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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싣는 순서]
2. 동춘당과 종택 3. 소대헌과 호연재 고택 4. 기타 5. 맺음말
동춘당 부근에는 송준길이 생전에 거주하였던 고택과 그의 손자가 거주하였던 소대헌과 호연재가 있으며, 대전광역시에서는 이 일대를 모두 동춘당공원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이 지역은 원래 회덕(懷德)이라 불리던 곳이었는데 2003년에 행정구역 명칭을 지금의 송촌동(宋村洞)으로 변경하였다. 송촌(宋村)이란 말 그대로 은진 송씨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지역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예부터 대전 인근에는 충남 논산시 은진면을 본관으로 하는 송씨들의 집성촌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동춘당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조선 예학의 거두였던 송준길이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동춘당의 위치]
전쟁은 끝나고 임금과 사대부들은 돌아왔지만 그러나 반상(班常)의 위계질서는 이미 무너진지 오래이고 평민들은 더 이상 임금과 양반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라 안으로는 당파싸움으로 인해 벌어진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등으로 정치마저 혼란해진 격동의 시기에 나라의 기강은 무너졌으며 급기야 왕조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의 기반마저 붕괴되어 사회적 무질서가 극에 달하였다. 이것을 회복하여 바로잡기 위한 사상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영남학파에서는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 받은 문인들이 중심이 되었고, 그리고 서인(西人)이 중심이었던 기호학파에서는 율곡 이이의 학통을 이어받은 사계 김장생으로부터 시작된 예학(禮學)이었다. 지식층이었던 사대부들은 관혼상제의 예법을 제정하여 가르침으로서 무식한 민초들을 하나씩 다스리기 시작하였는데, 답사지의 주인공인 동춘당 송준길은 바로 그 시대에 활동하였던 인물로 서인(西人)이면서 사계 김장생의 문하생이 되어 기호학파의 정통을 이어받아 당대 예학의 중심역할을 했던 학자였다. 시대가 변한 오늘날에도 성리학의 뿌리는 여전히 남아있고 특히 예학은 현대의 관혼상제 의식에도 많은 부분이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으므로 동춘당이라는 문화재를 통하여 조선중기 예학의 뿌리와 실상을 느껴볼 수 있다는 점이 답사의 큰 의미가 될 것이다. ①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송준길 초상]
어려서부터 친척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각별한 교분을 쌓으며 동문수학 하였고,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하였으며, 또한 글씨에도 뛰어나 송시열과 함께 두 사람의 글씨체를 양송체(兩宋體)라 하였다. 송준길은 성리학으로는 율곡 이이의 학맥을 이어받았으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과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예학(禮學)에도 밝았고, 기호학파의 주류를 형성한 정통 성리학자였다. 관직은 대사헌,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저서로는 동춘당집(東春堂集), 어록해(語錄解)가 있으며, 글씨로는 부산의 충렬사비문(忠烈祠碑文)과 남양의 윤계순절비문(尹啓殉節碑文)이 남아 있다. 167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81년 문정(文正)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1756년(영조 32)에 해동 18현(海東 十八賢)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②건축물의 배치
[건축물 배치도]
종택은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송씨가묘(宋氏家廟)와 송씨별묘(宋氏別廟)로 구성되어 있다. 소대헌과 호연재 고택에는 사랑채인 소대헌(小大軒)과 오숙재(吾宿齋), 그리고 안채인 호연재(浩然齋)가 있으며, 뒤쪽으로는 사당(祠堂)인 송씨가묘(宋氏家廟)가 있다.
사방이 담으로 둘러쳐진 가운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을 얹었는데 단아한 그 모습이 고상한 선비가 정좌한 듯 반듯하게 자리 잡고 있다. [동춘당 전경]
당호(堂號)인 동춘(同春)은 직역하면 봄과 같다는 뜻이다. 사계절의 하나인 봄이라는 뜻의 춘(春)은 오행(五行)으로 목(木)에 속하고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오상(五常) 중에 목은 인(仁)을 나타낸다. 성리학의 근간인 유학(儒學)의 기본이념이 인(仁)이니 봄과 같다는 말을 의역(意譯)하면 매사에 언제나 인(仁)을 바탕으로 행하며 살아가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문화재 관리관청인 대덕구에서 설치한 동춘당의 안내문에는 당호(堂號)인 동춘(同春)의 뜻이 “살아 움직이는 봄과 같아라”는 뜻이라 설명되어 있다. 이 말은 당호를 직역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의역(意譯)하여 춘(春)을 인(仁)으로 풀이하는 것이 송준길 선생의 사상과 더 합치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동춘당의 편액(扁額)은 친척이면서 평생의 동지였던 우암 송시열의 친필이다. 편액에는 숭정무오모춘 화양동주서(崇禎戊午暮春 華陽洞主書)라 되어 있다. 화양동주(華陽洞主)는 우암 송시열의 또 다른 호이다. 숭정(崇禎)은 명나라 숭정황제의 연호이고 당시 戊午年은 1678년이며 모춘(暮春)은 음력 3월을 뜻하는 말로 즉 늦은 봄날에 썼다는 뜻이다. 송준길 선생은 1672년에 돌아가셨으니 그로부터 6년 뒤에 편액을 써서 걸었다는 뜻이 된다. [종택입구와 대문]
이곳 종택은 송준길 선생의 5대조이신 송요년이 15세기 후반에 처음 창건하고, 그 후로 몇 차례 옮겨 지었는데, 1835년에 중건한 모습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널따란 마당이 있고 가장 먼저 사랑채가 눈에 들어온다. 사랑채는 정면 6칸에 측면은 1칸 반이며 팔작지붕을 얹었다. 대청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큰 사랑과 작은 사랑을 배치하였고, 서쪽 끝에는 안채로 통하는 중문(中門)이 나 있다. [사랑채]
남녀의 구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는 가장인 남편도 안채에는 함부로 드나들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하고 폐쇄적으로 조성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종택은 ‘ㄷ’자형으로 조성하고 앞 쪽은 사랑채가 가리고 있어 조선시대 양반가문의 폐쇄적인 안채의 공간구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구조라 할 수 있다. 안채의 가운데는 대청이 있고 서쪽으로는 안방과 골방, 그리고 부엌을 배치하였으며 동쪽에는 건너방과 부엌, 그리고 행랑이 연결되어 있다. [안채 전경]
전통적으로 궁궐이나 마을, 그리고 가택을 배치함에 있어서는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를 따르는데 그 원칙은 한마디로 ‘좌묘우사 전조후시(左廟右社 前朝後市)’의 법칙이다. 즉 궁궐을 중심으로 하여 조상을 모시는 묘(廟)는 좌측인 동쪽에,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시는 사직단(社稷壇)은 우측인 서쪽에, 그리고 신하들이 일하는 조당(朝堂)은 앞 쪽인 남쪽에,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市場)은 뒤쪽인 북쪽으로 배치한다는 원리이다. 이에 따라 종택에서도 가묘(家廟)는 좌측인 동쪽에 배치하였고, 사직단을 상징하는 부엌은 서쪽으로 배치하였다. 참고로 장독대는 시장을 상징하므로 집 뒤뜰에 배치하는 것이 원칙이며, 집의 맨 앞쪽 대문 옆에는 신하를 상징하는 하인들의 거처인 행랑채를 배치한다.
가묘(家廟)는 사당(祠堂)을 말하는 것으로 조성하는 근거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기원을 두고 있다. 성리학이 국가의 근본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는 효(孝)를 인간의 가장 중심덕목으로 보았기에, 조상에 대한 제사는 자신의 근본을 찾고 조상의 은혜를 새기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의식이었다. 따라서 사대부 가문에 가묘(家廟)의 설치는 필수였고,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나라의 문책이 따랐으며, 후대로 가면서 평민들도 이를 따르게 되었다. 가묘에는 3년상을 마친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시는데, 부모에서 고조부까지 4대만을 모시고 제사하였으며, 5대가 넘어가면 차례로 해당 조상의 신주를 철거하는 것이 관례이다. ⑤송씨별묘(宋氏別廟)
가묘(家廟)에 모셔진 조상의 신주는 4대조까지만 제사하고 이후에는 철거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특별한 조상의 경우에는 신주를 철거하지 않고 그 집안이 끝날 때까지 영원히 제사를 모시는데 이를 일러 불천위(不遷位) 제사라고 한다. 따라서 불천위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기 위하여 조성한 사당이 별묘인 것이다. 불천위 제사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 번째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공을 세운 경우에 나라에서 지정하여 문묘(文廟)에 배향하는데 이를 국불천위(國不遷位)라고 한다. 성균관 대성전에 공자와 함께 모셔져 있는 해동 18현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뛰어난 유학자 중에 지역의 유림들이 논의하여 결정하는데 이를 유림불천위(儒林不遷位)라 한다. 마지막으로 조상 중에 훌륭한 인물이 있으면 당해 문중에서 뜻을 모아 불천위로 결정하는데 이를 사불천위(私不遷位)라 한다. 동춘당 송준길 선생은 1756년(영조 32)에 동국 18현으로 선정되어 문묘(文廟)에 영구 배향된 국불천위(國不遷位)이다. 그러므로 이곳 송씨별묘에는 동춘당의 주인이신 송준길 선생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처음에는 대전시 대덕구 법동에 건립하였던 것을 송병하의 아들 소대헌 송요화(宋堯和, 1682~1764)가 1714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다. 고택은 조선 중기 대전지역의 살림집을 이해할 수 있는 건축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충청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안채인 호연재, 큰사랑채인 소대헌, 그리고 작은 사랑채인 오숙재와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대헌과 호연재 전경]
[소대헌]
②오숙재(寤宿齋) [오숙재]
당호(堂號)인 호연재는 안주인 김씨의 호인데 맹자(孟子)의 호연지기(浩然之氣)에서 따온 것으로 천지간에 가득 차 있는 넓고 큰 기운이라는 뜻이다. 호연재 김씨(1681~1722)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여류문학가로 난설헌(蘭雪軒) 허초희 (許楚姬)에 버금갈 정도로 뛰어난 여류시인이었다. ④송씨가묘(宋氏家廟)
[송씨가묘] 4. 기타 , 원래 효자정려는 송촌동 동춘당에 이르는 길가에 있었는데 1861년 후손들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면서 정문(旌門)도 함께 옮겨 가자 그 터를 기념하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송씨3세 효자정려 구허비] 송씨 삼세효자는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 1389~1446)의 6대손인 선교랑(宣敎郞) 송경창(宋慶昌)과 그의 손자인 지평(持平) 송시승(宋時昇, 1583~1638), 그리고 시승의 아들인 도사(都事) 송유관(宋有觀)의 삼세(三世)가 모두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겨 나라에서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그 행적이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 기록되었다. ②금암(琴巖)
이 글씨는 금암의 글씨라는 설과 송준길의 글씨라는 두 가지 설이 나뉘어 있다. ☯ 금암 송몽인(琴巖 宋夢寅, 1586~1612) 학자이자 시인으로 시문(詩文)에 뛰어난 재주가 있어 ‘갑천팔경(甲川八景)’을 비롯한 여러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가 죽은 뒤 부인인 여흥민씨(驪興閔氏, 1582~1644)가 글을 모아 금암집(琴巖集)을 편찬하였다. ③호연재(浩然齋) 시비(詩碑) [호연재 김씨 시비]
야음 / 夜吟 / 밤에 읊조리다 月沈千嶂靜 / 월침천장정 / 달빛 잠기어 온 산이 고요한데 ☯ 호연재 김씨(浩然齋 金氏, 1681~1722)
19세에 동춘당 송준길의 증손인 소대헌(小大軒) 송요화(1682~1764)와 결혼하여 28세에 아들 송익흠(宋益欽, 1708~1757)을 낳았으며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호연재 김씨는 출가한 이래 지금의 대덕구 송촌동에 있는 소대헌 고택에서 살아 이 지역과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여류문학가로 틈틈이 한시를 지어 194편의 작품이 전해져 오고 있다.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고리타분한 예학(禮學) 따위는 구시대의 유물 정도로 치부하여 무시하기 쉬운 것이 시대의 추세일 수 있지만, 물질에 가려져 점점 상실되어 가는 인간의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예학을 배우고 실천함으로써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할 것이라 본다. 답사를 마치고 동춘당 마루턱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예(禮)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논어에 이르기를 ‘己所不欲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이라 하였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마라는 뜻이다. 요즘 들어 돈 많은 재벌들의 소위 갑질행태가 부쩍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경제적 풍요를 이루는데 급급해 인간의 기본 도리인 예(禮)를 잊고 산 결과가 아닐까 여긴다. 돈의 힘에 의지하여 타인의 인격을 갑질행태로 무시하는 그들이 재물을 얻기에 앞서 동춘당을 만나 예(禮)가 무엇인지 그 참된 의미를 먼저 깨달았더라면, 지금처럼 만인의 지탄을 받는 갑질행태를 하였을까 생각하며, 동춘당 답사의 교훈으로 삼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