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묘한 것 같다.
지나고 나서야 조금 알것도 같고....
당시엔 전혀 예상치 못하는 그것
바로 인연이란 단어가 아닐는지!
내가 이 세상에 있기까지
또 내 아들, 딸이 이 세상에 나오기 까지
참 묘한 인연들... 우연에 가까운 인연들의 연속선상에서가 아닐까 싶다.
예전
성경을 즐겨 읽던 그시절
신약선경 처음에 등장하는 마태복음 첫장...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 (요즘은 계보라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예수그리스도의 육체적 인연들을 거슬러 올라가는 말씀입니다.
천하의 구세주도 하루 아침에 도깨비 방망위로 금나와라 뚝딱 해서 나온게
아니라 수많은 계보를 통해 탄생했던 것이네요...
고쳐 생각하면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도 영겁의 세월동안 숱한 인연들을
통해서만이 생겨날 수 있는것을요...
예수 탄생까지 위대한 인물도 있을테고.. 그저 평범한 인물도 있을테고....
그렇지만 연연히 이어 왔기에 그 가운데 성인의 탄생도 가능했을테고...
내가 수동전공을 가지 않았더라면..
이 전제도 별로 맞지 않는 얘기다.
나보다 결코 성적이 나쁘지 않았던 작은형이 전교석차는 5%대였는데
반석차가 10%가 되지않아 서류전형에서 합격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리도 내가 그보다 더 못한 공짜공부 하는 ... 당시 철도공고, 창원기계공고,
금호공고 등.. 그것들은 왜 수준이하로 생각하고 내가 형에게
내가 수도공고를 가서 형을 대학보내겠노라고 했는지..
막상 내가 공고를 가겠노라고 해 놓고 2년뒤 수공 시험볼 때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소주 됫병 반이나 마시고 시험쳤는데 정신이 더
말똥말똥해 오히려 시험을 더 잘 본것 같아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니..
피해가지 못할 게 인연인듯..
비록 그것이 좋은 결과든 나쁜 결과든 당시는 알 수 없었으니..
고1때
중학교 까지는 학원도 과외도 한번버 안받았지만.. 그리 열심히 공부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줄창지게 놀면서도 학교성적은 줄 곧 5%대 성적을
유지해서인지 제법 똑똑한 놈인 줄 착각했는데..
첫 중간고사 시험에서 45명 중 43등, 그때는 공부를 안해서 전기가 적성에
맞지 않아서 그렇겠지 했는데 기말고사에서 다시 41등.. 정말 전기공부가
너무 싫었고.. 그에 반해 너무 똑똑한 넘들이 많은지라 더 낙망하고...
이런 상태에서 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가능성도 없어보이고.. 어렵게
사시는 엄마 볼 면목도 없고...공부는 더 하기 싫고.. 오로지 죽자는 생각밖에는..
그러던 2학기 가을로 접어들 쯤.. 저녁 점호를 마치고 밤 11시쯤 학교
기숙사 옥상에 올라가 신을 벗어 가진런히 두고..
뛰어내릴 준비를 마치고.. 잠시 아래를 보는데...
그때 내 피투성이 시신을 봤다... 등교길 지나가는 애들이 한마디식 던진다...
"죽기는 왜죽어, 고개를 획 돌리면서 외면한다. 어떤 녀석들은 구역질을 한다.
고향에 계신 엄마, 누나들은 통곡을 한다.. 가슴을 친다.. 막내의 죽음을
당신 탓이라 여기며 그렇게 통곡을 한다...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 그날의 느낌이 그렇게 또렷하다.
한편의 영화가 끝나고 나는 다시 벗어놓았던 신발을 신는다.
"난 한번 죽었다 다시 태어났다."
당시 전라도 광산출신 오효근이란 친구를 만나 성경이야기를 들었다..
세상의 모든것이 비워진 마음에 발경한 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자
내 안에 원래 청정히 있었던 성령이다...
1983년 10월 23일.. 저녁...
얼굴은 생생한데 이름은 가물가물하네...
당시 대치동에 있던 서울중앙교회를 다니던 그분의 말씀...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내 죄를 대신해 십자게에 못밖힌 구세주
예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은 그날..
그때부터 기독교와의 인연이 고교시절 내내 나와 하나가 되어 살았고..
무사히 졸업도 했고...
졸업할 당시에는 다짐 같은것은 하지 않았지만 당연히 목회자의 길을
갈 것으로 알았는데.. 그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울산에 내려와 당시 울산 공업탑로타리 인근에 위치한 울산중앙교회에서
일주일간 금식기도를 하던 중 하나님의 뜻, 아버지의 뜻이 반드시 수도자의
길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깨닳게 됨으로서 목회자의 길이 결코 주의
뜻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믿음이 흔들린다는 수준 보다 더 큰 신앙생활의 갈등이 있었고...
그동안 교회에서의 엄격한 신앙생화 자체에 대한 회의와 이런 엄격히
절제된 삶이 결코 신의 뜻이 아니다는 결론에 이르니 더 이상
교회생활도 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되었다..
몇번이나 이교회 저교회를 기웃거렸지만 내가 갈 교회, 나를 받아 줄 교회는
없었다... 조용히 몇달 다니다가도 하나같이 목사들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본래 하나님의 뜻과 동떠러진 헛소리로 들려 더 이상의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을 접어야 했었다.
그렇게 부평초 같은 세월을 보내고 18개월 군생활을 마치고..
당시 울산에서는 한전보다는 유공, 대한유화 같은 회사들이 급여가 더 좋아
그쪽으로 눈을 돌리던 차에 한전 발령이 났다.
망서림도 있었지만 뒷돈 들이지 않는 한전을 선택했다...
1988년 10월 4일
2주간의 서울연수원을 수료하고 발전군인 나는 또다시 10주간의 삼천포 발전연수원에
입교해서 연수를 받게 되었다.
고3 방학때 영남화력에 한달간 현장실습을 했을 당시 한전 최연소 초급간부가 된
김태우과장이 연수원교수를 하고 있었다..
3년이 더 지난 재회였는데 내 이름을 기억하고 반갑게 맞아 주었던 기억에
참 고맙게도 생각했는데 10주간의 연수를 마칠 즈음에 교수님께 규모가 작은
영남화력보다는 울산화력엘 가고싶다고 했는데 기억코 영남화력에 보냈다..
그분의 첫 발령지라 영남화력에 많은 정이 있었으리라..
고3 현장실습때를 회상하면..
당시 친구들은 야음동 독실자 숙소를 배정받아 회사버스로 출퇴근 했었고
난 집이 회사에 가까이 있어 친구들 보다 일찍 출근해서 중앙제어실을
청소하는 협력업체 아줌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열심히 대걸레질을
하면서 부지런을 떨었었다.. 그 모습이 당시 담임을 맡고계신 김태우교수님의
눈에는 내가 참 성실해 보였나보다.
뭐든 열심히 하는 성격탓에 선배님들에게 귀여움은 많이 받았는것 같다.
그런것이 또 인연이 되었는지
연수원 성적이 나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원하는 울산화력 대신
김태우교수님이 원하는 영남화력이 내 첫 사업소이자 이곳 하동화력으로
발령나기 저 까지 무려 22년을 근무한 그리고..
그속에서 아내를 만나고 두 아이를 낳고 키워온 인연 깊은 곳이 되었다.
1988년 12월30일..
함께 발령 난 동료들 5명 중 제일먼저 사업소를 찾아가 3년 전에 대면한
여러 선배님들께 인사하고 그렇게 영남화력에서의 인생은 시작되었다.
발전소 기술직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첫 보직은 발전교대근무..
참 신나게 근무했었다.. 독서를 좋아하던 조관동이란 선배님과
같은 현장룸에서 많은 조언도 들었고.. 기억에 참 많이 남는다.
그분.. 언제 퇴사했는지.. 종교인이 되었을지도.. 어디서 무얼하고 계실까..
한전 그룹사 사우 찾기에도 없다...
5개월 남짓한 교대근무 생활도 내 뜻과는 무관하게 일근부서 선배님들의
줄기찬 구애에 못이겨 결국 89년 5월경 당시 전기부 제어과로 옮기게 되었고..
90년 겨울..
당시 발전소 굴뚝에 환경계측기 설치공사가 있었는데
고참직원이 (최동린과장님) 이나이에 내가 굴뚝 사다리 타고 오르락 내락하고
공사설계하고 추후 감사받고 하는 업무가 싫어 담당과장에게 투들거리고 있을 때
내가 공사감독 하겠노라 했었다.
당시 선례로 제어과 3년 쯤 경험이 있어야 5백만원 미만 간이공사 정도 했고
5년 이상 경험이 있어야 그런 일반공사감독할 케리어가 되었는데
이제 갓 1년 남짓 경험있는 내가 큰 공사감독을 자청하니 당시 과장님(김영학)
안 시키자니 정작 할 사람은 못하겠다고 하고.. 햇병아리가 당돌하게 하겠다니
믿음이 가지않고.... 돌이켜 생각하니 내가 담당과장이라도 고민좀 되었겠다.
최동린과장님 덕분인지
인연이 될려고 그랫는지...
공사감독을 맡은 후 굴뚝과 가까운 당시 전기부 통신실에 학교 선배님 두분이 있어
자주 놀러가곤 했는데 그때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당시에는 사내 전화를 돌려주는 교환원이 2명 있었는데 한명이 출산휴가를 떠나
아내가 고등하교를 졸업하고 교환학원에서 자격증을 따고 첫 직장이 바로
영남화력 교환실 임지직이 었으니...
지금 세상에는 정규직 직원과 임시직 직원은 하늘땅차인데...
당시에는 비정규직이니 임시직이니 하면서 노동자를 편가르는 시대가 아니었다.
뭐 첫눈에 반반건 아니었고..
지금 생각해도 너우 이상한 인연이다...
당시 난 여자를 많이 밝히는 편이었고.. 될 수 있는 한 결혼도 일찍 하자고 맘 먹고
있을 때 였다.
어릴적 동네 여자친구의 소개로 한 여자에게 어느정도 마음이 가 있고 결혼도
저울질 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아내을 별 영양가 없이 편하게 놈담을 하는
물론 나보다 4살이나 어려서인지 자연스럽게 반말하고...
여자로서의 매력이나 가슴 두근거림.. 전혀 없었다...
그러던 사이 굴뚝 공사가 계속 진행된 그해 겨울 자주 통신실을 찾으면서.
그때 출산휴가가 2개월이었으리라.. 한달이 넘게 흘러..
마치 하늘에서 지금의 아내가 하나님이 나의 배필로 예비한 사람이라는
느낌... 신의 계시..하나님의 음성.. 그런건 전혀 아니고... 정말 그런 느낌.
내가 아무리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가져도 신은 단지 그녀를 내 아내로 준비해
두었다는 느낌... 그 느낌.. 어쩌면 어길 수 없는 명령 같다를 생각.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그런 것...
물론 처음엔 하늘의 명령을 거부하고 싶었는데 그런 마음이 들 수록 다른
한편으로는 숙명은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더 당당할 수 있었던것 같다.
하늘이 명한 배필이니 그 누가 떼 놓으려고 해도 못하리란 확고한 신념..
양가 상견례를 앞두고 아내에게 이런말을 한 기억이 있다.
혹 장인, 장모님 될 사람이 나에게 키가 작다니 얼굴이 어떻다느니.. 등
싫은 소리 한마디라도 하면 결혼 이야기는 없던것으로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사실 작은키가 좀 신경쓰였던 모양이다...
그 다음 부터는 순풍에 돛단듯 상견례겸 약혼하고 회사 사택 신청해서
신접살림하고 첫아이 생기고.. 결혼식은 작은형에게 순서를 지켜
작은형이 결혼식한 그해 한글날 결혼식하고...
다음 해 이쁜 딸래미도 낳고...
철없는 아빠로 20년을 그렇게 보낸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많이 미안한 생활을 한 것 같다..
내 인생 절정의 30대를 후회없이 일에 몰두해 보자는 생각으로 모든게
회사 우선이다. 동료, 상사, 후배들과의 인간적인 유대도 회사일의
연속이라 생각하고 동아리 활동도 많이하고.. 노동조합 활동도 ..
그래서 술자리도 참 많이 했고... 놀기도 참 많이 놀아봤다..
정말 이제와서 별 후회 없이...한도 없이...
다음 스토리는 낼 저녁에 속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