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면이야기` 독자라는 분의 전화를 받았다. 양정에서 목회활동을 하는 목사님이었다. 부전동을 비롯해 범전동 전포동 등지도 옛날엔 서면에 포함되었다는 지난 달 `서면이야기`를 읽고서 하는 전화였다. 서면 언저리에서 목회활동을 하다 양정동으로 옮겼는데 양정도 옛날 서면에 들어가느냐는 게 요지였다. 교회 이름에 해당 지역명이 들어가는 게 관례인 모양. 옮기기 전에 서면 무슨무슨 교회였는데 옮겨서도 서면을 그대로 쓰고 싶다고 했다. 쓰고는 싶은데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서면이란 지역명에 애정이 진득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부산에서 동래가 중심이던 동래군 당시에는 양정도 서면에 들어갔다. 동래군 서면 양정리였다. 서면에 포함된 지역이 어디어디인지는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家戶案)`에 나와 있다. 가호는 요즘말로 가구다. 가호안은 1904년 탁지부에서 편찬한 동래구 12개면의 가호 대장이다. 탁지부는 구한말 국가재정 전반을 맡아보던 중앙관청. 가호안에 따르면 당시 동래군 가구 수는 12개면 154동에 4천8백70호다. 그럼 서면은 어디일까. 서면은 지금도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지만 100년 전에도 그랬던 것 같다. 1899년에 발행된 `동래부읍지`에는 서면만 나오지만 1904년 가호안에는 서면을 상하로 나누어 서상면 서하면으로 나온다. 요즘으로 치면 1동과 2동으로 분동된 셈이다. 우선 서상면. 괄호 안은 당시 가구수다. 부산리(37) 화촌리(36) 미남리(30) 여고리(23) 거인리(42) 거평리(30) 대제리(14). 화촌(華村)과 여고(余古)가 어디인지는 각자가 찾아보는 것도 괜찮을 듯. 힌트를 하나 주면 사직동에 여고초등학교가 있다. 거인리 거평리 대제리는 합쳐서 거제가 되었다. 대제(大堤)란 지명에서 이 지역에 큰 둑이 있었음을 짐작해 본다. 다음은 서하면. 양정리(28) 만덕리(19) 초읍리(41) 연지리(12) 범전리(29) 부전리(12) 전포리(23) 문현리(21) 연동(8). 서상면보다 마을은 많아도 가구는 적다. 중심지인 동래에서 멀어질수록 사람이 띄엄띄엄 살았던 것 같다. 지금 서면이라 부르는 부전동 일대에 달랑 열두 가구만 살았다니 옛날은 옛날이다. 빈 땅에다 집만 지으면 내 땅이고 내 집이었겠다. 양정도 서면에 들어갔다는 말에 목사님은 안도하는 눈치였다. 만나면 차도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서면이란 이름 하나로 연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고향을 떠나서 고향을 안다는 이유만으로도 연대가 이루어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듯이 서면을 떠나서 서면을 안다는 이유만으로도 연대가 이루어지는 사람 역시 한둘이 아닐 것이다. 서면이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 어제 있었던 지명이 오늘 다르고 오늘 봤던 풍경이 내일 다르다. 지명이 변하고 풍경이 변해도 우리의 기억은 그대로라서 바뀐 지명이 아쉽고 바뀐 풍경이 아쉽다.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가물거리고 소멸된다. 기억이 더 가물거리기 전에 소멸되기 전에 기억을 붙잡아두는 건 어떨까. 그것은 개인의 역사를 붙잡아두는 일이기도 하고 지역의 역사를 붙잡아두는 일이기도 하고 나라의 역사를 붙잡아두는 일이기도 하다. 동래군에 면이 열두 군데 있다고 했다. 나머지는 어디일까. 내친 김에 알아보자. 동래읍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방향에 따라 동면 서면 남면 북면이 있었다. 그리고 동평면 사하면이 있었다. 역시 상하로 나누었고 사하는 상중하로 나누었다. 당시에는 사하가 컸다는 얘기다. 뱃길 교역이 왕성했던 사하의 하단장은 구포장 부산장 동래장과 함께 부산을 대표하는 오일장이었다. 서면을 뺀 나머지 면이다. 읍내면 북면 사상면 사중면 사하면 동평면 남하면 남상면 동하면 동상면. dgs111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