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제1부 폭풍전야
제4장 신군부와 민중의 대격돌
3. 광주운동권과 학원자율화
학생-사회운동 연대 민주화열기 고조
전남대등 총학생회 부활 정치투쟁
노동자.농민 생존권보장 요구 "절정"
시민들 민주화 낙관에 [청협]등 "성급한 판단은 금물" 주장 펴며 조직결속강화
12.12로 박정희군사독재를 연장하려는 전두환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해가고 있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여전히 [민주화의 봄]이 찾아들 듯 사뭇 확신(?)하기 시작한다.
어둡던 유신시대를 마감한 광주와 전남 시.도민들도 새봄에는 그토록 바라던 민주정부가 들어설 것으로 기대에 부푼다.
광주의 충장로와 금남로 거리에서부터 농촌들판에 까지 지역경제 살림은 열악했으나 사람들은 활기가 넘친다.
얼마뒤 이 거리와 산하가 피로 물들줄은 꿈에도 생각지못한 채 적오도 79년말과 80년봄은 오직 희망 그것으로 가득찬다.
그러나 반유신의 선봉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광주운동권 내부의 정세판단은 민주화에 대한 [낙관론]이 우세한 가운데 [비관론]이 교차하면서 지역특수성을 고려한 조직적 대응을 차근차근 해나간다.
상반된 정세분석은 당시 광주청년운동권의 핵심이었던 윤한봉과 김상윤의 주도로 [절대 낙관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전열을 정비해 결정적으로 투쟁한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당시 운동역량을 고려, [학생이 전위에 서는 전 민중의 전국적 봉기]를 설정하고 역량을 강화하면서 시기를 조율하는 투쟁의 전략.전술이 선 것이다.
광주운동권은 80년 신년벽두부터 70년대에 지속적으로 성장한 각 부문별 역량을 통일적으로 결집시키는데 역점을 두고 서울보다 속도를 줄이면서 신중하고 단계적인 준비를 해나간다.
김상윤은 당시 광주운동권의 모습을 [서울을 비롯한 여타지역의 투쟁역량과 방향이 분산되고 통일되지 못했던것과는 대조적이다. 여기에 [동네사랑방]같이 하나로 연결된 논의구조를 갖춰 바로 80년 5월항쟁의 기본역량으로 옮겨진다]고 분석한다.
이점은 광주민중항쟁의 원인과 성격, 주체를 이해하는데 있어 5.18직전 광주운동권 파악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80년 봄 광주운동권은 청년.학생운동을 기본역량으로 해 사회인권운동, 문화운동이 왕성했으며 노동운동이 점차 달아오르고 여기에 교수 문인 정당인 법조인 등 재야 원로그룹이 지원하고 감싼다.
청년.학생운동은 민청세대와 이들이 배출한 전남대 조선대 후배학생들이 [하나의 끈]처럼 연결돼 조직력이 확보된 상황이다.
이들은 79년말부터 본격적으로 광주운동권 선두에 서서 사회부문운동과 연대해 민중운동역량을 결집시키고 학내에서는 자율화추진과 총학생회부활을 통해 5.18의 시발인 저 유명한 [민주화성회]를 이끌어낸다.
민청세대와 긴급조치 구속자로 구성된 전남민주청년협의회는 80년 신학기를 맞아 대다수 회원이 학교로 복적해 학내투쟁을 맡고 나머지 회원은 사회운동을 맡기 위해 복적을 포기, 역할분담이 이뤄진다.
청협은 이미 79년 6월 윤한봉의 주도로 광주시내 동명동로터리에 [현대문화연구소]를 개설하고 이곳을 청년운동 근거지로 만든다.
많은 민주인사들의 기부금으로 마련되고 운영된 연구소는 5.18직전까지 광주운동권의 회의장과 정보생산보급창구가 됐으며 민중문화운동 조직인 극회 [광대]와 수감자 뒷바라지를 하면서 여성운동을 모색하던 [송백회]가 이곳에서 활동한다. [송백회]는 구속자 부인들이 주 회원으로 나혜영(회장. 강신석목사부인) 홍희윤(총무. 황석영") 이소라(이강") 정현애(김상윤") 이소녀(이양현") 임영희 이윤정 정유아 등 회원들은 5.18이 일어나자 YWCA에서 많은 일을 한다.
당시 연구소장을 맡았던 정용화는 [녹두서점과 함께 확산되는 사회 부문운동과 청년학생들이 교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 마당이었다.]고 연구소 역할을 강조한다.
농민운동세력도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가 민주농정 실현과 농민생존권보장을 요구하며 다각적인 투쟁을 모색해나간다.
5월 19일 광주시 북동천주교회에서 전남대 학생회와 연대해 대규모 [전남농민대회]를 갖기로 했으나 5.18로 무산되고 대회준비자들은 5월투쟁에 합류한다.
문화운동조직은 자유실천 문인협의회가 [문학의 밤]행사 등을 통해 시민의식을 북돋웠고 극회 [광대]가 농민운동과 연대해 농촌현장공연을 활발히 진행해 나간다.
노동운동은 가톨릭 노동청년회(JOC)와 들불.백제야학 등의 조직이 가동되면서 80년 3, 4월동안 호남전기 아세아자동차 일신방직 남선산업 전일섬유 삼원물산 등에서 쟁의가 일어나고 민주노조 건설이 진행된다.
교회운동은 기독교교회협의회(NCC) 가톨릭정의평화위원회가 주도해 민주화와 인권운동의 선봉에 서서 헌신적인 활동을 한다.
대학 교수사회도 전남대는 [민주교육지표]사건으로 해직된 교수를 중심으로 교수평의회(회장 안용섭. 작고)가 결성되고 조선대도 사학비리척결 등을 요구하며, 평교수협의회추진위원회(위원장 문병권)가 결성돼 각 대학마다 시국선언을 채택한다.
광주 YWCA와 YMCA등 사회단체에서는 [동계대학]등 각종 시민교양강좌가 계속되면서 시민들의 운집장소가 된다.
종고등학교 교사들도 박석무 윤광장 임추섭등이 나서 정보교환을 위한 비공식적인 모임을 조직해 나가고 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한편 재야는 홍남순변호사가 중심이 돼 국민연합건설에 주력하면서 윤상원이 사무국장으로 내정된다.
마침내 [변혁의 기수]인 학생운동의 움직임이 개학과 함께 빨라진다.
학생운동세력은 겨울방학동안 학회와 동아리 지하학생운동권 제적생등 모임별로 정세파악과 조직정비를 마친 상태다.
여기에 유신반대시위로 대거 제적됐던 복적생들이 가세해 힘은 더욱 커진다.
학원자율화투쟁을 거쳐 [민주]학생회가 부활돼 학원민주화투쟁이 본격화되고 최후의 가두 정치투쟁이 전개되는 것은 광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전남대는 청협등 밖의 청년 사회운동과 긴밀히 연계해 전국에서 모범적으로 단계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을 벌인다.
각과 학회장과 서클대표자로 구성된 학원자율화 추진위원회(학자추위)가 2월하순 구성돼 유신잔재등 학내의 비민주적 요소 제거에 총학생회 건설에 매진한다.
한상석(철학과. 현 한종합상사대표)이 위원장이 되고 송선태(국문과. 현 정상용의원보좌관) 문석환(경영학과. 현 동화은행)등 새얼굴들이 대거 학자추위에 참여한다. 4월초 총학생회를 출범시키기까지 자율화를 위한 공청회와 해직교수및 제적학생 복직.복적환영대회등 참신한 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학생대중을 민주화에 대한 관심으로 들끓는다.
민청세대를 비롯, 긴급조치로 제적됐던 복적생들은 정동년(생물학과. 현 오민련의장)을 위원장으로 한 복적생협의회를 구성하고 3월27일
▲사회정화촉구
▲민족적인 양심회복
▲학원자율화와 정상화
▲대학구성원의 큰화해를 이유로 [어용교수백서]를 발표한다.
같은 시기에 1학년 신입생들은 4월중순에 상과대학을 시발로 군부대에서 받는 병영집체훈련을 [국가안보가 아닌 정권안보]차원이라고 규정하고 군부대 입영을 거부함으로써 사실상 최규하정부와 신군부를 상대로 하는 정치투쟁으로 나아간다.
마침내 전남대는 5월 8일 학생회장 박관현(법학과. 작고)이 주도로 [민족민주화성회]를 개최키로 하고 7일 취지문을 발표함으로써 비상계엄해제와 유신잔당 퇴진을 위한 전면적인 정치투쟁을 예고한다.
전남대에 비해 운동역량이 부족했던 조선대도 2월말 이곤섭(국문학과. 현전교조마산지휘)을 회장으로 한 서클연합회를 조직하고 사학비리척결 투쟁과 학생회 부활 공청회의를 개최하면서 운동분위기를 고조 시키나 서클들간의 수준차와 학교당국의 탄압에 의해 활동이 중단되고 3월 중순 김인원(법학과. 현 우신건설대표)을 위원장으로한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가 결성된다.
학자추위는 78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제적됐다 복직한 이경(정외과. 현 대림조경대표) 유재도 양희승등 복적생과 이우정 구교성 한국재 김대홍 권광빈 곽재구 등이 참여한다.
학자추위는 3월말 총장사퇴, 무능.폭력교수 퇴진등을 요구하며 교내시위와 농성을 벌였으나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하고 5월초 해체된다.
5월 3일에는 시내깡패와 학교 체육과학생들이 농성장을 덮치는 희대의 사건이 벌여지고 무관심한 학생들도 크게 분노하며 5월 9일 구성이 안된 총학생회의 역할을 수행할 민주투쟁위원회가 발족 선언을 한다.
민투는 복적생 김운기 (법학과. 현 완도 민주쌀상회대표)와 이우정(국문학과. 현재서울에서 약국경영)이 공동의장을 맡아 복적생과 학내 운동권자들로 구성됐으며 이후 전남대와 서울지역과 연계해 재단문제를 비롯한 학내투장을 학외투쟁으로 전환한다.
광주에서는 연일 광주 무등산 자락 식영정에서는 현대문화연소주최로 청협 송백회 광대 등의 회원들이 참가한 [민주가족야유회]가 열린다.
석양이 가까워질 무렵 윤한봉은 다음과 같은 인사말로 모임을 마무리한다.
[금명간 피바람이 난다. 신군부가 민주화의 봄을 뒤엎을 것이다. 광주에서 2천명이 죽을수도 있다. 철저히 대비해야한다.]
충분한 역량을 모은후 정치투쟁을 해야한다며 서울쪽 논리에 반박했던 윤한봉의 말을 야유회 참가자들은 흘려 보낸다.
그리고 광주의 5월은 피로 물들여지고 서울을 비롯한 여타지역 운동권은 대부분 공포와 침묵의 늪에 빠져들어간다.
<김선출기자>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연재하시라 수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