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최씨의 기원은 박혁거세 탄생 전설에 나오는 신라 6부 촌장중의 한사람인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로 하늘에서 형산(兄山)으로 내려왔으며, 32년(신라 유리왕 9) 최씨로 성을 하사 받은 것으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소벌도리가 정(鄭)씨의 조상으로 되어있으며 진주 소(蘇)씨도 소벌도리를 시조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씨의 실질적인 시조는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이며 소벌도리의 24세손인 최치원(崔致遠)이며 최치원의 윗대에서 개성, 삭녕, 동주(철원), 전주(최군옥) 등의 본관으로 나위어지고 최치원을 1세조로 하는 경주 최씨에서 최치원의 첫째 아들 최승로(崔承老)의 후손에서 함양, 청주, 충주, 영흥, 용강, 수원, 부안, 강릉, 강화,화순, 통천, 양천, 원주 등으로 분관이 되었고 지손에서 해주, 진주, 탐진, 전주(최균) 등으로 분관했습니다. 최씨는 경주 최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해주 최씨, 우봉 최씨 등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전주 최씨와, 동주 최씨도 상당한 세력을 펼쳤으나 최씨는 조선시대 보다 신라, 고려시대에 세력을 떨쳤습니다. 그밖에 김씨에서 최씨로 성을 하사받은 수성 최씨와 중국의 귀화 성씨인 충주최씨가 있습니다. 최씨는 문헌에 326본으로 나와 있으나 현재는 125개의 본만 전합니다. 최씨는 김씨, 이씨, 박씨 다음으로 인구가 많으며 191만 3322명(1985년)이 있습니다. 간성 강남 강동 강릉 강윤 강진 강화 개성 경기 경북 경주 계림 고부 고성 고양 곡강 곡성 공주 광양 광주 광해 괴산 김제 김해 나주 남양 남원 남평 낭주 단양 달성 담양 당진 대전 동근 동래 동원 동주 명천 문경 밀양 백천 보령 봉천 부안 삭녕 삭주 삼진 상원 상주 상현 서울 서화 선산 성주 수성 수원 순천 순흥 쌍용 아산 안동 양산 양주 양천 양평 여주 연안 연풍 영산 영암 영양 영주 영천 영흥 예산 완산 용강 용궁 용인 용주 우봉 원주 월성 인천 장수 장안 전주 정성 정주 제주 죽산 직산 진산 진주 창녕 창원 천안 청송 청주 초계 충주 탐진 태인 통천 파주 평상 평양 평창 하동 하양 하음 한남 함안 함양 함평 합천 항진 해남 해주 홍천 화성 화순 황주 흥해
간성 최씨(杆城 崔氏)
간성 최씨는 시조를 다르게하는 2계통의 최씨가 있습니다. [ 최무동 계통 ] 시조 최무동은 최흔봉(강릉 최씨(2)의 시조)의 20세손이다. 최무동이 간성에서 살다가 함경북도 온성으로 이사하였는데 그의 후손들이 간성에서 왔다고 하여 강릉에서 분관하여 본관을 간성으로 하였습니다. [ 최지순 계통 ]시조 최지순은 최필달(강릉 최씨(1)의 시조)의 15세손이다. 최지순이 조선개국 때 간성군에 봉해져서 강릉에서 분관하여 본관을 간성으로 하였습니다. 항렬 37세 석(錫)/ 38세 덕(德)/ 39세 규(奎)/ 40세 영(永)/ 41세 근(槿)/ 42세 병(炳)/ 43세 기(基)/ 44세 종(鍾)/ 45세 호(浩)/ 46세 정(楨)/ 47세 주(炷)
강릉 최씨(江陵 崔氏)
강릉 최씨는 시조를 다르게 하는 3계통의 최씨가 있습니다. 최필달 계통 시조 최필달(崔必達)은 고려 개국때 태조를 도와 삼한벽상공신으로 좌정승이 되고 경원(강릉) 부원군에 봉해져서 본관을 강릉으로 하였습니다. 최흔봉 계통 시조 최흔봉은 고려 태조의 부마를 지냈고 그의 12세손 최입지가 고려말에 문화평리상호장으로 공을 세워 강릉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강릉이라 했습니다 최문한 계통 최문한은 고려 충숙왕의 부마로 화성도위삼중대광의 지위에 올랐는데 고려가 망하자 강릉으로 이거했기에 강릉을 본관으로 사용했습니다 [ 대표적 인물 ] ·최치운(致雲) : 시조 최필달의 17세손으로 세종 때의 명신이었으며 특히 형옥(刑 獄)에 밝아 왕명을 받고 '무원록(無寃錄)'을 주석하였습니다. ·최수성(壽城) : 최치운의 증손으로 성리학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시문, 서화, 음 률, 수리(數理) 등 다방면에 뛰어난 당대의 기재절필(奇才絶筆) 이었습니다. 항렬 최필달계통 40세 형(亨)/ 41세 중(重)/ 42세 정(貞)/ 43세 중(重)/ 44세 록(祿) 최흔봉계통 27세 계(桂)/ 28세 병(炳)/ 29세 규(奎)/ 30세 홍(弘)/ 31세 근(根)/ 32세 철(澈)/ 33세 동(東)
강화 최씨(江華 崔氏) (종칭생략 하겠습니다.)
시조 최익후(崔益厚)는 최치원의 후손입니다. 고려 중엽에 상서우복야, 정당문학을 지내고 강화에 살면서 사족의 기틀을 이루었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강화로 하였습니다. [ 대표적 인물 ]
·최용소(龍蘇) : 고려시대에 공조전서(工曹典書) 등을 지냈고, 조선 태조 때에는 회례사(回禮使)로 일본에 건너가 포로로 잡혀간 본국인 570명을 데리고 나왔으며,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 都摠官)을 거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가 태조로부터 '관서부자(關西夫子)'의 칭호를 받았다. ·최순(淳) : 중종 때 대사간을 지냈다. ·최시성(時聖), 최희립(希立) : 선조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웠다. 항렬 30세 섭(燮)/ 31세 재(在)/ 32세 흠(欽)/ 33세 언(彦)/ 34세 주(柱)/ 35세 형(炯)/ 36세 균(均)/ 37세 진(鎭)/ 38세 수(洙)/ 39세 상(相)/ 40세 환(煥)/ 41세 헌(憲)/ 42세 호(鎬)/ 43세 영(永)/ 44세 식(植)/ 45세 열(烈)/ 46세 달(達)/ 47세 용(鎔)/ 48세 한(漢)/ 49세 동(東)/ 50세 희(熙)/ 51세 진(?)/ 52세 선(善)/ 53세 종(淙)
개성 최씨(開城 崔氏)
시조 최우달(崔佑達)은 토산현(현 평북 중화군) 사람으로 신라의 대상(大相)이었다. 그의 아들 최응이 고려 태조를 도와 고려의 건국에 공을 세웠으며 여러 대에 걸쳐 개성에서 살면서 호족이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개성으로 하였다. 항렬 20세 두(斗)/ 21세 용(容)/ 22세 곤(坤)/ 23세 종(鍾)/ 24세 태(泰)/ 25세 동(東)/ 26세 희(熙)/ 27세 규(奎)/ 28세 석(錫)/ 39세 락(洛)
경주 최씨(慶州 崔氏)
경주 최씨의 원류는 신라의 전신 6부촌중 돌산 고허촌장으로서 다른 촌장과 함께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32년에 최씨로 사성받은 소벌도리이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계통을 밝힐 수 없으므로 소벌도리의 후손 최치원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시조 최치원(崔致遠)은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의 24세손이며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이다. 최치원은 869년(신라 경문왕 9년) 12살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을 간지 5년후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무랑시어사에 이르고 자금어의를 하사 받았으며, 제도행영 병마도총 고변의종사관을 역임하고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병부시랑 지서서감이 되었다 그러나 외직을 원하여 대산, 천령, 부성 등지의 태수를 역임하고 아손이 되었다. 그 후 난세를 비관하여 전국을 유랑하다가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하며 수도하다 63세로 생을 마쳤다. 그는 한시문집으로 '계원필경(桂苑筆耕)'(20권) 등의 명저를 남겼다. [ 계파 ] 경주 최씨는 26파로 나뉘었는데 그중 아래의 6대파가 주축을 이룬다.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 : 최청 ·광정공파(匡靖公派) : 최단 ·정랑공파(正郞公派) : 최호 ·사성공파(司成公派) : 최눌 ·화숙공파(和淑公派) : 최현우 ·충렬공파(忠烈公派) : 최광위 [ 대표적 인물 ] ·최승로(承老) : 고려 성종 때 문하시중을 역임하였다. ·최항(沆) : 고려 현종 때 평장사를 지냈다. ·최제우(濟愚) : 동학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최시형(時亨) : 동학의 제2대 교주이다. ·최익현(益鉉) : 한말의 거유(巨儒)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단식으로 일생을 마쳤다. ·최준(浚) : 경주시 교동에서 '최부잣집'으로 이름났다. 이 '최부잣집'은 12대 만 석(萬石), 10대 진사(進士)로 유명하다. 최씨는 조선시대에 와서는 퇴조를 보여 겨우 문과에 42명을 배출하였을 뿐 상신, 대제학 가운데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다. 항렬 32세 모(模)규(圭)/ 33세 병(柄)용(鎔)/ 34세 탁(鐸)문(汶)/ 35세 래(來)동(東)/ 36세 시(時)선(先)/ 37세 용(鏞)재(在)/ 38세 수(洙)탁(鐸)/ 39세 근(根)한(漢)/ 40세 하(夏)민(敏)/ 41세 성(聲)식(植)
계림 최씨(鷄林 崔氏)
시조 최윤순은 경주사람으로 신라때 계림(경주) 부태수를 지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여 경주에서 분적 본관을 계림으로 하였다. 후손들의 분포상황에 대해서는 상고할 길이 없다 1,301명이 있다.(1985년)
고부 최씨(古阜 崔氏)
시조 최척은 최치원의 후손으로 판봉상사사를 지냈다. 그가 평북 구성에 살면서 후손들이 이전의 거주지인 고부를 본관으로 하였다. 항렬 20세 종(鍾)/ 21세 원(源)/ 22세 상(相)/ 23세 섭(燮)/ 24세 재(載)
곡강 최씨(曲江 崔氏)
시조 최호는 경주 최씨에서 분적한 전주 최씨의 시조 최순작의 증손 최균의 11세손이다. 그가 고려 때 문하시중, 삼한벽상공신으로 곡강(흥해)부원군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본관을 곡강으로 하였다. 그 후 누대가 실전되었으므로 그의 후손 최여실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최호를 시조로 하는 흥해 최씨와의 관계는 고증할 수가 없다. 묘소는 경북 영일군 의창읍 송남동에 있다. 항렬 11세 대(大)/ 12세 석(錫)/ 13세 순(淳)/ 14세 유(有)/ 15세 익(翼)/ 16세 오(嗚)
광주 최씨(光州 崔氏)
시조 최득보는 최치원의 후손이라고 하나 고증할 수는 없다. 최득보는 조선시대에 장사랑 훈도를 지내고 평안도 안주로 이사하여 정착하여 살면서 전거주지인 광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항렬 11세 상(尙)산(山)/ 12세 구(耉)신(信)/ 13세 선(善)기(基)/ 14세 응(應)성(聖)/ 15세 영(永)엽(燁)
낭주 최씨(朗州 崔氏)
시조 최흔(崔昕)의 선조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그는 낭주(영암)에 대대로 살아왔으며 신라 효공왕, 신덕왕 때에 원보상(元輔相)을지내며 가세를 번창시켜 후손들이 낭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항렬 16세 재(在)/ 17세 진(鎭)/ 18세 한(漢)/ 19세 채(采)표(杓)/ 20세 병(炳)도(燾)/ 21세 기(基)기(琪)/ 22세 종(鍾)석(錫)/ 23세 순(淳)수(洙)철(澈)/ 24세 상(相)동(東)채(采)/ 25세 환(煥)섭(燮)도(燾)/ 26세 중(重)/ 27세 호(鎬)용(鎔)석(錫)/ 28세 영(泳)호(浩)/ 29세 수(秀)술(述)/ 30세 형(炯)현(炫)
동주 최씨(東州 崔氏)
시조 최준옹(崔俊邕)은 득성시조 소벌도리의 25세손으로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공신 삼중대광 태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증손자 최석이 고려 문종 때 감수국사 삼수국 상서이부사를 지내고 동주(현 철원)에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동주로 하였다. 철원 최씨라고도 한다. [ 대표적 인물 ]
·최유청(惟淸) : 최준옹의 6세손으로 고려 예종 때 집현전 대학사를 지냈다. ·최당 : 최유청의 아들로 고려 신종 때 문하평장사를 지냈다. ·최선(詵) : 최유청의 아들로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다. ·최영(崔瑩) : 고려 말기의 명장으로 최유청의 6세손이며 동원부원군 최원직(元直 )의 아들이다. 그는 강직청렴한 명장이요 명재상으로서 왜구를 무 찔러 전공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10여 차례에 걸친 왜구 소탕과 함께 수차례의 내란에 공을 세웠으나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李 成桂)의 군사와 맞섰다가 결국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최남선(南善) : 국학(國學)의 대가이다. 항렬 31세 운(雲)/ 32세 계(桂)/ 33세 흘(屹)/ 34세 린(麟)/ 35세 근(根)
부안 최씨(扶安 崔氏)
시조 최창일은 고려말에 상호군 공조전서를 역임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부안으로 낙향 하였다. 아들 최도명이 세종 때 호조좌랑으로 왕에게 직간을 하다가 길주의 명원으로 유배 되었다. 그래서 그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청주 최씨에서 분관하여 본래의 고향인 부안을 본관으로 하였다. 항렬 22세 일(鎰)종(鍾)/ 23세 수(洙)태(泰)/ 24세 영(榮)근(根)/ 25세 겸(謙)/ 26세 재(載)/ 27세 진(鎭)/ 28세 호(浩)/ 29세 모(模)/ 30세 익(益)/ 31세 용(用)/ 32세 석(錫)
삭녕 최씨(朔寧 崔氏)
시조 최천로는 고려 때 평장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 최유가(崔兪嘉)가 고려 명종 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내고 삭녕에서 대대로 살았으므로 본관을 삭녕으로 하였다. 삭녕최씨는 주로 경남지방에 많이 살고 있는데, 특히 사천군 사천면(泗川面), 정동면(正東面), 사남면(泗南面) 일대에 특색 있는 동족부락을 이루고 있다. [ 대표적 인물 ]
·최항(恒) :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영의정을 두 차례나 역임하였다. ·최흥원(興源) : 최항의 증손으로 선조 때 유성룡(柳成龍)의 뒤를 이어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최한기(漢綺) : 최항의 15세손이며 조선 실학의 거두로 영조,정조 때에 융성했던 실학이 학문으로서 이론적, 사상적으로 미숙하던 것을 철저한 경 험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무실사상(務實思想)을 전개하여 실학의 체계를 확립한 학자이다. 역사학자들이 그를 가리켜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가교자(架橋者)'라 평할 만큼 그는 한국 사상사에 중 요한 업적을 남겼다. 항렬 19세 우(遇)/ 20세 구(九)/ 21세 병(炳)/ 22세 우(宇)/ 23세 성(成)/ 24세 범(範)/ 25세 강(康)/ 26세 신(新)/ 27세 성(聖)/ 28세 규(揆)
상원최씨(祥原崔氏)
시조 최응은 대상 최우달의 아들로서 고려 태조 때 내봉경을 지냈다. 그는 처음 궁예를 섬겨 한림랑이 되었는데 궁예의 횡포가 심해지며 왕건을 의심하여 모반한다고 문초하자 왕건이 이를 부인하려 하였다. 이때 그가 진서를 작성하기 위해 궁예 곁에 있다가 사태가 위급함을 보고 거짓으로 붓을 떨어뜨리고 붓을 줍기 위해 뜰 아래로 내려가서 왕건에서 승복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귀띔해 주었다. 왕건이 그제서야 깨닫고 승복하여 화를 면했다.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고 왕위에 오르자 원봉성사가 되고 이어 광평랑중 내봉경을 지내면서 고려 건국에 많은 공을 세우다가 35세에 죽었다. 태조가 애석히 여기고 원보에 추증했다가 다시 대광 태자태부로 고쳐 증직했다. 1027년(현종18) 태조 묘정에 배향되고 1033년(덕종2) 사도에 가증되었다. 그 후 보첩이 실전되어 소목을 밝힐 수가 없어 원손 효동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본관은 처음에 황주로 하다가 충숙왕 때 황주가 상원으로 개칭됨에 따라 상원이라 하였다. 시조의 묘소는 상원군 동면 초봉리에 있고, 1세조의 묘소는 실전되었다. [ 대표적 인물 ] .최윤연(조선 관직:병절교위) .최수해(조선 장사랑) .최응립(조선 관직:훈련판관) .최은명(조선 관직:수문장) .최흥운(조선 자:기포 관직:부호군) .최상태(조선 자:광택 관직:도정) .최상의(조선 자:향도 관직:주사) .최상영(조선 자:중명 관직:경무관) 1854년(철종5) 교관에 보직되고 임기를 마친 후 감찰에 전임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승진하여 인천항경무관에 이르렀다. 항렬 16세(載)/ 17세(鎭)/ 18세(泳·濟)/ 19세(根)/ 20세(熙)/ 21세(喆)/ 22세(鍊)/ 23세(淳)/ 24세(柱)/ 25세(炯)
수성 최씨(隋城 崔氏)
수원을 본관으로 하는 최씨가 두 계통이 있는데 이를 本최와 來최로 구분한다. 본최인 수원최씨는 원래 성이 최이므로 본최라 하고 수성 최씨는 본래 성이 김이었는데 최로 사성되었다고 하여 래최라 한다. 수성 최씨의 시조 최영규(崔永奎. 시호는 문혜)는 원래 김씨이다. 그는 신라 경순왕의 17세손으로 1261년(고려 원종 2년) 문과에 급제하고 형조전서겸 보문각 대경으로 있으면서 서경에서 명망이 높았다. 충렬왕 때 수원 일대가 기강이 퇴폐하고 인륜을 지키지 않아 왕이 개탄하고 '군신 가운데 누가 이를 다스려 풍속을 순화 하겠느냐?' 하니 그가 자청하여 호장으로 부사 안설과 함께 효도로 인도하고 의리로 설복하니 1년이 못되어 크게 변했다. 왕이 가상히 여겨 1302년(충렬왕 28년) 포상을 하고 그공이 최외와 같다 하여 최씨성을 내리고 수성백에 봉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수성으로 하였다. 같은 혈손이면서 또 다른 계통이 있는데 고려 때 부정을 지낸 최거경을 1세조로 하는 계통이 있다. 최영규의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어천리에 있다. 항렬 최영규 계 20세 순(淳)/ 21세 병(柄)/ 22세 혁(爀)/ 23세 중(重)/ 24세 용(鎔)/ 25세 원(源)/ 26세 근(根)/ 27세 현(顯)/ 28세 구(球)/ 29세 찬(贊)/ 30세 수(洙)/ 31세 인(寅)/ 32세 열(烈)/ 33세 정(廷)/ 34세 구(九)/ 35세 준(濬)/ 36세 빈(彬)/ 37세 연(然)/ 38세 채(?)/ 39세 선(善)/ 40세 우(雨)/ 41세 동(東)/ 42세 성(性)/ 43세 돈(墩)
최거경 계 15세 기(基)종(宗)/ 16세 현(鉉)모(模)/ 17세 윤(潤)/ 18세 휴(休)/ 19세 병(炳)/ 20세 주(周)/ 21세 종(鍾)/ 22세 수(洙)/ 23세 근(根)/ 24세 환(煥)/ 25세 재(在)/ 26세 석(錫)/ 27세 한(漢)/ 28세 영(榮)
수원 최씨(水原 崔氏)
수원 최씨는 동성동본이면서 시조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 한 계통은 고려 예종때 수주(수원)호장 최상익을 시조로 한다 . 다른 계통의 시조 최정은 고려 때 산원동정을 지냈으나 그의 선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최정의 고향이 수원이므로 본관을 수원으로 하였다. 항렬 20세 처(處)종(宗)/ 21세 천(天)붕(鵬)/ 22세 남(南)준(俊)/ 23세 용(龍)제(?)/ 24세 석(錫)학(學)/ 25세 활(活)시(時)/ 26세 진(鎭)
아산 최씨(牙山 崔氏)
아산 최씨는 해주 최씨에서 분적되었다. 시조는 사과를 역임한 최예립이다 선대는 누대 아산에 세거하다가 최예립이 정주지방으로 이주하면서 선대의 고향인 아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항렬 20세 처(處)종(宗)/ 21세 천(天)붕(鵬)/ 22세 남(南)준(俊)/ 23세 용(龍)제(?)/ 24세 석(錫)학(學)/ 25세 활(活)시(時)/ 26세 진(鎭)
양주 최씨(楊州 崔氏)
시조 최억(崔億, 시호는 문경)은 학문과 덕행이 높아 태사에 천거되었다. 1353년(고려 공만왕 2년)에 호부상서로 양주군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본관을 양주로하였다. 묘소는 충북 청원군에 있다. 항렬 정연공파 20세 수(秀)/ 21세 묵(默)환(煥)/ 22세 기(基)규(圭)용(用)/ 23세 종(鍾)탁(鐸)석(錫)/ 24세 순(淳)영(泳)준(準)/ 25세 동(東)상(相)/ 26세 섭(燮)열(烈)/ 27세 재(在)성(聖)/ 28세 현(鉉)선(善)/ 29세 해(海)기(淇)/ 30세 권(權)술(述)/ 31세 희(熙)영(榮)/ 32세 숙(塾)풍(豊)/ 33세 수(銖)선(銑)
정안공파 19세 세(世)/ 20세 왕(王)/ 21세 병(炳)/ 22세 사(士)/ 23세 호(鎬)/ 24세 영(永)/ 25세 동(東)
양천 최씨(陽川 崔氏)
시조 최원(崔遠)은 고려 때에 밀직부사로 공을 세워 양천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전주 최씨에서 분관하여 그를 시조로 본관을 양천으로 하였다. 항렬 21세 섭(燮)/ 22세 익(益)/ 23세 현(鉉)/ 24세 제(濟)/ 25세 식(植)
연풍 최씨(延豊 崔氏)
시조 최지강은 고려 때에 진사로 안화(연풍)에 대대로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경주 최씨에서 분관하여 연풍을 본관으로 하였다. 그러나 경주 최씨와의 계보는 고증이 없다. 항렬 15세 보(輔)/ 16세 국(國)/ 17세 봉(鳳)/ 18세 린(麟)/ 19세 의(義)/ 20세 문(文)
영천 최씨(永川 崔氏)
시조 최한(崔漢)은 전주 최씨의 시조 최균의 10세손으로, 고려 의종, 명종 때에 벼슬을 하면서 공을 세워 연산(영천) 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영천으로 하였다. 그러나 문헌이실전되어 분파계대를 상고할 수 없다. 묘소는 경북 군위군 송현에 있다. [ 대표적 인물 ] ·최흥효(興孝) : 조선 세종 때의 서예가로 유명하다. 그는 홍문관 제학을 지냈으 며 예서와 초서를 잘 썼다. 흥효의 후손에서 영천최씨는 12파로 갈린다. ·최무선(茂宣) : 고려 말기의 유명한 인물로는 발명가 이다. 그는 원(元)나라의 화약 기술자로부터 기술을 배워 그 제조법을 익혔으며 조정에 건 의, 화통도감을 설치케 하고 그 책임자가 되어 화포, 화전, 화통 등의 화기를 만들어 때마침 쳐들어 온 왜구의 선박 500여 척을 전멸시켰다. 1401년(조선 태종 1년) 조선의 화기 보유량은 화약 4근 4냥, 화기 200여 병(柄)이던 것을 그가 관장한 뒤 19년(세종 1년)에는 화약 6,900여 근, 화기 1만 3500여 병, 화포발사군 1만 여 명이라는 놀라운 숫자로 발전시켰다. 항렬 22세 한(翰)상(祥)/ 23세 봉(鳳)규(圭)/ 24세 기(基)일(一)/ 25세 석(錫)진(鎭)/ 26세 수(洙)원(源)/ 27세 상(相)
영흥 최씨(永興 崔氏)
영흥 최씨의 중조 최은함은 문창후 최치원의 지파이다. 그의 손자 연아가 경주에서 영흥으로 입북하였고 연아의 현손 한기가 조선 태조의 외조로서 태조가 등극한 후 위로 3대가 영흥백에 추봉되었으므로 본관을 영흥으로 하여 경주 최씨에서 분적하였다 묘소는 영흥군 덕흥면 진동리에 있다. 항렬 28세 봉(鳳) 석(錫)/ 29세 달(達) 입(立)/ 30세 기(基)/ 31세 희(熙) 봉(鳳)/ 32세 영(泳)
완산 최씨(完山 崔氏)
시조 최순작(시호는 문열)은 고려 정종 때 검교신호위 상장군으로 완산군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 후의 후손에 대한 기록은 없어지고 후손 최수강이 고려 말에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로 낙향하여 정착해 살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최수강을 1세조로하고 본관을 완산(현 전주)으로 하였다. 항렬 24세 호(鎬)/ 25세 락(洛)/ 26세 임(林)/ 27세 연(然)/ 28세 철(喆)/ 29세 용(鎔)/ 30세 준(準)/ 31세 종(種)
용강 최씨(龍崗 崔氏)
시조 최지무는 고려 때 무과에 급제하고 상호군 판선공감사로 공을 세워 용강군에 봉해졌다. 그 후 손자 최개산이 조선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감무, 호조판서로 직간을 하다가 북방으로 유배되어 정착세거하게 되었다 후손들이 청주 최씨에서 분관하여 본관을 용강으로 하였다. 항렬 17세 교(敎)/ 18세 진(鎭)/ 19세 구(求)/ 20세 근(根)/ 21세 섭(燮)/ 22세 준(埈)/ 23세 선(善)/ 24세 태(泰)/ 25세 모(模)/ 26세 현(炫)/ 27세 균(均)/ 28세 용(鎔)
용궁 최씨(龍宮 崔氏)
시조 최현(崔元浩)은 고려 때에 평리부밀직사사를 지냈다. 손자인 최유가 군부판서로 충혜왕을 호종한 공으로 성익근재협찬보정 1등공신으로 취성군에 봉해졌으며 공민왕 때 용성(용궁) 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해주 최씨에서 분관하여 본관을 용궁으로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개성에 있다. 항렬 20세 익(翼)/ 21세 봉(鳳)/ 22세 호(鎬)/ 23세 태(泰)/ 24세 식(植)
용주 최씨(龍州 崔氏)
시조 최광(崔光)은 고려조에서 부호장을 지냈다. 그의 선계는 원래대령(해주)인이었으나 용주로 이적하였다. 그의 증손 안도는 충숙왕의 총신으로 태부대감을 지냈고 현손 원(용성군)은 판도판사 밀직부사 등을 지내면서 외구 및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고 이어 원나라의 요청으로 장사성을 토벌하다가 전사하였다 한편 원의 형 유는 조적의 난때 충숙왕을 배종하여 1등공신이 되었으나 관작에 불만을 품고 원나라로 망명하여 공민왕을 폐위시키기 위하여 원병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왔다가 고려군에 패퇴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의 분포상황에 대하여는 상고할 길이 없다.
우봉 최씨(牛峰 崔氏)
시조 최원호(崔元浩)는 고려 중엽 우성공신으로 문하시중, 상장군을 지냈으며 후손들이 우봉(현 김천)에 살면서 본관을 우봉으로 하였다. 그러나 최원호의 상계는 상고할 길이 없다 [ 대표적 인물 ] ·최충헌 : 고려 희종 때 문하시중으로 진강군 개국후에 봉해졌다. ·최우 : 고려 고종 때 환도공신으로 진양후에 봉해졌다.
원주 최씨(原州 崔氏)
시조 최보은의 상계는 경주 최씨에게서 분적된 계통이라고 하나 분파계대를 상고할 수 는 없다. 다만 그의 조상이 강원도 원주에 토착하였었고 그가 1434년(세종 16년)에 호용위사대호군으로 임지인 함경도 명천에서 세거하였다 . 후손들이 조상의 연고지인 원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전주 최씨(全州 崔氏)
전주 최씨는 시조를 각각 다르게 하는 4계통이 있다. ·최순작 계통 시조 최순작(崔純爵, 시호는 문열)은 고려 정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문하시중으로 완주(현 전주) 개국백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최순작을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전주로 하였다. ·최균 계통 시조 최균(崔均)은 최치원의 지손으로 고려 때 동북로도지휘사가 되어 조이총의 난때 순절하고 완산군에 추봉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최균을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전주로 하였다. ·최군옥 계통 시조 최군옥(崔群玉. 시호는 문충)은 동주 최씨의 시조 최준옹의 후손으로 고려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내고 완산 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전주로 하였다. ·최아 계통 시조 최아(崔阿)는 최순작의 7세손이다. [ 대표적 인물 ] ·최명길(鳴吉) : 그는 인조반정 때 1등공신으로 대제학, 영의정을 역임했다. ·최석정(錫鼎) : 최명길의 아들. 숙종 때 소론(少論)의 영수로서 당론의 소용돌이 속에서 6차례나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최석항(錫恒) : 최명길의 아들. 경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최양(瀁) : 최군옥의 후손. 고려 말기의 절신(節臣)으로 '두문동(杜門洞) 72현록 (賢錄)'에도 들어 있다. 항렬 최순작계 24세 진(鎭)/ 25세 철(澈)/ 26세 식(植)/ 27세 병(秉)/ 28세 규(奎)/ 29세 종(鍾)/ 30세 락(洛)/ 31세 동(東)/ 32세 섭(燮)/ 33세 원(遠)/ 34세 호(鎬)/ 35세 승(承)/ 36세 근(根)/ 37세 용(容)/ 38세 교(敎)/ 39세 선(善)/ 40세 수(洙)/ 41세 상(相)/ 42세 양(陽)/ 43세 용(用)
최균계 26세 종(鍾)/ 27세 순(淳)/ 28세 병(秉)/ 29세 섭(燮)/ 30세 규(奎)/ 31세 진(鎭)/ 32세 원(源)/ 33세 식(植)/ 34세 병(炳)/ 35세 익(翼)/ 36세 석(錫)/ 37세 영(永)/ 38세 수(秀)/ 39세 열(烈)/ 40세 선(善)/ 41세 현(鉉)/ 42세 승(承)/ 43세 동(東)/ 44세 형(炯)/ 45세 기(基)
최군옥계 26세 식(植)/ 27세 병(炳)/ 28세 규(奎)/ 29세 용(鎔)/ 30세 한(漢)/ 31세 환(桓)/ 32세 섭(燮)/ 33세 주(周)/ 34세 호(鎬)/ 35세 해(海)/ 36세 동(東)/ 37세 희(熹)/ 38세 균(均)
최아 계 20세 홍(洪)/ 21세 병(秉)/ 22세 열(烈)/ 23세 규(圭)/ 24세 호(鎬)/ 25세 락(洛)/ 26세 임(林)/ 27세 연(然)/ 28세 철(喆)/ 29세 용(鎔)/ 30세 준(準)/ 31세 종(種)
죽산(죽주) 최씨(竹山 竹州 崔氏)
우리나라의 모든 최씨는 신라의 전신인 6촌 중의 돌산고허촌 촌장 소벌도리의 지손에서 분파된 씨족으로 한결같이 그를 원조로 모시고 있다. 죽산 최씨 역시 소벌도리의 지손이 죽산군에 봉해짐으로서 분적하여 본관을 죽산이라고 하였다 . 그러나 여러차례 병화를 당하면서 보첩이 유실되어 시조의 이름 및 생사연대와 행적은 물론 선세의 세계를 상고할 수가 없다 . 그래서 죽산군의 원손 효운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1세조의 묘소는 실전되고 보성 삼정사에 위패를 봉안하여 제향하고 있다.
직산 최씨(稷山 崔氏)
시조 최홍재(崔弘宰, 시호는 양숙)는 고려 예종때의 인물로 여진정벌에 대훈을 세웠다. 우산 기상시로 서북면 병마사가 되어 포주를 수복하고 의주성을 쌓은 공으로 동지추밀원사, 형부상서, 판삼사사, 참지정사, 문하시랑 평장사를 역임하고 한때 순천에 유배되기도 했다 복직하여 판이부사로 좌리공신에 책록되고 수사공우복야, 평장사에 이르렀다. 후손들이 직산에서 대를이어 살면서 본관을 직산으로 하였다. 1,366명이 있다.(1985년)
진산 최씨(珍山 崔氏)
시조 최개(자는 개지)는 최종한의 아들이다. 그는 1526년(조선 중종 21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사예를 거쳐 부사를 지냈다.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전주 최씨에서 분관하여 본관을 진산으로 하였다. 684명이 있다.(1985년)
청송 최씨(靑松 崔氏)
시조 최세걸(崔世傑)은 최온(해주최씨 시조)의 원손이다 통훈대부로 어희장군(禦侮將軍)에 추증되었다. 그는 청송에서 살다가 삭주의 대다동(大多洞)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이전의 거주지인 청송을 본관으로 하였다. 묘소는 평안북도 삭주군 삭주면 대대동에 있다. [ 대표적 인물 ] 최팽령(彭齡) : 조선조에 참의를 지냈다. 최용 : 부정(副正)을 지냈다. 최인방(仁邦) : 중추부사를 지냈다. 최흥원(興原) : 부장(副將)을 지냈다. 최시황 : 참의를 지냈다. 최언상(彦祥) : 판관을 지냈다.
청주 최씨(淸州 崔氏)
시조 최운은 최치원(경주 최씨의시조)의 15세손이다. 고려 예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언정(右正言), 좌사간기거서인(左司諫 起居舍人),서해도안찰사(西海道按 察使)를 지냈고 인종 때의 권신(權臣)인 이자겸(李資謙)을 탄핵하다가 고성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복관되어 이부시랑에 이르고 서원(西原, 현 청주)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경주최씨에서 분관하여 그를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청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항렬 24세 모(模)/ 25세 병(炳)/ 26세 균(均)/ 27세 종(鍾)/ 28세 영(泳)/ 29세 락(樂)/ 30세 열(烈)/ 31세 재(載)/ 32세 흠(欽)/ 33세 용(溶)/ 34세 주(柱)/ 35세 광(光)
초계 최씨(草溪 崔氏)
시조 최용궁(崔龍宮, 시호는 문숙)은 전주 최씨의 시조 최순작(崔純爵)의 8세손이다. 고려 충렬왕 때 문과에 장원 국가에공이 있어 충익재보조공신 판사참찬 삼중대광광록대부 세자태부(忠翼戴保祚功臣 判事參贊 三重大匡光祿大夫 世子太傳)로 팔계(八溪, 초계의 옛 이름)군에 봉해졌다 후손 들이 전주최씨에서 분관하여 최용궁을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초계로 하여 계승하고 있다. [ 대표적 인물 ] ·초계 최씨는 조선시대에 사인(舍人)을 지낸 최산두(崔山斗)를 배출하면서 가문의 기틀을 세웠다. 그는 1504년에 생원이 되고 1513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입선되었으며 문명(文名)이 높았다. 1519년 을묘사화 때 전남동복(同福)에 적거(適居), 1533년 풀려나왔고, 나부산인 이라 자칭하였다. 당시 호남의 윤구(尹衢), 유성춘(柳成春)과 함께 호남의 삼걸( 三傑)이라 일컬었다. 최경모(崔璟模) : 최규록(崔圭祿)의 아들로, 1873년 경과정시(慶科庭試)에 병과( 丙科)로 급제하였다. 최이 : 임진왜란 때 백의종군하였고, 그 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 되었으며 전력부위수문장(展力副尉守門將)이 되었다. 항렬 27세 재(在)/ 28세 휴(休)식(植)/ 29세 병(炳)형(炯)/ 30세 기(基)균(均)규(圭)/ 31세 용(鏞)현(鉉)종(鍾)/ 32세 홍(洪)호(浩)/ 33세 동(東)환(桓)/ 34세 열(烈)엽(燁)/ 35세 철(喆)요(堯)
충주 최씨(忠州 崔氏)
시조 최승(崔陞)은 본래 당나라 장군으로 846년(신라 문성왕 8년) 신라에 기근이 들어 도둑무리가 창궐하자 당나라 무종의 명으로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이를 토평하였다. 889년(진성여왕 3년) 신라에서 원종(元宗), 애노(哀奴)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동벌(東征), 이를 평정하여 은자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올랐고 그후 예성(蘂城, 충주의 옛 이름)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충주로 하였다. [ 대표적 인물 ] ·고려시대에 문하시중을 지낸 최옥(崔沃)을 비롯하여 문하시랑을 지낸 최백청(崔 伯淸), 좌찬성을 지낸 최숙청(崔叔淸),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復射)를 지낸 최우 청(崔遇淸), 직제학의 최원유(崔原儒), 검교정승(檢校政丞)의 최렴(崔濂), 이조 전서의 최자, 판관의 최중청(崔仲淸) 등 여러 관직자들을 배출하면서 가문의 기 틀을 세웠다.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대사간을 지낸 최순(崔洵)을 위시하여, 현감을 지낸 최빈 등을 배출하면서 충주최씨는 번영을 더하였다. 최빈(崔濱) : 언양현감으로 있으면서 청렴하고 애민하였으며, 선정을 베풀어 언 양현민들이 선정비를 세웠다. 최맹현(崔孟賢)은 1519년 문과에 급 제하고, 여러지방의 외직을 거쳐 충청도관찰사에 이르렀다. 앞서 외직을 지내는 동안 부임하 는 고을마다 선정을 베풀어 명성을 드높였다. 최명선(崔明善) : 명종 때의 인물로 1555년 문과에 급제하고, 흥해, 청풍 등지의 부사를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렀는데 일찌기 천추사(千秋使)의 서 장관(書狀官)으로서 연경에 다녀왔으며 외직으로 나가 있을 때는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청풍의 동벽루(寒碧樓), 괴산(槐山)의 청 원정(淸遠亭) 등을건축했다. ·최규석(崔圭錫) : 이항로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하여 사림의 중망(重望)을 받았다. ·최헌영(崔憲永), 최동봉(崔東鳳) : 학행과 예문에 저명하였고, 후진양성에 전심 하였으며 문집이있다. 항렬 23세 우(愚)/ 24세 면(勉)/ 25세 회(會)/ 26세 용(溶)/ 27세 임(林)/ 28세 현(炫)/ 29세 곤(坤)/ 30세 종(鍾)/ 31세 운(雲)/ 32세 계(桂)/ 33세 훈(勳)/ 34세 지(址)
탐진 최씨(眈津 崔氏)
시조 최사전(崔思全, 시호는 장경)은 최온(해주최씨의 시조)의 증손이다. 그는 예종의 내의(內醫)로서 1126년(고려 인종 4년) 권신 이자겸이 궁궐을 범하고 권세를 부리자 인종과 협의하여 이자겸의 심복 탁준경(拓俊京)을 설득하여 이자겸을 제거케 하였다 그 공으로 병부상서에 추충위사공신(推忠衛社功臣)이 되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고 탐진(강진의 옛 이름)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탐진으로 하였으나 두 아들 최변(弁), 최효인(孝仁) 이하는 여러차례의 병화로 인하여 고증과 문헌이 실전되어 계통을 밝힐 수 없어 최사전을 시조로하고, 그 후손 중 최응규(應奎), 최준랑(俊良), 최효노(孝老), 최총(聰), 최윤덕(允德), 최홍건(弘建), 최유각(有恪), 최맹상, 최해(海), 최제노(悌老), 최심충(深忠), 최계(啓), 최승태(昇泰), 최장보(章甫) 등 세거지(世居地)의 이름을 딴 각파의 중시조를 1세조로 하여 대를 이어오고있다. 묘소는 전남 강진군 군동면 나천리에 있고 향사일은 10월 15일이다. 최사전은 1147년(의종 1년) 제겹공신으로 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 대표적 인물 ] 탐진최씨는 고려시대에 상락원직장(尙樂院直長)을 지낸 최철(崔哲)을 비롯하여 이부상서를 지낸 최승(崔弁), 중서령을 지낸 최응규(崔應奎), 예부상서를 지낸 최상(崔尙), 중랑장을 지낸 최원길(崔原吉), 병부상서의 최용승(崔龍陞),참지정사의 최표(崔彪)등 여러 관직자들을 배출하면서 번영하였다. ·최상(崔尙) : 예부상서를 지내고 1056년 예부랑중(禮部郞中)으로 감찰어사가 되 어 7도를 순시하고 1057년 내사사인지동관시독사(內史舍人知東官 侍讀事)를 거쳐 1061년 좌유덕(左諭德)이 되었다. 1065년 병부상서 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거란에 다녀오고, 1068년 동지중추 원사로 지공거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 5명을 배출하였다. ·최중일(崔中一) : 1444년 진사가 되고 1450년 문과에 급제한후 사헌부감찰을 역 임하고, 1453년 지평(持平)을 거쳐 사간에 이르렀다. 최경 : 조선 때의 인물로 세종 때 도화서화원(圖畵署畵員)을 거쳐 별제(別提)에 이르렀다. 안견의 산수도와 함께 인물화를 잘 그려 유명하였는데 1472년 소헌왕후, 세조, 예종, 덕종의 어진(御眞)을 그린 공으로 안구마(鞍具馬) 를 하사받았으며, 뒤에 당상관(堂上官)에 올랐다. ·최홍전 :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천문, 지리, 역상에도 밝았다. 1679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각 조의 랑관(郞官)을 지내다가 1689년 기사환 국(己巳換局)으로 사직하고 고향에 은거했다. 1694년 갑무옥사사(甲茂 獄巳事)로 성환도찰방(成歡道察訪)에 기용되고 뒤에 음죽현감에 임명되 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항렬 강진 금천파 22세 상(相)/ 23세 환(煥)/ 24세 기(基)/ 25세 석(錫)/ 26세 영(永)/ 27세 술(述)/ 28세 용(容)/ 29세 균(均)/ 30세 태(兌)/ 31세 수(洙)/ 32세 병(秉)/ 33세 걸(杰)/ 34세 재(在)/ 35세 진(鎭)/ 36세 순(淳)/ 37세 식(植)/ 38세 형(炯)/ 39세 평(坪)
청양 예산 판서공파 22세 환(煥)/ 23세 재(在)/ 24세 갑(鉀)/ 25세 봉(鳳)/ 26세 병(炳)/ 27세 녕(寧)/ 28세 무(茂)/ 29세 기(起)/ 30세 강(康)/ 31세 신(新)/ 32세 임(任)
준양파 21세 상(相)병(柄)영(榮)/ 22세 환(煥)균(均)/ 23세 기(基)재(在)금(錦)/ 24세 석(錫)갑(鉀)수(洙)/ 25세 영(永)봉(鳳)병(秉)/ 26세 술(述)병(炳)현(炫)/ 27세 녕(寧)기(基)/ 28세 무(茂)종(鍾)/ 29세 기(起)윤(潤)/ 30세 강(康)/ 31세 신(新)/ 32세 임(任)
효노파 16세 상(相)/ 17세 영(榮)/ 18세 규(奎)/ 19세 석(錫)/ 20세 수(洙)/ 21세 병(秉)/ 22세 재(在)/ 23세 현(鉉)/ 24세 윤(潤)
광주 주서파 16세 병(秉)/ 17세 종(鍾)/ 18세 연(衍)/ 19세 임(林)/ 20세 ?/ 21세 강(岡)/ 22세 의(義)/ 23세 태(泰)/ 24세 동(東)/ 25세 명(明)/ 26세 중(重)/ 27세 근(根)
총파 21세 위(胃)/ 22세 욱(旭)/ 23세 병(丙)/ 24세 녕(寧)/ 25세 성(成)/ 26세 기(起)/ 27세 용(鏞)/ 28세 재(宰)/ 29세 서(瑞)/ 30세 춘(春)/ 31세 락(洛)/ 32세 식(植)/ 33세 형(炯)/ 34세 균(均)/ 35세 종(鍾)/ 36세 호(浩)/ 37세 근(根)/ 38세 열(烈)/ 39세 요(堯)/ 40세 호(鎬)
윤덕파 16세 병(秉)/ 17세 섭(燮)/ 18세 시(時)/ 19세 진(鎭)/ 20세 락(洛)/ 21세 식(植)/ 22세 일(日)/ 23세 돈(墩)/ 24세 용(鎔)/ 25세 해(海)/ 26세 근(槿)/ 27세 열(烈)
광주 주남 급서남파 16세 석(錫)진(鎭)동(銅)/ 17세 영(泳)한(漢)순(淳)/ 18세 주(柱)근(根)식(植)/ 19세 희(熙)/ 20세 철(喆)/ 21세 용(鏞)/ 22세 철(澈)/ 23세 춘(春)/ 24세 하(夏)/ 25세 규(奎)/ 26세 호(鎬)/ 27세 하(河)
광주 주북파 16세 상(相)/ 17세 섭(燮)준(焌)/ 18세 시(時)규(奎)/ 19세 진(鎭)종(鍾)/ 20세 락(洛)/ 21세 식(植)/ 22세 일(日)/ 23세 돈(墩)/ 24세 용(鎔)/ 25세 해(海)/ 26세 근(槿)/ 27세 열(烈)
태인 최씨(泰仁 崔氏)
시조 최용전은 고려 충혜왕 때 척불숭유로 인하여 태산(태인의 옛 이름)으로 낙향한 최해의 6세손이다. 최용전은 연산군 때 예빈사판사를 지냈으나 갑자사화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530년(중종 25년) 안릉(재령의 다른이름)에 정착하여 살면서 경주최씨에서 분관하여 고향인 태인을 본관으로 하였다. 항렬 13세 규(珪)/ 14세 인(仁)/ 15세 손(孫)/ 16세 증(曾)/ 17세 영(永)
통천 최씨(通川 崔氏)
시조 최경현(崔景賢)은 고려 때에 정의대부동판밀직사사(正義大夫同判密直司事), 중서좌상시감찰어사(中書左常侍監察御史)를 역임했다. 그의 8세손 최운해(崔雲海)가 고려말에 밀직부사를 지내고,조선 시대에 삭주병마사로서 통천에 출전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병조판서에 승진했다. 그래서 이 공훈을 영원히 남기기 위하여 경주최씨에서 분관하여 통천을 본관으로 하였다. [ 대표적 인물 ] 통천崔氏는 고려조에 동정(同正)을 지낸 최탁(崔卓)을 비롯하여 상장군을 지낸 최유(崔侑), 삼군부사(三軍府事)를 지낸 최운해(崔雲海) 등 여러 관직자들을 배출하면서 번영 하였다. ·최운해 : 아버지의 전공으로 공민왕 때 충남위산원(忠男衛散員)에 기용, 여러번 왜구를 격퇴하여 전법판서(典法判書), 충주와 전주의 목사를 거쳐 밀직 부사에 이르러 충근좌명공신(忠勤左命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어 양광 도절제사(楊廣道節制使) 겸 판광주목사(判廣州牧事)로서 전공을 세웠고 1388년 전라도부원수로서 요동정벌 때 조민수(曺敏修)의 막하로 출정,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고 이듬해 문하평리로서 양광도절제사가 되어 박위와 함께 왜구를 격파하였다. ·최윤덕(崔潤德) : 조선시대의 인물로, 1410년 무과에 급제하고 상호군, 동북면조 전병마사가 되고, 다음해 우군동지총제를 거쳐 1413년 경성등 처철제사(鏡城等處節制使)로 나아가 티무르를 복속시킴으로써 야인(野人)들의 준동을 막았으며, 1419년 의정부참찬으로서 삼군도통사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하고, 1421년 공조판서가 되 어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1435년 좌의정으로 승 진, 1445년에는 궤장을 하사받았다. ·최립 : 1561년 식년문과에 장원하여 여러 외직을 지낸 뒤 1581년 재령군수로 있 으면서 빈민구제에 힘썼고, 임진왜란때는 외교문서를 작성하는데 타의 추 종을 불허하여 송도삼절의 한사람이 되었다. 항렬 19세 성(性)/ 20세 진(鎭)/ 21세 근(根)/ 22세 병(炳)/ 23세 규(圭)
한남 최씨(漢南 崔氏)
시조 최흥연은 고려 때에 합문지후를 역임하였다. 후손 계방은 수사공 삼지정사 판삼사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 함은 문과에 급제하여 1125년 우정신 지재고가 되고 다음해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자 왕의 행재소에 가서 시종 뒤에 예부시랑 한림시독학사로 만수절사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고 병조상서를 거쳐 문화평장사호형부사를 지냈으며 문장에도 능했다 그러나 본관의 유래는 알 수가 없으며 한남은 수원의 다른 이름이다. 후손들에 대 자세한 기록은 없다. [ 대표적 인물 ] ·최계방 : 수사공, 상서우복야, 참지정사, 판삼사사를 역임하였다. ·최함 : 최계방의 아들. 시호는 문간. 고려 예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고 1125년(인 종 3년) 우정언지제고가 되고, 1126년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자 국새를 가 지고 왕의 행재소에 가서 시종한 뒤에 예부시랑, 한림시독학사로 만수 절제사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병부상서, 판삼사사를 거쳐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호형부사를 지냈으며 문장에도 능했다. 612명이 있다.(1985년)
해주 최씨(海州 崔氏)
시조 최온(崔溫)은 널리 알려진 해동공자(海東孔子) 최충의 아버지로 해주 대령군 수양산밑에서 오래동안 살았다고 한다. 그 곳의 별칭이 고죽군이어서 고죽최씨라고도 한다. 시조 최온은 일찌기 해주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이름을 떨쳤으며 문장으로도 명성이 높았고, 뒤에 판사부사(判吏部事)를 지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해주에서 이루어졌고 또 여러 대에 걸쳐 해주에서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해주로 하여 대를 계승하고 있다. [ 대표적 인물 ] 최충 : 최온의 아들. 동방 유학(儒學)의 비조(鼻祖)인 성제(惺齊) 최충, 그는 고려 목 종 8년에 문과에 장원, 문종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은퇴하여 開京에 최초의 사학(私學)인 구제학당(九齊學堂)을 열어 많은 영재를 배출 하였다. 그의 두 아들 최유선(惟善)과 최유길(惟吉)은 모두 宰相의 자리에 올라 부 자 2대에 名門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게 된다.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 의하면 "동방 학교의 일어남이 최충에서 비롯되 었고 최충의 자손으로 재상에 오른 사람이 수십명이 된다"고 했다. ·최경회(崔慶會) : 그 유명한 논개(論介)의 남편으로 전해진다. 논개는 사실 기생 이 아니고 최경회의 부실(副室)로 남편이 진주에서 전사하자 기생을 가장, 왜장들의 승전축하연에 참석해 왜장을 안고 투신 했다고 밝혀지고 있다. 항렬 사평공파 28세 문(文)/ 29세 극(克)/ 30세 선(善)/ 31세 우(雨)/ 32세 상(相)/ 33세 훈(薰)/ 34세 규(圭)/ 35세 진(鎭)/ 36세 영(泳)/ 37세 환(桓)/ 38세 병(丙)
좌랑공파 28세 환(煥)/ 29세 재(載)/ 30세 현(鉉)/ 31세 승(承)/ 32세 식(植)/ 33세 광(光)/ 34세 수(壽)/ 35세 진(鎭)/ 36세 구(求)/ 37세 종(種)/ 38세 용(容)
전한공파 28세 옥(玉)/ 29세 석(錫)/ 30세 부(溥)/ 31세 병(秉)/ 32세 섭(燮)/ 33세 노(老)/ 34세 호(鎬)
화순 최씨(和順 崔氏)
시조 최세기(崔世基)는 고려때에 평장사를 지내고 오산(화순)군에 봉해졌으므로 경주 최씨에서 분관하여 본관을 화순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의 기록이 없어져서 후손인 고려시대의 최언(崔堰)을 1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최언의 아들인 최계신(崔繼臣)의 두 아들 최영호와 최영유 대에서 2파로 갈라졌다. 이 밖에 최윤의를 1세 조상으로 하는 계통도 있다. 최세기의 묘소는 화순읍 일심리에 있다. [ 대표적 인물 ] ·최영호(永浩) : 고려 충렬왕 때 좌우위 보승산원(左右衛保勝散員)을 지냈다. ·최영유(永濡) : 공민왕 때 해주목사를 지냈다. ·최영경(永慶) : 저명한 성리학자로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었다. 항렬 23세 재(在)/ 24세 현(鉉)/ 25세 원(源)/ 26세 식(植)/ 27세 헌(憲)/ 28세 희(熹)/ 29세 종(鍾)/ 30세 택(澤)
황주 최씨(黃州 崔氏)
시조 최남혁(崔南赫)의 상계는 전주최씨에서 분관한 계통인데 문헌이 없으므로 분파계대를 고증할 길이 없다. 그는 조선개국 초기에 벼슬이 좌상(左相)이었으나 직간하다가 황주목사로 좌천되 지내던 중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인죄로 몰려 그 후 평북 의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정착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前 임지를 추모하여 본관을 황주라 하였다. 묘소는 의주군 송장면 금광동에 있다. 항렬 17세 중(重)/ 18세 석(碩)응(膺)/ 19세 정(廷)원(元)/ 20세 재(載)기(基)/ 21세 봉(鳳)현(鉉)/ 22세 종(鍾)준(俊)/ 23세 태(泰)
흥해 최씨(興海 崔氏)
시조 최호(崔湖)는 최치원(경주최씨 시조)의 7세손 최균(均)의 11세손이다. 그는 고려 때 삼중대광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 삼한벽상공신 신호위상장군(三韓壁上功臣神虎衛上將軍)으로 곡강(曲江. 흥해의 다른이름)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경주최씨에서 분관하여 그를 1세조로 하고 본관을 흥해로 하여 대를 이어오고 있다. 묘소는 경북 영일군 의창읍 송남동에 있다. 항렬 25세 경(慶)동(潼)흥(興)익(翼)도(道)기(基)현(鉉)창(昌)세(世)용(龍)/ 26세 치(致)희(熙)도(道)영(泳)근(根)식(軾)우(祐)식(植)태(泰)/ 27세 준(俊)기(基)간(幹)남(南)백(百)의(毅)규(奎)우(祐)증(增)/ 28세 한(翰)한(漢)병(炳)상(尙)병(昺)정(廷)수(壽)택(宅)/ 29세 규(圭)학(鶴)곤(坤)두(斗)진(鎭)형(衡)도(道)석(錫)식(植)/ 30세 순(舜)환(煥)호(鎬)봉(鳳)달(達)무(茂)학(鶴)한(漢)/ 31세 춘(椿)재(在)달(達)식(植)홍(弘)권(權)/ 32세 종(鍾)용(容)상(相)윤(潤)희(熙)찬(燦)/ 33세 근(根)열(烈)수(洙)규(奎)재(在)/ 34세 관(官)재(在) 끝으로 님에 건강과 행복이 충만하시기를 두손모아 빌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