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제자를 택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6장12-16절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예수님께 찾아와서 안식일에 밀밭에서 이삭을 자른 제자들의 문제를 거론하며 그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일을 했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논쟁에 대해서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또 다른 안식일에 회당에서 오른손 마른 자를 치유하시면서 주님은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셨습니다.
1. 열두제자를 택하신 예수님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6:12-13)
이 때에(12절)는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갈릴리에서 전도하시는 동안, 특히 5장과 6장 11절까지의 사건들이 있은 후를 가리킵니다. 11절과 관련하여 마태는 예수님께서 무리들의 음모를 깨달았을 때에 이 지방을 떠나셨다고 기록하는데(마 12:15) '이 때'는 예수님께서 그 지방을 떠나신 직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때가 정확히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산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나 학자들은 팔복을 말씀하신 산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여기서 '산'에는 관사가 있어서 예수님이 늘 오셨던 친숙한 산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밤이 맞도록’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뉘크테류오'는 '밤을 새다'의 미완료 능동태 분사로서 오랜 지속을 강조합니다. 이 단어는 의학적 용어로 신약에서는 이 구절에만 나오지만 70인역 등에서는 자주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의학적 용어로 쓰는 경우에는 밤을 새워 병간호를 하는데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살펴볼 것 같으면 그의 생애에서 모든 중요한 사건 전에는 반드시 기도하시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끝임 없는 기도의 실천을 통하여 자신의 기도와 실제 행동을 일치시키기 위해 한적한 곳을 찾아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습니다(막 1:35). 기도는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의 능력의 공급선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죄인을 구속하고자 하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애절하고 절박한 끊임없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본 구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가 선택하려고 하는 제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을 통해 미래에 성취할 모든 것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러한 기도는 남에게 과시(誇示)하기 위해 요란스럽게 빌었던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기도와는 현격히 대조됩니다(막 12:40).
예수님은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택하셨습니다(13절). 열둘이란 숫자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완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12제자의 선택은 예수님의 복음 사역의 초기 단계의 완전성을 의미하며 종말론적 의미에서 복음 사역의 완전한 성취를 뜻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것은 구약과의 관계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유대 민족의 형성 과정상의 12지파가 암시하는 바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택하여'는 예수님께서 복음 사역을 위해 주권적으로 그리고 주도적으로 제자들을 선택했음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요15:16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셨다는 말씀을 입증해 줍니다. 거기서도 예수님은 선택의 주체는 분명히 예수님인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아포스톨로스)는 '아포스텔로'('보내다')에서 나온 말로 문자적으로는 특별한 명령과 권세를 받아 보냄을 받은 사절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 가운데 열둘을 택하여 다른 무리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2. 열두제자의 명단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6:14-16)
14-16절은 사도 명단을 기록하고 있는데 신약에서는 네 곳에 나타납니다(마 10:2-4; 막 3:16-19; 행 1:13). 베드로는 비록 맨 처음으로 예수님께 부름받은 자는 아니라 할지라도(요 1:42) 열 두 사도의 목록 중에서 항상 맨 앞에 나옵니다. 이것은 그가 사도들 중에서 인정된 수제자(首弟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히브리 이름인 시몬은 그의 본명으로서 '듣다'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를 제자로 삼으신 후 붙여주신 이름으로서 헬라어로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요 1:42에서 그에게 붙여진 '게바'라는 이름은 아람어로서 역시 '베드로'라는 이름과 같은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의 동생 안드레는 갈릴리 바닷가의 벳새다 출신의 어부로서(막 1:16-18; 요 1:44) 세례요한의 제자가 되었다가(요 1:35,40)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즉시 그를 따르게 됩니다(마 4:19,20). 그는 그의 형제 베드로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후 베드로를 주께로 인도하였습니다(요 1:40-42). 성경에서 그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주의 제자로서 보이지 않게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요 6:8,9; 12:20-22; 행 1:13,14). 안드레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남자'라는 뜻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가장 사랑받던 세 제자 중의 두 명입니다. 마가는 이들에게 더 자세한 말을 덧붙여서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들'이라는 이름을 더했습니다(막 3:17). 그러나 누가는 아무런 수식이 없이 이들을 소개하는데 그것은 이미 5:10에서 그들을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로 언급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야고보는 '발꿈치를 잡음'의 뜻이고 요한은 '여호와는 자비하시다'는 뜻입니다.
빌립은 안드레나 시몬의 고향과 같은 벳새다 출신입니다. 주님을 처음 만난 후 친구 나다나엘을 주께 인도했던 자입니다(요 1:45,46).
바돌로매는 히브리식으로는 '바르-탈매'인데 이는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바돌로매는 요 1:46의 '나다나엘'과 동일 인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마가와 누가에 의하면, 마태(15절)는 '레위'로 소개되는데(5:27-29; 막 2:13,14) 그 의미는 '연합하다'입니다. 아마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고 난 후에 히브리식 이름인 '레위'에서 헬라식 이름인 '마태'로 바뀐 듯합니다. 그러나 마태는 자신을 구원하시고 사도로 택하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픈 심정에서인지 자신을 '세리 마태'로 숨김없이 표현합니다(마 9:9,10).
도마는, 세 번에 걸쳐 이 이름 다음에 '디두모'라는 헬라식의 이름이 따라 나옵니다(6:14-16; 마 10:2-4; 막 3:16-19). 이것은 당시에 헬라어를 사용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가 바로 이 '디두모'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마'는 히브리명으로 '쌍동이'라는 뜻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하여 '작은 야고보'로 불립니다. 그에 대해서는 신약에서 이름만 언급할 뿐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10:3; 막 3:18). 다만 전설에 의하면 그가 페르시아에서 선교했다는 것과 십자가 순교의 죽음을 당했다는 것만 전해질 뿐입니다.
‘셀롯이라 하는 시몬’에 대해서,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구별하기 위하여 ‘가나안 사람 시몬’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를 '셀롯이라 하는 시몬'이라고 했습니다. 마태와 마가가 호칭한 '가나안 사람'이란 가나안 지방 출신의 시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인'이란 뜻의 히브리어 '카나'에서 유래한 형용사입니다. 따라서 누가가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셀롯'이라는 헬라 명칭은 '열심당원'을 뜻하는데 시몬이 열심당원들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셀롯'이라는 이 한 마디 속에서 열심으로 불타는 열광적인 한 유대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열심당은 유대의 반로마적 애국 집단으로서 유대의 독립을 위해 폭력적인 반정부 활동을 감행 했었습니다. 이들은 살인과 방화를 일삼는가 하면 심지어는 약탈까지도 서슴지 않곤 했었습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시몬은 이러한 무리들 가운데 속해 있었다고 합니다.
‘야고보의 아들 유다’(16절)에 대해서, 마태와 마가는 '다대오'(Thaddaeus)라고 부릅니다. RSV에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Judas the son of James), KJV에는 ‘야고보의 형제 유다’(Judas the brother of James)라고 되어 있습니다. 공관복음에는 그의 말이나 활동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요한복음의 최후의 만찬석에서 가룟인 아닌 유다가 예수님께 질문한 적이 있는데(요14:22) 이 제자가 야고보의 아들 유다, 곧 다대오일 가능성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의 ‘가룟’은 그가 태어난 마을 그리욧의 헬라어 형태로서 ‘그리욧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 ‘가룟’이란 이름은 그의 아버지 시몬에게도 붙여졌습니다(요 6:71; 13:2,26). 그리욧은 '기럇'과 똑같은 말로서 ‘기럇여아림’에 있는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그중 하나가 모압에 있고(암 2:2) 다른 하나는 에돔 가까이 남동쪽 해변에 위치한 유다에 있습니다(수 15:25). 그가 언제 어떻게 하여 제자가 되었는가는 성경 어디에서도 언급이 없습니다. 그는 공관복음의 열 두 사도의 명단에 맨 나중에 돈궤를 맡은 자로서(요 12:6) 신뢰와 신망을 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그의 마음에 들어가 예수님을 팔 생각을 갖도록 유혹했습니다(요 13:2). 결국 그는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향유를 낭비한다고 항의(요 12:5)한 정의감을 내팽개친 채 겨우 은 삼십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을 팔아넘겼습니다. 당시에 유다가 받은 은 삼십이란 기껏해야 짐승에게 받혀 죽은 노예의 몸값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출 21:32).
적용: 예수님의 복음 사역의 동역자
예수님은 지상사역을 하시면서 열두제자를 선택하시고 3년동안 그들을 집중 훈련시키심으로 복음사역을 완성하도록 하셨습니다. 열두제자는 예루살렘 교회의 주축으로서 복음 사역을 확장시켜나갔습니다. 우리도 그들의 복음사역의 결과로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열두제자들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며 우리 또한 예수님의 동역자로서 복음사역에 동참해야할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대로 말씀(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야할 것입니다(딤후 4:2).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만날 때 기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데 힘을 써야합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사람들은 복음을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기회를 만들기 힘써야합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임을 확신하며(고전 3:9)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음사역자로 삼으셨다는 것을 확신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맡겨진 봉사의 일들을 통하여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사역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