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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의 봄
김 덕 호
눈앞이 캄캄하고 아찔했다.
뾰족이 튀어나온 칼바위를 보자 소름이 끼쳤다.
‘뛰어 내리자, 아냐 조금만 더 있다가 뛰어내리자.’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하다.
자살을 한다고 어렵게 여기까지 왔는데 막상 절벽 밑을 내려다보니 망설여지고 겁이 났다.
자살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송선주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다리가 후들거려 땅 바닥에 막 앉으려던 참이였다.
“이봐요, 눈 질끈 감고 그냥 뛰어 내려요. 잠깐이면 끝나요. 죽는 사람이 뭐가 그리 겁이 많아 망설이누. 내참.”
등 뒤에서 그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성이 나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까짓 생수 한 병 줬다고 아픈 사람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간섭하고 약을 올려? 못났 놈 !
“저리가요, 남의 일에 웬 간섭이 그리 많아요.”
그녀는 화가 나서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빽 질렀다.
“아줌마! 생각이 많으면 몬 죽어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뛰어 내리면 되는데.”
“어머나, 별꼴이야. 아줌마라니! 죽긴 왜 죽어요.
누가 죽는다고 그래, 흥.”
그녀는 독이 머리 끝까지 올랐다.가지런히 벗어놓았던 신을 다시 신고 일어서면서 앙칼지게 쏴 부쳤다.
“여사님, 내가 먹던 소주 한 모금 드릴까?
소주 마시면 간덩이가 부어 겁이 안 난다오.”
뒤에서 그가 또 수작을 부리며 부아를 질렀다.
“듣기 싫어, 저리가요.”
그녀는 귀찮아서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가긴 어딜 가요. 지금 댁이 서있는 그 자린,
내가 먼저 맡아 논 자린데.”
“어머머, 이 양반 좀 봐. 여기 이름 써 부쳐놨나?”
그녀는 기분이 나빠 이죽거렸다.
“이 여자 좀 보게, 점쟁인가? 건 또 우째 알았노? 땅바닥을 봐요, 땅바닥을!”
선주는 무심코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여기 저기 나뒹구는 소주병과
수북이 쌓여있는 담배꽁초들,
그리고 나무 꼬챙이로 썼는지
땅바닥에 깊숙이‘박진수’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순간 그녀는 알 수 없는 전율이 일었다.
땅바닥에는 생사의 기로에 선
한 남자의 몸부림과 절규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
그녀는 울컥했다.
자기보다 열배나 더 죽고 싶어하는
한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묘한 동료 의식과 친밀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긴 언제 왔어요?”선주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아픈 다리를 앞으로 주욱 밀면서 손을 짚고 앉았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제 아침 먹고 여길 와서 안즉도 몬 뛰어 내리고 있네요. 어허허, 난 내가 이렇게 겁이 많은 줄 여기 와서 알았다오.
우리 같이 뛰어내립시다.”
남자가 나즈막이 말했다.
“아니, 미쳤어요? 생판 모르는 남자하고 같이 죽게.”
아까는 그가 큰 소리로 분노의 감정을 자극하는 바람에
엉겹결에 왜 죽느냐는 말이 튀어나왔다.
죽음이 무엇이 무섭겠냐고 장담하던 그녀 자신이 절벽 앞에서 한없이 약해빠져 있음이 서글펐다.
그녀가 그에게 다 읽히고 있는 듯 했다.
죽을 힘 못지않게 살 힘을 테스트받는 것 같았다.
살아갈 이유까지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지팡이를 짚고 재차 벌떡 일어섰다.
“정말 그러네요. 남들은 바람나서 둘이서 정사한줄 알겠네요. 나야 괜찮지만 댁이 오해받겠구먼요.
그럼 내가 등을 밀어줄까요?”
그가 슬며시 한 발짝 다가서며 말했다.
그녀는 겁이 덜컥 났다.‘
저 미친놈이 정말 등을 밀면 자기는
아무도 모르게 죽을게 아닌가?’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왜, 왜 이래요. 어머나! 사람 살-려, 여기 사람 죽-어요.”
그가 그녀의 등에 손을 얹자,
그녀는 자살하러 온 것도 잊고 놀라서
동동 뛰며 냅다 고함을 질렀다.
그제서야 그가 흠칫하며 저만치 물러났다.
다시 절벽 밑을 내려다보았다.
눈앞이 가물거렸다. 그래도 뛰어 내려야지,
몇 번이고 다잡았으나 쉽질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다가
좌석리 입구 저수지에 빠져 죽는게 나을 뻔 했다.
생각이 많아서인지 몸을 던질 용기가 없는가 보다.
지금쯤 병원이 야단났을 것이다.
원미와 간호사들이 챠트와 외출증에 써있는 연락처
여기저기에 전화를 했거나
어쩌면 경찰서에 신고까지 했을 것이다.
병원에 거짓말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환우들이 곤히 자고 있는 새벽
콜택시를 타고 고치령까지 와서 해가 중천을 지나도록
아직도 결행을 못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몹시 꼴불견이었다.
말이 절벽에 굴러 떨어질 정도로 위험하다는
고갯길에서 절벽아래 마락리가 눈에 들어왔다.
충북단양이 고향인 선주와 경북영주인 남편이
도경계점인 이곳을 즐겨
산행하다가 결혼하게 된 사연을 떠올렸다.
경북, 충북, 강원 3도를 끼고 있는 소백산의
험한 길 만큼이나 몸서리치는 인생길이였다.
아픔은 견디며 동행해야 한다는 걸 익히 알지만
이젠 한계에 다다랐다.
이제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
아침이 되어도 설레임도 그리움도 없다.
그냥 목숨이 붙어있으니 무덤덤하게
하루하루를 지내왔을 뿐이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선택을 해왔지만
이제 마지막 극단적 선택을 하려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결행 의지가 약해 빠진 것도 알았다.그보다 바위보다 무거운 침묵의 무게를 견디며 평생 죄인으로 살아갈 딸을 생각하니 가슴이 멨다.듣기만 해도 끔찍한 게 자살이 아니던가?
지난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자신을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떠올리자
이내 눈물이 말랐다.
되갚음의 감정들이 불을 댕겼기 때문이다.
그래도 격려와 도움을 준 사람들이
지금도 자신을 받쳐주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벽아래 군데군데 남아있는 안개구름이
하이얀 양탄자를 깔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선주는 이태리 영화 ‘길’에 나오는 여주인공
젤소미나의 질문을 문득 떠올렸다.
‘난 아무 쓸모가 없잖아요?
사는 것이 지겹고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구요.’
선주의 마음이 그랬다.
지금 그녀의 마음을 돌이키려는 남자의 마음 또한
영화 속 대사내용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있는 것은 모두 어딘가에 쓸모가 있어요.
길가의 돌멩이조차 당장 어디다 쓰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조물주는 분명히 쓰임새를 아니까요.’
그녀는 자신의 생명이 세상에서 잠깐 빌려 쓰다가
깨끗이 돌려드려야 할 귀중한 존재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현실의 벽으로 앞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댁이 내 등을 좀 밀어줘요.”
그가 실실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나 참, 돌았어요? 내가 밀게.”
“그럼 이렇게 합시다.”
그가 그녀의 어깨위에 두 손을 살포시 얹으며 말했다.
정말 오랜만에 이성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우리 둘이 같이 껴안고 뛸까, 외롭지 않게요.”
“놔요!”
“못 놔.”
“이거 못 놔요?”
“안놀 거야.”
환갑이 가까운 남녀가 실랑이를 벌리자 마치
초등학생들이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지팡이로 그의 다리를 세차게 때렸다.
“아, 아야야,”
그가 그녀의 두 손을 잡고 빙빙 돌며 엄살을 부렸다.
“성희롱으로 고발할거야.”
“고발하셔, 어차피 난 삼개월 뒤에는 죽고 없는데 머.”
“삼개월? 먼 소리요 그게.”
“난 말기암 환자로 삼개월을 못 채울지 몰라요.”
“정말?”
“아님 자살할 이유가 없지요.”
잡은 손을 놓으며 그가 허탈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녀가 즉시 말을 이었다.
“가족은요?”
“집 사람은 정신과 질환으로 죽었어요.
그때 받은 스트레스로 암에 걸렸나봐요.”
“암이라고 다 죽나? 남들은 잘도 살더만.
누가 삼개월 안에 죽는다고 그래요.”
“내가요.”그녀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돌팔이 의사가 오진했겠지.”
“난 암센터에 근무했소.”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의사 선생님?”
“예, 난 다른 환자들을 오진 없이 고친 꽤 유명한 사람이요. 하지만 내가 말기암까지 올 줄은 몰랐소.
그러니 돌팔이라오.
내 환자들에겐 끝까지 항암치료를 받으라 권했지만
내가 직접 네 번을 받아보니 죽는 게
더 편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여길 왔지요.”
그는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뇌경색 환자지만 외모가 나무랄데가 없었다.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기품과 도량을 갖춘 매력이 있었다.
그는 갑자기 이 여자는 자기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너무 답답해서 지난달 희소암 전공인
동기생 권 박사를 찾아갔다.
권 역시 그더러 3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신변정리를 하고 공기 좋은데서 자연치유를 권유했다.
자연속에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조언도 했다.
3년 전 아내가 죽자 그는 병원과 학회일로 인한
과로 외에도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폭음으로 몸을 망쳤다.
생활이 무절제하니 의사인들 별 수 없었다.
결국은 악성 중피종이란 희귀한 암과
힘겹고 외롭게 투병해왔다.
말기 암으로 3개월 시한부 진단을 받고,
그는 몇주전 캐나다로 출가한 딸에게
마지막으로 잠깐 다녀왔다.
그리고 곧바로 소백산 12자락길을 거쳐
그동안 준비해왔던 농가주택으로 왔다.
그는 지난밤 아내를 생각하며 그 절벽 위에서
하룻밤을 보냈었다.
그가 아내를 처음 만난 곳은 지금은 없어진
옥대초등학교 마락분교 운동장이었다.
그녀도 소백산에 등산을 왔다가
작고 정겨운 시골학교 가을운동회를 구경하고 있었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이 맞아
산행을 하면서 사랑을 틔웠다.
그는 어제 하루 아내와 함께 걸었던
등산로를 회상하며 걸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중년의 어떤 여인이
고치령에서 절벽이 있는 산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반쪽이 부실한 중풍환자였다.
지팡이에 의지하며 등산로에 쓰러진 커다란 통나무를 넘지 못해 쩔쩔 매기에 그가 손을 잡고 도와주었다.
물병도 건네주었다.
그는 처음 그녀를 봤을 때 무척 놀랐었다.
그녀는 아내와 너무 닮았다.
갸름한 얼굴과 짙은 눈썹, 뒤로
비껴 내린 머리 모양까지 너무 비슷했다.
조금 전 손을 잡았을 때 땀범벅이 된 몸에서
풍기는 체취가 마치 아내의 것처럼
그의 콧속으로 확 스며들었다.
그는 유심히 그녀의 행동을 죽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지난밤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절벽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자살하러 온 듯 했다.
그는 갑자기 객기가 발동했다.
처음에는 감정을 자극할 요량으로
그녀를 놀리며 이죽거렸다.
발끈하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드는 모습이
아내의 표정과 똑 같았다.
살아생전에 아내의 행동과 어쩜 저렇게 똑 같을까?
급기야 그는 장난치는 척 하며 그녀를 잡아본 것이다.
그녀는 아내처럼 자기의 빈 공간을 채워 줄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앙탈을 부리던 그녀가
조금씩 마음이 풀어지고 있었다.
아내의 뒷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녀의 등 뒤에서 뛰고 있는 자기의 심장 박동과
손가락에 전해오는 그녀의 맥동이
포개지는 듯한 느낌에 얼굴이 달아 올랐다.
자기처럼 절망과 외로움에 지쳐 자살하러 찾아 온 이곳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에게 그의 신상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댁은 왜 죽으려고 하는지 사연이나 한번 들어 봅시다.”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그녀는 주저했다.
“자살 동기생끼리 마지막으로 회포나 한 번 풀고 죽읍시다.
누가 알우, 댁이 죽으면 내가 뒤따라 뛰어 내릴지.”
그녀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마음속에 진심을 담아 이야기를 이어갔다.
“난 댁이 올라오는 것을 멀리서 죽 지켜보고 있었다오.
몸이 아픈 여인이 혼자 이 산길을 올라올 이유가 없잖소.
왜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이 길을 걸어오고 있는지,
왜 죽으려고 해요?”
그녀는 그와 마주 앉았다.
그는 말은 가볍게 하지만 어딘가 무게가 있어 보였다.
그녀는 처음 보는 남자에게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선주는 편모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
그녀는 일찍 농사일을 돕다가
도시근로자로 이리저리 궂은 일을 마다않고
소녀시절을 보냈다.
때늦게 배움에 굶주려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생각과는 달리
산을 좋아하는 그녀는 산악회에서
산림공무원을 만나 결혼해 버렸다.
첫딸은 순산을 했으나 둘째가 미숙아로
복합질환을 갖고 태어나는 바람에 가슴에 묻었다.
그녀는 그 후로 태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시댁의 아들선호에 늘 죄인으로 살았다.
맞벌이로 살 만해지자 남편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개인사업을 시작했다.
때마침 금융위기로 사업이 어려워지고
과로와 스트레스가 겹쳐 돌연사 했다.
그녀 또한 남편이 남긴 사업을 이어오다가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생활로 건강에 금이 갔다.
모든 걸 정리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출가한 딸과 지내던 중,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진 것이다.
선주는 5년 전 어느 아침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단풍이 거의 지고 일교차가 심한 초겨울로 들어설 즈음
남편의 기일을 앞두고 있었다.
음식재료를 장만하고 일찍 잠을 청했다.
새벽에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서는데 자신도 모르게 쓰러졌다. 벽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쳤다.
헛발을 디뎠나 하고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한쪽이 힘이 들어가지 않음을 느꼈다.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웠다.
속이 울렁거렸고 입과 눈마저 한쪽으로 쏠리는 듯 했다.
119에 실려 온 게 아침 출근 때였다.
뇌 MRI, 조영술과 기본검사를 했다.
“송선주님.” 주치의가 불렀다.
“아, 네 네.” 발음이 제대로 안되어 버벅거렸다.
불안해서 콩닥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있었다.
“뇌경색 중풍입니다.”
그녀는 주치의로부터 결과를 전해 듣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좌측 중대뇌동맥 한 가닥이 막혀서
좌뇌의 바깥 부위가 기능을 못한다는 것이다.
떡심 좋던 그녀는 순간 반신불수로 힘겹게 길을 걸어가는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물이 핑 돌았다.
부산에서 3년간 좋다는 병원은 다 다녔으나
차도가 없었다.
마침 영주에 사는 친구로부터
한방, 양방 협력으로 교수출신 의료진이 펼치는
근거중심 임상 진료를 하는 병원을 소개받았다.
재활치료 하나만 해도 협력진료로
환자 개인별 맞춤식 진료를 한다는 입소문을 들어왔던 터였다. 그래서 영주로 왔다.
처음에는 휠체어로 왔던 그녀가,
이젠 지팡이라도 짚고 다닐 수가 있는 것은 오직 진료진과 직원들의 헌신적인 치료 덕택이었다.
그녀는 병원을 퇴원해 딸네 집으로 가도
거처 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렇다고 기초수급자도 못됐다.
송선주의 명의로 딸이 저지른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입원비는 시간제로 일하는 딸이 근근이 마련해서 보내주었다. 지난달 입원비는 원미가 대납했다.
딸은 입원비 부담으로 집으로 가자고 했다.
병이 든 몸으로 가봐야 딸에게 짐만 될 뿐이었다.
갈 곳이 없었다.
“음, 그랬구나, 자살할 이유가 충분히 되네요.”
그가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자살동기를 이해했다.
“난 홀아비, 댁도 홀몸,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이렇게 합시다,”
“어떡해요?”
“난 어차피 삼개월까지 살기 힘들어요. 댁도 내가 보기엔 삼개월전에 자살할 사람이야.”
“건 어떻게 알아요.”
“나도 사람 볼 줄 알우. 댁은 한번 결심하면 바꿀 분이 아니지, 내말 틀렸어요?”
그가 선주의 까만 눈동자를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어떻게 아세요?
그녀가 속마음이 들킨걸 부끄러워하며 물었다.
“댁 같은 분은 결심이 어렵지 한번 결심하면…. 그사람도 그랬으니까.”
“그사람이 누구예요? 사별한 부인?”
“녜, 우리 이렇게 합시다.
내가 삼개월후 십이월 이십삼일 까지 죽지 않으면
그땐 병원으로 송 여사를 만나러 가리다.
그전에 죽으면 할 수 없고.
안 죽으면 우리 둘이서 쿨하게 지냅시다. 어때요, 내 제안?”
그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글쎄요.”
“거기야 손해날 거 없지.
오늘 죽을걸 삼개월 뒤에 죽으면 되니까.”
“댁 말을 제가 어떻게 믿죠?” ‘
“그것도 그러네, 이게 약속의 표시요.”
그가 갑자기 목에 걸고 있던 자기 십자가 목걸이를 벗어서
그녀 목에 걸어 주었다.
그리고는 그의 행동이 수상쩍어
그녀는 고개를 돌리다가 그의 입술이
이마에 닫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마치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 가슴까지 찌릿했다.
이런 느낌이 싫진 않았다.
“송 여사, 주머니 속에 든 거 줘요.” 하며 손을 쑥 내밀었다.
“뭘요?”
그녀가 의아해서 쳐다보자,
그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바지 주머니를 가리켰다. 자살 기도자가 소지하는 중요한 증거물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유서를 꺼내자,
그는 자기 유서도 꺼내 같이 쭉쭉 찢어 버렸다.
그리고 절벽 아래로 휙 던져 버렸다.
조각 여러개가 하얀 꽃잎처럼 나풀거리며.
절벽에서 살아남은 소나무 위로 떨어졌다.
그녀의 정체성을 지우던 지우개가 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내려갑시다, 송 여사. 병원에 데려다줄게요.”
그는 그녀가 자기 아내나 되는 것처럼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손에서 가슴 쪽으로 파문이 일고 있음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의 그런 행동이 공감을 불러 일으켰고 또한 서로에게 치유의 시작이자 동행의 출발점이 된 셈이다.
“성탄이브 꺼정 나 안데리려오면 죽을 줄 알아요.”
“그럼. 그땐 맞아 죽어도 싸지, 허허. 당신도 지팡이 없이 나 만나야 돼요.”
“재활치료 더 열심히 받을게요.”
“자아, 약속” 그가 아이들처럼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그녀는 손가락을 걸며 흔들었다.
선주는 이 남자라면, 하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소백산 고치령 절벽에 죽으러 왔다가
3개월 뒤를 기약했다.
절망에 빠져 죽으러 왔다가 우연히 만나
다시 살아 갈 이유와 희망이 생긴 것이다.
등 뒤에서 이름 모를 산새가 따라오며 내는 소리가
마치 희망을 노래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서로 손을 잡고 다정한 부부처럼
자락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홀로 죽을 힘 보다는 둘이 함께 살려는 힘이
발걸음에 실려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휘청거리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고치령에서 국만봉 방향 400미터 지점서 사고발생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대원이
응급처치를 하고있던 남자에게 물었다.
“어느 병원으로 갈까요?”
“꽃동산 로터리에 있는 병원이라고 하던데.”
“아, 녜 그럼 거기로 갑니다.”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그녀를 살폈다.
응급차가 병원 앞에 도착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진료진이 급히 응급치료를 시작했다.
저녁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여기가 어디예요?”
“송선주님, 절 알아보시겠어요?
아마도 땀을 많이 흘려 탈수로 전해질 균형이 깨진
열사병이 아닌가 해요.
자칫 잘못하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죠.”
주치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친구생일로 외출증을 쓰신 분이 잠깐 갔다 오신다 하고선
연락이 없어 병원이 발칵 뒤집어졌잖아요.
112에도 신고했고요.”
원무직원이 말을 이었다.
“어떤 남자가 선주님을 병원에 모시고 와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셨어요.
깨어나면 뭐 사드리라고 용돈도 주셨어요, 여기 있어요.”
그 남자는 말 붙일 틈도 안주고 급히 나갔다는 것이다.
눈물을 닦아주며 병상을 지키던 간호과장이
귀로에 있었던 상황을 남자에게 들은 대로 소상히 말했다.
이튿날 회복되고 나서 선주는 병원이 천국처럼 느껴졌다.
자살하러 나간 길과 돌아온 길이
이토록 차이가 날까, 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겐 자살하러 간 소백산 산행이
인생 후반기 새로운 출발의 계기가 되었다.
병실 창으로 멀리 고치령 쪽 소백산을 보다가 주머니 속에 넣어둔 자락길 안내도를 꺼냈다.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그 남자 생각에 빠져 들었다.
‘그 사람은 죽지 않으면 꼭 날 데리러 올 거야.
약속을 지킬 남자야.’
선주는 그가 자신의 목에 걸어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매일 그를 생각할 때마다 잠을 설쳤다.
기분이 안 좋을 때는 그를 생각하는 버릇이 생기기까지 했다. 생을 포기하고 자살하러 간 자신에게
그가 준 마지막 희망이었다.
오늘이 7일, 이제 58일 남았다.
그녀는 그 남자가 마치 자기 남편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를 데리러 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재활치료를 열심히 받았다.
밤마다 그를 위해 기도했다.
딸의 가족과 주위의 지인들을 위해서도
이유 없이 기도하고 싶어졌다.
때때로 그가 왜 전화가 없지,
그때 적어준 전화 번호 쪽지를 잃어버렸나?
아니면 벌써 고인이 됐나?
그녀는 그런 생각이 들어 속이 탈 때가 잦았다.
그래서 자존심도 버리고 문자를 보냈었다.
그런데 답이 없었다.
궁금하다 못해 전화를 걸었다.
불통이었다.
그를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은 이젠 하루에도 열두 번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했다.
그녀에게 그는 살아갈 희망이었다.
하루살이같은 삶이어도 좋다.
운동치료를 하고
늦게 병실로 돌아온 그녀는 피곤했다.
잠시 병상에 누웠는데 서천 건너편
반짝거리는 카페 네온사인이 유난히 튀어 보였다.
불빛에 비친 서천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간간이 물결이 보였다.
물결위에 3개월 시한부 삶을 살면서도
이생의 애착을 갖지 않고
여유를 부리는 그의 얼굴과 호탕한 웃음소리가 겹쳐 보였다. 그는 분명 다른 이의 아픔을 나눌 줄 아는 익살쟁이였다.
죽음 앞에서도 그녀를 붙들고
짓궂은 소년처럼 빙빙 도는
유머러스한 그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나님, 그를 제게 꼭 돌려주세요, 하고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며 매달렸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깜짝 놀라 폰을 들었다.
“엄마, 낼 데리려 영주 갈게.” 딸 전화였다.
“권 서방은? 애들은?”
“맨날 그렇지 뭐. 속상해 죽겠어, 엄마.
그 인간 땜에 미치겠어.
그 놈이 아파트 전세금 빼갖고 정선으로 도망쳤어.
엄마, 우리 어떻게 살아, 흐흑흑.”
딸은 또 폰에 대고 울음을 터트렸다.
기다리던 남자의 목소리가 아닌 것도 마음 저린데
딸의 일까지 겹치니 마음이 아팠다.
사위가 또 사고를 친 모양이다.
그는 인간 말종이었다.
알콜 중독에 주식, 경마, 마약 등 못된 짓은 다하고 다녔다.
앞이 창창하던 젊은 사람이 그 좋은 직장을 내동댕이치고
일확천금에 눈이 먼 건 사람을 잘못 사귀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도박에 미쳐 살고 있는
집 전세금 까지 빼가지고 도망을 쳤다는 것이다.
선주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것도
따지고 보면 사위 때문이었다.
남편이 갑자기 죽자,
비상으로 들어놓은 보험금을 보태서
번듯한 아파트 하나를 샀다.
그리고 전세로 살고 있던 딸과 사위를 같이 살게 했다.
그런데 사위가 사업을 한다며 보증을 서 달라고 했다.
사업이 부도가 나서 살고 있던 아파트가
경매로 넘어간 것이다.
평생을 공무원으로 성실하게 살아온 남편의
목숨과 맞바꾼 셈이다.
그 아파트가 빼앗겨 버렸으니
그녀가 그 충격으로 쓰러진 건 당연했다.
가을에 만난 남자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숟가락질 조차 떨림이 생겼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어제가 12월23일, 그 남자가 죽는다고 말한 3개월째 되는 날에 하루가 지났다.
그는 고치령에서 헤어질 때 마지막으로 말했다.
자기가 만일 3개월을 살수만 있으면 병원으로
선주를 데리려오겠다고.
그는 정말 암으로 죽었을까?
그래서 안오는걸까?
안절부절 못했다.
그녀는 왈칵 울음이 터져 나왔다.
병이 든 몸으로 더 이상 살아봐야 갈 곳도 없고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도 실실 웃으며 죽음을 남의 일처럼 말하는 그가 부럽고 몹시 보고 싶었다.
차라리 그때 그와 함께 절벽에서 뛰어 내릴걸, 하고
창쪽으로 갔다.
7층 병실에서 뛰어 내려 죽을까?
선주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려다보았다.
하늘에는 간간히 진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병원 주차장은 도떼기시장 같았다.
5개의 부스가 있었다.
아참, 오늘 병원에서 바자회를 한다고 했지.
원미는 일주일 전부터 바자회 준비를 한다며 소란을 떨었다.
음식, 옷, 액세서리, 잡화 그리고 건강용품점으로 나뉜 난전, 마치 원당로 번개시장이 옮겨 온 것 같았다.
특히 병원측에서 내놓은 건강관련 물건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병원 앞에는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장날 같았다.
병원에서 불우이웃 돕기를 위해 여는 바자회는 시중 가격과는 무조건 비교가 안되었다.
상품의 품질이나 내용, 종류에서도 바자회 물건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뢰를 쌓아왔다.
금년에 여는 바자회는 14회째라고 했다.
원미가 어디 있지?
그녀는 고개를 길게 빼고 보도 위를 내려 보며 원미를 찾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원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면 죽을 수 있나, 하고
밑을 내려다보다가 이젠 바자회 구경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엄마, 이거 먹어.”
갑자기 등 뒤에서 원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볶이 접시를 쑥 내밀었다.
“뭐야 이건.”
“엄마 주려고 가져 왔어.”
“어젯밤에는 판매할 떡볶이가 부족할 것 같다고 걱정하더니.”
“오호호, 아무렴 장사꾼이지만 엄말 굶길 수는 없잖아.
엄마 한 번 더 가출하면 그냥 안 둔다.
그땐 얼마나 걱정했다구.”
원미가 뒤에서 두 팔로 꼭 껴안으며 말했다.
“애, 징그럽다 손 치워.”
어느새 차디찬 원미 손이 스웨터를 파고들었다.
“엄마젖 참 따뜻하다.”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다 큰 처녀가.”
“그래도 엄마가 좋은 걸 어떡해.
엄마 나 오늘밤 엄마 옆에서 자도 돼?”
“언젠 물어보고 잤니?”
“엄마 냄새 참 좋다, 흠흠.”
“다 큰게 어린애같이. 떡볶이 맛있게 잘 먹었다.”
“엄마, 바자회 끝나면 맛있는 거 사다줄게. 먼저 자지마.”
그렇게 말하고는 원미는 병실을 나갔다.
불쌍한 원미, 처음 입원한 환자들은
송원미가 그녀의 친딸인 줄 알았다.
엄마 성을 딴 원미를 선주의 딸로 착각했다.
주위에선 딸과 같이 있어서 좋겠다고들 했다.
요즘은 아들보다 딸이 더 낫다니까, 하며 거들었다.
이 바자회는 원미 때문에
처음 시작되었다고 했다.
꽃동산 육거리가 시간이 흐를수록 몸살을 앓고 있었다.
병원행사에 참석하러온 이들과 뒤섞여
도로는 주차장과 같았다.
성탄전야에다 눈발이 날리고 있는 겨울 저녁이라서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들떠있었다.
눈구름이 잔뜩 낀 회색 하늘은 성탄을
기다려서인지 차분해졌다.
어둠이 내리자 네온사인 불빛이 하나둘 켜지면서
병원직원들이 벌리는 바자회장에는 하늘의 마음이 함박눈에 담겨 날리고 있었다. 벌써 14년 전 일이었다.
“원장님, 시시티브이를 설치해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심각해?”
“ 예.”
간호과장이 탈의실 설치를 주장했다.
여직원들의 탈의실에 설치한다는 것은
사생활 침해의 문제가 있었다.
지난번 원무과에서 제안했을 때 원장은 반대를 했다.
그런데 간호과장은 여직원들이 강력히 요구한다고 했다.
문제의 시작은 여직원들이 출근을 해
근무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벗어놓은 옷이나 지갑 속에
돈이 자꾸 없어진다는 것이다.
돈을 분실한 직원들은 같이 근무하는 동료들을
의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들 신뢰 문제라 말도 못하고 각자 속만 태우고 있었다.
어제도 신혼부부인 간호사는 퇴근길에 장을 봐가야 하는데
지갑 속에 넣어둔 돈이 없어졌다.
여직원들이 자꾸 돈을 분실하자 드디어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사태가 심각했다.
“설치하세요. 단 판독은 여직원들만 하도록 하구요.”
원장은 전제 조건을 붙여
탈의실에서 돈을 훔쳐가는 범인을 잡기위해
설치를 결정했다.
직장 내에서 직원들 상호간 불신을 잠재우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 원장님, 도둑 잡았어요, 허허허….”
간호과장이 웃으며 말했다.
“ 뭐야! 도둑? 누구예요?”
“ 직접 보시죠.”
그녀가 CCTV를 재생시켰다. 탈의실이 나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원미가 나타났다.
“ 잰 원미잖아?”
“ 자세히 보시죠.”
“잰 오층에 입원해 있는 구서원 할머니 손녀 원미 맞지?”
“ 예.”
“ 원미가 저길 왜 들어가지?”
“ 보시면 알아요.”
원미는 탈의실에 걸려 있는
여직원들의 옷과 지갑을 뒤져 돈을 꺼내고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원미는 기초생활 수급대상자인 할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는 조손가정이었다.
아버지는 폐암으로, 어머니는 출산 합병증으로 죽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폐지를 주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마당 한쪽 구석에 심어 놓은 고추밭에서 일을 하다 미끄러져 허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측은 아무도 돌봐주지 못하는 어린 원미를
혼자서 집에 둘 수가 없어
병원에서 학교에 다니며 할머니와 같이 잠도 자고
밥도 같이 먹게 하였다.
그런 원미가 이런 짓을 하고 있었다.
원미는 벌써 2개월이 넘도록 여직원 탈의실에서 돈을 훔쳤다. 병원이 발칵 뒤집어졌다.
원장은 이 문제는 직원들이 결정하는 뜻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이미 이 사건으로 직원 한 사람이 사표를 낸 상태였다.
긴급 직원회의가 열렸다.
그런데 뜻밖의 결론이났다.
할머니와 둘이서 어렵게 살고 있는 원미에게
어떤 처벌도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모가 없이 할머니 손에서 자라고 있는 원미를 앞으로 병원 직원들이 돌보겠다고 했다.
원미가 울면서 한 말은 학교에 갔는데
날씨가 무더워 죽겠는데 친구들이 사먹는 아이스크림이
너무 먹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돈을 훔쳐 아이스크림을 마음껏 사먹었다고 했다.
처음에 직원들은 월급에서 모금을 해서
원미를 돕기 시작했다.
모금액이 불어나자 직원들은 원미와 같은
어려운 결손 가정이 의외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병원 직원들은 급기야 성탄전 병원 앞에서 바자회를 열어 불우이웃돕기 모금을 하기 시작했다.
1회 바자회 기금이 천만원이나 모였다.
처음에 원미를 돕자고 시작한 작은 일이 이젠 병원의 중요한 연례행사가 되었으며 지역의 많은 뜻있는 분들이 함께
동참하는 큰 행사가 되었다.
할머니는 12년 전에 타계했고
고아가 된 원미는 병원이 집이 되었다.
원장은 원미가 여상을 졸업하자 원무과에 근무하게 했다.
함박눈이 내리는 하늘에 원미의 작은 몸집이 팔랑개비처럼 병원 구내를 뛰어다녔다.
“원장님, 이 잠바 어때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한번 입어 보세요.”
그런데 두벌을 꺼냈다.
평소에는 얌전하고 말수가 적은 원미였다.
그런데 바자회장에서는 쾌활하고
힘이 넘치는 왈가닥으로 변해 있었다.
“어머, 참 잘 어울리시네요. 호호호…. 원장님, 한 벌은 제가 사드리는거구, 한 벌은 원장님이 사시는 거예요.” 원미가 손을 쑥 내밀며 말했다.
그런데 최근에 원미는 707호실 입원환자
송선주를 엄마라고 부르며 몹시 따른다고 했다.
그 중풍 환자의 입원비를 원미가 지불한다고 했다.
병원에서 자란 원미는 그후로 바르게 자랐고
천성이 착하고 성격이 밝았다.
그는 정말 원미가 입원비를 대납하고 있다며
병원에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월급은 모아서 시집갈 때 써야지, 하며 인사말을 듣는 원미는 병원에서 키운 모두의 딸이였다.
어제는 박진수가 선주를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한 날이었다.
그런데 오지 않았다.
그녀는 어제 하루 종일 그를 기다렸다.
딸네 집에도 갈 형편이 못 되는 그녀에게
그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녀는 지난 3개월 동안 하루도 그를 잊은 적이 없었다.
사람은 희망에 살고 절망에 죽는다.
그러기에 그녀는 그를 생각하며
희망에 차서 열심히 재활에 매달려왔다.
몸도 이젠 정상에 가까워졌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면 재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녀는 양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가렸다.
어젯밤에도 딸이 전화를 해 퇴원을 재촉했다.
그녀는 밤을 새며 소지품을 챙겼다.
짐이라고해야 달랑 크고 작은 가방 하나씩이 전부였다.
그가 죽었다면 이젠 병원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밤마다 그가 자기를 데리러 오는 꿈을 꿨지만
이 또한 물거품인가?
그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몸관리를 했는데
그가 죽었다면 모든 것이 일장춘몽이 아닌가?
이른 아침 창가까지 뻗어있는 목련나무 가지에서
까치 두 마리가 이른 봄에 필 몽우리를 쪼면서 뭐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좋은 소식이 있을려나?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이를 기다려왔는데.'
그이와 같이 정성껏 아기 예수께
경배 드리는 성탄절 아침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건만 이 또한 허사란 말인가?
그래도 기다려보기로 했다.
멀리 서천을 옆에 끼고 우뚝 솟아 있는
제민루가 눈에 들어왔다.
600년 전 이 시간에도 아프고 굶주린
백성들이 찾은 곳이 아니던가?
그안에 자원봉사자들 또한 얼마였을까?
그래, 설사 그이와 인연이 닿지 않는다 해도
멀쩡해진 이 몸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야지!
희망은 풍요 속보다는 절망 속에서 오히려
가치가 있지 않는가?
전에는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집착하여
절망했지만 이젠 아니잖아.
그래도 남겨진 하나를 찾아냈지 않는가?
자살소동 후 3개월간 많이 생각하며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은 그녀는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어릴 때 성경공부를 통해 예수님의 삶을 배웠던 내용을 들추며 성탄의 목적과 의미를 되새겨보았다.
그녀는 제민루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나 송선주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라고 독백하며 일기장에
결심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병실 벽시계가 아홉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딩동 딩동 딩딩 동동’
성경위에 둔 폰이 울었다.
‘또 누군가, 혹시?’
“여보세요,”
“송 여사, 나 박진수요. 설마 자살 동지를 잊진 않았겠지?”
“…잊긴요!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녀는 한참을 목이 메여 머뭇거렸다.
그는 그때 그녀와 헤어지고
서울로 올라가지 않고 마락에 주저앉았다.
산골에서 환부로 산다는게 불편하지만 그래도 그녀와 재회할 약속에 희망을 걸고 심신을 단련해왔다.
자연식을 하고 마음을 비워 매일 등산이나 하며 지냈는데
놀랍게도 죽지 않고 건강해졌다고 자랑했다.봄이 오면 산나물을 많이 뜯을 곳도 알아놓았다고 했다.
“그저께 왜 안 왔어요? 약속위반!”
“거긴 눈이 많이 와 길이 막혔어요. 오늘 아침에야 겨우 통행이 풀렸다오. 그래도 날짜를 어겼으니 마음대로 하셔. 선주씨, 나 보고 싶었어요?”
“에잉 몰라요. 어디예요?”
“병원 후문, 빨리 내려오셔. 그냥 몸만 내려와요.”
선주는 황급히 가방을 끌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원무과에 들러 직원과 함께 후문으로 나왔다.
가까이에 지프가 시동을 켠 채 부르릉거리고 있었다.
지프 앞문이 스르르 열렸다.한 남자가 마치 사랑스러운 눈으로 자기 아내에게 말하는 것처럼 재촉했다.
“빨리 타요.”
첫댓글 작가님께서 "그래도"라는 이번 소설을 통하여,어떠한 질병도 자연과 함께 하는 "하나님"과의 동행이 치료와힐링이
된다는 희망과 긍정의 메세지를 독자인 우리들에게 전달하려는 아름다운 노력이 돋보인다고 느껴집니다.
아름답고 힐링이 되는 글 감사합니다.늘 건강 축복 기도드립니다.
희망이 생기고 힐링이 되었다니 감사합니다.
가슴이찡합니다...
그다음은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노년에 그것도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만난 사랑이야기 . 누구에게나 희망은
있나봅니다. 영주란 지명이 참 친근합니다. 주인공의 심리묘사 재미있습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더 행복한 마지막이 이어지겠지요??
옹달샘님의 마음에 따라서 주인공의 마지막이 그려지겠죠. 감사합니다.
글을읽고'아~정말다행이고반갑다!'라고 혼자소리칠펀했네요ㅎ 소백산기운받은 저희영주병원환자들이 글속의분들처럼 행복해졌으면 하고 기도합니다..
이글읽으신분들도 모두모두행복하세요!!!
좋은글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