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입문-020] : 전도서(코헬렛) 입문
1. 저자와 시대
전도서는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임금인 코헬렛의 말”로 전해진다(1,1). 그런데 코헬렛은, 앞으로 자세히 말하게 되겠지만, 인명이 아니라 직책 또는 직능의 명칭이다. 이 1,1의 말은 의도적으로 임금의 이름을 직접 대지 않고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청중이나 독자는 그가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곧 솔로몬 임금을 지칭하는 것이다(전도 1 - 2와 1열왕 3 이하 비교). 그래서 전통적으로 전도서의 저자는 솔로몬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이 책에서 쓰인 히브리말은 언어적으로 구약성서에서 가장 후대의 저술들이 지니는 특색을 띠고 있다. 곧 구약성서에서는 이 책에 단 한 번만 나오면서, 성서 후대의 히브리말에서는 자주 쓰이는 어휘들이 많다는 점과 여기 쓰인 히브리말이 어휘에서뿐만 아니라 형태론과 구문론에서도 아람화 경향을 강하게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전도서에서는 더 나아가서 드물기는 하지만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정벌로 시작된 지중해 동쪽 언어들의 그리스화한 흔적들도 보인다. 또한 전통적인 지혜의 가르침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특히 이 가르침의 중심 사상인 현세적 응보 체계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하는 내용등은 이 책을 기원전 6세기의 유배 귀환 훨씬 후대에 자리잡게 한다.
집회서의 저자는 전도서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쿰란(제4동굴)에서는 기원전 2세기 중엽에 필사된 전도서의 몇 줄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전도서 저자의 활동 시기는 마카베오 시대 이전, 곧 기원전 3세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활동장소로 에집트 등이 제안되기도 하지만, 이 책에 담긴 제반 생활 양식 및 성전과 제사에 대한 언급(4,17; 9,2)등은 팔레스티나(예루살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도서는 전 시대의 임금을 저자로 내세워 문학 양식(樣式)의 일종인 픽션의 형태를 취한다. 이러한 기법은 잠언에서도 마찬가지이다(잠언 1,1 참조). 이스라엘 지혜의 정점이며 대부이고 지혜와 부의 원형인 솔로몬의 입을 통하여, 그의 권위 아래 지혜의 가르침을 전개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전도서에서 일곱 번(1,1.2.12; 7,27; 12,8.9.10) 언급되는 코헬렛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저자가 임금이었다는 말은 1 - 2장으로 끝나고 3장에서부터는 더 이상 그의 왕위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을 뿐더러, 왕실과도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
코헬렛의 제자이었을 사람이 붙인 발문(跋文)에 따르면 그는 직업적인 현인으로서 백성에게 지혜를 가르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전해 내려오는 잠언들을 수집 정리 기록하였고 스스로 새로운 잠언들을 지어내기도 하였다(12,9-10). 이는 전도서의 저자에만 한정된 특수성은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현인들은 모두 이러한 활동을 하였다(잠언 25,1과 집회서 맛머리말맜 참조). 다만, 12,9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보다는 성인들에게 자기의 인생관을 설파하는 일종의 ‘철학자’를 연상하는 것이 적합하리라 본다.
전도서는 “허무로다, 허무! - 코헬렛이 말한다`- /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1,2)라는 말로 시작하고, 같은 말로 끝을 맺는다(12,8).``
첫머리에 이미 결론을 내세우고, 책 전체를 통하여 설파한 내용을 끝머리에서 재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 부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논리적인 사고 전개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전도서는 예컨대 인생의 허무성과 사물의 불가해성에 대한 논문이 아니다. 이 책에서는 현대적 의미의 논문이 갖는 어떠한 논리적 구조도 찾아볼 수 없다. 반면에, 이 책의 바탕에 깔린 사상과 거기에 쓰이는 언어는 전체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통일성을 드러낸다. 한 가지 사상을 동일한 문체로 표현하면서, 논리를 직선적으로 펼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순환적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과 내용의 단일적이고 통일적인 맥락은 저자가 오직 한 사람임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저자의 손에 의해서 또는 스승의 사후 제자의 손에 의해서 발간되었는지는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12,9 이하의 맛발문맜은 제자가 덧붙인 것이 확실하다. 반면에 이 편집자의 손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또 코헬렛의 말 중에서 이스라엘의 전통적 신앙과 지혜의 가르침에 벗어나는 사항들에 대한 수정이 있는지, 있다면 그 수정이 구체적으로 어떤 구절들에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가설로 머물 수밖에 없다.
2. 책 이름
‘전도서(傳道書)’라는 한자로 된 책 이름은 1,1의 코헬렛이라는 히브리말에 기인한다. 유다교에서 시작하여 예로니모를 거쳐 루터에 이르는 전통 중의 하나는 이 낱말을 ‘전도자’, ‘전도사’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전통을 동양권에서도 받아들여 이 책을 전도서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붙여진 책 이름은 논리적이라 할 수 없다.
본디 ‘전도자/전도사’에 ‘서’를 붙여 ‘전도자서’ 또는 ‘전도사서’라 해야 했다. 그러나 그냥 전도서라 이름지음으로써, 이 책이 이를테면 종교의 도리를 전파하기 위하여 집필된 책으로 오해될 여지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맛공동번역 성서맜는 코헬렛을 “전도자”라 하지 않고 “설교자”로 번역하였다. 이에 따라 이 책의 이름은 “설교서”, 또는 더 정확하게는 “설교자서”가 됐어야 했다.
그러나 코헬렛의 뜻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이 낱말은 ‘집회’, ‘회중’, ‘국민 공동체’ 등을 뜻하는 ‘카할’의 동사형 ‘모이다’의 단순형 여성 단수 분사이다. 그래서 이 낱말은 집회를 이룬 공동체 안의 어떤 직책이나 직능, 더 나아가서 이 직책/직능을 맡은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칠십인역은 (우리말로 음역하여) 에클레시아스테스(이대로 책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회중’, ‘교회의 구성원’으로, 히브리 성서를 라틴말로 번역한 예로니모는 concionator ‘연사(演士)’로 옮긴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코헬렛은 ‘집회의 의장’ 또는 ‘집회의 연사’라는 뜻을 지녔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 밖에도 ‘수집가’, ‘수집 책임자’, 또는 ‘대변인’으로 옮기는 학자들도 있다. 원뜻이 어떠하였든간에 코헬렛은 일반명사에서 출발하여, 이 명칭을 지닌 이의 가명 또는 제자들이 부르던 호칭이 되고, 그럼으로써 이 현인의 이름처럼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뜻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근래에 와서는 코헬렛을 번역하지 않고 음역하는 경향이 짙은데, 이는 옳은 추세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말에서도 책 이름이자, 동시에 본문에도 나오는 이 명칭을 일관성 있게 코헬렛으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전도서’라는 책 이름이 굳어져 있기 때문에 당분간 이 명칭과 코헬렛을 함께 쓰기로 한다.
3. 개괄적 내용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전도서는 분명한 순서와 구조에 따라 주제들을 전개해 나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략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이 책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간추려볼 수 있겠다.
우선 사물의 순환(循環) 운동에 관한 맛머리말맜(1,3-11)이 나오고 이어서 세 부분이 뒤따른다. 첫째 부분에서 코헬렛은 일종의 자기 반성을 하는데(1,12`─`2,26), 인간이 설사 그 누구보다도 많은 소원을 채웠다 하더라도 인간의 조건을 탈피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소용이 없다는 확인으로 끝을 맺는다. 즐기는 것밖에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쓰디쓴 맛만이 입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허무라고 코헬렛은 말한다.
둘째 부분에서(3,1 - 6,12) 코헬렛은, 시간의 영속성과 일시적 순간 사이의 대립에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모든 현실이 부정적인 면과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것들의 상대성을 인식하면서 이 또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는 운명의 신비 앞에서 철학적 번민을 토로하게 된다(3,22; 6,12; 7,14; 8,7; 9,12; 10,14). 인생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1,3; 2,22; 3,9; 5,15)? 누가 인생과 세상사를 알 수 있는가? 인간은 자기 실존의 부조리를 탈피할 수 있는가? 완전한 진퇴양난 속에 자포자기만이, 또는 (현대의 어떤 실존철학자와 관련지어) 구토증만이 남는 게 아닌가? 자살과 향략에로의 욕구 사이에서 코헬렛은 진정으로 인간적인 자세를 발견하고자 시도한다.
셋째 부분(7,1 - 12,7)은, 두번째 부분이 열네 번에 걸쳐 ‘…? 때(또는, …하기 위한 때)’라는 말로 시작했듯이(히브리말에서는 이 글귀가 문장 앞에 온다), 비교의 형태를 취하는 일련의 일곱 가지 생각들과 함께 출발한다. 이어서 저자는 지혜, 이것과 정의의 관계, 여자 문제, 권력의 행사, 운명의 비밀, 현세적 정의에 대한 전통적 주제, 사회적 관계 및 전도되고 폭력적인 사회에서 이들이 취하는 명백히 비정상적인 형태 등을 다룬다. 이전의 욥처럼(9,22; 21,7 등 비교; 또한 시편 37; 49; 73; 예레 12,1; 말라 3,14-15도 참조) 코헬렛은, 사람들을 실존에 투신하도록 격려하는 현인들의 언행을 타협주의이며 공허한 수사학(修辭學)에 불과하다고 반발한다. 말을 많이 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며, 이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10,14). 역설적으로 코헬렛은 비효율성으로 귀결되는 극단적인 입장들을 고발한다(일례로 7,16-17 참조: “너는 너무 의롭게 되지 말고 / 지나치게 지혜로이 행동하지 마라.`… 너는 너무 악하게 되지 말고 / 바보가 되지 마라”). 그러나 그는 기회주의자가 아니다. 동시에 그를 단순한 양분법에 따라 비관론자 또는 낙관론자라 부르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그는 현실적이고 냉철한 정신과 이성의 소유자이다. 그는 진실과 사실에 대한 정열을 지녔다. 결국 삶은 그에게 좋은 것이다. 그것은, 천사나 금수처럼 굴려는 시도없이, 기쁨과 함께 받아들여야 하는 하느님의 선물이다(3,13; 5,17; 8,15; 9,9 참조).
코헬렛은 학파를 형성하지 않는다. 그는 ‘이스라엘의 지혜’라는 큰 흐름의 가장자리에 서서 정통 신앙과 전통적 지혜의 가르침에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몇몇 시편들을(39; 62; 88; 90) 전도서에 근접시킬 수는 있겠다. 그리고 전도서가 나온 다음 몇십 년 후에 등장하여 코헬렛의 사상을 잘 알고 있었던 집회서는(특히 집회 14 참조), 전통적 사상에로의 복귀를 드러낸다. 또한 하느님과의 미래 생활에 대한 새로운 전망 속에 코헬렛과는 전적으로 반대 입장을 취하는 지혜 2,1-10은 역으로 전도서에 의하여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4. 성서 밖의 유사한 전승
전도서는 헬레니즘이 전 중동 지방을 풍미하던 시대에 편찬되었다. 자연히 그리스 철학 사상들과 접촉이 있었으리라 추측되지만, 그것은 막연하고 불명확하다. 코헬렛의 사상, 그리고 에피큐리즘과 스토아 철학과 시니시즘[犬儒哲學] 사이에 공통된 분위기가 상존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전도서의 저자는 의심의 여지없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팔레스티나를 다스리던 때 곧 기원전 3세기에 살았다. 그는 아마도 헬레니즘의 사상가들과 함께 대화를 하려고 시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코헬렛과 그리스 철학자들 사이에는 유사점보다는 상이점이 더 많으며, 그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그리스적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중동적, 더 분명하게는 이스라엘-유다적이다. 전도서에 대한 그리스 철학의 직접적 영향은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반면에, 이스라엘 지혜문학의 원천 중의 하나는 오래 전부터 정치 문화적으로 팔레스티나에 영향을 끼쳐온 에집트이다. 예컨대 잠언 22,17`─`23,14는 에집트의 맛아멘엠오페의 지혜맜와 매우 흡사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이 맛지혜맜의 구절을 직접 인용하기도 한다. 전도서와 관련해서는 맛절망에 빠진 자와 제 영혼 사이의 대화맜, 맛하프 연주자의 노래맜 등이 비교된다. 그러나 분명하게 드러나는 접촉점은 메소포타미아의 전승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도서의 주제들이나 표현 방법들은 맛바빌론의 코헬렛맜으로 불리는 문헌과, 특히 고대 중동 전역에 공동의 정신 문화 유산으로 전해오던 맛길가메쉬 서사시맜와 큰 유사점을 보이고 있다(일례로 9,9?의 각주 참조). 그러나 전도서가 이러한 성서 외 전승들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저술되었거나, 또는 그들이 코헬렛으로 하여금 전도서를 집필하도록 자극을 준 것은 아니다. 코헬렛이 그렇게 고통스럽게 제기하는 문제점은 이스라엘의 사상적 맥락 안에서, 특히 전통적 지혜의 가르침과의 상관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5. 문학 양식
전도서 역시 지혜문학서로서 전통적인 지혜문학의 양식들을 사용하며, 다른 지혜문학서들에서와 같이 운문으로 되어 있는 ‘잠언 양식’이 기본을 이룬다. 이 밖에 스승이 제자들에게 하는 말투인 ‘너’의 호칭을 자주 쓰고, 또 자신의 직접적 또는 가상적 경험을 독백 형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유다인 성서 전승가들은 전도서를 운문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시편-욥기-잠언의 악센트 체계와는 다른 일반 체계를 이 책에 적용하였다. 그러나 전도서의 문장은 대구법을 위시한 히브리 시(詩)의 특성들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12,1-7에 나오는 인간의 말년(末年)에 대한 묘사는 성서 시문학의 최고 절정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코헬렛은 어떤 일정한 운율에 얽매이지 않고, 이를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 자유롭게 구사한다. 어쩌면 그의 사상이 전통에 얽매이지 않듯, 코헬렛은 문장의 형식도 일정한 틀에 묶이는 것을 바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거의 ‘호칭기도’와 같은 단조로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이러한 반복 형식 또한 저자가 역설하고자 하는 바를 뒷받침하고 있다. 사실, 코헬렛이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주제들이 구약성서 자체나 고대 중동의 문헌들과 비교해서 완전히 새로운 것들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들을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그 주제들이 더욱 강력한 형태로 새롭게 전달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번역 성서들은 전도서를 운문과 산문 형식으로 나누어서 옮긴다. 그러나 그 구분은 일치하지 않는다. 이 책의 문장들 중에는 명백한 산문들도 있지만, 우리는 일괄적으로 운문 형태로 옮긴다. 전도서의 산문도 일정한 운율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운문으로 옮겨놓는 것이 우리말에서 읽고 이해하는 데 더 수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 전도서와 이스라엘의 신앙
코헬렛은 정통 신앙 및 전통적 지혜와 거리를 두고 이것들에 따른 선입견 없이 자기만의 냉철한 눈과 냉엄한 판단력으로 인생과 세상사를 관찰한다. 그 결과로 전통적 지혜가 가르치는 윤리적 세계 질서가 그에게는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세상의 윤리적 바탕이 상실된 것이다. 윤리 도덕적 행동에 상응하는 응보없이,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야 할 바를 겪는 의인들이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야 할 바를 누리는 악인들이 있다(8,14). 인간이라면 모두에게 어떠한 구분이나 차이도 없는 동일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9,2). 지혜를 추구하는 이나 어리석음으로 일관하는 자나 모두 같은 종말을 겪게 되고(2,15), 인간이나 짐승도 같은 운명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이 짐승보다 나을 것도 없다(3,19). 인간들은 이를 알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에는 악과 어리석음만이 자리한다(9,3). 인생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세상사의 불가해성으로 이어진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일정한 질서나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불가해한 세상에 사는 인생의 모든 것이 결국 허무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선인들이 그렇게 열심히 추구해 왔던 지혜 역시 소용이 없다. 물론 빛이 어둠보다 낫듯이, 지혜가 우매함보다는 낫지만, 지혜를 찾음은 근본적으로 헛수고이다(2,15). 전통적 지혜가 그 윤리적 세계관적 바탕으로부터 효력을 상실한 것이다.
이러한 인생의 허무성과 사물의 불가해성은 결국 코헬렛의 신관(神觀)과 하느님께 대한 생각에 기인한다. 그는 야훼라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께서 선택하신 백성과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의 이름을 채택하지 않는다. 오직 “하느님” 또는 더 정확히 말해서 “신”(정관사가 붙은 엘로힘)만을 사용한다.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께서는 하늘 위에 계시는 존재이다(5,1).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내려오셔서 인간과 대화를 나누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다. 모든 것을 주재하시면서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지 않으신다(8,16-17). 코헬렛에게 있어 하느님께서는 인격적 신이 아니시다.
코헬렛의 근본적인 딜레마는 하느님께 대한 문제를 신앙의 입장이나, 신학적 견지에서가 아니라, 이러한 것들을 배제한 채 오직 인간적 지혜와 이성으로만 해결하려고 한 데에 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이스라엘의 인격적-실존적 신앙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알지 못한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상실은 인간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한 신뢰의 상실을 의미한다. 결국, 결론은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코헬렛은 삶 자체를 싫어하게 된다(2,17). 살아 있는 사람보다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고인들이 더 행복하고, 더더욱 낫기로는 아예 태어나지 않아 이 세상에서 자행되는 불의와 허무한 일들을 보지 않는 인간이라고 말한다(4,2-3).
그렇다고 코헬렛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 자체를 상실한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자기 민족의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있어서도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시다(11,5; 또한 8,17도 참조). 그분께서는 창조주로서(12,1) 세상을 아름답게(3,11), 그리고 사람을 올바로 만드셨다(7,29). 사람들은 그분을 경외해야 하고(3,14; 5,6; 7,18; 또한 8,12도 참조) 그분께 영성적 경신례를 드려야 한다(4,17). 그분께서는 각자를 그 행실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3,17; 11,9; 또한 9,7; 12,14도 참조). 이러한 최종적 심판이 내려질 때까지, 인간에게는 제한적이기는 하나 실제적인 행복이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된다(8,15; 9,7; 11,9). 그리고 인간은 너무 집착함 없이 이러한 행복을 누리도록 해야 한다. 코헬렛은 또한 선인들처럼 현인으로서 이러한 사항들을 지혜문학적 언어로 백성들에게 가르친다.
전통적 지혜의 파산, 존재의 환멸, 모든 선의 무상함 앞에서 인간은 만족스럽게 될 수 없다. 코헬렛은 절대적인 것에 대한 향수를 품는다. 그는 우주 안에서의 자기 존재에 대한 계시와 자기 운명의 의미에 대한계시를 갈망한다. 코헬렛은 자신의 전존재를 투신하면서, 그리고 거의 ‘학문적으로’ 전통적 신앙이 열어둔 채방치해 놓은 심연을 드러낸다. 오직 그리스도의 오심만이 그것을 메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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