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Ⅰ. 서 론 ‥‥‥‥‥‥‥‥‥‥‥‥‥‥‥‥‥‥‥‥‥ 2
1. 문제제기‥‥‥‥‥‥‥‥‥‥‥‥‥‥‥‥‥‥‥‥‥‥‥‥‥ 2 2. 연구방법‥‥‥‥‥‥‥‥‥‥‥‥‥‥‥‥‥‥‥‥‥‥‥‥‥ 4Ⅱ. 묵시적 종말론의 이해 ‥‥‥‥‥‥‥‥‥‥‥‥‥‥‥‥ 6
1. 유 래 ‥‥‥‥‥‥‥‥‥‥‥‥‥‥‥‥‥‥‥‥‥‥‥‥‥ 6
1)묵시문학의 태동 ‥‥‥‥‥‥‥‥‥‥‥‥‥‥‥‥‥‥‥‥‥‥ 6
2)포로후기 ‥‥‥‥‥‥‥‥‥‥‥‥‥‥‥‥‥‥‥‥‥‥‥‥‥ 6
3)중 간 기 ‥‥‥‥‥‥‥‥‥‥‥‥‥‥‥‥‥‥‥‥‥‥‥‥‥ 7
4)예 수 ‥‥‥‥‥‥‥‥‥‥‥‥‥‥‥‥‥‥‥‥‥‥‥‥‥‥ 8
2. 특 징 ‥‥‥‥‥‥‥‥‥‥‥‥‥‥‥‥‥‥‥‥‥‥‥‥‥ 9
1)문학적 특징 ‥‥‥‥‥‥‥‥‥‥‥‥‥‥‥‥‥‥‥‥‥‥‥ 9
2)신학적 특징 ‥‥‥‥‥‥‥‥‥‥‥‥‥‥‥‥‥‥‥‥‥‥‥ 11
3. 신약성서와 묵시문학 ‥‥‥‥‥‥‥‥‥‥‥‥‥‥‥‥‥‥ 14
1)예수와 묵시문학 ‥‥‥‥‥‥‥‥‥‥‥‥‥‥‥‥‥‥‥‥‥‥ 14
2)바울과 묵시문학 ‥‥‥‥‥‥‥‥‥‥‥‥‥‥‥‥‥‥‥‥‥‥ 15
3)복음서와 묵시문학 ‥‥‥‥‥‥‥‥‥‥‥‥‥‥‥‥‥‥‥‥‥ 15
4)유대묵시와 기독교묵시의 관계 ‥‥‥‥‥‥‥‥‥‥‥‥‥‥‥‥‥16
Ⅲ. 데살로니가 전서 주석 ‥‥‥‥‥‥‥‥‥‥‥‥‥‥‥‥ 17
1. 데살로니가 전서 개관 ‥‥‥‥‥‥‥‥‥‥‥‥‥‥‥‥‥‥ 17
1)바울서신에서 데살로니가 전서의 독특한 위치 ‥‥‥‥‥‥‥‥‥‥ 17
2)데살로니가 전서에 대한 역사적 접근 ‥‥‥‥‥‥‥‥‥‥‥‥‥‥ 17
3)데살로니가 전서에 대한 문학적 접근 ‥‥‥‥‥‥‥‥‥‥‥‥‥‥ 20
2. 본문 주석(살전 4:13-5:11) ‥‥‥‥‥‥‥‥‥‥‥‥‥‥‥‥ 21
1)살전 4:13-4:18 주석 ‥‥‥‥‥‥‥‥‥‥‥‥‥‥‥‥‥‥‥‥ 21
2)살전 5:1-5:11 주석 ‥‥‥‥‥‥‥‥‥‥‥‥‥‥‥‥‥‥‥‥‥ 24
Ⅳ. 바울의 묵시적 종말사상 ‥‥‥‥‥‥‥‥‥‥‥‥‥‥‥ 28
1. 구 조 ‥‥‥‥‥‥‥‥‥‥‥‥‥‥‥‥‥‥‥‥‥‥‥‥‥ 29
1)두 세대론 ‥‥‥‥‥‥‥‥‥‥‥‥‥‥‥‥‥‥‥‥‥‥‥‥ 29
2)종말론적 구원의 실재 ‥‥‥‥‥‥‥‥‥‥‥‥‥‥‥‥‥‥‥‥ 31
2. 의 미 ‥‥‥‥‥‥‥‥‥‥‥‥‥‥‥‥‥‥‥‥‥‥‥‥‥ 35
Ⅴ. 결 론 ‥‥‥‥‥‥‥‥‥‥‥‥‥‥‥‥‥‥‥‥ 38⊙참고문헌 ‥‥‥‥‥‥‥‥‥‥‥‥‥‥‥‥‥‥‥‥‥‥‥‥‥ 39
Ⅰ. 서 론
1. 문제제기
6여년 전에 한국교회는 잘못된 종말론으로 인해 심한 열병을 앓았었다. 바로 1992년 10월 휴거설을 주장하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에 의해서이다. 비록 무위로 끝나버리고 자신들의 교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사과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의 문제는 더욱더 심각하게 한국교계 뿐만아니라 한국사회에 영향을 미쳐 왔다.
종말론이란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이론이다. 이것은 개인의 삶의 역사에 있어서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 곧 죽음의 문제, 심판의 문제, 영혼불멸의 문제등을 다루는 개인적인 종말론과 세계사의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을 곧 죽은 자의 보편적 부활과 최후심판, 천년왕국, 하나님의 나라 등을 다루는 세계사적 종말론으로 구분된다. 오늘날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말사상 내지 종말론은 세상의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사상이나 이론을 말한다. 그러나 종말론은 생명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중심적 핵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생염의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추진하시는 구원계획은 인간역사 전체 위에 펼쳐지고, 그 인간의 역사가 영원 안에 온전히 실현되기까지 펼쳐진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인간의 환상에서 꾸며진 계획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람되심과 죽음과 부활에서 계시된 계획이다.
유대의 묵시적 종말사상은 기원전 586년의 제1차 포로시기를 전후하여 본격화되었으며, 기원전 2세기 마카비 혁명당시인 수리아의 폭군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 통치하에서는 극에 달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이 불결하게 여기는 돼지들을 성전으로 끌고가 잡은 뒤 돼지피를 제단에 뿌렸으며, 제우스 신상을 번제단 위에 세우고 유대인들에게 그것을 향해 절하게 하였으며, 율법 읽는 일과 할례를 금하였으며, 안식일 조차 폐지하려고 하였다. 이와같은 암울한 시대적 상황속에서 백성들로 하여금 세상과의 타협이 아닌 신앙의 절개를 고수토록 하기 위해 묵시문학 형태의 종말론이 본격적으로 성행하게 되었다. 그후 주후 1세기 후반기에는 로마의 황제인 네로와 도미티안 같은 폭군들이 황제숭배를 강요했을 때, 유대교인들은 타협했지만 기독교인들은 타협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 나갔다. 그 결과 기독교인들에게는 엄청난 핍박과 박해, 순교의 위협이 놓여졌으며, 이와같은 로마의 조직적인 박해 속에서 궁극적인 미래의 승리를 바라보고 신앙의 절개를 지킬 것을 교훈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 바로 묵시문학 중의 하나인 요한계시록이다. 이러한 박해들로 점철된 역사를 가진 이스라엘백성들은 주위의 강대국틈에 낀 약소민족으로 빈번한 외세의 침략과 압제를 받았기에 자연발생적으로 묵시사상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과 지리적인 조건과 비슷한 우리나라 역시 외세의 침략과 압제가 있을 때마다 시대에 따라서 무교와 불교, 유교, 천도교 등에 의존하여 그들의 소망을 표현하였다.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1920년대와 30년대 사이에도 여러 가지 종말사상이 등장하였다. 그 중 원산의 유명화는 예수가 자기를 통하여 친히 임하였다고 하면서 예수의 모습을 하고 다녔고, 황국주는 자칭 예수라 하면서 수염과 머리를 기르고 다녔다. 6·25사변 후에도 전쟁후의 사회적 불안과 북한 공산당의 위협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박태선의 천부교, 문선명의 통일교와 같은 몰역사적인 이단들이 속출하여 여러 종말 사상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종말사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공통된 역사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 형성되었다. 즉, 변화와 개혁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사회현실, 미래를 예견하기 어려운 역사의 격동기, 제도교회와 성직자계급의 부패와 정신적 빈곤등 소위 정신적 절망감 속에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종말사상은 모순과 부조리를 안고 있는 사회의 례쇄성과 정신사적 변혁,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제도교회의 경직성과 정신적 빈곤을 근본 역사적 배경으로 갖는다.
문제는 역사적 배경도 종말사상과 함께 그 운동의 원인이 되지만 지금까지 교회와 신학이 종말론을 소홀히 다루어 왔던 사실도 그 원인이 된다. 제 2세기 천년왕국적 묵시운동인 몬타니즘(Motanism)에 대한 정죄와 에베소 공의회 이후로부터 종교개혁자들에 의한 묵시 문학적 사고의 정죄에 이르기까지 종말론은 교회의 삶의 주류에서 밀려났으며, 이단적인 탈선의 지위로 격하되었고 이미 19세기의 묵시사상은 장식적인 용어들로 정의되었다. 또한 전통적으로 교의하거에 있어서 종말론은 지엽적인 한 테마로 간주되었고 하나의 부록처럼 마지막 한 장으로 취급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수십년 동안에 결정적인 변화들이 일어났다. 바이스(J. Weiss)와 슈바이쳐(A. Schweitxer)와 같은 학자들을 선두로 종말사상에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묵시문학과 예수 또는 바울을 결부시킨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편을 주장하였다. 즉, 예수나 바울의 설교도 묵시문학적이기 때문에 현대인들에게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종말사상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불가피하게 되었고 드디어 케제만(Kasemann)에 이르러 "묵시사상은 기독교사상의 어머니였다"라는 주장에 의해 슈바이처이후 묵시사상이 가져다 준 강박관념을 해결할 실마리를 가져다 주었다.
그 이후로 종말에 대한 연구는 여러 학자들을 통하여 꾸준히 연구되어 왔다. 특히 본 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바울에 대한 신학연구에 있어서 많은 학자들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19세기 역사비평학과 함께 학문적인 바울연구의 길을 최초로 바우어(Baur)가 열어 놓았으며, 슈바이처에 이르러 유대교의 묵시문학적인 관점인 그리스도-신비주의에서 바울신학을 조명하였다. 또한 불트만(R. Bultmann)같은 이는 실존주의 철학에 기반을 둔 인간론의 입장에서, 쿨만(O. Cullmann)이나 래드(G. E. Ladd)같은 이는 구속사적 견지에서 바울의 신학을 전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해석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최근 바울 해석사를 기술하는 학자들이 바울의 생애와 사상의 배경이나 기원에 바탕을 둔 접근방법에 덧붙혀 서술하고 있는 종말론적- 바울 해석이다. 이 방법은 근래의 여러 바울해석자의 견해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기본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이 신약성서의 주된 신학적인 문제들을 종말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시도를 하여왔듯이, 바울의 신앙과 신학의 바른 이해를 위해 종말론적인 접근방법은 새롭게 재조명되어야 하며, 바울의 신학과 사상에 있어서 종말론적인 기조는 그 어떤 것보다도 먼저 고찰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특히 기독교 선교역사 초기부터 과도하게 종말론 지향적이었고, 최근에 들어서서 그 심각성이 날로 더 해가고 있는 한국교회내의 이단적 종말사상의 위협은 종말사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시급히 요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초대 기독교회와 전기독교 역사상 두드러진 한인물인 바울의 종말론 이해를 반추해 봄으로써(살전 4:13-5:11을 중심으로), 불확실한 미래를 내다보며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나날의 삶을 영위하는 현대 신앙인들의 삶의 기초를 위한 올바른 종말 이해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2. 연구방법과 범위
Ⅱ장에서는 바울의 종말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초적인 종말론의 자료로서 묵시 문학의 유래와 특징, 그리고 신약성서와 묵시문학을 살펴보고 거기에 나타나는 종말사상과 여기에 영향을 받은 사도 바울의 종말에 관하여 알아본다.
Ⅲ장에서는 데살로니가 전서의 주석 개관으로 바울의 데살로니가 전서의 독특한 위치와 역사적 접근으로 데살로니가 전서의 일반적·교회·공동체의 상황을 살펴보고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서를 쓰게된 집필동기와 목적등 때와 시기에 관한 문제를 알아본다.
Ⅳ장에서는 바울의 묵시적 종말사상으로 두세대론과 종말론적 구원의 실재와 그 의미에 대하여 알아본다.
Ⅱ. 묵시적 종말론의 이해
1. 유 래
1)묵시문학의 태동
주전 587년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대 민족의 역사를 포로기의 시대로 이끌어 갔다. 이로 인하여 유대인의 정신 사조에는 '위기의식'이 조성되었다. 죄에 대한 심판으로 야훼께서 유대 민족들을 파멸로 내모셨다는 신명기 역사관으로는 저들의 비극이 다 설명될 수 없는 신학적 위기였다. 곧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야훼의 처소가 무너짐으로 야훼의 신적 권위가, 이스라엘의 자기 이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포로기 예언자들은 이같은 위기 상황에 대하여 온 우주에서 일어날 새 구원의 프로그램을 포로기의 공동체를 향하여 갈파했다. 그것은 포로기의 혼란을 평정시키는 '우주적 구원의 드라마'였다(사51:9-11,겔47:1-12). 혼돈에 처한 하늘과 땅에 새로운 질서가 조성되며, 원수의 세력은 축출되고 파멸에 이른다. 야훼가 새로운 창조의 질서를 조성하는 시기에 땅의 풍요와 정의로운 사회, 정치, 종교가 회복되게 될 것이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유대 민족들은 고향 예루살렘으로 귀환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회복을 외쳤던 예언자들의 비전은 실현되지 않았다(학1:2-4,12-17). 수난의 역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역사에 대한 선대 예언자들의 낙관주의적 신뢰가 회의와 실망으로 바뀌게 되고 회복의 꿈이 포기되게 되었다. 포로 후기 시대의 암울함에서 비관적인 묵시(Apocalyp-se), 묵시주의(Apocalypticism), 그리고 묵시문학적 종말론이 태동하게 되었다.
2)포로후기
포로기 직전 그리고 포로기라는 민족적 위기와 패망과 같은 새로운 상황에 나타난 문학형식이 예언 문학이라고 한다면 포로 후기의 공동체에서는 그것을 다시 급진적으로 변형시켜서 그 시대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 어떤 새로운 해답을 주려 한 것이 묵시문학의 시작이다. 묵시문학에 나타난 종말론의 근본적인 의도나 목적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현재에 대한 그들의 행위와 결단에 따라 장차 임할 여호와의 미래적 구원에 관한 묘사이다. 이로써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여호와 신앙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 하나의 우주적 구조 속에서 이해된 것이다. 핸슨(P. D. Hanson)은 포로후기 시대에 제창된 민족국가, 공동체회복의 프로그램이 두 개의 경쟁 그룹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고 본다. 첫째가 학개와 스가랴의 초기 예언, 묵시가 주창한 개혁 운동이다. 에스겔 환상(겔40-48)은 포로후기 팔레스틴 땅에 지속된 사회적 소란과 경제난에 의해서 난관에 봉착되었다. 이때 이 에스겔의 회복 프로그램을 받아 들여서 그것을 '묵시문학적 상상주의'로 발전시킨 사람이 학개와 스가랴이다. 학개와 스가랴의 묵시문학적 종말론은 야훼의 장엄한 역사 개입과 다윗과 사독계열의 지도력에 근거한 메시야 왕국 설립이 그 초점이다(슥1-8). 또 다른 그룹은 포로기 후반부터 시작하여 주전 5세기 말엽에 이르기까지 등장했던 '소수 분파적인 환상주의자들'(sectarian visionary)이다. 이들은 사독계열이 주도하는 제정주의적 프로그램을 거부한다. 이들은 박해, 소외, 재난문제의 해결은 사회제도의 회복에 있지 않고 장차 오실 야훼의 역사 개입에 달려있음을 선포한다. 이들은 현실세계, 기존의 질서를 부정한다. 현실정치, 역사, 제도에 대한 신뢰는 포기되고 초월적인 세계가 강조되며 시간과 공간의 이분법적 구분이 대두된다.
3)중간기
포로기-포로 후기 사회가 묵시문학의 여명기였다면, 중간기 즉 주전2세기-주후 1세기는 본격적인 묵시문학의 태동기였다. 이 시기는 유대교의 극심한 박해기이다. 헬라화라는 미명하에 강요된 세속지배 세력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한 유대인들의 수난기였다. 이때에 형성된 묵시문학 운동들은 통치자들의 정치적 음모, 유대 민중의 무력저항의 실패, 강요되는 헬레니즘의 가치관, 우주관으로 인하여 과연 유대인, 유대사상, 유대종교가 살아 남을 수 있겠느냐는 생존의 문제 앞에서 현실의 역사를 철저히 거부하게 되었다. 결국 주전 2세기경 안티오커스 4세의 핍박 때부터 묵시문학은 다시 출발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쓰여진 묵시문학 중 가장 뛰어나게 영향을 미친 묵시문학은 다니엘서이다. 다니엘서는 역사적 현실에 민감하였다. 그리고 민족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역사의식을 가진 책이다. 다니엘서에 의하면 인간들의 악한 세력은 오랫동안 성왕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날도 마침내 끝이 오고야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참사람 같은 이가 구름 가운데 나타나 모든 권력과 지배의 권한을 하나님께 돌리는 날이 온다는 것이다. 여기 '사람 같은' 이라고 하는 '인자(人子)'에게는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의미가 숨어있다. 그러므로 인자의 날은 민족의 새 시대를 말한다. 따라서 다니엘서의 종말의 날이란 우주의 종말이나 말세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악의 종말을 가리킨 것이다.
다니엘서는 이 세상의 역사가 하나님이 정하신 미래의 그 한 지점을 목표로 향해 꾸준히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이같은 현실세계의 정돈을 깨뜨리기 위해 초월적인 하나님을 그리고 있다.
묵시문학은 종말의 징조를 기대했고 전쟁, 기근, 염병과 같은 자연적인 사건들을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해석했다. 이러한 자연질서의 혼란은 사람의 도덕적인 타락과 결부되었다(에스라 4서 5:4-12). 이 끝이 '메시야 출산의 진통'의 때이며, 적 그리스도의 사상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 때에는 구주의 모습도 신화화되었고 '인자'라는 신화적인 인물로 바뀌어졌다. 그 다음에 죽은 자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이 일어난다.
결국 이 묵시문학은 시대가 절망적일 때 하나님이 역사를 이끌어 갈 것이며 심판하는 날에 엄정한 판결을 내리시고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종말론적인 희망을 주었던 것이다.
4)예 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의 말씀은 종말론적인 말씀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관적인 의미의 세계의 종말이 아니다. 또한 미래의 종말의 사건만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예수의 주변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눅17:20-21). 예수님은 인자에 대해서 말했는데 그것은 역사적인 구주가 아니요, 심판자로 오실 天上的인 구주였다. 예수에 의하면 심판은 최후의 심판에 집중되고 그 이전에는 각자가 자기의 소행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마지막 때의 사건들에 대한 예수의 말씀들을 이해함에 있어서 두 개의 공관복음 묵시가 있다. 하나는 마가복음의 묵시(막13:1-37)이고, 또 하나는 누가복음의 묵시(눅 17:20-37)이다.
막13장의 강조점은 예비적인 표적들이고, 눅17:20-37은 종말의 때의 갑작스러움이다. 막13장은 마지막 때의 위기에 앞선 저주와 고통의 때를 세 단계로 묘사하고 있다. 그 날에는 거짓 메시야들의 출현, 난리와 전쟁들, 지진들, 핍박들이 있을 것이며(막13:5-13),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전을 점령할 것이며(막13:14-23), 우주의 붕괴, 인자의 파루시아가 있을 것이다(막13:30). 천지는 없어질 것이며, 이 세대는 지나갈 것이다(막13:30). 오는 세상이 있을 것이며(막10:30), 그 세계는 부활한 자들의 세계가 될 것이다(막10:25).
막13장에는 당시 묵시문학의 결정적인 주제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성전(聖戰, Holy War), 원수들에 대한 심판, 미움과 복수의 감정, 디아스포라의 모음, 구원에 관한 물질적이고도 지상적인 표상, 예루살렘의 회복, 이방인들의 다스림등 반대로 막13장에서는 재앙이 이스라엘 자체 위에 임할 것이라고 한다. 이런 것은 유대 묵시에서는 볼 수 없는 사상이다.
예수가 바라보는 종말적인 재앙은 역사 안에서의 마지막 재앙이다. 하나님 나라가 고통을 통해서 임할 것을 확신했다.
이 모든 것이 심히 두려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마지막 재난의 전주곡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마지막 일은 역사를 초월한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분리작업을 수행한다. 두 사람이 함께 쟁기질을 하거나(마24:40), 혹은 한자리에 누웠을지라도(눅17:34), 한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다른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신적 심판을 수행하는 이 때에 영원한 불의 지옥인 게헨나가 열릴 것이다. 그곳은 구더기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는(사66:24, 막9:48)장소이다. 그곳은 바실레이아와 마찬가지로 선재적(pre-existent)이다(마25:41). 따라서 그것의 도래는 필연적이다. 그것은 전인(全人)을 포함한다(막9:43-48). 그것은 영원하다(막3:29, 9:48, 마25:46).
예수는 종말의 시기에 대해서는 점성가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예언자적 입장에서 말씀하신다. 그는 연대기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예언자적으로 말씀하신다. 그는 예보를 하신 것이 아니라, 예언을 하신 것이다. 그런즉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기에 인간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마25:13).
2. 특 징
묵시문학의 정의가 통일되어 있지 아니한 것처럼 묵시문학의 특징에 대한 학자들의 열거도 다양한 실정이다. 또한 모든 묵시문학 작품들이 이러한 특징들을 모두 구비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다만 그중 몇 가지만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고에서는 묵시문학의 특징을 크게 문학적 특징과 신학적 주제의 특징으로 대별하여 아래와 같이 살펴보고자 한다.
1)문학적 특징
①익명성(匿名性; anonymity)
익명성은 묵시문학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모든 묵시문학 문서들은 한결같이 저자의 본래 이름을 감춘 채로 즉 익명으로 발표되었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들-에녹, 노아, 아브라함, 모세, 에스라, 바룩 등-을 저자로 내세운다.
묵시문학의 저자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감추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서 자신들의 작품을 발표한 까닭은 무엇일까? 몇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박해상황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묵시문학이 기록된 목적은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극도의 박해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중들에게 위로, 권면, 저항 및 순교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기본적으로 권력자에 대한 정면 도전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고 따라서 권력자로부터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익명을 사용했을 것이며 이 이유는 또한 묵시문학 작품에 수많은 상징들이 사용된 원인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이유만으로 묵시문학의 익명성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저자의 본명을 숨긴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고대의 유명한 인물들의 이름을 차용 내지는 도용한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대중의 신뢰획득이라는 요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묵시문학의 저자가 자기의 작품에 선대의 유명 신앙인들의 이름을 도용(盜用)함으로써 자기가 기록하고 있는 계시에 권위를 부여하고자 시도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와 관련하여 묵시문학서들이 익명으로 발표된 이유를 게제는 정경편입과 결부시켜서 설명한다. 예언서들은 B.C. 3세기가 끝나기전에 경전 편찬 작업이 끝나서 정경으로 확정된다. 그런 까닭으로해서 역대기와 다니엘서는 전,후기 예언서와 함께 편집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2세기에 시작된 묵시문학 운동가들은 가명을 쓰기 시작했다. 즉 의식적으로 고대의 전설적인 인물들을 저자로 끌어들임으로써, 경전 속에 끼지 못하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권위를 대신 확보하려 했다는 것이다. 권위를 이토록 중시한 이유는 모진 박해 속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에게 될 수 있는 한 널리 보급되어 읽힘으로써 그들에게 희망을 주자는 의도였던 것이다.
세째로 "집합적 개인"(corporate personality)라는 관념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에녹이나 노아에 관한 전승들을 보존하고 있던 집단이나 개인이 거기에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환상이나 계시를 추가할 때에 자신을 에녹이나 노아와 완전히 동일시하였다는 것이다. 이 경우 묵시의 가명은 더 이상 호칭이 아니다. 그것은 묵시문학 저자의 인격의 확장이다. 말하자면 어떤 저자가 자기의 글을 아브라함의 이름으로 밝힐 때, 그 묵시문학자는 아브라함의 정신, 신앙, 업적, 개성, 명예를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코흐 역시 이 익명성을 이런 각도에서 보고 있으며 따라서 익명성을 그들 자신을 속이기 위한 동기로 귀착시키는 것은 매우 부적당한 일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②환상과 상징주의
묵시문학의 또 한가지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상징성을 들 수 있다. 상징은 논리보다는 직관에 호소하는 능력이 있어서 지식인보다도 단순한 민중들에게 더 호소력을 발휘한다. 묵시문학자들이 상징을 주로 사용한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특히 묵시문학 운동가들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상대는 강대국이요 지배자이다. 그것은 수리아일 수도 있고 로마일 수도 있다. 이러한 권력에 직접적으로 대항하여 비판하다가는 당장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상징적인 언어를 통해서 보다 날카롭게 상대방을 공격하고 나온 것이다. 예컨대 유대인들은 수리아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를 사단이라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종이었던 사단이 반역하여 안티오커스를 통해 악을 자행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가 사단이고 그의 하수인들은 사단의 졸개들이다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박해의 상황은 그런 직접적 표현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은 상징과 암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징언어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짐승들이다. 다니엘서의 상징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다니엘 7장에 나오는 네 종류의 짐승은 각각 바벨론과 메대와 페르샤와 헬라제국을 상징한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의 위력은 황소로, 의인은 어린양으로 상징된다.
이들이 사용하는 상징언어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벨론 신화나 구약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언어 자체에 목적이 있지않고 그 언어를 가지고 표현하려는 의미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③비밀성(esoterism)
기묘한 상징주의와 우의적 예언 형태에 따르는 필연적인 귀결이다. 꿈들이나 환상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혹은 역사를 날(days)과 주(weeks)로 구분함으로써 의도되어진 연대 추정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항상 불분명하다. 역사는 암호 형태로 관측되었고 미래에 관한 정보는 일반지식과는 떨어져 있는, 비밀로 전해져 내려온 어떤 것이었다. 따라서 예를 들어, 다니엘은 '환상을 봉인할 것'과 '환상비밀을 지킬 것'을 명령받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득히 먼 장래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국에는 누설된다. '그가 가로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단12:9). 마찬가지로 에녹서도 서두에 그는 이 세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득히 먼 장래의 어떤 한 세대를 위하여 기술하고 있음을 밝혀놓았다(에녹1서 1:2).
2)신학적 특징
①이원론적인 두시대 개념
묵시주의는 항상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기초하고 있다. 땅의 실재 대 하늘의 존재, 현 세대 대 다가올 세대, 하나님 대 사탄, 천사 대 악마, 의로운 무리 대 사악한 무리 등이다.
그리하여 묵시문학은 종말 개념과 관련해서 두시대 개념을 가지고 있다. 창조에서부터 심판에 이르는 역사과정은 하나님이 설정한대로 순서에 따라 진행되어 간다. 이렇게 진행되어 가는 역사를 묵시문학은 두시대로 구분하는데 곧 이 시대와 새시대이다. 이 시대는 악이 왕성하여 사정없이 횡포를 부리는 시대이다. 그래서 악한 자와 이방나라들이 세력을 잡고 선한 자와 의로운 자를 괴롭힌다. 그러나, 앞으로 새시대가 온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새시대가 오면 악한 세력은 완전히 정복된다. 따라서 의인들은 승리를 만끽하게 되고 하나님이 통치자가 된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이 통치하는 이 세대는 악한 세대요 하나님이 통치하는 새시대가 와야 역사에서 악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 두 시대 사이에 거쳐야 할 큰 관문이 있는데 그것은 환란과 의인들의 핍박이다. 두 에온의 세력들이 대립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 위하여는 고통이 따르는 것처럼 이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아홉달 반의 임산부가 아기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진통으로 부르짖는 것처럼, 이 세계가 신음하고 고통하고 있다.
이 두 시대 개념을 중심으로 해서 이원론이 나온다. 묵시문학은 어쩔 수 없이 이원론적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현재는 악한 시대이고 새로운 세계는 현 세계의 부정을 통해서만 중재된다. 그래서 묵시문학을 구약의 예언문학과 기독교 사이에 있는 구약종교의 안티테제(Antithese)로 본 학자도 있었다.
②임박한 종말사상
묵시문학의 중심사상은 종말사상이다. 묵시문학의 관심사가 주로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들에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날에 일어나는 일들은 부활, 심판, 그리고 그 후에 세워지는 메시야 왕국과 이전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새 시대의 시작 등이다. 이러한 사건들이 발생하게 되는 동기는 우주에 편재해 있는 악 때문이다. 선이 악을 극복하는 과정이요 현상들이다. 그러나 보다 특징적인 것은 종말 자체는 오래 지연될 수 없다고 하는 커다란 기대감과 확신이다. 옛사람들이 마지막 때를 위해서 봉인한 이 비밀스러운 계시들이 이제 알려지게 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종말이 임박했다고 하는 확실한 조짐이 되었던 것이다.
③개인주의 및 보편주의(우주적 성격)
묵시문학은 한 민족이나 어떠한 국가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이 운동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해서 인류 역사의 포괄적인 관점을 부여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문학운동이다. 부활 특히 세계심판과 세계소멸은 그 규모가 우주적인 것이다. 그래서 폰 라트는 사람의 아들이 이스라엘에서 나오지 않고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는 이유가 바로 우주적 성격에 대한 관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폰 라트는 묵시문학의 뿌리가 예언자 전통에 있지 않고 지혜문학 전승에 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예언자들의 종교는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인 선민사상을 넘어설 수 없다. 그러나 묵시문학(다니엘서)에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같은 것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계 만국을 상대로 한다. 천하만국을 심판하고 그 위에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시는 머리를 들지 못할 것이다.
④부활과 최후의 심판
악한 시대가 새시대로 바뀌는 과도기에 큰 환란이 일어난다. 이 큰 환란은 심판 전에 발생하는 징조이다. 환란이 지나고 나면 부활이 있게 된다. 이 부활은 어느 특정인의 부활이나 의인들만의 부활이 아니다. 최후의 심판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수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의 아들이 불러 일으키는 모든 죽은 자들의 보편적인 부활이다. 공정한 심판을 받으려면 의인만 부활해서는 안된다. 악한 자들까지도 다 부활해서 그들이 행한 악의 분량에 따라 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의인에게는 영광의 부활이요 악인에게는 심판의 부활이다.
⑤하나님의 대리자·사람의 아들(人子) 사상
하나님의 심판이 있은 후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난다. 이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한 곳은 다니엘서이다. 다니엘서에 나타난 사람의 아들은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존재이다. 그의 통치형태는 야수적이거나 야수보다 더 지독한 세상의 못된 통치자들의 그것과는 구별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람의 아들은 인간다움을 제대로 지니고 있는 '참인간'이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들과 포악한 통치자들은 이미 인간성을 상실하고 동물, 특히 야수나 괴물의 수준으로 전락한 것이다. 다니엘서에 의하면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이 모든 심판을 마무리 지은 다음에 나타나서 하나님으로부터 통치권을 넘겨받는다. 그러나 에녹서에 들어가면서 인자의 기능은 확대된다. 그는 세계의 심판권을 손수 가지게 된다. 그는 새로 오는 왕국에서 영원한 지배자로 군림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앉게 된다. 단순히 인간이었던 사람의 아들은 묵시문학의 발전과 함께 신격화되어 간다.
3. 신약성서와 묵시문학
'모든 기독교신학의 어머니?'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연관성을 묻는 사람은 이 둘의 접촉면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묵시문학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의 왕적통치에 대한 임박한 기대에서, 세례자의 선포와 예수의 본래적 선포(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에서 이미 묵시문학 전승의 핵심을 신약성서는 내포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예를 든다면 마가복음 13장과 그 평행구절들의 묵시문학적 말씀이 공관복음서 전승의 기본요소에 속하고, 또 신약성서가 요한계시록 속에 이런 전승양식을 포함시키기를 꺼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구약성서에서 비교적 후대에 속하는 넓은 의미의 묵시문학 전통이 신약성서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기독교 저작자들은 처음 유대문헌이나 묵시문학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어서 그 문서들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재조정하는 것을 중요시했었다. 특별히 이런 작업은 그들의 새로운 믿음에 대한 가르침이 율법과 선지자들이 입증하고 있다는 변증적 이익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신약성서 연구 중 가장 어려운 과제는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서 역사적 예수에게로 되돌아 가는 과정이다. 특히 묵시문학과 신약성서와의 관계를 논할 때 묵시문학의 영향을 역사적 예수가 받았겠느냐 아니면 신약성서를 기록한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아서 역사적 예수를 새롭게 이해하고 그 틀 속에서 재해석했느냐는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다른 많은 부수적인 문제들이 따르는 게 사실이며 또한 학자들의 견해도 다양한 실정이다.
여기서는 묵시문학이 신약의 여러 문서나 예수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케제만의 견해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는데 그는 예수보다도 초대교회가 묵시문학을 도입한 것으로 본다.
1)예수와 묵시문학
케제만은 슈바이처와 바이쓰가 예수를 묵시문학가로 해석한데 대해서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케제만에 의하면 묵시문학을 도입한 것은 예수가 아니고 초대교회이다. 초대교회는 예수가 죽은 후에 극단적인 묵시문학을 받아들여 예수의 재림을 인자의 오심으로 해석했다. 케제만에 의하면 예수는 "그의 전 존재로써 하나의 수수께끼, 하나의 물음, 하나의 약속, 곧 성취와 응답을 요구하는 그런 약속 그 자체였다. 그는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 됨으로 인한 자유 속에 세우고, 그 자유 자체를 삶으로써 이미 지상의 주가 되었다. 부활의 날에 그의 제자들은 이전에는 분명히 인식치 못하였던 깊이에서 그런 사실을 깨달았으며, 이에 대하여 제자들은 다만 묵시문학적으로 대답할 도리 밖에는 없었다." 제자들은 이 일을 위해서 쿰란 공동체에 접근하고 그들로부터 묵시문학을 전수 받아 왔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이러한 행동을 하도록 원동력이 되어 준 것은 부활절 경험이다. 부활절 이전에는 말씀의 성취와 추종과 같은 인격적인 신앙이 표출되었다. 그러나 부활절 이후에는 십자가, 부활, 사죄, 새로운 계약 등과 같은 구원 사실이 받아 들여졌다. 이들은 자기들의 공동체를 이스라엘의 거룩한 남은 무리로 생각했다. 그들은 자기네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병 고치는 기적과 같은 표적 속에서 마지막 때의 징조를 보았다.
케제만은 불트만이 역사적 예수의 선포와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를 구별한 처사를 전적으로 지지한다. 케제만은 이 양자간의 차이점이 바로 묵시문학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케제만의 이론대로 하면 신약문서들은 예수의 선포에 묵시문학을 첨가한 것이라고 보던가 아니면 역사적 예수의 단순하고 단편적인 민중의 이야기들을 묵시문학을 틀로 삼아 체계화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어쨌든 케제만에 의하면 예수는 묵시문학자가 아니다.
2)바울과 묵시문학
공관복음서가 묵시문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주장하는 케제만은 바울 서신 도처에서 묵시문학적인 영향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는 바울의 사도로서의 자의식은 다만 그의 묵시문학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바울이 열광주의 쪽에 기울어지지도 않고 요한 신학의 현재적인 종말론 쪽으로 기울어지지도 않은 것은 오로지 묵시문학의 덕택이라는 것이다. 케제만은 바울신학의 핵심을 고린도전서 15장 20-28절에 있는 부활에 대한 진술에서 발견한다. 바울에 의하면 부활은 두 번째 아담의 일이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들의 소생을 뜻하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통치해야 한다는 이 명제가 바울신학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3)복음서와 묵시문학
케제만은 묵시문학과 복음서와의 관계를 먼저 취급하고 다음으로 바울 서신들을 살핀다. 케제만은 슈바이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한다. 슈바이처에 의하면 "예수는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에 심취하여서 그의 제자들을 성급히 팔레스틴의 선교를 위하여 파송했으며, 그 자신은 중간 시간의 윤리를 선포하였고, 결국 그의 희망들이 좌절되었을 때 그는 예루살렘으로 행진함으로써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도록 하려고 시도했으며 이로 인하여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케제만은 슈바이처의 이러한 고찰이 우리 앞에 주어진 문서를 밝혀 주기는커녕 더 모호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케제만은 초대교회 공동체를 "부활절 이후의 열광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의 아들 문제를 먼저 취급한다. 초대교회의 열광주의자들은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 속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예수는 곧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올 사람의 아들이기를 희망한다. 이렇게 해서 사람의 아들 칭호가 제자들의 부활절 경험 속에서 예수에게 넘어옴으로써 신학사상 하나의 큰 발전을 가져 온 것으로 케제만은 주장한다.
4)유대묵시와 기독교묵시의 관계
앞 부분에서 우리는 유대 묵시사상이 신약성경에 깊고도 광범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 점에서 케제만(E. Kasemann)이 던진 유명한 선언 - "묵시문학은 모든 기독교신학의 어머니였다"(The apocalyptic was the mother of Christian thelolgy)- 은, 그것이 비록 어느 정도 과장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유대교와 기독교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묵시문학 연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비교적 정확하게 간파한 선언이었다고 여겨진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묵시적 사상을 가득히 함유하고 있는 환경으로부터 출현했다. 그 기독교의 전령자인 세례 요한의 선포는 묵시적이었다. 예수 자신의 미래에 대한 기대는 묵시적인 것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팔레스틴에 있는 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그 성격과 자기 이해에 있어서 철저하게 묵시적인 것이었다. 유사하게 초기 이방 선교의 케리그마는 묵시적인 특징들에 의해서 강하게 명시되었다.
그런데 유대묵시와 기독교 묵시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즉 묵시사상적 이원론은 새시대의 도래를 대망(待望)하고 있는데 반해서 신약성서는 이미 새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쿰란 공동체는 묵시사상을 극단화시켜서 광야에서 공동생활을 영위함으로써 새시대를 성취하려고 했는데,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미 새시대 안에 그들이 살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를 대면하고, 도전하고, 이 세상의 악의 구조로부터 사람들을 불러내어 새로운 질서에 살도록 하였다. 세상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보았던 초대 기독교 신자들의 신앙은 놀라운 것이었다.
묵시사상은 또한 신약에 와서 아주 그 진보성을 신앙의 내용에 강화시켰다. 하나님의 독단적인 용서, 그리고 종말론적인 가치 전도가 일어난다. 먼저된 자가 나중 되고, 창기와 세리가 의인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깝다. 종교는 외형보다 내재적 가치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기존의 세계관, 가치관, 전통적 신앙이 새로운 관점에서 반전된다. 모든 인간문화를 부수고, 인간이 설정한 경계선을 부순다. 원수 사랑은 이러한 경계선 철폐의 클라이맥스이다. 세계가 한 가족이 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바울에게서 이것은 아주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다.
묵시운동은 헬라세계가 안고 있던 시대적 고민을 정확하게 분석하여 적절하게 응답하였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묵시운동의 영향을 받아 나름대로 해석하고 발전시켜서 새시대의 도래를 선포하고, 이 시대의 고민에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묵시운동에 대한 바른 이해와 평가는 신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과제이며, 바울을 연구하는데 있어서도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Ⅲ. 데살로니가 전서 주석
1. 데살로니가 전서 개관
1)바울서신에서 데살로니가 전서의 독특한 위치
오늘날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데살로니가전서가 최초의 바울서신이며, 신약성서 중에서 가장 처음으로 기록된 문서라고 인정하고 있다. 이 점은 우리에게 몇 가지 통찰력을 제시해 준다.
첫째,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서신 중 최초의 서신이기 때문에 후대에 기록된 로마서, 갈라디아서등 바울의 여타 서신들과는 독립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데살로니가전서가 최초의 기독교의 문헌이라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서신의 장르에 대해 좀더 세밀하게 연구할 것을 요청한다. 셋째, 데살로니가전서가 최초의 작품이기 때문에 이 서신이 기독교의 초기적 형태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의 복음 선포의 내용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자료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통찰력을 가지고 본 서신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주석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첫째, 이 데살로니가전서가 쓰이게 된 직접적인 상황은 무엇인가? 둘째, 이러한 상황에 대해 바울은 어떠한 문학적 양식을 가지고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는가? 셋째, 바울이 이 서신을 통해서 전달하려고 했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인가?
본장에서는 역사적, 문학적 접근을 통해서 데살로니가전서에 관한 개론적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서 바울의 묵시문학적 표상이 뚜렷하게 표현된 살전4:13-5:11을 주석적으로 고찰해 보고 여기서 얻어지는 내용들을 바탕으로 다음으로 '데살로니가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묵시사상'을 다루고자 한다.
2)데살로니가전서에 대한 역사적 접근
①데살로니가의 일반적 정황
데살로니가는 주전 316년경 알렉산더 군대의 장군인 카산드로스(Cassander)에 의하여 건립되어 빌립 2세의 달이자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누이인 그의 부인 데살로니케이아(Thessalonikeia)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지리적으로 데살로니가는 에게해에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육로로는 로마와 동방제국을 연결하는 엑나티아 가도(Via Egnatia)선상에 있었다. 바울과 그 동역자들은 이 도로를 따라 빌립보에서 암비볼리를 경유하여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데살로니가로 갔을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주전 146년 마케도니아가 로마의 속지로 되자 데살로니가는 즉 마케도니아 속주의 지방 수도요 총독의 거주지가 되었다. 시저(Caesar)가 암살되고 로마가 내란상태에 빠졌을 때 유명한 빌립보 전투에서 데살로니가는 시저의 양자인 옥타비우스(Octavius)편에 가담한 공으로 주전 42년에 자유도시가 되었다. 그리하여 로마의 후원자에 의하여 데살로니가의 번영은 자유도시로서의 확고한 지위와 동서의 중심축으로서의 위치를 얻게 되었다. 바울 당시 이 곳은 7인의 행정관(행 17:6)에 의해 통치되었다. 종교적으로는 데살로니가는 로마의 영향을 많이 받아 황제숭배 사상이 이데올로기화 되어 있었다. 한편 국제적인 도시답게 다양한 종교문화가 혼재하고 있었는데 특히 신비종교가 널리 퍼져있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세라피스 제의(the cult of serapis), 이시스(Isis)제의, 대오니소스(Dionysus)등이 있었다. 이러한 종교들은 거듭남, 불멸성, 죄의 용서 혹은 성적인 만족 등을 말하고 있었다.
②데살로니가 교회의 정황
ⅰ)교회 개척의 상황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한 것은 2차 여행 때인 것으로 보인다. 2차 여행의 출발은 안디옥에서 행해지는데, 1차에서 동행했던 바나바와 결별하고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동행한다. 바울과 그 일행은 원래 아시아 쪽으로 가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한 무시아에서 비두니아로 가려고 하는 길도 막혀서 드로아에서 빌립보로 가게 된다. 빌립보는 마케도냐 지역의 첫 성이다. 여기서 교회를 개척하고 후원을 받는다. 더 나아가서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드디어 데살로니가에 들어서게 된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자기의 목숨까지도 바치려고 했다. 유모처럼 신자들을 대했고, 스스로 생계를 이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상황을 보면, 유대인들은 바울이 회당에서 설교함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그리스도교로 전향하는 것을 시기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형제들은 바울과 그 동료들을 밤중에 도피시켰으며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로 가게 된다. 여기서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남겨두고 바울은 홀로 아덴으로 간다. 그 후 바울은 고린도로 가서 1년 6개월을 머무르게 되는데 이 때 갈리오가 아가야 지방의 총독이었으므로 주후 50년경이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이 고린도에 머무를 때 디모데가 돌아옴으로써 바울은 이제 기쁨을 가지고 데살로니가전서를 쓰게 되었다.
ⅱ)바울의 목회
데살로니가전서와 사도행전을 통해서 바울의 목회사역과 관련한 다음의 질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데살로니가 교회에서의 바울의 선포의 핵심 이슈는 무엇이었는가?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행한 것과 같은 설교가 나타나 있지 않으며 다만 바울의 케리그마의 일부가 간략하게 나타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유대인의 회당에서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을 보면 율법의 문제가 하나의 도화선이 되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는데 데살로니가전서에는 놀랄만큼 율법의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자체에서 추론해 보면 묵시적 메시지가 강하게 전달되지 않았겠는가 생각해 볼 수 있다. 살전4:17에는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면서 바울의 묵시적 사상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 또한 설전 1:10에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묵시적인 메시지이다. 이러한 편지를 내게 된 것은 분명히 바울의 처음 메시지가 묵시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그것이 강력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그것이 어떠한 문제를 야기시켰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데살로니가 공동체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살전 1:9에는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이들은 전에는 이방인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의 선교를 회당으로부터 시작했다는 사도행전의 내용과는 일면 상충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강조점의 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회당이라는 구조 안에서 바울의 사역을 조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고 반면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대다수의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유대인으로부터 시작하여 후에 다수의 이방인이 가담했을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사회 경제적인 계층으로 이들을 분석해 보면, 본서에서 수공업과 같은 육체 노동을 강조하고 또 부자의 위험이나 타락 등에 관하여 별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회심자의 대부분이 근로 계층의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③공동체의 상황
ⅰ)밖으로부터의 박해
데살로니가전서 안에는 공동체의 박해를 암시해 주는 몇 구절이 있다(살전1:6,3:4). 데살로니가전서 2:14을 보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라고 하면서, 박해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 자신들로부터 나왔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박해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울 자신은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데살로니가전서 4:1-12의 윤리적인 문제에 관한 진술들을 토대로 추론해 볼 때에 데살로니가 공동체와 공동체 밖의 사람들간에 어떤 충돌이 있었을 것임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이런 충돌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아마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묵시적 열광주의에 압도되어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데살로니가 공동체 주변 사람들은 이 공동체 구성원들이 일상생활의 문제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돌리고 엘리트적인 자의식을 가지고 오만한 태도를 취하자 이에 대해 몹시 분개하여 박해가 발생했던 것이다.
둘째는 정치적인 박해의 가능성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묵시적 열광주의에 압도되어 살았다면 이런 믿음은 사회와의 단절, 정치적 권위에 대한 불복, 자신들만의 분파형성 등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많은 박해를 받을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 바울의 메시지 자체도 당시 정치적으로 반로마적인 의혹을 받을 여지가 충분히 있었는데 확실히 데살로니가전서에는 정치적으로 오해될 요소들이 뚜렷이 나타난다. 바울에 의하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그의 나라에로' ( )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살전2:12). 그밖에 세 개의 무게실린 정치적 용어(political terms)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 , 가 그들이다.이러한 상황들로 인해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로마제국에 반기를 든 사람들로 쉽게 이해되었을 것이다.
ⅱ)임박한 재림의 기대와 신자의 죽음
데살로니가 공동체 안에는 임박한 재림기대가 형성되어 있었고 이런 상황하에서 죽는 자들의 발생은 이를 예상치 못한 공동체 사람들에게 박해와 더불어 공동체에 위기의식을 가져다 주었다.(살전4:13) 주님의 날이 자꾸 지연됨으로써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희망도 무산될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여기서의 문제는 신자의 죽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죽음이 주의 재림 이전에 일어나서 그들의 믿음이 헛되게 되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 점에 대해 바울은 4장 14절에서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를 통해 죽은 자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재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을 가르침으로써 공동체의 걱정을 무마시키려 하고 있다.
3)데살로니가전서에 대한 문학적 접근
①저자 및 집필동기와 목적
본서의 바울 저작에 대하여는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가 그 진정성을 인정하고 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를 저작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한 후 갑자기 그곳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사도행전 17:1-9의 기록과 같이 유대인의 문제제기와 당국의 핍박 때문이었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데살로니가를 떠나온 바울은 다시 방문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디모데를 통해서 그곳의 소식을 접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방문을 대신한 편지를 쓴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면, 바울은 세 가지 목적을 성취하려고 이 편지를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계속되는 박해를 이겨내어 굳건히 서도록 하는 것이다. 3:3에 나타난 바와 같이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둘째는, 자신의 메시지를 바로 이해하도록 재교육하려고 한다. 즉 종말에 관해서, 그 때와 시기에 관해서, 자는 자들에 관해서 가르치고 있다. 셋째는, 성도를 그 가르침에 따라 올바른 삶을 영위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분명히 그릇된 종말론으로 인해 윤리적인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일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자가 생겨나고,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사람이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윤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은 본서를 기록한 것이다.
②데살로니가전서의 구조
본 서신은 내용상 크게 전반부(1:2-3:13)와 후반부(4:1-5:28)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감사(thanksgiving)의 글로서 다른 바울서신과는 달리 상당히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과거에 대한 회상(1:2-10), 과거에 대한 설명(2:1-12), 현재의 상황(2:17-3:13)이 그것이다. 한편 후반부는 권면(exhortation)으로서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일반적인 윤리적 교훈(4:1-12)과 교리적·종말론적인 교훈(4:13-5:11)이 그것이다.
2. 본문주석(살전 4ㅣ:13-5:11)
1)살전 4:13-4:18 주석
①)구 조
살전 4:13-18의 본문은 ABB'A'의 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구조 지을 수 있다.
4:13 A 서론 : 슬퍼하지 말라
4:14 B 케리그마와 그 의미
4:14a a 케리그마 : 예수는 죽었다가 살아났다
4:14b b 예수와 함께 하는 죽은 자들
4:15-17 B' 주의 말씀과 그 의미
4:15-17a a 주의 말씀 : 재림, 부활, 들림
4:17b b 주와 함께 하는 산자와 죽은 자들
4:18 A' 결론 : 서로 위로하라
이하의 주석은 이 구조를 따라 진행하고자 한다.
②주석 :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의 문제 (살전 4:13-4:18)
ⅰ)서 론 (4:13)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함을 원치 아니하노니" : 이 구절은 바울의 통상적 어법으로서 "너희가 알기를 원한다"는 것을 강조할 때 쓰이고 있다. 여기서 다루어질 주제는 재림(Parousia) 때 이미 죽은 자들의 운명인데 이 주제에 관해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W. Marxsen은 "잠자는 자들에 대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걱정은 공동체 내에 이 표상에 관한 정보가 부족함으로 기인한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바울은 희망을 가지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을 언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음 후의 삶에 관한 표상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주변에 있는 이방 세계에서도 여러 가지 형태로 존속해 있었다. 따라서 이방인들도 그 당시 전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 '죽은 자'들을 '자는 자들'이라고 표현했는데, '잠'은 죽음의 완곡어법(euphemism)으로서 헬라인이나 유대인을 포함한 고대세계에서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헬라적인 문학 작품은 물론이고 다니엘서를 제외한 구약성경에서도 '죽음'을 '잠'으로 비유한 것은 내세(afterlife)에 대한 실질적인 개념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바울이 죽은 자들을 주 안에서 '잠자는 자'라고 표현한 것은 죽음에 대한 보다 심오한 신학적 이해 때문이었다. 이 세상의 삶과 부활 사이의 중간상태에 대한 바울의 독특한 이해( )에서 기인한 것이다.
ⅱ)케리그마와 그 의미(4:14)
14절에서 (우리는 믿는다)로 시작하는 절은 일종의 신조(信條) 형식의 전형적인 서두이다(롬 10:9 참조). '우리는' 믿는다라고 함으로써 바울은 자신의 믿음과 그의 독자들의 믿음을 연결시키고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고전 15:3f절에서도 발견되는 내용이며, 그것보다는 좀 더 짧은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바울이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동사인 (일으키다)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이 구절이 바울의 창작으로만 볼 수는 없다. 14절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16절 이외에도 그러한 표현은 여러 인용들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인용문들에서는 '예수'가 함께 언급되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이것은 다른 그리스도론적 주제들이 예수와 함께 연합되기 이전의 단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형태는 매우 초기의 것이며, 그 이후의 모든 그리스도론, 즉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고백은 바로 이 자료(data)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 여기서 다시 하나님이 주절의 주어로 나타나는 바울의 일상적 표현으로 하나님이 진정한 주어임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다시 살아남'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를 다시 살리심'이라는 의미로 전이되고 있는 것이다.
ⅲ)주의 말씀과 그 의미(4:15-17)
15절의 "주의 말씀으로"( )는 예수의 어떤 말씀인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 주의 말씀의 출처와 관련하여 가능한 한가지 견해는 바울 자시이나 다른 선지자들을 통하여 공동체에 주어지는 계시를 주의 말씀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선지자들은 장래를 예언하며(행11:27 ; 21:11), 교인들을 가르치거나 위로하였는데, 그러한 선지자들은 높임을 받으신 주님의 말씀들을 지상의 예수의 말씀과 거의 구분하지 않았다. 결국, 바울이 주의 말씀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나온 것으로서 전승을 통해 바울에게 전해진 내림예언을 의미한다. 즉, 초기 기독교의 확신에 따르면 주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예언자의 신탁을 의미한다.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서 초대교회는 믿음을 지킨 채 죽은 자의 부활과 살아 남은 자에 대한 축복이 재림 때에 있게 될 것으로 믿었음에 틀림없다.
바울은 15절에서 16-17절에서 해명하려고 하는 것을 미리 요약한다. 즉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이미 잠든 자들보다 결코 앞서지 못한다. 따라서 걱정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16-17절에서 바울이 의도했던 핵심진술이다.
15-17절에서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대조되고 있다.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들"(15절)은 17절의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들"과 같고, 15절의 "자는 자들"은 16절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과 동일하다. 여기서 죽은 자들의 범주 속에는 바울이 서신을 집필할 당시까지 죽은 크리스챤들 뿐만 아니라 재림시까지 죽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포함된다. 마찬가지로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들"은 바울 당시의 생존 그리스도인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모든 서신들에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가 나타나지만, 오직 이 본문에서만 재림 장면이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16-17절에서 바울은 유대 묵시문학적 표현을 빌려 주의 재림 때에 일어날 일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다른 언어들로는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신비의 세계를 언급하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실사적인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상징적인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호령', '천사장', '소리', '나팔', '하늘', '구름' 같은 표현은 유대 묵시문학에서 종말과 심판을 묘사할 때에 자주 사용된 표상들이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표상들을 빌려온 것은 종말의 각본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묵시문학적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의 목적은 단순히 재림 때의 사건 계획표나 순서를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확증과 증거를 제시하려는 것이다. 그의 확증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온 세상은 그 광경을 보게 될 것이고, 죽은 자들도 그때 부활해서 살아 남아있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재림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ⅳ)결론(4:18)
결국 4:16절의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벌어질 것이라고 믿는 사건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바울 자신의 의도는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서로 위로하라"라는 말 속에서 분명해진다. 그는 독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자신의 가르침으로 서로 서로 위로함으로써 이미 죽은 자와 주의 재림 이전에 죽을 자들에 대한 그들의 슬픔에서 벗어나기를 바랬던 것이다. 이러한 위로의 근거가 되는 것은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 모두 들려 올리워 그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는 주의 말씀에 기초한다.
③메시지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는 하늘로 승천하셨고, 또 다시 돌아와 그의 나라를 회복할 것"이라고 가르쳤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건은 바울의 생전에 일어날 것이며,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음이 분명하다. '잠자는 자들'의 운명에 관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질문에 대해 바울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모든 죽은 자도 다시 살아나서 여전히 살아 남아 있는 자와 똑같이 재림에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이다"고 대답하며 그들을 위로한다. 전체적으로 13-18절은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자 하는 권면적 편지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동시에 이 단락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처해 있는 믿음의 구조, 또는 상징적인 세계에 관한 문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전해준 바울의 종말론적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못된다. 그들 중 대부분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세계관에 대한 전연 새로운 이해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사실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미래에 구원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재의 삶이 장차 오게 될 구원에 의해 규정받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삶은 소망 중에 죽음도 슬퍼하지 않고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2)살전 5:1- 5:11 주석
① 구 조
5:1-11은 4:13-18과 형식에서 유사함을 가지고 있는데 우선 첫 문장(5:1)이 4:13과 유사하게 '관하여 + 주제(시기와 때)'로 시작되고 있다. 또한 '형제들아'하는 호칭과 그 주제가 교육을 위함임을 서술함이 두 본문의 시작을 유사하게 한다. 각 본문의 몸체도 동일하게 설명과 함께 시작한다(4:14 ; 5:2). 그리고 용기를 북돋는 어조로 끝맺음을 하는 것도 유사하다(4:18 ; 5:110.
이제 이 구조를 도식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5 A 동기적인 자료(motivatinal Material)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해산의 고통처럼 도래하지만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않고 빛에 있다'
6 B 명령(Imperative)
'깨어 근신하라'
7 A' 심화된 동기적 자료(Further Motivational Material)
'밤에 속한 자들'
8a A2 동기적인 자료(Motivational Material)
'낮에 속함'
8b B2 명령(Imperative)
'믿음, 소망, 사랑을 가지라'
9 - 10 A'2 심화된 동기적 자료(Further Motivational Material)
'구원과 주와 함께 있음'
11 결 론 (Conclusion)
②주 석 : 때와 시기에 관한 문제 (5:1-11)
ⅰ)동기적인 자료(5:1-5)
앞에서 살펴 본 4:13-18절의 '재림 이전에 죽은 자'의 주제가 이제 5:1-11절에서는 '재림의 때'로 화제가 바뀌고 있다. 그러나 그 초점은 재림의 도래를 대비하여 계속 방심하지 말고 준비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권면에 있다. 즉 전체적으로 볼 때 5:1-11절은 4:13-18에 이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긴박한 시기와 재림에 대비하는 생활을 가르치기 위해서 바울에 의해 쓰여졌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에게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정확한 시기, 즉 "주님의 날"에 관하여 디모데를 통하여 질문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이 단락에서 그 질문에 답하고 있는 것이다.
5:1, "때와 시기" : 때의 사용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심판하실 시기에 대한 암호로서 구약, 특별히 예레미야서와 다니엘에서 발견되고, 신약에서도 발견된다. 바울 자신은 고전 4:5절에 나오는 '심판'에 대해 언급하기 위해 (날,dates)를 사용하고 있다. 과 이라는 표현은 2절에 나오는 (주의 날)과 평행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때'는 분명히 심판의 날에 대한 암시이다.
5:2, "주의 날"( ) : 주의 날은 결정적인 그리고 최종적인 신의 간섭이라는 구약의 역사에로 그 배경을 가진다. 이것은 아모스에게서 명확하게 언급되어지고 있는데 그가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예언자는 아니고, 당시 일반에 널리 통용되고 있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구약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주제로 되어 왔던 이 용어는 근본적으로 심판의 날이기도 하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이었던 것이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날'이 되었다(빌1:6,10). 결국 구약의 '주의 날'은 바울에 의하여 (문서상으로는) 최초로 주의 재림( )과 동일시되어 유대적 전승의 기독교화가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살전5:1-11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주의 날이란 고통과 심판의 날인 동시에 구원의 날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절정을 이루게 될 날이다.
5: 2-3, '주의 날'의 두가지 비유 : 바울은 주의 날이 임하는 것을 "…같이"라는 두가지 비유를 들어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의 날이 갖는 이중적 성격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2절과 3절에서 '도적'과 '해산의 고통'이라는 두가지 비유가 그것이다. 밤중의 도적은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온다면 예기치 않는 때에 오기 때문에 언제 올 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예기치 않는 때에 오기 때문에 언제 올 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잉태한 여자에게 오는 해산의 고통은 언제 올지 대강 알 수는 있지만 피할 수 없이 반드시 오는 것이다. 이 두 비유들을 함께 생각하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 두 비유들은 주의 날의 예측 불허성과 불가피성, 그리고 준비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제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5:4-5, "빛의 아들, 낮의 아들" : 여기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는 비유들과 댓구들이 나타나는데 '낮과 밤', '빛과 어두움'이 그것이다. 이러한 용법은 쿰란문헌에서도 자주 나타나고 있는데 그러나 신약성서에서는 쿰란문헌에서처럼 낮과 밤, 빛과 어두움을 분명하고 결정적인 것으로 구별하지는 않고 있다. 이것은 지금 빛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도 다시 어두움에 빠질 수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재림의 표상이나 재림시기 같은 사변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계속 임박한 재림 기대 속에서 자신들이 책임성을 가지고 빛과 어두움을 선택하며 현재를 사는 것이다.
ⅱ)명령 Ⅰ (5:6)
여기에서 '잠을 자다'는 4:13-18의 용법과는 다르다. 여전히 은유로 쓰이고 있지만, 이제 죽음에 대한 은유가 아니라 발생하는 일들에 깨어있지 않음, 다가오는 대 사건을 의식하지 못함, 구원에의 무감각성을 나타내고 있다. 또 본 절에서 2인칭을 1인칭으로 바꿈으로써 바울과 모든 믿는 사람들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않은 자들임을 나타내주며, 이들이 이미 빛의 아들로서 이 모든 일들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나머지 사람들'처럼 잠자고 있을 것이 아니라 깨어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이들을 격려하는 것이다.
ⅲ)심화된 동기적 자료 Ⅰ(5:7)
바울은 밤에 일어나는 두 가지 사실들을 그의 가르침 속으로 끌어들인다. '잠'과 '술취함'이 그것인데, 이 두 개념은 현세계의 일들에 흠뻑 취함을 나타내는 은유로서 사용되고 있다.
ⅳ)동기적인 자료 Ⅱ(5:8a)
그리스도인은 밤에 속하지 않고 낮에 속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양식은 '나머지 사람들'(6절)과는 매우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이런 상태를 단순히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상태는 항상 새롭게 형성되어야 한다.
ⅴ)명령 Ⅱ (5:8b)
또한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주어진 세가지 은혜가 8절에 언급되는데 '믿음', '사랑의 흉배' 그리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로서 11장 3절과 평행을 이루는 표현이다. 이 세 가지는 우리들로 하여금 주의 날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ⅵ)심화된 동기적 자료 Ⅱ (5:9-10)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고 불러내신 목적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고 그 증거가 바로 '예수'라는 바울신학의 독특한 주제가 언급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듯이 그분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다시 살리신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사나 죽으나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되는데, 이것이 재림 때 누리게 될 은혜이며, 우리가 고대하는 구원이며 영광이요,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ⅶ)결론 (5:11)
따라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 사람들은 서로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는 봉사의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5:11).
Ⅳ. 바울의 묵시적 종말사상
팔레스틴 유대교에서 하나의 묵시적 종파로서 시작되었다 할 수 있는 최초의 그리스도교는 세상의 임박한 종말을 기다렸는데, 이는 종말론적인 심판주요 구세주로서 오는 예수의 재림의 형태를 신앙한 것이었다. 신약성서 안에는 사탄의 왕국(The Kingdom of Satan), 두 세대의 교리(The Doctrine of two aeons),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 마지막 부활(The end-time resurrcetion)과 같은 상당히 많은 부분에 있어 묵시적 범주들이 드러나고 있다. 바울의 서신 또한 묵시적 견해를 상당 부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여러 저자들이 묵시적 사상과 언어에 의존하였다 할지라도 묵시문학사상은 신약성서에서 철저하게 재해석되고 있다. 그것은 신약성서의 중심사상, 즉 하나님의 새 세대가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도래하였다는 선언에서 발견된다. 유대교의 묵시문학과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의 말씀과 행위를 통하여 이미 나타났다고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현재적 실재에 대한 경험은 묵시문학적 두 세대교리의 시간적 틀을 깨고, 종말에 대한 묵시문학적 사변을 제거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구원의 완성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현재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의 능력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특별히 초기 기독교의 최초, 최대의 신학자라 할 사도 바울의 묵시적인 종말론적 이해는 유대 묵시적 종말론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상과 구별됨을 보이는데, 그것은 그의 종말론 이해의 독특함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의 묵시적 종말론에서 중요한 것은 종말적 삶의 실재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존재의 특징에 대해 가장 흔히 사용되는 개념이 구원의 현재적 차원과 미래적 차원 사이의 긴장관계라는 것인데, 즉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된 구원과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 가운데서 사는 것이라 함이다. A Nygren은 현재의 특징은 "옛 시대"와 "새 시대"가 중복된 상태라고 표현한다. R. Bultmann은 구원의 임재(the presence of salvation)는 역설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련의 형태로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존재의 특징이 표현되어지면서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종말적 삶의 실재가 철저히 탐구되거나 명확히 규명되지 못하고, 애매한 paradox의 개념 속으로 빠뜨려지게 되었다고 보아진다.
바울에게 있어서의 새 삶은 장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하리라는 확실성 속에서 유지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삶은 아니지만, 그에 상응하는 삶이며, 새 창조된 자로서 그리스도인의 종말적 실재인 새 삶은 종말의 현재적 침투 즉 현재 속으로 뛰어드는 미래의 선취로서의 구원을 경험하는 실재이다.
사도바울은 당시 유대교의 묵시사상으로부터 두 세대의 교리를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종말사상의 구조의 기본은 바로 두 세대 교리에 대한 그의 해석으로 인해 이루어진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초대교회의 신앙에 근거해서 유대교의 묵시문학적 종말사상을 재해석하였다. 즉, 사도바울은 유대 바리새인으로서 유대 묵시적 세계관 속에서 있어왔지만, 사도적 전승과 다메섹 사건을 통해 그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재해석된 새로운 묵시적 종말사상에 입각하게 되는 것이다.
1. 구 조
1)두 세대론
①새 세대의 도래
바울은 "이 세대"를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는 현재의 실재로, 그리스도인을 위협하는 현재의 실재로 묘사한다. 바울에게 "이 세대", "이세상"은 무상함(고전7:31), 시련과 고난(롬8:18) 그리고 가득차 있는 악한 양상들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그는 로마교회의 교인들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12:2)고 권면하는가 하면,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는 "누구든지 이 세대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라"(고전3:18)고 하며,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서는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빛의 아들이요…낮의 아들이라…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살전5:4-6)고 권면한다. 바울은 당시 묵시문학적 유대교에서 이해했던 것처럼, "현재"를 하나님에게서 소외되었고 마침내는 멸망하는 이 세대에 속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 세대는 현재의 악한 세대이다.
그러나 바울의 신앙과 복음은 바로 이 악한 세대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어떤 새로운 것이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현재"를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의 활동이 시작된 때라고 이해한 사실을 인정할 때만 그의 종말론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에게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바쳤다"(갈1:4), "때가 차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 "현재"이다(갈4:4)라고 말한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는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다"(고후:2)라고 쓰고 있다. 데살로니가를 향해서는 "우리는 낮에 속에 속하였으니,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5:8-10)라고 말한다.
그는 "현재"를 여러 가지로 특징짓고 있다. "이제"는 "율법과 선지자들이 이미 증거한 하나님의 의가 율법을 떠나서 나타난" 현재(롬3:21)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화목한" 현재(롬5:11)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현재(롬8:1)이며,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쓸" 현재(살전5:8)이며,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할" 현재(살전5:16-18)이며, "성령이 함께"하는 현재(살전5:19)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는 종말론적 현재로써,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가 이미 이 현재에 종말론적 구원의 효과를 가져 왔으며,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구원의 때가 이미 동트기 시작하였다. 그의 종말론적 구원의 구조의 기본이 되는 두 세대를 아담의 세대와 그리스도의 세대로 구분하는 바울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 세대가 시작되었다고 이해한다. 그리스도안에 이미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이 나타난 것이다. 이 세대의 권세들에 대해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이 대립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현재성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이 세대의 권세에 대하여 종말론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확신이었다. 반면에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은 아직도 미래에 속한다. 바울은 오는 세대란 표현을 쓰지 않고 구원의 완성이 기대되는 미래를 하나님나라, 그리스도의 재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하나님의 아들의 나타남, 또는 장차 올 영광의 나타남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갈5:21, 고전15:50, 고전15:23, 살전2:19, 3:13, 4:15, 5:23)
②옛 세대의 존속
한편 바울은 현재의 구원을 "소망 가운데 있는 구원"(롬8:24)이라고 특징지으며,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롬8:23)고 지적한다. 예수의 오심을 메시야의 도래로 보고 있지만, 메시야의 도래와 함께 이 세계의 즉각적인 종말이 온다고 보는 것은 아니며, 곧, 바울에게 있어서 현재의 구원은 완성된 구원이 아닌 것이다.
바울은 묵시사상가들과 같이 이 세대를 적의에 찬 천사적 권세들의 무리와 관련짓는다. "이 세상의 통치자들"(고전2:6), "이 세대의 신"(고후4:4), "천사들"(롬8:38), "권세들"(고전15:24), "이 세상이 초등학문"(갈4:3,9) 등등을 이 세대를 지배하는 영적, 우주적 세력들로 언급하고 있다. 이 세력들은 하나님이 사랑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분리시키려고 위협한다. (롬8:38). 소위 마지막 원수로 지탄받는 사망의 권세도 다른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함께 언급된다(고전15:4-26). 한마디로 이 세대의 천사적 권세들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는 세력들이다.
이와 같이 바울은 옛세대의 권세가 아직도 존속하며, 주 예수의 강림(살전3:13)과 마지막 부활(살전4:16)과 세계의 구원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음을 명백히 한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고대하며(살전4;14-16), 재림의 날(살전3:13,4:14-17), 마지막 원수 인 사망의 권세까지도 멸망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고전15:26).
그러므로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살전4;17)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일은 미래에 속하며, 영광에 참여하기 전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가운데 공중에서 주를 맞이하는 변화를 거쳐야 하며(살전4:15-17), 그때까지 온 피조물은 여전히 타락과 부패의 세력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롬8:19-23)
바울에게 있어서도 묵시문학에서와 같이 이세대-오는 세대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이러한 묵시의 표상들이 바울에게서 큰 변화를 일으킨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서 세대의 전환이 일어났음을 보게 되는데, 바울신학에서 이것에 긴밀하게 연결된 것은, 그전에 전혀 없었던 그에 의해 철저히 전개된 통찰, 즉 신 앞에서 상실된 인간이 세계의 지표로 확인되고 신의 구원의 행위는 시간과 역사 안에서 이 인간에게 일어났다는 통찰이다. 이 세대에는 이제 옛 세대가 존속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취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새세대가 시작되었고, 두 세대가 만나고 있는 것이다. 즉,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부활부터 재림까지 두 세대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바울은 미래의 "주의 날"이 신속히 그리고 갑자기 닥쳐올 것이라는 점을 주목한 후 데살로니가에서 바울 자신이 개종시킨 자들을 "낮의 아들"(5:5) "낮에 속하고"(5:8)라고 덧붙여 말한다. 그들의 현재적 삶은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에 의해 특징지어져 있다. "낮" 그 자체가 아직 오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이 세상의 "어둠"속에서 살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이 당하게 될 진통과 궁극적인 파멸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살전5:3-4)
그리고 바울은 이 세대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오는 세대를 대표하는 능력을 성령이라고 본다. 바울은 성령을 하나님의 능력과 연관시켜 설명한다(살전1:5, 고전2:4, 롬15:13,19, 갈3:5). 구약성경에서도 놀라운 기적들이 행해지는 가운데 능력으로 오시는 사건이, 바로 최후의 날이 현재에 침입해 들어오는 표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욜2:28-29). 이처럼 바울 서신 속에서도 성령이 새로운 세대의 도래에 대한 표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성령은 종말이 실제적으로 이 세대 속에 침입해 들어오는 것을 상징한다.
2)종말론적 구원의 실재
①현재실재와 미래실재와의 관계
바울의 세대의식에 있어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행위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서 "이 세대"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다루시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건은 근본적인 전환점을 이루었다. 비록 현재의 악한 세대가 아직 계속되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나라 도래가 지연되는 듯 한다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통치는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바울의 종말론적인 이해가 현재적이냐 아니면 미래적이냐는 질문을 중심으로 한 논의는 극복되었다고 보아진다. 근래의 성서연구에 따르면, 바울사상에 있어서 종말론적인 구원은 이미 현재적이지만, 또한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는 것이 거의 공통된 견해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되어야 할 점은 미래 구원의 완성이라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행위가 미래에서 현재로 침투되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에서 선취되었다는 점, 그로 인해 잡혀진 종말론적인 이해의 초점은 종말론적인 삶의 실재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있다는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된다(롬6:4).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로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새로운 삶을 바울은 새로운 생명 가운데 행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죄로부터 해방되었으며 깨어 근신하며 새로운 구원의 소망을 덧입고 살아가는 새로운 실재이며 장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하리라는 확실성을 지니며 살아가는 종말론적 실재인 것이다.
바울에게는, 미래의 부활에 관한 것과 현재에 관한 것 즉, 종말론적 구원의 실재로서의 현재적 실재와 미래적 실재의 차원이 언제나 평행적 구도 속에서 제시되고 있으며, 바울의 이런 묵시적 종말사상의 진술에는 그리스도인의 변혁적 삶을 추진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져 있음을 보게된다. 데살로니가전서의 본문도 이런 측면에서 전체적인 구도를 잡아볼 수 있다. 1:1-9/10, 2:1-18/19-20, 3:1-12/13, 4:1-12/13-18, 5:1-22/23-24.
②그리스도의 통치와 그리스도인의 순복
하나님이 새 창조의 창시자이시며, 주역이라면, 그리스도는 새 창조의 사역을 중개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업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구절은 수단을 의미하는 전치사 " "(통하여)를 사용한 구절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해하였고, 인간을 의롭게 하셨다(고후5:18 ;롬3:24).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롬5:1 ; 고후1:3-5). 바울의 서신에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역하시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을 중개하는 분이다.
하나님의 행위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표현도 많다(롬6:23; 8:39; 고후2:14; 5:19; 빌3:14; 살전5:9-10). 때로는 하나님의 활동이 그리스도의 행위와 병행하든가 또는 동일시되는 구절도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그를 사도로 부르신 이를 그리스도라고 하기도 하고(고전 1:17), 하나님이라고도 한다(갈1:15f). 때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연합하여 역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고전4:4; 살전3:11). 바울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고전1:24)라고 부르고 그리스도는 옛 율법의 끝이며(롬10:4), 하나님의 구원의 새로운 방법이라는 의미에서 새로운 법이며, 질서이다. 따라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의 재림 때까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루시는 우주적 질서 또는 주권이 된다. 바울은 재림까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자리에서 통치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바울의 사고에서는 그리스도의 현재의 통치와 미래의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는 구별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유업으로 미래에 받는 것이며 미래에 완성된다(고전6:9-10; 15:50; 갈5:21; 살전4:17). 이 기간동안의 그리스도의 임재와 사역은 성령 안에서 경험된다. 바울은 主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과 성령을 기능적으로 동일시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완전히 일치시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예수의 인간성, 고난과 죽음은 여전히 부활의 주의 기본적인 특성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활동을 중개하듯이 성령은 그리스도의 역할을 중개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은 이 세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그리스도의 통치적 능력이며, 새창조 안에서의 구원의 표시이며, 보증이다(고후1:21-22, 5:5 ; 살전1:5-6, 4:8, 5:19)
이러한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순복이 따른다. 종이 주인의 뜻대로 자신을 바치듯이 그리스도인은 주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롬6:13, 16, 19 ; 살전4:1). 이때 그리스도인은 종말론적 갈등을 겪게 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부활과 재림 이전의 시기를 환란과 위험이 점증하고 惡의 권세들의 횡포가 악화되는 시기로 보기 때문이다. 즉, 이 중간기에서는 사실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임박한 재림만이 번복될 수 없는 사실이며, 그 외의 새로운 창조에서 이루어진 모든 승리는 잠정적인 것이며, 막대한 희생을 대가로 하는 것이므로, 마치 적의 진중으로 공격하여 들어가는 것 같이 악의 세력들로부터의 강한 반격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재림 이전에 그리스도인이 선취한 승리나 진보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고, 부분적이며, 취약한 것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순복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밤과 어둠에 속한 이 세대에서는 종말론적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다. 바울의 확신처럼 종국적인 승리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참여가 있는 그 마지막 날에 가서야 악의 권세들이 완전히 패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시험과 어둠의 환난 속에서도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하며,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써야 하는 것이다. 온 영과 몸과 혼이 주의 강림하실 때까지 소멸치 않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흠없이 보전되도록 악의 세력과의 투쟁과 긴장 속에서 살아야 할 묵시적인 종말론적 존재인 것이다.
③종말의 임박성
데살로니가를 향한 바울의 설교는 아주 강한 묵시적 요소(살전1:9, 4:13-5:11,23)를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임박한 파루시아에 대한 기대는 현저한 특징이 되고 있다. 즉 하나님을 향한 데살로니가인들의 전환이 파루시아 곧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진노와 심판에서 그들 자신을 구원하실 예수의 도래를 기다리기 위한 전환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살전1:9). 분명, 바울의 선포는 자신의 개종자들로 하여금 실제로 종말론적인 클라이막스가 매우 임박해졌음을 믿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 죽는 자들이 생긴 것이 그들에게는 혼동을 일으켰으나 바울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으며, 임박한 종말에 대한 바울 자신의 기대는 조금도 움츠려들지 않았다. 그들 중에 대다수는 그리스도가 강림하실 때에 살아서 그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바울은 확신했다(살전4:15,17; 5:23). 바울은 파루시아 그 자체를 매우 명확한 묵시적인 용어로 묘사하고 있다-천사장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큰 소리와 나팔소리와 더불어 하늘로부터 하강하심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과 같은 그러한 용어. 그리고 파루시아는 경고없이, 준비하지 않은 자에게 파괴를 가져오면서 갑자기 무섭게 임하는 새 시대의 해산고통이며, '따라서 피하지 못할 것이다'(살전5:2이하). 신약 자체에서 가장 오래된 본문인 데살로니가전서는 묵시적인 특징을 독특하게 입증할 뿐만 아니라, 초기 바울의 교회들의 교훈과 희망이 얼마나 뚜렷하게 묵시적이었는가 하는 것을 명시해 주기도 한다.
이러한 절박한 묵시적 종말에의 선언의 견지에서 윤리적인 권면들에 주목해야 한다(살전5:1-11). 이것은 유대 묵시 문학의 또다른 특징이다. 묵시적 희망이라는 것은 도덕적인 노력을 느슨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반대로 그것은 대경각심을 유발한다. 절박한 기대와 도덕적인 성실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④그리스도의 재림,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묵시적 희망
바울은 다가오는 재림의 징표를 읽을 수 있는 어떤 안목이나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나(고전7:26-31), 그의 서신에서 징표에 관한 어떤 이해도 논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그는 재림의 시기를 측정할 수 없다고 명백히 한다. 그것은 주께서 밤에 도적같이 잉태된 여인에게 결코 피할 수 없는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갑작스런 종말이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살전5장).
데살로니가전서 4:13-5:11에서 재림을 묘사하는 언어-명령이 떨어지고, 대천사의 부름, 그리고 하나님의 나팔소리-는 구약성서와 유대문학에서 유래한 전통적인 묵시적 상황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교의 묵시적 희망을 되풀이하고 있으며, 또한 구름을 언급한 것은 다니엘서7:3에 있는 베일에 싸인 인자에 대한 암시일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인자"보다 오히려 "주님"이란 말을 사용한다. 더욱이 그는 그 과정으로, 먼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은 다음 살아있는 우리는 그들과 함께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기 위해 구름 속으로 들리워진다는, Q나 공관복음의 묵시적 담화들 속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구체성을 묵시적 표상으로 상술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의 부활이란 종말론적인 희망을 표현한 것으로, 이것은 묵시사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의로운 죽음은 새 시대의 축복을 소유하기 위해 생명으로 복귀되리라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들 속에서 사건들의 연대와 시간에 관한 도식을 도출해 내는 것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 구원의 내용에 대해서도 별로 언급하지를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지는 궁극적 구원의 내용에 대한 바울의 이해의 특징을 구별해 낼 수는 있다. 하나님 주권의 승리이다. 그리스도가 모든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날 때, 사탄과 죽음과 더불어 모든 권세들과 능력은 파멸될 것이다(살전2:19, 3:13,4:15-16, 고전15:23-25, 롬16:20).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로 인하여 그 주도권은 이미 박탈당하였으나 파멸되지는 않았던 이 세대의 권세와 능력이 마침내 모두 파멸되고 오직 하나님만이 지배하시고 통치하신다는 확신이다. 그때에는 어떤 세력도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사이를 방해할 수 없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주권의 수립,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권세들의 제거가 바로 궁극적 구원을 기대하는 소망의 가장 중요한 전개이다. 바울이 사용한 여러 묵시적 개념들은 오직 이와 같은 기대와 확신을 표현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승리가 될 우주적 구원의 사건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일어날 것이다. 마지막 구원이 성취될 때 인간은 세계와 함께 구속이 된다. 그런데 바울은 이 궁극적 구원에 대한 소망을 묘사할 때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표현을 때때로 사용한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살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5:10).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후13:4). 바울은 물론 궁극적 구원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물로 받는다든가(살전2:12, 롬5:2, 8:18, 고전15:43), 영생을 받는다든가(롬2:7, 갈6:8, 고후2:16, 5:4)등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바울이 대망하는 궁극적인 구원의 본질적인 성격은 그리스도와 끊이지 않는 교제, 항상 주와 함께 있는(살전4:17) 교제인 것이다.
바울의 묵시적 종말사상의 구조는, 유대 묵시사상의 구조를 이어받기는 하지만, 그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새롭게 구성된다. 옛 세대가 존속하는 이 세대 안에 새로운 세대가 도래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새생명을 얻게 되었으며, 종말론적 구원의 현재적 선취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 구원의 현재적 실재는 그리스도의 통치하에 그리스도께 순복하는 그러나 동시에 두세대(존속되는 옛세대와 도래한 새세대)사이의 종말론적 갈등을 겪는 그리스도인의 새 삶을 의미하며, 바울의 묵시적 종말사상의 구조에서 구원의 완성이랄 수 있는 미래실재와 함께 중요한 상관관계를 지닌다. 바울의 묵시적 종말사상은 하나님에 대한 희망, 즉 궁극적인 나라는 하나님에게 속하며, 하나님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에 그의 통치를 시작하신다는 묵시적 희망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 주권의 승리 - 그 완전한 수립은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함께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란 묵시적 희망을 소유하고 있다.
2. 의 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다가오는 승리의 표징들을 간파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즉 하나님의 심판과 우리 현재의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죄와 고난을 포용하며 그들에게 새 삶, 새 용기, 새 희망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징이다. 바울의 묵시사상은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가 우리의 현세상으로 그 빛을-그 빛이 아무리 불투명하다 할지라도 또 그것이 우리의 현 세상의 경험적인 실재와 대단히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이미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 사건과 하나님의 통치의 가시적인 드러남 사이의 중간 시간은 그 안에서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한 그리스도의 임재가 그의 영광스러운 미래로의 복귀를 위하여 준비하는 시간이다. 바울의 묵시사상은 하나님을,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조물들에게로 왔으며 또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그의 임재를 나타냄으로 이미 그의 왕국으로 그들을 모으고 있는, 다가오는 자로서 믿게 한다.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살전2:11-12).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신실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5:24).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찬가와 바울에게서 자주 마주치는 사랑, 소망, 신앙의 세 개념들에서와 같이, 미래에 대한 대망은 많은 종말론적인 진술들을 통해 사도의 복음에 깊이 그리고 확고히 새겨져 있다. 이 종말론적인 명제들 중 많은 것이 간결한 표현으로 모든 지상-인간적인 역사의 피안에 있는 미래를 위해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신앙고백으로 결론을 이끌어내고 그것으로써,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세상에서 이미 믿는 자들을 위해 행한 것에 확고하게 근거를 둔 희망을 확언한다.
또한 미래의 대망들이 장황한 묵시적인 상들과 사상들로 확대되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것들에서는 바울이 그의 교회들에서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 불안들, 의혹 또는 표상들에 대해 대답해야 했던 것과 이를 위해 대개, 그 나름으로 새로 강조하고 그의 그리스도 이해에 의해 자주 변조하기도 하면서 유대교적 원그리스도교적인 묵시문학의 사상 및 표상자료를 받아들인 것을 볼 수 있다. 앞서 살핀 대로 데살로니가전서의 묵시적 단락도 오순절 후의 공동체의 소산인 주의 말을 근거로 도래 전에 죽은 자들의 운명에 관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안심시키고 이미 죽은 자들은 미래의 구원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그들의 근심을 덜어주려고 노력한 위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확언한다. 그들은 살아 있는 자들 뒤로 밀려나지 않고 주가 최후의 심판 날에 하늘로부터 내려올 때, 첫째로 부활하여 아직 살아있는 자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올려지고 주는 그들을 맞을 것이다"(살전4:13-18).
바울의 묵시적인 진술들의 성격은 그것들을 평면화하여 단독적인 전체상으로 종합하는 것을 금한다. 그 진술들의 문맥에 의해, 바울이 무엇 때문에 기록했으며, 어떤 구체적인 상황등 -그것이 교회의 문제들 또는 곤경들이든, 그의 광신적 적들의 구호들과 사상들이든 간에 -을 향해 그가 말했는가라는 문제에 대답해 보려하면 그 사실은 뚜렷해진다. 바울의 데살로니가전서는, 아주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그리스도의 도래와 세상의 종말에 전 기대를 걸고 있던 중 몇몇 공동체 성원들의 죽음으로 동요가 일어났던 한 교회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공동체를 고무시키기 위해, 그들에게는 아직 생소했었음이 확실한 죽은 자들의 부활이란 사상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 묵시에서 유래한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한 표상은 여기서 생명과 사망, "깨어남과 잠듦"(살전5:10) 사이에 결코 건널 수 없는 틈을 열어 놓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과 잠든 자들은 곧 함께 주와 영원히 결합하리라는 특정한 약속에 관련되어 있다(살전4:17,5:19).
바울서신들의 미래에 대한 이 모든 진술들은 언제나 주목되는 바와 같이 다양한 중에서도, 바울의 신학의 매우 특정한 기본 주제들, 즉 존엄과 스스로 시작한 일을 홀로 완성하는 신의 영원한 승리를 전체적으로 다시 인식시켜 준다. 그런 종말론적인 사상들은 인간과 세계를 그들의 시간성의 한계들 안에 매어두고 고난과 죽음 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책임까지도 열광적으로 과장하여 말하는 것을 믿는 자들에게 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은 용기를 주며 또는 권유하면서, 구원사건에 근거를 둔 희망, 환난조차도 신의 구원에 대한 모순으로서가 아니라 이른바 환난, 인내, 확증, 희망의 확고한 고리를 이루면서 구원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경험하는 희망에 의해 새겨진 것이다. 바울의 종말적 진술들은 신이 행한 것, 믿는 자들이 옮겨진 새로운 존재에 대한 종말적 삶의 실재로서의 책임을 촉진시킨다. 즉, 이것은 언제 올지 모르는 그리스도의 도래에 직면하면서 동터오는 햇볕에 서서 깨어 있으며 더 이상 어두움에 속하지 않게 하고 냉철하여 어두움의 자식들과 같이 취하지 않게 하는 촉진력이다(살전5:1-11).
그러므로 바울의 묵시적 선포는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5:8), "화목하라"(5:13), "오래 참으라"(5:14), "항상 선을 좇으라"(5:15), "항상 기뻐하라"(5:16), "쉬지 말고 기도하라"(5:17), "범사에 감사하라"(5:18)고 호소하는데 집중한다.
살핀바와같이 바울의 서신, 특별히 그의 묵시적 종말의 진술들로부터 어떤 특정한 프로그램화된 설계나 구상을 얻어내려한다는 것은, 비역사적인 낡고 헛된 시도가 될 것이며, 동시에 사도의 선포에 대한 신학적 오해일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나는 해방에 관한 그의 복음으로 절망적인 환상 및 인간자력으로 세계의 질서를 바로잡고 세상을 낙원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그릇된 환상에도 종지부를 찍었다. 한편, 그는 그리스도안에서의 자유를 토대로 한, 이미 도래한 새 세대에서 새 창조로서의 인간 상호관계에서 영의 능력으로 확증되려는 가능성들과 척도들을 보여주려는 노력도 적지 않게 행했다. 그는, 어떻게 어디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일어날 수 있으며 일어나야 하는가를 위해 언제나 타당한 것을 미리 규정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살전 4:13-5:11에 나타난 바울의 묵시적 종말사상의 선포는 그러므로 그의 묵시적 사고 안에서, 종말적인 심판주요 구세주로서 오는 예수의 재림의 형태를 받아들이는 세상의 임박한 종말을 선포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도식적 설계의 선포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묵시적 구조 속에서 데살로니가 공동체가 당면하고 있었던 내부적인 문제(죽는 자로 인한 동요)와 외부적인 문제(박해의 고난)에 대한 묵시적 희망의 선포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Ⅲ. 결 론
이상에서 바울의 종말론적 이해의 지평을 데살로니가전서 4:13-5:11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먼저 Ⅱ장에서는 바울의 종말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그 배경이 되는 구약시대와 중간기의 묵시문학사상의 일반적인 개념을 고찰하고 묵시문학 속의 종말사상에 나타난 문학적·신학적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이는 이것이 바울의 종말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당시 유대교의 묵시 문학사상으로부터 두세대, 즉 새로운 세대와 옛 세대에 대한 사상을 물려받아 그의 종말사상에 적용하였다. 제Ⅲ장에서는 바울의 "종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으며 구약에서 받은 묵시문학적인 영향을 통해 바울이 어떻게 그의 종말사상에 적용을 하였는지 데살로니가 전서 4:13-5:11을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제Ⅳ장에서는 묵시 묵학사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두 세대론, 즉 새로운 세대와 옛세대에 대한 사상을 살펴보았다.
이상과 논고를 통해 사도 바울은 종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오늘의 우리는 종말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살펴볼 때, 바울 서신을 비롯한 성서에 나타난 종말 정신은 그날과 그 시기를 알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흑암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고 죽음 앞에서도 부활의 소망과 용기를 주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건에 있어서 완전한 구원이 계시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감추어져 있는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완전히 드러나는 종말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곧 종말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종말의 보증으로 성령이 주어졌다고 생각하였다. 바울은 초기에는 종말이 자기의 살아있는 동안에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만년에 이르러서 자기의 살아있는 동안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바울이 생각하였다고 해서 그의 종말에 대한 기대가 식은 것은 아니다. 바울이 만년에 이르러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종말의 도래라는 것이 애매하기 때문이 아니라 종말이 도래하는 "주의 날"의 시간 계산이 인간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에 속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의 종말에 대한 기대는 더욱 뜨거워져 갔다. 바울은 종말이 도적이 오는 것과 같이 갑자기 순식간에 임하기 때문에 늘 현재를 종말로 생각하여 준비하는 삶으로 살아야 하며 가까이 임박한 것으로 자각하였다(빌4:5).
바울의 종말론은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약속된 절박한 장래의 대망일 것이다. 이상을 통하여 볼 때 결국 참된 종말의 대한 이해의 길은 하나님의 미래 구원을 대망하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믿는 자들에게 개방되어지는 하나님의 은총과 지혜의 신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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