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을 앞산으로 오봉산을 뒷산으로 넓은 평야를 바라보고 죽림밭을 뒤로 하여 육백년넘게 월출산의 기를 받아온
영암군 덕진면 영보마을.
농촌진흥원으로 부터 2009년 살고 싶고, 가보고 싶은 농촌마을로 지정된 영보마을로의 여행은 이 마을 토박이로 광주에서
여행사를 경영하며 3년후 귀농을 준비중인 친구 정태균과 같이 하였다.
그 친구는 귀농을 하기위한 준비과정으로 주말이면 부모님이 계시는 영보마을에 내려와 집앞 논과 밭에 매실과 감나무 등을 심고
또 형제봉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옆에도 감나무를 심으며 귀농준비를 차분히 하고 있다.
글쓴이 또한 이런 귀농프로그램에 대해 생소하지만 또한 동경을 하고 있던차에 친구의 고향나들이에 동행하는 즐거움을 가졌다.
곧있으면 민족의 대명절인 한가위.
영암의 넓은 평야에 우뚝 솟은 월출산을 바라보며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영보마을로 들어간다.
영보마을은 녹색농촌 체험마을인 전주최씨 집성촌으로 600여년의 마을역사를 자랑하며 지어진지 400여년이 다되는 전남기념물
제104호인 영보정과 19세기말에 지어진 전통가옥들 그리고 보물 제594호인 최덕지영정과 최덕지 고택, 중요민속자료인 최성호가옥 등
다양한 민속자료와 마을을 감싸안고 있는 형제봉밑의 약3만여평에 이르는 대나무숲을 끼고 도는 산책로는 각 계절마다 다양하고
신비로운 모습을 팜스테이를 즐기고자 영보마을을 찾은 가족단위의 도시민들에게 자연의 경이로움을 볼 것으로 선사하고있다.
마을 입구에는 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도 있어 언제든지 영보마을에서 농촌체험학습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녹차만들기, 황토염색, 옹기그릇만들기 등의 체험학습으로 가족단위 관광객들에겐 재미있는 즐길거리를 만들어주고 마을에서
직접생산된 먹을거리가 있는 한 곳에 머물며 세가지 즐거움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일거삼락(一居三樂)과 과거와 현재가 아름답게
공존하며 오봉산 형제봉의 아픈 우리민족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영암 영보마을은 보통의 마을과 달리 격이 있어보이는 그 무엇인가
가 마을 진입로에서부터 오감으로 느껴온다.
마을의 중앙에서 바라본 영보마을 안쪽의 전경으로 뒤로 보이는 산은 6.25때 동족상잔의 아픔을 간직한 오봉산 형제봉이다.
약30여가구가 있는 양반고을 영보마을.
마을의 중앙에서 바라본 영보마을 바깥쪽의 전경으로 멀리보이는 산은 월출산이며 교회옆에는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마을입구에 들어서면 우람한 몸체에 비해 가지가 앙상한 슬픈 모습의 소나무 한 그루와 정자가 눈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소나무는 약400여년전에 영보정을 중건하기 이전부터 심어진 것으로 보이는 소나무로 수령은 430살, 높이는 7m, 둘레2.8m이다.
온 몸에 상처를 입고 1987년에 당시 김옥현영암군수와 동향인 최윤호의 노력으로 말끔히 치료가 된 소나무로 소나무시술기가 앞에
세워져 있다.
영보정(永保亭)이다..2009년 9월에 방송된 KBS 2TV 해피선데이 1박2일 영암월출산편에서 오프닝을 한 장소..
그날의 컨셉인 휴식에서 시작된 용돈 쟁탈전으로 MC몽, 이승기, 이수근이 월출산 구름다리로 올라가며 오르막길~ 내리막길~을
유행시키고 강호동, 김C, 은지원은 숙소인 도갑사입구에 있는 죽정마을의 안용당에서 용돈을 가지고 내려오는 등산조를 미행하는
미행조로 엮어가는 1박2일 오프닝을 영보정 앞마당에서 촬영했다.
2009년 9월 방송된 1박2일 영암편 화면(영보정앞과 월출산)
영보정은 조선초기의 학자이자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지낸 연촌 최덕지(崔德之1384~1455)가 남원부사를 마지막으로
정계에서 물러나 고향인 전주로 가지않고 처가고을인 영보촌에 거주하면서 그의 사위이자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를 지낸
신후경(愼後庚)가 함께 지었으며 후에 최덕지의 7세후인 최정(崔挺)이 신천익(愼天翊1592~1661))과 함께 재건한 것으로 보아
1630년경에 현재의 모습으로 세워졌다 한다.
일제시대에는 이곳에 영보학원(1921년)이 설립되어 청소년들에게 항일구국정신을 배양하기도 했으며 1931년 영암청년들의
항일투쟁으로 손꼽히는 '형제봉 만세운동'도 영보학원을 중심으로 졸업생및 영암청년회원들이 주축이 되었다.
영보정의 편액은 최덕지의 사위인 신후경의 3세후인 강원감사 신희남의 문하생 한석봉이 영보정에서 학문에 정진을 하며 썼다한다.
영보정은 이와 같이 신식교육과 구국정신을 함양한 학사(學舍)로써 매년 5월5일에 풍향제(豊鄕祭)라는 마을축제가 열리며
2010년에 32회째가 열렸다.
전주최씨와 거창신씨 사이의 500년에 걸친 우의(友誼)의 상징이기도 한 영보정은 거창신씨 집성촌에 있는 이우당과 함께
영암을 대표하는 정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 우의는 지금까지도 전통행사를 공유하면서 돈독하게 지내고 있다 한다.
보통의 정자가 정면3칸에 측면2칸으로 되어있으나 영보정은 정면5칸에 측면3칸, 방은 정면3칸에 측면1칸으로 마루는 방을 중심으로
ㄷ 자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방에는 별도의 다락방도 설치하여 보통의 정자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네 기둥에 활주까지 세운 영보정에는 전주최씨 집안과 거창신씨 집안의 500년에 걸친 우의를 대변이라도 하듯이 영보정 입구에는
신씨가문의 비가 세워져있으며 교보생명의 창업자인 대산(大山)신용호의 생가터도 영보마을에 있다.
영보정에서 바라보 월출산.. 약례당(約禮堂)..영암 덕진면에 있는 12개마을의 대동계 대표가
모이는 장소로 2010년에 지어졌다.
최덕지영정이 있는 영당과 담장안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배롱나무..문이 잠겨있고 곳곳에 감시 카메락 설치되어 있어 내부촬영은
불가하다.
영당안에 모셔져 있는 보물제594호인 최덕지영정과 유지초본으로 원본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그린 초안도 있어 역사적으로도
귀중한 자료이며 가장오래된 조선시대 사대부의 초상화로 그시대의 초상화표현방식및 기법과 복색등을 알수있다.(사진출처:문화재청)
최덕지고택..전주최씨집안의 종갓집이다..솟을대문안으로 들어가면 입구 우측으로 영보정에서 본 자그만한 직사각형 연못이 있다.
내부는 아주 집을 잘 지키는 진도견 한 마리가 있어 훗날을 기약해야 했다..쥔장도 안 보이고..
백치아다다, 봄봄, 낫 이라는 영화촬영지과 6.25특집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한 최성호가옥은 중요민속자료 16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금은 최성호씨 2세,3세,4세손이 살고 있다. 안채, 사랑채, 헛간채, 문간채와 사랑마당까지 옛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초가지붕을 새로이 얹어 비닐로 잘 덮어서 꾹꾹 눌러놨다..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와 헛간채를 마당을 중심으로
ㄷ자 형태로 나눠져있다. 사랑채 뒷쪽으로는 방문이 앞뒤로 달려있고 삼성당이라 쓰여있다.
안채의 모습..실제 주인이 거주하는 관계로 부억칸에는 방충망을 달아놓고 샷시유리문을 나무창살로 가려놨다.
내부엔 각종 현대식 살림살이가 있어 고택을 지키면서 현대적인 삶을 살아가는 주인장의 모습이 아름답기만 하다.
헛간채의 둘둘말아진 멍석과 지붕안쪽으로 건너가는 전깃줄..이런 전깃줄을 참으로 오랫만에 본다. 지금은 모두 매립형이라 해서
건물내부에 꽁꽁 숨어있지만 옛날엔 저렇게 건물외벽을 따라 전깃줄이 지나다녔다.
안채 마루에서 잘 익고 있는 고추..요즘 고추값이 금값인데..고추농사를 잘 지었나 보다.
대문옆 통풍이 잘되는 그느린 곳에 걸려있는 마늘이 소탐스럽기만 하다.
대문밖에서도 고추는 빨갛게 익어가고...밭에서는 창이 넓은 토란대도 익어가고...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3만여평에 이르는 대숲이 마을을 빙돌아 감싸며 둘러있고 그 사이로 2km에 달하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영보마을의 전 이장이자 친구의 부모님이 계시는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엔 종이에 잘 쌓여진 청포도가 무럭무럭
익어가고 있다.
먼 옛날부터 이 마을의 식수원이었을 우물은 잘 발달된 상수도로 인해 사용은 안하고 물위에 떠있는 댓잎만 옛풍상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넓은 마당엔 역시 고추가 토실토실 익어가고 있다.
곧 있으면 한가위이듯이 마당의 텃밭엔 석류와 감, 사과가 가을색으로 영글어가고 있다.
마을 사이로 난 죽림산책로의 녹음은 여름이지만 들판을 들여다보면 벼가 제법 노랗게 익어가는 것이 이제 가을이다.
마을을 벗어나 뒷산인 형제봉으로 가는길로 들어선다. 1931년 영암청년들의 항일투쟁으로 손꼽히는 '형제봉 만세운동'이 일어난곳..
6.25때 좌우익을 넘나들며 피난과 학살이 자행된 곳....그 길로 들어선다.
산으로 난 임도를 따라가다보면 명당자리라고 생각되는 곳엔 모두 후손들에 의해 잘 만들어진 묘들이 즐비하다..
산자락 밑까지 가면 공동묘지도 나오고..그 앞을 통과하여 산으로 난 길은 어디가 들머리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길의 희미하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길이 거의 안보일정도로 원시림으로 가득차있다.
대낮임에도 수풀안엔 사람이나 짐승이 다닌 흔적이 전혀없고 산새소리와 풀벌레소리만 우렁차게 울리다가 가끔 지나가는 우리로
인해서 울음을 그치는 인간세상하고는 아주 인연이 먼 자연상태 그대로의 산이다.
공동묘지 입구에서 부터 한 200여m올라가면 길이 완전히 끊어져 더이상 진입이 불가능한 곳에 이르른다.
이곳엔 수백년전부터 흘렀을 냉기가 서린 약숫물이 흐르는 기점이다. 손이 시리도록 차가운 냉기가 흐르는 약수터엔
60여년전의 한이 그대로 서려있다.
여기서 부터 형제봉까지의 길은 있으나 수풀로 덮혀있어 더이상 올라가기가 힘들고 겁도 난다.
그만큼 산속이 깊다. 마을을 감고 도는 대나무숲길 2km여와 마을 뒤 형제봉으로 오르는 둘레길을 잘 연계시키고 마을 논과 밭,
그리고 대숲사이로 난 길을 올레코스로 이어준다면 아주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 듯하다.
영보마을이 앞으로 100년 이상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로 팜스테이를 운영할려면 기존의 우수한 향토사적 문화재와 유구한
역사 그리고 현대사의 아픔까지 그대로 녹아있는 하드웨어를 조금만 더 업그레이드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 더 이른 시간에 이 영보마을을 떠나 도시에서 살던 젊은 사람들이 귀농하여 새로운 사고와 개척정신으로
팜스테이를 운영해 나간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팜스테이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인 박찬승이 쓴 '마을로 간 한국전쟁'에는 '영암의모스크바', 한 양반마을의 시련이라는 소제로 영보리에서
있었던 6.25전쟁당시의 좌,우익에의한 양민학살사건(1천여명의 주민중 200여명이 학살당함)과 1951년 나주 금정의 산에 피신해
있던 빨치산들이 야간에 내려와 식량을 요구하자 쌀가마니를 내어준 이가 있었는데 그 쌀가마니에 쥐가 뜯어먹어서 생긴 작은구멍
으로 쌀이 쏟아지는 것도 모르고 짊어지고 금정으로 돌아간 빨치산을 경찰이 비가 와서 길에 떨어진 불어있는 쌀을 찾아 산속에
숨어있는 빨치산을 쉽게 찾아내어 큰 피해를 입자 빨치산쪽에서 고의로 가마니에 구멍을 뚫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보복을 결정하고
야간에 영보마을을 습격하여 세 가족 18명을 살해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과거의 쓰라린 아픔을 잊고 영암을 대표하는 녹색농촌마을로 탈바꿈한 600년 양반고을의 모습에서 아련한 역사의 한페이지가
새롭게 넘어감을 느껴본다.
영보마을 입구에서 형제봉을 바라보고 또 월출산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천혜의 관광자원을 가진 영보마을의 미래가 밝게만 보인것은
때늦지 않게 귀농을 준비중인 도시의 영보인(永保人)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처럼 도시에서만 자란 사람들은 이런 고향을 둔 친구들이 마냥 부럽다..
그래서 그 친구의 옆집에 나의 조그만 거처도 하나 만들어 놓고 말년에 나와 나의 내자가 같이 의지하며 열심히 농사를 짓고 글을 쓰며
블러그의 삶을 윤택하게 하며 살다가 생을 마감하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