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Vincenzo Montella
생년월일 : 1974년 6월 18일
출생지 : 이탈리아(Pomigliano D'Arco) 출생
신장 / 체중 : 172cm / 68kg
포지션 : 스트라이커(ST)
소속팀 : AS로마(Italy)
전 소속팀 : 삼프도리아
A매치 경력 : 15경기 / 3골
주요 경력
- 01/02 시즌 세리에A(로마) 득점 공동10위(13골)
- 00/01 시즌 세리에A(로마) 득점 공동11위(13골)
- 99/00 시즌 세리에A(로마) 득점 4위(18골)
- 98/99 시즌 세리에A(삼프도리아) 득점 공동13위(16골)
- 97/98 시즌 세리에A(삼프도리아) 득점 공동4위(25골)
- 96/97 시즌 세리에A(삼프도리아) 득점 2위(25골)
- 95/96 시즌 세리에B(제노아) 17골
- 2002한일월드컵 1경기 36분 출장 1어시스트
왜소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골 감각과 빠른 스피드, 드리블 능력 등 스트라이커로서 훌륭한 자질을 모두 가지고 있는 선수.
Serie A 에서 외국 출신의 세계적인 스트라이커들과 겨루며 같은 이탈리아 출신인 토티, 델베키오와 함께 로마를 상위권으로 이끌어 토티와 함께 국가 대표팀에까지 뽑혔다.
93년 엠폴리(Empoli) 시절 심장염으로 선수생활을 포기할 위기에서 처하기도 했었던 빈첸조 몬텔라(Vincenzo Montella)는 95/96 시즌 제노아(Genoa) 소속으로 세리에 B 득점랭킹 2위(21골)에 오른 뒤 시즌 직후 같은 제노아를 연고로 하는 지역 라이벌 삼프도리아(Sampdoria)로 이적했다.
처음 세리에 A 무대에 오른 몬텔라는 이적 후 첫 시즌에만 18경기에서 12골을 떠뜨리는 등 처음 두 시즌 동안 61경기에 출장 42골을 뽑아내는 탁월한 골결정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삼프도리아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98/99 시즌 부상으로 시즌 절반 가까이를 결장
해야 했던 몬텔라의 공백은 삼프도리아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더군다나 오르테가, 디오니지(Davide Dionigi), 팔미에리(Francesco Palmieri) 등이 공격라인에 버티고 있었지만 삼프도리아의 98/99 시즌 총 38골 가운데 12골이 몬텔라의 골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팀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실감케 할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
시즌 막판 부상복귀로 다시금 득점포를 터뜨리기 시작했지만 그 혼자만의 분전으로 팀의 17년만의 세리에 B 강등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편 팀의 2부리그 추락은 몬텔라를 새로운 기회와 도전에 직면케 했다.
잉글랜드 명문 아스날로부터의 이적제의를 비롯, 주요 유명 클럽들의 러브콜이 잇달았지만 결국 그는 카펠로가 지휘봉을 맡고 있는 전통의 명문 AS 로마를 선택했다.
로마로 날아온 첫 시즌인 99/00 시즌 델베키오와 투톱으로 나선 몬텔라는 그의 능력에 반신반의하던 주위의 우려를 보란 듯 불식시키면서 18골을 성공시켜 팀내 최다득점자에 등극한 것은 물론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비행기 골세레모니를 유럽 축구팬들에게 각인 시키기에 충분한 활약을 펼쳤다.
신장이 작다는 핸디캡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극복할 만큼의 스피드, 수준급의 패싱력, 출중한 드리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평가 받는 몬텔라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보다도 상대문전에서의 골잡이로서의 육감을 타고났다는 점일 것이다.
비록 유로2000에서는 비슷한 플레이 스타일의 필리포 인자기에 밀려 프랑스와의 결승전에서 교체투입된 것 외에는 별다른 활약을 펼쳐 보이질 못했고 소속팀인 AS 로마에서는 바티스투타라는 최고의 스트라이커의 그늘에 가려 교체멤버로 활용되고 있는 형편이지만 언제든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금 그의 신들린 듯한 비행기 세레모니를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줄 안다.
몬텔라는 그가 15세가 되던 시절부터 본격적인 축구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나폴리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세리에 C1 소속이었던 엠폴리에 입단하여 세계적인 스타로의 부상을 꿈꾸기 시작한다.
입단한 첫해에는 아직 나이가 어렸기에 별다른 활약을 보이진 못했지만 이듬해인 91/92 시즌부터 몬텔라는 천부적 득점력을 보이기 시작한다. 7게임에 출장하며 4골을 뽑아낸 그는 구단관계자 들에게 '가공되지 않은 보석' 이라는 평가를 들으며 장래성을 인정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92/93 시즌에는 다시 5골을 뽑아내며 팀의 유망주로서의 자신의 가치를 완전히 입증한다. 그러던 그에게 첫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부상으로 인해서 93/94 시즌은 단 한 경기도 출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18세에 어린 나이에 당한 이때의 부상은 그에게는 꽤 괴로운 일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경기장에 찾아가 동료들이 뛰는 모습을 씁쓸히 지켜보는 일이었다.
'동료들이 뛰는 모습을 보면서 언제나 아쉬움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동료들이 실점을 하면 그 자리에 내가 뛰고 있는 것을 상상했고 득점을 하면 내가 득점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했다.' 면서 몬텔라는 그 당시의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다시 뛸 수 있음을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그의 말대로 부상에서 회복된 94/95 시즌은 그에게 있어서는 정말 최고의 시즌이었다.
부상으로 1 시즌을 쉬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그를 팀의 주전으로 기용했고 몬텔라는 멋지게 재기했다. 그는 30게임에 출장 모두 17골을 뽑아내며 세리에 C1의 득점 3위에 랭크되는 기염을 토했다.
엠폴리는 이러한 몬텔라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하위권에 머물러 승격되지는 못했지만 몬텔라 개인의 가치는 폭등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몬텔라를 눈여겨보던 삼프도리아는 엠폴리가 세리에 B로 승격하지 못하자 그의 가능성을 높이사고 그를 영입한다.
하지만 삼프도리아에서 그가 주전으로 올라서지는 못했다. 팀에는 키에사라는 수퍼스타가 있었고 구단에서는 어린 몬텔라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세리에 B의 제노아로 임대시키게 된다.
몬텔라는 주전이 되지 못했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불평을 하지도 않았고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나갈 뿐이었다. 95/96 시즌 제노아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였다. 부상없이 34경기 전경기에 출장하며 21골이라는 대단한 득점을 했다.
득점왕은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경합했던 체세나의 허브너에게 빼았겼지만 단지 한 골이 적었을 뿐이었다. 이쯤 되자 삼프도리아는 몬텔라를 완전히 신뢰할 수 밖에 없었다.
삼프도리아는 팀의 주 득점원이었던 키에사를 파르마로 이적시키고 96/97 시즌부터는 몬텔라를 주전으로 기용하기 시작했다.
삼프도리아의 이러한 선택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96/97 시즌이 시작되자 리그는 두 어린 포워드의 득점 경쟁에 집중이 되었다. 파르마에서 아무런 활약을 하지 못한 채 아탈란타로 쫓겨난 필리포 인자기와 무서운 신예인 몬텔라의 대결이었다.
인자기가 골을 넣으면 몬텔라가 뒤질세라 쫓아가는 형국이 계속 되었다. 결국 시즌이 끝난 뒤 몬텔라는 인자기에게 득점왕을 내주고 말았지만 팀이 6위의 성적으로 마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삼프도리아는 몬텔라와 만치니의 투탑이 37골을 합작해내면서 총 60득점으로 리그 최다 득점팀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97/98 시즌이 시작되자 몬텔라는 세리에 A 수비수들의 많은 견제를 받았지만 그 무엇도 그의 득점행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만치니가 부진을 거듭하는 바람에 팀의 성적은 9위에 머물렀지만 몬텔라는 2년 연속으로 20+ 득점을 해냄으로서 팀의 에이스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은 이 젊은 포워드에게 이탈리아의 미래를 느끼기 시작했고 그는 아직도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다.
98/99 시즌은 몬텔라에게 또 삼프도리아에게 매우 불행한 시즌으로 기억된다. 삼프도리아는 97/98 시즌의 문제가 플레이메이커에 있었다고 판단하고 리버 플레이트로부터 오르테가를 영입한다.
그러나 오르테가는 기대 이하의 활약을 펼쳤고 팀의 성적은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몬텔라는 부상으로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고 결국 팀은 16위라는 처참한 성적으로 2부로 떨어지고 만다.
삼프도리아는 2부로 떨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몬텔라의 가치까지도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몬텔라는 여러 명문팀들로부터 이적제안을 받은 후에 결국 AS 로마를 자신의 새로운 거취로 결정했다.
몬텔라는 지난 3시즌동안 뛰었던 정든 구단을 뒤로하고 로마에서 자신의 새로운 축구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로마로 옮기고 나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몬텔라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몬텔라는 이 즈음 드디어 처음으로 이탈리아 대표팀에 뽑혀서 이탈리아의 유로2000 지역예선 팀에 속해서 경기를 펼쳤다.
디노 조프는 비에리와 델 피에로의 공백을 로마의 두 포워드인 델베키오와 몬텔라 그리고 토티로 채우기 시작했다. 로마 팀 또한 카펠로 감독을 새로이 영입해서 우승에 대한 의지를 키워가고 있었다.
99/00 시즌 로마의 시작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초반 2게임을 연속으로 비기면서 어려운 시작을 했다. 몬텔라 역시 새로운 팀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로마는 라치오와의 로마 더비를 시작으로 되살아나기 시작했고 중반까지 좋은 성적을 거뒀다. 몬텔라는 델베키오와 득점이 양분되었지만 그러는 중에서도 18골을 뽑아내는 득점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로마는 하위권 팀과의 승부를 압도하지 못해 막판에는 파르마에까지 뒤쳐지며 6위의 성적으로 리그를 마감해야 했다.
한편, 다소 아쉬운 99/00 시즌을 마치고 몬텔라에게는 드디어 자신의 축구인생 최고의 무대인 유로2000이 다가왔다.
디노 조프 이탈리아 감독은 대회를 앞두고 열린 친선경기에서 몬텔라를 선발로 기용하며 그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했다. 하지만 정작 대회가 열리자 그의 지난 득점왕 경쟁자였던 필리포 인자기를 주전으로 내세웠고 몬텔라는 벤치 워머에 만족해야 했다.
이탈리아는 이 대회에서 극적으로 결승까지 올라갔지만 프랑스에게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결국 아쉽게 패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몬텔라는 로마로 이적해온 바티에게 등번호 9번을 빼앗기게 된다. 몬텔라의 등번호는 18번. 게다가 카펠로 감독이 몬텔라를 주전에서 밀어냈다. 모두가 의외라는 눈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티스투타가 들어와서 델베키오가 백업으로 빠지고 몬텔라와 바티스투타가 투탑으로 설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