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전당집 제11권 / 묘표(墓表)
죽은 아내 정숙옹주 묘표(亡室貞淑翁主墓表)
고명하면서 온화하였고 / 高明而和
유순하고도 정직하였네 / 柔惠且直
우리 선왕(先王 선조(宣祖))께서 / 惟我先王
특별히 애지중지하여 / 鍾愛特篤
스승에게 가르침 맡기지 않고 / 不煩姆敎
몸소 예학을 가르치셨네 / 親授禮學
효성과 우애 갖추고 근검하니 / 孝友儉勤
종중의 사람들 우러러 본받았네 / 宗人仰則
또 이르기를,
지난 혼조(昏朝 광해군(光海君))에 / 昔在昏朝
천리가 무너지고 끊어졌을 때 / 天理滅絶
홀로 선비의 행실 있어 / 獨有士行
더욱 병이(秉彝)를 잡아 지켰네 / 彌堅操秉
정성껏 자궁『慈宮: 인목대비(仁穆大妃)』을 받들어 모시고 / 誠戴慈宮
바르지 않은 길은 가지 않았네 / 跡絶曲徑
하였다. 또 이르기를,
의리는 형제의 급난을 구할 때 드러났고 / 義著急難
외환에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었네 / 不怵外患
아름다운 명성 퍼져서 / 芬馨斯播
사덕에 흠 잡을 것이 없다네 / 四德無間
하였다. 부친께서 옹주를 곡하며 지은 제문(祭文)은 다음과 같다.
온화하고 문아하고 밝고 은혜롭고 / 溫文明惠
안존하고 조용하고 곧고 정성스러워 / 靖穆貞愨
선비의 행실이 있고 / 有士之行
부인의 덕이 있었네 / 有婦之德
또 이르기를,
한미한 집에 시집와서 / 釐降寒門
좋고 궂은 일 두루 겪으면서 / 備嘗榮戚
예의와 공경 오로지 일삼아 / 禮敬斯專
시종 한결 같았네 / 終始惟一
하였다.
이조 판서와 대제학을 역임한 장유(張維) 공은 묘지명(墓誌銘)을 지어,“옹주는 훌륭하고 맑은 자질을 지니고 태어나 어려서부터 성조(聖祖 선조)에게 수신제가(修身齊家)의 교화를 입었고, 덕망 있는 가문에 출가하여 훌륭한 시부모의 가르침을 받기까지 하였으니, 선천적인 성품과 후천적인 학습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안팎으로 아름다운 덕에 부합하였다. ‘마음속에 지닌 그 덕, 밖에 그대로 드러났네.’라는 시야말로 바로 옹주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아! 임금과 시부모의 칭찬과 인정이 지극하도다. 이조 판서의 비명과 같은 경우는 돈사(敦史)가 아니겠는가. 이 말들만으로도 후세에 영원히 전해질 수 있을 터인데, 다시 무슨 불필요한 말을 보태겠는가. 옹주는 선조(宣祖) 소경왕(昭敬王)의 셋째 따님으로, 모친은 인빈 김씨(仁嬪金氏)이다. 10세에 봉작을 받았고, 13세에 혼례를 올렸다. 15세에 대궐에서 나와, 나와 27년 동안을 함께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덕스러운 품성, 아름다운 행실, 정신, 식견과 도량으로 권장하여 집안을 보호할 듯 했으나 한 번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했으니, 하늘의 도는 알 수가 없다. 아! 슬프도다. 옹주는 만력(萬曆) 정해년(1587, 선조20) 3월 19일에 태어나서 천계(天啓) 정묘년(1627, 인조5) 11월 5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41세이다.
11명의 자식을 낳아 길렀는데, 살아남은 자식은 5남 4녀이다. 장남 면(冕)은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감사 윤훤(尹暄)의 여식에게 장가들어 딸 한 명을 두었다. 차남 변(昪)은 대사성 이민구(李敏求)의 여식에게 장가들어 아들과 딸을 두었다.
삼남은 경(炅), 사남은 최(最), 오남은 향(晑)이다. 장녀는 사인(士人) 홍명하(洪命夏)에게 출가하여 2남을 두었고, 나머지는 어리다. 묏자리는 광주(廣州) 치소(治所) 동쪽 사부촌(沙阜村) 유좌(酉坐)의 언덕에 정하였는데, 관사(官司)에서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해주어 이 해 12월 28일에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렀다.
임금이 호조에 하교하기를, “정숙옹주의 묘소 아래 있는 봉안역(奉安驛) 위전(位田)은 세금을 거두는 것이 온당치 않으니, 그 집에 사급(賜給)해 주라.”하였다. 호조에서 교지를 받들어 위전 몇 뙈기를 문서로 작성하여 지급해 주었으니, 이는 특별한 예우이다.
옹주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집안을 다스리는 일을 아들과 며느리에게 맡기고는 방을 깨끗이 정리하고, 인사(人事)를 멀리하였다. 무익한 슬픔이 건강을 해칠 뿐임을 생각하여 억지로 약물과 도서(圖書)로 남은 생을 의탁하나, 지나간 일은 아득하기만 하고 이 세상이 더욱 허망함을 깨닫노라. 우선 죽은 자의 일을 서술하여 후세에 알린다. <끝>
[註解]
[주01] 죽은 …… 묘표 : 이 글은 저자의 아내인 정숙옹주(貞淑翁主, 1587~1627)에 대한 묘표이다. 옹주는 선조의 서녀로 인빈 김씨(仁
嬪金氏)의 소생이다. 저자와 혼인하여 5남 4녀를 두었다.
[주02] 규수석(圭首石) : 규수(圭首)는 비석의 형태를 나타내는 용어로, 비석의 양쪽 모서리를 각이 지도록 만든 것이다.
[주03] 지난 …… 지켰네 : 광해군 때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이를 반대하고 대비를 섬긴 일을 말한다. 어느 날 밤에 객이 와서
인목대비를 폐비시켜야 한다며 남편을 협박하고 회유할 때 먼 바닷가로 귀양을 가더라도 따라 가겠다며 남편을 위로하고 설득한 일
을 말한다. 《樂全堂集 卷13 亡室貞淑翁主行狀》
[주04] 의리는 …… 드러났고 : 능창군(綾昌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와 의창군(義昌君)이 두문불출할 적에 감히 그를 위문하는 사
람이 아무도 없었으나 옹주가 눈물을 흘리며 달려가 안부를 묻고 보살펴 준 일을 말한다. 《樂全堂集 卷13 亡室貞淑翁主行狀》
[주05] 사덕(四德) : 옛날에 부녀자가 갖추어야 할 규범으로 꼽혔던 부덕(婦德), 부언(婦言), 부용(婦容), 부공(婦功)을 말한다.
《周禮 天官冢宰 九嬪》
[주06] 부친께서 …… 같다 : 제문(祭文)은 한국문집총간 72집에 수록된 《상촌집(象村集)》 권30 〈제종부정숙옹주문(祭宗婦貞淑翁主
文)〉에 전문이 실려 있다.
[주07] 마음속에 …… 드러났네 : 《시경》 〈상상자화(裳裳者華)〉에 나오는 시로, 재(才)와 덕(德)을 온전하게 갖추고 있음을 찬탄한 내용
이다.
[주08] 옹주를 …… 아니겠는가 : 묘지명은 한국문집총간 92집에 수록된 《계곡집(谿谷集)》 권10 〈정숙옹주묘지명(貞淑翁主墓誌銘)〉에
전문이 실려 있다.
[주09] 돈사(敦史) : 삼왕(三王) 때 노인들을 봉양할 적에 좋은 말을 청하여 기록해서 사람들에게 이를 본받도록 하였는데, 진호(陳澔)의
《집설(集說)》에 의하면 돈사란 돈후한 덕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禮記 內則》
[주10] 위전(位田) : 관청(官廳)의 경비나 제사(祭祀)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설치된 토지이다. <끝>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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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亡室貞淑翁主墓表
翁主就窀穸之翌年夏。樹圭首石。大書以表之曰。有明朝鮮國貞淑翁主之墓。遂假厥背。略次事行。摧悲塞中。曷能修于辭也。惟其葬也。上遣中使諭祭曰。高明而和。柔惠且直。惟我先王。鍾愛特篤。不煩姆敎。親授禮學。孝友儉勤。宗人仰則。又曰。昔在昏朝。天理滅絶。獨有士行。彌堅操秉。誠戴慈宮。跡絶曲徑。又曰。義著急難。不怵外患。芬馨斯播。四德無間。家大人哭之以文曰。溫文明惠。靖穆貞愨。有士之行。有婦之德。又曰。釐降寒門。備嘗榮戚。禮敬斯專。終始惟一。冢宰太學士張公維誌之曰。主旣稟生靈淑。自幼濡染於聖祖修齊之化。而媲德名家。逮訓於賢舅姑。性與敎相成。內與外合美。惟其有之。是以似之。其斯之謂歟。噫。得君親褒與其至矣。若冢宰之銘。非敦史也耶。茲足以不朽。復奚辭以贅爲。主卽宣祖昭敬王之第三女。母曰仁嬪金氏。十歲受爵封。十三歲成婚禮。十五出閤。與余同居二十七年而逝。德性懿範。精神識度。若可以嚮用庇家者。一疾不起。天道無徵。嗚呼傷哉。生於萬曆丁亥三月十九日。歿于天啓丁卯十一月初五日。年四十一。產育凡十一。存者五
男四女。男長冕魁司馬。娶監司尹暄女。生一女。次昪娶大司成李敏求女。有男女。次炅。次最。次晑。女長適士人洪命夏。有二男。餘幼。卜山於廣州治東沙阜村酉坐之原。官司備物具儀。用是年十二月二十八日。以禮葬焉。上敎戶曹曰。貞淑翁主墓下有奉安馹田。耕收未安。特賜其家。戶曹奉敎。以田幾頃成券而錫之。異數也。自哭主。生意頓盡。挈家秉付兒若婦。却掃一室。罕接人事。念無益之悲徒損性也。強以藥餌圖籍。爲餘生寓喩之地。而歷往若冥。覺此世益幻妄。姑敍逝者事諗于後。<끝>
樂全堂集卷之十一 / 墓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