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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도가에서 살아나야 할 네 가지 마음이 있으니
나날이 신심이 살아나야 할 것이요 나날이 공부심이 살아나야 할 것이요 나날이 공심이 살아나야 할 것이요 나날이 자비심이 살아나야 할 것이니라
- 대산 종사 법어 제 6 회상편 6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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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심
도가에서 살아나야 할 마음 4가지가 있다. 이렇게 말하기도 하구요,
살아있는 종교, 또는 그 종교에 속해있는 사람이 어떤 마음이어야 하는가, 종교에 속한 사람이 살아나야 할 4가지 마음이 있다. 이렇게도 볼수 있습니다. 또 여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냐, 여러 가지 조항이 있지만 이 네 가지입니다. 결국 이 회상에 큰 일꾼이 되는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이 바로 이 네 가지입니다. 마음이 들어서 복도 짓고 악도 짓고 마음이 들어서 선연도 만들어내고 악연도 만들어 냅니다. 마음이 들어서 진급하기도 하고 강급하기도 하고, 마음이 들어서 깨닫기도 하고 , 해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큰 악업을 짓기도 합니다.
그러면 착한 마음이면 되겠느냐? 그것도 쉽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그걸 넘어서 이 네가지 마음이 필요합니다. 법문중에 40-50년 결실이요, 400-500년 결복이다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요즘은 기도문을 읽을 때나 어디 행사에 가서 사회자가 <원기100년>이라 칭하면 그 말을 듣고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원기 100년 ? 벌써 100년이야.... 원기 100년.이런 생각이 듭니다. 40-50년 결실이라는 말은 국내에서 그런 결실을 본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사실 100년 이내에 원불교는 어느 정도 결실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400-500년 결복이라는 것은 100년 이후에 세계에서 인증을 받고 그것이 어느 정도 꽃을 피워 나간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나가야 하는가. 오늘 이 마음 , 바로 이 네가지 마음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고, 잡으면 있고 놓으면 없어지는 이 기기묘묘한 이 마음이 큰 성공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큰 고통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 마음에 대해서 오늘 같이 한번 생각을 해 보고자 합니다.
살아있는 종교, 살아있는 집단, 살아있는 회사, 살아있는 가정은 마음이 살아있습니다.
마음이 죽어있는 곳은 곧 사그러듭니다. 기업도 구성원들이 마음이 죽어있는 기업은 어렵게 됩니다. 가정에서도 마음이 죽어있으면 어렵습니다. 한 개인도 희망도 없고 마음이 없으면 어렵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한 개인의 마음에 희망이 있으면 아주 생생합니다. 눈빛을 봐도 살아있고 말을 들어도 살아있고 기운을 봐도 살아있고 , 그 사람은 생생합니다.
네 가지 마음 중 첫째가 신심입니다.
신 : 사람의 말을 믿는 것이 신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최소한 항마위 이상의 성자입니다. 성자의 말씀은 평상심의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고 정성심 있는 마음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성자는 정성스럽고 바른 분입니다. 성은 바를 정과 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게 사실 주변에 별로 없습니다. 믿을 만한 규모의 은행도 무너지기도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그다음 정법입니다. 그다음 스승입니다. 그 다음 회상입니다. 무엇을 믿느냐? 이 네 가지를 믿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게 뭐냐면 진리를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진리가 우주 안에 편만해 있습니다. 그 진리를 깨친 사람이 성자이지요?
그 깨친 진리를 우리에게 내놓은 것이 법이고 그 깨친 진리를 실현하기 위해서 함께 모여서 일하는 곳이 회상입니다.
진리는 과거 이래로 계속 있어왔습니다. 그 진리를 손에 움켜 쥐어서 잡으신 분이 성자입니다. 성자도 다 다릅니다. 과거 선천시대의 성자는 시대와 민심을 따라 그 지역을 맡아오셨습니다. 예수가 맡은 지역, 부처가 맡은 지역, 그리고 시대와 민심에 맞추어 활동하셨지요.
그러나 새로 시대가 바뀌어서 세상이 하나되는 새로나온 성자가 있으니 그 분이 바로 대종사님이시다. 그래서 정산종사님은 대종사님을 주세불이라고 하셨습니다. 主世佛
신심의 핵심은 스승관이 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스승관 중에서도 대종사님이 주세불이라는 주세불관이 서야 합니다. 이 관이 선 사람이 비로소 신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신심은 마음을 정한 것입니다. 확신하는 것이지요. 결정하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결정하지 않고 흔들리는 그것이 바로 불신입니다.
불신이라는 것은 자기 주견을 내세우며 성자의 말씀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어떤 결정을 함에 있어서 대종사님은 어떻게 이것을 말씀해주셨나? 이 일을 대종사님이라면 어떻게 취사하셨을 것인가? 신심있는 사람은 대종사님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신심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판단 자기의 주견에 따라 결정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혹 中 혹 不中이다. 맞을 때도 있고 안 맞을 때도 있습니다.
주세불은 천지의 대기운을 받아오신 분입니다.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그 주세불에게 다 갑니다. 대종사님은 그런 운을 받고 나오신 분이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져서 원불교라는 말도 있기는 합니다.
원불교 역사를 하나하나 짚어보면 신기하게도 불가사의하게도 일이 되어집니다.
시대가 밝아져서 그러나? 내가 사심 없이해서 그러나? 아니면 국가가 운이 트나 하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대부분은 대종사님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 서서 이야기 하는 것도 주위의 많은 도움 속에서 이렇게 된 것 같지요. 부모님이 낳으시고 부모님께서 출가시키려고 천일 기도 하시고 해서 제가 여기에 있는 것 같지요 그러나 사실은 대종사님 덕입니다.
대종사님이 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내 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종사님이 다 짜신 각본에 따라 , 대종사님의 주체성에 맞게 거기에 맞게 계속 가고 있는 겁니다.
정산종사님은 이런 것을 일찍 알아보신 분입니다. [대종사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내가 맡아놓고 깨달을 수 있고 맡아놓고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겠구나, 대종사님이라는 분은 음계 양계의 대운을 다 타고 나오신 분이시구나. 새 주세불로 오신 분이시구나. 대종사님의 법은 새 시대에 딱 맞는 법이구나. 그래서 여기에 함께 하면 마치 천리마 궁둥이에 달라붙은 파리가 천리를 가듯이 우리가 쉽게 서원을 이룰 수 있고 쉽게 감히 내가 여래위에 가겠다는 원력을 품고 달려갈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을 정산종사님은 아신 것입니다.
여래위는 어떤 마음이냐 ?
여래위는 신심이 있습니다. 성위도 신심으로 뚫는 것입니다. 신심이 없으면 옆에서 귓속말로 살짝 건드리면 금방 넘어갑니다. 힘든 경계 하나 오면 바로 넘어갑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어찌 다행 이 주세불과 법을 만난 홍복자들입니다.
이런 어른 만났을 때 우리는 세세생생 이 어른과 인연이 되고 이 어른께서 하고자 하는 일을 합력하고 이것이 바로 나를 가장 크게 만드는 길이요 내가 행복한 길이요 이 세상에 제일 큰 일하는 길이다. 하는 생각...이것이 바로 신심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미국 유학 갔다오면 드는 병이 있습니다.
기라성같은 세상에 기라성 같은 멋진 학자들이 많이 있는걸 보게 되지요. 대종사님이 시골 산골 아저씨 같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종사님을 그냥 똘똘한 사람 중에 하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만큼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정산종사님 대산종사님 법문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어떻게 사람이 이런 말을 할수 있을까 하는 생각 드시지 않습니까?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사통오달이 되게 이렇게 체계적으로 합리적으로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 안드십니까?
그렇게 훌륭하신 분이 받드는 그 분, 또 그런 훌륭한 분을 만드신 분이 바로 대종사님이십니다. 그래서 대종사님뿐만이 아니라 역대 정산종사님 대산종사님 좌산상사님 경산종사님 역대 종사님들을 대종사님과 하나로 보는 마음, 그것이 신심입니다.
조금 크면 이 소리 저 소리 하고 자기가 보는 눈으로 뭐라고 뭐라고 합니다. 조금 크면 그럽니다. 항마위 정도 되면 좀 보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다 본건줄 압니다. 사실은 그것이 아니데 말이지요. 대종사님 같으신 분을 우리가 어찌 쉽게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사회적으로 영성이 있는 사람이 우리 회상에 와서 열심히 하면 그 사람이 큰 공덕이 있다고 했었습니다. 왜 그러냐? 보통 우리가 우리의 생각으로 대종사님을 좋아하고 받들다가
나보다 더 명성 있는 사람이 대종사님을 좋아하고 따르면 아, 내가 좋아하는 이것이 진짜 맞는거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그 한 사람의 공덕이 크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 선진님들은 대종사님 한 분에게 온 생을 다 바치신 분들입니다. 다 바치고 나니까 노예가 되고 괴로움만 남고 손해만 보고 후회만 남았느냐? 아닙니다. 가장 행복했다고 얘기하십니다.
2. 공심 (公 心)
그 다음 공심입니다. 신심은 스승관을 확립한 것이요 그 다음은 공심입니다.
공심은 생략된 말입니다. 중간에 益자를 넣어주어야 합니다. 公益心의 준말입니다.
공익심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이야기 하면 주인심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주인의 마음이다. 이게 공익심입니다. 공과 대비되는 말은 사(私)입니다. 일원상의 마음 자체가 공심입니다. 空心 公心입니다. 빈 마음에 바탕해서 공익심을 내자는 것이 마음공부입니다.
이 마음은 더 들어가면 사가 없습니다. 사가 없으면 엄청난 힘이 생깁니다. 천록이 생깁니다. 신기할 정도입니다. 사가 없이 기도했더니 위력이 나오고 사가 없는 어린아이는 엄마 가슴에서 젖이 나오고 사가 없는 도인은 돈 걱정이 없습니다. 사가 없으면 위력과 천록이 알아서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착각을 합니다. 내 노력과 정성으로써 얻어야만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더 훌륭한 사람은 내 정성으로써 얻는 노력도 있지만 하늘이 우주가 진리가 스승이 사은이 나를 도와주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위력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런 위력이 나오느냐? 어떤 사람은 왜 가는 곳마다 사람이 도와주고 일이 풀리고 하는 겁니까? 인과의 이치로 놓고 보면 무언가 지은 것이다. 무언가 준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받는 것이지요. 공심은 바로 주인심이요 주인심은 바로 교단관입니다. 세계일이 내 일이다. 세계일이 내 일이 되는 것, 이것이 공심이요 이것이 교단관입니다. 원불교 교단은 세계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개척해 나갑니다. 주인이 아닌 사람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주인이 아닌 사람은 여려 부류가 있습니다. 주인을 헐뜯는 사람, 비방하는 사람, 모른척 하는 사람 다양하게 있습니다.
묘합니다. 나보다 훨씬 높은 사람은 박수쳐줍니다. 나하고 비슷한데 박수를 받아? 상을 받아? 그러면 묘하게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그것이 있습니다. 어째 갑자기 그 사람이 안이쁩니다. 지인이 착한 일 하는데 안 이뻐집니다. 왠지 그건 잘하지만 다른 것은 아닌 것 같고 말이지요. 하나만 잘 못해도 탁 그 사람을 쳐내버립니다.
그 집단이 잘 되려면 부처님의 마음을 쓰는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그것이 공심입니다.
진짜 공심은 내가 괴롭고 내가 손해가 오더라도 살리는 것입니다. 보통 범부는 너좋고 나 좋고만 생각합니다. 공심은 내가 없다. 무아다. 사가 없다. 이런 정신입니다. 그러니까 나한테 손해가 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그 일로 칭찬을 받거나 박수를 받으면 그 일을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하다가 내가 손해를 보거나 괴로움이 오면 탁 접어버립니다. 그것은 공심이 아닙니다.
공심이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것이 공심입니다. 핑계가 없습니다. 조건이나 합리화가 빠집니다. 내가 괴롭고 손해를 보더라도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는 어머니처럼 내가 괴롭고 손해를 보더라도 전 교단을 위해서 아낌없이 내 놓는다 이것이 공심입니다. 이 세계를 위해서 내가 아낌없이 내놓는다 이것이 공익심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런 공익심 있는 성자들 공익심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인들이 착각하는 것이 종교인들만 세상일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완전 오해입니다.
훌륭한 과학자 한 분이 이 세상에 얼마나 공익을 주는데요,
훌륭한 시민단체 활동하는 한 사람이나 훌륭한 기업가 한 분이 얼마나 큰 일을 하는데요?
그것이 사은입니다.
우리는 알고보면 엄청난 사은의 은혜속에 살고 있습니다.
제선교우가 어느날 한의원에서 치료를 하다가 사은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침을 만들어준 사람, 침을 놓는 법을 알려준 사람, 책을 만든 사람, 가르쳐준 사람, 침 하나에 엄청난 사은의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글을 쓰고 판단하는 것은 알고보면 과거의 수많은 은혜 속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 많은 은혜를 입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 속에 살면서 그 은혜에 보은 하는 것, 그것이 공심이지요.
오직 나 하나? 너희들은 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 내가 잘나서 좋은 대학 나오고 내가 노력해서 공부해서 번 돈이니 내 맘대로 해도 됩니까?
그것은 공심이 아닙니다. 진짜 공심은 어중간한 공심과 다릅니다. 어중간한 공심은 할려다가 박수 안 쳐주면 확 돌아섭니다. 돌아서기만 하나요? 갑자기 불평 불만자가 됩니다. 냉소주의자가 되고 배신자가 되고 변절자가 됩니다. 공심이 빈 마음에 바탕한 공심이 아니면 하다가 상이 나오게 되고 하다가 멈추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합력을 안 해줍니다. 비합력자가 되는 것이지요.
공심이라는 것은 참여한다는 것이고 내가 나선다는 겁니다. 앉아서 말로 글로 하는 사람은 공심 아닙니다. 자기의 상처를 달래는 합리화일 뿐입니다.
왜 그러냐? 자기라는 것이 들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무아가 되면 참공심이 나오고 나가 비어버리면 전체가 다 하나로 보입니다.
공심있는 사람은 손님이 아닙니다. 방관자가 아닙니다. 박수만 쳐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공심 있는 사람은 뭔가 하나라도 스스로 찾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찾아서 개척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인입니다.
원불교가 초기 교단이어서 지금 천지개벽공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코가 석자입니다. 좋은 세상이지요. 먹을 거 많고 놀러갈 데 많고 자기 쾌락과 안락을 취하기 좋은 세상입니다.
공심이 있으면 머리가 안 좋아도 지혜가 개발됩니다. 공심이 있으면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창의성이 나옵니다. 신기합니다.
공심이 있는 사람은 결국 지도자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공심 있는 사람에게 박수쳐주는 것이 지자본위요 그 공심있는 사람에게 합력해 주는 것이 공도자 숭배입니다.
중생들은 공도자를 씹습니다. 지자본위보다 우자가 큰소리 빵빵 칩니다.
그런 집단은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정말 공심있는 사람을 앞세우고 공심 있는 사람에게 합력하고 그 공심있는 사람과 함께
공익심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짜 부처님의 마음이고 여래의 마음입니다.
부처님은 지공무사의 일원상의 마음으로 오직 공을 위해 사시는 분이십니다.
대종사님은 가면 갈수록 공심이 지극했다고 하십니다.
교도님들을 보면 한 때 뜨거웠다가 식어진 분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마음이 아니고 정체된 마음 죽은 마음이지요. 그건 부처님 마음이 아닙니다. 이 법을 공부할수록 마음이 살아나게 되어있습니다. 물론 하늘에 구름이 한번씩 끼듯이 우리도 살다보면 아닌 마음도 나고 나태심고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입니다. 그것은 내 공부를 탄탄하게 해주는 자산이 되는 것입니다. 공심이 있으면 그럽니다.
공심에 무슨 학력이 필요합니까?
오늘 아침 밥 먹는데 그럽니다. 대학원대학교에 신문, 방송반 , 무슨무슨 반 등이 있는데 그 중에 제일 힘든 곳이 신문반이라고 합니다. 취재를 가야지 글을 써야지 편집을 해야지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제일 힘드니까 선허교우가 있던 학년은 사람을 모집하는데 방송쪽으로는 많이 간다고 합니다. 자기 목소리도 나오고 자기다 드러나니까 말입니다.
예전에 수요 공부방에 타이핑 하는 일을 청년들이 맡아서 했을 때입니다. 글을 올리는데 사람들이 리플도 잘 안 달아줍니다. 일을 정말 열심히 하는데 대중의 반응이 없습니다.
그런데 엠씨하면 서너시간이면 됩니다. 타이핑은 정리까지 해야 하니 길게는 아홉시간 열시간 걸립니다. 뉴스에는 얼굴이 나오지요. 그래서 엠시는 웬만하면 시키면 다들 합니다. 그러나 뒤로 음덕을 쌓는 타이핑은 잘 안하고 지원자가 별로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학과 대학원도 신문반은 별로 지원자가 없습니다.
교당도 똑같습니다. 바자회하는데 손님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교도인지 손님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그건 공심이 아닙니다. 내 일같이 생각해야합니다. 그게 공심입니다.
내가 소속된 이 교당에서도 손님같은 사람이있습니다. 다 그런거 아니고 딱 한사람 있습니다. 제가 누구라고 말은 못하겠습니다.
공부삼아 공심을 길러보는 것이 좋습니다. 에라 한번 해보자.
왜냐하면 신기하게도 연습하면 점점 되는 이치가 있습니다. 신심도 연습삼아 한번 자기가 어색할 정도로 한 번 내보십시오.
공심도 내가 무리한다 싶을 정도로 한 번 해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묘하게 못느껴본 기쁨이 있습니다.
봉사를 잘 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면 그 분들의 대답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봉공회 한 사람이나 자원봉사 한 사람이 대부분 똑같은 대답이 나옵니다.
어떻게 자기를 참고 그렇게 다른 사람 위해서 봉사합니까? 하고 물으면
<사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왔는데 하다보니 내가 기뻐서 했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봉사를 안 해본 사람은 내가 손해본다고 생각하고 피곤하고 부담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봉사를 해본 사람은 내가 더 기뻤다는 것입니다. 내가 더 받았다고 얘기합니다. 주었다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게 공통점입니다.
갑자기 큰 것은 어렵겠지요. 작은 것부터 해보십시요.
우리 단에서 공심을 내봅시다. 꼭 단장이 전화해야 합니까?
단원이 먼저 전화하면 안됩니까? 꼭 대중공양을 식당에만 가서 해야 합니까? 공부방에 빵하나 공양해도 공심입니다.
공심이 없는 사람은 여기저기 가서 대접받으려고 합니다. 여기저기 가서 손님입니다.
여러분, 손님은 복 까먹는 사람입니다. 주인은 복을 쌓는 사람입니다.
손 발 죽으면 썩을 것 뭐하러 아끼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으면 금방 태우던가 묻어버리는데 그렇게 아껴서 뭘하려는지요. 공심은 주인의 마음이요 교단관입니다. 교단관이 다 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공부심
세 번째 공부심입니다.
진정한 공부심은 성리에 바탕한 공부심이요 삼학의 공부심이라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은 공부심이 얼마나 살아 나십니까?
아까 그 신심과 공심이 더 탄탄하게 살아나려면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를 해야 그 신심이 까라지지 않고 공부를 해야 공심이 증장됩니다.
이번에 엘지 인화원 사장이 이야기 하시는데 자기 멘토 교수가 한 이야기를 소개해주었습니다.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열정은 아는 데서 나온다고 합니다. 알아야 열정이 나온다는 겁니다.
한 때 객기로, 분위기로 열정을 내는 것은 언젠가는 까라집니다. 알면 열정이 안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같이 텅 비어서 원만한 그 마음이 수양의 마음입니다. 부처님 같이 원만한 지혜가 내 안에서 솟아 오르도록 하는 것이 공부심입니다. 부처님같이 마음을 실지에 써야 합니다.
원불교에 들어오니까 공부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마음공부 도학공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원불교를 다니는데 10년 20년 30년을 다녔는데 변화가 잘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심은 있습니다. 그런데 변화가 안됩니다. 그것은 바로 공부심 문제입니다.
공부심은 생활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을 생활속에 경계속에 쓰는 것이 공부심입니다. 내가 교당을 몇 년 다녔고 신심도 있고 공부심도 있다고 생각을 하지요.
그런데 경계를 당하면 팍팍 무너집니다.
제가 잘 무너지는 경계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착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일을 하는데 불분명하게 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헛돈이나 헛 시간이나 분노가 나고 얽히고 섥히고 그러면 제가 막 화가 납니다. 어떤 회의를 하거나 얘기를 하면 정확하게 확인하는 습관이 생깁니다. 그런데 누나도 교무님이십니다. 누나를 만나면 항상 티격태격 합니다.
이번 명절에 아버지가 호스피스 병원에 계셔서 금년에 마지막으로 사가에 모시고 간다라는 생각으로 승합차를 가지고 갔습니다. 누나가 집에 오려나 안 오려나 물었습니다. 그런데 대답이 두루뭉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래서 간다는 거여 안간다는 거여? 했더니 누나가 너는 왜 그렇게 따지냐고 뭐라고 하십니다. 기린교당에 계시는데 익산 가는 길에 같이 간다거나 아니면 기도식을 할 때 같이 할지 말지 그런 결정을 하기위해서 묻는 것인데
누나는 대충 말해놨으니 이 말정도 하면 네가 알아듣지 않겠느냐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래저래 물으니 저보고 너무 깐깐하다고 합니다.
내가 확인하려는 마음이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었구나.
저에게 외부에서 중매해달라고 뭔가 부탁이 옵니다.
중매를 하려면 자기의 조건을 먼저 빨리 명확히 내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조건을 명확하게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잘 맞는 중매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자기 조건이나 원하는 바를 두루뭉술하게 얘기합니다. 그러면 저는 또 확인합니다. 그래서 급여는? 근무조건은? 그 사람은 나이는 몇 살이고 어디 살고 하고 자꾸 묻게되지요. 그래야 소개를 하지요.
제가 자꾸 이 경계에 무너집니다. 왜 이 경계에 무너지나 했더니 두루뭉술해서 손해본 기억들이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비워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도 그럴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이해 연구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온전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공부심이 없는 사람은 말을 하면 그 안에 항상 뾰족한 촉이 있습니다. 공부심이 있는 사람은 무언가 그 안에 따스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혜가 됩니다. 묘합니다.
내가 말 한 마디 하고 행동 하나 해도 그 안에 공부심이 있으면 묘하게 내가 차분해지고 상대에게 은혜가 됩니다..
얼음이 얼려면 계속 차가운 기운이 있어야 얼음이 됩니다.
공부심이 있으면 내 안에 업력이 보입니다. 내가 피해의식이 있구나 내가 두루뭉술한 사람들에게 받은 피해의식 때문에 자꾸 내가 확인하는 병이 있구나 하고 발견하게 되듯이 공부심이 있으면 습관의 업력이 보인다. 그래서 그것이 유무념으로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여래위여도 공부심을 놓으면 보통 사람과 같습니다.
출가위 이상이면 불퇴전입니다. 출가이상은 공부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심이 자연 챙겨지는 것이다. 상황이 바뀌고 주변이 바뀌면 거기에 맞은 취사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공부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부심 있는 사람이라야 영생을 책임질 수 있다.
공부심도 가만히 보니까 아는 만큼 공부를 더하려고 합니다. 모른만큼 공부를 더 안 합니다.
아는 만큼 배우려고 하고 아는 만큼 재밌고 아는 만큼 더할려고 합니다. 모른만큼 재미없고 모른 만큼 공부 안하고 모른만큼 더 안하려고 합니다. 신기합니다.
거꾸로 되어야 하는거 아닙니까? 왜 아는 사람이 더 되는겁니까? 제게 알려주세요. 왜 모르는 사람이 더 배워야 할텐데 모르는 사람이 더 공부방에도 안오고 모르는 사람이 더 훈련 간다고 하면 빠져버리고 합니까? 그 사람이 더 열심히 해야 하는거 아닙니까?
나 진짜 알려주십시오. 몰라도 하라고 하는대로 하는게 신심입니다. 그래서 신심이 중요합니다. 신심이 있으면 내가 몰라도 하게 되어있습니다. 모르니까 안하고 싶은 마음이 더크겠지요. 알수록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생기겠지요.
우리교당에 무결석 한의사가 3명이 있습니다. 10년간 무결석입니다. 신기할 정도입니다. 신이 있으면 마음이 정해집니다. 정하면 마음이 요란하지 않습니다. 그냥 가면 됩니다. 갈까말까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있으나 없으나 정해버렸으면 가는 겁니다. 모르면 알려고 하고 배우려 하는 것이 공부심입니다. 회사가 잘되서 못오고 안되서 못오고 집안에 뭔일이 있어서 못옵니다. 언제 공부합니까? 그래서 힘들어도 괴로워도 공부심을 놓지 않는 것이 그것이 신심입니다.
공부심이 없으면 자기가 이중적인 삶이 되고 자기가 자기가 미워집니다. 공부심이 있으면 자기가 이뻐집니다. 공부심이 있으면 경계야 와라 이럽니다. 고의로 경계를 찾아다니기도 합니다. 마음이 살아나면 그렇습니다. 공부심이 없는 사람들이 주로 내세우는 것이 껍데기입니다. 교당 몇 년 다녔다. 교당에 얼마 냈다. 어디 교무님 안다. 이런 이야기 하고 다니면서 공부심 있는 사람을 공부심 없게 만듭니다.
우리교당에 마음이 제일 살아있는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저는 허대신님을 꼽습니다. 눈에 나는 원불교가 좋아 죽겠소라고 써있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교화하려 하고 마음이 지금 부처님 마음입니다. 공부심이 살아나면 그냥 기쁩니다. 고생? 문턱 넘듯이 넘는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 아쉬운 것이 실지 공부입니다. 공부를 위한 공부만 합니다. 장학사업을 하는데 인재양성을 위한 장학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지로 인재 양성에는 투여가 안됩니다. 교무를 하려면 할 것 많지요. 꽃꽂이도 배워야 하고.. 피아노도 배워야 하고 ..그런데 교무가 되는 진짜 공부도 해야지요. 일원상을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만 추모하고 그 형식만 따릅니다.
공부심은 생활관입니다. 그 사람의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느냐 일과를 보면 되고 경계에서 그 사람의 마음을 보면 됩니다. 아침에는 수양시간을 갖는지 참회반성시간 갖는지 경계마다 마음공부를 챙기는지... 이게 공부심입니다. 공부심이 없는 사람은 불만이 많습니다. 공부심만 가지고 나가면 100년이든 1000년이든 성불은 날짜를 받아 놓은 것이나 다름 없다고 했습니다.큰 경계가 왔을 때 공부심이 살아나는 사람도 있고 공부심이 가라앉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 신심의 문제입니다.
진리가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선물을 주려면 먼저 재앙을 살짝 줍니다. 복을 주려면 재앙을 주고 나서 복을 줍니다. 그런데 그 시험에 전부 넘어갑니다. 그래서 마음의 그릇이 크고 확실하게 타력을 움켜 쥐어야 합니다. 그릇이 작으면 자기 꾀에 자기가 속아버립니다. 자기꾀에 자기가 넘어갑니다.
공부심이 있으면 다 은혜롭게 보입니다. 그리고 안보이는 것도 보입니다. 공심으로도 보이지만 공부심으로도 보입니다. 공부심이 없으면 힘들고 약한 자들이 보이지 않고 시기 질투심이 많이 납니다. 누가 잘하면 기쁨이 일어나는 것이 공부심인데 잘하면 배가 아린 것이 공부심이 없는 마음입니다.
4. 자비심
자 : 누군가가 열심히 잘하면 박수쳐주고 칭찬하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비: 형제간에 다투고 부정부패하고 싸우고 하는 것을 보면 저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까 하는 것이 비심입니다.
나를 미워하고 나를 놓아버려도 미워하지 않는 마음이 진짜 자비심입니다. 부처님은 자비심덩어리입니다. 기독교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그런데요, 이 자비심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막연한 덕을 자비심이라 여기면 안됩니다.
어떤 스님이 관장하는 공원이 있었습니다. 풀이 막 자라니까 사슴이 와서 풀을 먹습니다. 스님이 밑에 시자한테 몽둥이로 사슴을 쫒으라 합니다. 시자가 없으면 자기가 모둥이를 들고 쫏습니다. 주변사람이 이것을 보고 시비합니다. 자기가 기르는 것도 아니고 저절로 나는 그 풀좀 사슴이 먹었다고 저렇게 무자비하게 사슴을 내쫒느냐..
그래서 어떤 사람이 용기내어 스님께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까지 하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사슴을 살리려고> 그러셨다고 합니다. 사슴이 자꾸 공원에 내려와 풀을 먹다보면 사람 근처에 드러나게 되는 사슴은 언젠가는 사람손에 죽게 될거기에 일부러 사람들 손을 타지 않게 하려고 그랬다고 하십니다. 무자비의 자비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혼내고 회사에서 직원을 혼내고 교무님이 교도를 혼내고 대종사님이 제자를 혼을 냅니다. 칭찬이 큰 힘이 될수도 있지만 칭찬이 큰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역대 성자들은 이 자비심으로써 인간을 대합니다. IS가 저렇게 세계에서 테러를 하는데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비심이 없는 것입니다. 내 코가 석자인거지요. 나 놀러 다니고 나 편하면 좋다? 자비심은 그런게 아닙니다. 우리 교도중에도 어려운 사람이 있고 , 교단에도 백년 사업이 있고, 교당에도 학사 사업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모른 척 합니다. 이건 자비심이 아닙니다. 자기것에 걸린 마음은 자비심이 아닙니다 . 자비심이 많으면 덕화가 만발하고 인천대중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큰 강에 수많은 고기가 모이고 큰나무에 새와 벌레가 와서 살 듯이 자비심이 있는 부처님에게 인천대중이 몰립니다.
이 네가지를 하나로 묶어버리면 그게 뭐냐, 바로 서원입니다. 이게 바로 여래의 마음인데 이걸 다른 말로 표현하면 원력입니다. 좋은 학점 집한채 좋은 자녀 이런 것은 개인 가정에 대한 원이고 여래의 원은 이 세상에 대한 원입니다. 네 가지 마음이 하나로 엮어지면 그것이 바로 여래의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 있을 수 있습니다. 이번 생애 항마만 가면 좋겠다. 출가는 갈 수 있을까?
오늘 그 서원 바꿔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서원도 여래가 되는 서원과 바꾸지 말아라! 어떤 경계가 와도 어떤 무엇이 와도 여래가 되는 서원을 버리지 마십시오.
우리 교당도 나날이 때때로 신심이 살아나고 공부심이 살아나고 자비심이 살아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보물같은 사람입니다.
어떤 한 단체를 보면 선도자 그룹이 있고 저 아래 남이 뭐 하면 발목잡고 문제 일으키는 집단이 항상 있습니다. 하물며 벌도 이런식으로 그룹이 나누어 지기도 합니다.
제가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불교를 만나기 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죄 안짓고 살자...상위 하위 40% 말고 60% 중간에 살자라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삽니다. 그런데 원불교믿다보니 앞 선두그룹에 들려고 하고 신심이 생겨서 공부 하려고 하고 우리 스승님들은 이 공부를 하신거구나 하고 내가 이렇게 바뀌고 있구나 하면서 기뻐합니다. 자비심을 억지로라도 내보니까 <야 이런 재미가 있구나 하면서> 선도자 그룹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한 집단이 아래쪽 집단이 힘이 세냐 아래쪽 집단이 힘이 세냐에 따라서 중간 60%가 위나 아래로 물이 듭니다. 아래 20%가 힘이 세면 이 60%가 아래의 집단과 같아지기도 하고 위20%가 힘이 세면 위 20%와 같은 집단으로 성격이 바뀝니다.
우리 교당은 아래 20%는 없으면 좋겠고 60%가 다 선도자 그룹으로써 이 회상의 주인으로써 살고 모두 여래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교당에서 1명이라도 여래위가 나오면 좋겠습니다. 이 생에 아니면 다음생이라도요.
손 한번 들어봅시다. <나 여래위 되겠다>
사람들은 신기하게 자기가 말한 대로 되어가게 되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묘하게 그렇게 합력이 되고 진리가 묘하게 그렇게 도와줍니다.
여래위 되겠다고 저랑 약속합시다. 엄지손으로 도장 찍었습니다. (대중들 손들고 교무님과 도장 짝음)
감사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글로 읽는 설법은 또 다른 맛이나네요~ 이걸 쓰느라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 하셨을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