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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답동성당(仁川畓洞聖堂)
인천광역시 중구 답동에 있는 천주교 인천교구 주교좌성당.
사적 제287호. 1889년(고종 26) 답동본당이 설립되자 빌렘(Wilhelm, J.)신부가
부임하여 지금의 성당자리에 부지 3, 212평을 마련하여 성당을 건축하기 위한
정초식을 가졌다. 1891년 르비엘(Leviel)신부가 부임하여 1893년에 임시성당을
건립하였으며, 3대 신부 마라발(Maraval)이 건평 396평의 본격적인 고딕양식
의 연와조 성당건물을 1899년에 완공시켰다. 그 뒤 5대 신부 드뇌(Deneux, E.)
가 1933년 본당의 개축공사에 착수하여 1937년 6월말에 완성함으로써 연건평
307. 2평의 현재 성당이 준공되었다. 두 차례의 내부공사가 있었지만 비교적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오늘에 이른다.평면은 라틴십자형 삼랑식(三廊式)
이고, 건축양식은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전주의 전동성당과 흡사한 외관이다
. 적벽돌이 주재료이나 화강 석재를 의장적(意匠的)으로 중요한 곳에 사용한
점이 특이하다.정면 중앙과 양측에 반원 아치로 된 출입구가 나 있고, 그 위에는
반원 아치의 창이 있는데 창 둘레와 출입구는 화강석재로 처리하였다. 중앙종탑과
좌우의 작은 종각 꼭대기에 구성된 8각고상부첨탑(八角鼓狀部尖塔)은 처마 밑 돌림
띠의 석재장식과 함께 정면외관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한다.이 성당은 1961년 7월
인천교구가 서울대교구로부터 분리, 설정됨으로써 메리놀(Maryknoll)회 소속인
맥노턴(McNaughton)주교가 인천교구장으로 부임, 1962년 교계제도(敎階制度)의
설정과 함께 대목구(代牧區)에서 주교구로 승격되어 주교좌성당이 되었다.
『답동본당(畓洞本堂) 85년사』(천주교인천교구답동교회, 1974)
「제물포본당의 창설」(최석우, 『경향잡지』, 1976년 4월호)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답동성당
답동성당
답동성당
답동성당
답동성당
예수성심상(우)
예수성심상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album.asp)
성모자상(좌)
답동성당
인천 최초의 성당
형구돌
내부, 2층 정면
내부, 1층 정면
(출처- http://info.catholic.or.kr/pds/album/album.asp)
성당내부 출입문
성당내부
제대
제대
감실
독서대
성당내부
출입문
감실
독서대
내부 오른쪽 바오로상
성 바오로상
내부 왼쪽 성녀 소화 테레사 상
성녀 소화 테레사 상
유리화
▼ 십자가의 길[14처]
주교좌
내부 기둥 십자가
성수대
성수대
홍보물
홍보물
사제관
수녀원
문화원
인천교구청
교구청 성모상
교구청 성모상
교구청 성모자상
인천 내동 성공회성당
(仁川內洞聖公會聖堂)
인천광역시 중구 내동에 있는 성공회성당.
이 성공회성당은 당초 1890년 요한 신부에 의해 건립되었으나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56년 6월 23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2년
12월 23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었다.
영국 해군 종군 신부였던 요한 주교 등 선교 동역자 6명이 인천에
들어와 1890년 9월 29일 이 성당을 건립한 후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902년에는 한때 러시아 영사관으로 이용되었고, 1904년부터 1956년
까지는 성공회신학원으로 운영되었으며, 현재는 성공회성당으로 쓰이고 있다.
건축 면적은 2,056.7㎡이며, 건물 형태는 지붕의 목조트러스를 제외하고는
외벽과 주요 부재는 화강암으로 견고하게 쌓아올린 중세풍의 석조이다.
일부 한국의 전통적인 목구조 처마양식을 가미하였으며,
창호 및 벽체 부분의 처리가 뛰어나다.
개화기인 19세기 말에 건립된 성당으로 종교적으로는 물론이고,
건축학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건축물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 최초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중세기풍이가득 느껴지는 성공회 교회 주변을 거닐다보면 갖가지 표지석과 기념비
그리고 흉상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 안내문을 하나하나 읽다보면 구한말 역사의
한 페이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가 한국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890년 9월29일이다.
E.B 랜디스( Dr. Eli Barr Landis,한국명 남득시)는 1865년 12월 18일 미국 펜실베니아
주 랭카스타에서 출생했다. 1883년 밀레스 빌리에 있는 국립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의예과 과정을 졸업했다. 1885년 9월 필라델피아 대학 의학부에 입학 하였으며 필드
(Field Charles Niel)신부로 부터 감화를 받고 신명으로 영세 성사를 받았다.
1888년 5월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랭카스터 병원의 레지던트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 그는 선교적 열정이 가득하였으며, 벤슨(R.M.Benson)의 권고로 한국 선교를 결심했다.
1890년 캐나다로 이동하여 8월 28일 벤쿠버에서 기선 아비시니아(Abyssinia)호를
타고 항해하면서 영국 성공회 한국 초대주교 코프(Bishop Charles John Corfe,
한국명 고요한 高要翰)와 합류했다.
두 사람은 9월 14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 고베항에서 스루가마루호를 타고 9월 26일
부산을 경유하여 1890년 9월 29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고요한 주교는 한국 최초의 성공회
교회인 성미가엘교회를 설립하고 선교활동에 들어갔으며, 랜디스가 인천에 도착해서 본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인천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치료도 못 받고 병명도
모른 채 그냥 죽어가거나 한방으로 겨우 치료할 뿐이었다.
1883년 인천주재 일본영사관 내에 현대 의료시설을 갖춘 병원이 있었으나 일본인들만이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랜디스는 가슴 아파하며 송학동 전세 낸 집에 방 한칸을
임시 진료실로 개조하여 1890년 10월 10일 인천 최초의 서양식 병원을 개원하고 10월
11일 첫 환자를 받았다. 한국인, 일본인을 차별두지 않고 치료하기 시작했다.
오전에는 진료실에서 환자를 받고 오후에는 왕진을 다녔다. 첫해에는 의약품도
별로 없고 한국말도 잘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3개월동안에 11명(외래환자
35명, 투약환자 75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25차례 왕진했다.
그 후 1891년 4월 20일 송학동 3가 3번지(현 내동교회)에 새 병원 건축을 착수하여
10월 18일 준공했다. 이때 입원실은 온돌을 깔고 응급환자가 생기면 가마를 이용했다.
이때 진료받은 환자들로부터는 다소의 치료비를 받았는데 한국돈 (엽전)은 작은
액수에 비해 많은 양의 동전을 받아야 하기에 많이 불편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환자들은 계란이나 과일등으로 치료비를 냈다.
랜디스는 의료사업을 중심으로 선교사업에 힘써 그 당시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였고
영어 학교를 개설하여 교육에 힘썼고, 고아원을 운영하는 등
서민들에게 너무도 고마운 은인으로 존경 받았다.
이후 서울과 강화,진천,청주, 대전, 부산의 대한성공회로 확장되어 갔다. 하지만
환자를 헌신적으로 돌보던 랜디스는 1898년 과로와 결국은 장티푸스에 걸려 32세
나이에 요절했다. 그는 한복 두루마기에 쌓여 북성동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가
지금은 청학동 외국인 묘지로 이전되어 고이 잠들어 있다
세계 1차 대전으로 인하여 선교본부의 지원금 부족으로 1917년 6월 26년간의 역사를
마감하고 문을 닫았다. 그 당시 고요한 주교는 현재 인성여고 체육관 자리에 교회를
만들어 선교를 했으나 한국 전쟁때 불타서 없어지는 바람에 1956년 병원이 있던
이곳에 다시 교회를 중건 하게된것이다
▲규모는 작아도 장중하고 수도원 느낌이 드는 대한성공회 인천 내동교회 ⓒ 2016 한국의산천
1891년 한국 최초로 인성여고 부근에 세워진 성공회 내동교회는 한국 전쟁때 소실
되었고 지금 건물은 성누가병원 부지에 1955년 8월 28일 주춧돌을 놓고 1956년 6월
23일 완공하여 복구한 것이다. 내동교회는 6·25 전쟁에 참전해 전사한 영국전몰장병을
추모하기위해 그 유가족들이 모금해 건축한, 일종의 전쟁기념성당이다. 50년대 말 까지
교회 안뜰에는 대공기관포가 있었다고 한다. 1902년에는 한때 러시아 영사관으로
이용되었고 1904년부터 1956년까지 성공회 신학원으로 운영되었으며 현재는 성공회성당
으로 쓰이고 있다. 인천내동성공회성당 이라는 이름으로 2000년 12월 23일 인천광역시
에서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했다.
▲ 내리교회 뒤쪽에서 오르며 보이는 내동 성공회교회 ⓒ 2016 한국의산천
대한 성공회 내동교회
인천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
지정번호 인천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 제51호 (2002년 12월 23일 지정)
소재지 인천광역시 중구 내동 3
제작시기 1956년
소유자 대한성공회
건물 형태는 지붕의 목조트러스를 제외하고는 외벽과 주요 부재는 화강암으로
견고하게 쌓아올린 중세풍의 석조 구조물이다 한국의 전통 건축 양식인 처마를
적용했으며, 창호와 벽체 부분의 처리가 뛰어나다.
건물 현황 편집
성공회 내동성당에는 감사성찬례와 성사 집전에 이용되는 성공회 성당 2채
(대성당, 소성당) 외에도 결식 주민들을 위한 식사 봉사 등에 쓰이는 사회복지관
1채, 사제관 1채, 예수가 손을 든 모습을 묘사한 하얀색의 성상이 있다.
성공회 내동성당 안은 목재로 지어졌으며, 성수를 담은 성천, 성체를 모시는
성막, 스테인드 글라스, 역대 주교들의 초상화, 감사성찬례 집전에 사용되는
제대가 있다. 개화기인 19세기 말에 건립된 성당으로 종교적으로는 물론
이고, 건축학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건축물이다.[인천시 홈페이지 참고]
▲ 성공회와 구세군, 규모는 작아도 봉사활동은 대단히 많이 하는 종파로 알고있다 ⓒ 2016 한국의산천
성공회 [The Anglican Domain , 聖公會]
1534년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해나간 영국 국교회의 전통과 교리를 따르는
교회를 총칭하는 말이다. 성공회라는 명칭은 '하나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적인 교회'라는 교회에 관한 신앙고백 가운데 성(聖)과 공(公) 두 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밖에 영국 국교회, 영국교회, 영국성공회, 잉글랜드교회,
앵글리컨처치라고 하며, 미국의 성공회는 주교감독제교회라는 의미의
에피스코팔교회(Episcopal Church)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 성당 입구 오른편 정원위에 고요한 주교와 랜디스 박사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다 ⓒ 2016 한국의산천
사실 랜디스 박사는 정식 선교사는 아니었다. 선교활동으로 인천을 찾은 코프
주교와 함께 다양한 활동과 사업을 했다. 특히 의료사업으로 뛰어난 활약을 하신
분으로 성공회가 우리나라에 뿌리내려 토착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890년 10월 10일 성공회에서 개원한 성 누가병원은 인천 최초의 현대식 병원
으로 당시 제물포 주민들은 이 병원을 약대인 병원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랜디스는]
어떤 어려운 병도 신통하게 잘 고쳐 주는 명의로서 당시
주민으로부터 절대적인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 본래 이곳은 옛날 영국병원(성 누가 병원)이었으나 근처에 있던 성공회
교회가 불타버려 이곳에 교회가 다시 지어진 것이다 ⓒ 2016 한국의산천
랜디스 박사는 '최초',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선구자적인 인물이었다.
랜디스의 통계에 따르면 1892년 모두 3천594명의 환자를 진료했고, 1894년에는 더욱 늘어나 4천464명의 신규 외래 환자와 방문치료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는 인천에서 1891년 최초로 영어학교를 만들어 인천시민들과 외국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었으며 1892년에는 고아를 데려와 보살피면서 최초의 고아원을 창시했다.
랜디스 박사는 40명의 학생을 4개 반으로 나눠 일주일에 6일씩 하루 3시간 영어를 가르쳤다. 학생 대부분이 일본인이었고, 이중 6~8명 정도의 중국인도 끼어 있었다.
그는 또한 당시 여섯 살 난 고아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아
길렀다고 '인천 내동교회 110년사' 책자는 전하고 있다.
그의 뛰어난 능력과 자질에는 한국에 대한 애정과
깊은 이해가 있었던 것 같다.
성누가를 기념하는 첨례일에 새 병원에 입주한다 하여 성누가병원이라 이름 지은
것을 두고 그는 “성누가병원이라고 하는 이름은 한국인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며
뛰어난 한문실력으로 지은 '낙선시의원(樂善施 : 선행을 함으로써
기쁨을 준다)'라는 '이라는 간판을 달았다고 한다.
인천 최초의 현대식 병원 낙선시
한국이름 남시득으로 살다 간 약대인
사람들은 랜디스를 약대인(藥大人) 이라고 높여 불렀으며, 랜디스가 이곳에
있기에 이곳 응봉산(자유공원이 자리한 산)을 말할때는 약대이산 (藥大人山) )
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 중국에서는 위대한 사람을 대인(大人)으로 부른다
환자를 헌신적으로 돌보던 랜디스는 1898년 과로와 결국은 장티푸스에 걸려
32세 나이에 요절했다. 그는 한복 두루마기에 쌓여 북성동 외국인묘지에 안장
되었다가 지금은 청학동 외국인 묘지로 이전되어 고이 잠들어 있다
▲ 성당 본당의 벽면은 붉은 벽돌로 십자가 문양을 넣어 쌓아 올렸다 ⓒ 2016 한국의산천
▲ 성당 본관 왼쪽에 보이는 건물에 아래와 같은 동판이 붙어있다 ⓒ 2016 한국의산천
그 내용은 이렇다
In memorial of the Russian sailors of ....
이곳에서(중략) 러시아 선원들을 떠올린다...
" 1904년 이 자리에 진료를 받았던 순양함'바랴그'호와 포함 '코레에츠'호
러시아 선원들을 추념하며 감사드리는 러시아 국민들로부터 2004년 2월 11일"
이곳은 러.일 전쟁당시 임시 적십자병원이었을 때 러시아
병사와 그외 많은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 빨간 건물 뒤로는 대한성공회 문화재단인 '성미가엘
종합사회복지관'이 서있다 ⓒ 2016 한국의산천
▲ 중세기 수도원처럼 고풍스럽고 단단한 화강암 외벽의 성공회 성당 ⓒ 2016 한국의산천
▲ 성당 제일 후면에 자리한 정초석 ⓒ 2016 힌국의산천
1891년 한국 최초로 인성여고 부근에 세워진 성공회 내동교회는 한국 전쟁때 소실되었고
지금 건물은 성누가병원 부지에 1955년 8월 28일 주춧돌을
놓고 1956년 6월 23일 완공하여 복구한 것이다.
1902년에는 한때 러시아 영사관으로 이용되었고 1904년부터 1956년까지 성공회 신학원으로
운영되었으며 현재는 성공회성당으로 쓰이고 있다. 인천내동성공회성당 이라는
이름으로 2000년 12월 23일 인천광역시에서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했다.
▲ 중세기 수도원이나 단단한 옛 성처럼 고풍스럽게 지어진 성공회교회 건물 ⓒ 2016 한국의산천
▲ 대한성공회 내동교회는 1891년 9월 30일에 지어진, 한국 최초의
성공회 교회이다.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에 소속되어 있다.
대한 성공회는 선교초기부터 한국문화의 토양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린 교회가
되고자 토착화에 힘써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살린 교회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인천광역시 중구 내동에 있으며, 인근에 감리교회인 내리교회가 있다.
청학동 외국인 묘지
이역 만리를 지나 한국에 찾아왔던 외교관, 통역관, 선교사, 선원, 의사, 사업가 등 외국인의 묘지
▲ 송도역과 청학지하차도 중간쯤 주택가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단촐한 외국인 묘지 ⓒ 2016 한국의산천
▲ 자물통으로 굳게 닫힌 묘역 철문을 보니 사람의 손길이 끊긴 지
오래된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 2016 한국의산천
▲ 연수구 청학동 외국인 묘지
인천시는 현재 진행 중인 ‘인천가족공원 2단계 조성사업’에 따라 청학동 외국인묘지를
내년 개장 예정인 봉안당에 새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5일 밝혔다.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에 체류하던 외교관, 통역관, 선교사, 선원, 의사 등 외국인 60여
명이 안장돼 있는 연수구 청학동 외국인묘지가 부평가족공원으로 이전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현재 청학동 외국인 묘지 66기도 이르면 내년 이곳으로 이전될 예정이다.
청학동 외국인묘지에 묻힌 인물들은 인천항 개항 이후 국내에 체류하며 인천을 비롯한
한국 발전을 위해 애쓴 외국인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1980년 인천에 도착해 인천 최초의 성누가병원을 설립하는
등 의료 선교활동을 펼친 랜디스(Eli Barr Landis)박사 등이 있다.
청학동 외국인 묘지
이역 만리를 지나 한국에 찾아왔던 외교관, 통역관, 선교사, 선원, 의사, 사업가 등 외국인의 묘지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미국 선교사이면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했고 광복 후에 국빈으로 방한했다가 질병으로
사망해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는 호머 헐버트 박사의 묘비명이다.
단일민족으로 역사적 전통을 지켜온 한국에서 이러한 외국인 묘는 아주 특별한 관심을 끈다
. 헐버트 박사처럼 유명하지는 않더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에 왔다가 자신의 나라로 돌아
가지 못해 낯선 이역만리 타국에 자신의 주검을 남긴 외국인들은 많다.
연수구 청학동 성호공원을 끼고 물푸레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청량산 기슭에 위치한 묘역이
바로 이곳이다. 대지 5,760평에 묘지면적 3,140평에 달하는 청학동 외국인 묘역에는 영국인
21명, 미국인 20명의 무덤 외에도 독일인 11명, 러시아인 7명, 이탈리아인 3명과 프랑스,
네덜란드, 호주인의 무덤이 각각 2기씩 있다.
이외에도 캐나다, 인도, 중국인의 무덤을 포함해 모두 71기의 묘가 안장돼 있다. 이들은
1883년 인천의 강제개항 후 외교관, 통역관, 선교사, 선원, 의사 등으로 와서 나름대로 소임을
다하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숨을 거뒀지만, 본국으로 유해를 돌려보내지 못한 사람들이다.
원래는 외국인 특정 거류 지역이었던 중구 북성동, 율목동, 남구 도화동에 나라별로
흩어져 있었는데 1914년 각국 대사관의 협조로 북성동 일대에 묘역을 조성한 뒤 무덤
들을 한 곳에 모은 것이 효시다. 하지만 한국전쟁 중에 묘역 일부가 파손된 데다 북성동
이 도심으로 개발되면서 1965년 당시 시 외곽이었던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이 묘역의 역사적 가치는 충분하다. 1890년 성공회 코프 주교와 함께 인천에 도착해
의술을 베풀었던 엘리 바 랜디스 박사의 무덤도 이 묘역에 있다. 랜디스 박사는 인천
에서 한국 최초의 성공회 교회를 세웠으며 훗날 ‘약선시직원(藥善施直院)’으로 이름을
바꾼 성누가병원을 개설한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을 위한 영어 학교를 열었고
한국의불교문헌을 영어로 번역해 서양에 소개하기도 했다. 당시 주민들은 랜디스 박사를
‘약대인’이라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교황청에서 파견했던 요셉 마라발 카톨릭 신부와 그의 동생 쟌
마라발의 가족묘를 비롯해 찰스 앨버트 허친슨(1948~1950)
미국 영사의 묘 등이 위치해 있다.
▲ 묘역 27번에 자리한 켈트(Celtic)십자가의 랜디스 묘비 ⓒ 2016 한국의산천
▲ 묘역 27번에 자리한 랜디스 묘 ⓒ 2016 한국의산천
▲ 죽어서도 인천을 떠나지 않고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고이 잠든 한국
이름 남시득으로 산 약대인(藥大人) 랜디스의 묘비 ⓒ 2016 한국의산천
의사 랜디스
환자를 헌신적으로 돌보던 랜디스는 과로와 결국은 장티푸스에 걸려 32세 나이에 요절했다
. 그는 한복 두루마기에 쌓여 북성동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 인천 연수구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편안히 잠들어 있는 약대인 랜디스의 묘 ⓒ 2016 한국의산천
빌딩의 그림자 황혼이 짙어갈때
성스럽게 들려오는 성당의 종소리
걸어오는 발자욱마다 눈물 고인 내 청춘
죄 많은 과거사를 뉘우쳐 울 적에
오 싼타마리아의 종이 울린다
흰눈이 내릴 때 미사가 들려오면
가슴깊이 젖어드는 아베마리아
흰눈 위에 발자욱마다 눈물 고인 내 청춘
죄 많은 과거사가 나를 울릴 적에
오 싼타마리아의 종이 울린다
2017-06-18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