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문학의 고향 晋州
강석호
나의 고향은 경남 하동, 지리산의 장엄한 기상이 줄기차게 뻗어 내리고 섬진강 맑은 물이 8백리 굽이돌아 남해로 접어들며 푸른 파도가 수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한려수도의 수평선이 끝없이 펼쳐지는 바닷가의 작은 농어촌이다.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30리 떨어진 당시 군내 유일의 공립인 진교중학을 다니며 소년기의 꿈을 키웠고 청년기는 서부 경남의 중심도시 진주에서 사범학교를 거처 직장을 다니며 인생의 푸른 꿈을 꽃피웠다.
그래서 문학의 고향 하면 청춘의 푸른 꿈을 키운 고교시절과 사회의 첫발을 디딘 진주를 잊을 수가 없다.
당시 진주는 아름다운 전원 도시였다. 도심을 남북으로 가로 지르는 유서 깊은 남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강 따라 펼쳐지는 강변의 백사장은 낭만의 필드였으며 즐편한 들판에서 자라나는 싱그러운 무, 배추는 풍요의 상징 그것이었다.
게다가 촉석루를 비롯, 서장대와 북장대, 논개의 충절이 넘치는 의암을 비롯해 피어린 임진 항전의 유적지가 그때의 그 기상을 말해주듯 든든히 버티고 있고 국내 예술제의 효시인 개천예술제가 해마다 흥겹게 열리고 있어 청춘의 꿈과 낭만을 펼치기에는 더없이 좋은 예향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학교공부보다 시골 고향 갯구석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문물에 눈이 휘둥그레져 방과 후면 도심과 근교를 마구 쏘다니며 사춘기를 갓 지낸 청춘의 낭만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여러 가지 견문과 체험 중에도 유달리 문학에 관심을 갖고 명작을 읽으며 시낭송이나 문학의 밤 또는 출판기념회에는 빠지지 않고 구경 다니기에 열을 올렸다.
회원도 아니고 순서에도 명단에도 없고 더욱이 초청장 같은 것은 그림의 떡. 이름 없는 관객의 신분으로 그저 잉어가 뛰니 망둥이도 따라 뛰는 격으로 동분서주 가슴을 태우고 땀을 흘려댔다.
그러다가 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시와 인접한 군내의 시골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고 하숙처가 없어 학교 숙직실에서 홀로 기거하다 보니 외롭고 적적하여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본격적으로 문학서적을 탐독하며 틈틈이 습작에도 열정도 쏟았다. 그때는 소설과 수필을 썼다.
그러면서 마음 맞는 문학 지망생끼리 문학 동인회를 구성했다. 동인회 명칭은 ‘접동문학동인회’(접동은 귀촉도, 소쩍새), 멤버는 소설을 쓰는 나와 김수정, 시에 김덕기, 조만옥 등 4명이었다. 우리는 토요일 마다 시내 다방에서 만나 문학얘기를 하고 작품평도 하며 활발히 움직였다.
당시 진주에는 우리 동인회외에 시가족동인(조인영, 이덕 김경자, 이월수, 박용수, 문의식)가 이름을 날렸는데 우리도 그에 못지않게 열을 올렸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동인회지를 내었는데 회지 표제는 「子午時」이었다. 당시 우리의 지도 교수 역할을 한 이경순 시인이 명명해 주었다. 앞의 시가족동인의 동인지 명은 「零度線」으로 지리적 출발점인데 비해 우리는 시간적 출발점으로 문학 진주의 근간이 되라는 뜻에서 그렇게 지어주신 모양이었다.
당시 진주에는 지방 소도시로서는 유일하게 동아일보에 한․일 합방의 분노를 터뜨린 ‘是日也 放聲大哭’이란 사설을 쓴 장지연 선생이 창간한 「경남일보」라는 일간지가 발간되고 있었다.(군사 정권 시 잠깐 중단 되었다가 지금 계속 발간되고 있음)
그 신문은 지방의 뉴스나 여론의 대변에 큰 몫을 하였을 뿐 아니라 그 지역 문인들에겐 발표지면이자 시민들의 문학 정서의 샘 역할을 했다. 그래서 진주의 문학열은 대단했다. 설창수, 이경순 두 원로를 중심하여 위의 두 동인회원외에 이형기, 이명길, 김수성, 전기수, 한동렬, 김석규, 최용호 등이 그에 많은 시와 수필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내게 행운의 기회가 왔다. 4․19 이듬해 어느 가을날 「경남일보」 편집국장인 김수성 시인이 나를 만나자고 하여 약속한 다방에서 만났더니 당시 연재하고 있는 소설의 작가가 사정이 있어 중단을 하게 되었는데 그 뒤를 바로 이어 내가 연재소설을 써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등단도 안한 무명의 문학지망생에 지나지 않고 한번도 신문연재를 써 본 적이 없는 내가 그것을 감당하기는 턱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김국장은 신문사 입장도 있고 또 내겐 절호의 좋은 기회이니 용기를 내어 시키는 대로 하라고 반 명령 반 사정조로 나왔다. 나는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했다. 그래도 김국장은 그럴 시간이 없고 연재중인 소설 원고가 3회분 남았는데 그간에 필자 교체의 사고(社告)를 내고 1주일 후부터 작품이 나가도록 하라 하고 미리 자리를 떠버렸다.
나는 그것이 비록 땜방 출연이지만 두려움 반, 욕심 반을 안고 그날부터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고심하다 마침 쓰다가 둔 습작품이 있어 그것을 다시 손질하고 연재에 맞게 매수를 맞추어 내면서 뒤를 이어 쓰기로 작정하였다.
소설이 나간 날부터 매일 저녁 다방에 나가 독자들의 반응을 엿듣는 것이 일과 중 하나였고 밤이 늦도록 책상 앞에 앉아 끙끙대는데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소설의 제목은 「나발이」. 천방지축으로 세상사를 요리하며 떠들어 대는 한 독설가를 통해 당시 혼란된 사회상을 고발하는 주제였다. 앞의 연재소설이 낡고 진부한데 비해 나의 소설은 문장의 패기와 정의감이 넘친다는 평을 들었는데 나를 필자로 선정한 김수성 편집국장도 만족했고 많은 동료 문인들, 그리고 시민 독자들이 좋은 평을 해주었다.
나는 그런 인기에 붕 떠서 꽤 거만한 자세로 다방에 나타나 차를 마시며 문인대가인양 폼을 잡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고 유치하기 그지없지만 그것을 기회로 나의 문학적 인식과 위치 구축은 곤고하게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외 문학과 관련하여 잊지 못할 일은 개천예술제 때마다 개최된 「문학의 밤」이었다. 시내 중심지의 작은 다방을 빌어 참가한 국내외 유명무명 문인들이 모두 모여 시를 낭독하고 가곡도 부르고 조크도 하며 즐겼는데 나는 동인활동을 하고부터 회원들과 함께 그에 참석하여 다방 한 쪽 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벙어리 냉가슴 앓듯 문학에의 열정을 속으로만 불태우고 있었다.
문학의 밤의 하이라이트는 시낭송이나 저명 작가들의 신변담도 재미있었지만 1부를 마치고 2부에 베풀어진 주석이었다. 봉곡동 어느 허름한 주막집에 모여 막걸리나 동동주로 주거니 받거니 출출한 배를 채우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껄이다가 취할 대로 취하면 알게 모르게 헤어졌는데 남의 구두를 바꿔 신고 갔다가 다음날 아침 해장국집에서 다시 만나 자기 신발을 찾아보는 것이 순서였다. 거의 자기 것을 찾아 신게 되는 것이 기적이었다,
그런 나의 문학의 출발지인 진주는 생각만 해도 그리움과 추억과 낭만으로 나의 가슴을 적신다.
지금은 넓은 들판이 주택지가 되고 남강의 수량과 백사장도 줄어들고 도심의 많은 지형이 바뀌었을 뿐 아니라 당시 함께 활동을 하던 문인들도 상당수 면모를 찾을 수 없는데 신인들이 대거 출현하여 그 판도가 달라졌지만 그때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진주의 봄은 남강변에 나와 빨래하는 여인들로부터 온다. 날이 풀려 남강의 얼음이 녹으면 겨우내 모아두었던 빨래거리를 이고 나와 강변 바위에 즐비하게 앉아 빨래를 하는 여인들의 모습은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였다.
거의가 검정치마나 몸빼에 흰 저고리를 입고 머리엔 수건을 두르고 빨래를 하다 더우면 소매와 정강이를 걷어붙여 하얀 살결을 내놓고 힘껏 방망이질을 하며 옆사람과 얘기꽃을 피우는 모습은 생동감이 넘쳤고 게다가 홍조를 띤 얼굴은 모두가 미인이요, 아름다운 봄의 정령이었다.
그때 우리 학생들은 몇몇씩 무리를 지어 강으로 나가 빨래하는 여인들 앞에서 물장구를 치며 짓궂은 장난을 쳤고 성인이 되어서는 체면상 함부로 굴 수가 없어 팔짱을 끼고 숨어서 그 모습을 훔쳐보던 일은 수치스러움만은 아닌 것 같다.
진주는 그런 봄뿐만 아니라 四季가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들판에는 한겨울에도 무, 배추, 파, 시금치, 우엉이 풍성했고 각종 농장과 온실에는 아름다운 꽃과 청과가 그치지 않았으며 기후도 지리적으로 잔인하게 춥거나 덮지 않아 일년 내내 봄날이었다.
그런 생동하고 수려한 고장에서 젊은 시절 문학의 꿈을 익혔기에 비록 어설프나마 오늘날 나의 문학의 명맥은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또한 나의 문학의 길에 동행하며 함께 뛰고 달려준 소녀도 있었으니 그 이상 좋은 추억과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눈부터 웃던 그 소녀도 지금은 할머니가 되어 손주들의 재롱을 즐기며 그날을 회상하고 있을 것이다. 그 시절의 봄이 그립기만 하다.
첫댓글 떠나온 진주가 다시 그립습니다.진주서 출발한 문인들 이야기도 흥미롭군요. 남강문우회를 통하여 진주 문학의 르네상스가 왔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강석호님의 진주에 남겨진 문학이야기를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 시절의 문학의 병을 앓던 세대들이 오늘 모여서 남강문우회를 엮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문학의고향 진주 / 를 올려주신 강석호님 약속대로 글 올려주시고 또 좋은글 올려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진주가 그립습니다 그리운진주를 더욱 그립게 만드셨네요 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