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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민 자
작품 노트
오늘 지쳐있는 내 삶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내일은 따뜻하겠지.
내가 살아야 할 이유
임 민 자
창가를 바라보니 무거운 보따리를 낑낑대며 병원 언덕을 올라오는 동생이 보였다. 영등포에서 지하철타고 의정부까지 한 시간 남짓, 또 병원 오는 마을버스를 탔을 것이다. 삼복더위에 숨을 헐떡이며 병실에 들어온 동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두 눈에 이슬이 가득 고인다.
“언니가 오래 살아야 강원도 옥수수를 맛보는데... 제발 아프지 마”
병원에 입원 할 때마다 매번 여동생은 찾아온다. 작년 올해로 뜻하지 않게 입원을 자주하는 터라 이번만은 알리지 안했다. 며칠 전 전화하다 힘없는 내목소리에 동생은 눈치 채고 말았다.
손이 벌겋도록 들고 온 보따리에서 동생은 주섬주섬 꺼내 놓는다. 내가 좋아하는 장아찌와 젓갈, 먹음직스런 열무김치 보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간다. 오랜 병원 생활로 매슥대는 속을 보리밥에 열무김치 넣고 얼큰한 고추장에다 섞어 쓱쓱 비벼 먹으면 가라 안을 것 같았다.
동생은 또 다른 보따리를 풀었다. 마술 상자를 열은 것처럼 색색으로 수놓은 과일과 계란말이는 꽃잎을 말아 놓은 듯 아까워 먹을 수가 없었다.
여러 자식 뒷바라지도 힘든데 새벽부터 부산하게 음식을 준비한 동생에게 할 말을 잃었다. 또 가방을 부스럭대더니 흰 봉투를 꺼내 내 손에 쥐어 준다. 완강히 뿌리치는 나와 실랑이를 벌이다 베게 밑에 슬며시 밀어 넣었다. 보조의자에 앉아 땀을 훔치는 시늉을 하면서 동생은 고개를 돌려 수건으로 눈가를 찍어낸다.
“언니는 방사선 치료만 받고 나가면 예전처럼 건강해져...”
두 눈이 붉어진 동생의 작고 여린 손을 잡고 다독였다.
나를 엄마처럼 의지하며 살아가는 동생이다. 우리 자매는 부부싸움이나 속상한 일이 있으면 자주 하던 전화도 뚝 끊는다. 서로에게 짐이 되고 마음 아픈 일은 피하고 있다.
우리 자매는 어린 시절 부부싸움으로 자주 집을 비우던 어머니에게 정을 못 붙이고 자랐다. 개구쟁이 오빠들 틈에서 늘 구박받던 동생이었다. 구박받을 때마다 편이 되어주던 나를 지금까지 친정엄마처럼 의지하고 있다.
동생은 쉰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색다른 물건이나 음식이 있으면 제일 먼저 나를 챙긴다. 계절 따라 외출복과 구두까지 내 취향에 맞추어 보낸다. 자신도 입어보지 못한 비싼 옷을 보내놓고 몇 번이나 전화로 확인을 한다. 나는 선물을 받고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생을 나무란다. 동생은 성의를 무시한다고 서운해 했다. 어려운 형편에 보내 온 옷을 입을 때마다 가시처럼 내 가슴을 콕콕 찌른다.
두 어깨가 축 처져 병실 문을 나서는 동생의 뒷모습을 보며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또 한 가지 생겼다.
2015년7월
민들레
임 민 자
언제부터인지 내게는 민들레 말린 것이 한 봉지가 있었다. 약을 내기에는 너무 적어 숙제처럼 남겨 두었다. 그런데 그 것을 해결 할 기회가 찾아왔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이었다. 큰 숙이와 작은 숙이를 앞세우고 오랫동안 남편의 병간호를 하다 잠시 내려 온 회원을 찾아갔다. 그녀는 핼쑥한 얼굴로 잠시 일하던 손을 멈추고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만난 우리에게 줄게 없다며 밭에 흐드러진 딸기를 따가라고 성화를 해댔다.
운동장 같은 밭을 그녀의 야무진 손이 새벽이슬 맞으며 알뜰히 가꾸어 놓았는데, 남편이 아픈 탓으로 지금은 나간 집처럼 잡초만 무성하다.
콘테이너에 틀어놓은 선풍기로 땀을 식히고 있는 두 숙이를 딸기 밭으로 몰고 갔다. 시기를 놓쳐 따지 못한 딸기는 손끝만 닿아도 흐물흐물 거렸다. 나는 잠시 허리를 펴는 순간 눈에 번쩍 띄는 게 있었다. 밭둑에 널려있는 민들레였다. 더구나 노란 꽃피는 민들레보다 귀하다는 흰 꽃이 눈송이처럼 날리고 있었다. 밭주인은 잡초 속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귀한 민들레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처지였다. 나보고 필요하면 뽑지는 말고 잎만 가져가란다. 민들레도 욕심이 났지만 핑계 삼아 무성한 잡초를 뽑아주면 그녀의 근심을 덜어 줄 것 같았다.
딸기를 따던 작은 숙이는 낫질하는 내가 어설퍼 보였던지 일손을 바꾸자고 했다. 그러지 안아도 낫이 잘 안 들어 힘들었는데 손을 바꾸자는 말에 ‘얼씨구나!’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땀을 뻘뻘 흘리며 민들레를 베는 작은 숙이 뒤를 따라가며 나는 풀을 뽑았다. 쨍쨍 내리쬐는 날씨에 혼자 뽑기 힘든 잡초를 이야기 나누며 매는 밭주인 손길에 힘이 넘쳐났다.
숨을 몰아쉬며 씩씩대는 작은 숙이 얼굴을 보니 곧 숨이 넘어 갈 것 같았다. 나는 베어 놓은 민들레를 큰 봉지에 꾹꾹 누르고 큰 숙이는 묶었다. 여러 개의 봉지가 불룩하도록 작은 숙이는 밭고랑을 갈고 있는 암소처럼 헉헉대고 있었다.
밭고랑에 핀 민들레를 다 베어 낸 작은 숙이 얼굴은 농익은 토마토를 닮아가고 있었다. 민들레를 조금만 베어 갈 줄 알고 손을 바꾸었던 작은 숙이는 집에 가자고 재촉을 했다. 나는 욕심이 생겨 밭 입구에 민들레도 베고 싶다는 말에 작은 숙이는 낫을 얼른 놓았다. 그러면서 다음에 머위 베러 올 때 마저 하자며 손을 털었다.
집에 오는 차 안에서 속아서 손을 바꾸었다고 아이처럼 투정부리는 작은 숙이를 보며 한참을 모두 깔깔댔다. 나는 민들레 봉지가 넘칠 때마다 흙 범벅이 된 큰 숙이와 작은 숙이 손이 얼마나 예쁘고 고마운지 뽀뽀라도 해주고 싶었다.
잡초로 무성했던 밭고랑이 훤한 길처럼 들어났다며 배웅하는 그녀의 환한 얼굴에 내 마음은 뿌듯해 졌다. 잡초 때문에 근심 가득했던 그녀 밭에 올 여름 블루베리가 주렁주렁 달렸으면 좋겠다.
며칠이 지나도 밭 입구에 널브러진 민들레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나는 작은 숙이가 밭주인에게 머위 베러 간다는 말이 떠올라 전화를 했다. 그렇게 머위 반찬을 좋아한다던 작은 숙이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시간이 없다고 한 마디로 자른다. 거절하는 작은 숙이 말에 서운하기 보다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숙이야! 네가 베어 준 민들레를 먹고 내 머리에 흰 꽃이 만발하도록 건강하게 살게.
2016년6월
설빔
임 민 자
동생들 설빔 때문에 나는 구박덩이 이였다.
명절이 제일 싫었던 어린 시절이었다. 이웃에서는 명절 준비로 부산한데 우리 집은 언제나 텅 빈 것처럼 썰렁했다. 명절이 다가오면 우리 이웃에 있는 방앗간에서는 떡 찌는 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았다. 또 집집마다 풍기는 고소한 냄새가 뱃속에 회까지 꿈틀거려도 우리 남매들은 군침만 삼키고 있었다.
어머니는 명절이 다가오면 부부싸움하고 가출하는 날이 많았다. 또래 아이들은 부모가 오일장에서 사온 설빔입고 골목길을 뽐내고 다녔다. 평소에 골목을 주름잡던 우리 남매들만 무릎이 헤진 바지를 입고 있었다.
명절 아침이면 낡은 옷차림으로 아버지를 따라 큰집으로 제사 지내러 갔다. 신작로를 따라 먼지 펄펄 나는 이십여 분을 걸으면 큰집이 보였다. 대문 밖으로 솔솔 풍기는 음식냄새와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또 큰어머니의 억센 말투에 집안일 돌보는 처녀의 더듬대는 음성까지 들렸다. 우리가 큰집 가까이 가면 담너머로 들리던 명절 아침 풍경이었다.
시골에서 미리 오신 꼬부랑 할머니는 아버지 앞세우고 들어서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슬하에 오 남매를 둔 할머니는 작은 아들인 아버지가 제일 아픈 손가락이었다. 할머니는 내손을 잡고 혀를 차며 눈가를 꼭꼭 찍어내고 있었다.
큰집에는 조카들 삼남매가 있었다. 큰어머니가 준비한 설빔으로 말끔히 차려 입은 조카들을 바라보는 동생들 부러운 눈빛에 나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큰집에 오면 우리를 바라보는 친척들 앞에 늘 주눅이 들었다. 그나마 챙기는 할머니 엉덩이를 우리는 졸졸 따라 다녔다.
차례가 끝나면 집에서 먹지 못했던 색다른 음식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나왔다. 식사를 마친 친척들은 서로 덕담을 나눴다. 덕담을 나누다 동물원에 원숭이처럼 일제히 우리에게 시선이 왔다. 친척들은 측은한 눈빛으로 명절에 참석 못한 어머니를 물어보는 게 제일 견디기 힘들었다. 또 친척들하고 이야기 나누다 아버지 한숨 쉬는 소리가 내 가슴에 천둥소리로 들렸다.
나는 식사를 마치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할머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내 손에 큰어머니 눈치를 보며 음식을 주섬주섬 싸고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시골에서 가져온 누런 광목 보따리를 구석에서 슬며시 꺼냈다. 보따리 속에는 짚으로 엮은 동고리에 계란이 들어 있었다. 정성껏 모아 온 계란과 세면 종이에 둘둘 말은 갱엿에서 할머니의 진한 향기가 배어 나왔다. 할머니는 나에게 부탁을 했다. 아침이 밝으면 하루에 한 알 씩 아버지 머리맡에 계란을 갖다 놀 것을 신신당부하는 할머니 목소리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명절날 한복은 고사하고 새 옷 조차 입을 수 없었던 동생들이 안타까웠다. 나는 아버지의 일터인 사진관을 찾아가 아무리 떼를 써도 못들은 척 했다.
네게는 소원이 있었다. 언젠가 동생들에게 남들처럼 설빔을 해주고 싶었다. 드디어 동생들 설빔을 해 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어머니가 가출하면서 깜빡 잊고 두고 간 금반지 두 돈이 있었다. 어머니에게 야단맞는 것보다 동생들이 설빔 입고 골목에서 뽐내고 다닐 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설렜다.
반지를 팔아 돈을 두둑이 챙긴 나는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집 근처에 있는 오일장보다 상점이 많은 곳에서 옷을 사고 싶었다. 친구와 함께 버스로 삼십 여분을 달려 논산시내에 내렸다. 논산 시내 여러 곳을 구경하면서 동생들이 좋아 할 근사한 옷으로 샀다. 남동생들 보다 항상 마음에 걸렸던 여동생은 화사하고 깜찍한 옷으로 여러 벌을 골랐다. 설날에 새 옷 입고 활짝 웃는 동생들 상상만 해도 어머니에게 야단맞는 것 쯤은 두렵지 않았다.
명절 때면 어깨가 축 처져있던 동생들에게 새 옷을 입혀 놓으니 부자님 도령 부럽지 않았다. 신발을 질질 끌며 아버지 뒤를 쫒아가던 동생들은 한 발 앞서 큰집을 향해 다람쥐처럼 뛰었다. 맛있는 음식보다 조카들에게 새 옷을 맘껏 자랑하고 싶었나 보다.
어머니가 집에 돌아와 반지 팔은 죄로 여러 날 호되게 야단맞았다.
세월이 흘러도 동생들 설빔해 준 것이 내 마음 한 구석에 뿌듯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눈부시도록 고운 한복을 입고 손녀들은 세배를 한다. 세뱃돈 챙기는 손녀들 고사리 손에 어린 시절 내 추억도 복주머니에 함께 넣는다.
2016년2월
수영복
임 민 자
“삼 개월 할부예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며느리 손에 이끌려 수영복 매장에
온 사연이 있다.
작년 휴가 때 둘째 아들 가족과 피서를 떠났다. 며느리가 예약해놓은 곳은TV에서나 가끔 광고로 보았던 ‘오션월드’ 라는 곳이었다. 입구에서부터 모두맨발에 수영복 차림이었다. 내가 수영복을 미처 준비 못한 걸 눈치 챈 며느리는 매장 안으로 안내를 했다.
처음 수영복을 구입한 것은 이십여 년 전 수영장이 있는 온천을 다닐 때이었다. 그때 함께 간 이웃들은 날씬한 몸매에 어울리는 화려한 꽃무늬 수영복을 골랐다. 펑퍼짐한 몸매에 자신 없었던 나만 짙은 검정색에 짧은 치마가 달린 수영복으로 손이 갔다. 내 생각에 앞뒤로 삐져나온 살을 조금은 감출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난생처음 수영복을 입고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영락없는 서커스단에서 통 굴리는 여자와 흡사했다. 나는 벌떡 누워 두발을 번쩍 들고 통 굴리는 시늉을 했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함께 간 이웃들은 탈의실이 들썩이도록 웃었던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예전처럼 자신 없는 몸매에 신경 쓰지 않고 맘에 쏙 드는 수영복을 입고 싶었다. 다양하게 갖추어진 매장 안은 색상도 곱고 살에 닿는 촉감도 야들야들했다. 색상이 맘에 들어 입어보면 곁에서 지켜보던 며느리의 머리채가 흔들렸다. 벗고 입기 힘든 수영복을 여러 번 반복하다보니 매장 아가씨 눈치가 보였다. 그리고 옆에서 말없이 쳐다보던 아들은 연신 하품을 해댔다. 손녀들까지 지루한지 복잡한 매장 안을 돌며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다.
매장에 들어오는 날씬한 여자들은 미리 수영복을 맞추어 놓은 것 같았다. 맘에 드는 색상을 입어보고는 바로 계산대로 향했다. 나만 외톨이처럼 빙빙 돌며 수영복을 찾아내지 못했다. 며느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비가 날갯짓 하는 주홍색 꽃무늬로 골라왔다. 며느리가 찾아낸 수영복은 내가 가장 감추고 싶은 배 부분을 치마처럼 묶을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골라도 눈에 띄지 않았던 수영복을 며느리는 나이와 몸매에 어울리게 찾아냈다. 입어보니 편안하고 불룩 나온 옆구리 살과 뱃살도 어느 정도 감출 수 있었다.
그런데 가격을 보니 입이 딱 벌어져 가슴이 벌렁거렸다. 입어 본 수영복을 만 지락 거리다 슬그머니 놓고 매장 안을 돌며 가격표를 보았다. 저렴한 것도 있는데 내 눈에 차지 않았다.
며느리가 골라 놓은 수영복은 쌀이 세포대가 넘는 액수였다. 간이 조마조마해 망설이고 있는데 내 또래 여자가 계산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삼 개월 할부”
나도 덩달아 카드를 쑥 내밀며 할부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목돈만 생각하고 망설였는데 나누어 낼 방법을 찾아내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내 맘에 쏘옥 드는 수영복을 입고 아들 가족과 물놀이를 하며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집에 와서 다시 입고 거울 앞에 섰다. 비즉비즉 나 온 살들이 또 눈에 거슬린다. 내년을 생각해 이 살들과 전쟁을 해야겠다.
2016년8월
집 타령
임 민 자
“직장 다니며 텃밭 가꾸는 안 사람이 불쌍해 낫으로 고추, 배추 모조리 베어 버릴 거여요”
아침부터 잔뜩 화가 난 아들은 씩씩대며 할머니를 몰아붙이고 휭 하니 나갔다.
어제 새벽에 부산하게 병실을 들랑날랑 하던 할머니, 집에 못 가게 만류하는 아들에게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성화대더니 외출을 나갔었다.
할머니는 아들 내외가 출근하고 나면 굽은 허리를 뒤뚱거리며 텃밭으로 갔다. 골고루 심어놓은 곡식과 야채밭을 풀 한포기 없이 말끔히 가꾸었다. 어느 날 몸을 씻다보니 엉덩이에 콩알만 한 것이 잡혔다. 그런데 별로 통증이 없어 밭고랑에 털썩 주저앉아 매일 김을 맸다. 숨이 목까지 차오르는 더위에 밭고랑에 상처가 쓸려 어느 날 보니 팅팅 부풀어 올랐다. 할머니는 자식들 몰래 치료하다 간식 들고 온 며느리에게 들키고 말았다.
아들에게 이끌려 병원에 도착 했을 때는 이미 고름으로 상처가 가득 차 있었다. 상처를 보자마자 의사는 거침없이 도려냈다. 상처가 얼마나 깊었는지 입원 한 달이 넘도록 치료를 해도 당뇨 때문인지 잠자고 나면 겉옷까지 누렇게 배어 나왔다.
눈만 뜨면 할머니는 집에 못가 안달이 났다. 할머니가 정성껏 가꾼 텃밭에는 고추도 있고, 참깨 들깨, 가정에 필요한 양념을 골고루 심었다고 했다. 또 휴가철에 놀러올 딸내미들을 위해 옥수수와 방울토마토도 있단다. 할머니는 텃밭이야기만 나오면 집 타령이 시작 되었다.
아들 내외가 병원가까이 직장이 있어 아침이면 밑반찬과 윤기가 반지르르한 토마토를 가져왔다. 자식이 가져온 보따리는 뒷전이고 텃밭에 여물어가는 참깨가 걱정이었다. 그리고 말복이 지나면 심어야하는 김장 때문에 몸살을 앓았다.
농사일을 해보지 않은 아들이 깨를 베도 묶을 줄 모른다고 했다. 할머니는 가깝게 지내던 이웃에게 물어보라고 닦달하기 시작했다. 며느리는 쫒아 다니면서 잔소리 해대는 이웃 노인과 남편이 다투었다고 할머니에게 일렀다.
할머니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참깨 베는 시기를 놓칠세라 아들 퇴근 시간이 가까 오면 전화기에 불이 났다. 또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를 따라고 며느리에게 성화를 해댔다. 할머니는 집에 가고 싶다고 안달을 하더니 아침 일찍 외출 허락을 받았다.
해질녘이 되어 돌아 온 할머니는 오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허리 통증 때문에 저녁도 굶은 채 초저녁부터 잠이 들었다.
자식에게는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 속이고 아들 내외가 출근한 틈을 타 텃밭에서 온 종일 있었다고 했다. 그늘에 있어도 이마에 땀이 줄줄 내리는 한낮 더위에 백여 포기 넘는 김장배추를 다 심었다. 그리고 아들이 엉성하게 베어 하우스 바닥에 팽개쳐둔 참깨를 가지런히 묶어 세워 놓았다고 했다.
그 이튿날이 되었다. 출근 전에 들린 아들에게 다리에 쥐가 나고 상처에서 진물이 겉옷을 흥건히 적셨다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아차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들의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병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두 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한 마디 대꾸도 못하는 할머니가 안타까웠다.
먼 산을 바라보고 혼자서 중얼대는 할머니에게 나는 어떻게 위로할지 난감했다.
“서운하시죠? 아들들은 대부분 어머니보다 지 마누라 먼저여요.”
쏟아지는 눈물을 삼키려고 할머니는 마른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할머니는 온종일 시름에 젖어 병실 복도를 오락가락했다. 아침마다 오던 아들 내외는 하루가 지나도록 발길을 뚝 끊었다.
할머니는 아침 식사도 거른 채 힘없이 누워있는데
“엄마! 깨를 털었는데 한 말이 나왔어”
아들 목소리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정말?”
“뻥이야”
장난치는 아들 말에 그동안 속앓이 했던 할머니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리고 있었다. 아들의 서운한 타박에 상처가 다 나아도 병원에서 버틸 거라고 장담하던 할머니였다. 그런데 언제 그랬냐는 듯 회진 도는 의사에게
“언제 퇴원해요?”
할머니는 또 집 타령이다.
2016년9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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