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마태복음 27장 57~60절, 열왕기상 19장 18절
날이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출신으로 요셉이라고 하는 한 부자가 왔다. 그도 역시 예수의 제자이다. 이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청하니, 빌라도가 내어 주라고 명령하였다. 그래서 요셉은 예수의 시신을 가져다가, 깨끗한 삼베로 싸서, 바위를 뚫어서 만든 자기의 새 무덤에 모신 다음에, 무덤 어귀에다가 큰 돌을 굴려 놓고 갔다. <표준새번역>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에 칠천 명을 남겨 놓을 터인데, 그들은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입을 맞추지도 아니한 사람이다. <표준새번역>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예수님의 부르짖는 소리가 천지를 울리는 듯 두 번 들려오더니 이윽고 고요해 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성전 휘장은 위에서 아래로 두 폭으로 찢어졌으며,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는 현상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멀찍이 서서 지켜보던 여자들은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고 있었고, 오히려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이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렇게 날이 저물었습니다.
골고다 언덕 주변을 포함하여 축제 기간이었던 유월절의 풍경조차도 모든 상황이 끝난 것 같은 침묵으로만 고요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시작했던 새벽을 지나, 생기로 가득했던 아침을 보내고, 빛으로 충만했던 오후를 건너,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저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다르고 말았음을 모든 것이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 "이제 다 끝났구나. 메시아인줄 알았는데, 로마로부터 구원해줄 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십자가에서 죽는구나. 그래도 지난 3년 참 행복했는데. 이제 다 끝났어. 예수님은 죽었다고. 죽었어!" 저마다 한숨을 내쉬며 '한 여름밤의 꿈'이었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날이 저물었습니다.
3년 동안 자리를 지키던 제자들은 이젠 그림자조차 볼 수 없습니다. 덩그러니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의 시체는 패배와 절망을 이야기하듯 축 늘어뜨려져 어떠한 희망조차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 아무도 시체를 내릴 생각조차도, 장례를 치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 시간, 조금이라도 동조하는 사람은 십자가에 같이 못이 박힐까봐 몸을 사리는 시간, 이젠 자신들과 상관없다고 고개를 저으며 예수님을 잊어가는 시간..그런데 그 적막함을 깨고, 그 시간을 뚫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한 사람이 갑자기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에서 30키로 떨어진 곳에 '아리마대'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바로 그 곳 출신의 한 부자가 등장합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이기도 했고, 착하고 선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부자나 산헤드린 공의원라는 말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면 마태의 기록대로 "그도 역시 제자이다" 입니다. 12제자 이외에도 제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핵심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제자들은 예수를 팔고, 예수를 부인하고, 예수를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12명의 제자 외에 나머지 제자들도 불보듯 뻔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모르는 제자, 그것도 이런 때에 등장하는 제자가 있다니요? '난세에 영웅'은 들어봤지만 '난세에 제자'는 처음 들어봤습니다.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이 요셉에 대해서 '명망있는 의원이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아리마대 요셉을 '난세에 제자'라고 부르기 어려울 거 같은 이유도 한 가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9장 38절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거두게 하여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니, 그는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렸다." <표준새번역>
누가복음에 보면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었던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였다는 것을 유대 사람들이 알아챌까봐 무서워하기도 했지만, 예수님의 사형에 대한 의회의 결정과 처사에 찬성하지 않았던 소신을 가졌던 인물이 바로 아리마대 요셉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제자임도 숨기고 싶었던 비겁함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 제자, 아리마대 요셉이 바로 이 때 등장한 것입니다.
바로 이 아리마대 요셉이 바로 빌라도를 만나러 총독 관저로 들어갔습니다. 총독의 업무가 다 끝난, 날이 저물어 늦은 시간에 총독 관저에 가서 빌라도를 바로 만날 수 있는 관계라면 당연히 빌라도와 상당한 친분을 유지했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신을 내어달라고 청하자마자 빌라도는 바로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주었습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지금 소위 '반역죄'로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의 시신을 이렇게 쉽게 받을 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을 아리마대 요셉이 해 내는 상황입니다. 자신이 제자라는 사실조차 숨기면서 살 던 사람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캐물으면서 자신조차도 공격할 수 있는 빌라도 앞에 나아가 그의 시신을 요구했다는 것은 정말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설사 평소에 빌라도와 가깝게 지낼 수 있을 정도의 권력을 가졌던 사람이라고 해도 이렇게 빨리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한다면 오히려 빌라도로부터 예수와의 관계에 대해서 의심을 받고 곤경에 처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리마대 요셉은 그 일을 해냅니다. 하지만 성경은 아리마대 요셉이 이 일을 한 이유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한 구절 "그도 역시 제자이다"라고 답변을 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제자'라는 이유가 아니라면 자신의 목숨까지 위험해 질 수 있는 상황에서 이런 '커밍아웃'을 할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깨끗한 삼베로 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위를 뚫어서 만든 자신의 새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처형된 죄수의 시체는 보통 가족의 묘실이 아니라 공동묘지에 던져지던 것이 당시에는 당연했는데, 요셉은 자신의 가족처럼 예수님을 정성스럽게 자신의 무덤에 모신 것입니다. 이제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제자임을 넘어서서 예수님을 가족으로 생각해서 자신의 무덤에 모신 사람으로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이 소문은 결코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었던 요셉에게 이득이 될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사천리로, 당연하다는 듯이 이 일을 진행했습니다. 이 일은 결코 숨기지 않았습니다.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알려지면서 이 일을 해냈습니다.
이렇게 날은 저물었고 이제 예수님의 이야기는 끝이 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날이 저물어도 예수님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도록 만드는 한 사람이 등장했음을 성경은 알리고 있습니다. 어둠이 찾아왔어도 빛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칠흑같은 암흑 속에서 촛불 하나가 켜지면 오히려 더 밝게 느껴지는 것처럼 바로 그 촛불 하나의 사건, 예수님의 복음이 이어지는 통로가 되는 이야기가 바로 이 한 사람, 아리마대 요셉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성경은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현재 우리에게 아주 큰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시대가 많이 어둡습니다. 누군가는 교회가 이제 '저물어가는 때'라고 이야기합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을 다시 한번 일으키고자 "Again1907"을 외치던 무리들은 이제 교회의 '엔딩'을 봐야 할 때라고 외쳐대고 있습니다. 같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이제 교회는 희망이 없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소망을 찾을 수 없다고 손가락질 하기 일쑤입니다. 한명의 가룟유다를 욕하는 11명의 제자와 같이 교회는 완전히 반으로 갈라져 비난과 대립 속에서 서 있습니다.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사랑을 품은 정의는 없고, 긍휼을 품은 비평이 없으며, 변화를 품은 용서는 없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날이 저물어 어두운 시간에 지금 교회가 서 있는 듯 합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예수님이 돌아가셨던 그 골고다 언덕과 같은 그 무거운 분위기가 요즘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다음 조사를 보면 현재 교회의 모습이 얼마나 어두운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비단 코로나19로 인해 찾아온 어둠의 시대가 아닙니다. 이미 2019년도 한국교회 빅데이터를 살펴보면 이미 오랜 시간 어둠의 시간이 계속되어 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로 이제 교회는 날이 저물어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그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날이 저물어 어두운 상황입니다. 개신교라는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로 다음과 같은 인식을 주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대로 날이 저물었음을 인정하고 교회를 등지고, 하나님을 등지고, 신앙을 등지고 떠나가야 하는 것일까요? 같이 욕하면서 '엔딩'을 선포해야 하는 것일까요? 도대체 희망이라는 것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일까요? 저는 이런 비관적인 모든 질문에 감히 대답을 드립니다. 결코 아닙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렇게 날이 저물어 있을 때, 반드시 등장하는 '아리마대 요셉'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같이 숨어 있던 평범한 믿음의 영웅이 등장할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버린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찾으러 간 제자가 그 어두웠던 시대에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예수님을 버리는 제자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찾기 위해 등장하는 제자가 있을 것을 확신합니다. 진정 난세에 진짜 제자가 나타날 것을 확신합니다.
그 옛날 갈멜산에서 이방 선지자들과 850대 1의 싸움에서도 거뜬하게 승리했던 엘리야선지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엘리야 선지자가 당시 시대의 권력자였던 이세벨 때문에 찾아온 날이 저물어가는 시대를 보며 안타까워하면서, 또한 자신을 위협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하나님께 목숨을 거두어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을 모두 알고 계실 것입니다. 엘리야의 고백처럼 믿는 사람은 나만 홀로 남은 것 같은 그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던 그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이 오늘 저희 모두에게 희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열왕기상 19장 18절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에 칠천 명을 남겨 놓을 터인데, 그들은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입을 맞추지도 아니한 사람이다." <표준새번역>
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우린 현실만 볼 줄 압니다. 그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우린 어둠만을 보고 있지만,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모두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눈에 볼 때 어둠이지, 하나님의 눈에는 새로운 시대를 열기 직전의 새벽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새벽 여명 이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 아닐까요? 가장 어두운 시대가 계속 되려는 것이 아니라 새벽이 오기 위해, 새로운 날이 열리기 위해 지금은 너무도 어두운 때를 보내고 있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마치 말라기가 끝나고 400년이 넘도록 그 어떤 이야기도 기록되지 않고 있던 어둠의 시대를 끝내고, 복음서의 서막이 열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 새벽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인물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여시는 하나님, 그래서 그 새벽을 열 예수님의 제자 '아리마대 요셉'을 곳곳에서 일으키실 것을 확신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진짜 제자들이 이 시대에 새롭게 일어날 것입니다. 자신이 제자인것도 숨긴채 비겁하기도 하지만, 드러내지 않고 묵묵하게 신앙생활을 해오던 이들이 이제 드디어 쓰임을 받기 위해 용기를 내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들이 진짜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어두운 시대에 더욱 더 확실하게 제자임을 나타내는 이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바로 이 시대에 '아리마대 요셉'이라고 불릴 제자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짧은 칼럼을 통하여 저는 질문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혹시 바로 당신이 그 진짜 제자는 아닙니까?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그 '아리마대 요셉'이 아닐까요? 빌라도 앞에 나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할 수 있는 용기와 같이 이 시대에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할 용기를 소유한 사람이 바로 당신은 아니실까요? 이 땅에서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가 회복되도록, 교회가 회복되도록, 예배가 회복되도록 당신의 용기가 이제 빛을 발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이 날이 저물어가는 현실을 인정하되 사랑과 말씀으로 변화시키며 다시금 희망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제자로 여러분을 더 이상 숨어 있음에 두지 않으시고 외쳐 부르고 계심을 깨닫기를 소망합니다. 아직 바알에게도 무릎을 꿇지도 아니고, 입을 마추지도 아니한 순결한 신부같은 제자, 바로 당신이 이제 이 시대에 '아리마대 요셉'이 되어 주셔야 합니다. "네? 당신은 아니라구요? 아니요! 바로 당신입니다."
진심으로 간절하게 이 시대의 '아리마대 요셉'을 찾습니다. 날이 저물어가고 있는 이 때에 새롭게 예수님의 이야기를 이어갈 그 한 사람을 찾습니다. 더 이상 숨어있지 마십시요. 이 어두운 시대에 묻혀 빛나는 자신의 믿음의 가치를 감추지 마십시요. 교회를 욕하며 신앙을 버리지 마십시요. 오히려 교회를 정화하며 다시 리모델링해주십시요. 변화의 바람을 일으켜 주십시요.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다시 날아오를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가 희망임을 알려줄 제자가 되어주십시요.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이 그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저물지 않았습니다.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고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모든 제자들을 다시 제자로 회복하게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회복되어지고, 성령 충만을 경험하게 되자 그들은 사랑을 들고, 복음을 들고 세계 곳곳을 향하며 결코 날이 저물지 않았음을 선포했을 때 교회가 세워지고 예배가 드려졌습니다. 문제도 많았습니다. 부딪힘도 많았습니다. 힘든 일은 날로 쌓여 있고, 눈물로 밤을 지새기 일쑤였습니다. 마냥 꽃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가는 곳곳마다 꽃처럼 수많은 위기속에도,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이어져 왔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역사는 2020년 9월 현재까지 와 있습니다. 네! 다시 어두워졌습니다. 하지만 다시 새벽이 올 시간이기도 합니다. 무너졌으면 다시 세울 시간입니다. 다가올 새벽을 준비할 시간입니다. 잊지마십시요. 여전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있기에! 여전히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간절히 요청합니다. 이렇게 새롭게 시작되어야 할 시대에 '아리마대 요셉'이 되어주십시요. 바로 당신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용하고 싶어 하십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luo6-vwY8(마커스, 주를 위한 이곳에)
https://www.youtube.com/watch?v=romoT4dGYKM(꿈이 있는 자유, 도하전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