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黃眞伊)와 서경덕(徐敬德)의 연정(戀情)
조선 9대 임금 성종 시대에 황해도 개경(개성)에 천하의 미인이고 노래와 춤까지 잘하는 기생 황진이가 살았다. 이 소문이 삽시간에 전국 팔도에 퍼지자 한량들의 심금을 울렸다.
황진이는 자기를 찾아온 수 많은 한량이 연정을 고백하기에 이르자 웃는 낯으로 “청(請)을 받아줄 테니 쇤네가 내는 문제를 맞히면 허락하겠다”라고 조건을 달았으나 황진이가 낸 문제를 한량들은 풀지 못하고 허탈하게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다.
황진이는 한량을 여럿 만나 시험하였으나 진인(眞人)이 나타나지 않음에 “이 세상에 한낱 기생이 내는 문제를 풀 사람이 없단 말인가!” 하면서도 언젠가는 자신의 글을 풀고 사랑을 나눌 기백이 있고 인물이 출중한 한량이나 선비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하염없는 세월을 보냈다. 문장과 지혜가 번쩍이고 자신을 능가하는 기량을 가진 내로라하는 사내를 좀처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기다리는 어느 날 남루한 차림의 중년의 선비가 황진이의 집을 찾아왔는데 기방 하인들이 선비가 남루한 것을 보고 문전박대를 하고 있었다. 황진이는 바깉의 시끄러운 소리에 문을 열고 밖을 살피니 남루한 선비의 기품(氣稟)이 범상치 않아 문을 열고 나아가 선비를 안채 마루에 모신 후 주안상을 차려 대접하였다.
선비가 첫 잔술을 마시려는 순간에 황진이가 「點一二 牛頭不出」이란 글귀를 휘호하여 선비에게 내밀었다. 여인이 내민 글귀를 보고는 빙긋하게 웃으며 여인의 속치마를 펼치게 한 다음 향내 가득한 명주 속치마에 「許」라고 딱 한자를 썼다.
황진희는 글자를 보고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한 다음 선비에게 큰 절을 세 번을 올렸다. 산 사람에게 절 삼배(三拜)를 함은 산 자에게 한 번의 절을 하고, 죽은 자에게 두 번의 절을 하는 것이다. 세 번째의 절은 여인이 첫 정절(貞節)을 바치는 남자에게 하는 여인의 법도이자 신하가 임금에게 하례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황진이는 선비를 정성으로 대접하고 또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러나 선비는 보름달이 지지 않은 꼭두새벽에 방문 창호지에 다음의 시(詩)를 한 수 적어놓고 홀연히 길을 떠났다.
물은 고이면 강이 되지 못하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꽃이 피지 아니한다.
내가 가는 곳이 집이요 하늘은 이불이며
목마르면 이슬 마시고 배고프면 초목근피가 있는데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이 어디 있느냐?
선비가 떠난 후 황진이는 선비를 잊지 못하고 가슴 깊이 사모하며 다시금 선비를 만나면 가죽 신을 시켜 발을 편하게 해주겠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신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 선비를 찾아 팔도를 수소문했으나 쉬이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선비가 어느 사찰에 머물고 있다는 풍문(風聞)을 듣고 찾아가 극적인 재회를 하고 그간의 애태웠던 그리움을 하룻밤에 다 날렸으나 늦은 아침이 되어도 그 선비는 움직이지 않자 왜 일어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인심 사나운 절간 중놈들의 눈치 때문이라 하자 황진이는 마을로 내려가 주안상을 준비하여 절로 왔으나 애써 만든 신발만 덩그렇게 놓인 채 밤새 정표(情表)를 남긴 사내는 떠나고 보이지 않았다.
황진이는 문득 깨닫기를 선비의 사랑은 소유할 수 있어도, 선비의 몸은 소유할 수 없음을 알고는 평생을 그 선비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 후 황진이는 이 선비가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임을 알고는 평생 화담을 존경하고 그리워하였다 한다.
황진이와의 사랑을 잊지 못한 것은 화담도 마찬가지였었다. 산속 우거(寓居)에 살던 화담도 그녀와 지난날 두 번의 만남을 생각하며 다음의 시를 지어 황진이를 그리워하였다 한다.
마음이 어리석은 후(後)니, 하는 일이 다 어리석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랴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그인가 하노라.
비록 기녀로 살았지만, 당시(唐詩)에 일가견이 있었던 황진이도 다시 오시지 않는 화담을 다음의 시에 그리운 마음을 적었다.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 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황진이는 미모뿐만 아니라 경서(經書)와 사기(史記), 즉 서사(書史)에도 밝았고 시를 짓는 데도 능하였다. 황진이가 기생 신분이지만 당대의 시인 묵객(詩人墨客)들과 교류한 조선 초기의 여류시인(女流詩人)이었다. 황진이는 시조(時調)는 6수, 한시(漢詩) 4수가 전해 오지만 실전(失傳)된 시가 상당했을 것이라 추측을 해본다. (곽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