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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 김교준 선생 [金敎準, 1884 ~ 1965]은 1884년 4월 6일 박동의 자택(현 조계사 자리, 현 조계사 대웅전은 김교헌, 김교준 형제의 자택에서 사랑채 자리였다)에서 공조판서와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한 김창희(1844~1890)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김정집도 대사헌과 예조판서를 지내는 등 경주 김씨인 김교헌,김교준 집안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명문거족이었다. 집안은 재산도 많아 숙종으로부터 하사 받은 박동의 대저택 외에 말죽거리에 수십만 평의 땅을 가지고 있었다. 형제는 모든 가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치게 된다.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김교준에게 열 여섯 살 위인 형인 김교헌은 형이자 아버지였다. 김교준의 호가 ‘내원’인 것도 형인 김교헌의 호가 ‘무원’인 것의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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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준 선생은 한국 근대 양의학의 선구이며 대종교(大倧敎) 지도자이다. 한국 최초의 양의 양성기관인 대한의학교를 제1기생으로 졸업하였고, 그후 육군부위(副尉)에 임관되었으며, 이듬해 모교의 교관이 되어 1910년 국권피탈 때까지 군 의무사(醫務士)로 있으면서 정3품인 통정대부(通政大夫)로서 육군참령 3등군의장(陸軍參領三等軍醫長)까지 승진하였다. 나라를 잃은 후 관직에서 물러나 대종교 신자가 되어 1911년 지교(知敎)로 특별임명을 받고 배천지사(白川支司)의 전사(典事)로 일하였다. 1914년 상교(尙敎)가 되었는데, 1917년에 일제의 종교탄압으로 총본사(總本司)가 동만주 지린성[吉林省] 삼도구(三道溝)로 옮길 때 맏형이자 제2대 교주 교헌(敎獻)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선교에 노력하는 한편, 재만(在滿) 동포들의 질병 치료에도 힘썼다. 1938년 정교(正敎)가 된 후에 8·15광복을 맞게 되자 귀국하여 서울에 남도본사(南道本司)를 세우고 전리(典理)로서 활동하다가, 총본사가 환국해 오자 초대 전리 겸 도사교위리(都司敎委理:교주 권한대행)가 되었고, 1958년 사교로 승진하면서 도형(道兄) 호칭을 받았다. 1962년 4월에는 제5대 총전교(總典敎:교주)에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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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학사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대종교인 일산 김두종 (金斗鍾, 1896∼1988) 도형은 1910년 14세에 서울 휘문의숙(徽文義塾:현 휘문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의학과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휘문의숙을 졸업한 뒤 경도부립의학전문학교(京都府立醫學專門學校)에 들어가 학업을 마친 뒤 중국으로 건너가 내과의사로 병원을 개업하였다. 1936년 40세 나이에 만주 의과대학의 동양의학연구소에 연구원으로 들어가 학문연구를 다시 시작하였고 1945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광복이 되자 귀국하였다. 1947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사학(醫史學)을 강의하며 부속병원장을 맡았고 1957년 미국 존스홉킨즈대학 의학사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한국의학사를 연구하고 김규식(金奎植)이 창설한 대한적십자사의 전신인 조선적십자사의 초대보건부장으로 활약하며 부총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1960년 숙명여자대학교 총장, 과학사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1963년 성균관대학교 재단이사장을 역임하고, 1980년 학술원 원로회원이 되었다. 의학의 기술적 발전과 문화적 의의, 그리고 사상적 배경을 중심삼아 의학사를 서술하는 일에 전력하여 이 분야에서 길이 남을 금자탑을 세웠다. 한편, 서지학자로서도 각종 고서(古書)의 간행연대나 판본의 형태, 자체(字體) 등과 그 책에 붙어 있는 서(序)·발(跋) 등을 연구하여 《한국고인쇄기술사(韓國古印刷技術史)》를 펴냄으로써 서지학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일산 김두종 선생의 형은 임오교변으로 순국한 대종교 ‘순국십현’인 설도 김서종 대형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