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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저: http://blog.daum.net/didaudtns/5728666
답사코스: 의귀리 리사무소-2연대 1대대 2중대 주둔지-무장대 희생터-현의합장묘 희생자 학살터-구 현의 합장묘역-
헌마공신 김만일 묘-신 현의합장묘역-이맹이물-영궤모루주둔소 터(민악주둔소)-4.3 피난처 영궤-
송령이골 무장대 희생자묘-의귀리 리사무소 (약 15km) 제주4.3 연구소에서 주최하는 제17회 역사교실에 우연찮게 참가하게 되었다. 예전부터 4.3에 관심은 있었는 데. 관심 뿐이었다.
오늘은 가벼운 마음으로 제주도 도민이면 꼭 알아야 할 4.3 사건에 대해서 들어보기로 했다. 일단 차가 제공되었다.
아침 09:00 까지 신산공원집결이다. 카메라를 일단 챙기고 간단하게 가방을 챙긴다음에 출발했다.
40분 정도 차를 달려 의귀리초등학교에 도착해서 간단하게 오늘 행사하실 분들 소개하고 고생하신 분들 소개로
10분 정도 소요되었다.
*역사교실은 3차례에 걸쳐 진행된다.
오늘은 의귀.수망지역으로 무장대와 군부대의 격렬한 전투가 있었건 곳.
현의합장묘.
송령이골.
영궤모루주둔소 터(민악주둔소터) 가 당시의 상황을 전해 줄 것이다.
그리고 의귀리는 헌마공신 "김만일" 의 고향이기고 하다.
제주도의 아픈 과거, 울고 싶어도 소리내어 울지못한 설움을 가슴에 안고
살아야 했던 우리내 할머니.할아버지를 생각하면서 ....
*의귀초등학교
의귀초등학교는 4.3당시 1948년 12월26일부터 1949년 1월20일까지 제2연대 1대대 2중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실제 2중대원으로 이곳에 근무했었던 이 윤은 "진중일기" 에 "1대대 2중대는 1948년 12월16일 제주에 들어와 12월26일 의귀리에 주둔을 시작했다."고 한다.
또 2중대는 학교주변에 4개의 초소를 세우고 옥상에는 기관포를 설치했으며. 주위에는 모래가마니로 바리케이트를 만들었다고 하며 토벌이 본격화되면서 이들은 매일같이 주변 수색에 나섰고. 마을 주변의 숲이나 궤(동굴)에 숨어 있는 주민들을 발견하면 즉시 총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거나 잡힌 사람들. 내려오면 살려준다고 하여 돌아온 사람들을 학교 창고에 감금해 두었다. 이들 주민을 구출하려고 했는지 몰라도 1949년 1월12일. 무장대는 군 주둔지 습격을 감행했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이날 교전중에 4명의 군인 전사자와 무장대 수십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성을 잃은 군인들은 피의 보복으로 초등학교에 감금했던 주민들 80여명이 군인들에 의해 집단 총살되었다.
"진중일기" 에 이하면 이들 군인들은 무장대 습격 직후인 1월20일 이곳에서 철수하여 태흥리로 이동했다고 한다...
*3/4번 사진
무장대 희생터라고 했다. (의귀초등학교 바로 동녁편)
의귀초등학교 북쪽 밭. 오00 의 오영팟으로 1949년 1월12일
무장대의 군부대 습격 당시 교전 중에 군인이 쏜 기관총에 맞아 사망한
무장대의 시신들이 널 부러진 채 1년간 있었던 곳이다.
1년뒤 의귀리가 재건되면서 이곳의 시신들은 마을사람들에 의해 송령이골에
수습되어 묻혀 있다.
*5~7사진 : 현의합장묘 희생자 학살터
1949년 1월10일 30여명.
1월12일 80여명의 주민들이 총살된 곳이다.
의귀국민학교에 주둔한 2연대 1대대 2중대는 주변 수색을 계속하여.
초토화 이후 집을 잃고 은신하던 의귀리.수망리.한남리와 가시리 주민들을
현장에서 총살하거나 붙잡아 국민학교에 수용했다.
이 과정에서 젊은 청년들을 1949년 1월10일 이곳에서 김재춘.양기필 등
30명이 1차 총살되었다.
이어서 1949년 1월12일. 의귀리 주둔 군부대에 대한 무장대의 기습으로
치열한 전투 끝에 4명의 전사자를 낸 2중대는 곧바로 의귀국민학교에
수용됐던 주민 80여명을 끌어내 이곳에서 총살했다.
전형적인 보복학살로 김일석.김윤생.고경평.허성만.김순옥.고창숙.
양을영.양기학.양기원.양복선.부갑출.오승윤 등 의귀리뿐만 아니라 이웃
한남.수망.가시리 등 중산간 마을 출신의 노인은 물론 어린 아이들도
이때 대거 희생됐다.
이곳에서 어머니와 채 이름도 짓지 못한 동생을 잃은 김명운(남. 03년 71세)
씨는 "생후 15일 된 어린 동생이 어머니 품에서 같이 죽었다" 고 말했다.
이곳에 흙암 씌운채 아무렇게나 버려졌던 희생자들의 시신 일부는 1년쯤
지난 1950년 마을 재건 즈음에 유족들이 찾아갔다.
이때 옷가지나 기타 특이사항으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시신 일부를
유족들이 품치듯 찾아간 것이다.
찾아가지 않은 나머지 시신들은 토벌대의 명령에 따라 민보단에 의해
들것에 실려 으귀리 765-7번지 (구 현의합장묘역)에 집단 매장되었다.
*8사진
구 현의합장묘역으로 가는 길.....
*구 현의합장묘역
의귀국민학교 동녘밭에서 총살당한 희생자들의 시신을 집단 매장했던 곳이다.
이후 이곳에 가족이 매장되어 있다고 확신하는 유족들을 중심으로 봉분을 쌓고 성묘를 하며 1976년 "삼묘동친회" 를 결성했다. 세 무덤에 묻힌 사람의 후손들은 같은 친척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1983년 "현의합장묘" 비석을 세웠다.
한편 현의합장묘는 2003년 9월16일부터 20일까지 유해발굴 및 추도식을 갖고 수망리 지경의 새로운 묘역에 안장했다.
봉분을 파헤친 결과.뼈들이 얽히고 설킨 상태이며 일부는 심하게 부식돼 그 흔적조차 없어 당시 참상을 짐작케 했다.
유해발굴 결과 서쪽 묘에서 17구, 가운데 8구, 동쪽에서 14구가 발굴되었다.
또 숟가락. 비녀,혁대.머리에 박힌 총탄 등의 유물이 나오기도 했다.
현재는 현의합장영령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싸늘한 비문에는 ........!
이 곳은 4.3 사건 당시인 1949년 1월12일.
의귀초등학교에 수용되었던 80여명의 의귀리.수망리 주민들이 국군 제2연대 군인들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하고나서 그 이듬해 봄 세개의 구덩이에 "멜젓담듯" 매장되었던 옛 터이다.
이름 석자 얻지 못한 어린아이에세부터 예순이 넘은 부모형제의 시신
조차 제대로 감장하지 못한 아픔을 속으로만 삭이던 유족들은 그 후 묘역을 마련하고 단장하며 반세기가 넘도록 의로운 넋들이 함께 묻혔던 이곳에서 추모의 옷깃을 여며왔다. 그러던 차에 수망리 신산모루에 새로운 유택을 마련하고
2003년 9월16일 이장과정에서 서쪽 봉분 17구, .가운데 봉분 8구. 동쪽 봉분 14구 등 총 39구(남자 15구, 여자 1구,청소년 추정2구 포함한 성별 미상 17구)가 다수의 유물과 함께 확인되었지만.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다수의 유해는 이미 흙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현의합장 영령들이 54년동안 머물렀던 이곳에서 피를 머금고 자라는 풀 한포기. 흙 한 줌,
이 시대를 증언하고 있기에 이곳에 발걸음 한이들이여! 그대들 가슴에 인권의 소중함 품고 가시길 기원하며 이 비를 세운다
2010년 5월19일
*헌마공신 김만일 묘 가는 길~
*선데기소(선댁이):마르지 않는 생명수
남원읍 위귀리 리사무소 돈물냇가를 따라 500m 지점 옛날 삼나무밭에 현씨가 살면서 여기서 물을 구해 먹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지고 있다...
출처: http://jejuvill.net/jejutown/domain-root/4206/
*의귀리 김만일 묘역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5호
소재지: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1773번지, 지정일: 2009.7.29
조선중기 헌마공신 김만일 분묘는 비교적 정확한 축조시기를 알 수 있어.
17세기 제주분묘의 산담과 봉분의 축조양식 및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묘역 내에는 동일시기로 추정되는 봉분 1기. 혼유석1기. 비석 1기. 문인석 2기 등이 있으며. 문인석은 돌하르방과 같은
형태의 제주형으로 제주 고유의 석물문화를 밝히는 데 중요자료가 된다.
헌마공신 김만일은 1592년부터 인조대(1623~1649)에 걸쳐 계속된 전쟁당시에 자신의 제주마를 수차 국가에 헌납하여
"헌마공신" 이란 칭호를 받았다.
지위는 종2품 가선대부 오위도총부도총관, 이어 종1품 승정대부까지 다다랐고, 그 후손들은 효종 9년(1658)부터 고종 32년(1895)까지 김만일의 말목장을 비롯한 산마장의 감독관을 세습해 나갔다..
선데기소를 지나 힘들게 올라간 곳은 의귀리 김만일 묘지...
김만일은 말을 헌납한 공으로 관이 부총관에 이르고 나이는 80에 죽었다고 한다.
남원읍 의귀리를 관통하는 서중천 변에 위치한 "반기밭" 일대는 이들 김만일 가문과 깊은 연관이 있는 텃밭이다.
이곳에는 세습감독관을 지내며 제주목장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겼던 김만일 후손들의 무덤이 위치하고 있다.
김만일 분묘는 원형의 대형봉분으로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민묘와는 형태와 규모면에서 크게 달라 유적으로서도
가치가 크며 분묘 문인석의 경우도 17새기 전반에 조성됐기 때문에, 조선중기의 표식유물로 삼을 수 있는
충분한 가치를 지녔다.
김만일 묘의 동자석 4기가 경기도로 반출된 것을 찾아 왔으나. 다시 도둑맞아 현재 동자석이 있었던 자리는
움푹 패인 채 남아있다.
한편, 김만일 가계의 소장 고문서들은 1994년 후손들에 의해 제주교육박물관에 기탁됐다.
김만일의 아들인 김대길의 초대 산마감목관 임명교지를 포함해 국가가 김만일 가계의 구성원에게 관직을 내리면서
발급했던 교지와 교첩, 과거급제 합격증서 등 모두 51점에 달한다.(제주일보 2007/10/05)
김만일 묘의 오른쪽에는 부모의 묘가 있고 100m 쯤 앞에는 역개 감목관 묘역이 있다. (고영철의 역사교실)
*김만일묘역을 보고 현의합장묘역으로 이동 중.....
이때쯤 피곤해진다.
도로변을 지나서 북쪽으로 가는 길목에 "녹주백반석"
제주가마찜질방으로 가는 의정표가 보인다.
*현의합장묘역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동쪽에는 전시관이 있어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우리 일행은 여기서 점심식사를 했다.
싸늘한 공기가 과거의 아픈 상처를 전해주는 것 같았다.
*싸늘한 비문에는 ........!
유난히 매섭고 시렸던 무자.기축년 그 겨울
곰도 범도 무서워 잔뜩 웅크려 지내면서도
따뜻한 봄날 오려니 했더이다. 아, 그랬는 데....
거동 불편한 하르방 할망, 꽃다운 젊은이들
이름조차 호적부에 올리지 못한 물애기까지
악독한 총칼 앞에 원통하게 스러져 갔나이다.
허공 중에 흩어진 영혼, 짓이겨져 뒤엉킨 육신
제대로 감장하지 못한 불효 천년을 간다는 데
무시로 도지는 설움 앞에 행여, 누가 들을까
울음조차 속으로만 삼키던 무정한 세월이여!
'살암시난 살아져라' 위안 삼아 버틴 세월이여!
앙상한 어웍밭 방엣불 질러 죽이고 태웠어도
뿌리까지 다 태워 없애진 못하는 법 아닙니까
봄이면 희망처럼 삐죽이 새순 돋지 않던가요
참혹한 시절일랑 제발 다시오지 말라 빌고 빌며
뒤틀린 모진 역사 부채로 물려줄 수는 없다며
봉분 다지고 잔디 입혀 해원의 빗돌 세우나니
여기 발걸음한 이들이여! 잠시 옷깃을 여미어
한 가닥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 보듬고 가신다면
헛된 죽음 아니라 부활하는 새 생명이겠나이다.
*서기 2004년 10월07일
*이맹이물
4.3 의 길을 가는 데 하얀 리본이 보인다.
하얀천에 동백꽃을 그려놓고 옆에 4.3 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하얀리본...
이것이 4.3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표시를 따라가니, 이맹이물이 나온다..
이맹이물 주변은 늪지대처럼 질퍽질퍽거렸고. 그 위를 올라가니 웅덩이같은 조그마한 곳에 물이 고여 있었다.
마치 당같은 분위기였다..
가운데 폭낭이 자리잡고 있었고..
제주도 중산간 마을에서는 용천수가 거의 없는 데.
의귀리는 이곳에 있었다. 귀한 용천수였던 것 같다.
물나는 이맹이물을 지나, 이제 소로를 따라 오름쪽으로 쭉 올라간다.
가다가 지칠때쯤 길 양쪽에 빨갛게 달린 열매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남오미자"
열매를 보기는 처음이다.
이곳에 지천으로 보인다.
*남오미자-목련과
한국이 원산이다.
다섯가지 맛이 난다고 해서 오미자.
중국에서는 북방에서 생산되는 북오미자를 오미자라 하고.
이와 구별해 남방에서 생산되는 남오미자를 남오미자로 별도 구분한다..
국내의 경우 주로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한 산간지방에서 생산되는 것이 북오미자이고. 남부섬이나 해안지방에서 생산되는 것이 남오미자이다...
남오미자는 유명한 쓰임새가 머리 결을 좋게 하고
비듬을 없애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샴푸나 린스가 없던 시절에 이나무의 껍질을 삶아서 그 물에 머리를 감아 머리 결을 가꾸었다.
*물나는 이맹이물
의귀리 공동목장 입구를 통과하여 500m 정도 가다보면 길 북쪽에 이마처럼 튀어나왔다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물나는 이맹이가 있다.샘물로서 조금씩 나며. 목감(목축을 관장하는 사람) 이 지나며, 식수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의귀리공동목장 "봉천수"
4.3 의 길을 가다는 도움이다.
하얀천에 동백꽃을 그려놓고 옆에 4.3 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하얀리본...
이것이 4.3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표시를 따라가니
이맹이물이 나온다..
주변은 늪지대처럼 질퍽질퍽거렸고. 그 위를 올라가니 웅덩이같은
조그마한 곳에 물이 고여 있었다.
이제 영군모루주둔소 터로 가는 길이다.
삼나수로 가득 채워진 오름이 보인다. 오름이 궁금해서 물어보니
"민오름" 이라 했다.
제주도에는 민둥산이 많았다. 방목을 했기 때문에
일년에 한번씩 오름에 불을 놓았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이 민둥산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민오름" 이다.
민오름에서 조그마하게 보이는 오름은 "물영아리" 이란다.
발걸움이 무거울 때쯤 의귀리공동목장이란다.
소들이 평화롭게 물을 먹으러 왔는 지 여기저기 모여있다.
연못처럼 보이는 것이 봉천수다.
제주도는 용천수보다는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우물을 만든것이다.
웬만하면 이곳 봉천수는 마르지 않는 다 한다.
소떼중에서 검은소가 보인다.
혹시 임금님한테 진상했던 "흑우" 인가 해서
카메라에 담아본다.
*평화로운 의귀공동목장을 지나갈려고 하니 자꾸 소때가 우리를 향한다...
봉천수에 비친 음영은 참 아름답다. 지친 발걸음에 힘을 준다.
"영군모루주둔소 터" 에 다 왔나보다..
제일 높은 고지에 산불감시원초소가 있었다.
아...
이곳이 영군모루주둔소 터 이구나...
그렇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 보면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돌담으로 둘러싼 이름모를 무덤들만이 바둑판처럼 수놓아있다.
어떤 무덤은 귀티가 나는 보라색 "꽃향유" 가 봉분을 장식하고 있는 무덤이 많이 보인다.
아까 민오름을 지나올때 길가 주변에 꽃향유가 지천에 깔려 있더니, 이곳 망자의 무덤에도 지천에 꽃향유가 장식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무덤은 평화로워보인다.
사람들은 벌써 해설자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사진찍다 일행에서 처진 나는 부지런히 달려간다.
4번사진이 바로 영군모루주둔소 터 라고 했다. 지난날이 아픈 상처는 다 덮고 지금 현재만을 간직하고 있는 것 처럼
너무 평화스러워 보인다.
*영군모루주둔소 터
영군모루주둔소는 1948년 12월 하순부터 1949년 1월 중순까지
위귀국민학교에 주둔했던 2연대 1대대 2중대 군인들이
전방초소로 활용했던 곳이다.
이후에도 경찰 주둔소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고 한다.
김홍석 씨는 "귀순 후 1949년 붐에 이곳에서 군인들의 심부름을
한 적이 있다. 여군모루주둔소 아래쪽 샘물이 있는 데,
거기 가서 물을 떠오라고 해서 철모에 물을 받아온 적이 있다."
라고 말했다.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속냉이골 의귀사건 희생자 유골방치 터
송령이골(속냉이골) 무장애 희생자묘 라고 했다.
1949년 1우러12일 의귀국민학교 전투에서 사망한 무장대의 시신이 집단 매장된 곳이다. 이 날 의귀국민학교에 주둔한
2연대 1대대 2중대 본부를 상대로 한 무장대의 기습은 3시간이 넘는 치열한 전추로 회자되고 있다. 이 날 군인 4명이 전사했지만 그보다 휠씬 많은 수의 무장대가 교전 중 사망했다.
이윤의 "진중일기" 에는 "오늘, 이 전투에서 우리 중대는 안중사 이하 4명이 전사했고, 5명이 부상하는 피해를 본 반면,
반도들은 사살 96명, 생포 14명,소총 60정과 도검류 다수와 놈들의 기밀문서 등을 노획했다" 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밝히고 있는 사살 숫자가 의귀국민학교에 수용했다가 총살한 일반주민과 무장대 사망자를 합친 숫자인지는 불명확하지만,
아무튼 많으 수의 무장대가 사망했다.
주민들은 약 30여구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의 시신은 학교 뒷밭에 1년여 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이곳 송령이골에 집단 매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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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은 존엄한 것이다.
옛말에 "적의 무덤 앞을 지나더라도 먼저 큰 절부터 올리고 가라" 고 했다.
바로 이곳은 제주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4.3사건" 의 화중에 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영령들의 유골이 방치된 곳이다.
당시 국군2연대 1대대 2중대는 남원읍 중산간 마을 일대의 수많은 주민들을 용공분자로 몰아 의귀초등학교에 수용하고 있었다.
1949년 1월12일(음력 48년 12월14일) 새벽 무장대들이 내습, 주민피해를 막아보려 했지만 주둔군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희생되고 말앗다.
이 때 희생된 십수명의 무장대들은 근처 밭에 버려져 썩어가다가 몇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곳에 묻혔지만. 내내 돌보는 사람 하나 없이 덤불 속에 방치돼왔다. 우리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은 우익과 좌익 모두를 이념대립의 희생자로 규정한다.
학살된 민간인뿐만 아니라 군인.경찰과 무장대 등 그 모두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때 희생된 내형제 내 부모였다.
평화의 섬을 꿈꾸는 제주도 바로 이곳에서부터 대립과 갈등이 고리를 끊어야 한다.
우리 순례단은 생명평화의 통일시대를 간절히 염원하며, 모성의 산인 지리산과 한라산의 이름으로 방치된 묘역을 다듬고 천도재를 올리며 이 푯말을 세운다.
2004년 5월13일
생명평화탁발순례단 일동
*제주 4.3 사건이란?
제주 4.3사건은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현대사에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 당국의 정책 실패와 사회문제 등으로 민심이 불안한 상황에서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제주도민의 민.관 총파업에 대응해 미군정은 응원경찰과 서청단원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테러와 고문을 일삼았다.
결국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단정반대를 기치로
소요사태가 발생하였고. 5.10 총선거(200개 선거구) 에서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된 뒤 정부는 제주도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군 병력을 증파하여 강력한 진압작전을 펼쳤다.
11월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제주도 전역에서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자와 내륙지방 형무소 재소자 등이 또 다시 희생이 되었다.
결국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되었다.
이로써. 1947년 3.1절이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3사건은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2만5천~3만 명의 주민들이 희생된 가운데 7년 7개월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세계적인 냉정 상황과 한반도 분단체제의 고착화 과정에서 발발.전개된 제주 4.3사건은 국가공권력에 의한
집단희생으로 귀결되었고, 이 후 반세기를 넘어 진상 규명운동의 과정을 거쳐 명예회복을 통한 화해와 상생의
해결과정을 밟고 있다.
*출처: 제주4.3연구소 책자,제주 4.3 평화공원 책자에서....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