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팽호도에 닿다
( 이방익의 발자취를 따라 3)
이방익은 1796년 9월 20일 제주 연안에서 표류하여 9개월 만인 1797년 윤6월20일 고국 도성으로 돌아온 후 자신의 경험담을 글로 남겼다. 그는 가사형식으로 『표해가』를 썼고 순한글 기행문으로 『표해록』을 남겼다. 나는 2017년 8월 『표해가』를 중심으로 평설 『이방익표류기』를 써서 발표했다. 『표해록』은 원본 그대로 부록으로 실었다. 나는 기행문 형식으로 이 글을 써감에 있어 이방익의 순한글 『표해록』의 내용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이방익의 발자취를 더듬어 찾고자 한다.
대장정을 떠나며
이방익 일행은 표류한지 16일 만에 이름 모를 섬 해안에 닿았다. 이방익은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아침 해가 높이 뜰 때 큰 섬이 보이기에 8인이 함께 섬을 가리키며 이제는 우리가 살았구나 라고 외쳤다. 그러나 배 돛대와 키를 잃었으니 인력으로 어찌 하겠는가? 풍랑이 임의로 출몰하여 겨우 섬 북쪽 언덕에 닿았다. 정신을 수습하여 서로 붙들고 언덕에 올라 바라보니 배는 물결에 깨어지고 석경(夕景)은 참암(巉巖)한데 정신이 혼미하여 세상인 듯 구천(九天)인 듯.
8인이 언덕을 의지하여 누었다가 이윽고 정신을 차려 사방을 돌아보니 고국은 망망(茫茫)하고 눈앞에 보이는 것은 만경창파 무인지경이요 외로운 섬뿐이었다.
눈물이 비 오듯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인가를 어찌하면 찾을까 서로 보며 말하는데 홀연 한 사람이 멀리서 엿보고 가더니 한 식경(食頃)이 지난 후에 수백 사람이 무슨 말을 지껄이며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표해록』)
이방익은 몰려온 사람들의 복장을 보고 거기가 중국 땅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가 한때 조정에서 무겸선전관으로 있을 때 임금이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는 자리에 임금을 호위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방익이 글로 써서 물어보니 이곳은 복건성에 속하는 팽호도(澎湖島)라는 것이다.
팽호도 즉 팽호제도는 대만 서안에서 50km, 중국 하문(廈門)에서 120km(동경120도, 북위23도의 북회기선)에 위치한 대만해협상의 섬이며 대만의 일개 현으로 인구는 12만 정도이다. 모두 66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는데 사람이 사는 섬은 19개 정도이다. 그 중에서 팽호도, 백사도(白沙島), 어옹도(漁翁島)가 가장 큰 섬들이다. 팽호현의 현도는 마공시(馬公市)이다. 섬들은 평탄하여 산이나 구릉지가 없다. 사시사철 바람이 심하고 강수량(연 평균 1,000mm)이 적어 대부분 척박한 땅으로 방치되어 있다. 사람들은 주로 어업에 종사하지만 특이한 방법으로 채소를 가꾸어 먹는다. 현무암으로 밭담을 쌓아 채소밭을 일구는데 밭담의 모양은 제주도와 흡사하다.
팽호도는 역사적으로 중국에서 거들떠보지도 않던 섬으로 내지의 백성들이 부역에 시달리다 못해, 또는 죄를 짓고 도피해 살곤 했고 더러는 해적의 근거지가 되어 중국 남부 연안에 출몰하면서 노략질을 일삼기도 하였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서구동점의 시기에 팽호도는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상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1622년에는 네덜란드가 대만을 점령하면서 이곳도 아울러 점령하여 중국과의 교역에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지금도 네덜란드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명나라의 복원을 꿈꾸던 정성공(鄭成功)이 복건성을 중심으로 저항하다가 대만으로 물러가 네덜란드인을 몰아내고 웅거할 때 팽호도를 전진기지로 삼아 어옹도에 두 개의 포대를 세우고 청나라와 끈질긴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청나라가 대만을 점령하면서 많은 화교들이 여기 팽호도에 둥지를 틀고 서방과의 교역을 벌였기 때문에 이방익이 찾았을 때의 팽호도는 무역선이 폭주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변했다.
팽호제도
우리는 이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과감히 이방익의 발자취를 더듬고자 나섰다. 무모한 일인지도 모른다. 일행은 나와 내 아내 노인숙, 심규호(제주국제대 교수), 진선희(한라일보 문화부장), 고봉균(촬영기사, 한라일보) 등이다. 나는 이방익 표류기의 저자로써 이 일을 기획하였고 심규호는 중국학을 연구하며 100여 권 가까이 번역을 한 사람이다. 진선희와 고봉균은 이번의 대장정을 밀착 취재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다. 내 아내가 동행하는 이유는 내가 책을 냄에 있어 동참했고 중국어를 약간 알기 때문에 나의 귀와 입이 되고 늦은 나이에 장도(長途)를 가는 나의 건강을 보살피기 위해서다.
우리는 제주공항-김포공항-인천공항-대만 가오슝(高雄)을 거쳐 2018년 4월28일 저녁 팽호도 마공(馬公) 공항에 도착했다. 다음 날 아침 호텔을 나섰다. 이방익이 ‘섬 북쪽 언덕’에 닿았다고 하니 북쪽으로 가기로 했다. 우리는 택시를 잡아타고 팽호본섬을 달려 북쪽의 백사도로 달렸다. 본섬과 백사도는 교량으로 이어져 있었다. 일행이 5명이지만 기사에게 사정하여 젊은 촬영기사 고봉균은 뒤 짐칸에 탔다. 빠듯한 예산이라 택시비를 아끼기 위하여 우리는 여행하는 동안 내내 그렇게 했고 그를 뒷방 청년으로 놀려대기도 하였다.
우리는 백사도 북항 적감(赤嵌)에서 배를 타고 최북단 지베이섬(吉貝島)으로 향했다. 적감은 네덜란드인이 쌓은 성 또는 건물을 말하는데 네덜란드의 붉은 색 머리를 빗대어 대만에서 그들을 홍모(紅毛)라고 불렀고 붉을 적(赤)자를 넣어 그들이 지은 건축물을 적감이라고 불렀다. 타이난(臺南)의 적감성이 그 한 예이다. 이곳을 적감이라고 부른 것으로 볼 때 백사도 북녘에 네덜란드인의 건물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적감항에서 지베이 남항까지 15분이 소요되고 거리가 약 15km 정도다. 이방익이 5리쯤 된다고 했는데 얼추 맞는 거리다. 지베이 남항에서 우리가 가고자 하는 최북단까지는 약 4km쯤 된다고 하지만 교통편이 없다. 젊은 관광객들은 스쿠터를 전세 내어 섬을 한 바퀴 돌지만 국제운전면허가 없는 우리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나와 아내는 이왕 온 김에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며 도보행진에 나섰다. 한참을 걸으니 마을이 나타난다. 그 마을에 관제묘(關帝廟-관우를 모시는 곳)로 보이는 사당이 있어 둘러보고 있는데 스쿠터를 빌려 보겠다던 나머지 일행 3명이 다 낡고 번호판도 없는 차를 타고 달려왔기에 우리는 합류하여 목적지로 향했다. 차주(車主) 사(謝) 선생은 북쪽으로 돌출한 곶으로 우리를 안내하며 이곳을 이방익 일행이 표착했을 곳으로 지목했다.
지베이섬 북단(이방익 표착추정지)
석호구(石滬區)라고 부르는 이곳 언덕에서 바라보니 저 멀리에 작은 섬들이 점점이 떠있는데 이방익이 이를 일러 ‘눈앞에 보이는 것은 만경창파 무인지경이요 외로운 섬뿐’이라고 표현한 듯하다. 가까운 바다에 여(물속에 잠겨 보일 듯 말듯 한 바위)가 여럿 있어 물결 따라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바다로 뻗은 너럭바위는 제주도의 빌레처럼 검은 현무암이다. 너럭바위 앞 얕은 바다에는 물고기를 잡기 위하여 인공으로 둘러쌓은 돌담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보이는데 제주도의 원담과 흡사하다. 여기서는 석호(石滬)라고 부른다. 우리가 서있는 완만하고 낮은 언덕은 지친 이방익 일행이 기어오르기에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석호는 원시적으로 고기잡이를 하는 돌담이다. 신석기시대부터 전해오던 것으로 팽호도에는 현재 574개가 남아있다고 한다. 팽호도는 쿠루시오(흑조)해류가 경유하는 곳이어서 어족자원이 풍부하고 사방의 얕은 바다에 산호초가 깔려있고 현무암이 형성되어 있어 수천 년 전부터 석호를 쌓아 고기를 잡는 기술이 축적되어 왔다. 해안가 사람들은 현무암과 산호초를 얽어 담을 둥글게 쌓고 수문을 만들어 밀물과 썰물, 바람의 방향을 관찰하면서 합심하여 고기를 잡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번에 잡아 올리는 어획량은 몇 대의 우마차에 가득하였다고 한다.
석호(원담)
현지인 사씨의 설명을 들으며
해안에 떠밀려온 통나무
우리는 이방익 일행이 우리가 서있는 이곳에 표착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면서 매우 들떠 있었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첫째는 바람의 방향이다. 앞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겨울철 황해를 거쳐 불어오는 북서풍은 양자강 나아가서 오키나와와 비등한 위도에서 동남풍으로 바뀌기 십상이다. 그 바람은 대만해협으로 빠져나간다. 이방익이 이 바람을 따라 팽호도까지 흘러온 것이다.
둘째는 쿠루시오해류의 영향이다. 발해에서 기원한 해류는 황해를 지나 제주도를 거쳐 중국대륙연안을 따라 남중국해로 흐르고 다시 대만해협으로 빠져나간다. 바로 팽호도가 이 해류의 길목인 셈이다. 지베이 북단인 석호구 해변에는 중국제 음료수병이 널려있다, 여기서 나는 칠성사이다병(업소용)를 발견했는데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낮은 언덕에는 지름이 1m가 넘고 길이가 10여m나 되는 통나무가 떠 내려와 있다. 사 선생에 의하면 근래에도 여러 구의 시신이 여기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세 번째는 해안 가까이 여기 저기 박힌 여 때문이다. 이방익의 배는 일엽편주로 돛대와 키도 부러지고, 노와 상앗대도 날아가 버렸고 닻과 닻줄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마치 바다에서 물결 따라 바람 따라 떠다니는 널빤지나 가랑잎과 다를 바 없다. 육지나 섬에 가까이 가도 그냥 맴돌다 조수에 밀려 멀어져갈 뿐이다. 이방익은 언덕에 닿을 때의 광경을 『표해록』에서 ‘언덕에 올라 보니 배는 물결에 깨어지고‧‧‧’라고 했고 『표해가』에서 ‘탓던 배 도라보니 편편이 파쇄하여 어대 간 줄 어이 알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배가 여에 부딪히는 순간 8인은 깊지 않은 바다로 튀어나갔을 것이다.
다섯째 조류와 석호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밀물 때 석호의 입구를 열어놓고 물이 빠질 때 막아놓아 갇힌 고기를 잡는 일인데 어부들은 조석(潮汐)에 따라 석호를 관리하게 된다. 이방익이 표착한 지점은 마을에서 5리 떨어져 있지만 풀과 나무가 없는 황량한 벌판이었다. 이방익을 발견한 사람은 일부러 석호를 찾은 어부임에 틀림없다. 그 어부 아니면 이방익 일행은 5리조차도 걸을 수 없을 만큼 기진맥진했기 때문에 해안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이방익 등 8인을 목격한 어부는 그 길로 마을로 달려가서 마을사람들을 데리고 달려온다.
한 사람이 멀리서 엿보고 가더니 한 식경이 지난 후에 수백 사람이 무슨 말을 지껄이며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우리 8인이 서로 의지하여 하는 거동을 보더니 그들은 우리를 혹 붙들고 혹 끌고 함께 데려가니 그 뜻이 감사할 뿐이다. 3리를 가니 30여 호의 큰 마을이 나타나는데 다 기와집이요 닭과 개와 소와 말이 있는 것이 우리나라와 다름이 없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길을 메웠지만 기갈이 자심한데 통정할 길이 없었다. 즉시 우리를 집으로 들게 하거늘 입을 가리키고 배를 두드려 기갈을 이기지 못하는 거동을 보더니 즉시 미음을 내오고 젖은 옷을 벗겨 말리니 그 은근한 거동이 우리나라사람 같았다. (『표해록』)
지베이섬에는 포구의 상점가 말고 동쪽 해안에 한 마을이 있는데 100여 호쯤 되는 것 같다. 차주인 마을 토박이 사(謝) 선생은 약 400년 전부터 이 마을에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이방익은 표착지에서 ‘3리를 가니 30여 호의 큰 마을이 나타나는데 다 기와집이요 닭과 개와 소와 말이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곳임이 틀림없다. (『표해가』에서는 5리라고 썼는데 우리가 지난 길은 2km(5리)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이곳이 바로 이방익이 묵은 마을일 것이 분명하지만 220년 전의 옛집은 찾을 길이 없었다. 이방익은 여기에 큰 공해(公廨)가 있고 문 위에 <곤덕배천당>이라는 현판이 걸렸었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는지 모르지만 돌아갈 배시간이 촉박하고 일정이 빠듯하여 우리는 찾기를 포기해야 했다.
지베이섬을 떠나기 전 빙수 한 그릇, 고개껍질이 탐스럽다
마을사람들은 이방익 등을 묵게 하면서 원기가 회복될 때까지 극진한 대접을 마다하지 않았다. 6,7일을 보내고 그들은 화려한 채선을 타고 팽호본도를 향해 떠났다.
우리는 뱃길을 되짚어 이방익이 건넌 바다를 건넜고 곧 이방익의 발자취를 따라 행군을 계속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