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발시간 |
도착시간 |
출발지 |
목적지 |
소요시간 |
비고 |
08:00 |
|
동작문화원 |
|
90분 |
|
|
09:30 |
|
장무공 황형사당 |
40분 |
|
10:10 |
|
장무공 황형사당 |
|
10분 |
|
|
10:20 |
|
연미정 |
40분 |
|
11:00 |
|
연미정 |
|
10분 |
|
|
11:10 |
|
성공회 강화 성당 |
40분 |
|
12:00 |
|
중식 |
|
40분 |
|
|
13:30 |
창후리 선착장 |
|
|
승선수속 |
|
14:00 |
|
교동도 월선포 |
|
하선 |
|
14:10 |
|
교동향교, 비석군 |
40분 |
|
14:50 |
|
교동향교 |
|
|
|
|
15:00 |
|
부군당(연산군유배지) |
30분 |
|
15:40 |
|
부군당 출발 |
|
|
|
|
16:00 |
|
연산군 적거지 |
30분 |
|
16:40 |
|
연산군 적거지 |
|
|
|
|
16:50 |
|
월선포 |
|
승선수속 |
17:20 |
|
창후리 선착장 |
|
|
하선 |
|
17:50 |
하점면 여래입상 |
|
30분 |
도보 10분 |
18:30 |
|
답사 종료 |
|
|
고인돌 |
◔ 강화의 역사
강화군은 멀리 국조 단군성조의 개국과 그 역사를 함께하며 도서 특유의 지정학적 숙명으로 고금을 통해 왕실의 흥망성쇠가 곧 강화군의 역사를 이룬 곳이라 하겠다. 강화의 옛 이름은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 불리었고, 고구려 시대에 이르러 군제를 두어 혈구군이라 칭했으며, 그 후 신라 때에 이르러 해구군 으로 개칭하고 태수를 주재시켰다.
고려조에 이르러 태조 22년에 현으로 개편되고 이어 현재 지명인 강화현으로 불리었다. 이후 강화는 국가에 커다란 변란이 있을 때 마다 제2의 서울로서 임무가 주어졌으며, 외적이 침입할 때마다 조정에서는 강화로 천도함으로써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임을 알게 한다. 그래서 강화는 근 40년간이나 사실상의 고려조의 왕도 역할을 하게 되었고 그 후에도 수차의 천도가 있던 도중 처음으로 강화에 천도한 것은 고려 23대 고종이었다.
연대 |
주요 내용 |
연대 |
주요 내용 |
상고시대 |
갑비고차 |
1627년 |
조선 인조 때 강화유수부로 승격 |
392년 |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 혈구군으로 호칭 |
1906년 |
조선 고종 때 강화군으로 강등 |
757년 |
신라 경덕왕 때 해구군으로 개칭 |
1914년 |
교동군을 강화군에 편입 |
939년 |
고려 태조 때 강화현으로 개칭 |
1962년 |
볼음출장소 설치 |
1377년 |
고려 우왕 때 강화부로 승격 |
1973년 |
강화면을 읍으로 승격 |
1413년 |
조선 태종 때 강화도호부 설치 |
1995년 |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편입 |
그 해 대륙에서 득세한 신흥세력인 몽고군이 송도(지금의 개성)에 침범하자, 당시의 권신이었던 최우는 고종에게 천도를 권유하였고 그 다음의 원종도 강화에 머물러 39년간 강화는 사실상 고려의 서울이었다.
고려는 고종 때의 천도를 계기로 당시의 서울인 송도를 폐하고 강화를 항구적인 도읍으로 삼으려 했던 모양이다. 고종은 그해 8월(음6월)에 송도에서 강화로 옮기면서 일품군을 동원하여 국도의 방어성인 내성의 축조공사를 일으키는 한편 궁전 구장과 사찰, 사직 등을 모두 당시의 왕도인 송도를 모방케 하고 궁전 배후의 산에 송악이라는 산 이름까지 새로이 하였다. 내성이 완공되자 익년 겨울에 외성을 쌓게 하고 22년 9월에는 연안의 방비를 강화하였으며, 24년 12월에는 외성 등을 또 중수했다.
그러나 몽골군의 세력이 날로 강화되어 강호도의 임시 왕도 방어가 위태롭게 되자 마니산 남쪽에 별궁인 흥왕이궁을 마련하고 5월에는 가궁과 혈구사를 삼랑성에 창설하는 등 갖은 노력을 다 하였으나 끝내 강화는 몽고군에 유린되었고, 태자는 볼모가 되어 46년 6월에 몽골의 내지로 납치되는 등 비극이 일어났던 것이다. 태자를 몽고로 보낸 채 고종은 강화에서 천명을 다 했고, 뒤를 이은 것이 24대 원종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태조․정종․태종 등의 세 왕이 일시적으로나마 강화에 잠행한 일이 있고, 특히 태종은 강화에 도호부사를 두어 해안방어를 강화하였다. 선조도 강화의 방어에 주력해 왜병을 근접치 못하게 하였다.
병자호란 때도 제1차 전쟁에서 40일간을 강화로 몽진, 겨우 난을 피했었고 남한산성에 농성한 지 45일 만에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기도 하였다. 이후 숙종은 인조시대부터 설치되었던 강화유수부에 진무사를 겸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수비 진보의 강화, 증설하였을 뿐 아니라, 갑곶돈대를 비롯하여 5진 7보 53돈대가 이 때 설치되었다. 그중 49돈은 당시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을 받아 함경․황해․강원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을 동원하여 40일 만에 축성하였을 정도로 강화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역사시대 이래 지속되었다. 강화도의 수난은 근대에까지 미쳐 고종 2년 대원군의 쇄국정치로 천주교도 탄압으로 빚어진 프랑스 군함사건(병인양요, 1866. 9. 7)과 동 8년의 미국의 통상요구가 발단이 된 신미양요(1871. 4. 23), 동 12년 운요오호 사건(1875. 9. 20)으로 일본과 체결하게 된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 등으로 이어져 개화 여명기의 풍운을 직접 겪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현재 강화도는 사찰과 서원 및 향교를 비롯하여 450여 점의 문화재를 간직한 역사의 고장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 ������강화사������, 강화문화원 발행]
◔ 강화의 문화유산
▣ 장무공 황형신도비(莊武公 黃衡神道碑)
황형신도비는 강화읍 옥림리에 있다. 황형의 시호는 장무(莊武)이고 본관은 창원이며 1480년 22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1510년(중종 5년) 삼포(三浦) 왜란이 일어나자 방어사에 특임되어 평정하였다. 오위도총부도총관(3군총사령관)을 거쳐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북쪽 오랑캐를 평정하고 잘 다스려 민심을 안정시키고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후에 평안․함경절도사를 지내고 돌아와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그는 벼슬을 사퇴하고 노령으로 고향인 연미정 근처에 거처를 정하고 항상 식목(植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이때 심은 나무들이 성장하여 임진왜란 때 병선․무기․궁전 등의 건조와 수축에 사용재로 긴하게 쓰였다. 또한 연미정은 그가 세운 정자로서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의 옛집인 연미정 부근에는 당시 대마도에서 가지고 온 대나무가 지금도 무성하다. 1502년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 연미정(燕尾亭)
연미정은 60년 만에 개방되어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이 보이는 북녘 땅, 1천3백리 유유히 굽어 흘러내린 한강물이 임진강과 반가이 만나 한 줄기는 북쪽 서해로 한 쪽 물길은 갑곶을 지나 염하로 흐르는 물길이 제비
그림 3) 연미정 꼬리 같다 하여 이곳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하였다. 연미정은 강화팔경으로 손꼽히는 비경으로 북쪽으로는 개풍군과 파주시, 동으로는 김포시가 한 눈에 들어오기도 하며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를 기다렸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그림 4) 연미정에서 볼 수 있는 풍광 아쉽게도 연미정은 한국전쟁으로 휴전선이 생기면서 민통선(민간인통제구역)안에 위치하여 그 동안 일반인의 관람이 엄격히 통제되고 학술연구, 문화재보수 등 특별한 경우에 한하여 해당 군부대의 허가를 받아 출입이 가능 하였던 것을 강화군이 해당 군부대와 긴밀한 협의 끝에 완전 개방되었다.
연미정의 건립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고려시대로 추정하고 있으며 1244년에 왕이 시랑 이종주(李宗胄)에게 명하여 구재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하과(夏課)를 시켜 관인 55명을 뽑았다는 기록과, 조선시대 삼포왜란 당시 왜적을 무찌르고 1512년 함경도 지방 야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국가에 공로가 많은 황형에게 조정에서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대부분 파손된 것을 1744년(영조 20) 강화유수 김시혁이 중건하였고, 1891년 조동면이 중수하였으며 1931년 유군성의 특지로 보수하는 등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한국전쟁 때도 파손되어 1976년 강화 국방유적 복원 정화사업으로 복원되고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하였으나 정자의 높이가 고증보다 낮다는 이유로 2007년 또 다시 재축하였다. 이로 인해 정자의 고전적 풍미도 느낄 수 없고, 현재 정자를 둘러싸고 있는 월곶돈의 복원공사로 주변은 아직 산만하다. 그러나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빼어난 경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연미정은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 후 청나라와 굴욕적인 형제관계의 “강화조약”을 맺었던 곳으로 일부 자료에는 강화조약을 강화도조약으로 잘못 기록하여 혼동이 초래되곤 한다. 강화조약은 전쟁이 종료 된 후 국가 간에 맺어지는 조약으로 전 세계적으로 여러 번 있었고, 1876년(고종 13) 일본이 염하에서 위협사격을 하고 강화읍 서문 연무당에서 조선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 강제로 체결시킨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또는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인 강화도 조약과는 전혀 다르므로 혼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연미정은 팔작지붕 겹처마로 10개의 기둥을 돌기둥 위에 얹은 민도리집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에 면적은 약 40㎡이다. 서남쪽 모서리의 기둥은 한국전쟁 때 포탄에 맞아 세 동강 난 것을 다시 붙여 세웠다.
▣ 성공회 강화성당(聖公會江華聖堂)
그림 5) 성공회강화성당 정문(http://www.soguri.com)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江華邑) 관청리에 있는 한국 최초의 성당이다. 1981년 7월 16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1월 4일 사적 제424호로 변경되었다.
보호면적은 6,452㎡이며, 성공회유지재단 등이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성베드로와 바울로성당’이라고도 한다. 1896년(고종 33) 강화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이 세례를 받은 것을 계기로 1900년 11월 15일 이곳 강화에 한국 최초의 성당을 세우게 되었다. 건립자는 한국 성공회 초대 주교인 존 코르페(C. John Corfe:한국명 고요한)이다. 정면 4칸, 측면 10칸 규모의 2층 건물로, 목골조를 사용하고 벽돌을 쌓아올린 기와집이며, 2층은 바닥이 없는 통층구조이다. 로마의 바실리카 양식을 본떠 지은 것으로, 외형상으로는 불교 사찰 분위기를 풍긴다.
한국에 서양건축이 도입되던 시기의 초기 건축으로, 한국 그리스도교 역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서양식 장식이 거의 없는 순수한 한식 목조건물이면서 지붕과 내부구조는 한국적 건축양식을 많이 가미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한국 토착화를 뚜렷하게 상징하는 듯하다. 1910년대까지 강화 지역 선교의 중심이 되었으며 성공회 신학교인 성 미가엘신학교가 이곳에 설립된 이후 성공회 한국선교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한국인으로서는 첫 성공회 사제가 된 김희준 신부를 배출하였다.
성당 내부에는 성수대와 지성소가 있는데, 성수대는 직경 180cm의 팔각형 석판 위에 4개의 화강암 기둥을 세우고 사방 80cm의 큰 성수대가 놓여 있다. 성수대 정면에는 “중생지천(重生之泉)”이라는 명문이 있어 거듭나는 샘물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고, 그 맞은편에는 수기(修己), 세심(洗心), 거악(拒惡), 작선(作善)이라 새겨져 있다. 이 성수대는 신자가 회개하고 영세를 받을 때 사용한다. 지성소는 성당 내부의 6번째 고주와 9번째 고주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 105cm의 난간을 두루고 있다. 회중석에서 들어가는 문은 영광문이라 하는데, 건축 당시의 옻칠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지성소 내부에는 화강암 제대(220×65× 80cm)가 있고 그 위에 십자가와 촛대를 안치하였다. 또한 제대 위에는 “만유진원(萬有眞原)”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제대는 회중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으로서 예배시 집례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지성소의 북쪽 1칸에는 소제대(높이 105cm)가 위치하고 있는데 성체를 봉안한 성막을 안치하였다. 이곳은 소형예배 때의 집례공간이다. 성당의 뒤쪽에 위치한 사제관은 원래 주교관으로 1903년 반가(班家)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18칸 한옥이었다. 그러나 1984년 성당 기와교체 공사 중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86년 다시 지어서 사용하고 있다. 주련에는 다음과 같이 기독교적인 성구가 적혀져 있어서 전통가옥 혹은 사찰의 주련과는 내용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無始無終先作形聲眞主宰 처음도 끝도 없으니 형태와 소리를 먼저 지은 분이 진실한 주재자이시다
宣仁宣義聿照拯濟大權衡 인을 선포하고 의를 선포하니 이에 구원을 밝히시니 큰 저울이 되었다
三位一體天主萬有之眞原 삼위일체 천주는 만물을 주관하시니 참 근본이 되신다
神化周流圍庶物同胞之樂 하느님의 가르침이 두루 흐르는 것은 만물과 동포의 즐거움이다
福音宣播啓衆民永生之方 복음을 널리 전파하여 백성을 깨닫게 하니 영생의 길을 가르치도다
◔ 교동의 역사
교동(喬桐)의 역사는 고구려시대 때 이미 고목근현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지만 고려사에도 교동은 등장한다. 고려사의 편자들은 김관의(고려 의종때 문신)의 ������편년통록(編年通錄)������ 에 실린 왕건 조상들에 얽힌 민담들을 함께 고려사에 소개해 놓았다. 즉,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을 도우기 위해 백주관리 유상희 등이 개주(개성), 정주(풍덕: 예성강하류), 백주(연안)의 4개주와 강화․교동․하음 3개현의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영안성(개성에 있는 토성)을 쌓고 궁을 세워 놓겠다는 기록이다.
교동은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의 행정구역개편에 의해 호칭이 정해졌다. 교(喬)는 높을 고(高), 즉 ‘높이 솟다’의 뜻으로 어원은 「夭」(구부러짐)과 「高」의 생략형 한자로, 높고 상부가 구부러졌음을 의미한다. 교목(喬木)은 키가 큰 나무를 가리키는데 아마도 고구려시대부터 고목근현으로 불렸던 것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동(桐)은 오동나무의 동자로 동재(桐梓)는 오동나무와 가래나무의 뜻으로 곧 좋은 재목(인재)을 나타낸다. 교동에 예전에는 오동나무가 많이 있었을 것이고(지금도 읍내리에는 오동나무가 많이 보인다), 좋은 인재가 많이 났기 때문에 교동이란 명칭이 부쳐졌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림 6) 해무에 싸인 교동도 최근까지도 교동은 연산군의 유배지로만 알려져 있을 뿐 유구한 역사의 현장임이 알려지지 않았다.
교동은 예성강․임진강․한강이 만나는 삼각주로 발달한 섬이며, 섬이라기보다는 평야에 가까워 선사시대부터 인간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지금도 화개산 서쪽에 있는 고인돌이나 석기시대의 유물들, 마제석검(간석기)이라든가 패총과 같은 유적지가 남아 있어 그 모습들 증명하고 있다. 인지가 발달하면서 교동은 교통의 중심지가 되어 바다와 강을 잇는 중요한 곳으로 문헌에는 “수륙운송이 적합하고 편리하여 모든 길에서 조운이나 세금은 말할 것 없이 소금과 고기잡이에 유리하였다”고 했다. 이처럼 예로부터 교동에는 물자의 유통이 용이했고, 벼슬아치와 부자들이 다수 교동에서 살았다고 한다.
▣ 교동향교(喬桐鄕校)
그림 7) 교동향교 삼문 향교는 조선시대 각 군과 현에 설치되어 공자 등 옛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유생과 마을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의 역할을 한 교육기관이다.
그림 8) 교동향교 정문 교동의 향교는 우리나라 향교 가운데 가장 먼저 공자상(孔子像)을 중국으로부터 가져다 봉안한 유서 깊은 향교이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 고려 유학 제거로 있던 문선공 안유(安遊)선생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닻을 내려 공자상을 이 문묘에 봉안하였다. 교동이 위치상 중국을 오가는 바다 길목에 있어 대부분의 배 들이 그곳을 거쳐 갔다. 안유가 교동 향교에 처음 봉헌한 까닭이다. 이어 다시 김문정 등을 중국에 보내 유학성현들의 화상 10여 점과 제기 등을 구해 오게 했다. 이후 경향 각지에 문묘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교동읍이 읍내리로 옮겨짐에 따라 부사 조호신이 영조 17년(1741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고, 현존하는 우리나라 243개의 향교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대성전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두어 우리나라의 18현을 배향한다. 동무는 9칸이며 설총․안유․김굉필․조광조․이황․이이․김장생․김집․송준길의 9현을 봉안하고 배향한다. 서무 역시 9칸이며 정몽주․정여창․이언적․김인후․성흔․조헌․송시열․박세채 등의 9현을 봉안 배향하는 곳이다.
▣ 교동읍성(喬桐邑城)
교동에 일부 남아있는 읍성은 둘레가 약 305m 높이가 약 2.4m 이며 용성 3곳과 치첩 네곳이 있었으며 동쪽․남쪽․북쪽에 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문만 남아 있다. 순조 13년(1812년)에 당시의 통어사 백동원이 치첩을 고쳤고 고종 27년(1884년)에 부사 이교복이 고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나 폐하였다. 읍성의 3 문에는 각각 1층짜리 문루가 있었고 그 옆에 곡성이 4곳이 있었다 한다. 동문의 문루는 통삼루, 북문의 문루는 공북루, 남문의 문루는 유량루였다. 이 가운데 유랑루만 1921년까지 남아있다가 폭풍우로 무너지고 지금은 문루만 서 있다. 이곳의 읍성은 월곶진을 옮길 때 쌓았다는 말이 유전한다고 ������여지도서������에 기록되어 있다.
▣ 교동의 유배지 역사
교동은 지정학적 가치가 충분한 대신 고려시대부터 최적의 유배지로 이용되었다. 정쟁(政爭)에서 패한 인물은 서울에서 먼 곳으로 보냈으나 정말로 제거해야 될 인물, 늘 동정을 살필 필요가 있는 인물은 견고하면서도 수도로부터 가까우면서도 안전하고 주민들과도 격리된 곳에 두는 것이 좋았다. 때문에 교동은 수도에서 이틀 정도의 거리이고 바다로 둘러 싸여 있고 막상 해안과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지만 조류가 빠르기 때문에 유배지로 적정한 곳이었다.
• 교동에 유배된 역사인물
○ 희종(1181-1237)
고려 21대왕으로 최충헌에 의해 1211년 왕위에서 쫓겨나 처음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1215년 자연도(영종도)를 거쳐 교동에 유배된 후 복위운동을 펼치다가 1227년 다시 교동에 유배되어 사망.
○ 안평대군(1418-1513)
세종의 3남으로 1453년 계유정란 때에 세조에 의해 아들 우직과 함께 교동으로 유배되어 사사됨.
○ 연산군(1476~1506).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으로 교동에 위리안치되고, 그해 11월 6일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 조정에서는 왕자의 예로서 장사를 치러 강화에 묘를 마련하였으나, 후에 양주(지금의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하였다.
○ 임해군(1574-1609)
선조의 첫째 서자로 1608년 광해군에 의해 처음 진도로 유배되고 다시 교동으로 옮겼다가 1609년 사사됨.
○ 광해군(1575-1641)
인조반정(1623)에 의해 폐위되어 처음 강화도에 유폐됨. 1624년 이괄의 난 때 태안으로 옮겼다가 난이 평정되자 강화도로 다시 데려옴. 1636년 청나라가 쳐들어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고 하자 다시 보내졌다가 1641년 제주도에서 사망.
○ 능창대군(1599~1615)
선조의 손자이며 인조의 동생으로 능창군 추대사건인 신경희의 옥사사건으로 광해군에 의해 1615년 교동에 안치된 후 사사됨.
○ 숭선군
인조와 귀인 조씨의 5남으로 1651년의 무고로 인해 1652년 처음 강화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교동으로 위리안치됨. 1656년 석방되었다.
○ 익평군
철종의 사촌으로 헌종12년(1847) 교동에 유배됨.
○ 이준용(1870-1917)
흥선대원군의 손자이자 고종의 조카로 1895년 법무 현판 김학우의 피살사건에 연루되어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2개월만에 석방.
○ 민영준, 민형식(1875-1947)
을사오적 암살 계획이 발견되어 1896년 2월, 교동에 유배됨.
▣ 실록에 나타난 중종반정과 연산군
1506년(연산군 12년) 9월 1일, 성희안, 박원종 등이 연산군을 폐하려고 군사를 움직인 것이 중종반정이며, 9월 2일 대비(성종의 계비)의 윤허를 받아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맞아 왕으로 옹립, 그가 바로 중종이 된다.
연산군은 성종의 큰아들이며, 어머니는 지평(持平) 윤기묘(尹起畝)의 딸 폐비 윤씨이다. 비(妃)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이다. 폐비 윤씨가 사사된 뒤인 1483년(성종 14) 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자 시절 허침(許琛)․조지서(趙之瑞)․서거정(徐居正) 등에게 학문을 배웠다. 1494년 12월 성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초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하고 변경지방으로 백성을 이주시키는 한편, 녹도(鹿島)에 쳐들어온 왜구를 물리치고 건주야인(建州野人)을 토벌하는 등 국방에 힘썼다. 또한 사창(社倉)․상평창(常平倉)․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하는 등 빈민구제를 위한 조치를 취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부활시켰으며, 「경상우도지도 慶尙右道地圖」․「국조보감 國朝寶鑑」․「동국명가집 東國名歌集」 등을 간행하고, 「속국조보감 續國朝寶鑑」․「역대제왕시문잡저 歷代帝王詩文雜著」․「여지승람 輿地勝覽」을 완성했다.
그러나 사림파 제거를 노린 훈구파의 정치적인 공작과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게 되면서 형성된 성격상의 문제가 겹쳐 1498, 1504년 2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사화를 일으켰다. 1498년 ������성종실록������ 편찬 때 김일손(金馹孫)이 사초(史草)에 실은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 弔義帝文」이 세조의 즉위를 비방한 것이라 하여,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김일손․권오복(權五福) 등을 처형했으며, 정여창(鄭汝昌)․이주(李胄)․김굉필(金宏弼)․강혼(姜渾) 등을 귀양보냈다(무오사화).
1504년에는 어머니 윤씨의 폐비와 사사에 관련했던 후궁들과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김굉필 등을 처형하고 한치형(韓致亨)․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정여창․남효온(南孝溫) 등을 부관참시 했다(갑자사화). 이 옥사에서는 무오사화 때와는 달리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와 함께 훈구파의 거목들도 대거 참화를 당했는데, 이는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 등을 위해 훈구 재상들의 토지를 몰수하려는 조짐이 보이자 훈구파가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2차례에 걸친 사화로 연산군에 대한 반감은 사림파뿐만 아니라 훈구세력들 간에도 커지게 되었다. 홍문관과 사간원을 없애고 경연(經筵)과 상소제도를 중단시키는 등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여론제도를 크게 위축시킨 데다가, 갑자사화를 계기로 훈구파도 심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초상 때 역월지제(易月之制)라 하여 3년상 대신 25일상을 치르는 등의 행위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채청사(採靑使)․채홍사(採紅使)를 전국에 파견해 미녀와 좋은 말을 징발하고, 장악원(掌樂院)을 두어 기녀(妓女)를 양성하였으며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사대부의 여인들과 관계를 갖는 등 음행을 일삼았다. 더욱이 서총대(瑞蔥臺)라는 유흥장을 만들면서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고 베를 무더기로 바치게 하여 민심도 돌아서게 되었다. 또한 자신을 비방하는 한글투서가 발견되었다 하여 한글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마침내 1506년 성희안․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세움에 따라 왕위에서 쫓겨나 군(君)으로 강등된 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실록에는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 교동에 안치하도록 한다”는 내용만 있을 뿐, 교동 어느 곳이라는 기록이 없으며 약 2개월후 사망하였으므로 유배지가 교동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
▣ 연산군 유배지
현재 교동면의 신골(봉소리), 연산골(고구리), 읍내리 세 곳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교동 선착장인 월선포에 세워져 있는 지도가 곁들인 안내판에는 세 곳 모두 연산군 유배지로 표시되어 있다.
1) 연산군 적거지(교동읍 읍내리 270번지) : 향토유적 제28호
그림 10) 읍내리 부군당 읍내리 교동읍성 북성 위둑(읍내리 273)에 부근당(또는 부군당)이라는 조그마한 당집이 있어 이곳에는 연산군과 그 부인 신씨의 화상으로 추정되는 탱화가 걸려 있다고는 하나 대원군의 초상이라고도 함(강화사에는 부근당이 유배지라고 기록됨).
마을주민들은 이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해마다 이곳에서 굿을 한다고 하며 부근당에서 좀 떨어진 철종 잠저소로 전해오는 곳에도 1986년에 「연산군 적거지」의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 부근당에는 연산의 초상을 봉안하고 원혼을 위로했다고 하나 현재는 대원군 초상을 모시고 있으며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바라는 당집으로 변해 있다. 당내 왼쪽 벽에는 다산을 기원하는 뜻에서 나무로 깍은 남근 3종이 걸려 있어 흥미롭다. 부근당에서 200m정도 내려가면 연산군이 마셨다는 우물 속에서 오동나무가 자라나 신비한 모습을 하고 있다. 부근당 주변에는 조선 인조 때 만들어진 교동읍성의 남문이 있다.
2) 읍내리에 있는 연산군적거지 안내판
그림 11) 연산군 적거지 연산군 당시의 현청은 지금의 읍내리가 아닌 고읍리(고구리)에 있었고(조선조 인조 1629년에 읍내리로 옮김), 또한 예전(휴전선이 생기기전)의 뱃길은 강화의 인진나루(인화리)와 교동의 호두포였으므로(1960년 11월 부터는 창후리와 월선포) 현청과 나루터 근처가 폐군(연산군)을 감시하기가 좋은 곳이었으므로 읍내리는 아닌듯 하며 교동사, 교동향토사등에는 이곳을 철종잠저소로 표기하고 있다.
3) 신골 : 봉소리 신곡동
옛 선착장인 호두포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봉소리 동쪽 봉황산 기슭에 있으며 본디 나무가 우거져 숯을 굽던 곳이며 신씨가 많이 살아 신골이라고도 하며, 대나무가 무성한 곳이며 연산군이 읊었다는 시에도 “인진나루 보이는 곳에”라는 구절이 있다고 전하며,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예전에 이곳에는 많은 토기와 집기가 나왔다고 한다. 따라서 신골이 적절한 곳으로 보인다.
※ 연산골(영산) : 고구 2리 영산동
교동약사에 의하면 연산이 머무른 곳이라 하여 연산골 또는 영산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화개산 아래쪽에 있는데 고읍 터와 가깝기 때문에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
▣ 하점면 석조여래입상(보물 615호)
그림 12) 여래입상(보물 제615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봉천산 아래에 자리잡은 고려시대의 석조불상이다. 두꺼운 화강암의 판석에 돋을새김으로 했는데, 현재는 전각을 만들어 그 안에 모시고 있다.
민머리의 정수리 부분에는 상투 모양의 작은 머리(육계)가 솟아 있다. 계란형의 얼굴에는 살이 올라 있는데 눈·코·입의 표현이 다소 둔중해 보인다. 귀는 비사실적으로 길며, 목이 짧아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가슴까지 내려와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두껍게 표현되어 신체의 굴곡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으며, 좁고 둥글게 처리된 어깨선으로 인해 불상은 어딘지 모르게 움츠러든 모습이다. U자형의 옷주름은 가슴에서부터 흘러내려 무릎 부분까지 표현되었는데 형식적이며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오른손은 허리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고 있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다.
불신의 주위에는 2줄의 도드라진 선으로 몸 광배와 머리 광배를 구분하고 있다. 2줄 사이에는 드문드문 둥근 구슬을 새겨 넣었으며, 머리 광배와 몸 광배의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평판적이고 선으로 조각하는 경향이 두드러진 불상으로 모든 면에서 단순화, 생략되는 점은 시대가 내려가는 것을 말해준다. 살찐 얼굴, 짧은 목, 움츠린 어깨, 형식적인 옷주름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 편집 / 박경하 전영준
• 인쇄 / 2008. 4. 9.
• 발행 / 2008. 4. 16.
서울시 동작구 문화원길 10(상도2동 176-3)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교동 가는 날이 기다려집니다.
강화를 가면 교동은 잘 가지 않는 곳이다. 강화에서 뱃길따라 교동가는 길은 참으로 좋았다. 나는 강화 쑥 특히 교동 쑥이 좋다하여 역사탐방을 갔음에도 쑥을 캐느라 설명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가는 곳마다 맨 나중에 가서는 사진만 찍고 왔다. 자료집은 세심하게 읽었다. 강화 어시장에서 새우젓과 조개젓을 샀다.강화에서 많은 쑥을 캐왔기에 쑥국을 끓어 먹었더니 정말 맛이 있었다. 늘 좋은 자료로 역사탐방을 이끄시는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