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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6. 03. 14.
일본 천리대학교 소장 익재공(諱 齊賢) 진영과
19世 직장공(諱 養吾)의 따님 정경부인 조반배위 진영고찰.
▲익재 이제현선생 진영(일본 천리대학도서관 소장)
▲정경부인 조반배위 진영(일본 천리대학도서관 소장)
▲ 정경부인 하연배위상(河演配位像)/일본천리대학도서관소장
실물크기 : 50.1cm x 35cm
一. 머리말
문화재청이 2015년 10월 국회 동북아 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에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문화재가 세계20여 개국에 총160.342점이 국외 소장되어있다고 한다. 이중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품만도 67,708점이나 된다고 하니 과히 충격적이다.
그리고 이중 지금까지 미국, 일본 등 10개국에서 9,749점의 문화재가 환수되었다고 조사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肖像畵=影幀)는 고려 말 충숙왕 6년(1319)에 중국의 화공 진감여(陳鑑如)가 그린 오문(吾門-우리문중)의 17世 익재공(諱 齊賢) 영정이 국보 제110호로 지정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과 서울대학교박물관을 비롯한 전국 여러 박물관의 초상화를 모두 합쳐도 100여점에 불과하지만, 일본에서 역사가 깊은 나라현(奈良縣)의 천리대학도서관(天理大學 圖書館)에는 신라 말의 대학자 최치원으로부터 조선말의 추존 왕 익종(翼宗-憲宗의 아버지)의 비(妃) 신정왕후(神貞王后-趙大妃)의 조카인 조영하(趙寧夏,1845(헌종 11)∼1884(고종 21)에 이르기 까지 역대 명인들의 초상화 201여점이 수록된 《소상화첩(肖像畵帖)》 1·2·3·4권이 소장되어있다.
이 화첩(畵帖)에는 오문의 익재공 할아버지와 안향, 이색, 정몽주를 비 롯, 조선의 황희, 김시습, 이덕형, 송시열등 역사에서 빛나는 명신들의 초상화가 망라되어 있다. 이중 화첩에 이름이 밝혀져 있는 것이 121위(位)이고, 나머지 80위는 주인공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지만, 모두 명인임에는 틀림없다. 본시 정삼품이상의 당상관이 아니면 당시로선 나라의 화원에게 초상화를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二. 조선시대 왕비의 초상화도 전해지지 않는
사대부가의 여인초상화는 진귀한 일.
조선시대는 유교윤리를 바탕으로 한 가부장중심의 사회였음으로 여인의 초상이 제작되는 경우는 그 예가 매우 드문 일이다.
조선 초기에 주로 왕비의 초상이 제작되었을 뿐, 지금까지 전해지는 작품은 없다,
그러나 일본의 천리대학도서관에 소장되어있는 오문의 19世 직장(直長-從七品)공 휘 양오(諱 養吾)의 따님 정경부인(貞敬夫人) 『조반배위(趙胖配位 ?~1433)』 초상화와 세종31년(1449) 영의정(領議政)에 오른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1376(우왕 2~1453(단종 1)의 배위 『경제부인(敬齋夫人) 초상화가 유일하다.
단 문효공 하연(河演)의 부인상(婦人像)에는 『경제부인 이 씨 존오 녀(敬齋夫人李氏存吾女)』란 기록이 있어 직장공의 아우이신 석탄공(石灘公) 휘 존오(諱 存吾)의 따님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오기(誤記)이고 개성부윤(開城府尹) 이존성[李存性,?∼1388(우왕 14)/李仁任의 증손/월성부원군 경주이공 충열(忠烈) 이성림(李成林)의 사위)]의 딸, 성주이씨(星州李氏)로 바로 잡는다.
이 두 분의 정경부인(貞敬夫人) 진영은 비록 조선말의 이모본(移模本)이긴 하나 현존하는 조선시대 여인초상화로서는 가장 시대가 올라가는 작품들로서 국내에도 조반부부상(趙胖夫婦像)은 국립중앙박물관에 하연부부상(河演夫婦像)은 전북 무주의 백산서원(栢山書院)에 소장되어있다. 따라서 이 두 초상화의 범본(範本)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외의 여인그림은 벽화나「신윤복(申潤福,1758년(영조 34)~미상」의 미인화나 기녀 및 여인들의 그림이 다수 있지만 그림 속 인물이 명확하지 안 커나 박연[朴堧, 1378(우왕 4)~1458(세조 4)] 부부상처럼 연대가 불분명하거나 중간에 훼손돼 두 번이나 초상화가 바뀌는 등, 이 부류의 그림은 초상화의 범주(範疇)에서 제외된다.
三. 조선전기 귀족여인의 복식(服飾) 및 화장(化粧) 연구의 귀중한 자료.
고려 말 조선 초의 부녀자(婦女子)들의 복식은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참고하여 파악할 수 있는데 직장공의 따님 《조반배위》 진영의상은 고려 말, 조선 초의 귀부인 복식으로서 의상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초상화의 특징은 단순한 선묘(線描) 위주로 그려 음영(陰影)과 요철(凹凸)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있는데, 안면은 구륵세선(鉤勒細線- 실처럼 가는 선으로 그린 후 칠 하는 그림)으로 이목구비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색조 면에서는 고식(古式)을 보이고 있는데, 안면(顔面)에 조선초기의 옅은 복숭아꽃 색을 그대로 본 따서 칠한 것이 그러하다. 의복의 색깔역시 검은 청색바탕에 초록 선을 넣어 강세를부여하는 등, 색조에 대한 조심스런 배려가 눈에 뛴다.
아울러 직장공의 따님 《조반배위상(趙胖配位像)》은 《하연배위상(河演配位像)》과 더불어 조선 초기 부부상의 유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하겠다.
四. 화첩의 일본유출
위의 천리대학소장 화첩진영은 모두가 한 결 같이 발이 고운 견(絹-명주 천)에 한지를 배접해 채색으로 그렸다.
본시 진채(眞彩-丹靑에 쓰는 진하고 불투명한 채색)인 것은 진채로, 담채(淡彩-묽고 연한 빛깔)는 담채대로 복사하되 크기는 30㎝ × 50㎝의 소폭으로 하여 상반신만 옮겨 담았다.
규모는 작지만 이 같은 초상화는 후손들에게 피와 숨결을 물려준 선조들의 모습을 통하여 그 얼을 되새기고 이어받으려는 뜻있는 유산이고 능히 문화민족의 보배가 아닐 수 없다.
이 화첩이 일본으로의 유출은 1910년 한일합방당시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1897~1970)공의 시종무관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간 조동윤[趙東潤,1871(고종 8)∼1923./趙寧夏의 아들)이 결코 가보를 일본에 넘겨주기 위해 지니고 떠나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가 죽고 그의 아들 조중구(趙重九)가 1962년 일본에 귀화하면서 조국과 민족에 대한 애착마저 돌볼 겨를 없이, 1963년 일본의 천리대학에 「기증」이란 형식으로 양도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마 얼마쯤의 돈과 바꾸었을 개연성(蓋然性)이 높다.
그 후 천리대학은 이 화첩을 전시 하기는 커녕 금고에 넣어 극비에 붙여 그곳의 학교박물관장도 모르게 학장이소장고의「키(Key)」를 갖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당시 육군사관학교 이강칠(李康七,1926~2007,06.06) 군사박물관장이 조상의 모습을 뵙기 원하는 간청에 못 이겨 1968년 비로소 열람케 되었는데, 그는 화첩의 각 초상화를「필름」에 수록해왔던 것이다.
귀화하는 거야 개인의 자유이겠지만 우리문화재까지 일본에 바친 것은 친일이상의 행위로 여겨져 못내 아쉽지만 언젠가는 국민의 이름으로 반환되기를 바랄뿐이다.
五. 맫는말
우리조상의 얼과 뜻이 담긴 우리문화재는 필히 우리 땅에 있어야 그 의미를 더욱 빛낼 수 있을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말도 있지만
'혼이 담긴 계란으론 힘을 모으면 바위도 얼마든지 깰 수 있다'는 문화재 환수운동의 거목 혜민(惠敏)스님의 말처럼 우리문중도 힘을 모아 일본 천리대학교에 소장되어있는 두 선조의 진영을 환수할 그날을 기대한다.
왜냐하면 일제강점기 때 약탈당했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 본 47책을 혜민스님의 문화재 환수운동으로 2011년 동경대로부터 기증형식으로 반환 받았는가 하면, 6,25전쟁 때, 미군이 빼앗아간 ‘문정왕후[文定王后.1501(연산군 7)∼1565(명종 20)/조선 제11대왕 중종의 계비(繼妃)]어보’ 및 ‘대한제국 국새’ 환수도 혜민스님과 안민석(安敏錫) 국회의원 등의 힘으로 환수를 이끌어낸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六. 인물소개
●익재공(諱 齊賢)
“도덕의 으뜸, 문학의 최고봉”
德·功·言을 갖춘 유가적(儒家的) 인물
익재공[1287년(충렬왕 14)∼1367년(공민왕 16)]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자주성을 잃은 고려’라는 미증유(未曾有)의 민족수난기에 일곱 왕(충렬·충선·충숙·충혜·충목·충정·공민왕) 시대를 거치며 네 번이나 시중을 지낸 경륜의 정치외교가요 대학자요· 시인이요. 역사가로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아버지 동암공(東菴公 諱 瑱) 또한 고려건국의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의 후예로, 신흥관료로서 크게 출세하여 재상급인 검교시중(檢校侍中)을 역임하였으며 관료사회에서 신망이 두터웠고,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박통하고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권부(權溥)·
우탁(禹倬)· 이조년(李兆年)· 백이정(白頤正)· 신천(辛蕆) 등과 함께 당시 안향(安珦) 문하의 6군자(君子)로서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안향의 제자 : 이진(李瑱)·권부(權溥)·우탁(禹倬)·백이정(白頤正)·이조년(李兆年)·신천(辛蕆)· 박전지(朴全之)·윤안비(尹安庇)·허관(許冠)』
공(公)은 형님 인정(仁挺)과 동생 세기(世基)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조카들을 잘 가르쳐 대대로 가업(家業)을 떨어뜨리지 않게 했는데, 형님의 두 아들 부(榑)와 규(樛), 동생의 아들 천(蒨), 그리고 자신의 장남 관(琯)과 삼남 제현(齊賢) 등 5명이 성균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9世 직장공 양오(直長公 養吾)
직장공파의 파조로 고려후기의 문신이다. 생몰연대는 알 수 없고 동생 석탄공 존오(石灘公 存吾)의 생몰연대가 1341년(충혜왕 복위 2) ∼1371년(공민왕 20) 임으로 유추해볼 수는 있다. 아버지는 사재감승(司宰監丞-正五品) 휘(諱) 길상(吉祥)이고, 어머니는 고려판도사판서(版圖司判書) 겸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正二品) 방서(方曙)의 딸 온양방씨(溫陽方氏) 이다.
공은 네 형제 중 장자로 사온서(司醞署) 직장(直長)의 관직에 재임 중 객지에 출타하였다가 도적에게 화를 입어 청운의 뜻을 펴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는데, 여러 달이 지난 뒤 집안에서 소식을 듣고 동생 존오께서 그곳에가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치르러하였는데, 시신이 백골이 되어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동생 존오께서 "나의 형은 남과 달리 손가락이 여섯 개요" 라고 하여 이로 인해 장사를 치루고 관청에 요청하여 도적을 모조리 잡아들여 죽였다고 전한다.
●20世 직장공의 딸 정경부인 “조반배위(趙胖配位,?~1433)”
조선개국공신2등인 배천인(白川人) 복흥군(復興君) 조반[趙胖,1341년(충혜왕 복위 2)∼1401년(태종 1)]의 배위(配位)로 아버지는 사온서직장(司醞署 直長) 휘 양오(諱 養吾)의 딸이다. 부인(婦人)은 남편을 잘 내조하고, 3남(瑞老-都承旨/瑞康-吏曹參判/瑞安-開城留守), 3녀를 훌륭하게 잘 키워 현모양처의 표상이다. 정경부인이씨가 세상을 떠나지 세종(世宗)은 부의로 석회 50석을 하사하였다.
또한 부인은 자녀들의 훌륭한 보살핌으로 90수(壽)에 가까운 장수를 하신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인천광역시 부평구 가정동(佳停洞)이란 이름은 조반선생 부부의 별업(別業>별장) 이름에서 유례 한 것이다.
●24世 효사재 탁영(孝思齋 擢英,1541~1610)
직장공의 5代孫에 효사제 휘 탁영(孝思齋 諱 擢英)이 있어 그가 1592년 음력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순찰사(巡察使) 몽촌(夢村) 김수(金晬)의 막하(幕下)에 들어가 참모로 활약하였으며, 김수가 근왕병(勤王兵)을 이끌고 수원(水原)까지 진군(進軍)하였을 때에도 수종(隨從)하여 헌책(獻策)한 바가 많았다.
1593년(선조 26)에는 초유사(招諭使)와 경상좌감사(慶尙左監司)를 지낸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막하(幕下)에서 초병(招兵) 및 군량 등의 방책(方策)을 건의하여 전승(戰勝)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
공(公)은 왜란이 평정된 1598년 11월까지 7년간 임란시(壬亂時)의 진중(陣中)에서 일어난 일을 《임진변생후일록(壬辰變生後日錄)》이란 제목(題目)으로 초(草)하여 두었는데, 난(亂)이 평정(平定)된 1601년(선조 34) 오문의 28世 휘 시발(諱 時發)공이 경상감사(慶尙監司)로 재임 시, 관내(管內)의 임란사적을 채집케 하였는데 이 때 효사제공께서 이 일록을 재정리하여 제출하였던 바, 이를 감사 시발(監司 時發)공이 조정에 보고하니 이를 어람(御覽)한 선조(宣祖)는 정만록(征蠻錄)이라 명명하여 계하(啓下)하였다. 우리나라 보물 제880호로 지정되었다.
공은 평란 후(平亂後) 논상(論賞)에는 굳이 사양하였으며 효행이 특출하였다. 숙종(肅宗) 때 평란(平亂)의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正三品)에 증직(贈職)되고 정조(正祖)때 충효사(忠孝祠-의성군 의성읍 충효로 20(상리리 579)가 세워졌다. 저서(著書)로는 임진왜란의 종군일기《정만록(征蠻錄)》과.《효사재문집(孝思齋文集)》이 있다. 묘는 의성군 의성읍 중리리 산123번지 호현(狐峴)에 유한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세종62권(영인본)』/15년(1433 계축/명 선덕(宣德) 8년) 12월 7일(병진) 7번째 기사
『경주이씨세보-庚午譜(1930)/권지122P』경주이씨대동보소
『한국명인초상대감’(1972)』/이강칠 저
『일본소재한국전적목록(1991)』/국립문화재연구소
『해외전적문화재조사목록(2005,초판)517쪽』/일본천리대학도서관소장한국본/국립문화재연구소
『중앙일보]1968.11.30.』종합 3면
『조선명인전』1990-재수정판-명문당
『고려사열전』정인지외-한충희 역주/계명대학교출판부(2001)<끝>
2016. 03. 05
글쓴이 :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