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박일선입니다.
저 의 세계 배낭여행기 카페를 방문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카페는 저의 세계 배낭여행 글과 사진을 올리는 곳입니다. 1998년부터 현재까지 통산 약 71개월 동안 세계 100여국 배낭여행에 보냈습니다. 지금까지 여행한 곳을 연도 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1998년 일본 1개월
- 1999년 중국 4개월
- 2000년 중앙아메리카 2개월
- 2003년 중앙아메리카 2개월, 멕시코 2개월
- 2003년-2004년 남아메리카 11개월
- 2005년 인도, 네팔,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9개월
- 2006년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3국, 터키, 그리스,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6개월
- 2007년 몽골, 시베리아 4개월
- 2008년 북아프리카, 중동 4개월
- 2009년 남아메리카 1개월, 동아프리카, 남아프리카 7개월
- 2010년 카리브 해 2개월, 중국 신장성, 남서부 40일
- 2010년-2011년 서아프리카 4개월
- 2011년 알래스카 1개월
- 2011년-2012년 동남아 6개월
- 2013년 호주-뉴질랜드 4개월
아래 지도에 지금까지 여행한 지역을 대강 표시했습니다.
이제 남은 여행은 유럽뿐인데 2014년에 할 예정입니다. 그 외에도 캐나다와 미국 여행을 좀 더 해야겠고 아프리카도 이런 저런 이유로 못가본 나라들을 가보기 위해서 한 번 더 여행을 할 생각입니다.
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은 박일선, 한자로 朴一善 (密城 朴氏, 忠憲公 派, 密城君 朴陟), 영어로는 Elson Park으로 표기합니다. 조상님 고향은 경기도 이천이지만 (백사면 송말리, 조부님 朴庸勳) 저는 서울 근교 덕소에서 1940년에 태어나서 4살 때부터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서울을 고향으로 생각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이천이 고향입니다.
저는 외국에 대한 관심이 남달리 강했던지 어릴 적부터 외국 구경을 해보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 초등학교 때 방바닥에 배를 깔고 들어 누어서 세계지도를 보면서 세계 여행을 하는 공상의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사정은 외국 구경을 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 때였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무슨 청소년 국제대회가 일본에서 열렸는데 한국대표의 일원으로 나가는 시험에 저희 고교 대표로 뽑혀서 나갔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 고교 대표면 시험에 통과하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이니 동경에 가면 당신 친구들을 찾아봐 달라고 부탁하겠다고 하셔서 드디어 꿈에 그리는 외국여행을 해보나 생각했는데 불행이도 시험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시험은 영여회화 인터뷰였습니다. 당시 영어회화는 제법 한다고 자부했는데 (중3부터 서울 조선호텔 앞에 있던 ELS란 영어회화 학원에 다니고 고2 때는 서울시내 소위 일류 고교에서 영어를 잘한다는 학생들이 모인 Echo Club이란 영어토론 모임 활동도 했습니다. 인터뷰의 처음 두 질문 "What is the population of Korea?"와 "What is the size of Korea?"에 머뭇거리면서 대답을 못하고 그것으로 인터뷰는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간단한 질문에 대답을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지만 불행이도 전에 한국 인구와 면적을 영어로 말해본 적이 없으니 즉석 번역을 해서 대답을 해야하는데 한국어 숫자와 영어 숫자는 단위가 달라서 금방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간단하지만 너무나 중요한 질문을 미리 준비를 못한 것이 큰 실수였습니다. 두고두고 후회가 되는 인생 실패의 경험이었습니다.
외교관이 되면 외국 구경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릴적부터 알았고 (중2 때 장래희망 난에 "직업 외교관"이라고 기입한 기억이 있음) 고1, 2 때는 학교 공부는 뒷전으로 밀어두고 외교관이 되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이 된 외국어 공부에 (영어와 불어) 몰입했습니다. 고2 어느 학기에는 학교 성적이 반에서 49등까지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고3에 되면서 대학 입시준비에 전념하면서 성적이 올라서 1959년 서울대학교 사대부고를 졸업하고 그해 처음으로 생긴 서울대 외교학과에 입학해서 외교관이 되는 문턱에 다가 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대학을 졸업한 1965년부터 (재학 중 학보병으로 1년 반 군 생활을 하고) 여러 해 동안 외교관이 되는 관문인 외무고시가 없어져서 외교관이 되는 꿈은 접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신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났습니다. 1966년 무슨 공부를 하겠다는 뚜렷한 목표도 없이 도미해서 Utah State University,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University of Utah에서 MBA, 전자공학, 통계학, 컴퓨터 공학을 전전하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외교학이나 정치학 공부를 했더라면 박사학위를 땄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 공부에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새로 발견한 컴퓨터 공학에 제일 매력을 느끼었습니다. 결국 1969년부터 2001년 까지 미국 컴퓨터 업계에서 일을 하면서 Computer Sciences Corporation (소프트웨어 개발, 데이터베이스 관리 11년, LA), TeleVideo (전산 관리, 소프트웨어 전략 담당 임원 7년, San Jose), Novell (제품 마케팅 10년, Utah와 서울), NetScaler에서 (아태지역 영업 담당 2년, San Jose) 일을 했고 1995년부터 1998년까지 4년 동안은 Novell 한국지사에서 (부사장) 일하면서 30여 년 동안 잊어버렸던 한국을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IT 산업 30여년 (1969-2001) 역사를 거의 모두 경험했는데 특히 미국 IT 산업의 메카로 불리는 캘리포니아의 Silicon Valley와 (San Jose) 한때 제2의 Silicon Valley라고 불리었던 유타 에서 보낸 20여년은 정말 신나게 일을 한 시기였습니다. 특히 TeleVideo와 Novell은 세계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했던 제품을 가졌던 회사라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던 회사였습 니다. Novell에서는 NetWare Lite이란 세계적으로 큰 각광을 받던 제품을 책임적으로 탄생 시키는 소중한 경험도 했습니다. 외국 구경을 하고 싶어서 원했던 외교관이 되었던 것보다 더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합니다.
그 동안 외국 여행을 많이 해보긴 했지만 모두 업무에 관련된 여행이었고 사는데 바빠서 옛날에 꿈이었던 배낭여행은 (김찬삼은 나의 롤 모델) 꿈도 못 꾸어봤고 흥미조차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세계 배낭 여행자들이 제일 많이 사용하는 여행안내서 Lonely Planet을 알게 되었고 (한국에서는 "론리"라고 부름) 그로 인해서 옛날 꿈이 되살아 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98년부터 직장 생활을 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배낭여행을 하게 되었고 (일본, 중국, 중미) 2001년에 9.11 사태로 "자의반 타의반"의 은퇴를 하게 되면서부터 배낭여행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늦게나마 옛날 꿈을 다시 되살려서 이루어 가고 있으니 천만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주로 오지로 여행을 했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앞으로도 여행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올해 호주-뉴질랜드 여행은 여행 방법을 좀 업그레이드 시켜서 배낭여행 대신 자전거 여행을 했습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배낭여행을 하면서 자전거 여행을 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남미,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등등) "바로 저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혹시 내세가 있다면 그때는 꼭 해보겠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번 시작은 해볼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작했다가 못하겠으면 그만두면 그만이니까요. 시작했다가 그만두는 것이 시작조차 안하는 것보다는 나중에 후회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호주와 뉴질랜드 여행 그리고 내년에 하려고 하는 유럽 여행은 경비가 많이 드는 여행이라 자전거 여행으로 경비를 줄여보겠다는 것도 또 다른 이유입니다.
작년 8월에 미국 딸네 집에 갔을 때 자전거 광인 사위의 도음으로 딸이 옛날에 쓰던 산악자 전거를 개조해서 한국으로 가져왔습니다. 작년 7월에는 동대문 전철역에서 3년 째 세계 자전거 여행을 하고 있는 미국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그 젊은이는 지금까지 만났던 자전거 여행자와는 달리 짐을 최경량으로 가지고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자전거 여행자들의 짐 무게는 패니어라고 불리는 자전거 여행용 가방과 짐받이를 포함해서 약 30kg인데 이 젊은이의 짐 무게는 놀랍게도 7kg 정도였습니다. 생각 끝에 저는 이 젊은이의 최경량 여행 방법을 택하기로 결정하고 인터넷을 통해서 최경량 자전거 여행에 관한 연구를 하고 저도 짐 무게를 줄이기 시작해서 호주-뉴질랜드여행을 7.7kg 짐으로 시작했습니다. 여행 중에 캠핑하는 것을 포기하면서 캠핑도구를 한국으로 보내서 짐 무게는 5kg 정도로 줄었습니다. 호주-뉴질랜드 여행을 한 자전거 무게가 11.6kg인데 내년 유럽 여행을 할 때는 약 2kg 정도 더 가벼운 자전거를 구입할 생각입니다.
결론적으로 호주-뉴질랜드 여행은 생각했던 만큼 자전거를 많이 타지는 못했습니다. 10,000km를 계획했는데 대강 2,000km 정도 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전거 여행의 기분은 충분히 즐겼고 앞으로 할 자전거 여행에 큰 도움이 될 경험을 해서 만족입니다.
2003년 여름에 부부만 영주 귀국해서 현재 분당에서 살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한국 국적도 회복해서 명실 공히 다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습니다. 출가한 딸은 (응급의학 의사) 대학 때 만난 사위와 (일본-중국 4세, 정형외과 의사) 유타 주 솔트레이크 시티에 살고 있고 (손녀 2, 손자 1) 큰 아들은 (가정의학 의사) 샌프란시스코에, 작은 아들은 (UC Davis 사회학 박사 과정) 샌프란시스코 근교 오클랜드에 살고 있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잘 살고 있어서 저는 여행에만 전념할 수 있어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집사람도 한 동안 저와 함께 배낭여행을 했으나 (일본, 중국, 남미) 수년 전부터 손자 손녀들 뒷바라지에 매달려서 제가 여행을 할 때는 주로 딸네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여행을 안 할 때는 산을 오르거나 달리기를 합니다. 산은 주로 한국 산과 미국 캘리포니아와 유타 주에 있는 산들을 올랐고 남미 여행 중에는 안데스 산맥에 있는 Inca Trail, Torres del Paine, Cordillera Blanca 산들과 베네수엘라와 가이아나 국경에 있는 Roraima 산 트레킹을 했고 네팔 여행 중에는 Everest Base Camp와 Annapurna Circuit 트레킹을 했고 몽골 여행 중에는 Altai 산 트레킹을 했습니다. 아프리카 여행 동안에는 아프리카 최고봉인 Kilimanjaro 산 중턱까지 트레킹을 했습니다. 정상을 오르는 산행보다는 산 분위기에 빠져서 산길을 걷는 산행을 더 좋아합니다.
달리기는 여행을 안 할 때는 항상 하는데 지금까지 풀 마라톤을 12번 완주했습니다. 그중 여섯 번은 미국에서 (첫 번째는 2000년 미국 Columbus, Ohio 마라톤이었고 그 후에 뉴욕, LA, 나파밸리 등) 네 번은 한국에서 (2004년 가을 춘천 마라톤, 2006년과 2007년 봄 서울 국제마라톤, 2008년 가을 서울 국제마라톤), 그리고 두 번은 중국에서 했습니다 (2010년 가을 북경 마라톤, 2012년 가을). 제일 빠른 기록은 2001년 미국 나파밸리 마라톤의 4시간 11분이었습니다. 숙원이었던 보스턴 마라톤 대회 참가를 못해보고 작년 상해 마라톤을 마지막으로 풀 마라톤은 더 이상 안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몸이 더 이상 따라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아직까지는 즐겁게 뛸 수 있는 하프 마라톤만 (21km) 뛸 생각입니다.
이것으로 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2013년 5월 마지막 수정)
2009 년 여름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Great Zimbabwe 유적에서
세계 배낭 여행자들이 제일 많이 사용하는 여행안내서 Lonely Planet
유일한 여행 기념품으로 사는 마그넷
1983년 주부생활 잡지에 실렸던 이 기사에 나온 한글 워드프로세서는
후에 한글과 컴퓨터 사의 아래한글의 모체가 되었다
첫댓글 여기 빠진이야기가 있는데 Tele Video 인가 어느회사에 있을 때 수백만불 주식을 받았는데 그회사를
퇴직 하고서 공부를 더하려고 주식 일부를 팔아 은행에 예금하러 갔더니 그렇게 큰돈이 입금되기는
처음이라며 은행이 발칵뒤집혔다는 거였고 그얼마 후에 그회사가 망하는 바람에 나머지 주식은
깡통이 되었지만 미리 팔았던 것이 효자노릇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