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의 4대 박해
1784년 이승훈(베드로)이 우리나라 사람 중에 한국 최초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시작된 한국천주교회는 이어 이벽(세례자 요한) 등 젊고 유능한 평신도들에 의하여 자생적 교회로 발전해 왔다. 1886년 한불수교 조약으로 천주교를 인정할 때까지 100여 년간 박해의 역사가 이어졌다. 조선시대 자행되던 이 끔찍한 4대 박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신유박해 : 1801년(순조 1년)
2. 기해박해 : 1839년(현종 5년)
3. 병오박해 : 1846년(현종 12년)
4. 병인박해 : 1866~1873년(고종 3년)
• 신유박해
한국천주교는 조선시대 당시 성리학의 이념에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지배 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엽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1794년 중국의 주문모 신부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도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11세)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노론 벽파 정순대비는 천주교도들과 남인 시파를 일망타진하려고 사교邪敎, 서교西敎를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다.
오가작통법에 의거 전국의 천주교인 중 배교하지 않는 자는 역적으로 다스려 뿌리째 뽑도록 하라는 엄명을 전국에 내렸다. 이 회오리바람에 정약종 등 5명이 참수당하고 주문모 신부와 100명이 처형, 400명이 유배되었다. 지방에서 처형된 신자는 포함되지 않았으니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해 내용>
사제 : 1명(주문모 신부)
신자 : 참수 5명 (정약종 등 )
처형 100명
유배 400명
※ 당시 정치 상황 : 중국 주문모 신부 입국
정순대비가 순조(11세)를 대신해서 섭정
신자들을 잡아 드리기 위한 오가작통법
• 기해박해
1839년 3월~10월까지 계속된 박해로 기해박해의 표면적 원인은 사학邪學이라 불리던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것이었지만 시파인 안동 김 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해 벽파인 풍양 조 씨가 일으킨 정치적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5월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던 박해는 일단 누그러져 평온을 되찾는 듯 했지만, 7월에 천주교 신자 색출에 노력하라는 대왕대비의 전교가 있게 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피신해 있던 앵베르 주교는 자수를 결심하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도 자수한다. 이들은 9월 21일 새남터 형장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고 정하상과 유진길, 조신철도 참수된다.
<박해 내용>
사제 : 3명 자수 후에 군문효수됨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신자 : 참수 70명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등)
옥중 사망 : 60명
시성諡聖 : 70명
※ 당시 정치 상황 : 안동 김 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해 풍양 조 씨가 일으킨 정치적 변란
• 병오박해
기해박해 후 7년이 지난 1846년 6월 5일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된 병오박해는 9월 20일 종결됐다. 이 박해로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명과 평신도 8명, 모두 9명으로 1984년 모두 시성됐다.
김대건 신부는 9월 16일 어영청을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효수를 받았다. 그로부터 3일 뒤인 19일 신앙을 굳게 지켜오던 현석문도 군문효수형을 받았고 임치백, 남경문 등도 태장으로 순교했다. 여러 차례 박해를 겪어온 신자들은 소문을 듣고 피신했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교우촌으로 피신했다.
<박해 내용>
사제 : 1명(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새남터 군문효수형
신자 : 8명
시성諡聖 : 9명
※ 당시 정치 상황 : 김대건 신부를 체포하는 것으로 병오박해는
9월 20일 종결되었음.
• 병인박해
조선 말기인 1866년 초에 시작돼 1873년 흥선 대원군이 정계에서 실각될 때까지의 박해 기간으로 설정된다. 1866년 베르뇌 주교 등이 3월 새남터에서 순교한 사건으로 시작된 박해는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병인양요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혹해졌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는 약 8천 명~1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중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이고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 중에서 24명만 시성됐다.
<박해 내용>
사제 : 1명 (베르네 주교)
신자 : 약 8천 명~1만 명으로 추산
시성諡聖 : 24명
※ 당시 정치 상황 : 베르뇌 주교가 새남터에서 순교한 것을 시작으 로 박해가 전국으로 확대되고 특히 병인양요로 박해가 더욱 가혹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