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인간/ 02/ by. 얼음빙수/
무릇 학생이란 교복에 닿는 공기로 계절을 가늠하는 것이다.
춘추복과 하복의 혼용기간이 끝났다.
누가 뭐래도 여름이었다.
하복을 입어 드러난 도경수의 팔뚝 위로 소름이 돋았다.
여름을 싫어하는 도경수에게는 아침의 온도가 소중했다.
한산한 거리가 선선했다.
도경수는 이른 아침 집을 나선 보람을 느꼈다.
도경수의 기분이 완벽했다.
고3이라는 무게만 빼면
언제고 그리워질 날이었다.
/식물인간/ 02/ by. 얼음빙수/
도경수는 불도 켜지 않은 교실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었다.
커튼을 걷지 않은 창문으로 베이지색 햇빛이 투과했다.
햇살이 도경수 자리에 닿을락말락 했다.
도경수는 정말로 가만히 있었다.
시험 기간에는 벽에 간 금만 보고 있어도 재미있는 법이었다.
수능을 보고 달리는 이 긴 시험기간에는 더욱 그랬다.
빈 교실의 적막을 깬 것은 문제아 박명수였다.
박명수는 등교 하자마자 문제집을 꺼내 펼쳤다.
고3 신분은 천하의 박명수도 공부하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명수도 어쩔 수 없었구나.’
도경수는 공부에 박차를 가해야 할 시기에 나그네처럼 유유히 세상을 관망했다.
책을 편 지 5분도 안 된 박명수가 도경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야, 경수야.”
“왜”
“너 왜 이렇게 일찍 등교했어.
들어오는데 캡스 안 울렸어?”
“저번에 한번 울리게 한 적 있어서
이제는 경비 아저씨가 일찍 열어놓으셔.”
“내가 일등일 줄 알았는데.......”
“아쉽게 됐다, 명수야. 넌 날 이길 수 없어.”
“경수, 너. 잠은 자고 학교 오는 거지?”
“물론이야.”
“솔직히 말해. 네가 등교할 땐 해도 없었지!”
“명수야, 여름이잖아. 해가 얼마나 빨리 뜨는데.”
“어휴, 징글징글한 경수야. 같이 치킨이나 먹자.
오는 길에 문 열린 집이 있길래 사왔어.”
“오전 여섯 시에 문을 열다니. 다들 되게 일찍 일어나시나 보다.”
“너보단 아닐걸?”
“명수야,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넌 참 귀여운 것 같아.”
“너도 만만치 않아.”
명수와 경수의 이상하고 멋진 아침 식사가 시작됐다.
/식물인간 /02 /by. 얼음빙수/
상담을 끝내고 돌아온 김성규가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댔다.
“성규 이 씨발새끼!”
김성규의 담임 선생님 이름은 장성규였다.
“스스로를 욕되게 하다니.......”
“나 지금 장난칠 기분 아니야, 도경수.”
“그래.”
웃음과 온정이 말라가는 고3 교실이었다.
“얘들아, 정말 정 없구나. 왜 화났냐고 안 물어보니?”
김성규가 반 친구들에게 적당한 관심을 유도했다.
“성규야, 무슨 일이야! 씨발 개좆같은 성규가 뭐라고 했길래 우리 성규가 삐진 거지?”
우지호의 관심이 도를 지나쳤다.
“.......”
“참나....... 해줘도 지랄.”
우지호가 자리로 돌아갔다.
“아, 성규 진짜 이상해.”
“잠깐만 성규야. 토 나올 것 같으니까 그냥 담임이라고 불러.”
“그러니까, 담임이 자꾸 초를 치잖아. 수시 인하공전 쓴다니까, 무리하지 말라고. 많이 상향도 아냐. 이 정도면 소신지원이구만. 남자 승무원은 많이 뽑지도 않는데 외모를 많이 본다. 면접도 진짜 중요한데 내 성질에 합격은커녕 얼굴에 침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다. 아니, 그게 담임이란 인간이 할 소리냐? 아, 그러면서 인서울 사회복지학과 가라고 자꾸......!”
“솔직히 네가 면접관들한테 이쁨 받을 스타일은 아니지.”
“그러는 너는. 네 주제를 알았으면 좋겠다.”
“이거 봐.”
싸가지없는 놈. 저 성격에 무슨.
박성광이 욕을 씹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나 진짜 승무원 돼서 항공사 유니폼 입고, 외국도 많이 다니고, 알콩달콩 사내연애도 해보고 싶다고!”
“조금 다른 의미의 사내 연애는 어때?”
“석천이 지금 상황 파악 안 되니? 난 너를 존중하지만 자꾸 그런 말하면 진짜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야, 인마. 농담도 못 쳐?”
“석천아, 너 농담 아니잖아.”
“빙고.”
홍석천은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얄궂은 헤프닝과 짓궂은 만담에 반 친구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그중에는 그저 꿈이 있는 김성규가 부러운 이들도 몇몇 있었다.
/식물인간 /02 /by. 얼음빙수/
수능 D-DAY를 세지 않는 고3은 드물었고, 도경수는 보기 드문 학생이었다.
도경수는 믿는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닌데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생각이 많은 탓이었다.
고3 신분은 괜히 사람을 예민하고 비장하게 만들었다.
공부를 아예 하지 않는 학생은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일단 뭐라도 들여다봤다.
진로, 그 첫 번째 관문을 얼렁뚱땅 통과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목표가 확실한 학생들은 흔들리지 않고 수능연계교재를 씹어먹었다.
터무니없어도 꿈이랄 게 있는 학생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꿈이 꿈에서 끝난 학생들은 막다른 현실에 눈을 감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나아가야 했기에 눈을 감은 채로 걸었다.
비틀비틀댔다.
누구든지 어떤 것이든지 선택해야만 했고, 그 책임은 본인이 져야했다.
선택의 자유에 대한 책임이었다.
이런 것도 자유라고 자유란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게 못마땅할 만큼 자유가 아닌 것.
고작 하루 차이로 자유가 될 이들의 어깨는 무거워서 키가 자라지 못한다.
고3은 정서도 자라지 못한다.
악몽에 시달리는 밤이면 베개를 들고 부모 방을 찾는 어린 애가 된다.
그러나 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버려 부모님 사이를 파고들 수 없었다.
그래서 밤새 훌쩍였다.
도경수는 진학하고 싶은 대학도, 학과도 정하지 못했다.
마동석은 대학에 갈지, 말지도.
양세찬은 미친 척 개그맨 시험에 응시할지, 평범하게 수능을 볼지.
김준호는 상경(上京)에 반대하는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을지, 없을지.
끝내 오늘도 결정난 것이 없었다.
여전히 갈팡질팡했다.
그러는 사이 종이 쳤다.
무엇 하나 제대로 정하지 않은 친구들이 수능특강 새 페이지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직은 오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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