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수신[盧守愼]
본문
1515(중종 10)~1590(선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
|
대윤(大尹)의 한 사람으로 영의정에 올랐으나,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황·기대승 등과 주자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본관은 광주.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
|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를 지낸 홍(鴻)이다. 장인인 이연경(李延慶)에게 배웠으며, 휴정(休靜) 등과 사귀면서 불교의 영향도 받았다.
1543년(중종 38)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전적·수찬을 지냈다. 1544년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대윤(大尹)에 속하여 인종 즉위초에는 정언을 지내면서 소윤(小尹) 이기(李
)를 탄핵하여 파직시키기도 했다. 1545년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수렴청정을 하자 대비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을 비롯한 소윤이 정권을 잡은 뒤, 윤임(尹任) 등의 대윤을 제거하기 위하여 1545년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그는 소윤계열인 윤춘년(尹春年)과의 친분으로 죽음은 면했으나, 이조좌랑에서 파직되고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1547년(명종 2) 정황(丁
)과 함께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고 진도로 옮겨 19년간 귀양을 살았다. 1565년 괴산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567년(선조 즉위년)에 풀려나 교리·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내고, 1573년 우의정, 1578년 좌의정, 1585년 영의정이 되었다. 1588년 영의정을 사직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한 일이 문제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했다. |
|
진도에 유배되었을 때 이황·김인후(金麟厚)·이항(李恒)·기대승 등과 서신을 교환하면서, 도심(道心)은 체(體), 인심(人心)은 용(用)으로 보는 인심도심체용설(人心道心體用說)을 주장했다. 주자의 인심도심설에 따르지 않고 선가(禪家)의 용어를 쓴다고 하여 이항과 이황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우의정으로 있을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대상(大喪) 뒤에 갑자기 검은 갓을 쓰는 것이 미안하다 하여 국상에만 쓰던 흰 갓과 흰 옷을 입었는데, 뒤에 정철(鄭澈)이 이것을 본받았다. 원래 담제(i祭)의 갓에는 정해진 제도가 없었는데, 교리 신점(申點)이 경연(經筵)에서 이야기하여 백포립(白布笠)으로 정해졌다.
진도로 귀양갔을 때 당시 섬의 풍속은 혼례 없이 남의 집에 있는 여자를 중매를 통하지 않고 빼앗아오는 것이었는데, 예법으로 일깨워 혼인에 예식이 있게 했다. 이때 군수이던 홍인록(洪仁祿)이 심하게 박대했으나, 뒤에 요직에 있으면서 홍인록이 언관들의 규탄을 받을 때 오히려 그를 옹호했다. 부모의 봉양을 극진히 하여 몸소 음식을 만들어 바쳤으며, 관직이 높아진 후에도 이를 계속했다.
선조는 그를 "한·유(韓柳:즉 韓愈와 柳宗元)의 문장이요, 정·주(程朱)의 의논(議論)이다"라고 했다. 충주 팔봉서원(八峰書院), 상주 도남서원(道南書院), 진도 봉암사(鳳巖祠), 괴산 화암서원(花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광해군 초에 선조묘정에 배향하려는 의논이 있었으나 정여립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 夙興夜寐箴〉을 주해했고, 〈대학장구 大學章句〉·〈동몽수지 童蒙須知〉 등을 주석했다. 저서로는 〈소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였다가 뒤에 문간(文簡)으로 바뀌었다. |
|
소재집[蘇齋集]
본문
조선 중기의 문신 노수신(盧守愼:1515~90)의 시문집. |
12권 8책(원집 10권, 내집 2권). 목판본. 초간본은 1602년(선조 35) 저자의 조카 대하(大河)가 천안에서 목판으로 간행했다. 속리산에 두었는데 1615년에 소실되었다. 1624년 아들 복성(復城)이 성주에서 주자(鑄字)로 중간했고, 1652년 증손 준명(峻命)이 다시 개편한 것을 1665년 경명(景命)이 봉화에서 목판으로 3간했다. 권1~6은 모두 시로 부 3편, 시 1,540수를 수록했다. 권7은 잠(箴)·찬·서(序)·발·기·제문 등과 과제(科製)·책론을 수록했다. 발은 나흠순(羅欽順)이 쓴 〈곤지기 困知記〉의 발문인데, 저자가 나흠순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과 인심도심관(人心道心觀)을 계승한 점과 관련이 있다. 권8은 소차(疏箚)·전(箋)·사면(辭免)인데, 모두 사직소이다. 권9·10은 행장·묘표·묘지·비명 등이다. 권10의 끝에 자명(自銘)을 실었다. 다음에 연보·부록·행장을 실었다. 행장은 16장의 장편으로, 1634년(인조 12)에 이준(李埈)이 쓴 것이다. 내집은 상편·하편으로 서연(書筵)에서의 강의록인 〈시강록 侍講錄〉을 위시하여 〈초창록 草創錄〉·〈구색록 懼塞錄〉·〈문답록〉·〈양정록 養正錄〉·〈서기록 庶幾錄〉을 수록했다. 대부분 성리학 관계의 저술과 서간·문답 등을 제목을 붙여 묶은 것이다. 저자의 사상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국립중앙도서관·규장각·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
|
∥문화탐방∥ 孝子로 이름난 선비, 蘇齋 盧守愼 先生을 찾아서 -황 구 하
여름 입구, 화령재 넘어 화서 가는 길가 개망초꽃이 하얗게 피어있다. 화서면사무소가 있는 화령은 고개 들머리에 놓인 작은 산간 읍이다. 이중환(李重煥)의『택리지(擇里志)』에는 “상주 서쪽은 화령이요, 고개 서쪽은 충청도 보은인데 화령은 소재 노수신의 고향”이라 하였다.
몇 년 전, 내가 처음 찾아가게 된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선생 묘소(상주시 화서면 금산리 산587-1번지)는 큰 길에서 굽어들어 가는 입구에 ‘봉산서원’글씨가 박힌 작은 표석 외에는 다른 표지판이 없어 찾는데 여간 애를 먹은 게 아니다. 묘소 근처에 있음직할 표지판이 여전히 보이지 않아 좀 아쉽다.
초록 물결 일렁이는 논과 봉산못 옆길을 따라 들어가면 봉산서원이 먼저 눈에 띄는데, 나는 그 옆길을 돌아 낮은 언덕에 있는 묘소를 먼저 찾았다. 벌초한지 2,3일 정도 된 듯 묘소가 말끔하다. 이 묘소는 오랫동안 그것도 참으로 애달프게 떨어져 지낸 부인과 합장된 것으로 주변 오래된 나무들과 들꽃들이 그 애틋함을 더해준다.
소재의 묘소는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음택(陰宅)치고는 참으로 궁색하리만치 단촐하다. 무덤 앞 문인석상 또한 세월을 비킬 수 없는 탓에 약간 기울어진 채로 서 있다. 그러나 청렴한 그의 삶을 생각하면 더욱 고고하게 다가오는 것 있어 나는 늘 고개를 겸허히 숙이게 된다. 묘표(墓表)는 자신이 지은 명(銘)을 썼다. 그 한 구절에 “소사(小事)에 흐리어 혹 죄가 되었으나, 대의(大意)가 분명하니 참으로 부끄러움이 없다(小事糊塗或終累, 大意分明信無愧)”라 하였는데, ‘부끄러움이 없다[無愧]’라는 말이 가슴 서늘하게 다가온다.
그렇다. 소재는 조선 중기의 시인· 정치가 ․ 학자로 영의정까지 지낸 훌륭한 상주 인물이다. 소재의 덕행과 업적의 성과는 매우 다양하지만 특히 그는 효자로 이름난 선비였다.
효(孝)는 유교의 기본적 윤리규범의 하나이다. 후한(後漢) 때 허신(許愼)이 편찬한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효’는‘노(老)’자의 생략체와‘자(子)’자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글자로, 자식이 노인을 도와서 떠받든다는 뜻이다. 즉‘부모를 섬기는 도리’를 나타내고 있다.
소재는 부모를 봉양함에 양친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면 지극한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조정에서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면 소매 짧은 옷을 입고 부엌에 들어가서 손수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부모에게 바쳤다. 이와 같은 일은 고관의 높은 지위에 올라서도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유교적 규범으로 부모에게 효를 다하지 않은 선비가 어디 있을까만은 남성우월주의 사상이 지배적인 그 시대, 그것은 너무도 획기적이고 진보적인 모습이 아니었을까. 의식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남자가 부엌에서 얼쩡거리면 그다지 박수칠 만한 사람이 많지 않은 지금 현실을 생각해도 말이다.
선조(宣祖) 원년(元年), 소재는 한국 역사상 가장 오랜 유배기간이었던 19년간의 진도 유배에서 풀려나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를 제수(除授) 받는다. 그러나 두 달 후 아버지의 병을 이유로 고향으로 내려간다. 유배생활 때문에 곁에서 못다 한 효도를 하고 싶은 그 간절함이 오죽 했겠는가. 선조는 소재에게 서울로 돌아올 것을 재촉하며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겸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를 특별히 임명했다.
그러나 소재는 한 달 뒤에 양친을 봉양하기 위해 “신(臣)의 아버지 연세, 올해 일흔 셋으로 여위고 늙어 노환이 대단하며, 어머니는 일흔 두 살로 걱정과 노고로 병을 얻어 숨이 차나이다. 신이 귀양살이 할 때는 어찌할 수 없었으나 지금은 외람되이 영달하여 몇 달째 봉양을 못했습니다. 가서 어버이를 봉양하다 죽어 어버이와 함께 구천(九泉)에 가기를 바랍니다”라는 해직의 소(疏)를 올린다.
선조는 이 상소를 받아보고 해직을 간청하여 봉양하겠다는 정성에 참으로 아니 들어줄 수 없었다. 그러나 “노수신은 학행(學行)이 뛰어나 내 바야흐로 어진 이를 얻어 함께 훌륭한 정치를 이루고 싶은데 지금 들어주면 나는 현자(賢者)를 잃게 되니 어쩌면 좋겠는가”고 대신(大臣)들에게 물었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그와 같은 학문인(學問人)은 구할 수 없으니 그 사람을 보내지 말고 그의 어버이를 서울로 모셔 와서 봉양토록 하면 근심 없이 오로지 진강(進講)의 일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여 선조는 그에게 고향으로 내려가서 어버이를 받들어 모시고 오도록 하였다.
소재가 고향에 가서 보니 어버이의 병이 너무 위중해서 모시고 갈 수가 없었다. 소재는 해직귀향(解職歸鄕) 상소를 올리고 또 올린다. 선조는 그의 간절하고도 아름다운 효성과 딱한 사정을 잘 알지만 인재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그를 놓아주지 않다가 몇 번이고 같은 상황이 발생하자 선조는 할 수 없이 소재에게 가까운 고을원을 주어 어버이 봉양을 하게 만들어 준다.
소재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 觀察使)에 임명되어 부임할 무렵 부친의 상을 당하게 되어 급히 고향에 내려가게 되었다. 이때 서울에 있던 퇴계(退溪)가 달려와서 상사(喪事)를 같이 의논하고 전송해주지만 소재는 너무도 슬퍼하고 상례를 극진히 하여 병이 나서 위독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놀라 내의(內醫)를 급파하여 소재를 돌봐주는데 소재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홀로 된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몇 번의 사직을 요청하나 또 허락되지 않아 다시 간곡한 상소 올리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선조는 모친을 서울로 모시게 해 소재는 할 수 없이 어머니를 서울에서 모시나 얼마 후 모친이 병환으로 누우시고 상을 당하게 된다. 고향 상주로 운구할 때 선조는 방한복, 우의, 약 등을 보내주는데 그만큼 국왕이 소재의 효행과 사람됨을 아끼고 존숭했음을 알 수 있으며 동료들에게까지 귀감이 되었음은 당연하다.
소재는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 대상(大喪) 후에 바로 흑색의 갓을 쓰는 것이 미안하다고 생각하여 백포립(白布笠)을 쓰고 다니기를 국상(國喪)때와 같이 하였는데, 그 뒤 직제학 정철(鄭澈)이 이를 본받아 실행했고, 뒤에 교리 신점(申點)이 주청하여 담제(禫祭)전에는 백포립을 쓰도록 제도화시킨 일도 있다.
이상(理想)과 포부가 좌절된 암울하고 험난한 유배기간에도 소재는 유학자로서 덕행의 근본인 ‘효’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 애를 썼다. “곁에서 모시니 스스로 즐겁더니, 깨어나니 근심걱정 더해지네(侍側自懽說, 覺時增悶憂)”라는 유배시절 그의 시 한 구절처럼 몸은 비록 멀리 있지만 부모를 꿈에서까지 생각하는 큰 효자로서 소재는 참 효도, 즉 양지(養志)의 효를 실천하고자 애썼던 것이다. 부모님과 형제,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애절함으로 그는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을까.
묘소를 참배하고 나오는 길, 소재 선생이 배향되어 있는 봉산서원은 전보다는 조금 말쑥한 모습을 드러낸다. 얼마 전 찾았을 땐 뒤편 지붕이 허물어져 서원 건물 자체가 다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파란 비닐 포장으로 겨우 비가림을 하고 있었고 문이며, 마루, 기둥이 윤기 없이 바짝 야위어가고 있었다. 기와지붕도 새로 얹고 축대도 새로 쌓았다고는 하지만 서원은 여전히 쓸쓸하기만 하다.
두 그루 은행나무가 묵묵히 서 있는 마당을 거쳐 천천히 걸어 나오는데, 묘소로 가기 전 만났던 깡마른 노인 한 분이 아직도 천천히 꼴을 베고 계셨다. 묘소 쪽으로 들어가면서 마주치게 돼 인사를 했던 어른이었다. 잠시 후 아들인 듯한 젊은 남자가 저만치 경운기를 툴툴거리는 채로 세우더니 다가 와 노인의 짐을 훌쩍 짊어지고 간다. 아들의 뒤를 따라가는 노인의 모습은 더없이 한적하고 그윽해 보였다.
배울수록, 잘날수록 불효한다고 하던가. 그래서인지 소재가 한 나라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지위와 체면에 상관없이 어버이를 봉양한 효성은 『효경(孝經)』에 이르듯“하늘의 불변한 기준이요, 땅의 떳떳함(天之經地之義)”으로 효가 우주적 원리로 승화되는 힘임을 다시 한 번 알게 해준다.
핵가족화에 따른 인간 소외, 패륜범죄 등 도덕성의 타락이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요즘 부쩍 효사상의 회복을 부르짖는 사회적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래서 가정, 학교, 사회에서 효 교육과 개인적 실천을 요청하는 소리가 오히려 요란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공자가 “사람 스스로가 스스로의 길[道]을 넓혀가는 것이지 길[道]이 사람을 넓히지는 않는다(人能弘道, 非道弘人)”고 하였듯이,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과 조건이 크게 변한 상황에서 고루한 주장과 똑같은 도덕적 엄격주의로서의 효만을 곧이곧대로 강조할 수만은 없다. 다만 “옛것을 따사롭게 하고 새로움을 알아(溫故而知新)"효의 본질을 생각하며 실천하는 일이 더욱 중요한 일일 것이다.
소재의 묘소와 봉산서원에서 나오면 봉산 못이 보인다. 이 못은 고려 말에 팠다고 하는데, 못 가운데 20여 평의 뜬 섬[浮島]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이 섬이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흐르는 역사처럼 못가엔 수양버들만이 낭창하게 둘러 서 있다.
거기에서 1㎞쯤 구불거리는 길을 더 올라가면 ‘효자 정재수 기념관’이 있다. 이는 1974년 1월 22일, 아버지와 함께 12㎞ 떨어진 충북 옥천 큰집에 제사를 지내러 가던 중 폭설 속에 쓰러진 아버지를 구하려고 애쓰다가, 자신의 옷을 아버지에게 덮어주고 함께 하늘나라로 떠난, 효자 정재수의 효행을 널리 알리고자 건립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옥연사’는 소재의 유덕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사당과 강당이 있다.
들판 가득 어린 곡식들이 무성하게 숨을 토해내는 상주 화서 땅, 거기 효자 노수신 선생 묘소에 들러 아름다운 효의 손을 뻗어 효자 정재수를 쓰다듬어 보면 어떨까. ‘노수신’ 할아버지로부터 ‘정재수’ 손자에게로 이어지는 ‘효’의 피가 뜨겁게 흐르고 있으니.
[경북예술]2005 제22호 http://cafe.daum.net/dkbu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