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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4일(음력 7월 7일)은 칠석(七夕)입니다.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한 해에 한 번씩 만난다는 날입니다.유교 기도날 중 별에 기도하는 날. 칠석날은 일반인들에게 허용된 별에 기도하는 날로(추석.대보름은 달에 기도), 북두칠성을 향하여 집이나 야외에서 물이나 떡을 놓고 기도하는 유교문화의 오래된 명절입니다. 요즘은 아시아지역의 산업화로 대도시 지역에서 북두칠성이 가려져 잘 보이지 않기도 하지만, 그럴때는 실망하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며 북두칠성님을 외치며 기도하면 되겠습니다.
[1]. 개략적 서술.
유교의 하느님(天)을 최고신으로 하여, 달에 비는 기도날이 있고, 별에 비는 기도날이있고, 산천신에 기도하는 날이 있는데, 칠월칠석은 별에 비는 날입니다.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는 칠석날에 대해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칠석날은 별자리를 각별히 생각하는 날이어서 수명신(壽命神)으로 알려진 북두칠성에게 수명장수를 기원한다. 이 날 각 가정에서는 주부가 밀전병과 햇과일 등 제물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내거나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족의 무병장수와 가내의 평안을 빈다...
또 밭작물의 풍작을 위해 밭에 나가서 밭제를 지내기도 한다. 칠석날 처녀들은 별을 보며 바느질 솜씨가 좋아지기를 빌고 서당의 학동들은 별을 보며 시를 짓거나 글공부를 잘할 것을 빌었다...
[2]. 유교 경전인 시경(詩經))에는 견우(牽牛)와 직녀(織女)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곡풍지십(谷風之什) 대동(大東)편에는 다음과 같은 시어(詩語)가 있습니다.
維天有漢 하늘엔 은하수가 구비구비
監亦有光 희미한 빛내며 흘러가며
跂彼織女 직녀 바라보며
終日七襄 종일토록 베틀에 일곱번 앉고 지네.
雖則七襄 일곱번 앉고 져도
不成報章 무늬 고운 비단 짜지지 않고
晥彼牽牛 반짝이는 견우조차
不以服箱 소레 끌지 않네.
. 출처: 四書五經 2, 孟子.詩經/責任監修 前 忠南大 大學院 敎授 柳正基/文學堂 刊.(株)東西 供給/1986년 7월 20일 발행
. 필자 주 1). 谷風之什의 什에 대한 발음. 국내에서 什에 대한 발음은 주로 십.습.집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필자는 교학사 중한사전(박영종 저)에 의거 십으로 발음하여 표기하였습니다.
. 필자 주 2). 위 번역본 본문의 不以服箱(소레 끌지 않네)중, 소레는 수레를 의미합니다. 책임감수하신 유정기 교수님이, 나이가 많으시고, 한학을 주로 배우시고, 한글교육을 받지 않으신 세대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수레를 소레로 표기하신 것 같습니다만 자세하게 파악할 수는 없는 사항입니다. 필자는 헌책방에서 이책을 구입하였습니다. 그 당시 책임감수자인 유정기 교수는 대구사대 전임강사, 이화여대 조교수, 성균관대 전임강사, 대구대학 교수, 충남대학교 대학원 교수의 이력을 가진걸로 책에 나타납니다.
[3]. 칠석의 외국어 번역.
. 필자 주 3). 칠석날을 외국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다. 필자는 고등학교(미국 선교사가 세운 기독교 고등학교인 전주 신흥고등학교)때 제 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습니다.
영어로는, July 7th in the lunar calendar, the seventh day of the seventh month of the lunar calendar
독일어로는,
Juli nach dem Mondkalender
[4]. 칠석날에 대한 여러가지 백과사전류의 서술내용.
1].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의 칠석날에 대한 설명.
정의
명절의 하나로 음력 7월 7일.
내용
칠석은 양수인 홀수 7이 겹치는 날이어서 길일로 여긴다. 이 날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까막까치들이 놓은 오작교(烏鵲橋)에서 한 해에 한 번씩 만난다는 유래담이 있는 날이다. 이는 중국 고대의 설화가 우리 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력 7월이 되면 맑은 바람이 불어오고 하늘이 맑고 푸르며 높다. 북두칠성은 한 쪽으로 몰아 떠있고 비단결 같은 은하수는 금방 쏟아질 것 같다. 그 동쪽에 직녀성이 수줍은듯 희미하게 비치고 서쪽에서는 견우성(牽牛星)이 휘황하게 빛을 발하는데 이는 마치 서로 마주보며 정겨워하는 듯하다.
그러다가 칠석 때면 천장 부근에서 두 별을 보게 되는데 마치 일 년에 한 번씩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별자리를 보고 ‘견우와 직녀’ 설화를 만들어냈음 직하다.
중국의 두목지(杜牧之)의 칠석시에 이러한 정서가 담겨 있다. “요계야색양여수 와착견우직녀성(瑤階夜色凉如水 臥着牽牛織女星)”, 즉 “옥 섬돌에 밤빛이 서늘하기 물 같은데 누워서 견우 직녀 두 별을 바라보네”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남녀간의 정담이 담긴 명절인 까닭에 옛날부터 남녀 상사(相思)나 애정시와 설화도 칠석과 관련된 것이 상당히 있다.
주(周)나라 왕자 교(喬)가 봉황곡(鳳凰曲)을 울리며 신선이 되어 도사(道士) 부구공(浮丘公)의 부인과 만났다는 날이 바로 칠석이다. 서왕모(西王母)가 자운거(紫雲車)를 타고 전상(殿上)에 내려와, 장수(長壽)를 원하는 한무제(漢武帝)에게 요지 선도(瑤池仙桃)를 올린 날 역시 칠석이다.
또 이 날 양귀비(楊貴妃)의 혼이 재생하여 장생전(長生殿)에서 오매(寤寐:깨어있는 때나 자는 때)에 그리워하던 당명황(唐明皇)을 만나 “하늘에서는 원컨대 비익조(比翼鳥:암수의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라 짝을 짓지 않으면 날지 못한다는 전설상의 새)가 되고 땅에서는 원컨대 연리지(連理枝:한 나무의 가지가 다른 나무의 가지와 맞닿아 결이 서로 통한 것. 화목한 부부나 남녀 사이를 일컫는 말)가 되자”고 했다는 내용도 전한다.
우리 나라 <춘향전>에서 춘향과 이도령의 가약을 맺어주던 광한루(廣寒樓)의 다리는,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다리와 이름이 같은 오작교였다.
칠석날은 별자리를 각별히 생각하는 날이어서 수명신(壽命神)으로 알려진 북두칠성에게 수명장수를 기원한다. 이 날 각 가정에서는 주부가 밀전병과 햇과일 등 제물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내거나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족의 무병장수와 가내의 평안을 빈다.
가정에 따라서는 무당을 찾아가 칠성맞이 굿을 한다. 또 밭작물의 풍작을 위해 밭에 나가서 밭제를 지내기도 한다. 칠석날 처녀들은 별을 보며 바느질 솜씨가 좋아지기를 빌고 서당의 학동들은 별을 보며 시를 짓거나 글공부를 잘할 것을 빌었다.
처녀들이 바느질을 잘 하기를 비는 것을 걸교(乞巧)라고 한다. 칠석날 밤이면 궁중이나 민가에서 부인들이 바느질감과 과일을 마당에 차려놓고 바느질 솜씨가 있게 해 달라는 이른바 걸교제(乞巧祭)를 지내는 일이 한(漢)나라 시대에 이미 행해졌다.
이 풍속이 당(唐)나라 시대에 주변 민족들에 전파되었는데 우리의 걸교나 일본의 ‘다나바다마쯔리[붕기제=棚機祭]’는 그 예들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시대 공민왕이 이 날 왕후와 더불어 궁중에서 견우와 직녀성에게 제사를 지내고 백관들에게 녹(祿:녹봉)을 주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궁중에서 연희를 베풀고 선비들에게 명절 과거를 보게 하는 등 중요 명절로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걸교제의 민속화는 실제로 찾기 어렵다. ≪東國歲時記≫에는 인가에서 옷을 햇볕에 말리는 쇄의상(曬衣裳)이 옛 풍속이라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직물이나 바느질은 실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한데 직녀라는 별 이름 자체가 직물(織物)이나 바느질과 관련된다는 관념에서 걸교가 더 중요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근래까지 우리 나라에서는 칠석날 바느질 솜씨를 점치는 풍속이 행해졌다. 처녀들이 장독대 위에다 정화수(井華水)를 떠 놓고, 그 위에 고운 재를 평평하게 담은 쟁반을 올려놓고 바느질 솜씨를 좋게 해 달라고 축원한다.
그 이튿날 나가 봐서 재 위에 무엇이 지나간 흔적이 있으면 영험이 나타났다고 한다. 칠석날에는 칠석차례라 하여 햇벼가 익으면 사당에 천신하고 우물을 깨끗이 청소하고 우물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 출처:칠석[七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한국 세시풍속사전의 칠석날에 대한 설명.
정의
음력 7월 7일로 세시 명절의 하나. 헤어져 있던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만나는 날이라고도 한다.
유래
칠석(七夕)의 유래는 중국의 『제해기(薺諧記)』에 처음 나타난다. 주(周)나라에서 한대(漢代)에 걸쳐 우리나라에 유입되기까지 윤색을 거듭하여 온 것으로 보인다. 설화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옥황상제가 다스리는 하늘나라 궁전의 은하수 건너에 부지런한 목동인 견우가 살고 있었다. 옥황상제는 견우가 부지런하고 착하여 손녀인 직녀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결혼한 견우와 직녀는 너무 사이가 좋아 견우는 농사일을 게을리 하고 직녀는 베짜는 일을 게을리 했다. 그러자 천계(天界)의 현상이 혼란에 빠져 사람들은 천재(天災)와 기근(饑饉)으로 고통받게 되었다. 이것을 본 옥황상제가 크게 노하여 두 사람을 은하수의 양쪽에 각각 떨어져 살게 하였다. 견우와 직녀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애만 태울 수밖에 없었다. 부부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 된 까마귀와 까치들은 해마다 칠석날에 이들이 만나도록 하기 위해서 하늘로 올라가 다리를 놓아주니 이것이 오작교(烏鵲橋)이다.
견우와 직녀는 칠석날이 되면 오작교를 건너 서로 그리던 임을 만나 일년 동안 쌓였던 회포를 풀고 다시 헤어져야 한다. 칠석 다음날 까마귀와 까치의 머리를 보면 모두 벗겨져 있는데 그것은 오작교를 놓기 위해 머리에 돌을 이고 다녔기 때문이라 한다. 칠석날에는 비가 내리는데 하루 전에 내리는 비는 만나서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고, 이튿날 내리는 비는 헤어지면서 흘리는 슬픔의 눈물이라고 한다. 또는 낮에 오는 비는 기쁨의 눈물이고 밤에 오는 비는 슬픔의 눈물이라고 한다.
이 설화의 배경은 독수리별자리[鷲星座]의 알타이르(Altair)별과, 거문고별자리[琴星座]의 베가(Vega)별을 가리키는 것으로 두 별이 은하수의 동쪽과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데서 유래한 듯하다. 이 두 별은 태양 황도상(黃道上) 운행할 때 가을 초저녁에는 서쪽 하늘에 보이고, 겨울에는 태양과 함께 낮에 떠 있으며, 봄날 초저녁에는 동쪽 하늘에 나타나고, 칠석 무렵이면 천장 부근에서 보이게 되므로 마치 일년에 한 번씩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견우성과 직녀성이 일년에 한 번씩 마주치게 되는 천문 현상은 중국의 주(周)나라 때부터 인식하고 있었으며 한(漢)나라에 이르러서 칠석 설화가 형성되고 여러 가지 풍속이 발전하였다.
내용
우리나라도 일찍이 삼국시대에 이 설화와 풍속이 있었던 듯하다. 고구려 고분 벽화 가운데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에 있는 덕흥리 고분 벽화에 견우와 직녀 설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그림이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기록에는 고려 공민왕이 왕후와 더불어 칠석날 궁궐에서 견우성과 직녀성에 제사하고 백관들에게 녹을 주었다고 하였고, 조선조에 와서는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고 성균관 유생들에게 절일제(節日製)의 과거를 실시한 기록이 있다. 궁중 밖의 민간에서도 칠석의 풍속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모습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등의 문헌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칠석날 민간에서는 여러 가지 풍속이 행해졌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옛날 서당에서는 학동들에게 견우직녀를 시제(詩題)로 시를 짓게 하였다. 또 옷과 책을 햇볕에 말리는 폭의(曝衣)와 폭서(曝書) 풍속이 있었다. 여름 장마철에 장롱속의 옷가지와 책장의 책에 습기가 차면 곰팡이가 끼게 되므로 이를 막기 위한 것이다. 한편 여인들이 직녀성에 바느질 솜씨를 비는 걸교(乞巧) 풍속이 있었는데, 걸교는 원래 중국에서 유래한 풍속이다. 칠석날 새벽에 부녀자들이 참외, 오이 등의 과일을 상에 올려놓고 절을 하며 바느질 솜씨가 늘기를 빈다. 저녁에 상 위로 거미줄이 쳐 있으면 하늘에 있는 직녀가 소원을 들어준 것이라 여기고 기뻐한다. 다른 지방에서는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그 위에 재를 담은 쟁반을 올려 놓은 뒤, 별에게 바느질 솜씨가 좋게 해달라고 빌고 다음날 아침 재 위에 흔적이 있으면 영험이 있어 바느질을 잘하게 된다고 믿었다.
별과 조상과 자연과 부처에게 소원을 비는 풍속도 지역과 가정에 따라서 행해졌다. 지역에 따라서 칠석제, 용왕제, 밭제 같은 제사를 지내고 사당에 천신(薦新)하며 밀국수, 밀전병, 호박도래전 등 시절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칠석음식으로 밀전병을 만들어 먹고 칠석놀이라 하여 술과 안주를 갖추어 가무로 밤이 깊도록 놀기도 한다.
지역사례
전북 고창과 태인, 경북 봉화·예천·안동에서는 외와 수박을 차려놓고 조상에 제사를 지낸다. 전북 익산과 군산에서는 칠석날 시암제(샘제)를 지냈다. 마을에서 우물을 깨끗이 치우고 정결하게 한 다음 각 가정마다 시루떡을 쪄서 우물 옆에 두었다. 청년들은 솔불놀이라 하여 달집짓기와 비슷하게 이웃마을과 놀이를 벌여 즐기고 진 마을은 쉬지 못하고 일을 해야 하며, 이긴 편의 마을을 함부로 방문할 수도 없었다. 진안에서는 농현이라 하여 김매기를 끝내고 하루를 쉰다.
경북 안동에서는 부인들이 밤에 까마귀밥이라 하여 담 위에 올려놓고 자손의 명(命)과 복(福)을 빌고 집안일이 잘 되기를 빌기도 했다. 상주에서는 칠성단에 참기름으로 불을 켜서 자손들의 수명장수를 빌었다. 영일에서는 이날 바닷물을 약물이라며 멱을 감는다...
.출처:칠석[七夕] (한국세시풍속사전, 국립민속박물관)
3]. 종교학 대사전의 칠석날에 대한 설명.
칠석[七夕 ]
음력 7월 7일에 행하여지는 연중행사. 중국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에 퍼졌다. 7월 7일을 특별한 제일로 하는 관념은 농경의례에 기원을 두는데, 문헌자료에 남아있는 것으로서는 후한시대의 『사민월령』이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이다. 거기에서는 이날에 서적을 햇볕에 말리는 것 외에, 견우와 직녀의 두 별이 화합하는 것에 맞추어서 사람들은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견우ㆍ직녀). 햇볕에 말리는 것은 의복도 함께 행하여지는데, 의복에 조령이 붙는다는 옛날의 신앙과 함께 7월 7일이 원래 농경의례와 결부된 조령제의 날이었다는 것이 추정된다. 칠석에 점이나 소원을 비는 경우가 많은 것도 원래 농작물의 수확을 점쳤던 것에서 나왔을 것이다. 후한시대의 화상석이나 석조에 보이는 견우ㆍ직녀가 양자 한 쌍으로 우주론적 배치관계를 가지는 것에서 이 시대에도 칠석에 대한 전설이 신앙관념을 배후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남북조시대가 되면서 오래된 신앙적 요소는 불식되어서 연중행사의 하나로서 초가을의 행락의 날이 되었다. 남조양의 『형초세시기』는 7월 7일 밤, 견우와 직녀가 회합하는데, 그때 여성들은 7개의 바늘에 실을 꿰어 바쳐서, 바느질 솜씨가 좋게 해달라고 소원을 빈다고 한다. 견우와 직녀는 부부였는데, 천제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1년에 한 번, 칠석에만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도 후한경부터 서서히 발전하고 있으며, 남북조 중기경에는 직녀가 까치가 하늘에 만든 다리를 건너서 견우를 찾아온다는 줄거리가 고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느질 솜씨를 기원하는 풍습을 걸교전(乞巧奠)이라고 하며, 근데 도시의 번성기나 궁중의 세시기에 보이듯이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여성들의 제일로서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또한 7월 7일은 북두칠성의 제1성인 괴성(魁星)의 탄생일이라고 하며, 괴성이 문운(文運), 특히 과거 시험에서의 운ㆍ불운을 지배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근세의 독서인들은 칠석에 괴성을 제사지냈다.
한국
조선에도 7월 7일에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전설에 의거해서 중국의 걸교전과 마찬가지로 그날 밤 부녀자는 재봉의 능숙을 두 별에 기원한다. 또한 서적이나 의복을 햇볕에 말리기도 하며 한편 농가에서는 이날에는 두 별의 이별의 눈물이 내리기 때문에 이로써 몸을 정결히 하고 머리를 감으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여서 목욕하거나, 천곡귀신이 내려와서 곡물의 수확량을 정하는 날이라고 하여서 휴업한다. 이처럼 중국풍의 성제(星祭) 외에 원래 이 시기에 우리나라 고유의 농경예축의례가 행하여진 것을 알 수 있다.
. 출처: 칠석[七夕]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한국사전연구사)
4]. 종교학 대사전의 칠석(七夕)관련 설명중 나타나는 중국의 걸교전.
걸교전
[乞巧奠 ]
요약 중국에서, 칠석날 밤에 부녀자들이 5색 실을 견우·직녀 두 별에게 바쳐 바느질과 길쌈을 잘하게 해달라고 비는 풍속.
걸(乞)은 빈다는 뜻이고, 교(巧)는 길쌈과 바느질 잘하는 솜씨이며, 전(奠)은 물건을 바쳐 제사지낸다는 의미이다. 당(唐)나라 때 장식을 베푼 망루를 세우고, 이를 걸교루(乞巧樓)라 했는데 한국에서는 걸교라고 하였다.
. 출처: 걸교전[乞巧奠] (두산백과)
[5]. 직녀와 관련된 여러가지 자료들.
1]. 중국 인물사전에 나타나는 직녀.
직녀[織女, zhī nǚ ]
.요약중국 신화, 고사 속 인물
1. 고사의 여주인공.
중국 신화에서 천제의 딸, 혹은 손녀, 외손녀라고 전해오는 그녀는 직녀성의 여신으로, 별명은 칠성낭랑(七星娘娘), 칠성낭(七星娘), 칠서마(七星媽), 칠선고(七仙姑), 천선낭랑(天仙娘娘)이다. 견우직녀 고사의 여주인공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직물과 비단을 짰는데, 하서(河西, 황하 서쪽을 지칭)의 우랑(牛郞, 견우)에게 시집가 직물 짜는 것을 중단했다. 천제가 크게 노하여 이들을 헤어지게 하고는 매년 칠월 칠석에만 만나게 했다. 사람들이 이 날을 명절로 삼았다고 한다.
2. 고문헌의 내용.
직녀는 고문헌에 자주 출현하는데, 『시경』 제9편 「소아대동(小雅大東)」에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유천유한(維天有漢): 하늘에 있는 은하수
감역유광(監亦有光): 살펴보니 또 빛이 난다
기피직녀(跂彼織女): 베틀의 저 베 짜는 여자
종일칠양(終日七襄): 종일토록 일곱 자리 옮기어 앉아 있네
이 밖에 『사기』, 『한서』 등의 역사서에 천제의 외손녀로 소개되어 있다. 또 『회남자』 「숙진훈(俶真訓)」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만약 진인(真人, 도인)이 된다면, 지허(至虛)의 경지에서 느긋하게 행동하고, 멸망되어 아무것도 없는 들에서 소요(逍遙, 슬슬 거닐며 돌아다님)하며······ 우뢰를 신하로 삼고, 과보를 관리로 삼아 부리며, 복희의 딸을 첩으로 두고 직녀를 아내로 둔다!”
당나라 때의 『세화기려(歲華紀麗)』 권 3에는 『풍속통의』의 글을 인용하여 “직녀는 칠월칠석에 은하수를 건널 수 있는데, 까치를 부려서 다리를 놓는다.”라고 전해진다.
후일 직녀는 애인과 부녀, 아동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 출처:직녀[織女, zhī nǚ] (중국인물사전, 한국인문고전연구소)
2]. 우랑직녀[牛郎织女 ]. 도서출판 황매희에 설명된 자료임.
백사전전설(白蛇传传说), 맹강녀전설(孟姜女传说), 양축전설(梁祝传说)과 더불어 중국 4대 민간전설의 하나로 중국, 한국, 일본에 전해지며 우리나라에서는 견우직녀(牽牛織女)로 불리며 7월 칠석의 풍습과 관련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아주 오랜 옛날에 난양(南阳, 남양)의 성 서쪽의 우가(牛家) 마을에 우랑(牛郎)이라는 고아가 형과 형수와 더불어 살고 있었다. 형수는 그를 못 마땅이 여겨 그에게 아홉 마리의 소를 내어주고는 10마리의 소를 데려오지 않으면 영원히 집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하며 그를 내쫓았다. 우랑은 집을 떠나 낙담해 하던 중 한 도인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푸뉴산(伏牛山, 복우산)에 올라 한 마리의 병든 누렁소를 발견하였다. 그는 정성을 다하여 소를 돌보아 주었고 마침내 이 늙은 소가 원래 천상의 금우성(金牛星)으로 벌을 받아 인간세계로 내쳐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마침내 그 소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이 늙은 소의 지시에 따라 우랑(牛郎)은 선녀들이 인간세계로 내려와 목욕하며 놀던 장소로 가서 몰래 그중 하나의 옷을 가져왔는데 그것은 직녀(织女)의 옷이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아이를 낳았으나 이는 하늘의 규범을 어기는 일이어서 직녀는 하늘나라로 불려가게 되었다. 늙은 소는 우랑(牛郎)에게 그가 죽고 난 후 가죽으로 신발을 만들어 언덕에 올라가면 구름을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알려주었고 마침내 우랑은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바로 직녀를 만나려고 하였으나 서왕모(西王母)가 은비녀를 은하수로 변하게 하여 가는 길을 막아버렸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까마귀가 이들의 사랑에 감동하여 오작교를 만들어 마침내 우랑과 직녀가 다시 상봉할 수 있게 되었다. 서왕모도 이 모습에 감동하여 매년 음력 7월 7일 오작교에서 이들 두 사람의 상봉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매년 칠석(七夕)에 우랑(牛郎)은 두 아이를 데리고 하늘나라로 올라가 직녀와 상봉할 수 있게 되었다.
고대 서적의 기록에는 민간에서는 직녀가 총명하고 아름다우며 다재다능하다고 여기고 있어 7월 7일 저녁에 직녀성을 향해 지혜를 달라고 간절히 기원하면 어리석음이 없어지고 눈치가 빨라지며 손재주가 좋아질 수 있다고 전해져 이날은 여자들이 마당에 모여 새 옷을 입고 우랑성(牛郎星)과 직녀성(织女星)을 바라보며 절을 하며 상을 펼쳐 과일과 건과 등을 차려놓고 바늘에 실을 꿰며 색실을 잇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가 최초로 나온 것은 시경(诗经)의 소아(小雅) 다퉁(大东)으로 여기에서는 우랑은 견우(牵牛)로 칭해지고 있으며 당시의 우랑과 직녀는 하늘나라의 별을 지칭하고 사랑에 관한 묘사는 보이지 않는다.
서한(西汉) 시기 우랑직녀는 두 사람의 신(神)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우랑직녀 설화의 발원지에 대해서 비교적 신빙성이 높은 곳은 허난성 난양시(南阳市, 남양시)로 여겨지며 더불어 시안시 창안구(长安区, 장안구)에서 출토된 우랑직녀상(牛郎织女像)을 근거로 산시성(陕西省, 섬서성) 시안시(西安市)라는 설, 최근 우랑직녀의 이야기가 염황대전(炎黄大战) 이후 염(炎)씨의 부락이 남쪽으로 천도하며 발생한 이야기라는 설이 있다.
.출처: 우랑직녀 [牛郎织女] (중국행정구획총람, 2010. 8. 1., 도서출판 황매희)
[6]. 칠석놀이.
1]. 대전광역시에 전해지는 부사칠석놀이[ 芙沙七夕─ ]
부용사득이놀이 |
놀이 |
현대 |
세시풍속놀이 |
음력 7월 7일 |
정의
음력 7월 7일 대전광역시 중구 부사동(芙沙洞)에서 행해지는 마을공동체 놀이.
개설
음력 7월 7일 대전광역시 중구 부사동(芙沙洞)에서 풍장패를 앞세워 길놀이·합궁놀이·황새샘치기·칠성굿놀이·견우직녀 상봉놀이·장치기놀이로 이어지는 마을공동체 놀이이다. 그 외에도경상남도 김해군 부서(府西: 진영읍)의 알촌과 하계(荷溪)마을의 칠석놀이, 충청남도 금산군 진악산의 송계놀이 및 당진군 송산면 부곡리의 풍년제, 전라북도 정읍의 솔불놀이, 전라남도 여수 일대의 진세(進歲)놀이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칠석날에는 시절음식으로 밀전병과 과일을 먹는다. 음식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터줏가리·부엌·마루·미당 등 집안의 신들에게 먼저 올린 다음 먹었다. 대감과 성주에게 고사를 지내며 단골만신을 찾아가 빌기도 한다.
이날 여자들은 바느질 솜씨가 늘길 빌었고, 저녁에는 강강술래를 하고 그네를 뛴다. 매년 6월 그믐에서 7월 10일까지 행하는 알촌과 하계마을의 칠석놀이는 집집마다 술과 안주를 갖추고 긴 장대에 깃발을 달아 잡악(아악 이외의 여러 가지 속악)을 베풀어서 태종신(太宗神)에게 제사지낸다. 모두 모여서 술을 마시며 씨름으로 승부를 가른다. 시기적으로 농사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여러 번 폐지되었지만, 호랑이가 출몰하여 가축을 물어 죽인다고 하여 부득이 재개하였다.
연원 및 변천
부사동의 칠석놀이는 백제시대 두 연인 윗말의 부용(芙蓉)과 아랫말의 사득(沙得)의 비극적인 연애고사에 기원을 둔 촌락신화에서 유래한다.
신라가 백제를 침략하자 사득은 전장에 나가 전사한다. 부용은 보문산 선바위(아들바위)에 올라 사득을 그리워하며 기다리다 실족사 한다. 몇 해 후 마을에 가뭄이 들고 샘물이 마르자 멀리 소재한 황새샘에서 물을 길어온다. 부용이 윗말의 한 노인에게 현몽하여 사득과의 영혼결혼을 원하니 앙숙이던 두 마을은 화해하고 샘고사를 치른 후 이를 성사시킨다. 그러자 샘물이 펑펑 솟았고 이 샘을 부용과 사득의 이름을 따 ‘부사샘’이라고 불렀다.
두 마을은 매년 칠석마다 보문산 선바위에서 부용을 위로하는 제사(선바위 치성)를 올렸고 부녀자를 중심으로 제물을 진설한 후 비손하며 소지를 올린다.
부사샘을 깨끗이 치우고 샘고사를 올리는데, 풍장을 동원하여 길놀이, 기세배, 샘풀이, 샘치기노래, 고사가 결합된 형식으로 전승된다. 이들 두 사람의 넋을 달래기 위한 합궁놀이는 마을 전체가 행하는 모의 결혼행위로서 일종의 마을축제로 전승되고 있다.
1938년 이후 일제시대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의해 중단되었다가 광복 후 다시 계승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그 맥을 잇지 못하였다가 1990년 마을 거주 장택수씨가 동네 어른들의 고증에 기반을 두고 발굴하여 이후, 1993년 대전대학 국문학 교수 한상수씨의 고증을 받아 부활시켰다.
1992년 대전광역시 중구 민속놀이로 선정되었고, 1993년 10월 대전시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1994년 10월 21일 제3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현재까지 부사칠석놀이보존회를 결성하여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칠석날은 걸교(乞巧)라고 하여 처녀들이 견우와 직녀성에 대고 바느질 솜씨가 늘기를 빌었다. 유생들은 두 별을 제목으로 하여 시를 지으면 문장이 숙달된다고 믿었다. 또 ‘칠석차례’라 하여 올벼를 사당에 천신(薦新)하였고, 샘을 깨끗이 치우고 샘고사를 지냈다. 칠석제 또는 칠성제(七星祭)라 하여 부인들이 밤에 칠석단을 모아놓고 집안의 부귀와 자손의 명(命)과 복을 빌었다.
논산 지역에서는 두레의 김매기를 마치고 온 동민이 한자리에 모여 품값의 결산을 겸한 두레 먹이를 했다. 또한 떡을 해서 논에 용신제(龍神祭)·밭제(田祭)를 모셨고, 김매기와 밭매기가 끝났다 하여 하루를 쉬었다.
부사동 칠석놀이는 순차적인 놀이가 관행화된 성장의례의 생산성을 기원하는 세시풍속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있다. 이는 견우직녀 설화와 유사한 부용·사득 상봉놀이가 바탕이 된 것으로 농작물 성장의례에 부합되는 공동체 놀이라고 하겠다.
. 출처: 부사칠석놀이 [芙沙七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경남 김해, 충남 금산, 충남 당진, 전북 정읍, 전남 여수지역의 칠춸칠석 관련 풍속.
부사 칠석놀이, 경남 김해군 부서(府西)의 알촌과 하계(荷溪)마을의 칠석놀이, 충남 금산군 진악산의 송계놀이, 충남 당진군 송산면 부곡리에서 칠석날 행했던 풍년제, 전북 정읍의 솔불놀이, 전남 여수 일대의 진세놀이.
칠석놀이
[ 七夕- ]
분야계절날짜다른이름관련정일
놀이 |
가을(음력 7월) |
음력 7월 7일 |
송계놀이, 풍년제, 솔불놀이, 진세놀이 |
칠석(七夕) |
정의
음력 7월 7일 칠석날에 풍장패를 앞세워 길놀이, 합궁놀이, 황새샘치기, 칠성굿놀이, 견우직녀 상봉놀이, 장치기놀이로 이어지는 공동체 놀이. 대전광역시 중구 부사동(芙沙洞)의 칠석놀이를 비롯하여 경남 김해군 부서(府西)의 알촌과 하계(荷溪)마을의 칠석놀이, 충남 금산군 진악산의 송계놀이, 충남 당진군 송산면 부곡리에서 칠석날 행했던 풍년제, 전북 정읍의 솔불놀이, 전남 여수 일대의 진세놀이 등이 칠석놀이로 보고된 바 있다.
유래
대전광역시 중구 부사동에서는 칠석날 칠석놀이를 행하는데, 부사동은 보문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보문산을 경계로 남쪽으로 대사동과 호동이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으로 문창동, 동쪽으로 석교동, 서쪽으로 대사동과 대흥동 일부가 동계(洞界)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전승되는 칠석놀이는 백제시대 두 연인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일종의 촌락신화(村落神話)의 형태로 볼 수 있는데, 전체적인 서사 내용을 화소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백제시대에 부사동은 윗말과 아랫말로 나뉘어져 있다. 두 마을은 항상 갈등을 겪는다. ② 윗말의 부용(芙蓉)이라는 처녀와 아랫마을의 사득(沙得)이라는 총각이 사랑에 빠진다. ③ 신라가 백제를 침략하자 사득이는 백제군으로 징집되어 전장에서 전사한다. ④ 부용이는 매양 보문산 선바위에 올라 사득이를 그리워하다 실족하여 죽는다. ⑤ 몇 해 후, 마을에 가뭄이 들어 샘물이 마른다. 그래서 황새샘까지 가서 물을 길어온다. ⑥ 윗말의 한 노인 꿈에 부용이가 현몽하여 가뭄 해소의 대가로 사득이와 영혼결혼을 시켜줄 것을 원한다. ⑦ 아랫말의 한 노인 꿈에 사득이가 현몽하여 부용이와 같은 말을 건넨다. ⑧ 윗말과 아랫말 사람들이 화해하고 칠석날에 함께 모여 샘고사를 지낸 후 영혼결혼을 성사시킨다. ⑨ 샘물이 펑펑 솟는다. ⑩ 샘을 부용과 사득의 첫 자를 따서 ‘부사샘’이라고 일컫는다.
부사동이라는 마을의 이름도 이 촌락신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촌락신화의 내용을 토대로, 부사동의 칠석놀이가 구비설화에서 삼국시대부터 형성(③참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려사(高麗史)』권38 세가(世家)38 공민왕(恭愍王) 2년(1353)에 “임신일에 칠석이므로 왕과 공주가 내정 뜰에서 견우와 직녀에게 제사지냈다(壬申 七夕 王與公主祭牽牛織女于內庭).”라는 것으로 보아 칠석놀이는 칠석제(七夕祭)에 근거하고 있다. 칠석놀이가 부용과 사득이라는 두 영혼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두 마을의 결합(화합)까지 의미하기 때문에 더욱 강한 전승력을 발휘했을 것으로 보인다.
두 마을은 매년 칠석에 보문산 선바위에서 부용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부사샘을 깨끗이 치운 후에 샘고사를 올렸으며, 부용과 사득의 넋을 달래기 위해 합궁놀이를 하였다. 오늘날에는 선바위에서 부용을 위로하는 제사를 선바위 치성이라고 하며, 부녀자를 중심으로 제물을 진설한 후 비손하며 소지를 올리는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샘고사는 풍장을 동원하여 길놀이, 기세배, 샘풀이, 샘치기노래, 고사가 결합된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합궁놀이는 마을 공동체가 행하는 모의 결혼 행위로서 일종의 마을축제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부사동의 칠석놀이는 1930년대까지 온전한 형태로 전승되다가 단절된 후 최근에 재현을 시도하였다. 1992년 대전광역시 중구 민속놀이로 선정된 이래 1993년에 대전시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1994년에 제3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현재 부사칠석놀이보존회(회장 김준헌)가 결성되어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내용
현재까지 조사 보고된 칠석놀이를 살펴보면, 전북 정읍의 솔불놀이는 두 동네가 달집짓기를 다투는 성장의례 관련 놀이이며, 전남 여수 일대의 진세놀이는 칠석날을 ‘진세먹는 날’이라고 하여 3세나 5세가 된 아이가 있는 집에서 술과 음식을 장만해 마을 사람들에게 대접하고 노는 날이다. 대전광역시 중구 부사동 칠석놀이의 놀이 구성은 다음과 같다...
인접국가사례
중국에서는 칠석이 여인들의 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여아절(女兒節)이라 부르는데, 이는 중국 전통 명절 중의 부녀절이다...
의의
여름철 세시풍속과 관련한 놀이가 백중놀이 외에 별로 보고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전 중구 부사동 칠석놀이는 성장의례의 생산성을 기원하는 세시놀이라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있다. 부사동 칠석놀이의 핵심 단위는 견우직녀 설화와 유사한 부용·사득 상봉놀이가 바탕이 된 것인데, 백중놀이와 함께 농작물 성장의례에 부합하는 공동체 놀이이다. 연인이 이루지 못한 인연을 맺어주고 달래주는 놀이를 통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시에 마을의 화해와 화합을 기하고 있다. 촌락신화가 전승 지역의 세시풍속과 결부하여 길놀이, 합궁, 샘치기 같은 형태로 놀이화된 것인데, 칠석세시에 순차적인 놀이가 관행화되어 전승되고 있는 점은 여느 지역에서 발견할 수 없는 특징이다. 다만 설화의 놀이화라는 한계도 지니고 있다. 농악의 경우에도 대전 지역의 웃다리농악과 동일하다는 점이 특이하다. 특히 농악과 어울려 불리는 ‘황새샘치는 노래’나 ‘부용·사득이 노래’는 놀이의 독자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사칠석놀이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수상한 후 보존회를 통해 관리되는 공동체 유산이다.
. 출처: 칠석놀이 [七夕-] (한국세시풍속사전)
[7].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견우와 직녀.
견우직녀설화
[ 牽牛織女說話 ]
유형성격
작품 |
설화, 유래설화 |
정의
견우와 직녀가 한 해에 한 번 만나게 된다는 칠월칠석의 유래설화.
내용
시기적으로 매년 칠월칠석이 되면, 두 별이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그 위치가 매우 가까워지게 되는데, 이러한 사실로부터 설화가 생겨났다.
이 설화의 발생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중국 후한(後漢) 때에 만들어진 효당산(孝堂山)의 석실 속에 있는 화상석(畫像石: 장식으로 신선, 새, 짐승 따위를 새긴 돌)의 삼족오도(三足烏圖)에 직녀성과 견우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전한(前漢)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다.
이 설화의 가장 오래된 예는 진(晉)나라 종름(宗懍)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서 발견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408년(광개토왕 18)에 축조된 대안 덕흥리(大安德興里: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 고구려고분벽화에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앞에는 견우, 뒤에는 개를 데리고 있는 직녀가 그려져 있는 것이 발견된다.
기록상으로는 『고려사』 공민왕조에 왕이 몽고인 왕후와 더불어 안뜰에서 견우와 직녀에게 제사를 지낸 기사가 처음 보인다. 이 설화는 신앙과 함께 우리나라 전국에 전승되어 있다.
원래 직녀는 하느님[天帝]의 손녀로 길쌈을 잘하고 부지런했으므로, 하느님이 매우 사랑하여 은하수 건너편의 하고(河鼓)라는 목동(견우)과 혼인하게 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신혼의 즐거움에 빠져 매우 게을러졌으므로 하느님은 크게 노하여 그들을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다시 떨어져 살게 하고, 한 해에 한 번 칠월칠석날만 같이 지내도록 했다.
은하수 때문에 칠월칠석날도 서로 만나지 못하자, 보다 못한 지상의 까막까치들이 하늘로 올라가 머리를 이어 다리를 놓아 주었다. 그 다리를 ‘까막까치가 놓은 다리, 즉 ‘오작교(烏鵲橋)’라 하며, 칠석이 지나면 까막까치가 다리를 놓느라고 머리가 모두 벗겨져 돌아온다고 한다.
또한, 이날 오는 비는 ‘칠석우(七夕雨)’라 하여, 그들이 너무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라고 하며, 그 이튿날 아침에 오는 비는 이별의 눈물이라고 전한다.
「견우직녀설화」는 예로부터 동양권에서 무수히 많은 문인들의 시문의 주제로 사용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찍이 고려 때 이인로(李仁老)의 「칠석우」, 이제현(李齊賢)의 「칠석」, 이곡(李穀)의 「칠석소작(七夕小酌)」, 조선시대 정철(鄭澈)의 「차광한루운(次廣寒樓韻)」, 김정희의 「칠석칠률(七夕七律)」, 여류 시인들의 것으로 이옥봉(李玉峯)의 「칠석가」, 삼의당(三宜堂)의 「칠월칠석」, 운초(雲楚)의 「강루칠석(江樓七夕)」, 정일헌(貞一軒)의 「칠석」 등을 들 수 있다.
그 밖에 「춘향전」을 비롯한 여러 고전소설, 「규원가(閨怨歌)」·「해조가(諧嘲歌)」·「과부가」·「농가월령가」·「화조가」·「사미인곡」과 같은 가사, 또는 시조·민요들에도 「견우직녀설화」가 주제로 되어 있는 것이 많다.
이 설화는 칠월칠석의 민속과 함께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 정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이야기로 평가된다.
. 출처: 견우직녀설화 [牽牛織女說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8]. 칠월 칠석관련 중국 풍경 및 기타.
1]. 중국풍경.
1. 중국 칠석 합동결혼식
[인민망 한국어판 8월 7일] 지난 6일 중국 허베이(河北)성 황화(黃驊)시 난하이공원(南海公園)에서 칠석절(七夕節•음력 7월 7일)을 맞아 ‘손을 잡고 행복을 찾자, 사랑으로 부담을 덜자’라는 공익 합동결혼식을 개최했다. 중국 전통 혼례복을 입은 10쌍의 신혼부부는 두 손을 맞잡고 결혼식장으로 입장했고 ‘간략한 결혼식’을 실천하자는 이념을 실현하며 혼례를 마쳤다. (번역: 은진호)
※ 칠석은 견우와 직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다룬 전설로 연인들 간의 사랑을 확인하는 명절로 발전했다. 중국에서 가장 낭만적인 명절로 ‘중국의 밸런타인데이’로 불리기도 한다.
원문 출처: 신화망(新華網)
http://kr.people.com.cn/n3/2019/0807/c203281-9604157.html
2. 판빙빙, 中 칠석맞이 셀카 공개...한층 마른 얼굴.
2019.8.9. OSEN 지민경기자 보도뉴스.
http://osen.mt.co.kr/article/G1111201904
3. 미쓰에이 출신 지아, 해체 후 근황은? 재벌2세 남자친구 엘로이와 공개 연애 중.
2019.8.7. 톱스타뉴스 권미성기자 보도뉴스.
7일 중국 시나 연예에 따르면 지아와 엘로이는 칠석(음력 7월 7일)을 맞아 달콤한 데이트를 즐겼다.
http://www.topstar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655474
2]. 한국 풍경
1. 수원전통문화관, 세시풍속-북새통 ‘칠석’ 행사 진행
견우성과 직녀성의 오작교 만남, 칠석
2019.8.5. 이뉴스투데이 김승희 기자 보도뉴스.
http://www.enews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27327
2. 주민화합 한마당 된 '부사 칠석제'
2019.8.8. 디트 NEWS 24 이 영지 기자 보도뉴스
http://www.dtnews24.com/news/articleView.html?idxno=555206
3. 칠월칠석, 전주 기록문화유산 ‘완판본’ 만나는 날
2019.8.8. 전북일보 김태경 기자 보도뉴스.
4. '만남·사랑·화합'의 자리 편 칠석날 한마당
2019.8.7. 연합뉴스 서진발 기자 보도뉴스
울산문화사랑회, 전통차·학춤·견우직녀·국악 등 연출
https://www.yna.co.kr/view/AKR20190807024600057?input=1195m
3]. 주한 베트남관광청 "한베 여행-비즈니스 오작교될 것." 유교 경전 시경에 언급된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난다는 음력 칠월 칠석.
음력 칠월 칠석(2019년은 양력 8월 7일). 한나라시절 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걸쳐 동아시아에서 세계종교로 성립된 유교.
견우.직녀라는 용어나, 음력 칠월 칠석, 오작교라는 용어는 유교문화권의 공통적인 용어.
주한 베트남관광청 "한베 여행-비즈니스 오작교될 것.” 세종대서 주한 베트남관광청 개청 축하연...박양우 장관 “친구의 나라"
2019.06.28. 한경닷컴 박명기 기자 보도뉴스.
"지난해 베트남을 찾은 관광객 350만 명, 베트남은 한국의 2번째 관광시장이다.”
응우엔 응옥 티엔(Nguyen Ngoc Thien) 베트남 문화체육부 장관이 주한 베트남관광청 개청을 축하하면서 “주한 베트남관광청이 한베 여행-비즈니스 협력 오작교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한국에서도 친근한 ‘오작교’는 음력 칠월 칠일 ‘칠석’에 견우와 직녀가 헤어진 것을 멈추고 다시 만나는 장소로 까마귀와 까치가 다리를 만들어주는 전설이 깃든 이야기다...
http://gametoc.hankyung.com/news/articleView.html?idxno=52011
4]. 몽고.
몽고는 내몽고(네이멍구, 內蒙古自治區)가 중국영토가 되어, 춘절,중추절, 청명절, 단오절 및 24절기, 그리고 대보름.칠석.중양절,동지등 모든 명절들이 중국 기준으로 적용되는 지역입니다. 외몽고(外蒙古)지역은 별도의 독립 국가입니다.
5]. 싱가포르 풍경.
싱가포르 칠석. 가방
사랑스러운 핑크 컬러+로맨틱한 진주 스트랩으로 데이트룩에 딱인 ‘찰스앤키스 하트백’ - 인사이트 (insight.co.kr)
6]. 대만(차이니스 타이페이) 풍경.
[오늘의 세계]대만 '칠월칠석 커피' 커플만 오세요 < 국제 < 기사본문 - OBS경인TV (obsnews.co.kr)
@ 역사와 전통을 승계하며, 수천년 유교를 구심점으로 삼으면서, 시대변화를 적절히 반영해야 할 것입니다. 동아시아 유교국가들(중국,한국,베트남,몽고)은 수천년 전통의 유교와, 유교대학(태학.국자감.중국 국자감에서 이어진 베이징대)을 중심으로 漢字의 영향을 받으며 하느님(天)과 神明, 공자님을 숭배해 왔습니다. 한국은 고구려 태학.백제 오경박사, 통일신라 국학, 고려 국자감, 조선 성균관(해방후에 성균관대로 정통승계)이 있었고, 베트남은 국자감이 있었습니다. 베트남 화폐에 국자감이 새겨진건, 한국화폐의 유교적 표상인 세종대왕,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신사임당, 거북선처럼 오랜 유교문화 영향입니다. 몽고는 차강사르라는 음력설에 24절기 유교문화가 수천년 유교문화의 전통을 나타냅니다. 2차대전후의 신생 싱가포르와 차이니스 타이페이도 유교문화권입니다.십수억명의 동아시아 세계종교 유교신자.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한국 최고(最古, 最高)대학 성균관대나 한국 유교전통의 해방후 상황에 대해 살펴보고, 현재에도 이어지는 행태등(수천년 유교문화 전통이라, 국가나 집권정부 차원에서 제재하지 않는한 끊임없이 이어지는게 전통문화들임)에 대해 자료인용을 하면서 강제.불법의 일본 강점기 잔재세력들이 준동하는 상황에 대처하고 한국의 전통주권이나 세계사의 학문적 정설(定)을 중심으로 교육.연구자료로 활용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자료.
1. 유교는 하느님이 인간창조(天生蒸民)하신 점을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입니다. 하느님(天, 태극과 연계)을 최고신으로 하여 여러 하위신이 계십니다. 유교에서는 하느님(天)을 초월적 절대자로 보고 숭배해왔습니다. 공자님은 하늘이 내려보내신 성인. 성인임금(文宣帝이신 공자님 이전의 요순우탕도 성인임금이심)이시자, 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이 점이 중요합니다. 공자님의 가장 큰 업적은 혼란한 춘추전국시대에 은주시대에 믿어온 우주만물의 지배자이시자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天)의 초월적 존재를 많은 제자들과 제후들에게 계승시키시고 가르치신 점입니다
http://blog.daum.net/macmaca/3127
2. 해방이후 성균관대.유교 기득권은 학교교육(국사 성균관,세계사 유교, 윤리의 유교교육, 국어.한문의 삼강오륜등)에서 나옵니다.한국에서는 성균관대가 최고(最古,最高) 대학 학벌입니다. 한국의 Royal대는 국사에 나오는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한 성균관대. 세계사 반영시 교황 윤허 서강대도 국제관습법으로 성대 다음 Royal대 예우. http://blog.daum.net/macmaca/2560
3. 해방후 유교국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지위는 성균관대로 계승,제사(석전)는 성균관으로 분리.최고제사장 지위는 황사손(이원)이 승계.한국의 Royal대는 성균관대. 세계사 반영시 교황 윤허 서강대도 성대 다음 국제관습법상 학벌이 높고 좋은 예우 Royal대학.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 없음.
http://blog.daum.net/macmaca/2967
4. 1915년 조선총독부 포교규칙은 신도.불교.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였는데, 일본항복으로 이들 강점기 포교종교는 종교주권은 없는상태임. 일제강점기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의 일원인 한국유교를 인정않았음.
http://blog.daum.net/macmaca/2632
5. 한국은 수천년 동아시아세계종교 유교,하느님,조상신,공자 나라.최고제사장은 고종후손 황사손(이원).5,000만이 조선성명 유교한문성씨.본관 의무등록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신도(불교),불교,기독교는 주권없음.일제강점기 유교를 종교로 불인정.해방후 교육은 유교가 주류.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이승만)연설문.우리나라 종교 유교 강조,유교 교훈지켜 예의지국 백성이 되자고 설파.아세아 동방 모든나라가 다 유교의 덕화 입었다고 하시며,유교의 교훈 지켜 예의지국 백성이 되자고 훈시.삼강오륜 중시연설.
http://blog.daum.net/macmaca/2803
6. 하느님에 대드는 불교일본의 성씨없는 점쇠賤民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고 예수보다 높다고 자기들이 들여온 기독교의 신부억압과, 목사 고문.구타.
http://blog.daum.net/macmaca/3044
7. 한국인은 행정법.관습법상 모두 유교도임. 가족관계의 등록등에 관한 법률 제9조 제2항 등에 의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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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세계사로 보면 한나라때 동아시아 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가 성립되어 지금까지 전승. 이와 함께 한국 유교도 살펴봄.
한국 국사는 고려는 치국의 도 유교, 수신의 도 불교라고 가르침. 고려시대는 유교 최고대학 국자감을 중심으로, 고구려 태학, 백제 오경박사, 통일신라 국학의 유교교육을 실시함. 유교사관 삼국사기가 정사(正史)이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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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한국은 수천년 세계종교 유교나라.불교는 한국 전통 조계종 천민 승려와 주권없는 일본 불교로 나뉘어짐.1915년 조선총독부 포교규칙은 후발 국지적 신앙인 일본신도(새로 만든 일본 불교의 하나).불교.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였는데,일본항복으로 강점기 포교종교는 종교주권 없음.부처는 브라만교에 대항해 창조주를 밑에 두는 무신론적 Monkey임.일본은 막부시대 불교국이되어 새로생긴 성씨없는 마당쇠 천민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다고 주장하는 불교 Monkey나라.일본 신도는 천황이 하느님보다높다고 주장하는 신생 불교 Monkey임.한국은 헌법전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보장되어, 일본에 선전포고한 상태가 지속되는 나라임.생경하고 급격하게 새로 생긴 마당쇠 천민 천황이 세운 일제 강점기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에 남겨진 패전국 일제 잔재며, 마당쇠 천민 학교며, 부처 Monkey.일본 Monkey를 벗어날 수 없는 불교.일본Monkey 천민학교로, 한국 영토에서 축출해야 되는 대상임. 한국 영토에 주권이나 학벌같은건 없이 대중언론에서 덤비며 항거하는 일제 잔재에 불과함.한국은 조선성명 복구령에 따라 모든 국민이 주민등록에 유교의 본관과 성씨를 등록하는 행정법상 유교국가이고, 설날.추석등 유교 명절 쇠는 유교국가임.http://blog.daum.net/macmaca/2632
10. 일본 신도는 일본 막부시절 전 주민을 절에 등록한후 일본의 종교체질이 왜곡된후 이를 기반으로 19세기에 독특하게 형성된 불교적.無神論的(後發局地的) Monkey사상으로 판단됨. 부처의 불교는 원래 창조주인 범천에 대항해 일어난 무신론적 Monkey사상인데, 고대에 여러 나라들에 왕성한 포교를해서 널리 퍼졌지만, 중국이나 한국같은 전통 유교국에서는 핍박을받아왔고, 승려들은 공식적인 교육기관도 없이 체계적인 교육도 받지 못해왔으며, 사회적 지위도 별로 높지 않았고, 유교에 빌붙어서 유교의 하부 사상으로 유교적 풍토에 적응해 온 외래 포교종교임.
미국은 적어도 창조주나 하느님을 부정하지는 않는데, 창조주보다 높다는 부처원숭이 불교국가가 된 일본. 막부시대 이후 전 주민을 절에 등록하여 기독교에 대항한 이후, 불교 원숭이 국가가 된 일본. 불교에 기반한 일본 신도는 원숭이 일본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다고 예수보다 높다고, 한국 강점기때 기독교를 탄압함. 그리고 국지적 일본 신도와 일본 불교로 세계종교 유교(중국.한국.베트남.몽고 및 전세계 화교)의 일원이던 조선.대한제국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 정도로 오도하다가 패전국이 됨. http://blog.daum.net/macmaca/2596
11. 한국에서는 Royal대인 성균관대가 최고(最古,最高) 대학 학벌. 세계사를 반영시 관습법적으로 교황 윤허 Royal 서강대도 성대 다음 Royal대로 두 대학이 가장 학벌이 높고 좋음. 서울대는 한국에 주권이나 학벌같은 건 없음. 단지 마음대로 등록하던 여러 신문에 남아있던, 친일부왜배들이 성균관대에 도전하면서 위세를 떨치고 있지만, 을사조약.한일병합이 무효인 나라에서 일본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주권없고 학벌없는 대학임은 변치 않음. http://blog.daum.net/macmaca/2260
12. 유교의 내세관(來世觀)과 기복신앙(祈福信仰) 측면에 대한 고찰.
http://blog.daum.net/macmaca/800
13. 유교국가의 전통적 특징중 하나는 호적(戶籍)제도였음. 한국과 중국의 호적제도에 관하여! http://blog.daum.net/macmaca/2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