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19. 의무기록의 보호
소도시에서 비뇨기과 의원을 개원한 A원장에게 어느 날 의과대학과 의국 동기인 H교수가 찾아왔다. H교수는 지금 정부 연구비로 지방 소도시에서의 성병 유병률과 감염경로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는데 A원장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즉 지금까지 5년간 치료했던 성병 환자들의 의무기록을 복사하게 해 주고 앞으로 1년간 만나는 환자에 대해서는 자신이 준비한 간단한 설문지를 받아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설문지는 감염경로와 그 후의 대처 행동에 대한 내용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A원장이 난색을 표하자 H교수는 학문적인 목적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문제가 될 일은 없다, 이번에 도와주면 네 이름도 논문에 넣어줄 것이고 협조해 주는 대신에 연구비 일부를 제공하겠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A원장이 그래도 환자의 실명과 주소가 있는 의무기록을 어떻게 넘겨주겠느냐고 하자 H교수는 그렇다면 실명과 주소를 지우고 나머지만 주면 될 게 아니냐고 하였다. A원장은 어떻게 해야 좋을까?
<윤리적 고찰>
A원장이 H교수의 요청을 받아들여 의무기록을 넘겨주었다면 설사 환자의 실명과 주소를 지우고 넘겨주었다 하더라도 A원장과 H교수는 다음과 같은 윤리적인 문제점을 지닌 행동을 한 것이다.
첫째, 환자와 의사 사이에 지켜져야 할 기밀유지의 의무를 저버렸다.
의무기록은 환자의 개인정보와 건강에 대한 신상이 기록된 것으로 관련자 외에는 열람하는 것이 금지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환자의 인격과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것이고, 의무기록에 관여하는 의사나 간호사는 기밀유지의 의무를 이행하여야 한다. 타인의 열람이 필요한 경우에는 환자의 동의를 얻어 열람을 허용하여야 하며, 이는 학술적인 연구 목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둘째, H교수는 자신의 연구를 위해 거쳐야할 적법한 절차를 거치고 있지않다.
정부 연구비로 수행되는 H교수의 연구는 성병 유병률과 감염경로에 대한 것으로 환자들의 의무기록을 열람하고 환자들에게 설문을 해야 한다. 이 연구는 임상연구로서 임상연구심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시행할 수 있는 연구이다. 흔히 약물이 사용되지 않는 임상연구는 임상시험심사위원회의 심사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임상연구에서 보호되어야 하는 것은 단지 환자의 건강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환자의 기밀에 대한 정보도 보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약이 투여되고 비교되고 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H교수의 연구 역시 연구 참여 환자들의 진료기록이 열람되고 환자들이 설문지를 작성하여야 하기에 참여 대상 환자들에게 연구목적과 내용, 의무기록 열람의 목적, 열람된 내용의 기밀유지 약속, 설문의 목적과 설문결과의 이용목적 등을 설명하고 환자들로부터 서면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환자들에게 이 연구에 참여하는 것은 순전히 자발적인 참여임을 명시해야 한다. 따라서 언제든지 자신이 연구에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참여를 중단할 수 있음도고지되어야 한다. 이러한 상세한 연구 계획과 설문지의 설문 내용, 피험자 설명문, 피험자 동의서 등이 임상연구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야 하고, 심사 후 연구가 허용되어야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
H교수가 이런 심의를 거쳐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위 사례는 H교수가 심의 받은 대로 연구를 수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환자의 동의를 받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 그것인데, 이것은 연구 프로토콜을 위반하는 처사이다. 만약 환자의 동의서를 받아 의무기록을 열람하고 설문도 작성했던 것이었다면, A원장이 난색을 표명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H교수는 연구윤리를 위반하고 있다. 그러므로 A원장이 이런 비윤리적인 연구수행에 협조하는 것은 환자의 기밀유지 의무를 저버린 처사일 뿐만 아니라 비윤리적인 연구에 가담하고 있는 잘못 또한 크다.
셋째, 연구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A원장의 이름을 논문에 넣어주고, 연구비 일부를 제공하는 것 역시 연구윤리를 어기는 행동이다.
환자의 동의를 얻어 제대로 연구를 수행했다 하더라도 A원장의 도움은 저자가 될 수 있는 기여가 아니다. 저자는 연구를 수행한 사람이 제일저자가 되고, 연구 전반을 관장하고 총괄한 사람이 교신저자가 된다. 집필하지 않았으나 연구에기여한 사람은 저자가 아니라 도움을 준 사람으로서 감사의 글에 언급되어야 한다. 논문의 저자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제대로 구분하고 기여도를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은 연구윤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려항목이다.
게다가 위 사례에서 연구비 일부를 제공하겠다는 H교수의 제안은 협조를 돈으로 보상하겠다는 생각으로서 환자의 기밀을 유출한 것에 대한 대가의 성격을 지닌 보상이다. 따라서 일종의 거래라고 하겠다. 따라서 환자의 정보를 돈으로 거래한 비윤리적인 행동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연구비를 사용하는 것은 애초 연구계획서에 계획된 대로 예산을 집행하는 것이 아닐 가능성 또한 높다. 따라서 정부 연구비를 임의로 변경하여 사용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것 또한 연구윤리상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행동으로 윤리적으로 비난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법률적 고찰>
의료법 제21조 제1항에 의하면, 의료인은 각 진료기록부, 조산기록부, 간호기록부 그 밖의 진료에 관한 기록을 비치하여 그 의료행위에 관한 사항과 소견을 상세히 기록하고 서명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의료법 시행규칙 제17조에 의하면, 진료기록부에는 ① 진료를 받은 자의 주소, ② 주된 증상, 진단결과, 진료경과 및 예견, ③ 치료내용(주사, 투약, 처치 등), ④ 진료 일시분을 기재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진료기록부를 열람할 수 있는 자는 환자, 그 배우자, 그 직계존비속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배우자·직계존비속 및 배우자의 직계존속이 없는 경우에는 환자가 지정하는 대리인)으로 환자의 치료목적상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의사는 이에 응하여야 한다. 또한 의사는 환자의 진료 상 필요에 의하여 다른 의료 기관에서 그 기록·임상소견서 및 치료경위서의 열람이나 사본의 송부를 요구한 때에는 진료기록부의 열람에 응하여야 한다.
의료인에게 진료기록부를 작성하게 한 의료법 제21조의 취지는 의료행위를 담당하는 이들로 하여금 환자의 상태와 치료의 경과에 관한 정보를 빠뜨리지 않고 정확하게 기록하여 이를 그 이후 계속되는 환자치료에 이용하도록 함과 아울러 다른 의료관련 종사자들에게도 그 정보를 제공하여 환자로 하여금 적정한 의료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하고, 의료행위가 종료된 이후에는 그 의료행위의 적정성을 판단하는 자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자함에 있다.(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 2001. 2. 22. 2000헌마604)
진료기록부의 열람권도 환자, 그 배우자, 그 직계존비속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배우자·직계존비속 및 배우자의 직계존속이 없는 경우에는 환자가 지정하는 대리인), 환자의 진료를 맡고 있는 타 의료기관으로 한정한 것은 환자의 인격 존중과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위 사례에서 H교수의 의무기록의 요구는 환자의 치료와 관련되지 않은 요청으로 비록 실명과 주소를 지우고 넘겨주더라도 환자의 사전 동의가 없는 이상 환자의 개인정보를 유출한 것이므로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