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막아 농토를 일구고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 출포리 새마을지도자 임 광 묵
1.자립의지의 싹이 트다.
저는 배움이 부족한 농촌의 새마을 지도자입니다. 저는 워낙 배운 것이 없고
가난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가난 속에서 허덕이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우리 부락은 충청남도 최 서북단에 위치한 갯마을입니다. 당진군에서 서북단으로 약 16km,면소재지에서 2km를 보도로 가면 그림 같은 초가삼간들이 들어앉은 갯마을이 저희부락입니다.
총 호수 95호에 비농가가 7호, 농가가 88호, 경지면적은 전답 합해서 호당 0.6ha가 조금 넘고 있습니다. 남녀 인구수는 약 600여명이고 우리 마을은 갯마을이기 때문에 바다에 인접해있어서 바지락양식장이며 굴 양식장을 할 수 있는 광활한 면적이 있습니다. 도한 앞 개펄을 막으면 간척사업을 해서 농지조성이 가능한 부락입니다.
하지만 충청도의 봉건적인 폐습과 보수적인 생활로 인해서 가난을 숙명처럼 여기고 살아왔던 저희 갯마을입니다.
옛말에 고개 중에서 무슨 고개가 제일 높으냐고 하면 농촌에서 흔히 춘궁기의 보리 고개라고 얘기들을 합니다. 우리 부락에도 춘궁기에 들어서면 겉보리 생 이삭을 잘라다가 갈밥을 해먹고 7월중에 겉보리가 떨어지면 호박에 통밀을 갈아서 통수제비로 끼니를 연명했습니다. 음력 8월 초순경에 가서 또 떨어지면 들판에 채 익기도전에 벼의 생 이삭을 훑어다가 날이 궂으면 솥에다 볶아 가지고 그것을 끼니로 연명했습니다.
또한 바다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부녀자들은 어린것들의 굶주림을 달래기 위해서 조개를 한 톨 두 톨 주워 다가 그것을 이고 다니면서 이 문전 저 문전, 곡식과 바꿔다 끼니에 보태왔습니다. 지금은「나일론」옷이라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 당시만 하더라도 옷이 없어 그냥 솜 무명옷 저고리에, 지금은 장화가 있어 좋지만 그 때는 짚신에 감발을 해서 발을 짚으로 둥둥 감아 가지고, 엄동설한 그 눈보라가 휘날리는 찬바람을 무릅쓰고 갯벌로 가면 발이 빨갛게 오리발마냥 부어오르고 그랬습니다.
이렇게 가난한 우리 마을에는 배움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조금 철이 들라치면 이런 고생을 할 바에는 차라리 도시로 가서 심부름을 해 주고 또한 식모살이를 해서 배라도 불려야 되겠다고 도시로, 도시로 올라갔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이 좀 배웠다 하면, 동네가 이 지경이니까, 동네를 버리고 도시로 올라갔기 때문에 동네는 버려진 마을로 일컬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마을을 남부럽지 않게 가꾸고 우리가 이 가난을 물리쳐야만 좀 더 잘 살 텐데, 그런 생각은 하지는 않고 젊은 층 일부에서는 노름이나 하고 술이나 마시고 그저 허송세월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무지한 우리 출포리 주민들의 습성을 안 인근 자본가나 또 사회적으로 식견이 넓은 분들은 출포리 연안이 굴 양식장 적지라는 것을 알고서 출포리 연안 점유에 골몰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20여정 보나 출포리 연안을 점유해 가지고 굴을 생산하여 돈을 많이 벌었던 것입니다. 출포리 주민들은 그 자본가 밑에서 품팔이 신세가 되었고 그 분네 하시는 말씀이「출포리는 우리들 때문에 여태 살았지 벌써 굶어 죽을 것인데」, 또는 「우리 때문에 살았다」「우리 덕이 크다」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우리가 그 굴을 채취해 준 삯으로 연명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분들은 과거에 공직 생활을 해서 과장이다, 또는 판사 생질이다, 조카다 하는 식으로 좀 넉넉히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분들이 그 때 굴 양식장 20여 정보를, 광활한 출포리 연안 갯벌인데, 점유를 해 놓고서 무수한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런데도 이 나머지 것도 자기네들이 점유를 해서 시설을 해 가지고 돈을 벌자고 계획을 했던 것입니다.
어물전에 가보면 그 아주머니들이 비린내 나는 앞치마를 입고서 10원, 20원, 이것을 놓고서 무수히 아옹다옹 싸우는 모습을 흔히 봅니다. 직업에 무슨 귀천이 있느냐고 이렇게 말씀들을 하지만 그것을 보면 참 천하기 한이 없는 것입니다. 싸우는 까닭은 양식 굴 때문인데, 자연산조패류는 아주 조그맣지만 양식 굴은 우리 마을의 것이 질이 좋고 커서 칼로 썰어 먹을 정도로 되어 가지고, 금년에도 그 굴 한 깡에 현장에서 만 오천 원 시세가 되었습니다.
그 때 남해지방에서는 석유공해로 인해 일본에 수출이 안 된 다고해서 우리 마을의 굴이 일본수출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주머니들이 주인이 알까 모를까 하게 양식장에 들어가서 채취를 하면 감시하는 분들이 그 도구를 뺏고 “왜 남의 양식장 굴 밭에 들어와 채취를 하느냐?” “나가거라.”
“들어가거라.” “이년” “저년”심지어는 사람이 듣지 못할, 형용할 수 없는 그러한 모욕과 창피를 당하고 그랬던 것입니다.
나는 이런 모습들을 볼 때마다 우리 출포리 사람들이 우리 연안을 스스로 관리한다고 하면 얼마나 떳떳할 것이며, 저 사람 네들이 버는 것만큼 우리 수익이 될 텐데 왜 저것을 개발을 않나 하고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나머지라도 우리 출포리 주민들이 합심단결을 하여 저들한테 뺏기지 말아야 되겠다, 마음을 먹고 우리 마을에서 이것을 개발하려고 결심을 하였던 것입니다.
나 자신도 우리 마을은 갯마을이기 때문에 해안을 개발해야만 잘 살 수 있지, 해안을 개발치 않고는 도저히 잘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해안을 역점사항으로 두었던 것입니다.
갯가에는 조금과 사리가 있습니다. 조금 때는 물이 덜 나가고 덜 들어오고, 사리 때는 물이 많이 나가고 많이 들어오고 하는 때인데, 많이 나갈 적에, 그 분네들이 아니나 다를까 이 갯벌 땅에 와서 측량을 하려고 그래요, 그래서 그전에 우리 개발위원 몇 명하고 이장, 나, 기타 모모인들이 이것을 제지를 해야만 되겠다고 의논하고 젊은 사람들 몇 명이 갯벌로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측량을 하는 곳에 가서 나머지 것만큼은 출포리에서 개발을 해야만 될 테니까 이것을 좀 양보해 달라고 했더니, 그분들이 들어주지를 않아요. 그래 할 수 없이 현장에서 말다툼이 되었던 것입니다. 말다툼을 하다 보니까 내 자신 배운 것도 없고, 그 분네들은 사회적으로 식견도 넓고 그래서 참 감당하기가 어려웠고 또 사실상 이것을 우리가 선의 적으로 달라고 하는데 안준다하여 군중심리에 의해서 거기서 싸움이 났어요. 싸움이 나니까 뻘 칠을 얼굴에다 하고 옷이 말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도저히 안 되겠어요. 그래서 싸움을 말렸지요. 말려가지고 집에 와서 도저히 이렇게 해서는 일이 안 되는 것이니까 순서를 밟아서 일을 해야 될 것이라고, 곰곰이 생각했었습니다.
사실상 그 분네들도 면허를 얻으려고 하고 우리도 면허를 얻으려고 하는데 이 때 경쟁이 붙은 셈입니다. 나 자신 그 분네들을 생각할 적에 감히 어떻게 저 분네들하고 같이 면허를 내서고 우리가 시설을 할 수 있을까하고 걱정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면에 가서 이 양식장을 우리가 개발을 하려고 하는데 그 순서와 절차를 어떻게 밟아야 되겠냐고 물으니까 군청 수산계에 가서 면허 문의를 해 보라고 그래요. 그래서 군청 수산계를 갔던 것입니다.
군청 수산계에 가서 이러 저러해서 면허를 내려고 왔으니 서류가 무엇 무엇입니까? 이렇게 질문을 했더니 군청에서 얘기를 하기를 개인사업장은 잘 되는데 공공사업장은 잘 안된다며 왜 그러냐 하면 여러 사람이 한 마음 같지 않고 영속적으로 지속 되지를 못하고 중간에서 다 실패를 하고 마니 출포리 그 가난한 동네에서 어떻게 그 바지락 양식장 시설을 하며 어떻게 운영하겠느냐고 반문을 해요. 그래서 하여간 우리가 시설을 할 테니까 면허 내는 절차를 알려 달라 그랬더니, 뭐뭐 해갖고 오라고 그래요. 지적사본이며 측량도 해야 하고, 회의록이며 등등 여러 가지가 많아요. 그래 집에 와서 이장하고 얘기를 했지요, 이렇게 해 가지고 오라고 그러더라고.
며칠 있다 군청에 그 서류를 가지고 갔던 것입니다. 가서 서류를 보이고 면허를 내달라고 하니까 담당자가 검토를 하시데요. 하시더니 몇 군데 잘못되었으니 이것을 가서 새로 해 오라고 그래서 그 잘못된 것을 며칠 있다 고쳐서 또 가지고 갔지요. 가지고 갔더니 다른 것이 또 잘못되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서류를 도로 갖고 왔지요. 갖고 와서 또 그것을 고쳐가지고, 한 2,3일 있다가 갔더니 어디가 또 틀렸다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 할 적에는 처음에 그냥 무슨 서류 무슨 서류 하지 말고서 좀 더 구체적으로 1은 뭐, 2는 뭐하고 말해서 이렇게 하면 틀림없이 될 것이다 하고 잘 가르쳐주면 한 번에 서류만 제출하고 여러 걸음 안 걷게 될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가데요. 결국 그렇게 해서 면허를 얻었습니다.
면허를 얻었으면 시설자금이 있어야 되는데 바지락양식장 종패며 시설자금이 굉장히 많이 듭니다. 경험이 계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시설자금이 한 10정하는데 약 150만 원가량 들어요. 그러니 동네기금이라는 것은 한 푼 없고 남에게만 의지하고 살던 사람들이 생각이나 했겠어요?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면허를 얻어가지고 양식장시설을 해야 할 테니까 출자를 좀 해라, 사업자금으로 출자를 해라, 하니까 안 해요. 그래서 내가 생각할 적에, 인근에서 이렇게 돈을 많이 버는 것을 본다고 하면 어떠한 돈을 갖다가 투자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해야만 될 텐데 옆에서 번연히 돈 버는 줄을 알면서도 그것을 생각지도 못하고 안 하려고 하니, 내 마음 같았으면 내가 반 이상 투자를 하고 내 개인 것을 만들었으면 속이 시원하겠지만 마을사람들은 그것을 생각 못하고 돈을 안낸다고 그래요. 제대로 아는 사람은 「나 그것을 반 이상 투자를 할 테니 달라」는 사람도 혹시 있고 약간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공동적으로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 곰곰이 생각하니까 일개인에게 반 이상을 넘겨준다고 하면 출포리 명의를 빌려가지고 개인사업 시키는 것 밖에 안 되기 때문에 좌수를 결정했습니다. 1좌를 그 때 1,500원으로 하고 5좌를 초과를 못한다, 즉 7,500원을 초과 못한다고 하고서,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출자를 시키고 있는 사람이라도 5좌를 초과시키지 못하게 하며 가까스로 양식시설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고 보니까 상대방에서 면허를 얻으려고 했던 분들이 설마 저희들이 무엇을 하랴 생각했지만 이제는 만만치 않게 생각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원래가 연안에 접해 있는 양식장은 외지사람들이 하려고 하면 주민들이 승낙하는 도장을 찍어 주어야 된다고 그래요. 그런데 과거에 이장이 어떻게 되었는지 출포리 도장을 갖다가 이 분네들에게 찍어준 모양이에요. 그래 가지고 이 면허를 주었어요. 그러나 저러나 이것은 지나간 일이기 때문에 따질 필요도 없고 그래서 우리는 어촌계를 조직을 해야 되겠다 해서 어협에 가서 어촌계조직을 완전히 했지요.
이 양식장사업을 언제 했느냐하면(개인사업장이 옆에 있고 우리 출포리 양식장사업은 10정이 바지락양식장입니다.) 시설을 가을에 하게끔 되었던 것입니다.
이 굴이라는 것은 김장할 무렵, 찬바람이 나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 시세가 올라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들이 경영하는 양식장의 굴은 출포리 아주머니들이 굴을 까서 삯전을 받고 채취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 가을에 어촌계조직을 했기 때문에 우리 양식 사업을 시설을 해야 할 테니까 동네 사람들과 어촌계원들을 전부 모아놓고 「우리는 과거에 이러 이러한 설움을 받았으니까 앞으로 출포리 어촌계를 육성해야만 되겠고 누구나 다 여기에 참여를 해야만 되니까 이 규약을 엄수해야 된다. 만양 이 규약을 엄수치 않는 사람은 어촌계에서 제명처분을 해 가지고 아주 갯바닥에 한 발짝도 디디지 못하게 할 테니까 이것은 당신네들 알아서 하시요.」하고서 찬바람이 나기 시작할 무렵에 우리 양식장 시설사업을 하게 되었지요. 그러니까 가을철이 되어서 굴 시세는 올라가 까기 시작해야 될 텐데 출포리 아주머니들이 어디를 가느냐 하면 출포리 어촌계가 있으니까 어촌계 일을 해야 된다고 하니까 누가 나가겠습니까? 아무도 개인 양식장에는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굴이 만 천원 만이천원으로 오르기 시작 한다 이것이에요.
출포리 아주머니들이 한 근을 갖다가 채취하는데 작년도에 50원을 했습니다.
그러면 한사람 앞에 얼마를 까느냐 하면 잘 까는 사람은 10여근을 까요. 10여근이면 부녀자들이 그 조그만 어린이들까지 포함해서 한 세 식구나 두 식구 나간다고 하면 열 근이면 500원이고 세 식구 나가면 1,500원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 1,500원 생각이 나서 이 개인사업장으로 갈려고 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양식장시설을 해야 된다고 못나가게 하니까 굴 값이 자꾸만 올라가지만 까줄 사람이 있어야지요. 출포리 아주머니들도 이 개인사업장에 가고는 싶지만 출포리 양식장 때문에 갈수가 있어야지요. 그러니 굴이 1만 4천 원대로 올라가는 것이에요. 그것 야단났어요. 과거에 출포리 동네를 그렇게 만만하게 생각했지만 누구하나 나가서 까야 말이지요. 출포리 어촌계를 살려야 되겠다. 하루 여기 어촌계에 안 나온 사람은 제명처분을 한다 하니까, 아무리 굴 값이 올라가도 나가는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요.
굴 값이 드디어 만 오천 원으로 올랐습니다. 나중에는 그분 네들이 하다하다 안된 모양이에요. 그것 굴 한 깡에 10만원 하면 무얼 합니까? 깔 사람이 없으면 굴 밭에서 굴이 디굴 디굴 썩어도 출포리 아주머니들이 아니면 까줄 사람이 없는데 그러니까 애가 타는 모양이지요. 그래가지고 한 「카브」가 8인조인데 한「카브」를 사거라 하는 얘기까지 나왔습니다.
내가 고의적으로 이 사람들 하고 굴 시세 올라가는 사업장에다가 일을 붙인 것은 아니겠지만 이것 한「카브」를 사라고 하는 것이 심상치를 않아요. 출포리 아주머니들을 이용하려고 한다. 이것이에요. 그래서 나는 「사면 사고 그렇지 않으면 말지 그것 한 「카브」사서 무엇 하냐. 나는 속셈을 다 알고 있다. 나중에는 한 이삼년만 가면 모두 거저 들어온다.」하면서 버티었습니다.
그 사람들 사업장에 누가 나가서 까줄 사람이 있어야지요, 너무나 만만히 보았지요. 그래가지고 나중에는 이 사람들이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이러지 말고 우리 아주머니들을 동원시켜서 굴 좀 까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해요.
그래 가만히 생각하니까 한편 밉살스럽기도 하고 과거에 출포리 사람들은 자기들 때문에 굶어죽지 않고 산다고 하면 사람들이 이제 와서 아쉬운 소리를 한다. 이것이에요. 그렇게 큰 사업체를 갖고 있고 또 사회적으로 식견이 넓은 사람들이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왜 그렇게 말을 하느냐 이것이에요. 「출포리 주민들 때문에 우리 사업이 잘된다. 이것이 출포리 주민들 덕이다.」이러한 말을 하기는커녕, 출포리 사람들은 우리들 아니면 굶어 죽었다고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사정을 해요. 그래서 내가 그랬지요. 「사람이라는 것은 아무리 못생겼다 하더라도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는 법이 아니야! 너무 깔보고 그러면 못써! 앞으로 절대 그렇게 하지 마세요.」하고 사실상의 훈계를 했습니다. 결국 나쁜 버릇을 고쳐놓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까 과거에 없던 바지락 양식장시설을 해 놓았지, 어촌계가 완전히 조직이 되었지, 이제 누구든 만만히 보지 않아요. 그러던 해에 72년도에 저희 마을에도 양회 300포대의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2. 바다를 막아 옥토를 만들 계획을 세우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정부가 새마을운동을 시작할 적에 첫 번째 시책이 환경개선사업이었습니다. 그때는 무조건 지붕을 뜯어내고 담장 개량하고 하수구 개량하고 농로를 내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정신계발이고 세 번째는 소득증대사업이라고 저는 이렇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을에는 환경개선사업을 하려고 하니까 썩어터진 기왓장 한 장 없고 다 썩은 함석쪼가리 한 장 없고 그저 초가집도 다 자빠지고, 끼니조차 간데없는 우리 마을에서 도저히 환경개선사업을 할 수 없고 새마을사업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을은 오직 이 가난을 벗어나야 새마을운동도 하고 잘 살 수 있는 것이지, 우리가 아무리 지붕개량을 하려고 해도 우리는 할 힘이 없다. 그러니 우리는 부자부터 되어야겠다. 이제는 우리에게도 없던 어촌계가 생기고 양식장도 생겼으니까 이러한 조직을 가지고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이 농지를 좀 더 확장해 보자.」생각하고 앞바다에 간척사업을 한번 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 간척사업은 출포리 대대손손의 숙원사업이고 또한 언제인가는 이루어질 사업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다 알면서도 그때까지 손을 대지 못했던 것입니다.
출포리 부락이 95호가 집단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부락 단위로 나누어져서 1ㆍ2ㆍ3ㆍ4ㆍ5개 반인데 이 앞바다의 면적을 간척사업으로 한다고 하면 7만평입니다. 이것이 7만평이고 제방길이가 얼마냐 하면 326m입니다. 높이는 평균 6m 내지 7m가 되겠습니다. 이것을 과거에도 좀 해보려고 무수히 노력도 했지만 여태까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나도 배운 것이 없어 부락에서 그냥 지게목발이나 두들기고 살고 있지만 과거에 자유당 시절이나 민주당 시절에는 민의원선거 당시면 선거공약 사항으로 자기의 표를 끌기 위해서 지방에다 무수한 선거공약사업을 많이 해 준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어떤 부락에는 다리를 놓아준다, 어떤 부락에는 회관을 지어준다, 뭐 등등의 여러 가지 공약을 해 주었는데 어느 날 그러한 모임이 있다고 나를 불렀습니다. 나가 보니까 그 민의원후보자 되시는 분이 쭉 물어보고 출포리 아무개는 지방에 무슨 애로점이 있느냐 이렇게 묻기에 “우리는 이 앞바다를 막아야 잘 살 수 있기 때문에 이 앞바다를 좀 막게 해주신다면 우리 출포리 유권자 표는 당신에게 다 몰아 줄 테니 이것을 좀 막게 해 주세요.” 이렇게 말씀을 드렸더니 그분 하시는 말씀이, 과거에 정부에서 미 공법 480호 밀가루 양곡사업을 무수히 많이 했으나 중간 「브로커」들이 공유수면 매립면허를 내서 그저 이 사람에게 팔아먹고 저 사람에게 팔아먹고, 밀가루공사를 합네 하고 조금 해 가지고 밀가루만 떼어먹고 공사는 하지 않았으므로 정부에서 무수하게 실패를 했기 때문에, 아무리 선거후보자로 나왔지만 출포리 것만큼은 못해 주겠다고 이런 얘기를 해요.
「그러면 나도 당신 요구하는 표를 안 밀어준다. 어쨌든 이것 막아준다는 사람에게 출포리 유권자는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다 몰아 줄 테니까 이것이나 좀 해 달라」고 말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또한 이것을 좀 막게 하기 위해서 간척지에 대한 전문가가 안식교회 무슨 재벌 되시는 분들이 무수히 많이 답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분 네들 역시 이 출포리 간척사업은 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제방길이가 326m에 높이 6m 내지 7m의 이 토축공사를 해서 7만평을 막아가지고 7만평을 매각처분한 금액이 공사비를 제외하고 이문이 있어야 할 텐데 몽리면적은 작고 공사비가 많이 들어서 도저히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없는 땅값도 500원씩 할 적에 그것 막아놓기만 하면 1,000원씩 받을 테니 안심하고 공사를 시작해 보라고 했어도 그분 네들이 그렇게 속겠습니까? 속지 않지요. 이와 같이 바다를 막으려고 과거에 매우 노력했어도 이것을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마침내 우리는 이것을 72년도에 착수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72년도에 새마을선풍과 더불어 이 간척사업을 부락에서 좀 해 보아야 되겠다. 생각하고 유휴노동력을 찾아서 겨울에 최대한 이용하고 자본가들과 전문가들이 답사해 가지고 공사비가 많이 든다는 것은 출포리 노동 노임이 많기 때문에 공사비가 많이 드는 것이니 출포리 주민들이 노력부담은 하고 자본만 우리 출포리에서 출자를 하면 이것이 막아질 것이 아니냐. 생각하고 이장하고 나하고 일차 상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보는 바다고 산이겠지만 하루는 이장하고 마을 뒤의 커다란 산에 올라가서 바다를 내려다보니 서북풍에 몰아치는 바람은 파도에 밀렸다가 이리 철썩 저리 철썩 떨어지는데 심각하게 생각해 보니까 바다를 막는다고 생각은 했지만 막을 것 같지를 않아요. 바람에 파도가 막 치는데 동해안이나 해변에 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그 파도가 보통 힘이 아닙니다. 쾅쾅 소리가 나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겁이 나요.
그래서 「어쨌건 이것은 출포리에서 한번 손을 대보자, 우리 출포리 주민들이 이제 정신을 차렸으니 오늘 저녁에 나하고 좀 상의를 하자」해 가지고 이장네 가서 그날 저녁부터 상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선 동네 분들한테 진단을 하기 위해서 의논을 해서 동네에 싹 퍼뜨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부락총회를 열어서 한번 의견을 들어보자 하여 하루는 그때는 회관도 없고 그랬지만 이장네 집에서 회의를 붙였습니다.
그때가 72년도 정월달 이었습니다. 산골 마을이라 이장네가 좀 떨어져 있는데 노인네들이 회의 장소에 오시는 것을 보니 거나하게 취해 가지고 오시는 노인 할아버지들이 보이고 젊은 사람들 여럿이 오는데 거기서부터 우왕좌왕해요.
그래 가만히 생각하니까 무슨 소리가 진담으로 나오고 안 할 소리 못 할 소리 다하게 할 방도를 궁리한 끝에 술을 대접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술을 들게 되면 술기운에 자기가 꺼려했던 것도 본심에 맘먹은 대로 말하기 마련이라 이것이에요. 그래서 막걸리를 거나하게 먹였지요. 먹였더니 인제는 막 털어 놓는 것입니다. 술이 오르니까......,
「그 사업을 과거에 민의원 입후보자들이 하시려고 하다가 못하고 돈 많은 사람들이 하려고 하다가 못한 건데 너희들이 무엇이 잘나서 그것을 막는다고 하느냐」등등, 굉장합니다.
나도 충청도에서 살고 있지만 충청도 사람들이 느릿느릿하고 거기에다 내숭스럽기가 그지없어요. 게다가 따지지나 말아야지, 무엇을 따지면 아주 타산적입니다. 또 무슨 얘기를 하면 자기 하나밖에 몰라요. 자기본위입니다. 그것뿐이 아니고 고집이 세어가지고 좀 더 먼 장래를 생각하고 긴 안목을 생각하고 무엇을 해 보아야 되겠다고 심각히 생각해 본다는 것이 아니고 그저 목전의 이익, 이것을 생각해서 그것 좋다 해 가지고 하는 이런 식이었습니다. 좋은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을 시작하자고 하니까 생각지도 않고서, 지금 현실에 닥친 우리 일을 하자는 것도 안일하게, 그저 편케나 하고서 쓱 넘겨 보내려고 하는 이러한 마음이지, 「그 분네들이 하지 못한 것을 우리 한번 해 보자」이렇게 의욕적으로 나오는 사람이 없더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회의 장소에서 이러니 저러니 하다가 술김에 싸움판이 되었어요.
그래서 해산을 시켜 버렸습니다. 해산을 시키고 가만히 생각하니까 안 되겠어요. 그래서 어쨌건 운은 띠우게 되었으니까 야간에 개발위원과 이장과 그리고 모두 5개 반이니까 반별로 소집해 가지고 개개인의 의사를 물어 보았던 것입니다.
여기 참여를 하겠느냐, 공동투자를 해 가지고 공동노력을 하여 이것을 막아 보자, 그랬는데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설득을 좀 더 시켜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반회를 한 것을 날짜로 따지자면 헤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일은 잘 안되고 나 혼자 가만히 생각하니까 이래서는 안 되겠어요.
우리는 사람을 저울질하고, 없는 데에서 저 사람 나쁘다, 이 사람 좋다, 하는데 그 버릇은 참 나쁩니다. 하지만 내가 하는 내 나름대로의 이러한 일이 과연 그렇게 나쁜 것 같지는 않아요, 내 양심에…….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사람을 저울질을 안 할 수가 없고 그래서 동네사람을 내가 세층으로 골라 보았습니다. 제일 첫째 꼭 필요한 사람, 부락에서 꼭 필요한 사람, 둘째 번에는 있으나마나 한 사람, 세 번째로 불필요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꼭 필요한 사람은 청ㆍ장년으로써 열심히 마을일에 참여를 하고 「야 그것 한번 해보자」하는 의욕이 있는 사람이고, 있으나마나 한 사람은 어두운 밤에 어디를 갈지 모르고 그저 누가 하자면 하고,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분간 못하는 사람들이고, 또 불필요한 사람은 훼방 놓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하라고 하면 하지도 않으면서 남이 한다고 하면 배 아프게 여기고 헐뜯는 사람들, 특히나 돈 좀 있고 배운 사람들이 오히려 이런 일에 협조해 달라고 하면 앞장서서 해 주려니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아니고 오히려 앞에 나서서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세층으로 골라 가지고 우선 집중적으로 있으나마나 한 사람들을 포섭을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한 사람 두 사람 잡아서 해야 된다고 설득을 하는데 그렇게 숱한 100마디, 천 마디, 얘기를 하고 나서 뒷날 가서 물어보면, 그분이 엉뚱한 얘기를 합니다. “내일 임원회 하는데 자네 참석 좀 해 주어” 하면 “나는 못해!” 이래요. 엊저녁에까지 분명히 그 사람이 아주 적극적으로 한다고 했는데 왜 변했나 하고 가만히 알아보니까 그 동네에서 불필요한 사람들, 좀 넉넉히 사는 사람들, 또 배운 사람들이 “광묵이 뭐 한다고 하는데 그것 될 것 같은가? 그것 안 되어. 그것 하지도 말아.” 이러니까 홱 돌아간다. 이것이에요. 그러면 나는 이런 일을 하자고 천 마디, 만 마디 해 가지고 간신히 대답을 했는데 어째 그 사람들 한마디에 이렇게 마음이 홱홱 돌아가느냐 하고 가만히 생각하니 이 돈 있고 배운 사람들이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오히려 시기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 하루저녁에는 임원회를 해 가지고 완전히 결말을 지으려고 결심을 하였습니다. 자꾸만 시간만 낭비되고 회의를 하고 동네에서 시끄럽기만 하고, 그러니까 동네가 이 화제 때문에 왁자지껄한 거지요, 날이면 날마다……. 그래가지고 하루저녁에 회의 시작을 했는데 대개 농촌에서 사랑방 구석에서 회의를 한다고 어떤 주제를 내놓고 회합을 하면, 날이 저물거나 그러면 소가 먹을 물을 데운다, 여물 쑤러 간다, 볼 일 있다, 나무 들여 놓은 것이 없다, 그래 가지고 내일 하자고 미루고서 흐지부지 문제점을 해결치 못하고 그냥 넘어 갑니다. 또 저녁에 밤이 야심해지면, “아이고 졸려 이것 못 하겠네. 그러니 나 집에 좀 가 보아야 할 테니까 이것 내일하세” 해 가지고 해결을 안 보고 흐지부지 갈려고 그래요. 그래서 “아니여, 이장하고 나하고 저녁 준비했어, 국수 여기서 삶아다 먹어가면서 무슨 결판을 내야지 이것 사람 몸 말라 죽겠네, 그러니까 한다든지 못한다던지 결말을 내야 될 것이 아니냐. 하면 잠잠해요. 그래서 내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이 간척사업이라는 것은 과거에 없던 우리의 어촌계조직이 완전히 되고 새마을운동도 우리는 환경개선사업은 못하는 것이고 농지조성 하는 것이 대대손손의 숙원사업이니 이 간척사업 7만평을 우리가 스스로 농지확장을 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근본적으로 동네에서 볼 적에 나쁜 일이냐, 또 당신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러니까 임원 한 사람이 그것 동네에서 그전부터 내려오는 숙원사업이라고 그것 참 좋은 일이라고 말하기에 “그러면 일은 끝났네, 왜 끝난 것이냐 하면 동네에서도 다 좋다하고 대대손손으로부터 내려오는 일을 여태 알면서도 못했다고 하면서, 당신 자신이 좋다고 한 일이니까 이것은 해야 해, 당신이 나쁘다고 하면 하지 말아야 하고 또 동네에서도 나쁜 일이면 하지 말아야 하지만 다 좋다고 하는 일이니 우리가 한번 해보아야 될 것이 아니냐? 당신 입으로 분명히 좋다고 했으니까 좋으면 좋은 대로 처리를 한 번 해보자.” 하니까 하는 말이 “뭐가 있어야지요…….” 집에 간다는 말도 못해요. 국수는 들여왔지, 국수는 먹었지, 그래서 꼼짝 못하게 해 놓고서 한 일 년도 좋고 이년도 좋으니까 이것을 한번 해보자고......, 그래가지고 단합이 그런대로 되었습니다. 이렇게 돼서 72년도 초에 기공식을 갖기 위해서 삽이며 괭이며 지게를 가지고 현장에 나갔던 것입니다.
3. 드디어 간척 사업에 착수하다.
그런데 이 간척사업이라는 것은 양쪽에서 산과 산을 이어야 됩니다. 또한 이 마을 주위 갯벌은 조금 물렁물렁하고 (갯벌도 여러 가지입니다) 높았다 낮았다, 굴곡이 있는 갯벌도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판단하였습니다. 산과 산을 이으려고 하면 우선 토취장을 갖다가 해결해야 될 것이 아니냐. 그래서 이 토취장을 해결하려고 지적도를 놓고 보니까 묘하게도 막으려고 하는 데가 경계가 딱 갈라져서 이것이 김 씨네 산이고 저것이 박 씨네 산이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김 씨네 있는데 가서 우리 동네에서 간척사업을 하는데 토취장을 좀 우리에게 승낙을 해 준다고 하면 나중에 보답은 넉넉히 섭섭지 않게 해 줄 테니 토취장을 쓰게 해 달라고 하니까 이 분이 하시는 얘기가 논 3,000평은 주어야 한다고 그래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3,000평이 아니라 나중에 3만평이 차례 갈는지, 다 줄려는지 모르는 것이지만 3,000평을 달라고 하니 참 뜨끔하데요. 그래 이제는 다른 사람을 보러 가서 또 물어 보았더니 김 씨가 그만큼 얘기했으니 그 사람도 3,000평이나 6,000평을 주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간척사업을 해서 이 사람들 다주면 그만이지 뭐가 남겠습니까?
그래 생각다 못해 나도 들은 소리는 있고 (이런 큰 공사를 하려고 하면 정부에 무슨 관계에다 얼마의 임대가격이라 해서 토취장을 불하 받는 식으로 한다고 그래요.) 그래서 기관에다 이것을 한 번 상신해서 이 토취장을 국가의 임대가격에 의해서 아주 사 가지고 떳떳하게 한번 해 보려고 이런 생각도 한번 먹었지요. 하도 밉쌀 맞아서......, 해결하려고 해도 안 되고…….
그래 이제는 도저히 안 되어서, 우리 큰댁을 찾아가 형님을 보고, 우리가 이것 좀 하려고 하는데 형님 산 좀 주셔야 갰네요. 하니까, “아 그것 얘기할 것 없네. 내산 다라도 떠가게”라고 그래요. 형님한테 쾌히 승낙을 받고 이제 토치장만 해결이 안 되어 6,000평을 가지고 가만히 생각하니 6,000평 값어치만 가지고 비용을 만들어서 그 비용만 가지면 아쉬운 소리 않고 할만도 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서 한편 쪽에서부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 72년도 정월초순에 주민들이 괭이며 여러 가지 연장, 지게를 지고 쭉 늘어서서 기공식을 가졌습니다. 종일 흙을 괭이로 파고 가래로 흙을 내고 산을 무너뜨리고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6,70명이 나와 가지고 한 것이, 밀물에 물이 들어오더니 또 썰물에는 쑥 나가고, 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니까 다 떠내려가 버리고 없어요.
더군다나 주위마을에는 아산만 간조라고 해서 간만의 차가 급격히 심합니다. 그래서 썰물이 내려갈 때는 똘 물이 내려가듯이 내려가고 사리 때는 쭉 내려갔다 올라오는 등, 우리 마을도 인천만의 간만의 조수 시간하고 똑같습니다.
그런데 80명이(더군다나 이 산이 연장이나 잘 받고 가래나 삽으로 그 흙을 마음대로 팔 수 있는 곳이 아니고, 마사여서 곡괭이로 찍으면 송곳 꼬챙이처럼 거기서만 팽팽 소리만 나고 연장을 잘 받지 않는 흙입니다.)
무슨 능률이 나야지요, 그러니 하루 하고, 이틀 하고, 뭐 들 물에 빨갛게 올라가고 썰물이 쑥 내려가니까 주민들이 정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공사를 하는데 우선 수문, 토축, 석축의 세 조로 갈랐지요. 그래 한편은 그런대로 토축을 하고 한편 쪽에서는 채석, 그러니까 철창을 가지고 돌을 쪼고 뜨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마선 두 개를 샀지요. 돈이 넉넉하지 않아 전마선 조그만 것, 2.5톤짜리 배 두 개를 사서 독실이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차돌 같은 것은 한번 메로 탁 쳐서 부서지면 서슬이 막 갑니다. 그것을 섣불리 대어 들었다가 한번 놓치는 날이면 살이 쭉쭉 째집니다. 그래서 그 누더기를 입고 장화를 신고 차림새가 뭐 말할 수가 없지요.
주민들은 그래도 흙짐을 지고 「리어카」로 흙을 나르고, 그 해는 어찌 그렇게 비바람이 또 후드려 엎는지 조금 해 놓으면 파도가 냅다 들이치면 그냥 이 제방을 훌훌 넘어 다니고, 파도가 넘어 다니니까 돌이 벌렁벌렁 해서 그냥 넘어지면 살이 빨갛게 베어지고 이 야단이에요.
그래 주민들도 많이 애를 썼지요. 그래 가지고 근근이 한 200여「미터」를 막고 나니, (여기 새마을지도자님들은 경험이 계시겠지만, 200「미터」산간에서 리어카를 쭉 밀고 가서 그 흙을 한번 쏟고 달려와 보시오. 헐헐해서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나 없나, 먹기를 똑똑히 먹나, 그것을 악을 써 가면서, 육지 같으면 몰라도 바람이 막 넘겨 치고 파도가 넘겨 치고 하는데도 그 애를 써가면서 한 200「미터」를 근근이 막은 것입니다) 또 문제점이 생겼는데, 영세민들은 하루 품 팔아서 하루 먹는데 아무리 동네일이 좋고 이런 일을 동네에서 하는 것은 좋지만 먹어야 살게 아니냐. 그러니 먹을 것을 좀 해결해 달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고민을 하는데 한편 바다를 막으니까 물목이 좁아져서 물이 쫙 들어왔다가 나가려고 하면 그 물 속도라는 것이 더 빨라져서 논둑 잘라지듯 그 둑이 잘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 주민들은 그때부터 의욕이 상실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도저히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월달에 시작을 했으니까 못자리 두엄 낼 때도 되었지요. 못자리 갈 때도 되었지요, 뭐 나무도 해야 하지요, 이래가지고 의욕이 완전히 상실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바다를 200「미터」막았다고 하지만 여러분들이 제가 여기서 하기 좋은 말이지 그야말로 여기까지 막아온 과정은 피와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200「미터」라면 거리가 얼마나 먼지 그 둑을 생각해 보세요. 6,7「미터」높이도 좀 생각을 해 보세요. 더구나 그것은 파도와 싸우는 것인데 그 당시에는 내 자신도 이것을 시작했던 것을 새삼스럽게 후회 안할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생각다 못해 이제는 출포리 주민들이 아무리 의욕이 왕성하고 저것을 막아 보겠다는 결심은 대단하지만 도저히 저러한 자연과는 싸울 수 없다, 우리 기계의 힘을 한번 빌리자, 해 가지고 개발위원회에서 상의된 결과 「도자」1대하고「덤프트럭」3대를 빌려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도자」가 좋고「덤프트럭」이 좋다고 하더라도 내 자신 농촌에서 사는 사람이 전문가들한테 듣지 않고 무엇 일반적인 상식이 없는 한 빌려 온다고 하더라도 어디에 무슨 기계가 있고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야 그것을 좀 들여오지요. 또한 돈을 가지고도 누구보고 이것 좀 해달라고 할 사람도 없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보고 물어보고 저 사람보고 물어봐서 간신히 「도자」를 어디에서 빌려올 수 있는 방법이 생기고, 「덤프트럭」을 뒷바퀴 하나짜리는 못쓰고 GMC 바퀴 두 개짜리, 빠지지 않는 것으로 써야 한다고 해서, 그러한 「덤프트럭」3대를 빌려서 우리 마을에 갖고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우리 마을은 이상하게도 남의 행정구역인 조금리라는 구역을 통과해야만 우리 마을입니다. 그런데 중간에 큰 고개가 있어요. 이 행정구역이 차라리 면도에 직접 연결되었으면 괜찮을 텐데 그렇지 않아 불편을 굉장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여튼 「츄레라」에 싣고 「덤프트럭」세 대를 가져 왔어요. 왔는데 「도자」를 내릴 데가 있어야지. 「츄레라」에서 풀 자리가 없어요. 길이 좁아서……. 그래 마을 입구에서 간신히 풀어서 이제는 현장까지 가야할 텐데 또 조금리 행정구역 사이에 출포리 고개가 있고 묘하게 되어 중간에 한 두어 길 되는 낭떠러지가 있습니다. 낭떠러지와 둑이 좁은 길로 빠듯이 되는데 「도자」가 길을 올라가서 길을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길이 있어야 갈 수 있지요. 나는「탱크」처럼, 웬만하면 「덤프트럭」도 뒤꽁무니를 줄줄 쫓아 들어가고, 그냥 웬만한 데는 가려니 생각했지요, 누가 그렇게 될 줄을 알았나요.…….
들어가려고 보니까 봄이라서 마늘이 푸릇푸릇 나 있습니다. 보리가 자라나고, 「도자」를 딱 대니까 그 토지 지주가 어째서 말도 않고 들어가려고 하느냐고, 마늘 한 접 없어진 만큼 되었는데 이것 보상을 열 접 값은 해 주어야 「도자」가 들어가지 이것 못 들어간다고 떼를 쓰고, 또 보리가 수북하게 자랐는데 보리 두서너 말쯤 들어가서 밟힌다고 하면 이 사람이 세 가마는 받으려고 해요. 그뿐이 아니에요. 면 도로에서 그곳까지 들어가려면 장장 2km를 가야 합니다. 2km를 현장까지 들어가려고 하면 가운데 종산이 있어요. 이 씨네 종산, 무슨 최 씨네 종산이 있는데, 간혹 시제산소 뒤로도 가게 되고 앞으로도 가게 되고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할아버지들이 그런 얘기를 듣고, 그곳을 어떻게 「도자」가 가려고 하느냐고, 거기 우리 몇 대조 시제산소인데 하면서, 그 「도자」육중한 놈이 가서 부룽부룽하고 움직이면 신체가 울려서 우리 몇 대손까지 망하게 되니 그것 당치 않는 소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리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돌아갈 수도 없는데……. 그러니 장비는 갖고 왔지만 한시바삐 현장에 가서 일을 해야만 될 텐데 그것 참 안되겠어요. 그래 사정사정하고 내가 직접 해서 안 될 사람은 이 사람도 넣어보고, 저 사람도 넣어보고, 별 수단을 다 해서 보상도 해준다 하고 사정을 했지요. 나 같았으면 이왕 「도자」가 들어가고 길도 없는 데니 길이 나 반듯하게 내놓고 들어가라면 오죽 좋겠어요. 나중에는 돈들이여 가면서 만들었습니다, 길을…….그런데 그런 얘기는 않고 오간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사정사정해 가지고 「도자」가 들어가는데 하필이면 「도자」가 높은데서 쏙 빠지네요. 이 「도자」라는 것이 발통을 맞춰야 힘을 쓰는 것이지 빠져서 배가 땅에 닿으면 맥을 못 춰요. 그러면 헛바퀴가 돌아가면서 그냥 막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도자」를 특별분해 해야 나오지 세상없어도 못 나온다는 것이에요. 그러니 이것도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특별분해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니까, 길도 없고 다 장비도 들여와야 하고, 여기서 자기네들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있는 것으로서 그저 각목, 가마니와 육중한 나무를 갖다가 삽으로 파고 들이 박고해서 간신히 이놈을 빼 놓았습니다.
그래서 현장에 중장비 「도자」한 대하고 「덤프트럭」이 올라간 것입니다. 내 자신도 그렇지만 이 도시근교에서는 오며 가며 「도자」나 「덤프트럭」을 구경하고 저게 「도자」다 하는 것이지만 사실상 우리 촌마을 출포리 우리 동네는 아주 낙후된 동네라서 그러한 골목까지, 산꼭대기까지, 「도자」한대하고 뒤에 「덤프트럭」이 올라오기는 생전 처음이라 이겁니다.
저런 데까지 장비가 어떻게 올라갈 것이냐 하는 것까지 구경거리에요. 그러니까 노인 할아버지하고 아주머니들, 뭐 애들 할 것 없이 남녀노소 여기 와서 구경하는 것입니다. 부룽부룽 올라가고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과 나도 옆에서 그것을 보면서 「주민들이 그제는 저렇게 침체되었던 마음에 의욕이 좀 나는 거구나」하고 마음 역시도 참 기뻤고, 하여간 이 일은 어떻게 되었던 지간에 장비가 현장까지 들어온 것만 해도 주민들하고 이렇게 같이 어울려서 그것을 맞아들이는 것이 무척 반갑데요.
그래서 그날 저녁부터 야간작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하루빨리 막아야지 날이 뜨거우면 물이 더 들어와서, 일을 더해야 합니다. 뜨겁기 전에 빨리 시작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녁부터 야간작업을 시켰지요. 그러니까 담벼락마다 깎아 놓고 「덤프트럭」을 대서 「도자」로 한번 밀면 그대로 나가게끔 해서 정리를 다 해놓고 그냥「덤프트럭」에 「도자」로 한번 싹 밀고 나가는데, 그냥 막 3분마다 현장으로 척척 들어가는 것이에요. 괭이로 한번 찍고 삽으로 한 삽 뜨고, 지게로, 「리어카」로 나르는 게 그게 일입니까? 그게........
그냥 3분마다 「덤프트럭」이 4.6톤씩 싣고 다닙니다. 3분마다 와서 현장에 와르르 붓고 가고, 와르르 붓고 가고, 왔다 갔다 하니 금방 막아요. 그 전에 지게로 하고 또 「리어카」로 할 때에도 길이 있었지만 이것을 확장시켜 간사지 둑이 있는 부근에 회전할 곳을 하나 만들어 놓고 가서 탁 붓고 하나 들어가고 또 하나 나오고, 하나 들어가고 또 하나 나오고 그러니까 척척 되어가는 것입니다. 웅 하면 들어가고, 웅 하면 들어가고…….
어쨌든 막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만, 그때는 돈 생각도 안 나고요, 뭐, 그저 나중에 2,000, 3,000 가더라도 막기만 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아요. 돈 들어가는 것 문제도 안 돼요.
이것을 수문 고래 한 6,70 「미터」남겨 놓고서 마무리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조금때 물이 작게 나가고 작게 들어 올적에 그때를 기해하기 위해서 일시에 그냥 산무더기만큼 무진장 갖다 붓는 것이지요. 물 조금 들어왔을 적에 막으려고…….
그 뒤 조금날이 와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출포리 주민들은 그때 완전히 단합이 되었으므로, 이것을 막는다니까 너도나도 (이제는 막아야만 살고 근사하게 되었으니까 이제는 막아지는 것이니까......) 모여서 그때는 왜말로 「시미끼리」라고 그러죠, 끝맺음을 해가는 거예요.
말하자면 그날 아침에는 바닷물이 출포리 앞바다까지 들어왔는데 이제는 바닷물이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출포리에 있어서는 어찌 역사적인 순간이 안 되겠습니까? 「바닷물이 안 들어오니까 이제는 된 거여…….」하며 무조건 삽질을 하고 일을 막 하는데 그날 저녁에 「도자」가 고장 났던 것입니다.
“아니 「도자」가 어디 고장 났어?”
“아이구 고압 「파이프」가 터졌는데,”
이것은 여기서 살 수도 없고 천안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 큰일이 났습니다. 하루빨리 막아야 할 텐데 하필이면 여태 있다가 끝마무리 할 적에 고압 「파이프」가 터지느냐 이거예요. 그래 가만히 생각하니까 안 되었어요. 그래서 천안 갔다 빨리 좀 오라고 해 가지고 「택시」를 불러다 대고서 이제는 막 갔다 오고, 막걸리 좀 먹고 오라고, 두툼하게 돈을 주고서 다녀오게 했어요.
그래서 빨리 갔다 왔는데, 이 「도자」라는 것이 그때 임대가격을 얼마를 주었느냐 하면 72년도에 시간당 4,500원 (금년도에는 돈 만원씩 가데요. 한 200시간 금년도에도 또 썼는데......)인데 그 운전수가 일 할 나름이에요. 임대가격 4,500원, 그것만 따먹고 연기만 풍풍 내고, 그대로 왔다 갔다 하고 일 안하면 그만이에요. 4,500원 안 줄 장사 있어요? 임대해서 한 시간에 4,500원 주기로 했는데.
연기만 내며 왔다 갔다 하고 시간되면 한 시간, 두 시간 재서 일했다하고 달라면 그만이지요.
그런데 천안을 갔다 와서 그날 저녁부터 야간작업을 하는데 「도자」가 부서질 정도라 이거에요. 부릉부릉하더니 그냥 흙이 나가는데 고장 나기 전에는 가만히 생각하니까 속은 셈이에요. 무진장 나간다. 이겁니다…….내가 그런 줄만 미리 알았더라면 팁이라도 줘서 무지 부려 먹었으면 이문이 가는데 그것을 알았느냐 이겁니다. 나도 많이 배웠어요.
이제는 「도자」소리만 들어도 저 「도자」는 일하는 「도자」다, 저거는 시간만 보내는 「도자」다, 하는 것을 대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막 부셔대는데 놀은 기간의 흙을 배 이상 끌어내더라. 이것이에요.
2단 작업 넣어서 다다다 하는데…….
이렇게 해서 물이 들어오는 곳을 모두 막기는 하였는데 이것이 웬일인지 가운데 제방 한가운데가 쫙 부서져요, 제방이…….
이 제방이 쪽 부서지면서 어디로 내려가는지 없어지고 다시 이놈을 보완하기 위해서 집중적으로 갖다 붓게 되어서, (그러니까 이 한 가운데가 마무리 작업하는 데가 되는 거예요.) 가장자리 것을 채우면 금방 없어지고, 다시 채우면 또 없어진다. 이것이에요.
이것 이상해요. 그래서 물이 나갔을 때 보았더니 지반이 물러서 진흙 같은데 갖다 넣으니까, 이 제방이 힘을 못 잡는 것입니다. 이리저리 내 둘리는 것이지요. 진흙에다가 흙 갖다 놓아 봐요? 어디로 갈지 모르지, 그러니 이것이 큰일 났어요. 그렇게 무진장 갖다 부었어도 이것이 채워지지 않고 무진장 깔아 내려지니 말이에요. 지진이 일어나서 땅이 터지는 것 같이 되어, 왜말로 이것을 「진까이」라고 하더군요. 「진까이」가 막 되네요.
그러니 참 큰일 났어요. 이제 물은 들어오려고 그러지, 암만 보완해도 안 되지, 내가 그것을 미리 알았어야 될 일인데 내가 새마을지도자 전공과목이 토목기술자요, 뭐요, 막으면 되는 줄만 알고 그랬지, 그러게 참 무식한 사람은 할 수 없어요.
그것을 미리 알았다면 틀을 짜고, 돌을 넣고 다 해서 완전히 해 나갔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런 줄 모르고 시작을 해서 그렇게 되었어요.
어쨌건 출포리 주민들이 갖은 고생을 다해서 피와 땀으로 그것을 견디어 내었어요. 그것을 하고 나니까 내 마음은 어디에 어떻게 비할 수 없고 주민들이 땅 한 평이 없어서 서로 나누어 갖고 그 숙원사업으로 여겼던 것을 막은 것이 어떻게 감개무량한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전에는 안 된다고 했던 사람들도 그때서야 이장, 지도자, 개발위원들 참 혼났다고 치하를 하더군요. 제 속으로는 밉쌀 맞아 죽겠지요. 그러나 사람은 그게 아니고 하여간 성원해 준 덕으로 참 이렇게 큰일을 했다고 말하였습니다.
4. 환경개선사업
남들은 맨 먼저 환경개선사업인데 우리는 거꾸로 간척사업을 했고, 이 「도쟈」 를 들여올 때 고충을 겪어 와서 이제는 환경개선사업은 조금 못 하더라도 길은 좀 내야 되겠다고 생각했지요. 큰일은 해 놓았고…….
「도자」를 써 보니까 확실히 싸요, 그때 품값이 500원인가 되었었는데 500원이면 사람 열이면 5,000원입니다. 그러나 4,500원 「도자」한 시간이라면 사람 열 사람이 하는 것과 「도자」한 시간 일하는 것과 어떤 것이 일을 많이 하느냐 하는 것이 비교됩니다. 「도자」가 몇 배합니다. 훨씬 싸요.
그것을 내가 확실히 체험했기에, 농번기는 닥쳐오지요, 이제는 가래로 대고 삽으로 대고 네 땅이 많이 들어간다. 내 땅이 많이 들어간다. 하면 골치 아프고 싸움만 하고 또 이런 계제가 아니면 할 수도 없을 것 같아서 이장하고 개발위원하고 상의한 결과 이제는 길이 없는 아쉬움을 메우고 새마을운동을 하는데 우선 농로부터 내야 한다고 의견일치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타 행정구역은 건드릴 것도 없고 우리 안길부터 만들자고 하고 여기다 「도자」를 놓고 길을 막 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 이장은 「도자」에 올라타고 나는 설계된 대로 1반, 2반, 3반, 4반, 순서대로 반별로 하게 되었어요.
대 종로는 가운데로 쫙 내고 (그 운전수가 조금 마음이 약한 사람입니다. 지주가 뭐라고 하면 그냥 가지도 못할 것 같아 이장을 올려 보냈지요, 「도자」위로…….나는 앞에 있고 개발위원들은 구경하고, 토지문제는 미리 합의를 보았지요.) 그래 놓고서 밀기 시작하는데 그때 「도자」가 T-7 미제 구식 「윈치」를 앞에 장치하고 올렸다가 내렸다가 하는 것입니다. 삽날이 약 4m 정도 됩니다.
지금은 농로 같은 것 내는데도 편치만 그때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래 이장 올라탔지, 나 설계대로 하지, 이제 “오 라이” “오 라이”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4m로 고스란히 나가는 것입니다. “오 라이” “오 라이” 하면 그저 이장은 막 운전수보고 가라고 하고 붕붕하면 고추밭이고, 마늘밭이고, 보리밭이고, 그냥 뒤엎어지는 거지요. 4m 도로가 그대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뭣이고, 미루나무고, 있던 것도 그냥 막 엉망진창이 되고 마는 거지요. 그래서 주민들은 거기서 우두커니 서서 쳐다보면서 뭐라고 하고 싶어도 (그 금쪽 같이 여기는 문전옥답 같은 것도 그것 조금이라도 덜 들어가게 하려고 안타까운 심정은 다 마찬가지일 테지만),
뭐라고 얘기하면 그 육중한 「도자」가 한 바퀴만 슬쩍 돌아보면 그것은 결단 나니까, 얘기를 못해요. 그래서 이장이 올라타고, “오 라이” “오 라이”하니까 붕붕 붕붕해서 고스란히 길을 깨끗이 내는 거지요. 동네가 완전히 뒤집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논 마른자리 한 70평짜리가 있는데 그 한 가운데로 만부득이하게 꼭 나가게 되었는데 논주인 할아버지가 논에서 그냥 막 뒹굴면서, 「동네 젊은 청년 몇몇 놈들이 농지조성 조금 해 놓았다고, 이놈들이 귀중한 논ㆍ밭 이렇게 다 뒤집어 놔서 못살게 한다.」고 거기서 걱정해서, 「도자」앞에서 꼼짝을 못하게 하네요. 그러니 어떻게 해요.
그래 이장도 내려오고 암만 설득하고 뜯어말려야 되어야지요. 그래서 그분이 하도 억울하니까 논 값을 2,000원씩을 달라고 그래요. 그래서 나는 “제가 2,000원씩 드리겠습니다. 70평이면 2X7=14, 14만원 아닙니까, 제가 드리겠습니다, 하나 내 얘기를 한번 듣고서 이 돈을 받으세요. (우리 동네에 젊은 한 사람이 가정불화로 농약을 마시고 죽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농약 마신 것을 발견해서 등에 업고 병원으로 가는 도중 산기슭을 가다가 죽었어요. 그래서 실례를 들었지요). 우리 마을에 그 젊은 사람 아무개가 농약마신 것을 발견해서 병원으로 수송하는 도중에 그 애가 죽지 않았습니까? 우리 마을에 이 길이 있었다고 하면 전화 한 통화로, 「택시」라도 와서 문전에 탁 대고 급히 가서 치료를 했다면 살았을 것이라고 동네 사람들이 다 얘기를 하는데, 할아버지가 지금 2,000원 달라고 하는 이 땅값이 완전히 길로 놓아진다고 하면 2,000원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그러한 고귀한 땅값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길만 나면 몇 천 원짜리로 값이 오르지요. 그것을 모르고 2,000원을 달라고 하십니까? 할아버지, 2,000원 드릴까요?” 그러니까 잠잠해요. 그러면서도 또 안 된다고 내라는 거예요. 사실 돈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그 할아버지가 그대로 「도자」앞에 드러누웠는데 노인 할아버지들도 많이 와서 구경하고 그래요.
그러나 거기서 그것을 중단하면 낸 길은 다 소용없게 된 그 지점이에요. 그래서 이건 강행을 안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이장 할 수 없네. 이것을 내지 않으면 여태 낸 길이 다 무효가 되니 아무리 무엇 한데도 이 길은 내야 해.” 하고 이장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있던 동네사람들은 그 길을 내자고도 못하고 초창기니까 벙벙해요. 그래 올라타고 운전사에게 그랬지요, 「도자」앞에 바짝 드러누운 노인한테 그냥 「후까시」좀 되게 하라고. 그랬더니 따따따따, 「도자」「후까시 엔진」돌리는 소리가 되게 큽니다, 하니까 그 앞에 드러누웠던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나는 것이에요. 안 일어날 장사 있나요? 그러면서 진흙 판에 막 뒹굴면서 흙을 훌훌 털어 가면서 입에 거품이 부쩍부쩍 나서 이놈의 새끼들이 이제 노인네까지 죽이려고 그런다고 하면서 막 걱정을 하세요.
그러나 강행을 안 할 수가 없다 이것이에요. 그래서 거기서 내가 그랬지요. “만약 우리 젊은 사람들이 나중에 길을 내서 결과가 나쁘면 완전히 보상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할아버지라도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했는데, 그 일이 있은 며칠 후에 그 할아버지가 사과를 해요, 젊은 사람들 일하는데 잘못됐다고 하시면서…….
그 후에 그분이 새마을사업에 젊은 사람 못지않게 앞장을 서고, 인근 부락에서 길을 낸다. 보낸다. 이런 시비가 있으면 (그 「도자」앞에서 드러누웠던 노인이름이 이 갑대 씨입니다) 저 출포리 이 갑대씨 보고 길을 내나 안 내나 물어보고 와서 하라고 그랬습니다, 그런 실례가 있었고 젊은 사람들의 멱살을 끄집어 당긴 얘기는 시간 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
5. 둑이 터지다.
이렇게 큰 간척사업을 했지요, 길을 온통 뒤집어 놓았지요, 농번기는 닥쳐왔지요, 이제는 일손이 무진장 바빠졌습니다.
하여튼 이러한 축제의 기분에 있는데, 아, 둑이 하루는 터졌다는 것입니다. 간사지가 말이에요. 그러니 이게 하늘도 무심하지요. 그렇게 출포리 주민들이 한 줌 두 줌 있는 돈 없는 돈 푼푼이 모은 돈을 투자해서 이것을 막았는데, 그것이 터지다니 현실인지, 꿈인지, 그냥 아비규환이 되고 말았습니다.
내가 10년 전에, 서른 살 때, 해변 가까이 분가를 해서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는데, 솔밭이 그 옆에 있습니다.
그래 솔밭에서 내려다보니까, 아니나 다를까 밤물이 들어와서 뻘겋게 터져 들어오는 것이에요. 그 때가 사리 때니까, 물이 좀 많이 들어 왔겠습니까? 꽉 찼지요. 그냥 정신이 멍하니 뭐 어떻게 힘을 잡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 현장에 달려가 보았지요. 그곳에 달려가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지반이 무른 관계로 수압에 못 이겨 터진 것입니다. 썰물에 막 물이 내려가는데 철썩 철썩 그냥 무너져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래 주민들은 여기서 울고 그냥 통곡을 하고 몸부림을 치고, 없는 돈을 푼푼이 갖다 애써서 그렇게 만든 땅인데, 이것이 터질 수가 있느냐 이것이에요.
그러니 어떻게 해요? 그래 무슨 일이든지 일을 한다고 하면 시련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특히 이 간척사업이라는 것은 맨 처음에 시작한 사람이 망하면, 두 번째 사람이 하고, 두 번째가 망하면 세 번째 사람들이 헐값으로 사서, 결국 시작한 사람은 결딴나고 농사짓는 사람은 따로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돈은 다 떨어졌고 바닥은 났지요. 둑은 터졌지요. 기웃거리는 사람 있어요? 그것을 팔라고, 헐값으로 팔라고 그러니, 내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 같으면 되지만 헐값으로 팔고 투자하고 노력들인 것을 어떻게 하느냐 이겁니다. 그래 도저히 팔수는 없고 「어쨌건 출포리 주민들이 한번 다시 속아 봐야지 안 된다. 그러니 한번 재투자를 하자」의논을 하고 있는 집, 그러니까 누구 고모부 네가 넉넉히 사니까 거기 가서 돈 좀 얻어오고, 여기 가서 돈 좀 얻어오고 하는 등 성원을 해서 제2차 공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마무리작업이 그대로 되었지만 이제는 한번 패인 곳은 소류지처럼 막 패였습니다. 확 패여서 공사는 난공사에요. 그런대로 한번 터진 그 경험을 토대로 해서 다시 하려는데 이제 돌이 있어야 말이지요. 돌을 무진장 갖다 넣어야 할 텐데…….경찰서에 가서 채석허가를 안 낼 수가 없었어요.
채석허가를 내고 화약까지 집어넣고서 이제는 발파를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매질을 하고 남포구멍을 조금씩 뚫었지만 그것도 신통치 않아 「콤푸레샤」로 뚫어야 되요. 「콤푸레샤」를 그것도 구입하느라고 애썼어요, 똑똑 부러지는 나무는 안 돼요, 눌러도 휘어지는 나무라야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돌을 실어다가 이것을 쭉 박아야 합니다. 그런데 돌을 싣고 오다가 썰물에 말뚝이 딱 걸려서 배 밑에 펑크가 나고 사람이 막 떠밀려 가는 등 고생 숱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근근이 2차 공사를 완료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는데 그 첫해는 새마을심사가 그렇게 심했는지 몰라요. 뭐 심사다, 감사다, 뭐다 뭐다 해서 지도자 이장들은 집에 붙어 있을 사이가 없었습니다.
한편 우리는 환경개선을 일체 못하고 간척사업에 매달려서 일을 하였지만 어디서 일전 한 푼 우리 마을에 협조나 무슨 보조나 그것은 일체 없었습니다. 우리 자력으로 한 것이지 누구한테 사정이나 하고, 뭐 그런 것은 조금도 없었어요.
그래서 새마을 심사를 한다고 해요. 도에서 나왔대요.
간척지를 구경하고 우리 출포리 자체적으로 이것을 했다고 하니까 그분도 참 좋아하시데요. 사무관급이신데 (그분이 군대 가셨다고 하세요.) 그분이 나중에 심사를 하시고 돈 5,000원을 주고 가셨어요, 5,000원을 주고 가면서 참 혼들 났다고, (그때 한참 돈 없어서 아쉬웠는데 그것을 보태서 썼습니다.)하면서 길은 어디로 냈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우리는 환경개선사업은 조금도 못했다고 하니까 우선 길이라도 보자고 하기에 「오토바이」를 타고 저리 가고, 이리 가고, 이렇게 해서 냈다고 했더니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마을 안길이 7km입니다.” 하며 우리들에게 친절히 알려 주셨습니다. 1개리에 대 종로가 3.5km, 모두 합해서 10.5km라는 길을 (그러니까 25리가 넘습니다.) 놓았는데 이렇게 말씀드리면 우리 동네가 얼마만큼 산 속에서 사는 동네인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그러니 길을 아무리 반듯하게 내려고 해도 사람은 사람대로 더 들고 힘은 힘대로 들이고 해서, 저것이 어째서 10.5km나 되냐고 하니까 (「오토바이」타고 다니는 것이 아마 「마일」수가 나오는 모양이에요.) 마일로 재어 보았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출포리 주민은 완전히 단합이 되었으니 정신적으로 깨었고 저런 큰 사업을 했기 때문에 자립부락으로 선정을 안 할 수 없다.」그래서 그 구석에서 우리 부락이 자립부락으로 선정을 받았습니다.
6. 죽음의 유혹을 물리치다.
그래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그러던 차에 (사람이 안 되려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기 마련입니다.) 이게 또 터진 것입니다, 둑이……. 터졌다고 하기에 참 이상하게 생각되어, 절대 터질 리가 없는데 그렇게 보완을 했는데 이것이 터질 리가 없다고 안 믿었습니다. 새벽 물에 터졌는데, 나는 터지는 줄도 모르고 잤지요, 또 빨갛게 물이 보이는 거예요. 한번 속기는 보통이라고 하지만, 두 번까지 이러니 사람이 할 일인지, 이것이 내 팔자소관인지 어쩐지 기가 막히데요.
내려다보니 빨개요, 이제는 가볼 힘도 없고 돈은 바닥날 대로 다 바닥나서 낮에는 가보지를 못하고 저녁에 갔는데, 그때 보름사리였으며 75년 5월 중순께쯤 되었어요, 가보니까 환하게 탁 터졌는데 다른 곳이 터진 것이 아니고 토취장 바로 옆이 6,70 「미터」확 나갔는데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에요.
그것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정신이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 주저앉고 말았어요. 가 볼 수도 없고, 그냥 주저앉아서, 아 이것 내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가 보려고 하니 도저히 현장까지 가지를 못하고 도로 오려고 생각을 하니까 걸음이 떨어져야 말이지요, 정신을 잃어가지고…….
다시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을 하니 돈은 다 떨어졌어요. 한심하였습니다. 내가 사는 것이 넉넉지 않고 그저 출포리 주민들이 합심해서 투자한 것인데, 한번 터졌을 때에도 임원들 개중에는 들인 돈이나 무엇하고 그만두자고 하는 것을 또 한 것인데 말입니다. 사람들이 나보고 돈 달라고 안할 테니까, 그것을 또 뭐 하려고 그러느냐면서 한번 실패했으니 헐값으로 팔고 밑천이라도 조금 건지자고 하는 것을 억지를 쓰고 있는데 또 터져 버렸으니…….
그러니까 주위 사람들은 뭐라고 하냐 하면, 이제 출포리 망한다. 이제 출포리 망했지, 하면서 비난이 오기 시작합니다.
인근부락에서는 말할 수가 없었어요. 지도자 때문에 저렇다, 이장 때문에 저렇다, 이제는 망한다, 과거에 이 갯고랑에 중이 건너가다가 빠져죽은 갯고랑이라서 중의 갯고랑이라고 하는데 제까짓 놈들이 뭐라고 거기를 막으려고 하느냐, 한번 터졌으면 그만두지 뭐 또 해서 그러느냐, 등등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좀 지원을 할 만큼 해 준 사람들은 동네에서 슬슬 피하고, 또 1차 터졌을 때 지원해 주려고 망설였던 사람은 또 터졌으니까 얼마나 좋겠어요? 투자했더라면 절단 났을 것인데……. 하면서 그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이에요.
내가 어디 가면 돈 달라고 할까봐 그 사람들은 내가 지나가면 그냥 저 쪽으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이렇게 천해 질 수가 없었어요.
그래 나도 이제는 감당을 못하겠고 그것을 시작했던 내 자신이 후회도 되었지만 그것을 했다고 해서 누구보고 탓할 수도 없고 누구를 원망도 못한다. 이것이에요.
「나는 이제 오로지 저 제방과 생사 간에 결판을 내야지 내지 못하면 도저히 저 채무 변제며, 여러 가지 것을 내가 혼자 감당을 못한다.」그런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의 선택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고 드디어 죽음의 길을 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길을 결정하고 나니 나의 마음은 그저 즐겁기만 하고 인간 40평생 걸어온 길이 너무나 허무하고 즐거웠던 일이며, 그 고생스러웠던 일이며, 40살 사는 것이 요것뿐인가 싶고 「나는 이제 어떠한 딴 세상으로 가는구나」하고 자꾸만 허무하게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그래 달밤에 현장에는 가보질 못하고 집에 오려고 마지막으로 집으로 오는 길을 걸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집으로 걸어와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니 내가 걷는 길도 이것이 마지막이고 이 간사지 쳐다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구나. 이렇게 생각할 때, 그저 세상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전부 내 아래에 있고 조그만 것 같이 생각이 들더군요.
집에 들어가서 방문을 씩 열고 들어가니까, (내가 2남 1녀입니다.) 안식구가 부스스 일어나면서, 당신 미쳤어도 유만부동이지 이제는 어떻게 하냐고 합니다. 그간에 안식구와 나와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나무가 있나, 농사철은 되었는데 못자리를 했나, 집구석이 말이겠습니까?
욕은 욕대로 빗발치듯이 먹지, 동네길 내네, 뭐네, 해서 무수히 욕을 먹은 것을 내가 지금 말씀을 세부적으로 못 드리지만 그날따라 아내가 또 그런 얘기를 또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동안 내가 반박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많이 했지만, 이제는 안식구가 그렇게 얘기하는 것도 어떻게 고맙고, 얼마나 불쌍한지를 몰라요. 그렇게 나하고 10여 년간 사는 동안에 고생을 시킨 생각을 하니까 내 면목이 안서고, 「네가 이렇게 아무리 얘기하는 것도 이제는 마지막이야. 너는 그것을 모르는 게 철이 없구나. 내가 지금 무슨 마음을 먹고서 지금 이 자리에 왔는지 알겠느냐」는 생각을 하다가 서로가 조금 언성이 높았는데 애들이 부스스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니, 논 700평 가지고 살림을 났는데, 그 애 들이 어디 갔다 온 줄 알고, 과자 뭐 이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런 말을 들으며 어린것들을 바라보니 기막히데요. 그것을 뭐라고 표현을 못하겠어요. 그리고는 내가 잠깐 생각을 했지요. 「내가 오늘 저녁에 저기 있는 농약이라도 그냥 꿀꺽 한번 삼키면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현실 도피하는 것이지. 그러나 나 혼자 편해지려고, 죽으면 분명히 저 애들은 철없이 내일 아침에 아버지 찾으면서 울 텐데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그것을 생각하니 동네사람들이 상여 가져 오는 것을 생각을 하고 별 생각이 다 나는 거지요. 내일 아침에 상여를 가져와 저 애들은 울고, 마당 한구석에서 그 애들 보고 얘기하는 사람이 또 있을 것이다 이것이에요.
저애 「아비가 왜 죽었느냐?」그렇게 물으면 「저애 아비는 새마을사업인가 무엇인가 하다가 동네 돈 다 쓸어 박고 망쳐 놓고, 제가 감당 못하니까 저 갈 데로 갔어.」라고 말할 것이 틀림없을 것이에요. 그러니 나는 죽어서 간다고 그러지만 그 애들은 그 동네에서 살지를 못해요. 천해서 살지 못한다. 이것이에요. 이사를 가던지 어디를 가야지.
그 생각을 하니까 그냥 번개같이 정신이 번쩍 들고 내가 아무리 잘못하였어도 남에게 도둑질을 한 것은 아니다. 내가 할 때까지 했는데 저렇게 안 되는 것이지 내가 나쁜 것은 없다, 내가 가난하게 살더라도 남의 자식처럼 내가 충분히 가르치지 못할망정 아비가 어떻다, 네 아버지가 간척지 하다가 이렇게 되었다, 새마을지도자 하다가 그렇게 되었다, 하는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고대 죽더라도 한번만 더 속아야겠다, 내가 이렇게 마음먹어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 정신을 다시 차렸던 것이지요. 그런데 자꾸만 죽는 데로 신경이 쓰이는 것이에요.
그러나 자식가진 사람은 도리 없는 모양이에요. 거기서 그 실오라기 같은 희망이 한 가지 언뜻 떠올랐지요. 그래서 이장 댁을 찾아 간 것이지요, 새벽 참에…….
남부끄러워서 밝기 전에 가는 거예요. 그랬더니 이장도 골치를 싸매고, 그 사람도 역시 뭐 누가 와서 얘기하는 것도 들리지도 않고, 꼭 초상집 같아요. 그 근방에 개도 안와요. 그렇게 막아서 성원했던 사람들이 발짝 하나 안 디밀고…….
가서 머리를 싸고 드러누운 이장을 보고 「자네 마음 튼튼히 먹어. 나하고 오늘 군청에 가면 해결될 게 있어. 내 지금까지 기관에 가면서 전번 터졌을 때에도 이것만큼은 어디 가서 일전 한 푼 사정 얘기한 것도 없었는데, 내가 지도자니까 새마을과에 사정하는 수밖에 없네. 그러니 내일 바람이라도 쐴 겸 하여간 군청에 한 번 가세.」
말해서 그 분을 간신히 달래고 서로를 위로하면서, 날이 밝기 전에 소재지에 가서 「버스」를 타야 할 텐데 남들이 또 손가락질 할 것 같아서, 저 사람들 큰일 났다고 할 것 같아서, 사람 없는 곳으로 둘러 외딴 데로 가서 「버스」를 세워 놓고 올라탔어요.
군청에 갔더니 그 현장 일은 잘 되냐고, 그러니까 터진 줄을 모르고 그러는 거지요. 한번 터져서 복구사업만 잘되는 줄 알고 그러니 감히 어떻게 얘기를 할 수가 있어야지요, 미안해서……. 그래서 그런 게 아니고 사실 이것이 터져서 이렇게 바닥나고 이러한 지경에 있으니 우리를 좀 협조를 해 주어야 되겠습니다. 하고 말하니까 무슨 얘기냐고 그래요.
어쨌건 우리 동네는 바닥이 나고 그래서 돈 일전 한 푼 어디 가서 사정할 수도 없고 동네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하는 것도 잘못이 아니고 그러니 하여간 도에 중장비를 의뢰해 가지고 임대료를 외상으로 하고 비용만큼은 우리가 쓸 테니 도에 중장비를 한번만 의뢰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미리 와서 말하고 싶었지만, 여태까지 하다 안 되어서 온 것이니까 이것만큼은 봐 줄 수 있지 않느냐고 그랬더니, 알겠다고 하면서 비상전화를 막 넣고, 도에 연락을 해 보니까 도에서 연락오기를 도에는 중장비가 없고 군부대 것을 지원을 받아야 될 텐데, 서류절차상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간사지라는 것은 물이 한번 들어왔다가 나가면 이것은 자꾸만 유실이 되고 자꾸만 패이고 흘러내리고 하니까 하려면 빨리 오고 그렇지 않으면 버리든지 말든지 해야지, 그래서 이러한 사정이 있기 때문에 빨리 해야 될 텐데, 최대의 협조를 좀 해달라고, 그리고서 허행하고 오는 길에 이장 친구를 또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게 터졌다고 그런 얘기를 했더니, 때마침 인접해 있는 면에 농업진흥공사에서 경지정리 하느라고 ‘코마스 60’ 그것이 나와서 임대기간이 끝나 들어갈 시기가 되었으니 거기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해 보라고 하기에 거기를 이장은 쫓아가고, 나는 현장에 좀 한번 가서 보려고 현장에 갔더니 연락오기를 경찰서에서 좀 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왜 그러느냐 하고, 둑이 터져서 자금이 달리니까 돈이나 좀 줄려나. 하고, 그 다음날 경찰서에 갔어요. 경찰서에 갔더니,「시멘트」330포대 중에서 몇 포대 떼어 먹었느냐고 하고, 밤나무 묘목에 12원씩 받을 때 (묘판용 부라에스, 그것 그때 얼만가 해 가지고 했는데) 그것 몇 본이나 팔아서 먹었느냐고 이런 얘기를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이장하고 또 같이 갔는데, (경찰서 수사계 처음 갔습니다. 어떻게 생긴 지도 몰랐습니다.) 사실상 동냥은 못줄망정 동정도 안 가는지 그것을 떼어 먹었다고 뭐라고 하더군요.
솔직히 부라에스 값을 떼어 먹었어요. 큰 공사하는데, 그까짓 부라에스 값이 얼마 간다고……. (변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얼마가 되겠습니까)
그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혀서 서장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내가 사실상 열 가지 중에서 신이 아닌 이상 잘못된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잘못된 것도 있고, 그 분도 잘못된 것이 있을 것이니 흑백을 분명히 가려서 내가 잘못했으면 내가 징역을 가야하고, 그분이 잘못했으면 그분 잡아다가 징역을 보내야 됩니다.」라고 말하고 나왔더니, 며칠 있다가 오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며칠 있다가 또 갔더니 내사를 다 해 본 모양이지요. 안일무사하게 일 안 하는 동네는 이런 일도 생기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일하는 동네는 이런 것이 끼게 마련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서 일이나 착실히 빨리 보거라 합디다, 그것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현장에 나가 보아야지, 경찰서 왔다 갔다 해야지, 떼먹었다고 조서 작성하고, 이것이 할 짓입니까? 그래 가지고 그 투서관계가 이제는 출포리 부락에 확 퍼져 버리고…….그 투서얘기 하려면 또 한이 없어요.
그런 끝에 「도자」가 들어오게 되었어요. 「도자」가 또 오는 거예요. 「도자」가 오는데 그때는 주민들도 「도자」가 들어오는지 마는지 쳐다보지도 않아요. 그때 처음에 들어올 때에는 「도자」가 그렇게 반갑고, 좋고, 기분 나서 노래도 했는데, 아주 이제는 출포리는 「도자」가 있는 동네구나, 이렇게 습관이 들어서…….
누구보고 사정 이야기를 할 수도 없어서 운전사에게 하여간 일이나 착하게 해 달라고 진지하게 얘기했지요. 우리가 사람은 나쁜 사람들 아니라고, 원체 하다 하다 안 되어서 이러니 이것 해 주기만 하면 보답은 나중에 톡톡히 사례를 해 줄 테니 잘 좀 봐달라고 사정하였습니다.
동네사람보고 나오라고 할 염치가 있나 뭐가 있습니까? 그래서 오직 뜻이 있는 사람은 하여간 모도 심지 말고 집도 남겨 두고, 스스로 따라오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장 그렇지, 반장 그렇지, 나 그렇지 하니까 이 행정이 똑똑하겠습니까? 비료를 타다 주어야지, 뭐 잡종세금, 뭐 심사 서류 등등 이 행정이라는 것이 마비가 되는 것이지요.
그때는 또 절미운동을, 강력히 도에서 지사님이 지시해서 절미운동, 마을금고, 뭐 이래 가지고 그저 막 내리 누르니 하는 장사가 있어야지요. 그러니 그 분담직원이 말단직 공무원이지만 호호방문 내 집처럼 부엌에 드나들었어요. 절미통 갖다 쏟아주고, 아주머니에게 격려의 말을 해서 부락 일에 참여를 하고 힘 좀 도와주라고 이렇게 해서, 그 분담직원이 애를 많이 썼어요.
그러는 동안에 근근이 해서 이것도 마무리작업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민들도 하도 염치가 없고 동정이 안갈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한번 터져, 두 번 터져, 이것 또 안 터진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그래서 수방대를 조직해서 수시로 물구멍이 나지나 않았나. 이제는 돌아다니면서 감시를 하는 거지요.
그렇게 해서 작년 그러께는 현미 200가마 쌀을 생산했고, 작년도에는 현미 500가마를 생산했습니다.
7. 인간 「불도자」
나는 이 일을 하면서 생각하는 것이 무척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안 된다고 했던 것도 (사실상 부락에서도 안 된다고 불가능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도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어는 한 곳에 투철한 정신과 신념을 집중하면 자연을 개발할 수 있는 그 위력이 나오지 않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정신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가 너무 나지 않느냐 하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내가 아무리 잘한다고 해서 나 혼자 이것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간척공사를 하고 보니까 농협에서는 개답할 당시인데 출포리 동네가 과연 쓸 만한 동네라고 하면서 개답비로 영농자금 270만원을 저리자금으로 융자를 해 주었지요. 또 어협에서는 새 어촌 건설구라고 지정해서 250만원의 굴양식사업을 더 하라고 하여 굴 양식장 사업을 또 확장했지요. 이러고 보니까 마을사람들이 또 전기공사를 하자고 해요.
이런 일을 해 놓고, 여러 가지 일을 해 보니 동네에서도 내가 생각하는 일은 하여간 못생겼거나 잘 생겼거나 사람들이 좀 어렵게 보는 것 같아요. 하여간에 내가 무슨 일을 한다고 하면 호응을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전기공사를 해야 되겠다고 해서 한전에 갔습니다. 한전에서 나와서 우리 동네를 보더니 측량도 않고 그냥 가려고 해요. 이런 동네에 무슨 전기사업을 하려고 하냐고, 워낙 산재되어 있으니까……. 돌아가서 나중에 우리에게 통보해 주겠다고 했으나 결국 5반만 못하고 1, 2, 3, 4반 순서대로 곳곳에 전기를 가설했는데 (그때 48호입니다.) 48호 전기공사를 하는데 고압, 저압 해서 전주가 109개가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한 집에 두 개꼴이 훨씬 넘은 거예요. 총 공사비가 630여만 원이에요.
그래서 300만원 융자를 받느라고 무척 노력을 했지요. 간신히 300만원 융자를 받아서 전기세를 물고 있지만, 지금 100만원으로 줄어서 마음대로 쓸 수 있어요. 「도란스」도 놓고 형광등은 완전히 공동구입을 해서 환하게 쓰고, 전기공사를 완전히 했습니다.
이렇게 하고 보니까 회관이 또 아쉽대요. 회관 건평 20평짜리 하나 짓는데 110여만 원 들어요. 그러나 주민들과 어촌계에서 산출되는 것으로 기금을 조성하고 어떻게 찬조를 받아서 회관을 하나 건립해 놓았지요.
내가 이런 일을 하면서, 마을기금이 일전 한 푼 없었다는 것이 무척 아쉬움이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협업농장 (이것은 출포리 공동재산입니다.) 5,000평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5,000평을 만든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그 부락이 발전하려면 기금이 있어야 발전하지 기금이 없으면 발전을 절대로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동네 기금을 만들어 놓으면 월말에 이장에게 얼마, 잡종세금 얼마, 비용이 얼마, 해 가지고 결산 딱 해 주고서, 거두어 드릴 것도 없고 애쓸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기서 크는 것은 그대로 커지고, 그래서 5,000평을 완전히 조성해 놓았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이 부락발전에 아주 근간이 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또한 연말에 가서 결산할 적에 금리관계가 있어야 부락에 대한 공동체의식이 가고 단합이 된다 이거에요. “ 돈 어떻게 썼어, 어떻게 했어.” 하면서 참여의식이 높아지고, 그러기 위해서 5,000평을 조성해 놓았던 것입니다.
이러고 보니까 공동취사도 하게 되고 군대식이에요. 우리 동네는 모심을 적에 공동취사를 해서 시간이 되면 회관 한가운데서 밥을 해서 평야지 같으면 한군데서 다 먹지만 1반, 2반, 3반, 4반, 산재되어 있기 때문에 군대 밥 하는 것같이 공동취사만 완전히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하고 보니 또 아쉬움이 남아, 이제 「버스」를 한번 넣어야 되겠다고 해서 4월 8일에 「버스」개통을 보기 위해서 지난겨울에 아주 7m로 도로를 확장해서 「버스」도 들어옵니다. 이 출포리를 통해서 버스가 들어가고 나오는 것입니다.
마을사람들이 도로를 내느라고 등이 벗겨지게 일했습니다. 오히려 나와서 일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였습니다. 이래서 우리 출포리 동네는 새마을운동을 통해서 완전히 변혁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그동안 고생해 온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지만, 지금은 농번기가 되어서 이 간사지를 갈고 있습니다. 초가을에 소슬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그때는 낮에 뜨겁지요.) 저녁 먹고라도 간사지 여기를 가봅니다.
「런닝」바람으로 혼자서 바람 쐬러 가느라고 가는 것이지요. 그러면 물이 하나 차 있습니다. 그렇게 사납던 물결도 이제는 잔잔합니다. 서쪽에 있는 해가 이렇게 뉘엿뉘엿 넘어가면 햇빛이 비추어 바닷가 갯물이 빨갛습니다.
또한 태공들이 전마선을 타고 오락가락 콧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이것뿐만 아닙니다, 갈매기가 평화롭게 날지요.
바람은 시원하지요, 바다를 쳐다보면 그렇지요, 제방 안쪽을 바라보면 벼가 자라서 결실을 재촉하느라고 황금물결을 너울너울 치지요, 이쪽을 보면 바다고, 저쪽을 보면 오곡이 익고, 곡식이 너울거리지요. 그리고 마을에는 회관을 하나 지어 놓고 자연부락단위로 앰프를 가져다가 선을 막 뻗었어요. 산골이니까 잘 안 들려요. 그래서 고성능 「앰프」녹음기까지 완전히 놓았어요.
그래서 여기서 무슨 노래가 나오는가 하면 여러분들이 지금 하시는 노래, 좋아졌네 좋아졌어, 이리 봐도 좋아졌고, 저리 봐도 좋아졌네……. 하는 노래가 이 「앰프」에서 「스피커」를 통해서 나와요.
나는 바람을 쐬러 가면서, 그 선선한 바람을 쐬면서, 지난날 우리가 한번 터져, 두 번 터져, 길 내놓고 뭐 협업농장조성이다 전기사업이다 등등의 여러 가지 사업들을 하려고 주민들하고 싸우고, 내가 앞으로 두 번 다시 겪어보지 못할 과거에 치렀던 일, 그런 것들을 생각합니다.
마을에 들어가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지도자님, 지도자님 합니다.
언젠가 내 자식이 담임선생한테서 신문 한쪽을 가져오면서, 내가 신문에 났다고 얘기를 해요. 그래서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게 뭐냐고 물으니 「아버지가 여기 있다」고 좋다고 해요. 그리고 하는 말이 “우리 학교에서 아버지를 모르는 애들이 없어요. 선생님께서 출포리 지도자라고 말씀하세요. 아버지보고 우리 아이들이 「도자」라고 해요. 아버지 지나가면 「도자」간다고 해요.”하기에 “어째서 「도자」냐?”고 하니 “아버지가 지도자니까 「지」자 빼고 「도자」고, 「도자」가 많이 들어와서 「도자」라고 해요.” 하더군요.
이 모든 것을 내가 생각할 때에 과거에 겪은 일의 생각, 내가 거기서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죽음의 길로 갔었더라면 지금 내 꼴이 어떻게 되었을 것이며, 나를 보고 그 애들이 이런 소리를 할 것인가 하고 생각을 해 봅니다. 안식구 역시 부락 일에 내가 참여를 한다고 하면 자기가 여물도 쑤고 나무도 하고, 나는 동네일을 가서 보라고 말을 할 때에 정말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새마을지도자반 제20기 수료생)
이 글은 임 광묵 지도자가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에서
발표한 성공사례를 녹취 수록 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