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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검자 기독교 17.6%, 천도교 11.8%, 유교 3.6%, 불교 1.1%, 무종교 47.7%. 미상 20%
교역자 기독교 244, 천도교 125, 불교 120 (기독교인구 비율 1.5%)
여성 총471명중 여성 309 (65.6%)
진압을 준비하는 경찰들
기마병 동원
체포되어가는 여성들
체포되어 끌려가는 학생
만세시위중에 끌려가는 시민
학살의 현장
학살과 방화의 모습
피묻은 겉옷과 저고리
눈을 가리고 재판장으로 이송하는 사람들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사람들
작두로 목을 자르는 일본군의 만행
조선인을 묶어 총검으로 살해하는 일본군
조선인 처형
⑷ 기독교적 의의
① 성서적 신앙으로 만세시위를 했다. 교회는 만세 운동 중 지킬 수칙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3시 기도, 주일금식, 매일성경읽기(월 사10, 화 롐12, 수 신28, 목아5, 금 사59, 토 롬8)
② 자유, 정의, 정직에 대한 기독교 본질이 일제의 압제에 순응할 수 없게 했다.
③ 교회의 에큐메니칼적 결속력은 운동의 전국조직을 빠르게 했다.
④ 삼일운동은 민족문제를 앞두고 종파를 넘어서 타종교인들과 연대하였다.
⑤ 교회의 민족해방과 독립참여는 겨레의 소망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남궁억
⑥ 삼일운동은 반제국주의, 반파쇼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세계사적 과제와 강한 연대를 지니고 있었다.
⑸ 선교사들의 관여문제 ① 삼일운동 이전까지 서구선교사들은 친일적이었고 기독교 민족운동가들과 대립되는 입장을 강했다. 선교사들은 정교분리 정책을 내세우며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고 교회가 민족운동에 말려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했다. ② 그러나 삼일운동과정에서 나타난 일제의 만행과 기독교 탄압에 대해서 선교사들은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는 수원 제암리 사건의 사진을 찍어 〈꺼버릴 수 없는 불〉을 출판하였다. 이 책자는 일본의 만행을 서구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수원 제암리에서 일본군은 마을사람들(기독교인들과 천도교인들)을 교회로 몰아넣고 방화하여 학살하였다. 세브란스 병원의 세균학 교수였던 스코필드 박사는 마을에서 연기와 불이 타오르는 장면을 보고 자전거를타고(그는 소아마비였다) 현장을 방문하였다. 현장탐사를 막는 일본헌병에게 항의하고 있다. 제암리 학살 사건 추모비 일본기독교회는 일본의 만행을 사죄하며 추모비를 세웠다. ③ 신흥우는 1919년 5월 미국북감리교 100주년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운동과 일제의 만행을 보도하였다. 미국기독교연합회(FCCCA)는 〈The Korean Situation〉을 5천권 발간하였다. 미국기독교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는 일본수상에게 만행을 규탄하는 전문(6.26)을 보냈고 일본 수상은 이것에 응답했다.(7.10) 미국 정부(6월)는 일본의 대리공사 데부치에게 해명과 조치를 요구하게 되었다. 일제는 그들의 만행을 숨길 수 없게 되었고 국제적으로 외교적으로 고립당하는 위치게 서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신문에 실린 삼일운동 한인신문 영문 독립선언서 4) 삼일운동의 결과 ① 삼일운동은 종교와 지역, 빈부격차, 국내와 국외를 뛰어넘어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어내었다. ② 상해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임시정부의 중심인물들에는 기독교인들이 대다수 였다. 안창호, 이승만, 김규식, 서병호, 현순, 김병조 등등) ③ 일제의 무단통치는 삼일운동 이후 기만적이지만 문화통치로 변화되었고, 일제의 기독교정책, 교육정책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④ 외래 종교였던 기독교는 삼일운동의 희생을 통해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종교로 자리를 매김했다. ⑤ 그리고 교인 수가 증가했다. 32만(1918), 30만(1919), 32만 3천(1920), 35만 5천(1921), 37만 3천(1922) 일제의 교회박해와 탄압으로 1919년에 교인 수는 감소했다. 그러나 그 이후 교인의 숫자는 크게 증가했다. 1920년대 후반의 교인 감소는 농민들의 대규모의 이민이 주원인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상해 임시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결성식 중국에서 일본군의 독립군 처형장면
2. 3ㆍ1운동 이후 사회변화와 기독교민족운동 1) 총독부의 정책변화 ⑴ 사이토의 총독 부임과 문화정치의 실시 ① 삼일운동의 한국인의 저항과 열강의 규탄으로 인해 일제는 정책의 변화를 시도했다. ② “관제개혁에 관한 고급관리 시정훈시 방침”은 헌병제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를 실시했고, 일반 관리의 패검을 금지했다. 일제는 한국인들의 하급관리임명을 허용했고, 제한적이지만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의 자유를 허용했다. 3대총독 사이토 마코토 ⑵ 문화정치의 허구성 ① 그러나 일제는 경찰 인원과 화력을 크게 증가시켰고, 한국인 관리들의 친일화를 유도하여 친일부역자를 양성했다. ② 일제의 〈조선통치의 방침〉은 “어떠한 경우에도 한국의 독립과 한국인의 자치를 불허한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다. ⑶ 일제의 한국교회에 대한 정책 ① 일제는 선교사 회유에 주력했고, 한국의 기독교인은 소외되었다. 많은 선교사들은 새로 부임한 사이토 총독에 대해 호의를 보였다. ② 일제는 “포교규칙”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었고, “사립학교규칙”을 개정해서 성서교육을 인정했다. ③ 그러나 종교 단체의 부동산을 내국인법으로 통제했고, 허가한 교회에 대해서는 감시와 통제를 계속했다. 이점은 선교사들 조차도 불만스러워했다. 2) 사회주의 운동과 기독교 ⑴ 지식인들의 기독교 비판 1920년대 한국교회를 향해 지식인들과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의 목소리가 크게 높아졌다. 이광수는 기독교를 “정통의 폭군”으로 비판했고, 특히 미신화, 사상과 과학을 경시하는 교역자들의 무식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현실의 문제에 대처하지 않고 현실을 도피하고 피안으로 빠져드는 기독교를 비난했다. 그러나 이광수는 기독교 자체는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춘원 이광수 ⑵ 사회주의자들의 기독교 비판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의 기독교 비판은 그 강도와 질이 달랐다.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면서 국내에도 사회주의 운동이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민족주의자들은 서구 사회가 약소국의 민족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것을 파악하고 사회주의 운동 안에서 대안을 찾았다.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며 종교는 타도의 대상이라고 주장하였다. 1.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수족이며 자본주의의 주구로 일제에 협력한다. 2. 현실에 대한 긍정과 복종을 강요하여 독립정신 말살시킨다. 3. 미신과 허위를 선전한다. ⑶ 반기독교운동 ① 1918년 기독교인 출신이었던 이동휘 장군은 러시아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했고, 1919년 블라디보스톡에서 ‘고려공산당’을 조직했다. 1920년 국내에서는 조선노동공제회가 조직되었다. 이동휘 이동휘 - 조선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자 ② 1923년 전조선청년당대회가 개최되었고, 1924년 경성신흥청년동맹회 등에서 반종교-반기독교 입장을 표명했다. 1925년 4월 김재봉, 조봉암, 박헌영 등은 국내에 ‘조선공산당’을 조직했다. 1925년 10월 “한양청년연맹”은 반기독교대강연회를 개최했다. 이때 강사와 강연 제목은 김단야 ‘기독교의 기원’, 박헌영 ‘과학과 종교’, 홍순준(洪淳俊) ‘기독교는 미신이다’, 김평주(金平主) ‘대중아 속지 말아라’, 박래원(朴來源) ‘양면양심의 기독교’다. 이 행사는 기독교 측의 반대와 일본경찰의 탄압으로 무산되었다. 그러자 사회주의 운동 쪽에서는 이행사의 무산이 기독교와 일제가 연합하고있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12월 25일을 ‘반기독데이’라고 칭했고, 김익두 목사를 고등무당이라고 칭했다. 박헌영은 또 ‘개벽’에 ‘역사상으로 본 기독교의 내면’이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줄거리를 보면 대략 이렇다. 박헌영과 주세죽 부부 김단야
③ 이러한 반기독교 운동에 대한 교회의 반응은 냉소, 반성, 긍정이라는 세 가지 입장으로 나타났다. 긍정적인 입장은 기독교 사회주의자였던 이동휘, 여운영, 이대위 등에게서 나타났다. 이대위는 “오인(吾人)이 동경하는 무삼 신세계를 조성코자 함에는 기독교 사상과 사회주의가 상동(相同)하다고 사유된다”고 했다. 신흥우는 “교회는 무산계급의 앞 운명을 개척키 위하여 있어야 하며 현대의 기독교회는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샌프란시스코 최초의 한글학교 1926 설립자 이대위 목사 여운형 신흥후 이동휘와 여운형은 평양신학교를 다녔던 전도사 출신들이었다. 1918년에 조직된 ‘한인사회당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초기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반제국주의, 민중적 요소를 기대한 측면이 컸다. 그러나 사회주의 청년들의 교회와 기독교를 향한 폭력 행위는 교회가 ‘반공산주의’ ‘반사회주의’ 노선으로 돌아서게 했다. 3)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삼일운동이 진행되던 1919년 4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국내에 연통제를 실시하여 자금을 조달하였다. 임시정부 활동을 국내에서 지원했던 단체들 가운데 기독인들이 상당수가 연루되어 있었다.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희,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1) 대한애국부인회(평양) 삼일운동 과정에서 교회의 여성들은 투옥된 교우들을 돕고 지원하기 위해 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1919년 11월에 장로교측의 “애국부인회”와 감리교측의 애국부인회“는 통합을 하여 애국부인회를 만들었다. 이들은 동지를 규합하고, 군자금을 모금하고, 배일사상을 고취시켰고, 비밀리에 독립운동요원을 원조했다. 이들은 임시정부의 연통제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1920년 12월 일제에 발각되어 해체 되었다. 중경에서 애국부인회를 재건 1939 (권기옥-오늘쪽에서 두번째, 독립운동가, 비행사) 2) 대한독립애국단(서울) 1919년 5월에 결성된 대한독립애국단은 핵심 인물의 대부분들이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은 연통제 업무를 수행하고, 임시정부 출범 축하시위를 벌였으며, 한국인 관리들의 퇴직동맹을 계획했다. 그러나 1920년 1월 일제에게 발각이 되었다 그후 단원들은 암살단이나 대한독립군에 참여하였다. 3) 대한민국청년외교단(서울) - 단원들의 대부분이 기독교인 1919년 5월 상해에서 독립운동가들의 도움으로 결성된 이 조직도 단원들의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국외 지부를 설치하고 조소앙 등 외교원을 파견하였고, 〈외교시보〉를 발간하였고, 연통제 업무를 하면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대한독립단의 철원군단(鐵原郡團)은 도피안사(寺)에서 조직되었고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는 강원도 월정사의 승려들도 소속되어 있었다. 4) 대한민국애국부인회(서울) 회장: 김마리아, 총무: 황에스더 ‘혈성부인회’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가 1919년 6월 통합하여 만들 조직이다. 이 애국부인회는 전국에 지부를 설치하고, 군자금을 모금하고, 연통제 업무를 통해 독립운동가를 후원했다. 1919년 11월 일제에 발각되어 해체되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김마리아 (1927년 모습) 5) 개인적 무력투쟁 ① 강우규 의사(1855-1920) 강유규 의사는 장로교회 전도사 출신으로 함남 흥원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 헌신했다. 그후에 “대한노인동맹단”에 가입하였다. 1919년 9월 남대문에서 새로 부임한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투척하였다가 체포되었다. 그때 강의사의 나이가 65세였다. 강의사의 거사 이유는 일제가 “이웃을 사랑하라” “남의 것을 탐내지 마라”는 하나님의 계명에 위반하고 민족자결주의를 멸시하였다는 것이었다.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없음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의사께서 교형직전 대한의 청년들에게 남긴 글에서) 동포여 나의 용모를 기억하지 마오 하늘이 주신 충렬 몸과 뼈에 세기오 삶과 죽음의 종적은 바야흐로 다시 이어지나니 천국은 이미 의사들에게 열려있오” 〈기독공보〉(1920. 12. 8) 단두대상에 홀로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강우규 의사를 취조한 일본인 경찰부장도 그의 애국심과 당당함에 감탄을 받았다. 우국지사였지요. 그는 정말 과장 안하고 우국지사였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이 격해지자 일어납니다. 이번에는 당당하게 독립연설을 시작합니다. 예순 몇 살이 된 노인이 탄상을 두드리며 독립의 열정을 피력합니다. 비장했습니다. - 지바료/ 1919년 당시 경기도 경찰부장 강우규 취조 내가 돌아다니면서 가르치는 것보다 나 죽는 것이 조선 청년의 가슴에 적은 나마 무슨 이상한 느낌을 줄 것 같으면 그 느낌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다. 조선 청년의 가슴에 인상만 박힌다면 그만이다.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고 하는 조선청년들이 보고 싶다. 아! 보고 싶다.- 동아일보 아들 중건에게 남긴 유언 강우규 의사 폭탄을 던진 서울역 광장 폭탄이 터진 곳에 세워진 비석 LA Times에 보도된 기사 강우규 열사의 재판 결과 보도 ② 박치의 1920년 9월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고 체포되었다. 그때 박치의 나이는 18세에 불과했다. 그는 사형이 언도되는 순간에 “하나님 은혜 감사하외다.”라고 소리를 쳤다. 교수대에서는 성경을 외고, 찬미를 부른 후 조선독립만세를 부른 뒤에 사형을 당했다. ③ 김상옥 총독과 일본관리, 친일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정보가 누설되자 김상옥은 상해로 탈출했고, 의혈단에 가입했다. 1923년 1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남산으로 도주했다. 그를 추격하는 일본인 경찰 500명과 대치하여 15명을 사살하고 자결했다. 그때 그의 나이 34세였다. 김상옥(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과 의열단 동지들 4) 국외에서의 독립운동 1)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기독교인의 영향 삼일운동을 계기로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훗날 대한민국 정체의 기초가 되는 최초의 공화제 정부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또한 임정은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을 상당수를 편입 흡수하여 효과적인 항일운동을 전개 하였다. 임정 수립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의 역할을 거의 절대적이었다. 신익희 안창호 현순 ① 조직의 결성 임정의 모체가 된 것은 상해 신한청년단이었다. 신한청년단은 1918년 여름에 결성되었는데 그 단원들 중 종교가 밝혀진 사람들은 모두 기독교인들이었다. 장덕수, 김구, 서병호, 송병조, 여운형, 김규식 등이었다. 이들은 독립을 호소할 정부가 없으므로 임시로 정당을 결성한 것이다. 이들은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보냈고,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보냈다. 앞서 살핀 대로 3.1운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19년 3월 말 신한청년당의 서병호, 여운형 등은 현순, 최창식 등 망명지사들과 연합하여 상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총무 현순)하였다. 그해 4월 10일 경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이 출범하게 되었다. ② 조직의 체계화 상해 한인교회의 구성원들은 임시정부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한청년단원들의 상당수가 이 교회에 출석하였다. 신한청년단 이 외에 이 교회에 출석했던 인물들은 이승만(국무총리-대통령), 안창호(내무장관), 김규식(외무총장), 이동휘(군무총장), 유동렬(참모부 총장), 신익희(내무차장), 조소앙(비서장), 김순애(대한애국부인회장)는 임시정부 요인이었다. 일제는 이 교회를 “예수교를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선전하는데 그 주의가 있다”고 경계하였다. ③ 자금조달 및 운영 현순은 기독교계 대표들로부터 2천원의 경비를 조달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송했다. 임시정부의 예산은 동포들의 성금으로 조달되었는데 기독교계의 모금이 두드러졌다. 2)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된 항일무장단체들 ① 북간도의 대한국민회 1919년 3월 북간도 용정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는 1만명 이상이 참가했고, 일본군의 발포로 10여명이 죽고 수 십 명이 다쳤다. 그 이후 국내에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보다 적극적인 무장투쟁이 일어났다. 1919년 4월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북간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대한국민회가 성립되었다. (회장 구춘선, 부회장 서상용). 이 회는 1920년 8월 당시 연길현, 왕청현, 화룡현 등 3개현에 10개의 지방회가 133개의 지회를 둔 북간도 최대의 독립운동단체로 발전했다. 이들은 북간도와 함경도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했고, 노령 연해주에서 무기를 구입했다. 그리고 독립군 양성을 위해 징병제를 실시했고 1920년 7월 연길, 명월구에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그 회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 등과 합류하였다. 1920년 7월 7일 봉오동 전투에 참가하여 대승을 하였고 10워13일 연길에서 대한신민단, 대한의민단, 훈춘한민회 등의 기독교 단체와 연합하여 10월 21일 완구루 전투, 10월 25일 고동곡 전투 등에서 일군을 물리쳤다. 또한 대종교 단체인 북로군정서와 연합하여 10월 22일 어랑촌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② 북간도의 대한 신민단 1919. 3. 12일 북간도 왕청현에서 조직 (회장 김규면등 단원들의 대부분이 기독교인) 이 단체는 신민회를 계승한다고 표방했고, 독립전쟁을 위한 교전단체임을 표방했고, 민주제에 의한 독립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하였다. 4월에 본부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으로 옴겼다. 이 단체는 5월 달에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1919년과 1920년에 수시로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였다. 1920년 6월 4일 두만강을 건서 함경북도 강양동에서 헌병순찰소대를 격파했고 박승길 위하 30여명의 단원들이 추격하는 일본군 1개 중대를 섬멸하였다. 이 단체도 봉오동전투에 참가하였다. ③ 서간도의 대황구 교회 300여명의 기독교인들이 모여 독립운동을 위한 무기구입을 위한 성금을 거두었고 주일에는 예배를 마친 후 청년 70여명이 곤봉으로 군사훈련을 받으며 항일투쟁에 대비했다. 홍범도 장군과 전우들 청산리 전투 승전후 기념사진 1921 김좌진 장군 ④ 기타 서간도의 항일투쟁 통화현의 회봉석 목사 홍경현의 오대규 목사 등은 급진파를 결성하여 일제를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즙안현의 기독교인들은 천도교인들과 연합하여 의용단, 청년회 등의 단체를 만들로 허선노 장로를 총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들은 항일연합전선을 구축하고 다른 독립운동단체들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0년 10월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훈춘사건’을 계기로 큰 타격을 입었다. 훈춘사건은 봉오동 전투의 패배에 대한 앙갚음을 하기 위해 중국의 마적과 결탁하여 간도의 조선인을 무조건 학살한 사건이다. 일본군은 이 지역 독립운동기지를 초토화하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여 처형하였으며, 교회와 가옥을 불살랐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희생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 국가였던 미국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않자 상당수 기독교인들은 러시아에 의존하여 독립을 달성하려 하였고, 그 결과 공산주의자가 되는 경우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3. 교회의 문화 운동 1) 교회합동운동과 연합사업 ① 1918년 12월 1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에서는 ‘초교파적 세계교회운동’(Interchurch World Movement)이 일어났다. 평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30여 교파교회가 참여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② 한국의 선교사들도 연합 운동에 열정을 가지고 연합운동을 시작했다. “조화를 위해서라면 나 자신의 예배형식 이나 교회 의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를 포기하겠다” . . . “감독주의 정치라도 받아들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이루어진다면 감독도 받아들이겠다.” (E. Bell) ③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러한 선교사들의 활동에 냉담했다. 그 이유는 1905년 교회 합동 운동이 정치적인 이유로 실패하였고, 3.1운동으로 막대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났고 교회 지도자들이 투옥 혹은 망명한 상태에서 교회연합운동은 현실과 거리가 먼 화두였다. ④ 그러나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 6개는 이미 1905년도에 "재한복음주의연합공의회"를 통해 연합운동을 해왔다. 또 장로회총회와 조선미감리회와 조선남감리회의 3개 교단은 1918년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를 만들었다. (회장 김필수 목사 서기 오기선 목사) 목적: ① 두 교회의 친목을 도모한다. ② 어려운 사업은 협력한다. ③ 그리스도 사업 확장을 서로 돕는다. 그러나 “신경과 정치와 예배모범 등에 대해서는 간섭치 못함”으로 못을 박았다. ⑤ 1924년 9월 24일에 새문안교회에서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결성되었다. 1920년대 초반 IMC 회장 존 모트(John Mott)가 아시아를 순방하여 교회협의회((NCC)를 조직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민족별 교회협의회들은 국제선교협의회(IMC)의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한국에서는 ‘재한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와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가 결합하여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1920년대에 사회주의의 성장과 반기독교운동 및 신사조의 도전에 대처하여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신학수준의 향상을 위해 교육의 질적 상승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독점하던 연합운동에 한국인의 참여가 증대하였다. 한글정기간행물 〈기독신보〉와 〈주일학교잡지〉를 발간하였고, 장감연합기관, 세브란스 병원, 평양기독교연합병원, 연희전문학교, 숭실전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일본정부가 추진하던 〈종교법안〉에 반대하였다(1925-26).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1931년에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로 대치되었다. 2) 기독교문서운동 문화통치 이후에 신문, 잡지, 등 언론과 출판에 상대적인 자유가 생겼고 이 시기에 많은 잡지와 신문들이 출판되었다. 신문:〈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었다. 잡지:〈개벽〉〈신생활〉〈신천지〉〈동명〉〈신여성〉〈신소년〉 〈조선문단〉등이 출판되었고, 교계에서는〈기독신보〉를 발간하였는데 외교, 정치, 사회 분야 기사도 게재하였고, 독립운동사건도 보도하였다.
기독신보 1915년 창간 1920년대 기독교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잡지들이 출판 혹은 창간되었다. The Korea Mission Field (1905)는 선교사들의 연합잡지였다. 감리교협성신학교는 〈신학세계〉 (1916) / 안식교 〈교회지남〉(1916) 장로교평양신학교 〈신학지남〉(1918) / 성결교 〈활천〉(1922) 구세군 〈사관〉(1927) 동경YMCA 〈현대〉(1920), 〈젊은이〉(1923), 〈사명〉(1926) 경성YMCA 〈청년〉(1921)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주일학교잡지〉(1925) 기독청년면려회 〈진생〉(1925) 강매 〈선민〉(1919) / 박희도 〈신생활〉 (1922) 최태용 〈천래지성〉 (1925) /김교신 〈성서조선〉 (1927) 유형기 〈신생〉(1928) 기독교 독자층이 넓어졌고 질적으로 향상된 필진들이 형성되었다. 미국유학파 : 김관식,정인과, 변성옥, 김창준, 조병옥, 김활란, 최상현, 남궁혁, 박형룡, 백낙준, 유형기, 김준옥, 김인영, 김형식, 송창근, 김재준, 이대위, 정경옥, 한치진 등 일본유학파 : 홍병선, 전영택, 김수철, 김유현, 채필근, 전필순, 함석헌, 김교신, 최태용 국내필진 : 최병헌, 김창제, 이석락, 박승봉, 김원백, 유경상, 조상옥, 이명직 조선기독교창문사의 설립: 한국인들이 주체적으로 기독교문화를 창출하려는 노력으로 전문출판사 정기간행물 <신생명> (1923)→기독교민족운동계를 대변할만한 잡지→1930년대 출판사 소멸 구약 개역작업 1911-1936, 신약 개역작업 1926-1937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신정찬송가》(1931) 출판→장로교《신편찬송가》(1935)로 장감분열 3) 기독교교육사업 ⑴ 기독교 사학에 대한 탄압 ① 3ㆍ1운동 이후 일제는 1915년에 만든〈사립학교규칙〉을 완화해서 기독교학교에 교과목선정의 융통성을 부여했다. 학교 안에서 성경과목을 채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것은 3.1운동 이후 일제가 취한 유화책이었다. ② 그후 〈개정조선교육령〉(1922)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하는 학교에서는 한국어를 선택과목으로 만들었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학교에서는 한국어, 한국역사ㆍ지리(필수)과목에서 총독부가 편찬한 교과서를 사용하게 했다. 이것은 內鮮一體 교육의 기초단계였다. 조선어 독본(총독부편찬) 내선일체비 일제시대의 교육 총독부 시책에 순응했던 감리교계통의 사립학교에 대해서는 고등 보통학교로 인가를 내주었다. 그러나 시책에 불응했던 장로교 계통의 사립학교들은 갑종 혹은 잡종 학교로 분류하여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자격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1920년대 기독교계 학교들안에서 학생들의 선교사 배척운동 혹은 동맹 휴학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25년도에 기독교학교의 10%만이 정부가 인정하는 지정학교였다. 그중 감리교 학교는 8개였고 장로교 학교는 하나도 없었다. ③ 주일학교 교육 1920~22년 종교 학교는 감소한 반면 주일학교 학생은 30%가 증가했다. 이것은 기독교 계통의 학교 교육에 어려움이 생기자 교회는 주일학교 사업을 통해 2세에 대한 신앙교육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미국 북장로회의 홀드크로프트는 주일학교 총무로서 이 사업에만 전념했다. 조선주일학교대회는 1921년부터 매 4년 마다 한번씩 개최되었다. 제1회 대회(서울, 1921) 대표 897명 1300명 운집 제2회 대회(서울, 1925) 대표 1997명 제3회 대회(평양, 1929) 대표 2330명 제4회 대회(대구, 1933) 대표 2713명 주일학교교육은 일제하에서 기독교교육의 공백을 메워 주었고 1930년대 황민화정책에 저항 할 수 있는 정신적 바탕을 제공하였다. 최초 조선주일학교대회(1913 덕수궁, 설교자 언더우드) 제4회 전조선주일학교대회(1933 대구제일교회) 경안노회남자주일학교(1928) 만국주일 공과책들 4) 교파별 교회의 발전 ① 성결교회 교리적 독특성(중생ㆍ성결ㆍ신유ㆍ재림)으로 독자성 유지 1920 제도를 정비하고 경성, 대전, 경북, 경남, 4개 지방회를 조직하고 장로사 제도를 두었다. 1921. 9 ‘복음전도관’을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로 이름을 바꾸고, 기관지 <활천>을 발행했다. 1936총회분규사건 ② 성공회 1911트롤로프 신부가 주교로 서품을 받았다. 1914강화도에 성 미가엘신학원을 설립하고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했다. 1915김희준이 첫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1916〈조선성공회 헌장과 법규〉를 제정했고 1926서울대성당을 한국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완공하였다. 서울성공회대성당 ③ 구세군 1916~19프렌치(G. French)가 2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1919~24 스티븐스(W. Stevens) 1924~26 폴스트라(W. Palstra) 1926~28토프트(J. Toft) 고아원 사업(육아원, 아현동), 걸인 숙박시설, 여행자 숙박시설, 자선남비(1928) 등 사회사업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했다. 1926대장 부드의 내한을 계기로 선교사들이 한인학생을 차별하는 것에 대한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첫 구세군 자선남비(1928) ④ 침례교 1914펜윅 선교사의 독선적인 교회 치리에 반기가 일어났다. 그리고 펜윅은 일선에서 은퇴하였다. 2대감독으로 이종덕 목사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펜윅의 추종 교인들이 이탈하여 다른 교회를 설립하거나 혹은 타교파로 이동하였다. 신명균은 조합교회로 갔고, 김규면은 성리교회 설립하였다. 손필환은 대동교회를 설립하였다. 1926펜윅은 〈달편지〉에서 자녀들을 세속적인 일반 학교에 보내지 말라는 언급을 하기도 했다. 펜위의 달편지 침례교회는 선교활동에 적극적이었다. 19064명의 한국인을 간도에 파송하였다. 1917신명균 목사를 길림으로, 박기양 목사는 즙안으로, 노재천 목사는 서간도로 파송했다. 1918박노기ㆍ김희서ㆍ김영태ㆍ최응선 등 시베리아 파견하였으나 선박 파손으로 순직하였다. 1921만주선교사 손상렬은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1925김상준ㆍ안성찬ㆍ이창희ㆍ박문기ㆍ김이주ㆍ윤학영 등은 길림에서 조선 독립군(좌익)에게 총살당했다. 1921‘대한기독교’(1906)라는 명칭을 ‘동아기독교’라고 변경하였다.
4. 해외선교와 해외 한인교회의 발전 (1) 미주지역 선교 한국인들이 해외로 흩어지면서 세워진 한인사회와 한인교회는 민족운동을 지원하는 항일 운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고 3.1운동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해외교회의 선교역사는 디아스포라(흩어진 민족)의 선교로부터 시작되었다. 1) 하와이선교 1902년 12월 감리교 선교사 존스(G.J. Jones)의 설득으로 인천 내리교회 등 감리교인들이 중심이되어 최초로 하와이 농업이민이 시작되었다. 1903년 홍치범, 안정수, 현순 등이 중심이 되어 최초로 하와이에 한인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렇게 한민족 이민역사의 출발은 기독교 역사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1910년 하와이에는 한인교회가 35개처가 되었고 미국 본토에도 한인교회가 확산되었다. 감리교 선교사 존스 하와이 이민광고 김이제 목사 가족(1903. 1.13) 최초 한인20명을 태웠던 S.S. Gaelic호 하와이에 세워진 한인교회들은 하와이 선교와 민족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1906년 호놀룰루 한인교회는 “한인기숙학교”를 설립하고 한인 2세들에게 국어를 가르쳤고 1905년에는 〈하와이 한인기독교보〉를 발행하여 교민들 사이의 언론매체가 되었다. 1905년 5월 윤병구는 〈시사신보〉를 발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고종의 생일을 축하하는 한인들 1907 국민군단 시가행진 1907년 하와이의 각 섬에 있는 24개의 한인 단체들이 “조국 국권광복과 재류 동포 안녕보장과 교육 장려”를 목적으로 ‘한인합성협회’를 조직하였다. 한인합성협회는 1909년 미국 본토의 ‘한인공립협회’와 합동하여 ‘대한인국민회’를 결성하였다. 이승만 계와 국민회 계의 분열 105인 사건의 체포를 피해 미국에 망명한 이승만은 1913년 국민회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 한인기숙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 박사학위자로서 교포들 사이에서 인기가 급상승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자신의 세력을 강화시키는 가정에서 갈등과 분열이 일어났다. 교육계 분열―1914년 하와이 감리사 프라이(W. H. Fry)는 이승만에게 학교와 교회의 재정권을 박탈학고 교육만 담당하게 했는데 이승만은 1915년 한인기숙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선교사 후원 없는 학교를 세우자고 교파를 설득하여 한인여자학원을 설립하였다. 그 결과 교포들 사이에 이승만 지지파와 선교사 지지파로 분열이 일어났다. 한인조직분열―1915년 국민회 간부 박상하ㆍ홍인표가 공금을 유용했다고 비난하는 기사가 이승만이 발간하는 〈태평양잡지〉에 실렸고 안창호가 와서 중재를 했으나 국민회는 분열되고 말핬다. 그로 인해 의형제 관계였던 박용만과 이승만은 결별하였다. 1917년 이승만은 국민회와는 별도로 ‘동지회’라는 한인단체를 결성했다. 교회분열―이승만은 1918년 자신을 지지하는 교인들을 이끌고 호노룰루에 ‘한인기독교회’라는 새 교회를 세웠다. 이로써 하와이의 한인교회, 교육계, 민족운동은 국민회와 동지회로 양분되고 말았다. 이 여파는 미국본토에도 영향을 주어 1924년 LA한인연합교회 내에 이승만 지지파와 반대파의 충돌이 생겼다. 이승만지지파는 1926년 ‘자유교회’란 명칭의 새교회를 세웠고 1930년 LA한인감리교회로 정착했다. 민족독립역량을 결집시켜야할 시기에 해외에서 교회와 교포사회를 분열시킨 기독교지도자들의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2) 멕시코와 쿠바 이민 1904 영국인 마이어즈와 일본인 다이쇼가 꾸민 사기 멕시코 이민 사업으로 많은 한인들이 고난을 겪었다. 이들은 하루 9시간 노동으로 은20-25전을 주기로 하였으나 12시간 노동에 12전밖에 주지를 않고 노동을 착취했다. 영국상전 일포드(ILFORD) 에케넨 잎을 베고 있는 노동자들 상동교회 엡윗청년회는 이 사건을 여론화하였고 박장현, 이범수를 특파원으로 파견하였다. 정부도 외부협판 윤치호를 파견하려 했으나 교포들이 일하는 유카탄 까지 가지는 못했다. 1909년 노동 계약 기간이 만료 된후, 샌프란시스코 국민회는 황사용와 방화중 목사를 파송하여 이민구제 사업 및 하와이 이민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멕시코 한인선교회가 조직되었다. 1920년 8월 288명의 교포들은 쿠바 마딴사스(Matanzas) 엘볼로(El Bolo)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주하였다. 이들 가운데 감리교인들과 안식교인들이 많았으나 1921년 10월 5일 이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한인선교회를 조직했고, 1926년 쿠바 한인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 초기 지도자들은 방경일, 양춘명 호건덕등이었다. 1959년 쿠바는 공산화가 되었다. 쿠바 엘볼로 농장 1920 엘볼로에 세워진 민성학교 1922 (2) 일본전도 1906 동경 한인 YMCA설립(김정식) 재일한국인교포와 유학생을 대상으로 선교했다 1908평양예수교서원 정익노 장로 백남훈, 조만식, 오순형 등이 유학생을 모아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9독노회는 한석진 목사를 파송했다. 훗날 이 교회는 재일 대한기독교 도꾜교회가 되었다. 1911일본에 초교파적 연합교회를 세우자는 취지 ‘재일본동경조선예수교연합교회’ 1917고베에서는 장로교의 정덕생 임택권(고베신학교 유학중) 등이 중심이 되어 한인노동자들을 중심으로한 전도사업이 시작되었다. 아오소 유학생 김영구, 양태승, 박상동, 김병우, 김유현, 전필순 등도 교토, 오사카, 고베 등에 전도하였다. 1924년 장로교 경남노회는 김이곤 목사를 고베에 파송하였다. 1924년 남감리회 조선연회가 박연서 목사를 선교사로 칸사이 지역에 파송하였다. 일본선교는 도쿄, 칸사이, 큐수 세 지방으로 구분된다. (3) 중국과 시베리아 만주ㆍ시베리아는 남만주(평북장로교, 북장로회), 동만주(함경장로교, 캐나다선교회), 북만주(미감리회 조선연회)로 구분 (4) 장로교회의 해외선교 1912 장로교의 산동선교―중국인을 대상으로 선교 결정 1913박태로ㆍ사병순ㆍ김영훈 파송―“자유교회를 설립하지 말로 그 땅 장로회와 연합할 것” 중화예수교장로회 화북대회→산동의 요충지 다섯 곳을 선교지로 내주었다. 1917방효원, 홍승한 김병규를 새로 파송 1920-30년대 지속적인 발전 (5) 감리교 1911 손정도 목사를 하얼빈에 파송하였다. 이상 출생한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교회가 해외선교 이민선교에 적극적을 보인 것은 민족과 교인을 돌보는 교회, 복음정신으로 타민족을 사랑하고 돌보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종교는 과학과 생산기술이 낙후한 조건에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기독교는 봉건 사회에서는 제후의 이익을,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야만 미개의 나라에 파견되어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는 선교사는 몸에 촌철의 무기도 갖지 않은 정예 병사로서 제국주의 영토 확장의 첨병 구실을 한다.”
대한애국부인회 결사대장 김성완 할머니
하와이 이민때 사용한 대한민국집조(1903)
호노룰루 한인기숙학교 1914(이승만)
국민군단 훈련소
멕시코 이민모집
유가탄 에케넨 농장에 도착한 한인노동자들 1905.5.12
첫댓글 그림이나 사진이 나타나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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