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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고 울고 사랑하노라니…
- 부산 원도심 ‘문화사랑방’ 뒷이야기(2)
최 화 수
비오는 날의 즉석 벽화, ‘우산을 든 여인’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인 다방과 음악실, 대폿집은 광복동, 남포동, 동광동, 중앙동, 창선동, 대청동 등 부산의 원도심인 중구에 집중돼 있었다. 1960년대 중구의 인구는부산의 10%였지만, 다방은 전체의 절반인 50%나 몰려 있었다. 지식인, 특히 문화예술인과 문화애호가들의 외출 행선지라면 당연히 ‘광포동(광복동·남포동)’이었다. 부산의 원도심 전체가 문화사랑방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6.25 피란시절은 물론, 60년대를 거쳐 70, 80년대를 관통하기까지 부산의 원도심은 문화사랑방으로 많은 사람들로 붐볐고, 갖가지 사연들이 아로새겨졌다. 특히 다방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 샐러리맨들의 사랑방, ‘자칭 사장족’의 임시사무실, 결혼중매소와 물품거래소, 심지어 다급한 이들의 해우소解憂所 역할까지 했다. 그렇지만 다방의 첫 번째 기능은 문화예술인들의 꿈과 낭만이 꽃피는 공간이었다.
원도심 문화사랑방 중에 찾는 이들과 분위기가 가장 독특한 곳은 음악다방이었다. 부산에서 일찍부터 음악다방으로 명성이 높았던 업소는 ‘에덴’ ‘비원’ ‘아폴로’ ‘오아시스’ ‘백조’ ‘로댕’ ‘에츄드’ 들이었다. 음악다방은 LP음반을 DJ실 벽면 가득 채워놓고 주로 클래식음악을 들려주었기 때문에 자연히 문화예술인이나 애호가들의 아지트 역할을 했다. 음악을 들으며 차를 마시는 자체를 멋으로 여겼다.
한국 최초의 다방은 1923년께 서울 종로 2가 부근에 화가와 영화인들이 함께 주머니를 털어서 만든 ‘멕시코’였다. 다방이라는 공간 자체가 처음부터 지식인이나 문화예술인들의 집합체였기 때문에 그들이 좋아할 만한 고급스러운 클래식음악이 필수요건이었다. 해방 이후에 본격적으로 서울 명동에 생기기 시작한 다방은 ‘봉선화’ ‘마돈나’ ‘에덴’ ‘휘가로’ ‘돌체’ ‘모나리자’ 등이었고, 부산은 피란시절부터 대표적인 문화사랑방이었던 ‘밀다원’을 비롯하여 ‘금강’ ‘에덴’ ‘스타’ ‘천연장’ ‘비원’ 등이 중요한 클래식 음악다방이었다.
- ‘김형찬의 대중음악이야기’, 국제신문 2016년 1월 4일자
부산의 음악다방 가운데 1953년 남포동에서 문을 연 ‘비원’은 클래식 SP레코드판을 피란 자동차에 싣고 온 이가 차렸는데, 문화사랑방으로 인기가 대단했다.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는 이곳에는 피란예술인들이 하루 종일 들끓다시피 했다. 당시 이 다방에 드나든 한 인사는 “분뇨 냄새 풍기는 곳에 쇠파리 모여들 듯이 예술하는 사람들이 진종일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밑도 끝도 없이 열변을 토했다”고 했다.
어느 비오는 날 밤, 이 ‘비원’에서 아주 진귀한 행위예술(?)이 벌어졌다. 부산의 젊은 화가 엄성관嚴聖寬이 잔뜩 술에 취한 채 들어와선 음악의 선율에 맞춰 발레를 하듯이 홀의 통로를 한 바퀴 돌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젊은 화가가 이리저리 뛰며 제멋대로 춤을 추는 것에 놀란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 행동을 주시했다.
엄성관의 춤은 그 다음의 벽화壁畵 그리기를 위한 예비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벽면 쪽 탁자 위에 올라 이리 건너뛰고 저리 건너뛰며 하얀 벽에다 큼지막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벽에다 무슨 낙서라도 하는 줄 알았던 홀 안의 사람들은 차츰 그림의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긴장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비 내리는 남포동의 거리를 한 여인이 우산을 받쳐 들고 걸어가는 그림이었어요. 우산을 받쳐 든 여인은 바람에 치마가 날리어 하반신이 드러나는 아주 관능적인 모습이었는데, 당시의 비좁고 들쭉날쭉 보잘것없는 남포동 골목 주변의 건물 모양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지요. 또 조금도 품격이 떨어지지 않은 좋은 벽화로 뒷면 벽을 모두 차지했어요.”
당시 현장에서 즉석 벽화 작업을 지켜봤던 이 다방의 터줏대감 정용해(鄭龍海) 시인의 말이다.
- 필자의 졸저 『부산문화이면사』
벽화란 하나의 그림을 두고 1년 또는 수십 년에 걸쳐 그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당시로선 무명에 가깝던 젊은 화가가 술에 취한 채, 더구나 손님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위를 건너다니며 순식간에 그린 그림이 제대로 된 벽화일 수는 없겠다. 하지만 전란의 불안하고 답답한 상황에 한줄기 소낙비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고 위로해준 점에서 작품의 수준을 떠나 기억할 만한 이벤트였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서울 등지에서 몰려들어온 콧대가 높은 피란예술인들에게 부산의 젊은 화가가 당당하게 ‘부산의 그림’을 보여준 기개를 과시한 것은 ‘속 시원한 일’(?)이기도 했다. 엄성관의 이 즉석 벽화는 다방 주인을 비롯한 그 누구도 지우지 않아 ‘비원’이 문을 닫기까지 하나의 명물로 존재했다. 내노라 하며 대가大家를 자처하는 피란 예술인들의 높은 콧대 앞에서 부산 한 젊은 화가의 벽화가 묘한 시위를 벌인 셈이다.
화가 겸 도예가 엄성관(1930~1989)은 부산 화단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도깨비’라는 별명처럼 예상을 뛰어넘는 기행과 기벽(奇癖)으로 작품보다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를 아는 사람은 “하루도 그가 취해 있지 않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술과 더불어 평생을 산 사람이었다. 한때 그가 재직했던 학교의 교장선생은 어떤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일 년에 한번 취하는 사람이다.” 일 년 내내 술이 깰 사이 없이 취해 지낸다는 표현이었다.
- ‘신태범의 부산문화야사’(국제신문 2005.1.15)
대구 출생인 엄성관은 부산사범을 거쳐 서울대 미대에 진학했으나 졸업을 앞두고 학장에게 거칠게 대들었다가 퇴학당했다. 그는 부산 배정고교, 초량 화교학교, 부산중, 동주여상 교사를 지냈다. 180㎝가 넘는 큰 키에 귀공자 타입이었지만, 거의 세수도 목욕도 이발도 않는 봉두난발에 누더기 옷을 걸친 거지꼴로 다녔다. 1966년 거처를 서울로 옮긴 그는 다시 86년부터 경기도 이천에서 도예제작에 몰입했다.
목선 타고 제주도로…‘첼로 임대작전’
‘비원’은 음악다방답게 초기 부산음악계, 특히 관현악 발전에 음으로 양으로 이바지하는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까지 부산에는 관현악단은커녕 3중주단이나 4중주단 하나 없었다. ‘피아노 트리오’나 ‘현악4중주단’의 말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 정도였다. 그런데 피란시절, 우여곡절 끝에 오태균吳泰均 김진문金鎭文 홍선하洪善河 장규상張奎祥 등이 ‘부산현악4중주단’을 태동시켰다.
오태균 김진문 홍선하 배도순裵道淳 과 몇몇 음악애호가들이 ‘비원’에 모여 연일 구수회의를 열고는 했다. ‘부산현악4중주단’을 탄생시키기 위한 모의(?)였다. 때마침 인천에서 훌륭한 첼리스트가 피란을 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주인공은 연희대 영문과에 다니던 장규상으로 그는 ‘말보다 음악을 먼저 배웠다’고 할 만큼 음악에 타고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전공(영문학) 공부보다 첼로에 더 미쳐 있었다.
첼리스트 장규상은 현악4중주단 발족에 흔쾌히 동의했다. 그런데 어쩌랴, 그는 전란의 와중에 맨몸으로 피란을 온 바람에 첼로가 없었다. 피란시절의 그 혼란 속에서 어디서 첼로를 구할 방도가 있겠는가. 참으로 딱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악기가 없으니 현악4중주단 탄생도 무산될 처지였다. 이때 ‘비원’의 단골 해병 용사 정용해 시인이 아주 기발한 제의를 했다. 누구도 생각 못한 ‘첼로 임대작전’을!
정용해는 밥보다 음악을 더 좋아했다. 굶는 것보다 음악을 듣지 못할까봐 더 두려워했다. 그는 어떤 곡이든 도입부의 한 소절만 들으면 작곡가와 곡명은 물론, 곡에 담긴 내력까지 줄줄 꿰었다. 같은 곡이라도 누가 지휘한 어떤 오케스트라, 어떤 실내악단의 연주인가를 척척 알아내는 놀라운 귀를 가진 사람이었다. 더구나 왼쪽 귀는 중이염의 후유증으로 듣지 못했다. 음악 전공자들도 그의 백과사전적 음악지식에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를 그냥 음악애호가나 음악광이라 하기엔 어딘가 부족하다. 그렇다, 음악인이라고 부르자.
- ‘신태범의 부산문화야사’ (국제신문 2005. 1.18)
정용해는 1949년 해병대에 입대, 한국전쟁 때는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워 훈장을 받았다. 그는 전란 중에도 음악을 듣느라고 서울 돌체음악실에 묻혀 있다가 체벌을 받기도 했다. 휴전 이후 진해 해군기지에 근무하면서 그는 주말이면 부산으로 달려와 ‘비원’ 등에서 음악을 들었다. 그는 부산의 음악인을 비롯하여 많은 예술인들과 교분을 쌓았고, 제대를 하자 부산에 눌러 앉아 부산사람이 되었다.
정용해는 음악을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진중시陣中詩 ‘해병묘지’가 해병기념관에 영구소장 전시된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시인이다. 그는 특히 천상병千祥炳 시인과 아주 각별한 사이였는데, 1986년 10월 10~16일 부산 에덴공원 노천음악당 ‘솔바람’에서 천상병의 ‘고별시화전’을 열어주었던 주역이기도 하다. 천상병은 전시회 기간 내내 아내와 함께 ‘다정한 친구’ 정용해의 집에서 먹고 잠도 잤다.
정용해와 천상병은 6.25전란 중에 서울의 한 음악실에서 처음 만나 우정의 싹을 틔웠다. 정용해는 “대한민국 시인 가운데 천상병 만큼 음악을 깊이 아는 시인이 없기 때문에 천상병과 친하게 되었다”고 했고, 천상병은 “대한민국 군인 가운데 정용해 만큼 음악을 깊이 아는 군인이 없기 때문에 정용해와 친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수십 년 동안 이어져 ‘고별시화전’까지 열게 된 것이다.
- 최화수 ‘시인이 버린 시인’, 『샘이 깊은 물』 1986년 12월호
전쟁이 旗ㅅ幅을 날리던 날 / 가슴을 조이며 외이던 實話였기에 / 스치는 인적 인적마다 / 발길을 멈추고 들여다보는 등성이엔 / 풀이 자랐고 / 서럽지 않은 十字架에 / 이름이 적혔다 / 同志와 / 戰友의 情을 안고 / 내사 여기 死者처럼 섰거늘 / 벗이여 / 전쟁은 가고 / 다시 榮華하는 조국의 하늘 아래 / 너희는 묻혀 있다.
- 정용해의 진중시 ‘해병묘지’ 일부
정용해 시인의 ‘첼로 임대작전’은 참으로 기발한 발상이었다. 당시 ‘비원’에 드나든 특이한 인물 가운데 수산업계 손상조 사장이 있었다. 어선을 여러 척 보유한 그는 음악을 무척 사랑했고, 취미로 첼로를 연주하고는 했다. 더욱 놀랍게도 그는 당시 부산· 경남지방에선 유일하게 체코제 명기 첼로를 고성 본가에 은밀히 보관하고 있었다. 작곡가 윤이상尹伊桑이 여러 차례 대여를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손 사장이 조업어선 독려를 위해 제주도에 머무르고 있을 때 ‘첼로 임대작전’이 전개됐다. 꽤나 풍랑이 높은 날, 해병 전투복 차림의 정용해가 특사로 선발되어 제주행 통통배에 올라 부산항을 떠났다. 진해에서 군복 차림으로 부산의 ‘비원’을 줄기차게 찾아오는 정용해와 손 사장은 이미 친숙한 사이가 돼 있었다. 자그마한 목선에 실린 정용해는 거센 풍랑에 16시간 이상 된통 시달린 끝에 제주도에 닿았다.
“나는 6.25가 터지기 전에 38선을 세 번이나 넘었고, 서부전선에서 전투도 했지만, 목선을 타고 목숨을 걸고 제주도까지 오면서 참말로 죽을 고생 했네요.”
“목선을 타고 목숨을 걸고 제주도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요?”
“첼로를 장규상씨에게 대여해 주시오!”
정용해의 단호한 요구에 손상조 사장은 어쩔 수 없이 승낙을 했다. 정용해는 한시가 급하다면서 손 사장이 즉석에서 고성 본가에 전보를 치게 했다.
‘장규상에게 첼로 대여를 허가함. 손상조’
아마도 역사상 전무후무할 전보문電報文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그 덕분에 곧 이어 부산 최초의 현악4중주단 창립연주회가 대청예식장에서 열리게 되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전란 이후 부산의 원도심 ‘광포동’을 누빈 최고의 멋쟁이는 누구였을까? 사람에 따라 주장이 다를 수는 있지만, 서양화가 송혜수宋惠秀라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1913년 평양에서 태어나 도쿄, 평양, 만주, 서울 등지로 옮겨 다닌 그는 6,25 때 부산으로 피란을 와서 정착, 2005년 92세를 일기로 타계하기까지 미술계의 야인으로 창작활동과 후진 양성, 미술상 제정 등 큰 발자취를 남겼다.
송혜수는 훤칠한 키에 빨강 양말을 신고 노랑머리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광포동’ 거리를 휘젓고 다녔다. 이 천하 멋쟁이가 부산극장 앞을 지나가다 장발 단속에 걸렸다. 새파랗게 젊은 경찰이 다짜고짜 가위를 들이대며 머리칼을 자르려고 했다. 기겁을 한 송혜수가 “너희는 어미 애비도 없느냐?”고 호통을 치며 빠져나와 광복동 로댕음악다방에 뛰어들어 김종식金鍾植 화백에게 분노를 토해낸 일화가 있다.
5.16 직후의 해프닝이었다. 당시 군사정권은 사회기강 확립이라면서 거리 곳곳에서 보행위반자와 장발長髮 단속을 했다. 시가지 건널목 요소요소에 □자 꼴로 새끼줄을 쳐놓고 보행 위반자를 그 망 안에 서있게 했다. 또한 장발이 눈에 띄면 나이와 지위를 불문하고 젊은 경찰들이 그 자리에서 가위를 들이대고 머리칼을 싹둑싹둑 잘라버렸다. 4.19 직후 민주화 열풍으로 고교생들의 장발도 유행한 때였다.
전란의 생채기를 제대로 치유하지도 못한 1960년대 초, 국민소득 200여 달라의 지독하게 가난하던 그 시절, 시민들은 군사정권의 강권통치로 암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광복로에는 일제시대처럼 야시장이 열리기도 했지만, 밤 12시 통행금지가 시가지를 얼어붙게 했다. 자동차도 인적도 끊어진 그 시각, 통행금지에 걸린 이들은 뒷골목으로 줄행랑을 치다 야경꾼에게 걸려 파출소로 끌려가기도 했다.
1년 365일 중에 통행금지가 풀리는 날이 두 번 있었다. 12월 24일 크리스머스 이브와 12월 31일 송년일이 그 축복받은 날이었다. 사람들은 통행금지가 풀리는 바로 그 날을 그야말로 손꼽아가며 기다렸다. 그 날 밤은 너나없이 통금해제를 환호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특히 ‘광포동’은 남녀노소가 범벅이 되어 콩나물시루를 방불케 했다. 가만히 서있어도 인파에 떼밀려 저절로 물결에 실려 가듯 흘러갔다.
1963년, 부산의 천재 시인 김민부金敏夫가 부산MBC PD로 저 유명한 프로그램 <자갈치 아지매>를 기획할 때였다. 부산문우회의 ‘문학의 밤’ 행사장에 나왔던 김민부는 그날 초청강연을 한 문학평론가 이유식李有植과 격렬한 ‘문학논쟁’을 벌였다. 난투극 일보 직전에 주위의 만류로 가까스로 수습이 됐다. 김민부는 12월 31일 저녁, 문우회 동문 몇 사람을 남포동의 ‘대학촌’으로 불러 망년회 자리를 베풀었다.
불타오르는 정열에 / 앵도라진 입술로 / 남 몰래 숨겨온 / 말 못할 그리움아 / 이제야 가슴 뻐개고 / 나를 보라 하더라 / 나를 보라 하더라.
- 김민부 <석류(石榴)>, 195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입선작
1941년 부산 태생의 김민부는 1956년 부산고교 1학년 때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석류>로 입선하고, 고2 때 첫 시집 『항아리』를 펴냈다. 고3 때인 1958년 다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균열>이 당선,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천재시인’으로 불리며 문학도들의 우상이 된 김민부는 ‘미래의 천재시인’ 하일河日을 비롯하여 부산고교 후배인 김창근 김선학 등에게 막걸리 잔을 건네며 여러 가지로 격려를 했다.
막걸리 잔치의 망년회가 끝나자 김민부와 하일 등은 ‘대학촌’ 문앞에서 헤어졌다. 하지만 젊은 그들은 자갈치시장 좌판으로 술자리를 옮겼다. 배를 두드려가며 막걸리를 마신 그들이 이번에는 왕소금을 안주로 됫병 소주 잔술을 마셨다. 딸랑딸랑 푼돈밖에 없다보니 잔술에다 낱담배 신세였다. 그런데도 하일은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는 순간을 기다려야 한다. 목숨을 걸고라도 기다리자”고 포효하듯이 소리쳤다.
1963년이 1964년에게 바통 터치, 해가 바뀌는 역사적인 순간, 막걸리에 취한 것도 부족하여 소주 잔술을 덮어쓰며 기다리는 그 순간, 그들에게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 “목숨을 걸고라도 기다리자”고 외친 하일은 카운트다운을 하면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시궁창 앞에 나란히 서게 했다. 드디어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는 그 순간, 그는 “시궁창에 우리의 모든 것을 토해내자!”고 외쳤다. 웨액, 웨액…, 그들은 그날 먹은 술과 안주는 물론, 가슴속에 응어리로 뭉쳐 있는 희망과 망상까지 시커먼 시궁창에 토해내느라 악을 썼다.
그로부터 그리 멀지 않아 그들은 또 하나의 진한 깨달음을 얻었다. 하일은 얘기를 하다가 말이 막히면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은 오지 않고…”를 양념 뿌리듯이 뱉어내고는 했다. 천재시인 김민부 작시, 장일남 작곡의 가곡 <기다리는 마음>이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한 때문이다. 그들은 제마다 가슴속에 뜨거운 열망을 안고 있었지만,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이 오지 않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 빨래 소리 물레 소리에 눈물 흘렸네
봉덕사에 종 울리면 날 불러주오 / 저 바다에 바람 불면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 파도소리 물새 소리에 눈물 흘렸네
- 김민부 작시, 장일남 작곡 ‘기다리는 마음’
김민부는 1964년 이영수와 결혼, 다음해 상경하여 방송작가로 활동하던 중 작곡가 장일남의 제안을 받고 가곡에 쓰일 시 한 편을 쓰는데, 바로 <기다리는 마음>이다. 그는 1968년 두 번째 시집 『나부와 새』를 펴냈지만, 순수문학 대신 방송작가로 활동하는데 대한 고뇌를 한다. 그는 상경한 뒤 MBC, DBS, TBC 등에서 방송작가로 활동하는데, 매일같이 살인적이다피시 많은 분량의 원고를 써내야만 했다.
김민부는 그런 중에도 김자경오페라단의 오페라 『원효대사』의 대본을 집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정열적으로 펼쳤다. 하지만 어느날 없이 엄청난 분량의 방송 원고를 쓰느라 쫓기고 또 쫓겼다. 1972년 10월 29일, 김민부는 31살의 한창 젊은 나이에 자택에서의 화재로 유명을 달리한다. 화마에 휩싸인 그를 끌어내던 부인 이영수는 얼굴에 큰 화상을 입었고, 2004년 시인의 부모도 화재로 세상을 떠났다.
‘검은 스카프, 검은 원피스, 검은 스타킹’
1960년대 ‘광포동’ 문화사랑방의 남자 멋쟁이는 서양화가 송혜수였다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여성 멋쟁이는 누구였을까? 초현실주의 시인 조향趙鄕이 주도한 부산의 시 동인 ‘가이거(geiger)'의 멤버였던 김춘방金春芳이 그 주인공이라고 할 만하다. 그녀는 ‘일요문학’ 동인으로도 활동했는데, 대학에서 불문학을 강의하는 한편으로 동광동에서 벨모르독서실을 운영하는 등 적극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김춘방의 이력에는 독특함이 있다. 그녀는 시인 이전에 부산무용계에서 최초로 해외공연을 한 여성무용가였다. 1950년대 중반 김향촌 이춘양 이매방 황무봉 등과 함께 부산에서 활동했다. 그녀는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타이완의 타이베이臺北, 진먼 섬金門島, 나쭈 섬馬祖島 등에서 해외공연을 했다. 1954년에는 대청동에 ‘김춘방무용연구소’를 개설했고, 이듬해 6월 중앙극장에서 ‘김춘방무용발표회’를 열었다.
제자들(이영희 경성대 무용과 교수, 정남순 시인)이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김춘방은 항상 검정색 옷을 즐겨 입고 스타킹까지 검정색을 선호하여 지성적인 신비한 매력을 지녔다고 한다. 특히 여성의 인권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였으며 외모도 아름답고 선구자적인 풍모를 가졌으나, 전쟁 이후의 다양하고 복잡한 여성 수난의 시대에 활동하여 제대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남긴 여성시인이다.
- 정영자, ‘이숭자와 김춘방의 시 연구’, 계간 『여기』 2013년 겨울호
김춘방은 경기여고 출신의 재원으로 6.25전란 중에 부산으로 내려와 동아대학교 대학원 국문과에 다니며 조향 교수의 제자가 된다. 초현실주의 시인 조향의 제자가 된 그녀 또한 초현실주의 시인이 된다. 1962년 동아대에서 ‘엘리오트의 초기 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그녀는 한성여대에 출강, 불어를 가르쳤다. 김춘방은 ‘가이거’에 이어 62년부터는 조향 교수가 주도하던 ‘일요문학’ 동인으로 활동한다.
검은 스카프, 검은 원피스, 검은 스타킹의 매력적인 무용가이자 시인인 김춘방은 ‘광포동’의 문화사랑방 프리마돈나로 한 세대를 풍미할 만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조향 시인과 팔짱을 끼고 다니는가 하면, 진한 염문이 따르는 등으로 하여 폭넓은 사랑을 받지는 못했던 듯하다. 60년 당시의 폐쇄적인 사회에서 광복동 거리를 대학교수와 그 제자가 보란 듯이 팔짱을 끼고 다녔으니, 술안주감이 되고도 남았다.
조향은 광복동 거리에서 여교수와 팔짱을 끼고 다니는 것쯤은 예사로 여겼다. 여교수가 팔짱을 풀면 “좋아하는 사람의 팔짱을 끼고 걷는 것이 뭐가 부끄럽고 죄가 된다고 주저해! 여기 걸어다니는 저 신사들도 알고 보면 다 위선자야” 그는 이렇게 사뭇 비분강개조로 설파한다. 여류 시인 김춘방과는 아예 드러내놓고 팔을 끼고 다녔다. 필자도 여러 번 목격했던 사실이다. 김춘방과의 사이에 낳은 딸애를 집에 데려와 기른다는 말과 자기 큰딸이 그 애를 좋아해서 참 다행이란 말도 서슴지 않는다. 그는 또 김춘방이 늘 불쌍하다고 말해 왔다.
- 김규태, ‘조향의 빛과 그늘’, 『김규태 인간기행, 그 사람들』
그녀의 염문 상대자였던 조향은 누구인가? 그의 문학 역량과 업적은 대단했지만, 아주 별난 행보로 하여 ‘문단 이단아’로 치부되기도 했다. 임시수도 시절에는 “이제 부산이 중앙문단이다”라고 하여 서울 문인들의 미움을 받았다. 정치적으로 극우였던 그는 5.16 이후 민족계몽위원회의 장 자리를 맡아 ‘칼’을 휘둘러 부산의 저명한 문인 몇몇이 고통을 겪게 되는 등 여러 가지 일들로 하여 말썽을 일으켰다.
조향은 1.4 후퇴 이후 “이제는 부산이 수도다. 부산이 중앙문단이고 서울의 너희들은 피란민들이다”라고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그의 커다란 부동산이었던 일본 적산가옥을 팔고 작은 집을 사서 이사해버렸다. 피란작가들이 오면 방을 하는 수없이 주어야 할 문학동인적 의무가 싫었기 때문이다.
- 고은 『1950년대 - 그 폐허의 문학과 인간』
60년대 초 군사정부가 정착될 무렵 동아대학교 조향 교수가 발설한 시내 모 일간지에 김상옥 시인을 두고 도벽시인이란 느닷없는 기사가 터져 나왔다. 이 기사를 알고 난 김상옥 시인은 안절부절 손을 덜덜 떨 정도로 분을 못 삭이고 있었다. (중략) 김상옥 시인은 백방으로 궁리한 끝에 명예훼손 고발장에다 부산 서울 거주 문인들과 자신의 고향 출신 국회의원 친구와 명사들의 서명날인 연판장을 받아서 첨부키로 했다.
- 박돈목 ‘시인이 시인을 고발한 명예훼손죄’, 『부산문학사』 제1권
김춘방은 1965년 『미네르바』 창간호에 세계여성문학과 함께 한국의 고전여성문학을 체계적으로 기술한 수필 ‘미네르바의 후예들’이란 글을 발표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동광동에서 ‘벨모르독서실’을 운영하면서 학계나 문학서클에 장소를 제공하기도 했다. 1973년 서예가 운여 김광업雲如 金廣業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날 때 벨모르독서실에서 술 대신 지필묵만 준비하여 아주 조촐한 송별모임을 열어주기도 했다.
1972년 2월 15~22일 서울 국립공보관에서 「김춘방·김광업 시서전(詩書展)」이 열렸는데 ‘어두운 퇴장’ 등 11점이 발표되었다. 김춘방의 시에 김광업의 붓글씨를 쓴 시화전이었는데, 한글의 현대시를 회화적 수법을 가미하여 형상화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선 처음 선보이는 것이었다. 종래의 소품적인 시화전에서 탈피, 장시長詩를 많이 발표하여 10여 개 병풍에다 20여 족자 액자가 중심이 되어 눈길을 끌었다.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고백서들이, 내 가슴을 휴지통 삼아 버려지고, 쌓이고.
귓가엔 시간의 행렬이 흐른다.
내 얼마 안 되는 피가 등피곁에서 말라들고
4시. 3시. 2시. 1시. 0시.
- 김춘방, ‘이 밤을 체념의 종점이’ 일부
김춘방은 부산에서 무용가로, 또 시인으로, 대학강사로 활동했지만 그녀의 생몰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을 만큼 ‘베일 속의 여성’이기도 했다. 그녀의 고향은 이북으로 짐작되고 있고, 6.25전쟁 중에는 중국인과 뜻하지 않은 결혼을 했다. 그녀는 70년대 초 서울로 옮겨갔는데, 결혼생활이 불행하였고 더불어 아들의 걷잡을 수 없는 탈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결국 자살로서 삶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녀와 ‘일요문학’ 동인으로 함께 활동했던 시인 노영란盧映蘭도 모던풍의 시를 쓰며 ‘모던 걸’로 불리었다. “반세기 전에 아이새도를 할 정도로 사치를 했고, 하하하 하고 잘도 웃는 여성이었다”고 구연식 시인이 들려준 바 있다. 두 권의 시집, 한 권의 창작집을 펴낸 그녀도 세월 속에 묻혀 잊혀져 갔다. 1965년 연탄가스 중독으로 9년간 절필을 하다 74년 회복했다. 80년대 서울로 옮겨간 그녀는 시집을 한 권 냈지만, 평생 독신으로 지내다가 1991년 친척집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 <문학도시> 2016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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