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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의 시편
2019년의 시편을 여기에 적는다.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문장을 불러와야 한다.
우선 이얼리티가 강화 되어야 할 것이다.
시문은 힘차고 유려하고 깊어야 할 것이다.
시를 쉽게 쓸 생각은 없지만 거느리는 자장을 넓혀야 할 것이다.
매일 시를 써야 할 것이다.
결락이 없는 시를 써야 할 것이다.
첫날
설렘이라고
두려움이라고
되돌아 설 수 없다고
한 해는 그렇게 밝았다
복수초꽃은 바람 위에 피었다
바람 위에 지은 것들은 바람이 떠나도 그대로인 것
복수초꽃이 그 자리에 피는 연유다
피가 더러워지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가려움으로 알 수 있는 피의 정화다
날개가 돋는다
더러운 피에서 돋는 날개는 강하다
더러움을 견딘 것에 주는 상급이다
강한 날개를 얻고 붉은 해를 얻었다
한 해는 그렇게 밝았다
슬픔을 버릴 수는 있어도 잊을 수는 없다
제야를 건너며 이제는 버려야 한다고 입술을 물었다
별빛은 별빛으로 슬펐다
눈빛은 눈빛으로 슬펐다
슬픔은 제야의 일이다
붉고 커다란 것이 솟아오른다
붉고 커다란 것은 벅차다
극지에 떠오르는 붉은 해를 생각한다
극점에 서서히 드러나는 빙벽의 위엄을 생각한다
거대하다고, 숨막힌다고, 황홀하다고 말 할 수 없다
한 해는 그렇게 밝았다
사람이 정금처럼 빛나는 시간이다
(2019. 1. 3)
마지막 날을 너와 있지 못했다
모래톱은 쓸려가고 쓸려온다
쓸려가고 쓸려와도 제 자리는 아니다
모래톱은 조금씩 옮겨가는 자리를 잊지 않기 위해
저렇게 힘껏 파도를 밀어내는 것이다
겹겹의 산맥들이 창으로 밀려온다
창은 산맥들의 숨소리로 차오른다
숨소리는 웅혼하여 창이 부푼다
숨소리로 겹겹의 산맥들이 일어선다
시간이 상처를 감추고 되돌아온다
예리한 상처는 예리한 시간에 찔린 증거다
시간은 생사를 가르는 칼날이다
그 날로 상처 내는 시간의 엄혹함이 다가온다
시간이 시간을 찌르는 날이 오늘이다
그대여, 노오란 꽃판이여
마지막 날을 너와 있지 못했다
(2019. 1. 3)
농담
그는 농담 할 사람이 아니다 경쾌해서 농담처럼 들릴 뿐이다
그는 서울의 한 모텔에서 경찰에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잠적 다섯 시간 만이다 유서는 진정성 있었고 자살은 분명해보였다 모두들 죽으면 안돼를 속으로 부르짖고 있었다 경찰에 비상이 걸리고 그가 죽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젓다
그는 죽지 않았고 웃지도 않았다 그는 죽을지도 모를 일이고 다시는 그의 웃음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 어머니 정말 사랑하고 죄송합니다. 그래도 전 잘 한 것 같아요. 더 긴 유서는 제 신림 집에 있어요. 죽었다는 이야기 나오면 친구가 유서 올려줄 거에요. 모텔에서 쓴 이 유서도 어떻게던 공개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전 원래 항상 웃었어요. 울 때도 웃으면서 울어요. 그리고 살 이렇게 많이 안쪘었어요. 진짜 스트레스 받아서 이 지경 된 거에요. 그래도 제가 죽어서 조금 더 좋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암시하고 사라졌다 남긴 유서에는 몇 번의 자살을 시도 했지만 죽지 못했다고 썼다 그는 농담처럼 살아서 발견되었다 세상은 좀 더 시끄럽겠지만 젊은 그를 TV에서 다시 볼 수 있겠다
농담이 지나쳤다
(2019. 1. 4)
쓸모 없는 것들을 위한 송가
*
헨델은 이발사의 딸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악보를 선물했다 그는 자주 이발소를 찾았다 때로는 밖에서 이발소 안을 훔쳐보기도 했다 그녀는 후광이 황홀했다 하루는 그녀가 손님의 머리를 자르고 있었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녀의 후광을 보았다 아빠, 메시아 악보 한 장만 찢어주세요. 머리칼 쓸어 모으게요.
헨델은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
*
손택수 시인이 시골의 식당에 들렸다 식탁 다리 받침으로 놓여 있는 책의 표지가 낯익었다 자신의 시집이었다 다리 하나가 시인의 이름을 찍어누르고 있었다 꿈은 찌그러져 답답하고 창피했다 어찌어찌 시골 식당까지 흘러와 홀로 서러운 시간에 식탁은 한 다리를 시집 속으로 밀어넣어 따뜻했릏 것이다
그는 시집이 기우뚱거리는 식탁의 받침으로 제몫을 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장시집 <시베리아의 침묵> 여섯 권이 예스24 중고서적으로 나와 있다 9900원짜리 1권, 12600원 짜리 1권, 12650원 자리 1권, 13500원 자리 3권이다 정가는 15000원이지만 구매해 읽고 내놓은 것인지 저자에게서 기증 받아 읽지 않고 내놓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느 소읍의 오래된 식당을 지키고 있을 낡은 식탁 받침으로 쓰이고 있을 <시베리아의 침묵>의 안부는 아직 모른다
*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고 갈파한 평론가를 기억 한다 몽상은 꿈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비춘다 자신의 추한 모습이 시집이다
시집 속에 갇혀 욕망의 노예가 되고 있는 나를 본다
* 김현
2019. 1. 7
배전판 2번 차단기
배전판 2번 차단기가 떨어져 있다
누전이 있었다는 신호다
누전 며칠 전부터 좌골신경통이 왔다
전기기사는 검전기로 2번 차단기에 연결된 전선의 누전 문장을 읽는다
바늘이 0.5에 머문다 어디선가 심각한 문장의 혼란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의사는 엑스레이를 들여다보고는 거침없이 인접혼란이라고 진단한다
전기기사는 2번차단기와 연결된 모든 콘센트를 열어 문장을 불러낸다
신경이 달아오를 때, 터질듯한 말들을 전선으로 흘려보냈던 무모를 뒤돌아본다
감성을 뜨겁게 달구며 흐르던 전류는 수시로 시편을 불 밝혔다
시편은 한동안 환했으나 홀로 어둑해지기도 했다
문장은 늘 질문이었다
질문은 회로를 돌아 냉장고를 관으로 만들고 오디오의 노예들을 방면하기도 했다
어느 시편이 누전을 일으키고 있는지 찾지 못했다
시편을 감싸고 있던 은유는 견고하지 못한 피복이다
누전 문장을 찾는 일은 난제다
나는 시편의 은유를 의심하고 전기기사는 벽속에 깔린 문장을 의심하고
의사는 인접혼란의 카드 색깔을 의심한다
2019. 1. 12
E나라로 가는 이미지의 길
당신이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단서는 없다
당신이 어디 살고 있는지 증명하기 위해 주민등록초본의 이미지를 제시해야 한다
당신이 당신인지 증명하기 위해 당신의 상반신 이미지를 제시해야 한다
당신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 증명하기 위해 최근 3년 동안의 행적을 이미지로 요약, 제출해야 한다
당신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증명하기 위해 출생년도와 출생지와 출생의 고고한 울음소리를 이미지로 제시해야 한다
당신이 어떤 지적 반경을 가지고 있었는지 증명하기 위해 서가의 목록을 이미지로 제시해야 한다
당신이 사이버 공간을 어떻게 소요했는지 추적해도 좋다는 동의서를 이미지로 제시해야 한다
당신이 영혼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몇 년간의 내출혈 내력을 출간할 계약서를 이미지로 제시해야 한다
당신이 지은 마지막 무덤 이후 다시 짓는 무덤의 모든 석재를 이미지로 제시해야 한다
이미지의 미로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당신이 가고 있는 곳은 당신 몸의 어긋난 이미지, 어디쯤 일 것이다
2019. 1. 13
축배 없는 승리
그가 천천히 숲길을 걷는다 숲은 깊어지고 햇살은
투명하다 고라니가 놀라 뛰어 달아난다
그는 고라니의 돌연한 출연에 잠시 길을 멈춘다
시간이 느릿느릿 그의 곁을 따라 걷는다
바쁜 것은 바람이고 햇살이다
찔레꽃무더기도 산벚꽃그림자도 바쁘지 않다
숲길은 북한강에 닿는다
그는 강물에 마음 띄운다
그의 삶은 축배 없는 승리, 사학에서 사회학으로
옮겨갈 때 혁명은 시작되고 있었다
혁명의 현장을 비껴 있었다는 죄책감이 그를 쓰러뜨렸다
그는 죽은 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했다
끝내 살아 문학이었다 치유의 흐느낌은 아득히 멀었다
그는 비린 내음을 풍기며 철철철 흘러가는 강물*의 유속을 생각한다
그는 눈길 머물 때까지만 그의 강물인 것을 생각한다
그는 ‘책읽기의 괴로움’**으로 한국시단을 꿰뚫어 본 먼저 간 친구를 떠올린다
그를 만나러 가기 전에 서둘러 시전집을 내야겠다고
*『최하림 시전집』서문에서
** 김 현
하지만 난 몰라
체 게바라가 녹색 노트에 옮겨 쓴 첫 시가 세사르 바예호의 「검은 사자들」이다
삶엔 고통이 있지, 너무나 힘든.....하지만 난 몰라!*라고 노래한 바예호의 마음을
체는 알 것 같았을 것이다 모든 고통을 꿰뚫고 있는 바예호가 난 모른다고 노래한 역설을, 투정처럼 들리는 노래가 체는 더 아팠을 것이다
아버지는 식자우환이라고 말씀하셨다 시골마을의 점령군은 아버지를 일정반경 안의 벼 낱알를 세어 공물량을 메기는 일을 맡긴 것이다 아버지는 사회주의자도 아니고 좌파도 아니었다 유일하게 문자를 안다는 이유로 부역이셨다
아버지는 어째서 홀쭉한 가방을 메고 지리산이나 한라산으로 가지 않으셨을까 아버지는 어째서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지 못하셨을까 아버지는 어째서 고작 벼 낱알이나 세는 부역이셨을까
아버지는 박헌영의 청년 비서도 못 되셨고 임화의 시도 읽지 못하셨다 아버지의 부역은 장남에게 화가 미쳤다 행정병으로 입대한 장남은 비밀취급인가를 받지 못 했다 연좌죄 때문이었다 군의 2급비밀문서를 열람할 수 없어 무늬만 행정병이었다
연좌죄가 폐지되고 백석과 정지용의 시집을 마음 놓고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세상을 뜨셨다 6.25 피난 시절의 궁핍을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고 떠나셨다 바예호도 체도 만나지 못하신채....하지만 난 몰라
* 세사르 바예호의 「검은 사자들」
어느 곳을 가고 있을까
지금쯤
나는 어느 곳을 가고 있을까
살아서 부르고 싶었던 많은 노래들 어느 숲에 남길까
시베리아의 베료자숲에 들어
백야를 건너며 자작시를 읽고 싶었던
나는 돈강의 유유한 흐름을 본 후
사는 일이 시덮지 않았다
나는 러시아의 검은 대지와 검은 베료자숲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느린 화면과 예술인 묘지와 끝없이 펼쳐진 야생화군락과 사원의 낡은 성화들을 만나 눈동자가 커졌다
그 날들은 살아서 빛났다
나는 러시아에게 무엇을 물었던가
질문은 혼란이며 질곡이며 질정이며 척력이며 인력인 것을 알아
살아 있는 날들은 바람이거나
발틱해 어디쯤 지친 시간이었을
나는 어느 곳을 가고 있을까
2019. 1. 25
변산바람꽃
해후다
몇 년인지
다 잊었었다
미웠고
아팠다
말 없이
서로를 볼뿐
유리창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 용서 할게
다 잊을게
또 몇 년이 흐르겠다
불쑥 나타나
넓은 유리창이겠다
2019 1. 30
시인의 하찮은 혁명
꽃들의 흔들림에서 혁명의 기운을 읽었다고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일으켜 세운다는 문장이 끌고오는 이미지는 낯설지 않다
시인에게는 시 쓰기가 혁명이다
하루하루를 갈아엎기 위해 페이스 북에 오래된 시인들 사진을 올리는 건
혁명의 전조다 누군가 피 흘리게 된다
눈물이 있으면 좋겠다
눈물은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낡은 이미지다
눈물은 어느 문장으로 이끌어도 익숙하다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눈물은 주루룩 흘렀다
눈물은 지나간 일상이었다
일상은 혁명도 모반도 아니었다
일상은 순응이었으며 그것으로 많은 것들을 누렸다
홀로 견디었을 외로운 순간들이 녹색노트였다면
눈물은 감동이고 통증이고 고통이어야 한다
무엇도 아닌 눈물은 자위다
흔들려보지 못한 꽃들이 혁명을 노래하다 모가지가 꺾인다
2019. 1. 30
간혈 단식
SBS에서 간혈 단식을 방송했다
위에서 꼬로록 소리가 날 때까지 먹지 않고 견디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방송을 본 많은 시청자들이 간혈 단식을 시작할 것이다
몸이 긍정적으로 변화 한다
혈압도 내려가고 혈당도 내려가고 머리도 맑아지고 몸도 가벼워지고
모든 건강수치가 좋은 쪽으로 변하는 걸 그래프로 보여준다
위만 공복상태기 필요 한 건 아니다
머리도 공복상태가 필요하고 정치도 공복상태가 필요하고
심포니도 공복상태가 필요하고
시도 공복상태가 필요하다
정지의 미학은 이깔나무에서, 자작나무에서, 층층나무에서 아름답다
신흠에게서, 이상에게서, 김수영에게서, 홍랑에게서 아름답다
비울줄 몰라 몰락으로 간 사람들이 넘치는 연옥을 말하지 않겠다
불면의 푸른 눈동자를 제비꽃으로 보게 되면
정지의 미학을 말 할 수 없겠다
저 세속의 와글거림으로 시가 태어난다
공복의 효과인지 과식의 부작용인지 암튼 시인들에게 시가 온다
시의 몸이 뚱뚱하건 홀쭉하건 거칠건 달콤하건
온다 와서 묻는다
살만한가?
2019. 1. 31
카페 이디야의 여인들
나는 카페 이디야 보라점의 단골 맴버다 내 자리는 늘 구석의 6인용 테이블이고 커피는 제자가 모바일로 보내주는 이디야 선물 커피, 핫 아메리카노다 내가 뒷문을 열고 들어가면 음대 휴학 중인 매니저 문 군은 주문 전에 아메리카노를 내린다 그걸 받아놓고 노트북을 켜고 심호흡을 하고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커피 맛은 나쁘지 않다
시 초고를 잡아 가는 날은 중간중간 일어서서 스쿼트 운동을 한다 엉덩이를 뒤로 빼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스무 개쯤 하고 나면 적당히 힘이 솟는다 허리가 약한 나는 작업 중에 스트레칭이 필수다 내 몸은 가늘지도 굵지도 않다 내 시 또한 가늘지도 굵지도 않다는 걸 안다
오늘은 옆자리에 줌마들이 앉지 않았다 줌마들의 힘은 넘쳐 몇 시간이고 입술이 현란하게 움직인다 몰두하면 그 입술들이 보이지 않는다 몰두하면 언제나 심산유곡이다 때론 여고생들이 옆자리에 앉아 밝고 유쾌하게 웃는다 무엇이나 깔깔깔인 여고생들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시 속 몇 몇의 그녀들은 이디야의 여인들이다 그녀들은 영감을 주고 찬란한 삶을 주고 흘깃 흰 눈자위를 주고 돌아가지만 다시 나타난다 고백컨대 그녀들의 표정을 베껴 쓴 것이 내 시편의 연시다
그녀들 누구도 자신이 내 시의 문장이 되어 있다는 걸 모른다 문장은 머리칼 내음이기도 하고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기도 하고 잊혀진 연인이기도 하고 흐릿한 체향이기도 하지만 그녀들이 내 시집을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 시집은 티브이 연속극에 비춰지지 않을 것이고 달달한 문장도 아니다
어떤 일은 끝나버린 후에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일어나려는 바로 그 순간에 알게 된다*
* 정미경 소설 「못」
2019. 2. 1
앤딩 자막
<극한직업>은 황당하게 코믹하다 액션장면은 리얼하지만 권선징악의 낡은 상투에 갇힌다 상처 분장은 과도하고 형사들은 오버액션이지만 흡인력이 있다 사족 같은 포상장면이 좀 지루하다 싶었을 때 앤딩 자막이 오르기 시작한다
주연부터 조연, 단역과 액스트라처럼 보이는 연기자까지 이름을 올려준 감독은 희망 고문을 시작한 듯하다 한 번의 영화 출연으로 평생을 영화판을 떠나지 못하고 배회할 것 같은 불길함이 밀려온다 잠간 스치고 지나갔을 단역의 이름에 김윤배가 보였다 찰라의 일이었다 그의 배역은 <수원갈비통닭 대구분점> 조직원이다 그가 어떤 연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존재감 없는 단역이라면 늙어서 연기로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게 될지, 배우 김윤배의 운명을 훔쳐본 것 같다
시인 김윤배의 운명은 누가 훔쳐보고 있는가
2019. 2. 2
히레까스는 랭킹 5위
보라동 바오돈까스 집의 매출 랭킹 1위는 왕돈까스다 돈까스의 크기는 대형접시만하다 내가 좋아하는 메뉴는 돼지안심을 튀긴 히레까스다 두툼하게 재워서 튀김옷을 입혀 튀겨내는 히레까스는 단연 최고다 육질은 부드럽고 육즙 또한 풍부하다 거기에다 크림맥주 500 cc 한 잔이면 황홀하다
그 히레까스가 바오에서는 랭킹 5위다 나는 언제나 히레까스를 주문한다
돈까스의 랭킹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 모든 것에 랭킹이 있다
랭킹은 최고의 권력을 만들기도 하고 파탄을 부르기도 한다
환호하던 동계올림픽 경기의 몇 랭커들이 예산을 주지 않아 선수생활을 포기했다
경기장은 폐허로 변하고 미친 듯 쫒던 TV는 선수들, 환희의 눈물을 잊었다
환호 장면에 대통령과 영부인의 열광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랭커는 슬프다
하위 랭커는 더 슬프다
차기 대권주자들의 랭킹이 계속 바뀐다
그들도 슬프다 언젠가는 잊혀질 것이어서
슬프고 감옥에 갈지 몰라 슬프다
사형제도보다 두려운 것이 랭킹이다
그래도 나는 바오 랭킹 5위인 히레까스를 주문한다
2019. 2. 7
생화, 그 짧은 생애
매주 강단의 꽃꽂이는 바뀐다
꽃향기에 취해 청소하는 일이 힘들지 않았다
오래된 성전의 돌계단이 별들을 보낸다
피 흘리는 사람이 걸어나오는 새벽 돌계단이었다
어느 날, 생화가 조화로 바뀐 걸 알았다
강단의 어둠은 배교의 칼날을 숨겨 위태롭다
매주 토요일 새벽에 오르던 돌계단이 두려워지고
경전이 높아져 허리의 통증이 시작되었다
돌계단에 남아 있던 별빛은 통증을 척추로 밀어넣었다
바뀐 근무자는
생화 같은 조화로 눈멀어 메마른 정지의 꽃잎을 보게 될 것이다
정지의 순간, 무한 펼쳐지는 침묵의 세계에 서서
눈물 날 만큼 감동되지 않으면 가짜라는 걸 알 될까?
2019. 2. 8
생매장의 순간들
구제역 발생지역이니 우회하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생매장의 순간을 보기 위해서였다
산그늘이 빈 우리까지 내려와 있다
소떼의 슬픈 울음소리가 빈 우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순하고 커다란 눈망울 위로 붉은 훍을 다 퍼붇고
포크레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포크레인보다 더 몸을 떨던
젊은 기사는 운전석에서 내려오지 않고
굉음을 몰고 다른 생매장지로 떠난다
죽음에 이르는 짧은 순간, 생매장의 소들은 무엇을 떠올렸을지 알 수 없다
소울음보다 더 깊이 울던 아낙은 며칠째 집을 비웠다
목장주는 밤 늦어 접근금지 붉은 띠를 들어올리고 빈 우리로 들어가 어깨를 들먹였다
소리 없는 울음이 어떻게 차령을 넘었는지 모른 일이다
2019. 2. 11
무화에 이르다
사랑을 영원한 거라고 말하지 않겠다
사랑을 순간적인 거라고 말하지 않겠다
사랑은 영원하지도 않고 순간적이지도 않다
사랑은 순간 위에서 영원을 바라보는 순수다
사랑은 미리 써놓은 묘비명의 첫 문장이다
사랑은 죽음으로 완성에 이르는 생의 마지막 문장이다
기다려지고 미칠 것 같고 미워지고 원망스러울 때
네가 온다 꿈으로도 오고 생시로도 온다
일년 쯤 볼 수 없던 네가 눈물을 보였다
눈물은 속눈이 보이도록 투명하고 따스했다
네 눈물은 증오도 착란도 미필도 두려움도 무화하는 마법이었다
후회스러움도 미혹의 시간들도 돌아설 수 없는 운명도 무화하는 마법이었다
마침내 내가 네 눈물로 스며 무화에 이른다
2019. 2. 25
눈 오는 날
눈이 와 쌓인다
눈 위에 눈을 묻고 또 눈을 묻는다
눈 위에 눈물을 묻고 또 눈물을 묻는다
눈 위에 새를 묻고 또 새의 발자국을 묻는다
눈 위에 사랑을 묻고 또 흔적을 묻는다
눈 위에 나무의 눈빛을 묻고 또 나무의 말을 묻는다
눈 위에 한 시대를 묻고 또 한 시대를 묻는다
눈 위에 인간의 욕망을 묻고 또 인간의 하염없는 눈빛을 묻는다
눈 위에 나를 묻고 또 너를 묻는다면
우리들의 이야기는 어느 얼음벽에 투명한 눈물로 흐를 것인데
눈 오는 아침
나는 죽고 너는 살아난다
이미 죽었던 내가 또 죽고 살아 있던 너는 다시 산다
2019. 2. 27
내 안에 오래된 냄새가 있다
*
어둠은 서가의 오래된 냄새에서 온다 오래된 냄새 속에는 전후 한국문학전집이 있고 사할린 탄광 입구에서 무테안경을 쓰고 찍은 아버지의 사진 속 무표정에도 있다 어둠은 죽은 시인이 주고 간 동백나무와 홀로 피고 홀로 이울던 동백꽃잎의 검붉은 그리움에도 있고 아무 일 없이 몇 년 지나고나서 뒤돌아보는 핏빛 울음에도 있다
여자는 극단이었고, 극단이어서
온 몸을 떨었고
여자를 안고 있던 뜨거운 말들이
빠르게 식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바람의
계곡이었다
여자에게 바쳐진 노래들이 서서히 매몰의 시간으로 갔다
시대의 암울을 전한 여자는 백 년을 서 있다
여자는 잠간 낮달을 보았다
눈썹에 커다란 호수를 숨기고 있었다
벚꽃이 피지 않았다
바다는 계절풍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여자의 손이 마르고
뒤에 오는
두려움 같은 것
침묵 같은 것
비웃음 같은 것으로 어두웠다
*
남자는 이슬을 보았다
이슬 속에 빛나는 붉은 해를 보았다
이슬 속에는 새도 바람도 숲도 있었다
이슬 속에 누워 있는 남자를, 남자는 보았다
남자는 묘비명을 하늘에 쓰고 있었다
묘비명은
아침 햇살에 빛났다
묘비명의 문장을 남자는 기억하지 못했다
남자는 이슬 밖 세상의 대지와 늪지와 군락을 이루어 피는 야생화를 보고 싶었다
남자는 이슬에 누워 백년이었다
백년 후, 남자는 여자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백년은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가혹한 세월이었다
2019. 3. 29
천외목 공방
횡성의 천외목 거장은 그가 분명하다
그는 소목장이다 그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나무향은 그의 먼지투성이 작업실을 숲으로 끌고 가곤했다 그가 젖은 나무를 말릴 때부터 나무결 속에 들어 있는 온갖 소목작품들이 온다 설계도 없는 그의 작업실은 영감으로 가득차 기괴스럽다
영감이 오는 날은 대패질이 힘들지 않다 장이 반다지로 바뀌는 일은 없다 소반이 찬합으로 가는 일도 없다 맨 먼저 떠오른 그림이 그에게는 실현된 소목작품이다 톱질 대패질 끌질 사포질 칠질까지 소목작품 하나에 수 만 번의 손길이 머문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은 하청이어서 그의 이름이 찍히지 않는다 그의 하청 가격의 몇 배에 거래되는 걸 본 이후 담배를 피워 무는 일이 잦았다 그러는 그를 위로하느라 지어준 공방이름이 천외목天外木이다 하늘 밖 나무라니, 그만큼 귀한 나무를 쓰는 공방이라는 의미로 자어준 이름이다
공방 이름을 받은 그는 무쇠인두를 만들어 완성된 소목작품 어딘가에 天外木이라는 낙인을 쳤다 납품가격은 올라가지는 않았다 그의 소목작품들은 섬세해지는 것으로 새로웠을 것이지만 10년 전의 일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우연히 천외목이라는 공방 이름을 보았다 횡성으로 귀촌한지 몇 년 되지 않는다면 그는 안성의 소목장일 것이다 이제는 유명 갤러리에서 초대전을 할 만큼 알아주는 장인이 되어 있다
그가 고맙다며 준 과일 담는 목기는 어디에 처벅아두었는지 기억 할 수 없다
2019. 4. 15
미선나무의 시간
정지된 시간 속으로 고뇌의 뿌리들이 뻗어간다
척박한 땅이었으니 꽃차례조차 무한 총상總狀이다
그렇게 봄의 시간을 묶고 삶을 묶는다
나는 너는 버릴 수 없었다 계절을 건너고 부러지기 쉬운
줄기를 움켜쥐고 잎이 피기 전의 시간을 묶어낸
너는 백의의 시간이거나 성녀였다
너는 정지의 아픔을 기억해서는 안된다
너를 부르지 않았을, 매혹은 쉬이 무너지는
육신이어서 슬픔이었던
봄날은 정지된 계절의 성장통으로 산은 저렇게 높은
나무들을 거느리는 것이다
너를 이곳으로 이주 시킨 농부를 기억한다
어제는 목련차를 내리지 않았다
순백의 순수 시간을 잃고 몸빛이 변해가는 걸
몰랐다면 그건 죄다 싶은 봄날이었다
이제는 통증을 꽃으로 피워내
시간을 머물게 하는 너를 몰랐다 말하고 싶다
너를 몰랐으므로 봄날을 몰랐을
봄꽃, 그 난망의 생을 지켜볼 뿐
미선이어서 더 아릿한 희디흰 꽃잎들
2019. 4. 21
사과꽃
하늘이 먼저 품은 것은 사과꽃이었다
사과꽃은 해마다 몇 알의 사과를 남겼으나 그늘의 서식으로 그을음병을 맞아 몰골이 사나워지는 것이었다
꽃마다 그늘을 두어 태양을 쉬게 하는 것으로 낙화의 시간을 유예시켰다면
봄은 공모의 질타를 피할 수 없겠다
하늘은
사과꽃을 품은채 봄을 보낼 심산이다
봄은
꽃 속의 더러운 색정을 더는 숨겨두지 않을 텐데
돌아와야 돌아오는 거겠지만 사과꽃 지고 나서 울음이라면 용서 하겠다
봄이니
여자가 그을음병을 몸 깊이 숨겨
화사한 웃음으로 돌아올 수 있겠다
사과꽃이 벙글기 시작했다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궁금한 물음은 나비의 날개에 얹겠다
나비의 날개가 황금빛으로 빛난다면 여자가 살아 있다는 전언이라고 믿겠다
살아 있는 것으로 용서 하겠다
사과꽃은 꽃향을 풀었지만, 이미 여자의 사과꽃은 아니었다
여자가 입원했다는 정신병원에선 아무 것도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나비가 서녘으로 날자 하늘이 붉어졌다
2019.4.28
도착
시집원고를 읽는 일은 관음이다
짜릿한 오르가즘을 느낀다
쾌감은 짧고 강력하다
시집원고는 누구도 안아보지 않은 처녀숲이다
시집원고 속에는 시인의 도착이 있다
무엇이 시인을 여기까지 이끌어 왔는지
몇 번이나 주저흔을 남겼는지
누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였는지
훔쳐보는 일로 유쾌하게 흥분된다
그 후는 도착이다
시문을 벗기고 싶고, 빨고 싶고, 발기시키고 싶고, 뒤에서 보고 싶고, 기절시키고 싶어 안압을 높이지만 시문은 오지부동
내 시집원고를 읽는 일은 자기위로다
자위는 토씨를 버리는 일이다 토씨가 떠나면
불안해지는 부사와 형용사다 몇 번씩 흔들었다 놓는다
끝까지 살아남으면 문장이라는 방을 얻는다
그 방을 순례하는 즐거움은 크다
방은 비밀이고
도착으로 번식을 종식시키는 어리석음이다
2019. 5. 21
함박꽃
함박꽃이라고 함박 웃지는 않는다
함박꽃은 함박일 때만 함박웃음이다
함박꽃을 보다 구름을 찢고 눈물 흘린 일 있다
눈물은 어둔 하늘 흐를 수록 진하고 영롱하다
함박꽃 피면 여름 오고 풍만하던 젖가슴이 떠난다
가슴이 풍만하지 않아도 떠난다
풍만한 함박꽃은 밤의 눈물 때문에 나비가 오지 않는다
눈물과 나비를 바꾼 어리석음으로
날개의 황홀한 문양과 아름다운 호접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걸
마가목 흰 꽃술도 알았을 거고
덩굴장미의 부드러운 가시도 알았을 거다
덩굴장미를 먹으러 올라간 초록뱀도
초록뱀이 남기고 간 허물도 알았을 거다
함박이어서 함박 웃지 않는
꽃의 비극은 웃기 전에 씨방을 부풀려
꽃잎을 부드러운 바람의 관棺에 뉘여야 한다는 거다
2019.2.28
비밀
내 안에 몇 개의 어둠과 몇 개의 아침과 몇 개의 죽음이 있다
그 건 비밀, 그녀에게도 말 할 수 없다
어둠은 어둠으로 밝고 밝아 어둠이고
아침은 아침으로 저녁이고 저녁으로 아침이고
죽음은 죽음으로 살고 살아 죽음이고
어둠이고 아침이고 죽음이다
어둠은 몇 개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아침은 몇 개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죽음은 몇 개인지 기억한다
죽었다 살아난 기억은 선명하다
따뜻하고 밝은 빛이 끝없이 펼쳐진 곳을 걷고 있었는데
춤추는 듯 했다 무게를 느낄 수 없는
무한한 공간이었던 기억은
커피를 마시는 공간과 겹친다
내가 커피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녀가 커피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모른다
이 얘기를 그녀에게 했던가 그녀의 눈빛이 멀리 머물고 있었다
그게 전부다 호수에 잠겨 있는 수양버들의 우람한 그림자를 보았다
슬프지 않았다
그녀가 슬펐다
그녀에게도 몇 개의 어둠과 몇 개의 아침과 몇 개의 죽음이 있다
2019. 6. 6
몰락하는 빛
가령 몰락하는 섬이 있어 섬의 모든 불빛과 하늘과 바람과 숲이 사라지고 울음소리도 사라지고 배를 매던 부두도 사라지고 사랑 앓던 달빛도 사라지고 말소리도 사라지고 초분도 사라지고 유령으로 떠도는 파도의 인광만 퍼렇게 살아 죽어 있는 나를 흔들어 깨운다면
깨어일어나 너를 찾겠다
깨어일어나 나를 찾겠다
물속에 잠든 너를 찾아
물속에 잠든 나를 찾아
섬의 모든 불빛과 하늘과 바람과 숲을 불러오겠다
몰락하는 빛이었으니
달빛도 부르고 굽은 소나무 그림자도 부르고 죽은 자의 영혼도 불러
부두에서, 백사장에서, 파도 위에서, 초분 위에서 노래 하겠다
몰락하는 빛이었으니
몰락에 경배하겠다
몰락에의 경배는 살아 있는 동안, 죽어 있는 동안 이루어지겠다
2019. 6. 21
최초의 감옥
내 생애 최초의 감옥은 한련화였고 한련화가 삼킨 날카로운 햇빛이었다
최초의 감옥은 아름다웠고 수감생활은 안타까워 햇빛은 검은 상복의 깃마다 슬픈 눈빛을 달아주었다 최초의 감옥은 몸속이었고, 몸 밖이기도 했다
감온은 언제나 찬란했다 찬란해서 어두웠던 감옥이었다
내 생애 최초의 감옥은 두려웠다 두려워 탄식이었다
최초의 감옥은 현란한 입술이었고 입술에 얹는 흰 손가락이었다 흰 손가락은 사람의 건반을 뛰놀던 기억으로 감옥이었다
피아노 선율은 숨막히게 아름다운 정념을 쏟았다
내 생애 최초의 감옥은 바다였고 높은 파도를 두드리는 달빛이었다
최초의 감옥은 가슴으로 파고드는 부드러운 칼날이었다 칼날 아래 쓰러지는 지느러미였고 부풀어오른 부레였다
달빛은 멀어 내가 흔들렸고 해변의 발자국을 지울 수 없었다
내 최초의 감옥은 숨소리였나?
내 최초의 감옥은 당신이었나?
2019. 8. 4
모든 건축은 폐허의 길을 간다
*
아프로디테 신전은 네 개의 온전한 돌기둥을 남긴 폐허다 올림피아 신전은 열 개의 돌기둥을 남긴 폐허다 그리스 신전의 폐허는 남아 있는 돌기둥 수로 계산되지 않지만 신전을 세울 때 이미 폐허를 생각했었던 게 분명하다 그랬기에 돌기둥만으로 수천년을 아프로디테 신전이고 올림피아 신전 아니겠나 돌기둥이 무너져도 신전은 폐허로 살아남아 영혼을 부르는 것이다
시간의 틈입으로 신전의 지붕에 틈이 생기고 광장이 기울고 돌기둥이 어느 하루 무너지기 시작하면 페허의 길이라는 것을 알았던 사람들, 폐허가 되는 것이 원형으로 돌아가기 위한 몸부림인 것을 알았던 사람들, 인간의 몸부림이 문명인 것을 알았던 사람들, 신은 그들의 편이었다 그들에게 상상력과 상상력을 실현해갈 손을 주었다 손이 상상력이어서 손이 거룩했던 사람들이었다 거룩한 시전은 손에 의해 이루어진 상상력의 실체였다
*
내 폐허는 시편이다 시편은 폐허의 길을 간다 원형으로 돌아갈 수 없는 폐허의 길이다 모티프의 나와 시문 속의 나와 시문 밖의 내가 다르기 때문이다 원형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내 시편의 폐허는 도시의 하수구로 흘러간다
내 시편은 폐허 이전에 오염의 근원 아닐까?
도서관 식당
도서관 식당을 갈까 도서관 식당은 잡곡밥에서도 서가의 오래된 책 냄새가 난다 검은색 접시에서도 오래된 책 냄새는 난다 가지무침에서도, 버섯볶음에서도, 돈까스에서도, 떡볶이에서도, 셀러드에서도, 방풍나물에서도, 고사리국에서도, 토스트에서도 오래된 책냄새는 난다
일찍 식당을 찾은 20대 취준생에서도 오래된 책 냄새는 난다 재취업을 준비하는 중년의 사내에게서도, 재수생에게서도, 정년퇴임한 사내들에게서도 오래된 책 냄새는 난다 오래된 책 냄새는 일층 서가에서 왈칵왈칵 밀려와 지하식당의 모든 반찬과 밥과 접시와 수저와 사람들을 포박한다
오래된 책 냄새는 오래된 생각이다 오래된 혁명이고 오래된 모반이고 오래된 사랑이고 오래된 감옥이고 오래된 의자고 오래된 실험이고 오래된 법칙이다
생각은 늙는 것이 아니어서 밤에 더 괄괄하다
결기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저자, 생각이 살아 있는 저자를 만나면 서가의 좁은 틈에서 포옹을 하기도 하고 생각이 다른 저자를 책갈피에 뉘어 질식사시키기도 한다 생각은 위험하고 불온하고 무서운 거다 그것들이 책 냄새를 이룬다
나는 위험하고 불온하고 두려운 책 냄새를 사랑한다
오래된 책 냄새를 맡으며 도서관 식당에서 식판에 잡곡밥과 버섯무침과 오뎅과 셀러드와 YTN뉴스를 퍼담는다
2019. 9. 1
자작나무숲에 보내는 편지
네게 편지를 쓴다면 자작나무껍질로 만든 편지지에 쓰겠다
연필에 핏줄 세우면 바스라져버릴 것 같은 애처로운 마음 위에 힘 빼고 쓰겠다
며칠이 듯 며칠이 듯 천천히 쓰겠다
느리게 걸어 너에게 닿는 날의 슬픔처럼 Tm겠다
편지는 우체국에서 부치지 않겠다 소인으로 안타까운 마음의 끝자락이 떨어져 나갈지 모르니까
언제가 네게 가는 인편을 찾아 보내겠다
인편 없으면 계절풍을 기다리겠다
계절풍의 한결 같은 길이 네게 가는 길이니까
계절풍도 몇 번을 건너 잉크의 색깔이 변하고
네가 달빛 없이 고적함을 견딜 수 있을 때, 그리하여
생각의 잎새마다 내리는 밤이슬이 아프지 않게 된다면
내 편지는 스스로 풍화에 들어도 되겠다
네게 가는 먼 길에서
아픔 없이
2019. 11. 8
모티프 볼트
*
인류 최후의 날이 올까
그날을 예비해 인류가 보유한 모든 씨앗을 보관하는 씨드 볼트*는 위기다
동토의 왕국 스발바르의 빙하가 녹기 때문이다
보관된 씨앗이 발아 된다면 인류 최후의 날 이후는 없을 것이다
발아의 비등점이 영하 18도다
*
서정의 방주를 스발바르 군도 스피츠베르겐 섬에서 찾는다
내 서정의 방주는 시의 씨앗 수만 개가 보관되어 있는 모티프 볼트다
언제나 영하여서 발아 되지 않는 동토의 서정이다
서정은 숨쉬지 않고 뜨거워지지 않고 발기하지 않고 다만 거칠어진다
그러는 동안 모티프 볼트가 낡아간다, 늙어간다
감동해야 할 때 감동하지 못하고 전율해야 될 때 전율하지 못하는
감동장애라는 걸 깨닫는데 수십 년이다, 묵묵부답의 나여!
길 위에 길이 쌓이고 숲 뒤로 오래된 숲이 사라지고 번개가 오고
소문 없이 시인의 장례가 치루어지고 검은 아이가 큰 눈을 감는다
그러는 동안 모티프 볼트가 부풀어 오른다
수많은 모티프들이 눈썹을 들어올리는 날이 온다는 징후는 아니다
발아가 재앙인 통토의 숨찬 날들
*노르웨이령 스발바르군도 스피츠베르겐 섬에 있다.
2019. 11. 8
횡계리
횡계리 전나무숲에는 천 개의 눈을 가진 바람이 있다
숲을 미친듯 사랑하는 여자의 계곡이 있다
계곡을 덮고 있는 안개가 있다
안개는 늘 미결이었고
여자는
수많은 파탄을 보았으므로 숲을 흔드는 바람은 파탄보다 아프지 않다
새벽안개를 따라 숲에 드는 날은 계곡 물소리가 가던 길을 역행한다
물소리는 여자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는 걸 눈치 챘지만
젊은 날 강건했던 여자의 허벅지를 믿었다
물소리는 안개의 미결 속으로 여자를 밀어넣었지만
여자는 나지막하게 귀에 익은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티벳 민요 아로야였다
달밤, 준령의 하얀 눈 위에 내려서는 달빛 치정이던 열아홉 앳띤 청년의 이름은 잊었다 청년의 입술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여자는 산노래들의 주술에서 풀려나지 않았다 산노래는 여자에게 결계였으므로
안개는 숲을 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미결의 안개는
여자도 놓아주지 않았다
횡계리 2
그녀의 숲이 얼마나 빈 가슴을 지니고 있는지 알겠네
바람은 얼마나 거친지 알겠네
세계의 검은 숲을 안았던 그녀가 왜 횡계리인지 알겠네
그녀의 새벽잠을 깨우는 이슬을 알겠네
투명한 어둠과 촉촉한 입술을 알겠네
준령이 키운 큰 바람을 다스리는 거대한 풍차의 의지를 알겠네
그녀의 꽃무늬 후레야스커트가 큰 어둠을 풍차처럼 돌리는 걸 알겠네
문장 속 흐린 사내를 알겠네
그녀의 의지가 별숲과 달빛강을 대관령으로 끌어들인다는 걸 알겟네
밤마다 큰 트럭을 몰고 대관령 넘는다는 걸 알겠네
동해의 너울을 싣고 넘어와 횡계리에 부리며 슬픈 미소 짓는다는 걸 알겠네
횡계리는 그녀의 말하지 않은 어둠인 걸 알겠네
그녀의 어둠이 숲으로 자라는 걸 알겠네
파란 하늘 가득 고인 그녀의 눈동자를
*
그녀의 숲이 얼마나 빈 가슴을 지니고 있는지 알겠네
바람은 얼마나 거친지 알겠네
세계의 검은 숲을 카메라에 담았던 그녀가 왜 횡계리인지 알겠네
그녀의 새벽잠을 깨우는 이슬을 알겠네
투명한 어둠을 알겠네
어둠의 촉촉한 입술을 알겠네
준령이 키운 큰 바람을 다스리는 거대한 풍차의 의지를 알겠네
그녀의 꽃무늬 후레야스커트가 큰 어둠을 풍차처럼 돌리는 걸 알겠네
문장 속의 흐린 사내를 알겠네
그녀의 의지가 별숲을, 달빛강을 밤으로 끌어들인다는 걸 알겟네
밤마다 큰 트럭을 몰고 대관령 넘는다는 걸 알겠네
동해의 너울을 싣고 넘어와 횡계리에 부리며 슬픈 미소 짓는다는 걸 알겠네
횡계리는 그녀의 말하지 않은 어둠인 걸 알겠네
그녀의 어둠이 숲으로 자라는 고산지대를 알겠네
파란 하늘 가득 고인 그녀의 눈동자를
그리하여 고래뱃속의 어둠과 들리지 않는 말을
하늘은 미치도록 푸르고
이디야커피보라점은 야전병동이다
아내들은 치명적인 상처를 서로에게 보인다
피범벅인 허리와 허벅지와 발목을, 피범적인 마음과 분노와 절망을
마구 부려먹고 말도 막하고 지네 가족만 소중하고, 참 기막혀 내가 이러려고 결혼했나 하는 후회가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 가족행사에 안가고 싶은 데 싸우는 게 싫어서 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신경을 안써 나는 그 인간 생각 속에 없어 완전히 투명인간이야 여행 갔다가도 기분 상하면 그냥 올라와 지 맘대로야 그리고 자빠져 잔다니까, 이제 안하고 싶어 그러거나 말거나 나도 신경 안 쓰고 투명인간 취급 할 거야 확실히 보내버릴 거야 친정 식구들 오면 그 인간은 께임 해 지네 식구들 오면 나는 온 신경을 쓰는데 이건 말이 안 돼 이해해보자 그럴 수 있겠다 생각하지만 이젠 안할 거야 정말 안할 거야
아내들이 칼을 가는 동안 하늘은 미치도록 푸르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뛰어들고 싶은
내가 서 있는 곳은 알펜시아스키장이다
알펜시아스키장의 인공강설은 언 물방울들의 현란한 춤이다
현란하게 날고 현란하게 대지와 슬로프를 껴안는다
슬로프가 일어서고 대관령의 모든 길들이 알펜시아로 향한다
저렇게 뿜어내는 염원이 슬로프에 얼마나 쌓여야 활강이 가능 할까 염원이 길을 덮고 고뇌를 덮고 등고선의 굴곡을 덮는다면 비상하는 젊음이 있을 거고 타이밍이라는 괴물이 있을 거고 착지의 불안과 두려움이 있을 거고 마지막이라는 문장의 뒤틀림과 돌이킬 수 없는 파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이, 아직 지지 않은 자작나무 노란 잎이 흰 눈 폭풍을 배경으로 풍경을 이룬다 문득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지긋이 문다
내게 뛰어든다는 것은 낭패라는 이름의 다른 명제다
속수무책으로 뛰어듦은 덜 미친 광기다
무아지경으로 뛰어드는 광기이고 싶다
번번이 속수무책, 뛰어듦이 패배의 시작이었던 지난 날의 흑역사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그게 곱게 늙는 것이라고?
미친!
대관령
내가 지향志向을 바꾸지 않았으면 횡계리는 안녕했을까 몇 년은 지향을 바꾸고 몇 년은 바꾼 지향을 다시 바꾸며 괴로움 없이 숲으로 들어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부른 이름은 숲으로 들지 못하고 나는 이름을 버리지 못했다 지향을 바꾸는 일은 신神을 바꾸는 일처럼 쉬웠다 신을 바꾸면 신의 저주가 있다는 걸 알면서 묵주에서 염주로, 염주에서 전신 타투로 바꾼 지향, 저주의 늪에 빠졌던 날들이다 그게 사람 이름이었다 대관령이기도 했다 대관령은 수많은 기다림이었고 환호였고 탄성이었고 감동이었지만 지향이 바뀌는 불운이었다 지향이 바뀌지 않는다면 대관령이 아니다 그곳에서 마지막 식사를 했으며 마지막이어서 단호했다 그 후 어떤 환호도 어떤 탄성도 어떤 감동도 풍력발전기의 날개가 늙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무소불위의 정객이 대관령의 지향이 바뀐 다음 어디에서 늙은 밥그릇을 받을지 알 수 없다 그에게 지향은 무엇이었을까 숲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 이유다
내 지향은 몇 번을 더 바뀌고 나서 영원히 한 곳을 바라보게 될 게다
조용한 말들
남자는 매일 긴장한다
달빛이 검게 상하는 것은 아닌가
별빛이 목관의 모서리에서 죽어가는 것은 아닌가
평생 짐으로 얹지 않는다는 걸 남자는 안다
그녀는 돌아서면 환한 웃음일 거고
결국 상처는 남자의 몫이다
말은 언젠가는 죽는다
사어가 날개인 남자는 날개로 집 한 채 짖고도 남을 것이다
약속은 몇 년만인지 몇 달만인지 기억 없다
노여움을 놓으라고 속삭이지만 노여움은 놓아지지 않는다
남자는 조용한 말들이 숨기고 있는 칼날을 안다
남자는 말이 숨기고 있는 칼날이 두러워 떨지는 않는다
어떤 말이든 상처라면 다 버릴 수 있다
버린다는 것, 파격은 아니고 음모는 더욱 아니다
그 때 이미 자작나무숲에 조용한 말들이 펄럭이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낮은 자리에 누워 있던 말들이 가장 높게 매달리는
더럽게 아름다운 말, 평생
아름다움이 적을 이긴다고?
*
미의승적美宜勝敵이라고 말한 왕은 아름다운 화성을 축성했다
제왕의 하늘이 종기로 무너졌다 재위 24년만이었다
노론들은 상복 속에서 소리 없이 웃었고 왕비의 눈에서는 피고름이 흘렀다
대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선인가하면 권력이고 미인가하면 음모고 진인가하면 죽음이다
그 때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묻는다
시인에게, 정치인에게, 노숙자에게, 어려서 떼죽음한 영혼에게
*
아름다움이 적을 이긴다고 생각한 황제 다리우스다
아후라마즈다 신의 뜻에 따라 가장 아름다우며 장엄한 궁전, 페르세폴리스궁을 건축한 다리우스 황제는 붉은 노을 속으로 잠기는 궁전을 보았다
황제의 드넓은 제국으로 보랏빛 어둠이 몰려왔다
황후에게도, 대신들에게도 보랏빛 어둠이었다
보랏빛 어둠으로 무너지지 않는 궁전이 없다는 걸 아는 황제였다
대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칼날인가하면 백성이고 무덤인가하면 역심이고 국경인가하면 패전이다
그 때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묻는다
메타스퀘아숲에게, 지친 바람에게, 공동묘지의 수많은 묘비명에게
카르투시오봉쇄수도원
극한 아닌 것이 없는 시의 세계다
시 속에서 새소리가 들린다
극한의 청력이다
시 속에서 새들의 날갯소리는 뜨거운 문장이 된다
시문 속에 발 디딘 새들은 죽어서도 시문을 나오지 못한다
시문이 아름다워서, 시문이 전율이어서, 시문이 죽을 만큼 먹먹해서
시속에 빠진 새들은,
시가 세상의 끝인 것을 오랜 유폐 후에 알게 된다
이미 늦었다, 완벽한 봉쇄다
시는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시는 시 앞에서 망설인다
소멸의 길이 두려운 것이다
시의 길고 어둔 복도를 조용히 지나가는 발소리가 있다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세상의 끝에 누가 시의 사원을 지었는지 모른다
시의 몸을 이루던 시어들의 눈빛이 언제쯤 흐려지고
고개를 꺾어 복도의 누추한 햇살을 보게 될지
시어 하나가 영면했다
바람의 조문이 이루어지고 나면 시의 사원이 무너질 것이다
죽은 시어는 어둡고 쓸쓸한 지하묘지에
묻혀, 누구도 그 죽음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가 세상의 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