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의 갈레온 선단은 세계를 지구촌으로 축소시킨 최초의 매개물이었다.” 필리핀 역사가 닉 호아킨이 한 말이다. “필립2세의 땅” 필리핀은 1565년부터 1815년까지 250년간 대서양 무역과 아시아-태평양 무역을 매개한 중심지였다.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바로크 예술이 아메리카 은괴로 가능했듯이, 마닐라-아카풀코 무역도 멕시코와 페루의 은괴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동남아의 허브 항구도시 마닐라는 중국 푸젠성의 항구인 아모이와 광둥에서 온 정크선단으로 득실거렸다. 100t에서 300t 급의 배들은 해마다 11월과 5월 사이에 자기와 비단 제품을 싣고 이곳을 찾았다. 이들은 파리안이라 불리는 차이나타운에 온갖 물건을 부리고는 아카풀코의 갈레온 선단이 실어올 은괴를 기다렸다. 스페인 사람들이 사는 인트라무로스(요새내 도시) 바깥에 있는 파리안에는 이미 1603년에 2만~3만명의 푸젠성 화인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 물건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의 카펫, 인도 보석, 벵골 침대보, 실론 계피, 자바와 수마트라의 후추, 말라카 향료, 캄보디아 상아, 일본 은제품도 취급했고, 이것들을 멕시코에서 온 상인들에게 팔았다. 수요가 컸던 도자기의 경우 1573년 두 대의 갈레온 선에 실린 규모는 2만2000점이었다고 한다. 마닐라는 중국을 위시한 아시아 제품을 팔았고, 아메리카의 은괴와 은화를 샀다. 코민은 250년간 마닐라 무역으로 약 4천만페소의 은화가 유입되었다고 했다. 쇼뉘는 200년간 아메리카가 생산한 은의 3분의1에 해당하는 4천~5천t이 동아시아로 유입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누구도 정확히 얼마가 흘러 들어왔는지 알 수 없다. 당시에 광범하게 퍼져 있던 밀무역의 규모가 공식 통계에 반영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과 마닐라 그리고 멕시코와 대서양을 잇는 무역 길에서 가장 중요한 세력은 멕시코와 중국의 상인들이었다. 스페인의 세비야 상인들이나 왕실은 식민지 독점무역 체제를 고수하려 했지만,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 밀무역을 근절시키려는 노력이 수차례 실행되었지만, 은괴를 빨아들이는 중국의 힘과 중국 제품을 이용해 큰 수익을 남기는 멕시코 상인들의 힘에 의해 계속 좌절되었다. 마닐라 무역을 대서양 중심 세계체제의 “외곽”이라고 설명하는 월러스타인의 해석은 불리한 논의를 회피하는 방법일 뿐이다.
“중국이 발산하는 강력한 시장의 힘 때문에 가능했던 여러 무역망의 연결에서 결정적인 상품이 바로 은이었다”고 플린과 히랄데스가 말했다. 마닐라는 이런 여러 무역망을 연결하는 중심고리 가운데 하나였다. 아메리카의 은은 아시아 상품을 매개로 큰 이윤을 남기는 멕시코 상인들 덕분에 엄청나게 빠져나갔다. 아메리카 은의 생산량에서 유럽 수출 분을 뺀 양은 연간 135t이나 되었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마닐라 밀무역에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1630년대 한 사제의 고변은 40만 페소의 무역 허용량에 200만페소(57.5t의 은)의 밀무역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스페인 왕실은 아메리카 은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또 자국의 비단산업이 위축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아메리카 백성들에게 중국의류를 입지 못하도록 하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은괴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필리핀과 페루의 거래를, 나아가 멕시코와 페루의 무역을 일체 금지시켰다. 하지만 왕실의 칙령에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세비야는 멕시코로부터 너무 멀었고, 마닐라의 경우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 /2.교환의 거대한 사슬 (1) 은이 바꾼 세계 ⑥갈레온 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