁이 일 어날 기미가 없다'고 하여 국군이 무방비상태가 되 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맥아더 와 함께 미군참전과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침공을 제일먼저 주장했던 인물이다. 동생 앨런 덜레스는 1947년 CIA를 창설한 인물로 두형제는 애치슨 국무 장관과 마찬가지로 월가에서 백악관으로 옮겨온 최 초의 은행가, 변호사들 집단의 일부였다. 이른바 '시 빌리언'그룹이다. 이들의 행보 하나하나는 2차대전 후에 새로이 등장할 세계체제에 기업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묻고 있는 듯이 보였다. 존 덜레스는 전 면 전쟁에는 못 미치는 전역戰域전쟁에 전술핵무기 를 처음으로 배치한 장본인이었는데 그는 이를 아이 크 행정부의 뉴룩( new look 새로운 면모)정책이라 붙였다. 앨런 덜레스는 CIA의 은밀한 개입을 통해 확전을 부추겼다. 한국전쟁 기간중 이들의 부상은 이후 미국군부와 시 빌리언 그룹간의 지속적인 갈등으로 나타났다. 군부 를 중심으로 한 공화당이 '전투'에서 과격하다면 시 빌리언들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은 전략에서 '잔 인'했다. 한국전쟁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전선이 교 착된 채 한반도가 파괴되기를 기다렸던 것은 맥아더 와 같은 군부가 아니라 덜레스와 트루먼 같은 시빌 리언 그룹이었다. 덜레스가 미국에서 갖는 지위는 수도 워싱턴에 도착하면 실감한다. 워싱턴의 두 개 국제공항 중 하나가 존 포스트 덜레 스 공항이다. 어떻게 대통령도 아닌 국무장관에게 이런 권력이 생길 수 있었던 걸까? 맥아더는 당장 이 기는데 관심이 있었고, 덜레스는 100년 후까지 미국 의 이익을 창출할 체제를 마련하는데 관심이 있었 다. 미국을 움직이는 국가기획의 한 축은 덜레스형 제의 기획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한반도에서 그 기획은 어떻게 적용되었을까? 그것은 분단이었 다. 때문에 승리만을 추구한 맥아더는 트루먼에 의 해 해임되어야 했고, 한국전쟁은 분단으로 고착화되 었다. 53년 10월 정전협정을 무효화시킨 한미상호 방위조약의 서명자도 덜레스였다는 사실은 많은 것 을 상징한다. 백악관과 군부가 화해했던 것은 부시대통령의 걸프 전 당시말고는 한번도 없다. 소위 핵전략가와 재래 전략가의 대립은 미국 군부 읽기의 핵심이다. 현재 의 럼스펠트 국방장관은 핵옹호론자이고 파월은 재 래전 옹호론자이다. 전통적으로 무모한 전쟁을 시도 한 것은 재래전을 옹호하는 군부보다 핵전이나 정치 적 이유를 앞세우는 시빌리언 그룹쪽이었다. 한반도 에서 남북간의 연방국가건립 운동이 급진전되게 되 면 미국은 비핵지대화 선언이나 재래식 군비통제 협 상등 한반도를 완전히 중립화하기 위한 주변국가들 의 요구에 어떻게든 대답해야 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 일본이 장래에 한반도 에 군사력을 끌어들이지 않기로 공식 서약할 경우 한반도에서 잔여 군사력을 철수해야 하고, 그러면 미국과 중국은 동시에 이남과 이북에 각각 맺은 상 호안보조약을 끝낼 수 있게 된다. 한반도에는 어느 때 못지 않은 화해의 분위기가 무 르익어 가면서 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 하자는 구 호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나의 생각으로 는 평화의 샴페인을 터트리기 전에 할 일이 있다. 비 무장지대를 비핵지대화하는 것이다. 91년에 걸프전 이후 부시는 재래전중심으로 치룬 전쟁에서의 자신 감을 기반으로 핵전략가들의 입지를 축소시키고 남 북이 비핵화선언을 하는데 강력한 역할을 했다. 그 리고 미군이 한반도에 배치한 핵을 철수했다는 발표 를 했다. 그러나 비핵화는 핵전쟁의 위협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못한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핵무기들 을 발사하겠다고 위협하면 하루아침에 한반도는 핵 전장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중심으 로 한 비핵지대화 선언만이 이 지대에서의 핵무기의 배치, 훈련, 발사, 이동등을 통제할 수 있다. 비핵지대를 설정하는 방법은 비무장지대를 중심으 로 한 원형과 타원형이 있는데, 원형은 비무장지대 를 중심으로 지름 4000km의 원형지역으로 설정하 는 것이다. 이는 남, 북, 대만, 일본을 주로 포함하므 로 정작 중요한 미국이 빠지게 된다. 따라서 알래스 카와 대만까지를 포함하는 타원형지대를 설정하면 원형보다 더 진보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한반도와 아시아 평화의 실질적 위협은 NMD/TMD와 더불어 핵 문제이다. 이중 NMD는 재래전과 핵전 전략가들의 이해가 합 치하는 사안인데 비해, 핵문제는 파월 같은 재래전 중심론자들이 이해를 달리하는 사안이다. NMD보 다 핵문제가 빈틈이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무장 지대를 기점으로 한 극동아시아 비핵지대화는 미국 의 핵옹호론자들에게 큰 갈등을 안겨줄 것이다. 백 악관을 중심으로 한 핵전략가들은 재래전을 옹호하 는 군부를 지지세력으로 만드는데 50년을 노력했지 만 결국 실패했기 때문이다. 철원군에서는 일찍부터 금강선을 복원하기 위한 계 획으로 부산했다. 아무리 보수적인 사람도 금강산 관광선에 타기만 하면 햇볕정책의 지지자가 되더라 는 정부관계자의 말이나, 경의선 복원과 백두산-한 라산 교차관광등 남북교류의 거개가 관광인 것을 보 면, 관광은 정치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참여 한다는 점에서도 제법 힘있는 정치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곳에 정연리역과 유곡리역이 지어지고 금강 산 철도가 오가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관광의 주 제로 삼을 것인가? 통일, 평화, 핵 이 모두를 총체적 연관속에서 보는 지혜가 필요하나 중심고리는 있을 터이다. 그것은 핵이다. 조선후기 금강산 유람기의 국문가사들은 거의 모두 처음을 인생무상을 한탄하 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훌훌 털고 떠나 단발령 고 개에 이르러서 내금강이 한눈에 들어오면 '불국정토 가 다름 아닌 여기로구나' 하고 발길을 재촉한다. 그 래서 금강산의 봉우리와 계곡들은 모두 불국정토의 궁궐이 되고 도피안의 귀의처가 된다. 화려강산이란 말이 금강산처럼 어울리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화 려는 눈부신 아름다움이니 역사적 짐을 다 털지도 못한 채 과연 그 눈부신 아름다움을 제대로 완상할 수 있겠는가? 금강산호와는 다른 기대가 금강산철 도에 생기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