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사범 면회를 하면서 위로하기보다 격려받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사진은 1988년 12월 광주교도소에서 석방되는 차성환과 김영을 환영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 |
직분상 여기저기 방문할 곳이 많다. 가정이나 병원 등을 찾아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만난다. 앰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 일을 맡으면서 시국사범 면회를 위해 감옥에도 잦은 발걸음을 했다. 마태오복음 25장의 예수님 권고가 아니더라도 궁벽한 처지의 사람들을 찾아보는 것은 아름다운 습속이기도 할 것이다.
쿠데타정권 시절부터 감옥으로 젊은이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대부분의 경우 위로하러 찾아갔던 내가 도리어 격려를 받고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한번은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다가 부산 주례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정인숙 양을 만났더니 자신의 처지는 잊은 채 오히려 내 신변에 대한 염려와 밖에서의 지속적인 활동을 주문하였다.
시국사범들의 면회는 대체로 직계가족에 한하여 한 달에 한 번으로 제한되어 있다. 가족 외에는 소위 특별면회라 하여 정보기관에 연락하면 법무부를 통해서 교도소에 통지된다. 그런 절차를 밟아 찾아가면 교도소장의 재량에 따라 소장실이나 보안과장 방에서 차도 한 잔 마시며 30분 정도 면회할 수 있다. 때에 따라서는 1시간 정도는 묵인해 주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유명 인사들의 경우는 더 많은 편의가 제공되지만 그들은 그런 특혜(?)마저 거부하고 일반 수형자들 같은 대우를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해 겨울, 눈이 내리던 날 안동교소도로 문익환 목사를 찾아갔더니 일반 접견장에서 만나자고 했다. 우리는 창살의 양편에서 유리를 사이에 둔 채 손바닥 넷을 맞대고 기도를 했다. 철창 속에 갇힌 그분은 오히려 나의 건강과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하는 이들의 안위를 위해 20분이 넘도록 기도했다. 또 그분 스스로 감옥 안에서 체득한 건강비법을 알려 주기도 했다. 경주교도소에서 복역하던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의 김은숙 양을 찾았을 땐 "저 지금 불어를 공부하고 있어요, 일어는 끝냈고요. 수감자들의 작품전에서도 서예부문에 입선했어요"라고 했다. 나는 활기찬 그의 감옥생활을 보며 "너는 대학을 다니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반대로 감옥생활을 어렵게 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김영(소설가 김하기)이 단연 으뜸일 것이다. 그는 부산대학교 철학과에 재학 중 시국사범으로 강제로 군에 끌려갔고 무장 탈영을 하였다가 영어의 몸이 되었다. 내가 찾아간 것은 그가 대전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였다. 마침 소장과 보안과장이 부산구치소를 거쳐간 분들이라 반갑게 인사를 하고 보안과장 방으로 갔는데 "오늘은 면회를 포기하고 다음에 기회를 잡자"는 것이었다. 멀리서 온 손님에게 어떻게 이런 대접이 있을 수 있느냐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나는 그들의 저의가 궁금해서 더욱 물러설 수가 없었다. 내가 버티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김영을 데려왔는데, 마치 그림자를 보는 듯했다. 몰골은 물론 어기적거리는 걸음걸이며 말은 발음마저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나 울화가 치밀던지 옆에 앉은 교회사의 멱살을 거머쥐고 감옥에 가뒀으면 그만이지 이게 사람꼴이냐고 호통을 쳤다.
그는 교도소의 처우문제를 놓고 데모를 모의하다 들통이 나, 벌방에서 개밥을 먹은 지 일 주일이 넘었다고 했다. 개밥이란 손발이 뒤로 묶인 채 입으로 밥을 먹는 것을 말한다. 아무튼 김영은 어디를 가든 가는 곳마다 말썽(?)을 일으켰다. 그는 출소해서는 1997년 만주로 여행을 갔다가 취중에 두만강을 건넜고 거기서 도망쳐 와서 다시 재판을 받으며 고생을 했다. 지금이야 중견 작가로 이름이 높지만 한때 꽤나 주변에 걱정을 끼쳤다.
또 기억에 많이 남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은 차성환이다. 광주교도소로 찾아갔더니 내게 한마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혼자서 한 시간을 이야기했다. 김영과 마찬가지로 보안사범이어서, 주위 변호사들이 신분에 불이익이 될까 염려되니 면회를 삼가는 게 좋겠다고 충고를 했다. 나는 그러기에 면회가 더 필요하다고 고집을 피웠고 끝내 그를 찾았다. 당시 차성환은 9년이 넘는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고 있었는데, 나는 이제 끝날 때가 되었으니 준비하라고 했다. 그는 풀려나자 곧 결혼을 했고 딸 셋을 낳아 기르며 시민으로서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민주공원 관장을 맡았다가 얼마 전에 임기를 마쳤다.
임수경의 면회는 아주 즐거웠다. 면회하는 날 부산대학교 넉넉한터에서 학생들에게 통일꽃을 나눠 주고 청주교도소의 임수경을 찾았다. 본성대로 발랄하게 조금은 깡충거리며 나를 맞았다. 군사분계선을 넘어올 때 동행했던 문규현 신부의 안부를 묻고는 통일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론을 펼치면서 시종 활기 띤 대화를 나누었다. 마치 넉넉한터에서 학생들에게 나눠 주던 빨간 장미송이 같았다.
이렇게 갇혀 살아야 하는 젊은이들, 과연 그들만의 잘못일까. 오히려 기성인들이 옥살이를 하고 그들은 공부를 해야 옳지 않았을까. 60년대부터 억울한 수형생활을 한 이들이 얼마나 될까. 나는 나중에 일로써 10여 건의 조작간첩 사건을 살펴 볼 기회가 있었다. 그 사건들 하나하나를 살피면서 우리 사회가 어떻게 이리도 부끄러운 짓을 했는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람은 두 생을 살지 못한다. 너나없이 한 생만이 허여된 것인데 신념 때문에 혹은 약간 앞선 주장들 때문에, 또는 전혀 터무니없는 조작들로 황금과 같은 세월을 옥에서 보내다니!
루가복음 15장에는 99마리의 양을 놔둔 채 잃은 1마리를 찾아나서는 비유가 있다.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19세기 이탈리아의 요한 보스코 신부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느날 보스코 신부는 소년원생 100여 명을 데리고 소풍을 다녀오겠다고 하니 소장은 정신병원에나 가보라고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끈질긴 요구에 못 이겨 당국은 결국 모험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년원생 네 명이 도망을 쳤다. 그날 신부는 밤이 깊도록 대문을 열고 네 명의 소년을 기다렸다. 4시간 뒤 네 명의 소년은 거짓말 같이 돌아왔다. 교도 방법을 논의하기보다 사람에 대한 대접, 신뢰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예화이다.
인간 본연의 귀함보다 겉보기만 보는 우리 사회의 사람 보는 잘못된 관행도 이제 바뀌어야겠다. 특히 높은 벽을 둘러치고 사회로부터 격리된 곳에서 인권문제가 가끔씩 불거져 나오곤 하는데, 이제는 우리의 교정행정도 격리에 급급하지 말고 교화에 치중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첫댓글 잘 봤습니다. 예전에 비하면 교도소도 좋아졌다지만 아직도 인권의 사각지대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