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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설
고장 난 부품의 시간, 두메로의 길
- 전석철 시인의 시세계
공 영 해(시조인)
1. 시에 대한 경외감으로
몇 년 전 감자탕 집에서 전석철 시인과 소주 한 잔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에게 지나가는 말로 삶과 죽음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더니 웃으며 직업 탓인가 보다고 하였다. 전 시인의 직업은 병원의 심장수술 체외순환사. 30여 년을 수술실에서 일해 온 직업인이다. 날마다, 입원하고 수술하고 퇴원하고 사망하는 환자들을 대하다 보니 자연히 인간의 삶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노라 하였다. 그의 삶에 이입된 나의 모습을 만나게 되면서부터 나는 전 시인의 시에 서서히 관심을 가지게 된다. 시는 시인의 얼굴이다. 먼저 시 외적인 전석철의 세계를 만나본다.
전석철은 진주의 궁벽한 오지에서 7형제 중 여섯째로 태어난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를 어렵게 졸업하고 도회로 나와 공장과 서점에서 일하며 주경야독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진주보건대학 임상병리학과를 졸업한 뒤 창원삼성병원에 일자리를 구하여 30여 년 간 심장 수술 체외순환사로 재직하면서 배움에 목이 말라, 한국방송대학 농학과를 졸업하고 진주경상대학교 수의학과 대학원에서 수의기초의학(석사)을 수료한 뒤 경남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석사)을 수료하기도 한다. 그가 공부한 학문은 그의 직업과 무관치 않은 인접 학문이다.
전석철은 또 사진학과 도자학에 관심을 가지는 한편 꾸준히 쌓아온 독서량을 바탕으로 시를 습작, 기성 문단 진입을 위해 수차례 도전한 끝에 마침내 계간 《조선문학》 신인상(2000년)에 당선하면서 당당하게 시인의 길을 걸어왔지만 시 쓰기에 전념할 환경이 아니었다. 그러나 등단 후 창원문인협회와 ‘남도문학’ 동인으로 활동을 하면서 계간 문예지 등에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여 오다가 등단 19년 만에 첫 시집을 내면서, 몇 차례 시집 출판의 기회가 있었으나 스스로 시에 대한 경외감으로 시집 출판을 늦추다가 갑년을 맞아, 그 동안 발표해 온 시 140여 편 중 꼭 시집에 담고 싶은 시만을 가려 한데 묶어 세상에 내 놓기로 하고 그 해설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이는 이웃 선배인 나를 믿고 처음 하는 부탁인데 순발력이 예 같지 않고 아둔하고 시눈이 어둡다 하여 이를 핑계로 어찌 면전에서 손사래를 치리오.
서랍 속에서 오래 잠자다가 깨어난 전석철 시인의 시집 《추방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 시인의 정신세계를 만나본다.
2. ‘추방의 공간’에서 만난 사람살이
전석철의 시에는 병원 체험을 시화한 작품이 많다. 이는 전 시인의 직업과 무관치 않다. 병원체험을 시화한 작품에는 병원 종사자이거나 환자들이 쓰는 언어가 그대로 쓰이고 있다. 시에서 이러한 말을 될 수 있으면 쓰지 말아야 할 터이지만 전석철은 과감히, 눈치 보지 않고 이러한 언어를 여과 없이 쓰고 있다. 이는 의학적, 학술적 용어가 이미 대중화 일반화되어 낯설지 않기 때문이며 이를 굳이 순화된 말로 쓸 경우 전달의 기능이 약화될 것을 염두에 둔 터일 것이다. 모든 언어는 시어가 될 수 있다. 전석철이 의학적 용어로부터 자유로울 때 그의 보편적 정서는 더욱 독자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시인이 근무하는 병원이라는 공간은 일반 사회와 달리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각을 다투는 절박한 공간이다. 이런 절박한 공간 속에서도 시인의 감성은 건강하여 다양한 체험을 시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수술을 막 끝낸 환자의 무의식 세계를 다룬 <추방의 공간>을 벗어나 시인의 시선은 갓 태어난 생명에서부터 수많은 생명의 정상적 피돌기로 발전한다. “세상 구석구석 풀어놓은/ 실타래를 잡아 당”기는 심장의 순환작용, 강 어디쯤 “그물을 드리우고/ 펄떡이는/ 고기를 거두고 있”을 건강한 역류의 동맥이 <몸의 강>을 흐르고 있다. 긍정적, 희망적 삶의 이면에는 병을 앓는 안타까운 모습도 지나칠 수 없다. “손끝에 살아난 마음의 감각/ 믿음과 희망으로 점자를 익히고/ 잘 길들여진 애견 한 마리 갖고 싶다던”, 당뇨로 실명한 “그녀”의 절망을 노래한 <어떤 장애>, “독한 항암제가 머리칼 한 움큼 뽑아가”는 “절망의 하루”를 보여주는 <병에 대하여>, 감각(미각, 후각, 청각, 미각)의 퇴화 현상을 통한 인간성의 메마름을 비추어 본 <우리라는 사람들은>, 소화 기관의 기능을 화학 현상으로 보여주는 <분해의 터널>, 고독을 떨치기 위해 신경의 매듭을 풀며 삶의 본질을 생각하는 <새벽에>, 항생제 남용으로 지친 현대인의 삶을 환경호르몬에 등뼈가 휜 물고기들의 살이에 기대어 생태계에 대한 경각심을 “헐떡이는” “시대의 병”으로 부각시킨 <병 만드는 사회>, “세월의 흔적”을 “악마의 균사”들에 의해 유린당한 상처로 본 <무한분열식>,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수술실의 숨 고름과 병마와 싸워 이겨야 한다는 의식의 흐름을 엿보여 준 <살아있는 병실>, 암에 걸려 “삶에 겨운/ 일들을 남겨두고 가는 // 친구를 보며/ 미처 준비하지 못한” 자아를 본다는 <자화상>, 당뇨와 “고혈압에 시달리다/ 전립선마저 퉁 퉁 부어/ 지린 오줌 마른 옷 적시”며 “고장 난 부품들을 내려놓고” 떠날 수밖에 없는 <생의 마지막 간이역> 등은 직장인 병원 생활에서 얻은 체험을 재구한 작품들이다.
(1) ‘외계’로의 귀한, 작별의 인사 준비
이러한 전 시인의 작품 가운데 생과 사의 터널을 넘나들면서도 오히려 초연한 표제시 <추방의 공간>을 먼저 찾아가 본다.
눈에 묻은
긴 잠의 찌꺼기를 뜯어내면 시방
의식의 회색 터널을 통과 중인 내 넋의
머리카락을 만나게 된다
넋이여, 너는 앉은뱅이
근육 옭아맨 상처의 흔적은 싸구려 훈장일지라도
재활의 꿈을 꾸어야 해
분명한 것은 내가 어느 외계에서
추방당해 수감되고 있다는 것인데 우습게도
나는 그것을 즐기고 있다
내가 잠에서 깨는 날은
마취에서 완전히 깨는 날은
작별의 인사를 준비해야 한다
아마 나의 추방은 실수였으리라
나는 지금 잠의 찌꺼기를 뜯으며 일어나
징역을 열심히 사는 모범수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추방의 공간> 전문
제목이 말하는 ‘추방의 공간’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보기로 한다. ‘추방의 공간’은, 추방을 당한 본래의 공간이 아닌 추방을 당해 현재 화자가 있는 공간, 다시 말해 화자의 넋이나 몸을 누일 수 있는 ‘공간’일 테다. 화자는 “수감”과 “징역”이란 말을 쓰고 있다. 이로 미루어 화자가 징역살이하는 공간은 ‘감옥’이다. 그러나 화자는 정말 징역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잠에서 깨는 날은/ 마취에서 완전히 깨는 날은”에서 보듯 ‘잠 = 마취’ 상태라는 등호가 성립된다고 할 때, 지금 화자는 ‘마취’에서 깨지 않은 상태에 있다. 마취에서 깨지 않은 환자가 있을 곳은 수술대이거나 수술이 끝난 뒤 의식의 회복을 위해 잠시 눕는 회복실일 수 있다. 따라서 화자는 지금 회복실에 누워 의식이 돌아오려(‘마취에서 완전히 깨’려)는 환자이겠다. 이 시의 공간적 배경은 ‘추방의 공간’, 곧 ‘회복실’이어야 한다.
인용한 시 <추방의 공간>은 시는 내용상 5연으로 나뉜다.
첫 연은 1행에서 4행까지. ‘잠’은 비몽사몽의 상태, “마취에서 완전히 깨”지 않은 상태이다. “눈에 묻은 긴 잠의 찌꺼기를 뜯어내”는 행위의 주체는 ‘나’이며 무의식의 세계를 ‘즐기고’ 있는 의식 밖의 자아(ego)이다. ‘나’는 지금 ‘의식의 회색 터널을 동과 중인’ 무의식의 자아를 만난다. ‘내 넋’은 무의식의 자아, 이드(id)이다. ‘머리카락’은 ‘삶의 끈’이다. ‘재활’에의 예감이다.
둘째 연은 5행에서 7행까지. ‘넋이여, 너는 앉은뱅이’ 비록 ‘옭아맨 상처’가 ‘싸구려 훈장’처럼 남더라도 ‘너는’ ‘재활의 꿈을 꾸어야’ 한다. ‘앉은뱅이’는 현대인의 불구성. ‘재활의 꿈’은 불구성 극복을 위한 자아의 다짐이다.
셋째 연은 8행에서 10행까지. ‘분명한 것은’ ‘이드’의 세계에서 ‘나’는 ‘… 어느 외계에서/ 추방당해 수감되고 있’는 죄인이지만 ‘나’는 그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외계’는 어디일까? 이는 자아의 우월성 내지 탈 불구성을 의미한다. ‘수감’은 불구의 상태로 잠을 자고 있음을, ‘수감’을 “즐기고 있다” 함은 미래에 대한 낙관이며 ‘외계’로의 복귀, 불구성 극복의 암시이다. 따라서 ‘외계’란 환자 이전의 건강한 정상인이 사는 세계, 병원 밖의 세계이다.
넷째 연은 11행에서 14행까지. 넷째 연에서 우리들은 “마취에서 완전히 깨는 날은/ 작별의 인사를 준비해야 한다.”는 말에 주목한다. 화자는 지금 수술실에서 마취에 취해 있는 상황이다. ‘잠에서 깸’은 ‘마취에서 깸’이다. 화자의 의식 회복되었음이다. ‘마취에서 깸’은 또 자아가 있는 공간이 수술대가 아닌 회복실 침상임을 유추하게 한다. 수술이 끝난 환자는 회복실을 거쳐 다른 병실로 가야 한다. 3연의 “수감”은 입원 상태, 즉 불확실의 불구적 세계이다. “작별의 인사 준비”는 “의식의 회색 터널을” 완전히 통과함에 대한 준비이다. 생과 사의 중간세계에서 하는 작별 인사는 ‘외계’로의 귀환을 뜻한다. “나의 추방”이 ‘실수’라면 둘째 연의 ‘상처의 흔적’은 ‘싸구려 훈장’이 아니라 목숨보다 귀한 ‘훈장’일 테다.
다섯째 연은 15행에서 17행까지. “나는 지금 잠의 찌꺼기를 뜯으며 일어나/ 징역을 열심히 사는 모범수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아직 회복 단계인지라 온전한 의식이 돌아온 것은 아니다. 환자복을 입은 자아의 모습을 징역 사는 죄수, 그것도 모범수로 비유하여 병원의 법규를 충실히 따르도록 한다. 불구성 극복을 위해서는 “모범수의 흉내를 내”지 않을 수 없다. 의식 밖의 자아는 모범수이다.
<추방의 공간>은, 건강한 정상인이 사는 세계인 ‘어느 외계에서’ ‘추방당해 수감’된 자아의 의식 세계를 다룬, 불구적 상황에 처한 현대인의 치유 의식을 다룬 작품이라 하겠다. <추방의 공간>에서 만난 전석철의 ‘외계’는 종교적 신비적 세계가 아니라 오욕칠정을 안고 사는 인간의 세속적 세계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사람살이의 아픔과 사랑과 외로움이 녹아 들꽃처럼 향기롭다.
(2) 나쁜 자궁 속에서도 맑은 눈
<태어나다 보면>을 본다.
이십일 주 차 팔백 그램 바삐
태어나 완성 못한 장기들이
얇은 피막만 두른 탓에
호흡도 장운동도 바람의 촛불
인공구조물엔 양수도
태반도 없는 마른 호수
유영하기엔 턱 없이 나쁜 자궁
고통을 지나
맑은 눈 뽀얀 얼굴
터 잡은 하루 하루가
백 그램씩 늘어난다.
<태어나다 보면> 전문
위의 시는 미숙아 출산을 다룬 시이다. 정상 분만 신생아는 3.2Kg으로 출생한다. 반면 7개월 미숙아는 2.4Kg. 약 800g 모자라는 생명체이다. “태어나 완성 못한 장기들이/ 얇은 피막만 두른 탓에/ 호흡도 장운동도 바람의 촛불”이라 불안하고 안타깝다. 정상 분만한 신생아처럼 자라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자궁의 대용물 인큐베이터라는 인공구조물에 넣어 기른다. 인공구조물은 산모의 자궁 역할을 하지만 “태반도 없는 마른 호수”이며 “유영하기엔 턱없이 나쁜 자궁”이다. 아무려면 마음껏 유영할 수 있는 모태 만하겠는가. 새로운 생명, “맑은 눈 뽀얀 얼굴”은 정상 분만의 아기들이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날마다 겪으며 ‘나쁜 자궁’에서 하루 ‘백 그램씩’ 자라야 한다.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뜻과는 달리 고통을 이겨내며 자라야 하는 미숙아의 하루를 우리는 안타까운 기도로 바라보게 된다. ‘맑은 눈 뽀얀 얼굴’은 아기의 티 없이 맑고 귀여운 모습이다. 어쩌다 미숙아로 ‘외계’에 태어났지만 정상적으로 분만된 아기 못지않게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라는 시인의 기도를 엿보는 듯하다.
(3) 고장 난 부품의 시간들
삶의 무게 지고
삼일장, 오일장 떠돌다
닳고 닳은 수레바퀴들
수리 위해 모여 드는 곳
천 리 길을 걷던 다리는
계단 앞에 서면
옛 일이 녹화된 필름에
낡은 비가 내리듯 후줄근하다
지난 세월 떠올리며
태엽 되감아도
이내 풀리는 관절
유효기간마저 끝난
쉬지 못한 부품들
당뇨에 고혈압에 시달리다
전립선마저 퉁 퉁 부어
지린 오줌 마른 옷 적시는 날
쌩쌩하던 기계들이
고장 난 부품들을 내려놓고
휑하게 사라지는 이곳
생의 마지막 간이역
<마지막 간이역> 전문
<마지막 간이역>을 본다. 1연에서 우리는 시골장터의, 낡고 닳은 농기구를 두드려 새 것으로 만드는 대장간을 연상하게 된다. ‘삶의 무게를 지고/ 삼일장, 오일장 떠’도는 모습은 살기 위해 부지런히 생업을 꾸려가는 장돌뱅이, 곧 열심히 일하는 생활인의 이미지이다. 간난신고하며 수많은 세월을 살아온 삶을 ‘닳고 닳은 수레바퀴’로 비유하여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기력이 쇠잔한 인간의 비극적인 모습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대상을 ‘수레바퀴’로 비유함은 인간 또한 문명의 산물임을, 쓰다 버릴 수밖에 없는 부품임을 말하기 위한 사전 포석. ‘수리를 위해 모여 드는 곳’은 수술이나 진료를 받기 위해 찾게 되는 의료시설일 터. 정상이 아닌 이러한 몸의 상황을 시인은 마치 장돌뱅이들이 고장 난 수레를 고치기 위해 대장간을 찾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2연에서는 아무리 먼 길도 끄떡없이 걷던 건강하던 다리도 계단 앞에 서면 자신이 없어지고 만다. ‘닳고 닳은 수레바퀴’는 ‘계단 앞에 서면’ ‘후줄근해’지고 마는 ‘천 리 길을 걷던 다리’, 곧 몸의 고장 난 일부이다. ‘옛 일이 녹화된 필름에/ 낡은 비가 내리듯 후즐근’함은 옛 기억이 담긴 낡은 필름에 빗발이 치듯 하여 힘이 없다는 것. 시각적 이미지로, 시선을 끌며 다음 연 ‘태엽을 되감’는 행위로 이어진다.
3연에서는 ‘천 리 길을 걷던’ 지난 세월을 떠올리며 기억의 ‘태엽을 되감아도’ 관절은 이내 풀리고 말다. ‘삼일장, 오일장’을 ‘삶의 무게’를 지고 열심히 떠돌아다니노라 쉬지 못하여 부품들이 다 유효기간이 끝나 이제 더 이상 손을 댈 수가 없다. ‘쉬지 못한 부품들’을 치유하여야겠는데 ‘유효기간이 끝’나 화자는 안타깝다. 생각하면 ‘유효기간이 끝난’ 것이 어디 다리뿐이랴.
4연에서 화자는 ‘유효기간이 끝난’ 다른 부품들의 이상을 보여준다. 당뇨병과 고혈압에 시달리고 전립선비대증으로 요도가 퉁 퉁 부어 소변을 제대로 못 봐 오줌을 지려 마른 옷을 적시기도 하는, 육신의 부품이 고장 난 환자의 아픔이 남의 일 같지 않다. 그렇다. 그들은 지난 세월 천 리 길도 단숨에 걷던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5연을 본다. ‘쌩쌩하던 기계들’, 건강하던 육신들이 ‘고장 난 부품들을 내려놓고/ 휑하게 사라지는 이곳’이라니? ‘이곳’이 바로 다음 연에서 부연처럼, 사망진단서처럼 던져 놓은 결어 ‘생의 마지막 간이역’이다. ‘휑하게 사라지는’ 행위는 주저함이 없는 행위다. 포기는 빠를수록 좋다.
요양병원에서 유모차를 끌거나 휠체어에 몸을 실은 채 두고 온 저 바깥의 삶을 그리는 환자들의 몸을 ‘수레바퀴’와 ‘기계들’로 비유한 것은 인간의 몸을 물상화한 시인의 냉정한 시선에 다름 아니다. ‘간이역’은 희망과 포기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희망은 삶의 세계이며 포기는 죽음의 세계이다. ‘간이역’은 생과 사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이 간이역은 구원의 기차가 오지 않는, ‘휑하게 사라’짐이 차라리 구원일 수 있는 ‘간이역’이다. 죽음의 그림에는 잊을 수 없는 ‘종이학’이 날 때도 있다.
봄날 햇살 같은
혜림인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물방울 부딪혀 부서지던
고운 피부에 핏기를 잃어가던 날
혈관 길을 가로막은
백혈암이 자해를 시도했습니다.
소원을 들어준다는 천 마리 종이학이
꽃들이 피어나는 병실 밖을
채 날기도 전에
밝은 눈과
맑은 마음을 나누어 주고
학이 되어 날아갔습니다.
<종이학> 전문
위의 시 <종이학>은 백혈암 환자 혜림의 안타까운 운명을 노래한 작품이다. 혜림이는, “봄날 햇살 같은”, “물방울 부딪혀 부서지던/ 고운 피부”를 지닌 “열여덟 살” 한창나이의 아름다운 숙녀이다. 그런 그녀의 “고운 피부에 핏기를 잃어가던” 원인이 “백혈암”이었다. 병명을 알고 얼마나한 자해의 충동을 받았으랴. 절망의 나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천 마리 종이학”을 접지만 “꽃들이 피어나는” 계절 그녀는 “밝은 눈과/ 맑은 마음을 나누어 주고/ 학이 되어 날아”간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혜림의 마음이 시인 전석철에 의해 밝고 맑은 마음을 담은 종이학으로 날고 있음을 우리들은 보게 된다. 그의 일터 병원에서는 안타깝고 슬픈 영혼들을 수도 없이 만난다. 시인은 그 슬픈 혼들을 위해 <혼굿> 한 판을 벌인다. 그가 당골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랴. <혼굿>을 본다.
(4) 열명길 환한 꽃길, 훠이!
잿빛 갈매기
물금 넘어 사라진 뒤
한 마당 굿판
다시는 돌아 못 올 혼을
훠이! 훠이!
모둠발 뛰어 달래는
그믐밤
징소리 북소리
원도 한도 없이
열명길 환한 꽃길
훠이!
훠이!
훠이! <혼굿> 전문
‘혼굿’은 ‘망자가 이승에서 풀지 못한 원한을 풀고 극락왕생 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굿’을 말하는데 ‘원한을 씻어준다’ 하여 ‘씻김굿’이라 한다. 씻김굿의 중요한 의례에는 ‘오구물림’, ‘고풀이’, ‘씻김’, ‘길닦음’ 등이 있는데 위의 <혼굿>은 “열명길 환한 꽃길”로 보아 ‘길닦음’에 해당하는 노래라 할 수 있다. ‘혼굿’의 행사는 하루 또는 며칠이 걸리기도 한다. 그 긴 행사를 시인은 주술에서 ‘나쁜 기운 물러가라’는 뜻을 지닌 감탄사 “훠이!”를 반복함으로써 압축하여 보여 준다.
화자가 펼치는 굿마당으로 들어가 보자. 1연 “잿빛 갈매기/ 물금 넘어 사라진 뒤”에서 우리는 시의 공간적 배경이 바닷가임을 유추할 수 있다. 자연물인 ‘갈매기’, 그것도 ‘잿빛 갈매기’가 ‘물금’ 곧 수평선을 넘어 사라진 뒤의 상황에서 우리는 ‘망자의 혼’이 잿빛 갈매기처럼 저승으로 가 주기를 바라는 화자의 염원을 읽어내야 한다. 화자는 무당이라는 당골이다. 화자의 시선으로 ‘물금’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 따라서 1연의 “물금 넘어 사라”졌다 함은 혼백이 저승으로 무사히 넘어가기를 바라는 화자의 마음을 은근슬쩍 보여주는 암시적 장치이다.
2연 “한 마당 굿판”은 굿판의 한 마당. ‘한 마당 굿판’을 따로 한 연으로 처리하여 위아래 공간을 비워둔 것은 마당의 넓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시인의 친절한 배려(?)일 터. ‘마당’의 내용은 3연 첫 행 “다시는 돌아 못 올 혼을”을 달래기 위한 굿. 어찌말 “다시는”과 “못”으로 보아 이승에의 미련을 떨쳐버리려는 화자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훠이! 훠이!”. 나쁜 귀신아 물렀거라, 썩 물렀거라. “모둠발 뛰어 달래는”, 모둠발로 뛰면서 망자의 넋을 달래는 화자의 모습이 숨 가쁘다. ‘모둠발 뜀’의 동작은 무속 춤의 대표성을 지니는 행위일 따름. 시종일관 이 행위가 지속됨은 아니다. 굿은 종합예술 중 주술성이 강한 민중예술이다.
4연 “그믐밤/ 징소리 북소리”는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독자들의 시선과 귀를 원한다. ‘그믐밤’은 시간적 배경으로 ‘어둠의 세계’, 망자가 벗어나야 할 세계이다. 징과 북은 굿에 동원되는 무속 음악에 동원되는 악기의 대유. 무속 음악에는 피리, 대금, 해금, 장구, 징, 북, 꽹과리 등이 동원된다. 4연은 시적 분위기 환기로 놀이에 대한 흥을 돋궈주는 역할을 한다.
5연을 본다. 이제 망자는 떠나가야 한다. “원도 한도 없이/ 열명길 환한 꽃길”을 가야 한다. ‘열명길’은 저승으로 가는 길을 말한다. 저승으로 가는 길이 환한 꽃길이라면 넋 씻김은 성공적이겠다. 이제 길베(긴 무명필)를 양쪽에서 잡고 당골이 넋당석을 들고 망자의 길을 잘 닦고 있나 보다. 6연은 그냥 읽지 말고 이렇게 읽자.
“훠이!”, 잘 가거라.
“훠이!”, 이승에 미련은 두지 마라.
“훠이!”, 가서는 오지 마라, 원 없이 잘 살아라.
3. 두메, 그 새로운 삶의 세계
시인은 자유인이 되고 싶다. 피비린내와 크레졸 냄새를 벗어나 정말 다른 세계에서 살고 싶다. 생의 환희도 잠시, 애틋한 주검을 보내야 하는 때도 있다. 자유인으로서의 시인이 꿈꾸는 세계는 ‘두메’이다.
<두메가 좋다>에서 시인은 “…… 파랗게 눈뜨는/ 풀피리”와 “만삭의 가을볕을 쬐”는 “갈대 섶 지붕”의 “박 두어 덩이”, 그리고 토담에 앉아 익고 있는 “호박 몇 개”와 “풀벌레 하야니/ 밤 밝히는 메밀 밭머리” “어디쯤”에 “살았으면 좋겠다”고 노래하고 있다. 꿈꾸어 오던 전원적 삶을 누리며 살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삶의 갈구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향수에서 비롯한다. 향수는 전원적 삶을 갈망하는 문명인의 귀향의식이다. 연어의 모천회귀 같은 것, 고향을 향할 수밖에 없는 원시적 정신의 균사체菌絲體 같은 것. 고향에 이르는 전석철 시의 과정을 따라가 본다.
<틈 사이>는 시인의 자전적 삶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보여 주고 작품이다. “생명주는 흙도 없이/ 메마른 콘크리트 틈새로 뿌리내린/ 냉이 개쑥갓 민들레”처럼 “갈증에 지쳐 가면서도” “당당히” 살아왔다. ‘콘크리트 틈새’는 삶에 부대끼는 소시민들의 극한적 삶의 공간이다. 이 ‘틈새’ 삶의 지나친 ‘갈증’은 <공동구역 이야기>에서 구체적으로 열거된다.
(1) 메마른 시체들이 사는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서면
표정 없는 CCTV가 돌아가고
인공지능 로봇이 되어 버린 사람들이
눈동자를 갈아 끼우고 틈새로 들어가는
방마다 비릿한 배설물이 넘치는 25시
컴퓨터가 부팅되면 열리는 사이버 시장
의식주를 공급받는 전선
자판을 두드릴 때마다
열리는 장송 음악회,
층마다 쌓여가는
공동구역
메마른 시체들이
살고 있다.
<공동구역 이야기> 전문
“엘리베이터”, “CCTV”, “인공지능”, “로봇 컴퓨터”, “부팅”, “사이버 시장”, “차판” 등의 시어들은 물질문명의 비이성적 중독성을 나타내는 시어들. 현대문명의 무비판적 수용이다. 스스로 기계화되어가는 메마른 인간상을 만난다. ‘자판을 두드릴 때마다 열리는’ ‘음악회’가 ‘장송 음악회’임을 ‘인공지능 로봇이 되어 버린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이들이야 말로 ‘메마른 시체들’이다. 어디 이들만이겠는가. CCTV의 감시를 받으며 오늘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는 당신도 나도 ‘메마른 시체들’이다. 공동구역의 삶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 시적 자아는 ‘두메’에서 살고 싶은 것이다.
(2) 늙은 고양이, 조올다가 쫑긋
그러나 오늘의 두메는 소박한 전원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시안으로 만난 <상강> 분위기에 젖어 본다.
세월의 낟알들은 돌아서서
제 편할 대로 떠나가고
백발의 할미
삭을 대로 삭은 몸 가누고
해바라기하는 툇마루,
늙은 고양이 한 마리 그미 발치서
조올다가 쫑긋 꼬리뼈를 세우고 있다
밤들자
대문간 먹감나무에 매달린 별들이
조롱조롱 등불을 켜고
퍽,
소리보다 먼저
또 홍시가 물러 떨어진다.
<상강霜降> 전문
시인은 그가 태어나 자란 고향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70년대부터 도시로 인구가 유입되면서 농촌의 인구는 급격히 감소되기 시작하여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는 고향마을이 공동화되어 가고 있다. 시인은 <상강>에서, 고령화로 쓸쓸히 삭아가는 농촌 마을의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상강”은 10월 24일경, 서리가 내리는 가을의 마지막 절기이다. 단풍이 지고 벌레들이 모두 땅에 숨어 겨울잠에 들어갈 때이다. 풍경의 주체는 “백발의 할미”. 백발이 되도록 수많은 세월을 보내는 동안 인연을 맺은 사람들은 “낟알”처럼 저 편한 데로 뿔뿔이 떠나가고 혼자 남은 ‘할미’는 “삭을 대로 삭은 몸” 겨우 가누며 툇마루에 나화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할미’의 반려는 “늙은 고양이 한 마리”이다. 이따금 “조올다가 쫑긋 꼬리뼈를 세우”는 고양이의 움직임은 자기 방어적 경계가 아닌 자연에 동화된 존재의 몸짓이다. 이 독거노인의 집에 밤이 들자 “대문간 먹감나무에 매달린 별들이/ 조롱조롱 등불을” 켠다. 그 등불 밤새도록 환하겠다. “퍽,/ 소리보다 먼저/ 또 홍시가 물러 떨어진다.” 고양이는 밤새도록 ‘소리보다 먼저’ 떨어지는 홍시 소리에 귀를 쫑긋, 꼬리뼈를 빳빳이 세우리라. ‘또’ 물러서 ‘퍽’ 떨어지는 홍시 소리에 밤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또’라는 어찌말은 행위의 반복으로, 추락의 이미지를 생의 감각으로 환치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 시인은 의태어 “쫑긋”, “조롱조롱”과 의성어 “퍽”을 불러와 <상강>의 영상감을 높이고 있다. 이는 오래도록 사진술에 익은 시인의 눈썰미가 그대로 작품화 하였음이겠다. 할미의 봄은 고목을 지키는 잎눈처럼 돋으리라.
<상강>의 ‘백발 할미’는 <어머니>에 그 모습이 보인다. 시인은 “아흔 맞은” 어머니를 그리면서 “경노당에 모였던 할매들은/ 하나 둘 떠나고 이제,/ 몇 명이 남았다는 주름가로 // 장편의 영화가/ 돌아간다”고 노래하고 있다. <상강>은 이 ‘장편의 영화’ 중 한 장면이겠다. 그러나 농촌의 현실은, <그곳에 가면>처럼 “저승꽃이 핀 마른 껍질을 힘겹게 벗겨내며/ 치매의 저편을 방황하고 있”는 “고향의 어귀를 지키고 선 느티나무”가 “유모차에 의지해 지나가는 할매들”의 모습처럼 쓸쓸하다. 게이트볼도 할 수 없는 할매들이다. “유년의 여행길에”서 화자는 “색 바랜 삶의 비늘들을” 만난 것이다. “아름드리 추억들이 고여 깔깔거리던/ 그날을 예서 만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화자는 여운을 남기고 있다.
(3) 느린 시간 속에 뭉클한 정이
이제 화자는 자신의 삶을 찾아야 한다. 동공화 되어 가는 ‘두메’에서 시인 전석철은 괭이를 쥐어야 한다. 그가 찾은 ‘두메’를 찾아가 본다.
지천으로 피어난 들꽃들이 행복해 하는
의령 자굴산과 한우산이 감싸 안은 곳
젊음이 떠난 마을 게이트 볼 장에 주름 골이 깊은
어른들이 힘주어 공을 굴려 보내다 바라다볼 때
편한 인사 한 마디에 웃음 가득 정겨운 시골
화선지속 햇살 따라 변해가는 풍경들
사방을 휘 둘러 보아도 온통 수채화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자연과 손잡고 걸어가는
누렁이 황소가 없어도 흐르는 실개천 따라
느린 시간을 풀어 뭉클한 정들이 되살아 숨 쉬는
의령군 가례면 갑을리 봉림마을
<가례면 갑을리 봉림마을>
위 따옴시 <가례면 갑을리 봉림마을>은 시인과 인연이 있는 정감 넘치는 마을 - 의령군 소재의 자굴산과 한우산이 감싸 안은 마을로, <두메가 좋다>의 후편에 가까운 작품이다. <두메가 좋다>는 가상의 공간이지만 위의 시는 체험의 공간이다. 농촌의 현실을 수용하는, 행복하고 정겹고 뭉클한 화자의 마음이 귀촌을 꿈꾸는 이들의 손을 잡아 이끄는 듯하다. 비록 젊은이들이 떠나고 “누렁이 황소가 없어도”, 게이트볼을 “힘주어 굴려 보내”는 “주름 골이 깊은” 어른들이 살지만 그에게 보내는 “편한 인사”에 “웃음 가득 정겨운 시골”이다. 들꽃이 지천으로 피고, “화선지 속 햇살 따라 변해가는 풍경들”이 “사방을 휘 둘러 보아도 온통 수채화”인, “흐르는 실개천 따라/ 느린 시간을 풀어” 정이 뭉클 “되살아 숨 쉬는” 마을이다. 첫 행의 “들꽃들이 행복해” 함은 화자의 행복이다. 화자는 이 ‘봉림마을’을 삶의 보금자리로 삼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 보금자리를 만들기 위해 <밭을 일구며>에서 화자는 괭이로 땅을 파 돌부리를 캐어 밭뙈기를 만든다. “허허, 콩 몇 섬 나오겠다”는 오가는 사람들이 농 섞인 격려를 들으며.
‘봉림마을’ 어디, ‘가례로 10길 어느 묵은 화전에서 괭이로 돌부리를 파내는 애송이 농사꾼 전석철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시인의 말’에서 전석철은 말한다. “그 헛된 이름,/ 헛된 시상(詩想)을/ 발설하고야만/ 이 부끄러움 // 다시는/ 이름자를 남기지 않으리….” 완전한 농사꾼이 되려는 것인가. 그러나 그의 이름은 헛되지 않다. 이 한 권 시집이 그는 자랑스러운 거다. 아무도 다루지 않는 세계를 과감히 다룬 전 시인의 첫 시집 《추방의 공간》출간을 축하하며 전원생활의 속살과 땀내 뭉클한 제2시집을 기대하면서 글을 맺는다.
표-4
◎ <추방의 공간>에서 만난 전석철의 ‘외계’는 종교적 신비적 세계가 아니라 오욕칠정을 안고 사는 인간의 세속적 세계이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사람살이의 아픔과 사랑과 외로움이 녹아 들꽃처럼 향기롭다.
공 영 해 (시인)
◎ 늘 새로운 관념을 추구하는 시인 전석철은 도전적이기도 하지만 감성적인 시인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시인이 근무하는 병원은 생과 사를 넘나드는 삶의 경계선이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공간에서 감성적인 문학을 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환자를 바라보는 시적 형상화를 통해 그들의 삶이 보다 건강해지고 또, 강인한 정신으로 재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고 느껴진다. 더러 사람의 능력으로 더 손 쓸 수 없는 한계상황에서는 그들의 아름다웠던 삶을 이야기하고자 했다고 보여 진다.
또한 시인은 세상의 삶을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끄집어내어 내적 희망을 순화시킴과 아울러 어떤 기교, 서술,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서정적 담론을 재구성하여 낯설지 않은 문장으로 애잔한 감정을 불어 넣어 읽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앞으로도 문운이 이어지길 바라며 시인의 말에서 ‘부끄러운 이름자’ 뒤엔 겸손함이 묻어 있을 터 시인의 또 다른 시적 감각을 기대해 본다. 홍 성 화(삼성창원병원장, 이비인후과 교수)
◎ 그와 나는 어제 만났다. 그렇지만 갑장이다. 그가 시 92편을 던졌다. 나는 받았다. 그의 시를 읽기 전에 나는 그의 ‘시인의 말’을 읽고 말았다. “그 헛된 이름, 헛된 시상(詩想)을 발설하고야 만 이 부끄러움, 다시는 이름을 남기지 않으리라...” 아, 그의 시는 백년 뒤에나 읽을 수밖에 없겠다. 그의 말을 미루어 이 시집은 그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이 될 것 같다. 제1시집, 제2시집, 제3시집...시집으로 성벽을 쌓으려는 자여! 저 ‘제’자가 나는 싫다. 제국주의 냄새가 난다. 권위주의 냄새가 난다. 시는 쌓는 게 아니다. 스며들어 사라지는 것이다. 그의 시를 읽기도 전에 그의 ‘시인의 말’ 앞에서 나는 무릎이 꺾이고 말았다. 그의 시는 백 년 뒤에나 읽어야겠다. 어딘가로 스며들어 사라진 뒤에.
김 승 강(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