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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귀주성 답사여행은 임종욱 박사님의 글과 동영상을 인용한것입니다.
임종욱 칼럼-귀주 소수민족
황과수에서 6시간을 달려 귀주 서남단(西南端)의 흥의(興義:Xingyi)시로 갔다.
최근 금광이 발견되어 오지마을이 신도시화한 신흥도시로, 사회주의 국가
이자만 밤-문화도 제법 번성하다는 고장이다.
흥의(興義)로 가는 도중, 고춧가루와 사탕수수로 유명한 단교(斷橋)와 개고기
(狗肉)으로 유명하다는 관령(關嶺)을 통과하는데 모두 해발 1100m에 위치하는
산간마을이고, 고산준령(高山峻嶺) 구절곡곡(九折曲谷)의 험로(險路) 특히
오메가형(Omega形)의 경사진 굴곡 길을 지날 때는 아찔함을 느끼게 하였다.
↑ 절벽에서 360도 회전하는 오메가형 도로
↑ 265~300m의 절벽 아래로 흐르는 북반강
북반강 대교(北盤江大橋)도 건넸다. 265~300m의 협곡(峽谷)에 세위진 전장(全長)
468.2m의 현수교(懸垂橋)이다. 다리를 건너며 불과 10여년만에 이토록 발전한
중국의 변천에 감탄이 나왔다.
↑ 북반강 대교
다음날 동남방향에 위치한 만봉림(萬峰林:Wanfenglin)과 만봉호(萬峰湖)를
관람하였다. 이 산은 태고적 바다 밑 암석이 융기(隆起)해 1만 개 이상의
봉우리가 숲을 이룬 것인데, 총 면적은 2,000㎢로 흥의시의 3분의2에 해당한다.
관람용 Carter로 산을 누비며 멀리서 조망(眺望)하는 만봉림(萬峰林)은 모두
도토리를 세워 놓은 것 같다. 그 중에 한 연봉(連峰)은 마치 여성이 누어있는
모습을 방불(彷佛)케 하기도 하였는데, 이곳은 동.서 두 봉림(峰林)중 서봉림
(西峰林)이라서 쌍유봉(雙乳封)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지경천(五指驚天: 다섯 손가락이 놀란다)이라는 곳도 찾지 못하였다.
이 근처는 묘족 마을이고 자연적으로 형성된 팔괘전(八卦田)이 있었다. 이곳의
경작은 팔괘의 순서대로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 만봉림을 오르는 산악 carter
↑ 팔괘전(八卦田)
↑ 쌍유봉 사진
↑ 만봉림 묘족 남성
만봉호(萬峰湖)는 인공호인데 항주(抗州) 서호(西湖)의 350배(倍)의 넓이란다.
우기에는 수위(水位)가 10~40m까지 높아진다니 그 담수량(湛水量:catchment)
을 가히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대국다운 면모가 은근히 부러웠다.
선식(船食)으로 유별난 것은 호수에서 포획한 민물새우 튀김과 생선찜 그리고
만봉림에서 채취한 버섯요리였다.
이곳 주차장에는 노파 두 서넛이 사탕수수를 팔고 있었는데 그들의 표정은 참으로
순박(淳朴)하였다. 더덕더덕 페인트 칠 같은 화장을 안 한, 때 뭇지 않은 얼굴,
눈 꼬리 사납게 영악하지 않은 선한 눈매, 꾸밈없는 수줍은 표정.....
아 인간미 넘치는 저 얼굴이여....고생하여 이가 빠지고 얼굴은 햇볕에 끄을려
검고 무딘 손에 보잘 것 없는 체구지만 강인한 정신과 착한 마음씨를 가진 저들의
건강을 돌보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며 고마운 마음을 표시할 길 없었다. 나는 이런 때,
늘 준비한 ball pen과 사탕 또는 쵸코렛(chocolate)을 준다. 푼돈으로 사례하면
걸인(乞人)도 아닌 그들의 인격을 모독(冒瀆)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만봉호
↑ 만봉호 주차장 노점상 노파들
↑ 가난해도 당당하고 즐거운 노파
↑
오후에는 마령하협곡(馬齡河峽谷)을 탐방하였다.
흥의시 동북방향으로 4,0km떨어져 있는 곳에 있고, 7,000만년전에 지각의 변동으로
인해 형성되었다. '지구의 가장 예쁜 상처'라고 일컬어져 있는데 길이가 무려 70km,
멀리 하류에서는 래프팅(Rafting)도 가능하다.
곳곳에 높이 40m의 가느다란 실폭포가 흐르며 절벽의 나뭇잎은 흙과 운우(雲雨)로
마치 가죽으로 된 멍석을 늘어놓은 듯이 보인다. 계단과 협로(狹路)를 수없이
내리고 오르며 동굴도 지나고 또 오르고 내리며 물소리를 들으며 구경하는데, 과연
不地不山 不山不洞 不洞不奇(부지불산 불산부동 부동불기). 산이 없는 땅이 없고,
동굴 없는 산이 없고, 기이하지 않은 동굴이 없다고 할 만하게 중국의 산수는 절묘
하다.
↑ 흙먼지 이불을 두른 절벽의 나뭇잎
↑ 땀 범벅에 햇볕에 끄을르고...
이곳에서 생전 처음 보는 비파(枇杷: loquat)도 맛보았다. 작은 망고와 흡사한데,
맛은 그만 못하다.
↑ 비파(枇杷
카이리(凱里: 개리) 검동남민 박물관(黔東南民博物館)
2008.5.1.
空慧
>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앞으로도 여행인의 한사람으로 박사님의 건강과 행복 하시는 일일 마다 축복 있으시길 비옵니다. 감사 합니다.
검동남민 박물관(黔東南民博物館)
카이리(凱里: 개리)는 귀주성 귀양(貴陽)의 동쪽에 있다. 시 외곽에 검동남민-
박물관(黔東南民博物館)이 있는데. 입구의 상가(商街)건물로 인하여 전경(全景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건물구조가 묘족(苗族)들의 가옥과 풍우교(風雨橋)를
본따서 지은 형식이다. 규모는 크지만 내용은 알차지 못하였다.
↑ 전면 상가 건물로 인하여 박물관 전체 모습을 볼 수 없다.
아래 층은 비어 있었고 2층 전시실에는 이 지방 묘족(苗族)들의 가옥구조의
모형과 풍우교(風雨橋)의 모형이 있었다. 가옥들은 모두 작은 흑기와(黑瓦)의 3층
인데 묘족은 석벽(石壁)이고 동족(侗族)은 나무 판자의 목벽(木壁)이다. 또한
동족(侗族)마을에는 반듯이 높은 고루(鼓樓: Drum pavilion)가 있어 묘족마을과
구별된다. 이 고장에는 곧바른 삼나무(杉木: Cryptomeria japonica)가 많아 목재로
쓰인다. 아래층에는 가축을 기르고, 2층에 기거하며 3층은 창고로 이용하는바,
중국남방과 베트남 등지의 가옥구조 형태이며 모두 운우(雲雨)로 인한 습기(濕氣)
에 대응하기 위해 강구된 구조이다.
의상들은 다양하여 복장(服裝)의 색에 따라 흑교(黑苗), 백묘(白苗), 청묘(靑苗),
홍묘(紅苗), 화묘(花苗)로 크게 구별하기도 한다. 또한 성별과 연령에 따라 약
1백여 벌의 의복을 착용한다고 한다. 멩(meng:蒙: 몽)이라는 아공(A gong)계통
(阿弓系統)을 시두로 멩루(meng lou: 蒙婁:몽루) 또는 빠이 먀오(Bai miao: 白苗:
백묘)라고 하는 자칭 준이(Zun-yi)계통:遵義系統:준의계통) 등 58개 계통(系統)의
복식(服飾)이 있다. 그 외 또 키안 시 베이(Qian-xi bei)지구(黔西北地區: 검서배-
-지구)묘족의 의상구분은 19개나 된다. 또한 계절과 거주 지역에 따라 복식이
다르므로 복식으로 묘족과 동족 부이족 등을 구별하기는 곤란하다.(※가옥과
풍우교는 후에 사진이 나오니 참고 하시라.)
천은 직접 베틀(織造機)에서 짜서 자연 염료로 염색하여 다듬이질(fulling)한 후
계란 흰자를 발라 햇볕에 말려 광택이 나도록 만든다. 중국 비단은 자고로 유명
하지만 이들의 직조기술과 염색술은 참으로 탁월하여 그들의 의상을 얼핏 보면
가죽으로 착각할 정도가. 겉옷은 당의(唐衣)외 비슷했다. 특이한 점은 의상에
많은 장신구를 단다는 점이다. 특히 여인들의 두발(頭髮)은 다양한 모양을 띠고
있으며 머리-치장(治裝)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호신용 작은 화살을 꽂는다는
점이다. 이를 위장하기 위한 꽃도 꽂으며 머리 장식이 화려하다.
↑ 은관(銀冠)과 은장식의 의상을 입은 묘족 처녀들
뿌이족(布依族: 포의족)과 똥족(侗族: 동족)은 서로 자기들의 시조(始祖)가 군신
(軍神)으로 숭앙받는 용맹한 치우신(蚩尤神)의 후예(後裔)인 혁(亻+革)가족이다
라고 하는 그 치우신 상이 모셔져 있기도 하다. 사실상 혁가족(亻+革家族)은
묘족 계열에 속해있어 독립민족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는데서 기인한 것이리라.
또한 후예사일(后羿射日: 후예가 활로 태양을 떨어트림)의 신화를 믿기에 태양-
숭배를 하는 혁가족들의 마을은 개리(凱里)의 시굴 마당(麻塘)이다. 그리고 그
후예(后羿)가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믿는 혁가족도 있다.
쪽물을 사랑한 포의족(布依族)은 밀납(蜜蠟)이 쪽물염색을 막는다는 사실을 예부터
터득했으며 지금도 리란(蜡染: 蠟染)의 엷은 쪽빛 옷을 많이 입는다. 어느 지역의
포의족 여인들은 커다란 두건을 쓰는 풍습도 있다.
↑ 치우신(蚩尤神) 상
↑ 포의족(布依族) 아기씨들의 의상
숙고(熟考)하면 후예(后羿)가 활을 쏘아 태양을 떨어트린 덕분에 지상의 인간들이
그 햇볕을 받아 농사를 지어 생명유지를 하게 되였지만 결국 지구를 파헤치는
자연훼손의 동기가 되었고, 불사약을 흠처 먹고 달로 달아난 항아(姮娥)는 계수-
나무 아래에서 장수하였지만 그 통에 후예는 죽었다.
그러니 세상만사 동전의 양면같이 길훙화복(吉凶禍福)이 등가(等價)인데, 그
조화를 잘 하여야 사람다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두 지족안분(知足-
安分)의 섭리를 모르고 욕심만 과하다.
혁가족의 여인 머리에는 붉은 술이 달린 두건을 쓴다. 태양숭배의 표식이다.
물론 은으로 만든 화살모양의 머리꼬지도 꽂고 있다.
↑ 묘족 여인들의 머리장식
↑ 혁가족 여인의 붉은 술이 달린 두건(頭巾)
목료인(木佬人)이 개리(凱里)와 황평현(黃平縣)과의 경계에 살고 있다고 사진과
함께 전시되고 있는데 여늬 중국인과의 차이점을 보지 못하였는데 ‘료(佬)’자가
점잖을 ‘료’ 자이니 점잖은 부족이리라.
묘족(苗族)을 위시하여 동족(侗族) 기타 소수민족들은 각기 다른 언어는 있었지만
문자가 없었다. 글자 대신 기호(記號)로 기록을 하였다. 하여 문예(文藝)활동은
없었지만 음악과 축제는 성대했다. 남성들이 부는 취악기(吹樂器)로는 크고 작은
루성(芦笙; 호생: 생황:笙簧)과 타악기(打樂器)인 동고(銅鼓)와 북(鼓)이 있었고,
드물게 만도린(mandolin)같이 생긴 현악기(絃樂器)인 월금(月琴)도 있었다.
중국에서 유일하게 총기(銃器) 휴대(携帶)가 가능한 빠샤묘족(芭莎苗族: 파사-
묘족)의 조총(鳥銃) 비슷한 구식 단발도 진열되어 있었다.
화약(火藥)을 개발한 것이 중국이므로 자연히 총포(銃砲)의 시조(始祖)가 중국
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원(元)대에는 이미 그것을 개량한 금속제의 통형-
화기(筒形火器)가 출현하였고, 14세기에 아라비아인들이 ’마드퐈’라고 하는 목통-
화기(木筒火器)를 북유럽에 유출시킴으로써 유럽에 알려졌다던 것이다. 중국이
개발한 화약 종이(紙) 지남철(指南鐵)은 결국 서양으로 건너가 대포(大砲) 인쇄기
(印刷機) 나침반(羅針板)을 만들게 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청말(淸末) 중국을
와해(瓦解)시킨 계기가 되었으니 실로 기상천외(奇想天外)한 귤화위지(橘和爲枳:
귤이 화수를 건너면 탱자가 됨)가 아닌가.
풍물(風物)들도 있었지만 재미있는 것은 우리 농촌에서 사용하던 것과 똑같은
농기구인 풍구(風具)가 있었고, 특이한 것은 작은 대롱인데 칼과 낯을 넣고 다니는
칼집(scabbard)이였다. 후에 보니 지금도 남자들은 이것을 허리 뒤춤에 달고
다녔다.
벼농사 추수(秋收)때 벼이삭을 자르는 적화도(摘禾刀)도 기묘하였다. 크기는 손바닥
만하다. 이모작(二毛作)을 함으로 우리나라같이 벼를 낯(鎌)으로 베지 않고 벼이삭
(禾: an ear of rice)만을 자르는 물건이다.
↑ 적화도(摘禾刀)
흥미있는 것이 또 있다. ‘꽃밥’이다. 묘족의 처녀들은 축제날 남성들에게
꽃잎으로 정성들여 물들인 색색들이 꽃밥을 선물하는데 그 꽃밥에는 나는 당신의
구혼에 동의한다(성쌍대: 成雙對) 또는 결혼 조건으로 비단을 달라(수헌단자:
酬獻緞子), 나는 기쁘지 않고(불희환: 不喜歡).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고(재래왕료:
再來往了) 등의 표식을 한다. 꽃밥 위에 젓가락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으면
승낙한다는 표시이다.
(貴州少數民族 探訪記)-6
시동(施洞) 자매반 축제(姉妹飯 祝祭)-1.
2008.5.2.
空慧
올해 자매반 축제(姉妹飯)는 4월 21일로 정해져 이날에 맞춰 귀주 소수민족 탐방에
나선 것이였다. 카이리(凱里:개리)에는 레이산(雷山), 태강(台江) 시동(施洞)등 여러
묘족들의 토속촌(土俗村)인 먀오짜이(苗寨: 묘채)가 주변에 많다. 좀 큰 묘채로는
청만(靑曼), 남화(南花), 계도(季刀) 등이며, 마당혁가(麻塘亻+革家) 외 귀주성에 48개
묘채가 있다,
태강(台江)에서는 지방에서 주최하는 공식행사가 진행되었는데 그 show같은 연출행사
보다는 전래대로 각 묘채(苗寨)에서 모여든 묘족들의 자발적인 행사가 열리는 시동
(施洞)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화창하지 못한 궂은 날이여서인지 시동 가는 길에 교총사고가 발생하여 시간이 지체
되었다. 아침이면 늘 비나 안개가 내려 운우(雲雨)가 자욱하고 오후가 되어야 해가
나는 중국에 비하면 아침이 선명한 우리나라 옛 이름이 조선(朝鮮)임을 실감한다.
도처에서 축제에 참가하는 인파들은 도보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배로, 차로 그리고
길목마다 가족단위로 참가 행렬이 줄을 이였다. 길가에는 벼룩시장이 열렸고 노천-
정육점, 닭, 앵두(櫻桃: 앵도: cherry)등 농축산물(農畜産物) 노점 그리고 쌀국수 등
다양한 먹거리 난전(亂廛)도 많았다.
↑ 포즈를 위해 무릎을 구부려 키를 나춰 묘족 묘녀와
↑ 시동 마을의 오리들도 일렬행진....
↑ 시동 벼룩시장의 풍물/패물들
시동은 시굴 맑은 물이 흐르는 강을 낀 산간농촌 마을이므로 숙박시설이나 음식점이
없었다. 축제는 오후에 개최됨으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점심때가 되어 마을
민가에서 차려주는 꽃밥을 시식하였다. 음식은 그런대로 먹을 만하지만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식욕이 나지 않았다.
민가 골목을 누비는데 떠들썩한 소리가 나서 다가가 보았더니 마침 그 집 마님
생일잔치였다. 푸짐한 음식을 차려놓고 많은 가족들이 연회를 하는데 불청객인
이방인 나보고 들어오라는 손짓을 한다. 염치없이 들어갔더니 며느리인 듯 애기
업은 새댁이 지리를 양보하였고 술과 음식을 권하였다. 그들의 소박하고 후덕한
마음씨가 너무 고마웠지만 감사를 표시할 길이 없어 늘 선물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ball pen과 candy/chocolate를 아기에게 주고 나왔다. 어느 민가 문 앞에선가
할머니의 아기보기의 정겨운 모습에서 핵가족시대가 인성(人性)을 굴절(屈折)시키고
있음을 통감하면서 그들의 가부장적 가정이 나의 어린 시절을 회상케 하였다.
↑ 시동 마을에서 맛 본 꽃밥
↑ 묘족 어느 민가의 생일 잔치상
이곳 어린이들의 눈망울은 영농(玲瓏)한 구슬같이 맑았다. 그리고 밝고 잘생겼다.
비록 옷차림은 좀 남루(襤樓)해 보이기도 하지만 도시의 영악(獰惡: truculent)한
아이들같이 약삭빠르고 매서운 눈초리가 아니어서 정감이 갔다.
여인들도 군티 없이 반듯하고 예뻤다. 최근 중국의 시굴에도 전기가 가설되어
오지 사람들도 TV를 시청하지만 공해(公害)없는 맑은 산촌에서 이들은 자리이타
(自利利他)의 정겨운 마음으로 더불어 사는 까닭이리라.
↑ 마냥 즐겁기만 한 밝고 착한 마을 어린이들....
그들은 축제를 위하여 노소를 불문하고 각기 고유의상과 은식(銀飾)으로 치장(治裝)
하였는데 성장(盛裝)을 맞추면 1500元(한화 약 22만원), 은장식으로 할 경우 1만元
(한화 약 150만원)이 든다고 한다. 은관(銀冠), 은-목걸이 그리고 옷에 부착하는
은장식은 모두 근래 공장제품인 것으로 보였다. 은관(銀冠)에는 은꽃, 은방울, 은공작,
은나비, 은침 등 수십 종류 때로는 백여 종류까지 달아놓아 무게가 3,40량(兩)까지
되는 것도 있단다. 그 뿐인가 은-귀걸이, 목거리, 팔찌등 은식(銀飾)은 화려하다.
수작업으로 만든 옛 것은 벼룩시장에 나와있었으니 그들의 치장은 이제 옛것이 아닌
신세대의 것이라서 전통미를 잃은듯이 보이기도 했다.
그들이 은장식은 15kg에 달하는 것도 있다는데 어린이와 부녀자들만의 이 단장은
부(富)의 과시(誇示)이기도 하다. 과거의 화폐인 은전(銀錢)이 값진 것이었으니 은관
(銀冠)과 은패물(銀佩物)은 부(富)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 어린이의 은장(銀裝)
다섯 살이 되면 자수를 배우기 시작 한다고 하고. 열 살이 넘으면 숙련된 솜씨로
다양한 도안을 수놓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수놓은 꽃띠나 수건 등을 축제 때
자기가 좋아 하는 상대에게 주기도 한다고 한다. 얼핏 보면 의상이 비슷한 듯
보이지만 묘채(苗寨)마다 달랐다.
본시 이 자매반 축제(姉妹飯 祝祭)는 자매절(姉妹節) 행사였고, 묘족 청춘남녀들의
배우자 선택의 날 이였으며, 각 묘족의 묘채(苗寨)에 따라 날자와 이름은 다르지만
형식은 같았다.
처녀들은 이 날, 마음에 드는 남성에게 꽃밥인 자매밥을 주는데 이것을 바로 자매반
姉妹飯: 자매반)이라고 하는바 찹쌀에 야생의 꽃을 넣어서 지어 색물감을 드린 밥
같이 보인다. 그 안에 마음에 든다 또는 다른 요구조건을 표시 한다. 자매반은
이미 전편에서 언급하였다.
↑ 비단을 바치라(수헌단자: 酬獻緞子)라는 뜻의 꽃밥
시동(施洞) 자매반 축제(姉妹飯 祝祭)-2.
2008.5.2.
空慧
↑ 묘족 가수
↑ 시동 자매반 축게 묘채 행사 배치도
축제는 강가 두(2)곳에서 열리는데 마을 아래편에서는 자마화(姉妹花) 선발대회 즉
미스 묘족을 선발하는 경연대회인데 시설과 진행이 미숙하였고 참가지망인도 그리
대수롭지 못한듯 하였다. 사람들은 마을 위 강가에서 열리는 축제에 더 많이
참가했고 행사도 볼만 하였다. 그 축제 장소는 마을을 다시 지나서 논길따라 꼬불
꼬불 언덕을 넘어선 강가였다.
냇가에 다다르니 북소리 장단에 맞춰 묘채(苗寨)단위로 원을 돌며 춤을 추고 있었다.
나도 대열에 동참해 보았으나 아풀사 모두 여성들만의 춤이라서 금새 대열에서
벗어났다. 각 묘채(苗寨)의 묘족들의 음악과 춤은 같았으나 의상이 달랐다. 춤은
느린 템포의 스코트 랜드 발춤(scotish dance)과 비슷하였다.
맑은 강변에 모여 화려한 고유의상을 입고 은관을 쓰고 최고의 치장으로 북-단장에
마춰 춤을 춘다. 추는 사람도 돌고 원도 돌고 사람물결도 돌았다.
부녀자들은 고성으로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북치는 고수(鼓手)의 빠른 북장단에 맞춰
춤추며 무아지경에라도 들은 듯 희열이 만면한 웃음을 짓기도 한다.
↑ 북치는 고수들
↑ 목청껏 소리내는 여인들
일정한 진행이 없는 자발적인 축제임으로 좀 무질서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번갈아
쉬었다가 또 노래 부르며 노소물문(老小不問)하고 춤을 추었다. 그 많은 묘족들은
노래와 춤 이외에 일절 말이 없었다. 우리네 부녀자들이 이런 축제를 갖는다면
아마도 노래 소리 북소리보다 잘 난체 하며 떠들어대는 잡소리가 더 크리라.
이들은 같은 부족끼리 묘채(苗寨)에서 오랜 세월 함께 살기에 서로를 도우며 서로
를 이해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가 생활화되었으므로 남에게 해가 되거나 나 혼자
좋기 위하여 나 몰라라 하는 이기배타(利己排他)적인 생각은 못하는 것 같다.
말없이 서로 눈웃음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
↑ 묘채별로 원을 그어 돌며 춤춘다.
>
>
>
윗편에선 남성들이 말타기 경기가 있었다..... 나귀(donkey)보다 좀 크고 노새(mule)
정도의 토종말 같았고 안장도 없다. 말도 각자 자기가 기르는 놈으로 겨우 3~4
마리(匹)가 참가했고 일정한 규칙도 없이 그저 짧은 거리를 말에서 낙마(落馬)하지
않고 오래 달리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 것이었다.
말을 보니 오랜만에 타보고 싶은 충동을 일순(一瞬) 느꼈지만 나는 그런 무모한
짓은 못하고 더구나 남이 노니는 곳에 끼어드는 결례(缺禮)를 범하고 싶지 않았다.
날씨가 구지니 어둠이 일찍 깔릴 것도 같고 개리까지 도라가려면 교통이 혼잡하여
3~4시간 이상 소요될듯하여 발걸음을 돌렸다.
문헌에 보니 모족들은 계절 따라 축제가 많다.
결혼은 12~13세에 조혼(早婚)하는 경우도 있으나 16세 이상 성년(成年)이 된
후에야 同居할 수 있다. 장례(葬禮) 풍습은 의(壽衣)를 입히고 염(殮)을 하는
절차, 발인(發靷) 매장(埋葬) 후 삼우제(三虞祭) 풍습 등 우리나라 전래의 장례-
풍습과 비슷하다.
랑덕(郞德) 세계문화유산.
2008.5.2.
空慧
a. 랑덕상채(郞德上寨):
랑덕(朗德: Langde)은 귀주성 대당현(大塘縣)에 속하며 개리(凱里)에서 동남 방향
약 27km 지점에 있다. 심산 오지인데도 큰 마을이 많았고 부자 동네란다.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이 랑덕상채(郞德上寨)에는 총 108가구, 약
5~600명의 주민이 거주하는데 내가 방문한 곳이 바로 랑덕 동가묘(東家苗)이며
랑덕상채 고건축군(郞德上寨 古建築群)으로 문화재 지정을 받은 마을이다.
이 오지 청정마을에도 최근에 전기가 가설되었다. 중국 정부가 대단히 큰일을
한 것이다. 그 결과 오지에서도 문화의 혜택을 받는 것은 좋았는데 그 결과로
문화침식(文化侵蝕)에 의한 부작용으로 환경오염 대자연 훼손 인성(人性)의 혼탁
문화풍습의 변질과 아류(亞流)가 염려된다.
본시 허풍이 많고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쪄들어 대국임을 과시하는 중국이 쓰찬성
(四川省: 사천성)에 건설한 산샤댐(三峽: 삼협 Dame)은 그 규모가 세계제일인데,
그 외 중국이 개방 후 불과 10여 년 만에 400개에 가까운 수력댐을 건설하였으니
그로서 산간 오지까지 전기를 수급하는 것은 좋지만 그 광장(宏壯)한 물의 무게로
지진이 우려된다는 학자들의 염려도 있었으니 큰 것만을 과시할게 아니며 급조한
토목사업으로 인한 불실 우려도 숙고해 볼 일일게다.
↑ 동네 노파들
↑ 연못 가 여인들
이 지방에서는 자고로 손님영접이 성대하였다. 먼 길을 마다하고 오셔서 대단히
반갑다는 그 전통을 이여 마을에 도착하면 온 마을사람들이 손님 영접에 나선다.
동구 입구에서부터 마을로 들어서는 길에 부녀자들이 명절날만 입는 은관(銀冠)에
은식(銀飾)이 달린 성장(盛裝)을 하고 길가 양옆으로 술잔을 들고 줄을 서서 손님
에게 작은 술잔에 담긴 술을 먹여준다. 이 술을 란로주(攔路酒)라고 하는데 12번
즉 12 여인에게서 한잔씩 입에 대어 마시게 된다. 이때 마을 남성들은 논-두락에
옆으로 길게 서서 루성(芦笙: 蘆笙: 로생: 笙簧: 생황)을 분다.
↑ 동구 논둑에서 루생을 부는 남성들
↑ 마을 마당인 로생장에서 루생을 부는 원로들
↑ 란로주
마을에 들어가는 문턱을 넘어설 때는 폭축(爆祝)을 터트리며 부녀들이 노래를 부르
고 각배(角盃)에 든 술 한 잔을 마시게 된다. 이때 각배에 손을 대면 다 마셔야
하며 손을 대지 않으면 마실만큼만 마시면 되는데 이술을 진채주(進寨酒)라 한다.
술맛은 란로주나 진채주나 같은 맑은술인데 달콤한 맛이 나며 소주와 배갈 중간
정도라고 할 종도다. 곡주(穀酒)이고 발효주(醱酵酒)임에는 틀림없는데 단맛이 나는
것을 짐작컨대 아마도 사탕수수(sugar cane: 감자: 甘蔗)를 섞은 것이 안니지...
뒷끝이 아주 께끗하고 금시 깨었다.
↑ 마을 문턱에서 진채주를 마시고
마을길은 돌을 깔아 문양을 넣었고, 경사진 산마을 임에도 연못이 있는 운치
있는 마을이다. 마을 중턱쯤에 마당이 있으니 가운데에 솟대가 세워져 있으며
이름하여 동고평(銅鼓坪) 혹은 로생장(蘆笙場)이다. 손님들이 이 마당에 도착
하여 좌정(坐定)하면 가무(歌舞)가 시작된다.
↑ 춤 시작
↑ 권주 춤
↑ 춤
↑ 춤
처음에는 젊은 부녀자들이 솟대를 중심으로 원을 돌며 남성들의 루성(芦笙) 소리에
맞춰 춘다. 추다가 일렬로 서서 술을 잔에 담아 손님들에게 한 잔씩 또 술을 권한다.
그런 다음 커다한 북소리에 장단에 맞춰 좀 활발한 춤을 추며 소리까지 내며 흥겨워
한다. 이어 동고(銅鼓)에 맞춰 추는 춤도 활발하였다. 다음 남성들이 로생(蘆笙)연주
와 춤을 추고 맨 나중에 온-마을 사람들과 손님들이 같이 원을 돌며 춤을 춘다.
여인들은 날신한 몸매 희고 고운 살결에 맑은 눈동자여서 아름다웠다.
행사가 끝나자 부녀자들은 각자 수제품(手製品)들을 들고 나와 판매하기 바빴다.
벌써 도시풍습으로 요염된 것이다. 이들의 순박한 인성도 도시문화의 침습(侵襲)
으로 불원 대가족제가 핵가족화하면 본데없이 자라게 되어 meism의 Tomboy girl,
Sissy boy 등으로 도시의 아이들 같이 변질 되리라. 그리고 이기적인 서양인들이
싫어졌다. 서양인들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은 좋지만 그들이 개인주의적 작태는 화가
날 정도로 싫다.
↑ 로생을 부는 원로들
↑ 피나레 춤
하루에 6~8시간씩을 차로 이동하면서 2~3시간 동한 즐기는 색다른 풍광(風光)과
여러 종족들의 생활풍습을 감상하는 즐거움으로 하루의 피로를 온욕(溫浴)으로
풀 수 있는 것은 좋은 시설의 호텔이다. 마치 이 심산오지 근처 뇌공산(雷公山)이
개발 중이었고 그곳에 최신식 서설의 뇌공산국제대반점(雷公山國際大飯店)이 있어
다행이었다. 음식 식단(食單)도 수준급이었다.
b. 천호묘채(千戶苗寨)
대당현(大塘縣) 서편 레이산(뇌산현: 雷山縣) 뇌산진(雷山鎭)에 묘족 1천가가구가
사는 천호묘채(千戶苗寨)가 있다, 개울 양쪽으로 마을이 크게 있고 지금도
새집들을 짓고 있었다. 마침 새집 짓기 선물행렬을 볼 수 있었다. 거울, 벼(稻)
네다리를 묵거 거꾸로 매달린 돼지, 술단지 등이 줄을 이어 집 짓는 곳으로
행하였는데 우리네 상량식(上樑式) 행사 인 게다. 축하한다고 금일봉을 보내는
우리네 현재 풍습보다 얼마나 정감이 넘치는 마을 전통인가.
헌집의 헌-개와를 내리는 광경도 보았다. 헌-개와를 지붕에서 뜯는 사람과 땅
위에서 쌓는 사람만 남자들이고 일렬로 50여명이 줄을 서서 나르는 사람들은 모두
부녀자들이었다. 새-기와를 딴 곳에서 이곳으로 운반하는 것은 사람과 나귀였고
트럭(Truck) 등의 기계는 안 보였고 마을을 지르는 도로확장도 하고 있었다.
모내기도 하고 있었는데 역시 대부분이 부녀자들이었고 논에는 우렁이(전라:田螺:·
토라:土螺: river snail)가 있었지만 도로 포장과 현대식 시멘트 건물들로 개울은
이미 오염되어있었다. 그들은 참으로 근면한 사람들이었다.
남자 못지않은 막노동은 물론 여인들은 쉬는 짬도 없이 손은 부지런 했으니 돈 몇
푼 된다고 신발깔창에 십자수인 도화(挑花: embroidery)를 놓고 있었다.
마을 공동잡업 그것은 비록 각개인의 날품팔이일지라도 더불어 사는 협동정신을
은연중에 실천하고 있는 자리이타(自利利他) 아니겠는다. 그렇지만 그것도 도시화
(都市化)바람으로 불원 사라지리라. 급물살을 타고 있는 농촌의 도시화. 개발화,
그것은 극심한 도농 간의 격차(약 3배)로 인한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할 수도
있을게다.
↑ 천호묘채 마을 원경
↑ 로생장 솟대
↑ 부녀 공동 작업 개와 나르기
↑ 모숨기
↑ 짬에도 수놓기
자고로 한족(漢族)은 노회(老獪: crafty)한 것으로 소문나 있지만 그 땅에서 사는
소수민족들 특히 묘족(苗族)들은 참으로 선량하고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들로
보였다.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며 비록 가난하여 막노동을 하는 부녀자도 군티
없이 맑고 밝은 얼굴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속으로 빌었다.
단군묘촌(短裙苗村)
2008.5.3.
空慧
단군묘촌 즉 미니스커트 묘족마을은 귀주성 대당현(大塘縣) 레이산(雷山)에 있다.
마을에는 전기가 가설되었고 프로판가스와 수도가 시설되었고 무선통신 손전화도
있었다. 그리고 시멘트와 현대식 5층 건물도 길가에 있고 4층의 시멘트 건물인
초등학교도 있었으나 마을을 흐르는 개울물은 아직 맑았다. 아직 이곳은 개발화
바람이 불지 않고 있는 것이다.
소위 신작로인 큰길가 작은 골목 한 곳에 단군묘 제1촌(短裙苗 第1村)이라는
간판이 붙은 문 있다. 아침이라서 이슬비와 안개로 시야(視野)는 흐렸다.
길가를 벗어나서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조용했고 기이하게도 마을 연못 위에
곡식창고들이 즐비했다. 개(犬)도 짖지 않고 다가서자 꼬리를 빼고 도망갔고
우리 안의 소나 돼지도 일절 짖지 않고 멀건이 내다볼 뿐이다. 가축은 기르는
주인을 닮는다던가..... 낮선 사람에게 짖고 덤비느니 보다 차라리 내가 피하는게
군자의 도리임을 저 가축들도 배운 것인가.....
↑ 양쪽으로 고간이 있는 골목길을 가는 여인
↑ 축제마당(로생장)으로 가는 길 입구에서의 손님맞이
단군(短裙)이란 짧은 치마 즉 미니스커트라는 말이다. 이 마을 부인들의 축제용
성장(盛裝)은 화려하고 앞면은 짧고 뒷면은 긴 치마다. 그 유래인즉 옛날 제사
(祭祀)날 맏며느리가 제수(祭需)를 진설(陳設)하던 중, 고만 긴 치마 끝을 밟아
제살(祭床)에 넘어지는 바람에 정성껏 마련한 제수(祭需)가 불결해져 신의 노여움을
샀기로 그 이후로 치마를 자르도록 하였다고 전해진다.
입구에서 부녀자들은 축제 때 입는 성장을 하고 2줄로 서서 기다리고 모자에 술을
단 남성들은 루생(芦笙)을 불며 환영하여 마을 마당으로 인도하였다. 동구에서
술은 없었다.
마을마당에 도착하자 남성들의 루생(芦笙) 소리에 맞춰 여인들이 춤추었고 솟대를
중심으로 원을 돌며 추다가 2줄로 대열을 바꾸더니 권주가 비슷한 노래를 부르며
밥공기 크기만 한 술잔을 들고 손님에게 마셔주었는데 이때 왼손으로 귀를 잡아
당겼다. 랑덕상채(郞德上寨)에서 대접 받았던 란로주(攔路酒) 진채주(進寨酒)와
맛이 같은 이 술은 바로 당나라 시대부터 양조된 곡주로 수수, 입쌀, 쌀밥, 밀,
옥수수 등 5가지를 원료로 빚었던 잡량액(雜糧液)이었으나 근래에 우량예(五粮液:
오량액)으로 불리워진 달콤하고 맑은 술이며, 도수는 60도나 되지만 강한 자극성
없다. 내개 술을 좋아하는 것을 아는지 다른 여인이 또 귀를 잡고 한잔을 주었다.
↑ 축제 첫 순서
↑ 원을 돌며 추는 춤
↑ 원을 돌며 추는 춤
↑ 권주가를 부르며
↑ 작은 의자 두두리며 추는 춤
다음은 원로(元老)가 치는 동고(銅鼓) 장단에 맞춰 노파(老婆)들과 젊은 부녀자들이
솟대를 중심으로 원을 돌며 추었다. 더불어 살고 즐기는 공동체 의식의 발로(發露)
이다. 그 후 로생(蘆笙) 음악에 마춰 큰-빗을 꼿고 검은 바지 검은 상의를 입은
노파들과 어린들만의 춤이 있었다.
참시 휴식이 있은 후 작은 나무의자를 들고 손뼉 치듯 젊은 부녀자들이 다시 춤을
추었다, 미니스커트 여자들의 살결은 하얗고 산수가 좋은 곳이라서인지 얼굴도 모두
미인 이였고 밝은 얼굴들이다. 이들의 성장도 현란할 정도로 화려했으며 뒤에는 긴
색술까지 달았다.
갖가지 춤을 추다가 후에는 마을 마당에 솟대를 바꿔 세우고 원로가 치는 동고
(銅鼓) 장단에 맞춰 남녀노서 동민들이 손님들과 함께 원을 돌며 춤을 춘다.
이들은 소수민족으로서 중국의 주인인 한족(漢族)들에게 역대적(歷代的)으로 오랜
박해를 받아온 피 압박 민족들이라서가 아니라, 밝고 맑고 근면하며 착한 이들의
화합정신인 자리이타(自利利他)정신과 그들의 아름다운 전통이 도시문화의 침습
(侵襲)으로 고갈되지 않기를 바라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 축제마당에서 노파들도 원을 돌며
↑ finale에 손님을 부르며
↑ finale에 손님과 동민이 모두 함께 춤을
↑ 식 후 여인들과
↑ 식 후 여인들과
↑ 식 후 물건판매 광경
이곳에는 숙박시설이 없어 약간 떨어진 뇌공산(雷公山)으로 왔다. 이곳은 새로
개발붐이 불고 있는 곳이고 최신식 신축 4성급 호텔이 하나 있었는데 손님은
없었으나 음식은 정갈하고 순하며 맛있었다.
↑ 뇌공신 국제호텔 요리
용강 천호동채(榕江 千戶侗寨)
2008.5.4.
空慧
↑ 용강 삼보고루(三寶鼓樓)에서
레이공산(雷公山: 뇌공산)을 출발하여 고산준려(高山峻嶺) 위험한 단애(斷崖)의 굴곡
(屈曲)길을 누비며 팔락진(八樂鎭)에서 밥과 장산탕(醬酸湯)찌게로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장산탕은 고기와 야채를 넣어 끓인 일본식 스끼야끼(すきやき:鋤燒
: Sukiyaki) 맛과 비슷했다.
↑ 험한 산길
↑ 다락 밭
↑ 도유강
↑ 장산탕
↑ 가는 길 어느 마을의 여인
산간 오지라서 무게가 15kg를 넘지 않는 산양(山羊: goral)고기(香羊痕: 향양흔)
으로 유명한 탑석(塔石)마을을 지나 조길(鳥吉), 평영(平永), 평강(平江)을 거쳐
도유강(桃柳江)을 우측(右側)으로 끼고 남하하여 용강(榕江)에 도착하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직경 3m의 북(鼓: Drum)이 있었다는 천하제일각(天下第一閣)
삼보고루(三寶鼓樓)는 널리 알려진 지방문화재이다.
외모 상 묘족(苗族: Miao)과 동족(侗族: Dong)은 다 같이 작은 체구들이고 구별이
안 된다. 아마도 동족(同族)끼리의 결혼으로 인한 열성유전자(劣性遺傳子: rece-
-ssive gene)가 작용한 것이리라.
그러나 동족(侗族)마을에는 반드시 고루(鼓樓)가 있다. 그토록 고루(鼓樓)는 동족-
문화의 상징이라고 할 정도로 그들 전통문화의 하나다.
기록이 없어 정확한 것은 모르나 당대(唐代) 이전에 이미 고루(鼓樓)가있었다고 한다.
건축양식은 고장마다 다양하여 고루평(鼓樓坪), 양정(凉亭), 회랑식 풍우교(回廊式
風雨橋), 채문(寨門) 등이고 추녀에는 용호(龍虎) 또는 봉황(鳳凰)을 달아 장식하고
화려한 벽화를 그려 넣는다. 재료는 삼나무(杉木)이다.
↑ 삼보고루
넓직히 자리 잡은 삼보고루(三寶鼓樓) 옆 강둑에는 아시아 열대에서 자생하는 용수
(榕樹)나무 고목들이 욱어져 있고 그 밑에는 우리나라 춘향전과 비슷한 야화(夜話)의
주랑(珠郞)과 랑미(烺美)의 동상이 서있다. 옛날 뇌산(雷山: 레이산)에 사는 두
남녀가 사랑을 하였는데 집안의 반대로 멀리 이곳으로 도피해 왔다. 지방유지가
랑미(烺美)의 미모에 반하여 주랑(珠郞)을 궁지에 몰아 죽였다.
헐 수 없이 남의 품에 안긴 랑미(烺美)는 그를 산으로 유인하여 무덤을 파게하고
그를 죽여 원수를 갚았다는 줄거리다.
동족(侗族)은 대개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살기에 한 마을에 같은 성(姓)끼리 사는
경우가 많으며 제일 많은 성씨는 오(吳), 양(楊), 석(石), 양(梁)성이라고 한다.
용강(榕江)은 큰 마을인데 다리 건너 옛-마을인 천호동채(千戶侗寨)와 신시가가
있다. 이 큰 마을도 역시 이농현상이 심한 것으로 보였다. 마을에서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 부녀자들뿐이었다.
아직도 자연과 더불어 살며 자급자족하는 동족들은 명주실로 비단짜기(織錦; 직금)
하느라 실타래를 감고 날실을 끼우고 또는 오래된 직조기에서 명주(明紬: silk-
fabrics)를 짜고 있었다.
이들의 다양한 의상은 다음 조흥(肇興 侗族: Zhaoxing Dong) 편에 볼 수 있다.
↑ 실 감기 물레질
↑ 날실 꼬이기
↑ 줄실 감기
↑ 직조(織造)
이들의 주방(廚房)은 단순했다. 화덕과 pan(鍋: 과), 도마, 칼 그리고 수도만
보였다. 조리대(調理臺) 양념장 그릇장 등은 보이지 않는다.
이들이 들고 다니며 먹는 음식은 만토우(饅頭:찐방), 쟈오쯔(餃子: 물만두),
수웨이지아오즈([水餃子: 물만두), 빠오즈(包子: 찐 만두) 도 아닌 쌀국수인
미미엔차오(米麵條)이다. 길가에 흔한 음식점 쌀국수 집이다.
↑ 간단한 주방
↑ 먹으며 길 가는 여인
↑ 아기도 먹으며 겄고
↑ 학교 가며 먹는 초등생, 아침 7시
동족(侗族: Tong Zu)의 기원에 대한 설은 많다. ①고대 루리워에(駱越: 락월)가
발전해 내려온 토착민족 설(진.한: 秦漢때 장족:壯族,으러 개칭). ②송대(宋代)에
걸링(佶伶: 길령)에서 나누어졌다는 설. ③리핑후치(黎平府志: 여평부지)에는 명
(明)나라 홍무(洪武)때 장서성(壯西省) 지안후 타이허현(吉安府 大和縣: 길안부
대화현)의 3만의 군민(軍民)이 광서자구 우저우(梧州: 오주), 류저우(柳州: 유주)를
거쳐 귀주(貴州)로 들어와 주둔하면서 현지의 동족과 결혼하여 동화되었다는 설,
④그리고 바이위에원류사(百越源流史: 백월원류사: 何光岳 著)에서는 하대(夏代)
이전에 청하이성(靑海省: 청해성) 따통(大通: 대통) 하류 유역에 거주하던렁인(令人:
영인 또는 令支)이 황하 하류로 내려와 대부분은 화샤족(華夏族:화하족)을 이루고,
일부가 남진하여 후난(扶南: 부남), 꾸이저우(貴州: 귀주), 광시(廣西: 광서) 등지에서
동족을 형성했다고 하는 설이 있으나 아직 정론은 없다.
현재도 귀주성(貴州省) 동남쪽 여평(黎平)에서부터 광서자치구(廣西自治區)의 경계인
삼감(三江) 지역에 많이 살고 있다.
↑ 한여(閑餘)한 노파는 지족안분(知足安分)을 아는 듯
이 지방부터 숙박 시설이 열악(劣惡)했다. 호텔은 우리나라 시굴 모텔수준이라고
할까, 승강기 없는 계단에 어둡고 음산한 방이다. 좌변기도 없으나 그나마 온수가
나와 샤워(shower)를 할 수 있어 다행이었고 음식은 맛있는 편이다.
마을의 작은 족욕(足浴)집은 값도 상업화된 도시보다 1/5값이고 잘 해주었다.
종강(從江) 빠사묘족(芭沙苗族)
2008.5.5.
空慧
從江의 빠사(芭沙苗族: Pasha Miao)
종장(從江: 종강)은 귀주성(貴州省) 동남단(東南端)에 광서장족자치구(廣西-
壯族自治區)와의 경계부에 있으니 서남단(西南端)의 흥의(興義)와 정 반대-
편이고, 주도(州都)인 귀양(貴陽)에서는 450km 떨어진 곳이다.
이 지역은 해발 2000m나 되는 산이 많은 곳이고, 종강현청(從江縣廳)에서
7.5㎞ 떨어진 산골인 '중국 문화부락 제1촌‘ 빠사(芭沙)마을에 왔다.
빠사(芭沙)는 묘족어로 '초목이 번성하는 땅', ‘풀과 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뜻이다. 빠사(芭沙族)의 성씨는 군(滾), 왕(王), 자(賈) 등 9개이고 6개 자연-
부락과 16개 촌민 조직이 있는데, 현재 종강 근처엔 약 400가구 1800명이
잔존(殘存)한다고 한다.
산 위 동구(洞口)에는 파사경구 수표(芭沙景區 售票)라는 매표소가 있었다.
36세 단구에 다부진 몸매이지만 보다 나이 많게 보이는 촌장 격인 군위안량(
滾元亮: 곤원량)은 오직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의 지시
대로 빠사(芭沙苗族) 몇몇이 입구에서 루생(芦笙)을 불고 총을 쏘는 환영식이
있은 후 마을 마당으로 인도 되었다.
동구를 지나서 수신(樹神)이라 쓰인 조모석(祖母石)을 모신 신수정(神樹亭)이
있으니, 이들이 자연 특히 나무를 사랑하며 생사의 윤회설(輪回說)을 믿는
징표이다.
한참 걸어 들어가니 경사진 산 언덕에 마을이 있었고, 지붕은 나무와 기와,
곡식을 말리는 현가(懸架)가 보였다.
마을 마당은 동리에서 좀 떨어진 산허리에 있었고 축제행사가 열리기 전에
먼저 굵은 향장목(香樟木) 나무에 향불을 피웠다. 나무는 집을 지을 때
이외에는 나무가 죽어 말라 제절로 쓰러질 때까지 자르지 않는다. 아이가
태어나면 나무를 심고 사람이 죽어도 나무를 심고 오래된 나무일수록 신성
(神聖)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또한 단풍나무(丹楓: Japanese Maple)를 숭배하고 집을 지을 때에도 가운데
큰 기둥만은 단풍나무로 세운다고 한다. 단풍나무를 숭배하는 이유는 이렇다.
옛날 중원(中原)의 신 황제와 동이(東夷)의 신 치우(蚩尤)가 탁록(涿鹿)에서
싸웠다.
그 치열한 전투에서 치우가 패하여 목이 잘렸다. 치우의 손과 발을 묶었던
수갑과 차꼬(足枷: shackle)에 묻은 피에서 이루지 못한 치우의 한(恨)처럼
붉디붉은 단풍나무가 자라났다는 전설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조상이 염제(炎帝)의 후예인 치우라고 믿기에 태양을 숭배하며 한족(漢族)이
아닌 자부심을 가진다.
또한 단풍나무 노래(楓木歌: 풍목가)도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수목장(樹木葬)을 한다고 하니 대자연속으로 귀의(歸依)하는
자연숭배의 샤머니즘에서 비롯된 것이다.
축제가 시작되자 남자들은 루생(芦笙)을 불며 때로는 여성도 루생을 불며,
몸을 360도 회전하며 추었고 여성들은 돌며 앉았다 이러났다 손발 놀림과
몸동작이 빠르고 활발한 춤이었다.
다음 결혼 풍습을 간단히 보여주었는데, 신부는 가마대신 2 남자가 멘 대-
나무에 메어갔다. 신랑다루기 도 있었다.
낯으로 삭발(削髮)하는 모습도 실현했다. 머리 정수리만 제외하고 모두
머리를 면도질하여 상투를 매는 이들의 특이한 머리(hair style)를 '후쿤
'(戶棍:호곤)이라고 하는데 남자 아이는 14세 성인식(成人式) 때 '후쿤'을
하고 아버지로부터 평생 허리에 차고 다닐 칼을 선물 받아 성인의 삶과
미래를 축복 받는다고 한다. 여성들도 어려서부터 머리를 길게 길러 머리
위에 틀어 올리고 빛과 머리꼬지 등으로 장식한다.
끝으로 나무통을 들고 고싸움을 하였고 finale를 알리는 총쏘기를 한 후
끝났다. 이들의 총은 단발로 총의 초기양식인 수제(手製)로 보였다.
오래전부터 수렵도하고 농경도 하였던 까닭이며. 또한 용맹의 생징으로
여겨져 이들만은 유일하게 중국에서 총기 휴대가 가능하다.
↑ 처녀들
↑ 처녀들과
↑ 촌장의 훈시, 허리춤에 찬 대롱은 낯-집(scabbard)
↑ 축제의 춤
↑ 신랑 다루기
↑ 후쿤하기 위하여 낯으로 삭발
마을을 대충 돌아보고 촌장 집으로 안내되었다. 그의 집 앞에는 연합통신-
CDMA의 커다란 간판이 붙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오지(奧地) 속에 단절된
전통부락이 아니고 현대사회로 변화되어가는 것이다. 그의 새로 지은 집에
가족은 출타 중이었고 그는 말없이 술통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술독에는
밥풀이 떠있는 맑은 술이 담겨있었고 그가 떠준 그 술맛은 묘족들의 우량예
(五粮液: 오량액)술맛 그대로였다. 안주는 땅콩이었다. 그의 우직(愚直)한 선심이
고마워 나는 1$짜리 몇 장을 손에 쥐어 주었더니 말이 안 통하는 것을 아는
그는 고맙다고 악수를 청해왔다.
길에서 만난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ball pen과 candy를 주었더니 고마워하면
서도 표현 못하는 그들의 천진무구(天眞無垢)한 귀여운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의 맑은 눈동자가 문명의 이기인 바보상자를 접하게 되면 안경을 쓰게 될
것이 우려된다.
↑ 촌장 군(滾: 곤)씨 집 앞 그의 간판
↑ 촌장 군(滾: 곤)씨
↑ 악수를 청하는 군(滾: 곤)씨
↑ 티 없이 맑은 소녀
이들은 자급자족으로 생계를 유지해 왔었다. 귀주의 다른 소수민족처럼 이들도
옷감을 직접 직조하는데, 직조한 옷감에 아교액(阿膠液: glue)을 발라 다듬이질
하여 광택을 내는데 이것을 '타오부'라고 하며 검은 색이다. 그 모양도 가죽
같지만 실제로 방수 방풍효과가 있다고 한다. 동족(侗族)들의 옷감도 이와 비슷
하지만 그들은 남보라색 풀물에 열 번 이상 염색하고 바람에 말려 계란 흰자를
입혀 햇볕에 말린 후 다듬이질하여 남보라색이다.
↑ 타오부를 만드는 부녀자들
↑ 도시로 갔던 처녀의 눈매는 모질게 변했지만,
언덕에서 수를 놓는 어미의 얼굴은 덤덤하다,
↑ 개방으로 세워진 전봇대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할미
귀주성은 중국에서 제일 가난한 지역임으로 발전한 신도시 심양(深陽) 상해
(上海)에 비해 소득격차가 무려 1/5~1/7나 된단다.
전봇대 옆에 쉬고 있던 노파는 맥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아마도 편하게
살게 된 지금보다 개방(開放)되기 전 불편하지만 오순도순 단란했던 시기가
그리워서 인가보다....자식 놈이 문명의 파도인 도시로 간 것이 못내 염려스러운
모양이다.
그의 모습에서 불현듯 나는 교훈(敎訓)을 느꼈다....“늙으면 심태신영(心泰身寧),
몸 편하고 보다 마음 편한 것이 제일 이니라...그까진 냉장고 셀류라폰(cellular-
phone) 등 문명의 이기(利器), 너희는 없으면 못 살아도 나는 없어도 살지만,
단지 지금 마음 편한 것이 제일이다.“.......문명의 노예들이여! 마음 편하려면
몸이 먼저 편해야 하는 법을 신세대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문명의 이기(利器)와 도시문화가 오지의 전통마을 침식시키면 불원 대자연은
훼손되고 공해와 더불어 인성(人性)까지 탁하게 오염되리라!....
조흥 동족(肇興 侗族: Zhaoxing Dong)-1
2008.5.6.
空慧
↑ 동구문(洞口門)
↑ 여러 고루에는 풍우교와 연못 또는 개울이 함께 있다.
과거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이 즐겨 마신 명주(銘酒) 마오타이(茅台)의 고장
으로 이름난 귀주성(貴州省)을 떠나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로 들어
왔다. 구이양(貴陽: 귀양)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km 떨어졌고 성(省)의
경계(境界)에서 25km 되는 곳이다.
쨔오싱(肇興: 조흥)은 광서(廣西) 리핑시얀(黎平縣: 여평현)에 속한 큰 동족(侗族:
Dong) 마을로 천여 가구가 산다. 길을 중심으로 개울이 흐르고 그 양 옆으로
주택과 5~6개의 고루(鼓樓)가 있는 풍치(風致)있는 마을이다. 유치원, 초등학교
그리고 작지만 중학교 까지 있는 마을이며 우리나라 면 소재지보다도 크다.
이곳 고루(鼓樓) 추녀엔 해학적인 그림이 그려져 있고 추녀 끝에는 봉황이 아닌
해치(獬豸: 해태)상이 장식되어 있었다. 골목길은 돌을 깔아 아르다운 문양을
넣었다.
↑ 고루와 풍우교: 풍우교는 다음 정양(程陽) 편에 설명한다.
↑ 고루 추녀
유난히 많은 고루가 있는 까닭은 아마도 이들의 신앙과 연관이 있으리라. 즉
이들은 마을이 생길 때 제일 먼저 고루를 짓고, 고루를 중심으로 조직이 이루어
지고 관리되어 왔고 혈연(血緣), 지연(地緣)중심의 구심점이요, 마을 제사(祭祀)와
행사도 이곳에서 행하였다.
이들의 종교는 원시모계사회의 영향으로 전설 속의 대모신(大母神)인 싸톈바 즉
싸마(薩瑪: 살마)를 모시는데 싸마는 ‘큰 할머이’라는 뜻이며, 조상숭배 신앙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선사시대에는 생식이 여성에게만 극한 된 신성한 것으로 여겨
졌을 뿐 아니라 모계중심사회였기로 대모신을 모셨던 것이다.
예전에는 집안마다 싸당(Sa tang: 薩堂: 살당)이 있었다고 하며, 식사 전에 먼저
음식을 올려 공경하였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이 마을에도 기독교 서양 선교사
들이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교회당은 보지 못했다.
그들이 믿는 싸톈바는 온화함의 상징인 직조(織造)의 여신이나 태양의 여신으로
형상화되기도 하고 달과 온순한 여성성(女性性: feminity)으로도 형상화됨으로
아직도 싸텐바를 믿는 것일까,..가부장제(家父長制)가 존속하고 있는 이 마을의
한여(閑餘)로운 노파들은 지금도 문명을 사랑하는 현대인들과는 달리 지족가락
(知足可樂)으로 자연과 더불어 편하게 살고픈 사람들로 보였다.
동족(侗族)은 남녀 모두 머리 두건(頭巾)의 모양과 장식이 다양하고 남성들의
두건은 예쁘고, 여인들의 두건은 크다. 아침에 어느 고루에서 원로들 회의가
열리고 있었는데 당서기장은 한족(漢族)이고 지역 족장은 동족(侗族)이니
그들의 표결이 민주방식으로 바꿨겠지만, 과거 고루에서 행한 의결제도인
향로(鄕老 또는 채로제: 寨老制)가 익숙한 원로(元老)들의 두건(頭巾)은 예나
다름없다.
가전제품 상점도 있지만 시멘트로 지은 집은 없었고 길가에는 재래시장도 몇
군데 있다. 현대식 숙박시설은 없고 재래식 가옥을 새로 개조한 여관뿐인데,
좁은 나무계단과 삐걱거리는 나무바닥, 겨우 침대 하나가 겨우 들어간 2평
쯤 되는 방에 반 칸 쯤 되는 열악한 화장실의 재래식 좌변기 한 옆에서나마
온수로 샤워를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식당은 옆집에 있었는데 음식은 채식(菜食) 위주이지만 돼지고기 닭고기도
있었고 그런대로 풍요롭고 맛있었다.
길에는 드문드문 트럭이 지나갔고 그 먼지와 매연이 역겨운지 쟁기를 메고가는
농부는 코를 막고 지나가는 등, 도시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의 거리 풍경은
볼거리가 많았다.
남자들 보다 여인들이 짐을 지고 갔다. 이 마을에도 젊은이들이들의 이농
현상이 심한가보다. 빵 하나를 사서 소중이 감쌓안고 있는 여인은 누구를
주기 위한 것일까?.......
마을을 흐르는 개울은 맑지 않았지만 납염(蠟染: 나염의 한 방식)한 옷감을
빨래하는 사람도 있었다.
민속놀이와 의상-쇼
본시 고루(鼓樓)는 여러 행사가 열리는 곳으로서 마을의 제사(祭祀)와 원로들의
회의 이외에 젊은이들의 문예 오락 활동 장소로도 활용되는 곳이다.
문자가 없는 둥족(侗族)은 문화와 풍속뿐만 아니라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노래로
전승(傳承)해 왔기로 아기들은 말보다 노래를 먼저 배웠다고 한다.
시내를 누비다가 개울가 Xintuan Drum tower(信團 鼓樓: 신단 고루)가 있는
의단화교(义團花橋)라는 풍우교(風雨橋)에서 중국 지방방송사가 방송용 민속쇼와
패션쇼(fashion show) 녹화를 하고 있었다. 나도 신나게 캠코더(camcorder)에
담을 수 있었으니 참으로 운 좋은 날이였다.
첫 순서는 용강 천호동채(榕江 千戶侗寨) 편에서 소개한 러브스토리 주랑/랑미(
珠郞/烺美)의 짤막한 단막극이였는데 20~30여명의 악사들과 합창단이 동원되었다.
남녀 합창단은 모두 전통의상을 입고 있었고 악사들의 악기는 현악기와 관악기
등 이었는데 그것이 bi ba(비파: 琵琶)인지 월금(月琴)인지 또는 소(筒簫), 적자
(笛子)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음악도 모두 전통 민요 뿐이었다.
언어를 모르니 그들의 그 노래들이 농부들의 농요인지 사부곡이나 사모곡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런 민요가 많은 것만은 사실이다. 화려한 의상에 얼굴치장도
하였지만 레이산(雷山) 지방의 묘족 여성들보다 아름답지 못하였다. 그러지만
그들의 얼굴은 유하고 부드러워서 도시문화인들같이 모질고 찌푸리지 않았다
동족(侗族)의 기원에 한 학설로는 동족은 본시 운남성에만 거주하던 타이족(
泰族)이 한족과 동화되지 못하고 100~300가구가 한데 모여 마을을 형성하였
기로 어리석은(侗) 족속이라고 한족이 비난한데서 부쳐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남방계라서 북방계인 苗族들보다 덜 예쁘다..
↑ 주랑.랑미 쇼
의상은 소위 fashion이라는 신세대 감각으로 변질되어 아름답고 다채로웠으나
고유미를 상실하여가는 듯 보였다. 전통의 옷은 모양보다 입어서 편하도록
만들었는데 이제는 편하기보다 외모에 치중한 유행을 따르는 게 아쉽기도 했다.
야간에는 그곳 야외무대에서 같은 순서의 지방공연이 있었다. 이제 이곳도
전통을 벗어나 네온 빛 아래 현대식 무대를 가추고 공연을 하며 외화를 버는
관광지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지만 밤-문화는 없었다.
밤에 길가 노점에서 석쇠에 구어 파는 돼지곱창은 일미였다.
청양바자이(程陽八寨: 정양팔채)
2008.5.7.
空慧
↑ 정양 풍우교 앞에서
청양바자이(程陽八寨: 정양 팔채)
조흥(肇興)에서 도유강(桃柳江)을 바른편으로 끼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싼지암
(三江: 삼강)을 지나 4시간 반만에 청양(程陽: 정양)에 당도했다. 온몸이 안마
라도 받은 듯 나른하다.
도중 강가 맞은 편 큰 마을이 있는 강의 풍경은 아르다웠다. 큰배 작은배들의
노젔는 광경은 마치 수채화를 보는 듯했다.
↑ 진흙 길
↑ 도유강
청양바자이(程陽八寨: 정양 팔채)란 8개 마을로 된 정양이라는 뜻이다. 즉
청양(程陽: 정양)은 마안자이(馬安寨: 마안채), 옌자이(岩寨: 암채), 삥자이(平寨:
평채), 둥자이(東寨: 동채), 다자이(大寨: 대채), 그리고 고개넘어 많이 떨어져
있는 삥보자이(平舖寨: 평포채), 지창자이(吉昌寨: 길창채), 삥턴자이(平坦寨:
평탄채), 등8개 마을로 구성된 마을 공동체인 셈이다.
↑ 마안채 마을
↑ 암채 개울
↑ 암채 마을 가옥들
정양(程陽)은 풍우교(風雨橋)로 유명한 곳이다. 풍우교란 교각 위에 고루(鼓樓)가
있는 삼나무(杉木)다리를 말하며, 그 원류는 사람들이 농사를 짓다가 비를 피하기
위해였다고 전해지지만 마을의 축제 회의 등의 회합, 휴식과 놀이, 젊은이들의
만남의 장소로 활용되는 곳이었다.
중국에는 도처에 풍우교가 있지만 정양(程陽)의 풍우교(風雨橋)는 그 규모가 세계
제일이니 길이 160m, 높이 10m이다.
입구 주차장에는 ‘정양 영제교(程陽 永濟橋)’라는 선전간판이 있지만 다리 현판
(懸板)에는 초서로 정양교(程陽橋)라 쓰여져있다.
다리 안에는 영웅호걸(英雄豪傑), 위오탄기(魏吳呑氣: 위와 오나라의 기운을 삼키라)
전구무문(全俱武文: 문무를 함께 가추라)라고 써진 편액(偏額)이 붙은 벽감(壁龕)이
있었으니 젊은이들에게 무언의 훈계(訓戒)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개방이후 지금은
행상인들과 노점상이 들어서 있으니 이 또한 근대화 개방화의 한 단면이다.
↑ 풍우교
↑ 편액 (위오탄기)
다리가 놓인 개울에는 큰 수차(水車)가 많다. 중심축(中心軸) 이외에는 모두
대나무(竹)로 만들어졌는데 개울물을 퍼 올려 논물을 대는 양수기(揚水機)역할이다.
흐르는 물은 맑았다. 개울물로 머리감는 여인들의 모습도 그림같다.
정양(程陽)은 또한 싼지암(三江: 삼강)지방과 함께 투앙지에(土王節: 토왕절)로도
유명한 곳이다. 투앙지에(土王節: 토왕절) 축제는 음력 2~3월 곡우(穀雨) 전에
노래대회 투계(鬪鷄: 닭싸움) 그리고 청혼가(請婚歌)부르기를 하는 마을 행사다.
이 명절은 중국 소수민족 축제로서, 고대로부터 몽고지역의 몽고 씨름 나따우
(那達幕: 나달막), 웨얼(回紇: 회흘) 등 이슬람지역의 말타기 구얼빵지예(吉爾邦節:
길이방절), 우남 백족(白族)들의 싼위에지에(三月節: 삼월절), 운남성에서 미인이
많다는 시솽반나(西双版納: 서쌍판납) 등지 타이족(泰族: 태족)들의 파수이지에
(潑水節: 발수절)등과 함께 주요 축제로 알려진 잔치다.
문자가 없는 동족(侗族)은 문화와 풍속뿐만 아니라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노래로
전승(傳承)해 왔기로 아기들은 말보다 노래를 먼저 배웠다고 하니, 아마도 동족
(侗族) 기원설에서 그들이 타이족(泰族: 태족)의 한 계파였을 것이었고 오래도록
한족(漢族)들과 동화하지 못한 까닭으로 한족으로부터 어리석은(侗) 족속이라는
동족(侗族)으로 차별받은 한(恨) 때문일까 ...이곳 아가씨들의 목소리는 맑은 미성
이었다. 그 실 동족의 중국 공식 발음은 ‘똥주‘라고 한다, 그러나 스스로 퉁주(
Tong zu: 侗族)이라고 하기에 이것이 보편화 된 것이다.
그들의 노래가 농요(農謠)인지 남편을 기다리는 망부고(望夫曲)인지 구애를 하는
청혼가(請婚歌)인지는 모른다. 다만 천락지음(天樂之音)라고 하는 ‘둥쭈다거’는
고음(高音)과 떨림으로 특이한데 떨림은 매미 소리를, 맑은 고음은 새소리를 모방
한 소리란다.
그들의 맑은 노래 소리를 들으며 이 마을에서 제일 큰 식당에서(겨우 10평정도)
저녁을 먹었다. 어스름 초저녁 등불을 켜놓고 풍우교를 바라보며 중국 귀주성의
명주(銘酒) 중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이 좋아했던 마오타이주(茅臺酒)도 아니고,
죽엽청주(竹葉靑酒), 오가피주(五加皮酒)도 아니며, 덩 샤오핑(鄧小平: 등소평)이
즐겨마셧던 장수장락주(長壽長樂酒)도 아니고 묘족(苗族) 아가씨들이 주던 오량액
(五粮液)도 아닌 주귀주(酒鬼酒)를 반주(飯酒)로 먹는 만찬(晩餐)은 일품(逸品)이니
선선놀이가 따로 없는 여행객이 모처럼 느끼는 백미(白眉)가 아닐 수 없다.
주귀주(酒鬼酒)는 진시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것을 최근의 양조기술로 재현시킨
술로서 그 색, 향, 맛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정성과 기술이 담겨진 술로서,
입술에서 목으로 넘어가기까지 7번의 맛의 변화를 가지고 있다고 전해지는 술이다.
숙박 시설은 열학하다. 헌집을 개조한 목조(木造)라서 삐걱거리는 계단과 바닥,
어두운 전기불, 온수가 제대로 안 나오는 화장실, 옆방 말소리까지 들리는 소음
등으로 자는둥 마는둥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마을을 누볐다. 길은 좁아도 집은
모두 커서 보통 80~90평은 되어 보이는 3~4층 목조이다. 그렇지만 주변은
모두 논과 밭이다. 아침이슬 자욱한 암채고루(岩寨鼓樓)와 합룡교(合龍橋)에
놓인 작은 풍우교는 한 점 수묵화(水墨畵)같이 보였다. 이른 아침이라서인지
새소리 개구리 소리 그리고 닭 울음 소리이외는 조용했고 인분지게를 메고 가는
농부들이 서넛 있었다. 이 마을들도 젊은이들의 이농현상이 심한가보다.
Longsheng Yao Zu(龍勝 瑤族: 용승 요족)
2008.5.7.
空慧
Longsheng(龍勝: 용승)의 瑤族(요족: Yao Zu)
용승(龍勝)은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동북부에 있고, 종강(從江)에서
동쪽에 있는 삼강(三江)을 지나 또 그 동쪽에 위치한 오지이고, 계림(桂林)에서
동북 100km, 자동차로 4~6시간 거리다. 도로는 비포장이고 고산준령(高山峻嶺)을
수없이 넘어야 된다.
요족(瑤族) 마을이 관광지로 변모하면서 산 아래 주차장 마을이 생겼다. 주차장
행상인들은 용케 알아보고 서툰 우리말로 테넨(천원)을 웨친다. 하기사 중국인
관광객 이외에 외국인은 우리 일행과 서양인 몇 뿐이였으니까....
마을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요족 종업원들이 음식을 식탁 위에 가져다 논 후
노래를 불렀다. 음식은 대나무 죽통(竹筒)에 찰밥, 나무통에 백반, 그리고 여러
반찬들이 나왔는데 요족음식이 어떤지는 몰라도 음식들은 모두 광동요리와의
fushion 같았고 맛있었다. 고기에는 버섯을 많이 넣었다.
↑ 행상 여인들
↑ 식당에서 음식 나르는 종업원
↑ 산악 자동차로 험로를 30분가량 올라가며
해발 1900m 고산에 살고 있는 요족 마을은 버스 정류장에서 사악용 미니버스로
제2 주차장에(遊客 候車 休息室: 유객 후차 휴게실)까지 올라간 후 도보로 약 1시간
가량 걸어야 볼 수 있다. 그 마을을 거쳐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동리마당(관망대)
까지 오르면 마을 전경과 주변의 다락밭 그리고 실오라기 같은 도로가 발아래 펼쳐
보인다.
동구 산채문(山寨門에)는 용승 평안 장족 제전 관경구(龍勝 平安 壯族 梯田 觀景區)
즉 용승의 평안 마을 장족의 다락밭 관광지구라고 써있다. 아마도 요족의언어가
한.장어계(漢壯語系)에 속하기 때문에 요족촌(瑤族村)이라고 하지 않은 듯하다.
요족의 언어는 3갈래로 분류하는데 ①勉(면,미엔: 요족적인 언어), ②布努(뿌이:
묘족적인 언어), ③拉加(라지아: 장족적인 언어) 등이다.
이들의 원류(原流)는 진대(秦代) 부터였으며 묘족의 기원과 같이한다. 이들은
남자아이가 15~16세가 되면 여러 가지 위험한 체험을 시켜서 무사(巫師)로
하여금 합격여부를 판별시킨 후 성인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강인 할뿐더러 맨발로 산야를 누비고 다녔다고 한다.
좁은 외길인 마을 비알길 양옆으로 집들이 약 300m 높이의 산에 연하여있는
마을이지만 초등학교도 있고 풍우교도 있다.
↑ 동구문
↑ 머리만 현대화한 전통의상의 요족여인들
↑ 노점 상
↑ 동구 문을 지나서 마을로 올라가는 길
좁은 계단길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면 나무 하나가 있으니 최고경관지 바로 앞에
서있는 삼나무(杉木)이다. 땀 흘리며 가쁜 숨을 모라 쉬며 계속 오르는 길가에는
노점들과 진풍경도 볼 수 있고 아래를 내려다 보편 옆으로 높은 경사요 멀리
다락밭(梯田: 제전)이 마치 굵은 곡선을 포개 놓은 것 같이 보인다.
1600m 쯤 지점에 용승제전 천하일절(龍勝梯田 天下一絶)이라는 표석(標石)이 있다.
↑ 마을 길가 구멍가가 노파들
↑ 노점 아가씨들
여인들은 머리를 자르지 않는 관습이 있고 머리카락도 버리지 않으며 진 머리를
다른 머리다발과 함께 말아 올린다. 여인들이 상의는 점퍼(jumper)같은 모양이다.
또한 허리를 긴 띠로 몇 번식 돌려 매는데 힘든 일을 하기 위함이리라.
산길에는 부족 부녀들이 3-4명씩 모여 긴 머리채를 세발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관람료를 요구하기도 한다.
중국 속담에 漢族住街頭, 壯族住水頭, 苗族住山頭, 瑤族住菁頭(한족주가두, 장족주
수두, 묘족주산두, 요족주청두) 즉 (한족은 시내에 집을 짓고, 장족은 물 위에,
묘족은 산위에, 요족은 부추꽃 욱어진 곳에 집을 짓고 산다.)라는 말이 있듯이
요족은 생활환경이 매우 열악한 고산에 산다. 이곳이 관광지로 변하면서 고된 일
대신 도시인들의 야박한 상술을 배워가는 것이다.
↑ 요족 여인들의 머리
↑ 양복을 입은 농부
↑ 들판에서 돌아오는 여인
주민들도 벌서 근대화, 개방화로 재래식 의상이 평상복으로 변했다.
따가운 햇살을 받아가며 1900m 최고 관경대(最高 觀景臺)까지 오르니 마을 전경과
다락밭들이 발아래 펼쳐지고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 해발 1900m의 최고 관망대
↑ 최고 관망대에 올라서 (뒤로 마을이 보인다)
↑ 다락 밭(梯田: 제전)
나라가 넓고 산(山)이라는 한자 글씨의 모양답게 산이 모두 도토리를 세워놓은
듯 능선이 없다할 정도로 가파르고 높다. 중국 한족(漢族)과 동화되기 싫어서
해발 2000m나 되는 오지의 심산 1000~1900m에 마을을 만들어 은거(隱居)하는
중국 소수민족들은 참으로 끈질긴 종족들이다.
그 56개 소수민족 중에서 귀주성에 거주하는 묘족(苗族)을 위시한 49개 부족들은
고유문화를 지켜오지만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그들마저
독립을 위친다면 중국은 와해될지도 모른다 . 그들의 한족으로의 동화(同化)를
갈망하는 중국 행정당국은 그들을 위하여 심산 오지에까지 전기와 그리고 비록
좁지만 도로를 만들었다. 참으로 큰일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도시화와
근대화라는 미명아래 청정지역을 오염시키고 있고 전통문화를 아류(亞流)로 전환
시키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민심 또한 도시의 상업인처럼 야박하게
변하고 있으니 문명의 자연(自然) 침습(侵襲)의 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요즘 인간의 지연 침습으로 하루에 160여종의 생물들이 멸종하고 있다고 한다.
이집트(Egypt)의 아스완(Aswan) 지방과 동일하게 중국 제일의 채석장(採石場)
이라고 할 귀주성의 석림(石林)도 이제 돌의 반출을 금하고 있으니 만시지탄이
있지만 다행이다. 우리는 지자제 운운하면, 지역이기주의적인 경제논리로만
일관하여 자연훼손 쯤은 아랑곳 하지 않는데 그런 몰지각한 태도를 일소해야
하겠다. 인간으로서의 우리는 너무 생을 즐기려고만 하지 말고 자연의 고마움을
생각하여 근검절약의 검소한 생활양식을 감내(堪耐)하여야 마땅하리라. 인간들은
일상의 고마움을 모르다가 병마나 재화(災禍)를 당한 후에야 그 고마움을 안다.
하여 늘 사후 약방문격인 대책만 강구하는데, 미리 미리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습성을 익히도록 해야 한다.
온 세계를 여행해도 중국같이 영어가 안통하고, 필담(筆談)에 있어서도 그들의
숙어(熟語) 술어(術語)가 다를뿐더러 간자체(簡字體)를 쓰고 있어 번자체
(繁字體)만 배워온 우리들의 한자(漢字)가 잘 소통되지 않아서 아쉽기 그지없던
일도 없다.
하기사 중국어를 안다 해도 이들 소수민족에게는 중국어 통역이 필요했다.
문자는 없지만 그들의 문화는 직조술 나염술(捺染術), 건축, 음악 등 참으로
대단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소나무가 목조건물의 수명을 오래 유지한다고
하지만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삼나무(杉木)가 재료다. 아마도 습기(濕氣)가
원인인 게다. 삼나무로 건축한 동족(侗族)들의 높은 고루(鼓樓)와 풍우교
(風雨橋)는 현대 기술을 능가한다고도 볼 수 있을 수도 있다.
그들은 매우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나라 사회같이 단순
하고 감정적이며 즉흥적인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듯했다. 매사 느리더라도
합리적인 방안을 강구하는 듯 보였다. 아마도 이런 점을 이해 못하는
성급하고 단순한 일본인들이 이들을 폄하(貶下)하여 만만디((慢慢的: 중국어
manmandi)라고 하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중국의 소수민족들은 채식 위주였고 남쪽으로 갈수록 음식은 맛있었으며
북경(北京), 산동(山東), 또는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사천(四川)요리 보다도
광동(廣東)요리에 가까웠다. 우리나라 중국음식과는 달리 그들의 요리엔
msg(미원)등 조미료가 안 들어가 있었고 호빵(포즈:包子)은 진미여서 밥보다
좋았다. 또한 그들의 전통주(소위 민속주)도 단백하고 좋았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근면하고 얼굴이 밝았다. 돈 없이는 못살고 늘 돈벌이
에만 급급하여 찡그리고 매서운 눈초리의 도시인들도 이들의 삶을 본받았으면
하는 실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직도 향로제(鄕老制)가 지속되는 가부장 사회의 전통을 고수하는 그들의
생활이 그들의 심성(心性)을 맑고 밝게 해주는 것이라 믿고 싶다.
빈부의 격차 또한 막심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같이 아우성소리로 시위하는
행패 등 비지성적인 행동은 없었다. 해 봐야 안 되고 또한 세금만 많아지니
단념했는지도 모른다. 중국에서 제일 가난한 주(州)에 속하는 귀주(貴州)의
소수민족들의 수입은 제일 작지만 향복지수는 제일 높다.
운남(雲南)과 사천(四川)등지의 소수민족도 탐방해야하는데 지진이 났으니...
다른 지구촌 가족들의 사람 냄새를 맡으며 다른 모습 다른 문화를 찾아
빈 머리를 채우기 위해 또다시 길을 떠나련다.
땅은 널고 갈 길은 멀다. 저 넓은 대지를 향해 발을 띨 수 있는 한 땅을 밟으리...
이 일정을 다 답사하며 좋은글과 동영상을 제작해 주신 임종욱 박사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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