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초고] 도시는 텃밭 자리를 약속해야 한다 ㅡAI시대 '도시농사'를 위한 토지이용계획 수립이 중요한 이유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전 수원대 교수)
요즘 AI에게 글을 맡기고 계산을 맡기고 그림까지 맡기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 녀석이 내 일을 다 가져가면 나는 무엇을 하며 살까.
사실 이 질문의 답은 오래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다. AI는 세상의 데이터를 순식간에 삼키지만, 흙을 밟아 본 적은 없다. 봄볕에 등이 따끈해지는 느낌도, 호미 끝에 걸리는 돌멩이의 감촉도, 내 손으로 키운 상추를 이웃과 나눌 때의 쑥스러운 기쁨도 모른다. 모든 것이 효율화되는 시대일수록 사람의 몸으로만 할 수 있는 일, 땀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의 값이 오히려 오른다. 필자는 그 땀을 '생명노동'이라 부르고 싶다. 사람의 몸을 살리고, 이웃을 잇고, 흙 속에 탄소를 되돌려 놓는 노동이다.
그런데 막상 그 땀을 흘리려고 나서면 곧바로 벽에 부딪힌다. 땅이 없다.
호미는 있는데 땅이 없다
우리 도시의 텃밭은 대개 남의 땅을 잠시 빌린 자리에 있다. 개발을 기다리는 사유지, 사업이 미뤄진 공공부지, 건물 사이의 자투리땅이다. 개발 소식이 들리면 텃밭은 소리 없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호미를 들고 다른 빈터를 찾아 나선다. 텃밭에는 주소가 없다.
주소가 없는 것은 텃밭만이 아니다. 우리 가족들도 전셋값에 밀려 두세 해마다 짐을 싼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한 동네에서 마치는 것이 행운처럼 여겨지는 나라다. 이웃이 생기려면 같은 자리에 오래 머물러야 하는데, 그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다. 흙도 마찬가지다. 지친 땅이 다시 살아나려면 여러 해가 걸린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텃밭에서는 흙도 사람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시장의 저울에 올려놓으면 텃밭은 언제나 지기 때문이다. 같은 땅에 아파트를 지으면 몇 배를 받는데, 상추 몇 포기로는 상대가 안 된다. 게다가 국가마저 논밭을 수용해 택지로 만든 뒤 되파는 '땅 장사'를 수십 년 해 왔으니, 마을의 빈터가 남아날 리 없었다.
하지만 이 저울은 절반만 잰다. 텃밭에서 흘린 땀이 지켜 주는 건강수명, 줄여 주는 의료비, 이어 주는 이웃, 흙 속에 가둬 두는 탄소는 땅값에 한 푼도 잡히지 않는다.
꿀벌로 치면, 시장은 꿀값만 셈하고 꽃가루받이의 값은 장부에 적지 않는 셈이다. 그 숨은 값을 드러내자는 것이 필자가 말해 온 '꽃가루받이 지수'다. 그런데 값을 매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시장이 지키지 못하는 땅은 계획이 지켜야 한다.
텃밭을 지도에 그려 둔 도시들
도시농사가 뿌리내린 도시들은 예외 없이 텃밭의 자리를 지도에 먼저 그려 두었다.
독일 칼스루헤에는 2000년대 초에 이미 클라인가르텐 78개 단지, 7,800여 구획이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 텃밭들이 도시 변두리가 아니라 시가지 한복판 곳곳에 박혀 있다는 점이다. 법이 소정원을 보호하고, 도시계획이 그 자리를 아예 '영구 소정원'으로 못 박아 두었다. 덕분에 한 가족이 대를 이어 같은 텃밭을 일구기도 한다.
도쿄 네리마구는 서울 강동구 같은 주거지역인데, 구 면적의 6% 남짓이 아직 농지다. 구청은 공공 땅에는 구민농원을, 빌린 사유지에는 시민농원을 만드는데, 그 상당수가 학교 옆에 있다. 아이들이 하굣길에 흙을 만질 수 있는 거리다.
쿠바 아바나는 아예 시청의 도시계획과와 도시농업과가 머리를 맞대고, 농사짓기 좋은 땅을 골라 나누는 토지이용계획을 세웠다.
이 도시들에서 텃밭은 해마다 예산을 따내야 하는 '사업'이 아니다. 도로나 학교처럼 지도 위에 자리 잡은 '용도'다.
일곱 해 전의 지도
필자는 7년전쯤 수원시를 사례로 '도시농사기본계획'이라는 구상을 내놓은 적이 있다. 방법은 소박했다. 수원의 옛 물길과 지형을 깔고, 그 위에 용도지역을 얹고, 공원녹지를 얹고, 초등학교와 학구를 얹었다. 그렇게 겹쳐 보면 걸어서 닿을 만한 거리 안에서 텃밭이 들어설 자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첫 목표는 초등학교 학구마다 아이들과 이웃이 함께 가꾸는 텃밭을 적어도 한 곳씩 두는 것이었다.
이를 기본텃밭으로 보았다.
우선 이 장소들부터 만들어가면 된다.
그때는 지도를 한 장 한 장 겹쳐 그리는 데에만도 적지 않은 품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AI가 그 일을 순식간에 해낼 것이다. 학구별로 비어 있는 땅을 찾고, 물길과 일조를 따지고, 흙의 상태까지 짚어 줄 것이다. AI는 바로 이런 일을 하라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밭에서 몰아내는 무인 농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어디서 땀 흘릴지를 찾아 주는 안테나 말이다.
그러나 AI가 끝내 대신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그 땅을 팔지 않고 텃밭으로 남겨 두겠다는 결정이다.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정치와 행정의 몫이다.
길이 없는 것도 아니다. 새로 만드는 도시라면 답은 간단하다. 국가가 택지를 팔지 않고 보유하면, 처음부터 학구마다 텃밭 자리를 그려 넣을 수 있다. 이미 빽빽한 도시라면 개발이익을 지렛대로 쓰면 된다. 시가 값싸게 나온 땅이나 쓰임새가 애매한 땅을 사들여 텃밭으로 바꾸고, 그 땅에서 쓰지 않게 된 용적률은 다른 곳의 개발사업자에게 넘기는 것이다. 개발이 텃밭을 몰아내는 대신, 개발이 텃밭을 짓게 하는 셈이다.
씨앗보다 먼저 심어야 할 것
결국 필요한 것은 거창한 예산이 아니라 한 장의 지도다. 도시의 기본계획 안에 도시농사의 자리를 그려 넣고, 공원이나 도서관처럼 생활권마다 최소한의 텃밭을 약속하는 일이다. 한두 도시에서 동네 하나를 골라 시작해 봐도 좋다.
AI가 일을 가져가는 시대, 우리에게 남는 것은 결국 몸과 이웃과 흙이다. 은퇴한 어르신도, 노동시간이 줄어든 직장인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도 흙 위에서 다시 사람이 된다. 그러려면 그들이 호미를 내려놓을 자리가 도시 어딘가에 확실히 있어야 한다.
호미 한 자루는 시민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그 호미가 내려앉을 땅은 도시가 약속해야 한다. 씨앗보다 먼저 심어야 할 것은 바로 그 땅의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