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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혁신학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천지
정암 박윤선의 성령신학
최윤배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우리는 본고를 박윤선의 간단한 생애, 그의 성령신학에 대한 필자의 논술 방법, 범위 등을 밝히면서 시작하였다. 박윤선의 성령론을 크게, 두 가지, 곧 성령의 위격과 사역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종말과 관계하여 마지막에 다루었고, 성령의 사역을 일반 사역과 특별 사역으로 나누어 논의했다. 박윤선의 성령신학을 다음과 같이 요약․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의 성령신학은 신구약성경과 종교개혁전통, 특히 개혁신학 전통에 아주 근접해 있다. 그러나 방언의 문제에서는 교회 안에서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다.
둘째, 그의 성령신학은 “삼위일체(론)적” 성령신학이다.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시며, 삼위들 중에 제3의 위격이시며, 자신의 고유성과 관련하여 경륜적 사역으로서 구원의 “실시”, “성화” 등의 사역을 하신다.
셋째, 그의 성령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적․인식론적” 성령신학이다.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는 내재적․경륜적으로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이중적(二重的)이다.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성령으로 사역하시고, 성령에 의해서 부활하셨다. 또한 부활․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앉아계시는 고양(승귀)된 예수 그리스도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며,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 부활․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현재 그리스도인과 교회에게 인식되시고, 현존하신다.
넷째, 그의 성령신학에서 성령의 사역은 크게 두 가지다. 창조질서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 역사하시는 창조와 섭리의 사역으로서 일반 사역과, 구속질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중심으로 선택론과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의 영역에서 역사하시는 특별 사역이 있다.
다섯째, 그의 성령신학에서 성령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불러서 중생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일생동안 그와 함께 계시면서, 성령의 은사를 주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여섯째, 그의 성령신학에서 교회는 성령의 은사공동체이다. 성령은 교회의 설립과 양육을 위하여 오셨으며,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통일성과 유익을 위하여 주어졌다. 성령이 사용하시는 중요한 도구는 성경말씀과 두 가지 성례(세례와 성찬)이다. 성령에 의하여 성경말씀과 성례는 효력을 발생한다. 교회의 직분은 성령의 은사를 동반해야 한다.
일곱째, 그의 성령신학에서 성령은 메시아의 영이며, “말세”, 즉 종말의 영이다. 그리스도인은 장차 완성될 “천국”의 맛을 지금 이미 보고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중심으로 전 피조 세계도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우주론적 대망을 하시며, 이를 위해서 탄식하시며, 기도하시는 영이시다.
여덟째, 그의 성령신학에서 특이한 점은 역사적(歷史的)으로 일부 개혁파 정통주의에서 가끔 간과되거나 소홀히 여겨졌던 성령의 은사가 매우 강조되면서도, 일부 열광주의적 성령운동에서 자주 나타나는 특정한 입신이나 특정한 은사의 절대화에 대해 그가 매우 경계하고 있는 점이다. 이 같이 균형 잡힌 주장은 성경주석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아홉째, 서론에서 밝혔다시피, 박윤선의 방대한 분량의 대부분의 작품들을 활용하지 못하고, 주로 그의 『개혁주의 교리학』을 중심으로 논문이 전개된 바, 앞으로 석사나 박사학위 논문 등에서 더욱 심도 있는 그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를 기대한다. 그러나 본 연구가 박윤선의 성령론 연구에 물꼬를 터 주었다는 점에서 연구의 보람을 가지는 바이다.
I. 서론
정암(正岩) 박윤선(朴允善: Rev. Yune Sun Park, D.D., 1905.12.11~1988.6.30)은 1905년 12월 11일 평북 철산군 백령면의 해변 마을 장평동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아버지 박근수(朴根秀)와 어머니 김진신(金眞信) 사이에 출생한 2남 3녀 중 둘째 아들이었는데, 그에게 형 박윤석, 위로 누나 두 사람, 아래로 여 동생 한 사람이 있었다. 1979년 10월에 “그는 『에스라․느헤미아․에스더 주석』의 집필을 끝냄으로써 신구약 66권의 주석을 20권의 책에 수록하여 완간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1949년 『요한계시록 주석』을 처음으로 출판한 이후 30년간의 각고 끝에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88년 봄 학기 강의가 끝난 얼마 후 6월 12일에 그는 복부에 심한 통증으로 영동 세브란스에 입원하였다. 오랜 지병이 된 위궤양과 담석증이 악화되어 암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마침내 “1988년 6월 30일 그는 영면했다.”
박윤선의 생애와 사상을 일반적으로 다룬 훌륭한 작품들이 이미 많이 나왔고, 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일반적 기술이 없어도, 본고의 주제에 대한 논의를 가능케 하기 때문에, 우리는 직접적으로 주어진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하기로 한다. 이미 황창기가 “박윤선의 성령론”에 대하여 훌륭하게 논의한 바가 있지만, 그는 여기서 주로 오순절 성령의 강림 이해를 중심으로 논하면서 그의 성령론에 대한 보완점을 많이 지적하였고, 실제적으로 박윤선의 성령론에 대한 전반적인 논의가 지금까지 많이 진행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박윤선의 성령론을 오늘날의 토론의 장으로 끌어오기 위하여, 특정한 관점에서 살펴보지 않고, 그의 성령론 전반을 골고루 살펴보고자 한다.
박윤선의 성령신학에 대하여 논의할 때, 우리는 그의 작품의 연대를 고려하지 않고 사용할 것이며, 주로 그의 『개혁주의 교리학』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며, 논문의 구성은 조직신학에서 일반적으로 기술하는 방법과 순서대로 두 가지, 즉 성령은 누구이시며, 성령은 무엇을 하시는지에 대하여 논의하기로 한다.
Ⅱ. 성령의 위격
A. 성령과 삼위일체 하나님
박윤선은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낱말이 언급되어 있지는 않으나 이 교리의 성립은 성경 전체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 뒤,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1인칭 복수인 ‘우리’의 입장에서 말씀하시고(창1:26; 11:7), 하나님의 행동이 복수 동사로 묘사된 곳도 있고(창35:7), 신약성경에도(마28:19; 고후13:13; 마3:16-17; 고전12:4-6; 벧전1:2) 삼위가 함께 언급된 곳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박윤선은 삼위일체 교리는 오묘하고, 신비하여, 피조물로서의 우리는 그것을 알기 어렵지만, 성경의 말씀 그대로 믿는다고 말한다.
“성부도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다. 이 삼위께서는 한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본체는 하나이신데 그 인격은 세 분이고, 그 세 분께서는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 동일하시다는 것이다. 명심할 것은 이 교리는 하나의 신비로서 우리 피조물들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신성(神性)은 동일체이시면서 격위(格位)는 서로 다를 수 있을까? 우리는 제한된 피조물로서 이 오묘에 대하여 알기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경의 말씀 그대로 믿는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유대교의 일신론(monotheism)과 이방인 출신 기독교 개종자들의 다신론(polytheism)의 종합에서 비롯되었다는 종교사학파적인 주장에 강하게 반대하면서, 박윤선은 성경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 각각 인격성을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실체도 셋이라는 “삼위삼체설(三位三體說)”이나, 한 분 하나님의 활동 또는 계시 방법이 세 가지로 나타난다는 “사벨리안 설(Sabellianism)” 또는 “일위삼양설(一位三樣說)”이나, 오리게네스(Origenes)와 아리우스(Arius) 등에 의해서 주장되었던 종속설(從屬說), 즉 성자께서 성부에 의해서 창조되어, 성자의 실체가 성부의 실체와 다르다는 주장의 반(反)삼위일론적 이단설들에 반대하여 니케아회의와 곤스탄티노플회의가 성경과 일치하게 말하였다. 이 회의들은 “① 사벨리안의 학설을 반대하고 삼위의 엄격한 인격적 구분을 내세웠고, ② 아리우스파에서 주장한 바 성부와 성자는 실체 있어서 서로 다르다(즉 ‘비슷하다’는 것, ὁμοιούσια)고 한 학설을 반대하고 성부와 성자의 동질성(ὁμοούσια)을 내세웠다.”
박윤선은 성경주석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체성과 삼위성을 위격 간의 동등성과 구별성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유일성(시6:4; 요17:3; 고전8:3; 고전8:4하; 약2:19; 딤전2:5; 슥14:9)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동등한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요1:1; 20:28; 롬9:5; 골2:9; 요일5:20; 사9:6; 요14:9-11), 아버지와 구분되는 다른 인격이심(요17:3; 요11:41-42; 17:1-26; 마26:39, 42, 44; 눅23:46)을 강조한다. 또한 그는 성령도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하나님이신(행5:3-4; 딤후3:16; 벧후1:21) 동시에 성부와 성자와 다른 인격으로 구분된다고(요14:16; 15:26) 주장한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을 세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기술하는데, 처음 두 항목들이 ‘내재적(본성적) 삼위일체’에 관한 기술이라며, 마지막 셋째 항목은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에 관한 기술로 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상황들은 삼위일체 교리의 골자이다. 첫째, 삼위 하나님의 본체가 하나라는 것은 질적(신의 본질)으로 동일하실 뿐만 아니라 수적(數的)으로도 하나라는 의미이다(빌2:6). 둘째, 하나님의 위가 셋이라는 것은 인격에 있어서도 셋이라는 의미니, 이것은 인간의 지식으로써 해결할 수 없는 오묘이다. 셋째, 삼위 안에서 성자는 성부에게, 성령은 성자에게 구원 사역상 종속적 관계(subordination in God’s redemption economy)를 가진다. 즉 성자께서는 성부의 보내심을 받으셨으므로 성부에게(요6:38; 13:20; 14:28; 17:7; 고전3:23),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나오시지만(요15:26), 성자의 보내심을 받으셨으므로(요15:26) 성자에게도 종속 관계를 가지신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신앙고백과 의식 없이 삼위일체론을 취급하다 보면, 우리는 자칫 사변적으로 흐를 수가 있다. 그러나 박윤선은 성경주석과 함께 구원론의 관점에서 경륜적 삼위일체론을 취급함으로써 일종의 사변을 피할 수가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가 없고(요3:16),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께 갈 수 없고(요14:6),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우리가 거룩해질 수 없다.”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사역을 하시면서도 위격의 고유성으로 인하여 각 위격에게 고유하게 주어지는 사역을 박윤선은 잘 파악하고 있다.
“우선 천지 창조시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성부 하나님은 그 계획자이시고, 하나님의 말씀(그리스도)은 그 방편이시며, 성령께서 그 내부적 성취 사역에 임하셨다. 다시 설명하면 창1:1-5에서 하나님은 창조의 주재(主宰)이시며, 말씀은 ‘하나님이 가라사대’로 나타나셔서, 없던 것이 있도록 하시는 존재의 원리가 되시고, 성령께서는 그 원리 속에서 역사하셨다. 이것은 구속 사업에 있어서도 마찬 가지다. 즉 아버지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침을 세우셨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의 중보자로서 인류 구원의 중보적 경륜을 이루셨으며, 성령께서는 그 구원을 인류에게 실시하시되 내면적인 역사로 각 개인의 마음속에서 일하신다. … 그렇다면 이 구절은(요일4:4. 필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성부․성자․성령 삼위의 하나님께서 기독신자와 친밀히 계시며 그의 구원을 이루시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적 교리를 바로 깨달을 때 신앙생활에 큰 담력을 얻게 된다.”
이상의 박윤선의 삼위일체 하나님 이해로부터 우리는 성령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② 성령은 제3위의 하나님이시다. ③ 성령은 내재적․경륜적으로 성부로부터 나오시고, 성자에 의해서 보냄을 받으시며, 구원에서 성화의 사역을 하신다. 결국, 박윤선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체성의 관점에서 성령을 하나님 자신으로 간주하여, 성령의 ‘신성(神性)’을 주장하고, 성령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성의 관점에서 제3의 “격위(格位, Person)”로 인정하고, 성령의 독립적 ‘인격성(人格性)’을 주장하며, 성령의 고유성(固有性, proprietas)관 관련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속에서 성령의 주된 경륜적 사역을, “내부적 성취” 또는 구원의 “실시” 또는 “내면적 역사” 또는 ‘성화(聖化)’로 표현하고 있다. 결국, 박윤선은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론적 성령론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B.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비록 박윤선은 A.D. 1054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분열의 주요 원인이 되었던 ‘필리오케’(filioque) 문제와 이 용어에 대한 교리적 언급을 시도하지 않을지라도, 그는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상호 불가분리의 관계성을 매우 강조한다.
“참된 신비주의는 말씀(그리스도)과 영(wood en geest를 Woord en Geest로 고칠 것, 필자)의 관계를 바로 가지되, 거짓 신비주의는 말씀과 영의 관계를 잘못 취급한다. 다시 말하면 거짓된 신비주의는 성령을 말씀에서 독립시켜 취급한다. 스킬더가 여기서 의미한대로 말씀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거짓된 신비주의는 그리스도 중심주의를 내세우는 것보다 성령을 중심한다. 실상 성령은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하여 사역하시는 분인 만큼, 그의 모든 사역이 언제나 그리스도를 중심한다(요15:26).”
첫째, 우리가 이미 논의한 삼위일체론 속에서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고, 성자에 의해서 보냄을 받음으로써 성령과 성자는 밀접한 상호 관계 속에 있었다.
둘째, ‘그리스도’라는 명칭의 의미와 기능 속에서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는 상호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박윤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의미를 언어학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고찰한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의 ‘예호수아’(구원)와 같고,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구약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라는 헬라어 역이고, ‘그리스도’는 예수의 공적(official) 명칭이며, 히브리어의 메시아, 즉 ‘기름부음 받은 자’에 해당되며, 구약의 배경으로 볼 때, 하나님의 성령을 특수한 의미에서 부음 받음을 나타낸다.(사61:1; 슥4:1-6) 구약에서는 왕과 제사장은 필수적으로 기름부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선지자의 경우에는 단 한 번 기름부음을 받은 기록밖에 없다.(왕하19:16) 확실히 이 이름은 어떤 인물을 성별하여 특별한 임무를 맡기는 것을(하나님 앞에서 대표하여 백성을 다스림) 표지(標識)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실 때 이미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할 수 있으나, 공적(公的)으로는 그가 세례를 받으실 때이다.(마3:16-17)
셋째,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의 삶에 항상 함께 하셨다. 이때는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보다 우월권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우선 예수님의 동정녀 잉태하심[成肉身]에서 그렇게 되어 있고(마1:18-20; 눅1:26-35), 세례 받으심(마3:16-17),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마27:50-51; 막15:37-38)과 부활하심[구원성취](마28장; 막16장; 눅24장; 요20장), 오순절 성령 강림(행2:1-12) 등 지상 성역 전반에 걸쳐 삼위께서 함께 하셨다.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을 들어 말하자면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은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님 위에 임하시고,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은 하늘로부터 들려 왔다.” 여기서 지상에서의 역사적(歷史的)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담지자(擔持者)’이심을 알 수 있다.
넷째, 부활․승천하신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혜사 성령을 그의 백성에게 보내신다. “예수님이 땅에 계실 때에 약속하신 것과 같이 저가 승천하셔서 保惠師 성령을 보내셨다.”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셔서 사역하시는 성령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메시아이시라는 증표요, 우리에게 주실 영적 축복과 은사의 근원이다. 박윤선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한 여섯 가지 의미 중에 하나가 “땅위에 성령님을 보내시려는 전제다(요14:26; 16:7-15).”라고 주장한다. 즉 구속사적으로 지상에서 사역하시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승천하신 후에야 비로소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이루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업과 성령의 강림하심은, 구원 경륜의 성질상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역사에 뒤이어 성령이 오실 것은, 구약에도 가르친 하나님의 경륜이다. … 그러므로 그의 부활 승천에 뒤이어 성령님이 오시도록 하신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부활․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는 성령의 파송자의 역할을 하신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예언자직, 제사장직, 왕직의 모형이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munus triplex) 속에서 성취된 것이다. 메시아로서 삼중직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는 예언자, 제사장, 왕으로서 성령론적 관점에서, 즉 성령을 통하여 그 직분을 수행하신다. “이 삼중직의 참 회복은 실패로 점철되어 온 지상의 혈통이 아니고 하나님의 신(‘나의 신’, 스가랴 4장)과 장차 오실 메시아(스가랴 6장)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신약시대)로 그 정점적인 성취를 본다는 것이다.
위에서 논의한 셋째와 넷째 관점은 성령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는 구속사에서 이중적(二重的)이라는 사실을 밝혀준다. 즉, 부활․승천하시기 이전의 역사적(歷史的)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신다. 여기서는 성령이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보다 우월하신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부활․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시다.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혜사 성령보다 우월하신 것처럼 보인다. 전자의 관점은 주로 공관복음에서 두드러지고, 후자의 관점은 주로 요한복음과 바울서신에서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러한 두 관점들이 서로 상반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상호 보완적이다. … 예수는 그가 처음 성령을 받은 자이며, 성령을 지닌 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성령을 보내신 자가 될 수 있다.” “성령이 내려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박윤선의 경우,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는 내재적 삼위일체 속에서와 구속사 속에서 상호 불가분리의 관계 속에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에서 나타난 박윤선의 성령론은 부처(M. Bucer)와 칼뱅, 바르트와 베르꼬프(H. Berkhof) 등 대부분의 개혁전통에서 발견되는 성령론의 전형적인 특징들 중에 하나에 해당되는 “그리스도 중심적․인식론적 또는 그리스도 중심적․적용(응용)적 성령론”이다. 그러나 그는 성경주석에 특별히 관심한 성서신학자(주경신학자)이기 때문에 교리사에서 지금도 뜨거운 논쟁이 되고 있는 ‘필리오케’(filioque)에 대한 분명한 논의는 발견되지 않는다.
Ⅲ. 성령의 사역(事役)
박윤선은 구약과 신약에서 똑같이 나타나는 성령의 활동을 “성령의 삼중 사역(三重使役)”으로 분류하는데, 즉 우주의 “창조자” 및 “우주 만물의 지지자(支持者)”와 “통치자”로서의 사역, “천국운동의 집행자”와 “하나님의 나라의 사역자”로서의 사역, 그리고 “우주나 신국(神國)” 뿐만 아니라, 개개인에 대한 “심령을 개조(改造)”하는 사역이다. 또한 박윤선은 “창조질서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아담을 생령이 되게 하시고, … 구원질서에 있어서도 역시 그가 사람에게 생명의 성령을” 주셨다고 주장한다. 성령의 사역에 대한 박윤선의 분류 방법을 참고하고, 논의상의 편리함을 위하여 성령의 “일반 사역(事役)”과 “특별 사역”으로 나누어서 기술하기로 한다.
박윤선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창조주 및 섭리주이신 동시에 구속주로 이해하고 있다. “구원의 작업은 창조와 마찬 가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성령 하나님은 창조주 및 섭리주이신 동시에 구속주가 되신다. 창조주로서의 성령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사역을 ‘일반 사역’으로, 구속주로서의 성령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사역을 ‘특별 사역’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주이신 동시에 구속주로서 창조와 구속 사역을 함께 하심이 언급된 박윤선의 말을 앞에서 이미 인용하였다.
성경 주석에 근거한 박윤선의 다음의 말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구속 사역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창조 사역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의 동시 개입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רוּ)이 수면에 운행하셨고, 성자 곧 말씀(‘하나님이 가라사대’, 요1:1-2)에 의하여 창조하셨고, 또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한 말씀을 보면 성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창조 사역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창조 사건과 원리적으로 병행하는 구원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류 구원사(救援史)도 그 전반에 걸쳐 삼위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A. 창조주 및 섭리주 성령 하나님의 일반 사역
박윤선은 창조론과 섭리론을 언급할 때, 창조와 섭리의 주체를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태초에 그 기쁘신 뜻대로 그의 영광을 위하여, 보통 섭리와 달리 기적적인 간섭(miraculous intervention)으로 기존의 자료를 사용하심이 없이(ex nihilo) 현상세계와 영적 세계를 구별이 있게 하시고, 그에게 의존하도록 지으신 것을 가리킨다. … 창조 사역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의 동시 개입을 주목해야 한다.”
천사들의 세계인 영적 세계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현상 세계”에 대한 창조 중에서 하나님은 인간 창조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셨다. 왜냐하면 인류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들을 관리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인류 창조에 대한 기록인 창세기 1:26-28절과 창세기 2:7절의 말씀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 라는 말은 일인칭 복수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며, 창세기 3:22절의 ‘우리중 하나’에 의하여 정당화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들자고 하심은 삼위일체 안에서 의정, 혹은 약정을 의미한다. 이만큼 사람은 중요하게 창조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다른 것들을 창조하실 때에는 이런 말씀이 없었다.”
박윤선은 섭리를 보통 섭리와 개별(초자연적) 섭리로 나누는데, 개별 섭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연 법칙을 무시하시는 것이 아니고, 자연 법칙을 내시고 또 그것을 관리하시면서도 그것을 통해서 특수 간섭도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통 섭리는 (1) 그가 지으신 만물을 보존하심(preservatio)과 (2) 그가 만물 안에서 이미 세우신 자연 법칙을 따라 만물을 작동시키는 협력(concursus)과 (3) 그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왕으로서 통치(gubernatio)하심이다.”
박윤선은 계시를 “일반계시”와 “특별계시”(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로 나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특별 계시’라 하고, 자연 만물(우주 삼라만상, 역사의 흐름, 인간의 이성)을 ‘일반계시’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한 이후로 일반계시만으로써는 하나님을 아는 데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하여 그 하나님의 형상의 지식면에서 받은 영향(noetic effect in the image of God)은 치명적으로 손상을 입었다. 그와 같이 자연계시에 덧붙여서 그에게 주어진 것이 특별계시인 성경(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이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절대 필수의 매개체가 된 것이다. 인간이 범죄한 후에는 특별계시를 통해서만 자연계시를 바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거듭난 인간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성령을 온전히 받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소유하게 된다.”
박윤선에 의면, 일반적으로 성령께서 사역하실 때, 자신이 원하시는 ‘매개체’ 내지 ‘도구’를 사용하셔서 일하신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어두워졌으므로(램17:9), 제 힘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직접 알게 해주셔야 된다. 죄로 인해 어두워진 인간에게 자연계시도 소리쳐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해 주건만(시19:1-7; 롬1:19), 그들은 이것을 의식하지 못할 뿐더러 도리어 만물들의 증거를 밟아 누른다. 오직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셔야 된다(하나님 단독 사역주의). 이 말은 전도행위와 진리의 글을 강론함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하는데 있어서 궁극적인 설득은 하나님께서만 하신다는 것이다. 즉 성령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매개체(medium) 내지는 도구(instrument)에 불과하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런 매개체나 도구는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피조물인 자연 만물이다.”
박윤선이 ‘특별계시’에 대한 언급에서는 특별계시의 주체를 성령으로 분명하게 밝히지만, ‘일반계시’ 또는 ‘자연계시’에 대한 언급에서는 성령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계시는 하나님이 나타내신 그의 능력과 그의 성품과 그의 의지이다. 자연 만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로서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롬1:20)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간섭으로 나타난 계시는 ‘하나님이 성령으로’(고전2:10)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박윤선의 창조론에서 사용된 일반적 논법에 근거하여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창조주 및 섭리주 성령 하나님께서는 일반계시의 사역에 관여하시고, 구속주 성령 하나님은 성경이라는 특별계시의 기록과 이해와 해석의 사역에 관여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박윤선의 경우, 성령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사역에 직접적으로 또는 도구와 매개체를 사용하여서 개입하시기 때문에, 박윤선의 계시론 내지 인식(지식)론은 성령론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 계시(啓示)라는 주장을 성경에 근거하여 가진다. 첫째, 바울은 자기의 전도나 설교의 말씀을 바로 ‘하나님의 말씀’(살전2:13)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계시는 동일한 것이다. 계시록 1장에서 ‘계시’(1절)와 ‘하나님의 말씀’(2절)은 동일시 되고 있다. 둘째,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성령이 이르신 바’(히3:7)라고 전제하였다. 이와 같이 사역의 말씀을 ‘성령’의 말씀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이고(하10:5), 히5:12의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하다. 셋째, 베드로는 구약의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증거하며, 또 바울의 서신들을 구약의 말씀과 다름없는 권위 있는 글이라고 증거하였다(벧후1:20-21; 3:15-16).”
박윤선은 구원론에서 ‘하나님의 부르심(Vocation)’을 세 가지, 즉 일반적 부르심 또는 이법적(理法的) 부르심, 그의 특수계시의 말씀을 통한 부르심, 성령을 통한 내부적 부르심으로 나누어 취급한다. 그는 첫 번째 부르심을 “일반적 은혜(보통은혜)” 또는 “일반 은총”(common grace)이라고 부른다. 첫 번째 부르심은 복음전파와는 같을 수 없으나, “율법전파의 정도”는 된다. 이것은 자연계(롬1:20), 역사(행17:26), 이성(理性, 참빛, 요1:9), 양심(롬2:14-15)에 의하여 성립되며, 그 효과는 사람을 변화시켜 구원하지는 못하지만, 몇 가지 일을 하는데, 가령, 자연계를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도록 촉구하고(롬1:20), 인류 사회의 죄악을 견제하고(살후2:6-7), 모든 피조물들을 보존시키고(창6:3; 시36:7; 145:9), 도덕적 질서 유지(롬2:14-15) 등의 일이다.
여기서도 비록 박윤선이 세 번째 부르심에만 “성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상 내용적으로 이해할 경우, 첫 번째 부르심에 해당되는 “일반 은혜”는 창조주 및 섭리주 성령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나 ‘일반 은사’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B. 구속주 성령 하나님의 특별 사역
우리는 구속주 성령 하나님의 특별 사역을 두 가지, 즉 그리스도인과 교회로 나누어서 기술하고자 한다. 구원의 시행은 주로 구속주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원칙적으로 구속주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박윤선은 이해한다.
“구원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모든 의(義)와 구속(救贖)도 성령의 중보사역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가 우리에게 미친다. 즉 구원의 작업은 창조와 마찬가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 가신다. 곧,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시고 성령께서 택하신 자에게 실시하신다.”
1. 성령과 그리스도인
비록 박윤선의 성령 이해는 모든 각론들(loci) 속에 골고루 분산되어 나타나고 있지만, 지금 취급하고자하는 그의 구원론 속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의 『개혁주의 교리학』제5편의 제목은 “구원론”인데, 그 목차가 “제1장 성령의 은혜”, “제2장 성령의 은사”로 구성된 것을 보면, 그의 구원론 속에서 성령론이 매우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그가 “제5편 구원론”을 시작하는 말, “구원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라는 말을 통해서 그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이미 정의한 성령에 대한 명칭에 의할 경우, 구원론에서 성령의 사역은 특별 사역으로서 보혜사이신 구속주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볼 수 있다. 박윤선은 구원론에서 두 가지, 즉 “구원실행의 서정”(Ordo Salutis)과 성령의 은사 문제를 집중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는 구원론뿐만 아니라, 교회론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문제는 교회론에서 다루고자 한다.
박윤선은 “구원실행의 서정”, 즉 ‘구원순서(서정, 질서)’에서 다양한 견해들이 있지만, 자신은 “단계적 차례”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며, 그 차례는, “개혁주의 신학”에 따르면, “부르심, 중생, 회심, 신앙, 칭의, 영자 삼으심, 성화, 궁극적인 구원, 영화의 순서”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박윤선이 주장하는 구원순서에서 항상 동반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며, 믿음이 여기에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신앙이 단순히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고,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며(엡2:8)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성립된다는 것이다.” 박윤선에 의하면,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받고(엡2:8-9), 믿음으로 의롭다함이 되고(롬3:28; 5:1), 믿음으로 성화되고(행26:18), 믿음으로 영화되고(벧전1:9), 믿음으로 행하게 되고(고후5:7), 믿음으로 은혜에 이르게 되고(롬5:2), 믿음으로 소망의 실상을 가지며(히11:1), 믿음으로 궁극적 실재의 확실성을 알게 된다.(히11:3)
첫째, “하나님의 부르심(Vocation)”에는 세 가지가 있다. 교회의 복음전파와 관계없이 자연인이 일반은총을 통하여 “율법전파의 정도”의 효과를 가지는 “일반적 은혜(보통은혜)”에 의한 부르심이 있다. 또 교회의 복음전파를 통한 “외적인 부르심”은 차별 없이 누구든지 상대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마22:14)인데, 교회의 복음전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믿지 않는 자에게도 복음의 일반 은총적 효과는 임한다.(사55:10-11). 마지막으로 “내부적인 부르심”은 개인적으로 또는 공중적으로 전파된 교회의 복음말씀을 들은 자들의 마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열려지고 참으로 믿게 됨을 가리킨다. 마지막의 내적인 부르심의 결과는 그 대상자에게 중생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박윤선이 주장한 “내부적인 부르심” 속에서 구속주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 박윤선은 중생(重生)의 주체, 즉 “중생의 사역자는 하나님의 성령과 그의 말씀이다.”라고 성경주석을 근거로 여러 번 강조한다. 그는 바빙크의 중생에 대한 정의를 인용하여 자신의 중생에 대한 정의로 대신한다. 중생은 사람의 영혼의 본체(substance)를 별도로 만드는 새로운 창조도 아니고, 외부적인 도덕적 개선도 아니고, “오직 사람의 성질의 영적 갱신”이다. 이 갱신은 사람의 행위, 생활 방식, 사상, 활동뿐만 아니라, 사람 전체가 본질상 핵심에 있어서 변동을 받는 것이며, 심지어 그 사람의 몸도 이 변화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다. 중생의 결과의 네 가지 내용은 시간적 선후 없이 동시에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중생의 결과로 자아의 분열이 일어나며, 죄책감을 가지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생기며, 중생의 네 번째 결과는 “유효한 은혜(efficacious)”인데, “구속의 은혜는 그것이 상대한 자들에게 효과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중생은 죄인에게 내부적으로 선한 변동을 일으키시는 “신창조의 역사”(겔11:19; 요5:24; 고후5:17; 엡4:24; 골2:13)이다.
셋째, 박윤선은 회개(悔改)를 정의하기를, “회개는 사람이 전 인격으로 그리스도(하나님)께 돌아오는 영적 태도이다. 그는 지식적으로 죄를 분별하고, 감정적으로 죄를 미워하고,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결단하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는 신앙의 결단으로 그리스도께 돌아와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의 죄도 고치고 이긴다. 믿음이 없는 회개는 죽은 회개이고, 회개할 줄 모르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인간의 회개는 하나님께서 성립시키”시며, 회개하는 자에게 죄 용서와 고치심의 은혜가 주어진다. 박윤선의 경우, 회개에서도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넷째, 박윤선은 신앙을 네 종류로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귀신도 가질 수 있는 “역사적 신앙”(약2:19), 인간의 초자연적 행동을 믿는 “이적 신앙”(요1:49-51; 마7:22-23), “일시적인 신앙”(마13:20-21; 딤후4:10), 그리고 “구원받는 신앙”이 있다. 구원받는 신앙은 “중생한 생명의 뿌리를 가진 믿음이니, 사람이 중생할 때에 그 심령에 하나님이 심으신 씨와 같은 믿음이다. 이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적 전도 내용을 받고 우리의 사죄와 구원 완성을 위하여 지금 하늘에 살아 계신 전능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신뢰함이다.”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건과,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인격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다는 것이다. 박윤선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성령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함으로써 믿음의 성령론적 차원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신앙이 단순히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고,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며(엡2:8)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성립된다는 것이다.” “성경과 정통신학에 따르면, 신앙은 복음을 듣는 자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되(롬10:17) 그 듣는 자의 심리로 작용한다(행16:14). 강한 신앙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긴다.
다섯째, 박윤선의 다음 주장 속에서 칭의(稱義)에 대한 정의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칭의는 법정 용어로서 범죄자가 법적 선언에 의하여 옳게 여김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그 죄인이 옳게 여김을 받는 것은 그 자신에게 의(義)가 전혀 없이도 성립되는 것이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하나님은 그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자’라고 법적으로 선언하신다. ‘그리스도의 의’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이루어진 열매이니 곧 하나님의 의(義)이다.(롬16:10; 롬4:25) 신자에게 주시는 칭의 선언이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고 그 사람의 도덕적 자격과 무관하다는 진리는 롬4:4-5의 말씀- … 이 명확히 드러낸다.” 박윤선은 칭의의 특징을 성화와 비교하여 여섯 가지로 언급하는데, 첫 번째 특징은 칭의는 성화보다 논리적으로 우선하며, 세 번째 특징을 “칭의는 하나님께서 선언하시고 성화는 성령께서 시행해 주신다.”라고 비교 설명한다. 비록 박윤선이 성령을 칭의에는 결부시키지 않고, 성화에만 결부시키지만, 박윤선은 믿음에 의한 칭의를 주장하고, 믿음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며, 성령의 은사라고 주장한 점을 고려해 볼 때, 결국 그가 이해한 칭의는 성령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을 것이다. 그는 칭의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시고, 우리에게 전가(轉嫁)하시는 의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칭의의 근거는 신자의 신앙도 아니다. 신앙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방법일 뿐(요1:12) 공로가 아니다. 더욱이 신자의 어떤 선행도 칭의의 근거는 될 수 없다(롬3:28; 갈2:16; 3:11). 칭의의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으심으로 확정된 그의 의(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피동적 순종으로 성립된 의로움)로만 성립된다. 이 근거는 하나님이 성립시키신 제도적 보장이니,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법적 보장이다(롬5:14-21).”
여섯째, 박윤선은 성화(聖化)의 사역을 삼위일체론적으로, 특별히 성령론적으로 규정한다. “신자를 성화시키시는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 살전5:23에 ‘(아버지) 하나님이 친히… 라는 말씀이 신자들의 성화 문제와 관련되어 나온다. 뿐만 아니라 성화의 작업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것은 성화의 방법으로 그 자신을 희생하셨기 때문이다. … 그리고 성경은 신자의 성화 작업을 이루어 가시는 성령의 역사를 두드러지게 역설한다. 그 이유는 구속의 경륜으로 보아 성령께서 특별히 인간 존재의 내부에까지 들어오셔서 믿음과 덕을 발생하게 해 주시기 때문이다. 신자의 모든 덕행은 성령의 열매이다.(갈5:22-23) … 성화는 신자의 잠재의식에서도 실현되어 간다. 성령의 동정(動靜)에 대하여는 인간의 전적 이해가 불가능하다(요3:8). 그러나 신자가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가운데 성령의 은혜를 받아서 성화되기도 한다.” 성화는 “성령께서 신자로 하여금 점차 거룩해지도록 하시는 역사이다. ‘저(주님)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호3:18하). 성화는 단번 사건이 아니고 계속 성취해 나아가는 과정(process)이다.” “신자를 성화(聖化)시키시는 이는 성령이시다(갈5:22-13). 그러나 신자 자신은 순종해야할 책임자이다(고전15:58; 빌2:12; 골3:5; 히12:4).”
일곱째, 박윤선이 말하는 “성도의 궁극적인 구원”은 일반적으로 불리는 “성도의 견인(堅忍)” 교리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뵈트너(Loraine Boettner)의 견해를 따라서 주장하는 바, 성도의 “구원의 견고성(확고성)”은 인간의 어떤 행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만” 달렸기 때문에 성도의 구원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비록 성도가 일시적으로 타락할 수 있지만,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민된 자격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참으로 택함 받은 성도라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다른 사람이 알게 또는 모르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날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박윤선은 범죄한 성도에 대한 교회의 사랑에 근거한 권징을 주장한다.
여덟째, 신자의 ‘영화(榮化)’를 박윤선은 두 가지의 경우에 적용시켜서 이해한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이루어지는 “육신의 부활” 또는 “몸의 구속(몸의 부활)”을 가리키고(롬8:18-26, 30), 다른 하나는 신자가 목숨을 거둘 때, “신자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 즉 “신자의 별세”를 가리킨다.(살전4:14; 계14:13; 딤후2:11; 고후5:8; 히12:23; 시73:24) 신자의 구원서정으로서의 영화와 관련하여 박윤선은 성령의 역사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성도의 영화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주장이나, “신령한 몸”(고전15:44)에 대한 주석에서 “몸”(σῷμα)이라는 말은 ‘영’(πνευμα)이라는 말과 다르며(눅24:37-39), 신자들이 다시 살아 날 때 그 몸이 성령의 전적인 지배를 받지만, 역시 몸이라는 그의 주장과 구원순서를 논의하는 2장의 제목이 “성령의 은혜”라고 붙인 점에 근거해 볼 때, 박윤선이 이해한 성도의 영화는 성령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보았다시피, 박윤선이 이해한 구원순서에서 신자의 구원의 주체는 일차적으로 구속주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지만, 특히, 구속주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고유한 역사로 나타난다. 또한 박윤선은 대부분의 구원순서에서 믿음을 밀접하게 결부시킨다. 구원순서의 성격과 관련해서, 박윤선은 “단계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가 하면, 성화와 비교하여 칭의를 정의할 때는 칭의가 성화보다 “논리적으로 우선”한다고 말함으로써, 구원순서를 단계적 순서로 이해하는지 논리적 순서로 이해하는지, 또는 단계적인 동시에 논리적인 것으로 이해하는지 분명치 않다. 칼뱅과 박형룡은 구원순서를 시간적․단계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신학적․논리적 순서로 이해한다.
2. 성령과 교회
1) 성령의 은사공동체로서의 교회
박윤선은 교회를 삼위일체론적이며,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해한다.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들의 모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은사공동체이다.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메시아에 대한 신앙을 공유함으로써 구속사적인 맥락 속에서 구약의 광야(廣野)교회(행7:38)와 연속성을 갖는다.
“‘교회’(ἐκκλησία)라는 말은 ‘불러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하나님께서 택하시어 불러내신 사람들의 단체이다(롬11:1-5; 벧전2:9).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이 누구인지 이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아시는 이는 하나님 뿐이시다. 그들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자들이다. 칼빈(John Calvin)은 말하기를 ‘선택의 거울은 그리스도(그리스도를 믿는 신앙)’라고 하였으니, 누구든지 진실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택함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또한 교회는 “메시야의 수반(隨伴) 현상”이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약의 교회를 직접 세우셨지만, 교회는 구약과의 관계 속에서 구속사적으로 그리고 메시아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신약의 교회의 설립이 구약 계시의 성취라고 생각할 때에 문제는 명백하게 해결된다. 구약 계시는 메시야의 오실 것을 예언하여 왔는데, 신약시대에 메시야가 오심으로 그것이 성취되었다. 메시야가 오셨다는 말은 곧바로 교회에 대한 구약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교회는 메시야의 수반(隨伴) 현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박윤선은 구속사의 틀 속에서 교회를 그리스도론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윤선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교회의 설립과 양육을 위해서 성령을 보내시고, 신자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신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일로 인하여 또 교회를 양육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셨다. … 신자들에게 가각 다른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첫째, 교회의 통일을 위한 것이고 둘째, ‘유익하게’(πρὸς τὸ συμφἐρον)한다는 것이다.”
박윤선은 신약시대 교회관의 변천을 다루면서 순교자 저스틴(Martyr Justin)의 글을 인용한다. “기독교회는 성령 받은 자들의 단체라고 하였다.” 박윤선은 “유기체(Organism)로서의 교회와 기관(Institution)으로서의 교회”를 취급하면서, 교회를 유기체로 비유하는 이유는 “몸은 단합체일 뿐만 아니라 생명체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관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논의에서 그는 속죄와 관련 없이 자연과 은혜를 병립시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이원론적인 교회관을 비판하고, 교회의 기관과 제도가 자연에 속할 수 없다는 칼뱅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기관 교회는 은사의 기관적 표현인만큼 거기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은사 중심으로 선출되어야 한다. … 누구든지 그의(가, 필자) 받은 은사에 따라서만 몸된 교회를 봉사할 수 있다. 교회에서 은사 없이 일한다는 자는 도적이요 강도이다.”라고 말한다.
비록 ‘유기적 생명체’라는 용어는 생물학적 용어이고, ‘기관’이라는 용어는 사회학적 용어와 깊은 관련이 있을지라도, 박윤선이 이해한 유기적 생명체로서의 교회와 은사공동체로서의 교회라는 사상 속에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론적인 동시에 성령론적인 관점이 강하게 발견된다. 교회의 “성결성”, 즉 “거룩성”, 교회의 직분(직원)의 자격 조건으로서의 은사의 수여와 은사를 통한 봉사, 교회의 영적 권세, 영적인 것과 사랑에 기초한 권징, 등에 관한 그의 논의에서도 박윤선이 교회를 성령론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박윤선은 은사론에 근거하여 만인제사장직과 직결되는 “일반교역”뿐만 아니라, 교회의 직분(직원)에 해당되는 “특수교역”도 인정하고 있다.
“교회의 교역자들은 평신도와 다른 제사장 계급은 아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특수 제사장은 없다. 교역자들은 제사장이라고 한다면 일반 평신도들도 그런 의미의 제사장이다. … 교회의 교역자들은 하나님의 은사에 의하여 어디까지나 봉사자이다(벧전4:9-11).”
“우리들은 은사를 받은 후에도 그 은사는 주님의 것이다. … 각기 받은 은사대로 봉사하도록 되어 있다(벧전4:10-11). 직원도 그 받은 은사의 종별에 따라 그 은사의 위치에서 봉사하는 것 뿐이다. 예를 들면 목사라는 직원은 그 신분 자체가 남 보다 높은 것이 아니고 그 받은 은사도 다른 은사들 보다 계급적으로 높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받은 은사(곧, 가르치는 은사와 다스리는 은사) 때문에 교회를 봉사한다.”
2) 은혜의 방편: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세례와 성찬)
박윤선은 은혜의 방편을 정의하기를 “은혜의 방편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및 성례를 말하다.” 교회의 직분에 대한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모두를 반대한 박윤선은 “은혜의 방편”, 즉 은혜의 수단의 문제에서도 로마 가톨릭교회의 객관주의와 “신비가들”의 주관주의를 비판하고, “개혁주의 교회”의 길을 걸어간다고 말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은혜의 방편으로서 성례가 그 자체에 은혜를 보관하고 있다고 그릇되게 말한다. 그리고 신비가들은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을 강조하면서 말씀(성경)과 성례는 심령 속에 은혜의 역사를 비유할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교회는 위의 두 가지 견해를 반대하고, 하나님은 은혜의 방편에 절대적으로 매이지 않으셨으나, 그가 그것들을 그의 기쁘신 뜻대로 사용하신다고 믿는다.”
어떤 학자들은 교회, 신앙, 회개, 기도를 은혜의 방편으로 간주하지만, 박윤선은 교회는 은혜의 방편을 실행하는 자이고, 회개, 신앙, 기도는 은혜를 받은 결과로 생기는 신자의 주관적 행위이기 때문에, 이것들은 중요할지라도, 은혜의 방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1)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
박윤선은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중심으로 이해하되, 성경과 설교와 성령의 역사를 포함하여 매우 포괄적으로 관련시킨다. 칼뱅이 사용한 용어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중심으로, 박윤선에게서 “성령의 영감”과 “성령의 내적 조명”과 “성령의 수단으로서의 성경” 말씀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하나님의 말씀, 필자) 인격적인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지도 않거니와 어느 때에나 하나님에게서 직접 나오는 계시를 가리키지도 않는다. 이것은 기록된(영감된) 말씀을 가리키는데 주로 증거자의 입으로 전파되는 때의 그 말씀(성경)을 가리키나, 그 밖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자들을 접촉하는 그 말씀도 가리킨다.”
박윤선은 성령의 사역 없이 말씀의 사역만을 강조하는 것을 율법주의로 정의하고, 말씀의 역사를 등한시하면서 성령의 역사만을 강조하는 것을 반율법주의라고 정의하면서, 양자를 동시에 비판한 뒤, 자신은 “개혁주의” 관점에서 말씀과 성령의 동반을 주장하면서도, 특별한 경우에는 말씀이 없이도 사역하실 수 있는 성령의 사역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여기서 루터와 루터주의는 성령과 말씀의 관계에서 “말씀에 의하여”(per verbum) 라는 말을 사용하여 말씀이 성령보다도 우월성을 지녔다면, 칼뱅은 “말씀과 함께”(cum verbo) 라는 말을 사용하여 박윤선처럼 성령과 말씀의 밀접한 관계를 확보하면서도, 말씀에 대한 성령의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율법주의는 말씀 사역만 강조하고 성령의 역사를 필요하게 느끼지 않는 반면에, 반율법주의는 성령의 역사만을 필요하게 보며 말씀의 역사를 등한히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말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의 동반을 주장한다. 성령께서 말씀 없이 역사하실 수도 있으나 보통으로는 말씀과 함께 역사하신다.”
박윤선은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의 글을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하여 인용하는데, 성령과 관계된 부분을 재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나 성령에게서도 분리되지 않는다. 성경 전체가 성령으로 영감되었고 계속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보관되며 능력있게 되는 만큼, 거기서(성경에서) 취하여 전파되는 부분적 말씀도 역시 그러하다.” “개혁자들은 성경 말씀의 능력 있는 역사를 무인격한 마술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늘 성령으로 역사하신다고 생각하였다. 성령은 늘 말씀과 함께 하시며 말씀으로 활동하시되, 언제나 같은 모양으로 역사하시지는 않는다.”
박윤선에 의하면, 율법과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전(全) 내용이며, 율법과 복음은 서로 동반되어 구약시대에도 있었고, 신약시대에도 있었다. 사실상 구약시대에도 복음은 약속의 형태로 있었고, 이 약속의 형태의 복음이 신약시대에는 성취의 형태로 완성된 것이다.
박윤선의 경우,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기록된 성경 말씀은 성령으로 영감된 말씀이며, 오늘날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역사하게 된다. 성경말씀은 반드시 성령의 사역의 동반을 통하여 역사하지만, 특별한 경우 성령은 말씀 없이도 역사하실 수가 있다. 그에게서 말씀에 대한 성령의 우월권이 발견된다.
(2) 성령과 성례(세례와 성찬)
성례는 세례(유아세례)와 성찬으로 구성된다. 박윤선은 말씀과 성례를 다음과 같이 비교한다. “(1) 말씀은 성례 없이도 스스로 존재를 유지하며 또 스스로 완전하나, 성례는 말씀 없이 스스로 완전할 수 없다. (2) 말씀으로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며 믿음을 견고케 하나, 성례는 다만 믿음을 견고케 할 뿐이다. (3) 말씀은 세계 그 어디든지 가지만, 성례는 진실한 신자들만 상대한다.”
박윤선은 세례의 의미를 크게 세 가지, 즉 계약에 가입하는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의 표에 대한 의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칼뱅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구약의 할례의 연장선, 곧 계약론의 입장에서 유아세례를 주장한다. 계약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세례와 할례는 표지의 모양은 서로 다르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씻는다는 것과 영적으로 우리의 육을 죽인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세례 받는 바로 그 시각에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은 아니지만, 유아도 중생케 하는 성령을 받는다.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성경 말씀의 사역에서도 성령의 사역이 중요하듯이, 은혜의 방편인 성례에서도 성령의 역사가 중요하다. 박윤선은 유아세례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성령의 사역을 강조한다. 여기서도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유아세례보다도 그 방편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역사의 우월성이 나타나고 있다.
“성례는 인간들의 의식(儀式)에 매이지 않고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 주시는 방편이 될 수도 있다. 성령께서 무식한 유아에게는 사역하시지 않는다고 단언할 근거는 없다. 사람이 은혜계약에 참여하여 효과를 누림은 그의 지식 때문만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 칼빈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유아들에게도 역사하시는 사실과, 유아들도 신앙과 중생에 참여하게 됨을 절대로 부인하지 않는다.”
박윤선은 성찬의 의미를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성찬집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명령이다. 성찬은 기념의 행위를 가지고 있다. 성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파하는 행사이다. 성찬과 관련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화체설을 강하게 비판하고, 루터의 공재설도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한 것”이라고 비판한 박윤선은 츠빙글리의 기념설은 약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칼뱅의 입장에 동의하면서, “신비설”, 즉 “영적 임재설”을 제시한다. 칼뱅과 핫지와 바빙크의 주장을 자신의 주장으로 언급한 다음의 글 속에 그의 성찬론은 성령론과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는 사실이 충분하게 밝혀진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성찬을 시행할 때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능력적(dynamic)으로 임재한다. 이는 마치 태양이 하늘에 있으면서도 그의 빛과 열이 땅에 임함과 같다. 그리스도의 몸이 성령의 중개에 의하여 그 영향력이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임한다. 그것은 성령의 영향력과는 다르다.’ 라고 하였다. 칼빈의 말한바 ‘그리스도의 몸의 능력적 임재’에 대하여 핫지(Archibald Alexander Hodge)는 해석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임한다 함은 성령에 의하여 그 속죄의 효과가 그 성찬을 받는 자에게 미침을 의미한다.’ 라고 하였다. 바빙크는 칼빈의 학설을 신비설(mystical theory)이라고 하였다.”
성찬의 의미에서는 칼뱅의 견해와 함께 츠빙글리의 기념설적인 측면도 받아들인 박윤선은 성찬에서 성령의 역사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박윤선에게서 말씀에 종속되는 성례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성례의 효과는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박형룡은 “은혜계약”을 삼위일체론적으로, 특히, 예정론(선택론)적으로, 그리스도론적으로 그리고 성령론적으로 이해하였다.
“(1) 이 계약(은혜계약, 필자)은 은혜로운 것이니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담보하시는 구주를 주시어 이 약속이 실현되게 하신 까닭이고, 또한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사 우리의 언약 관계의 책임을 실행케 하시는 까닭이다. (2) 이 계약은 삼위일체적이라 함이 옳다. 그 이유는 이 계약 체계에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셨고, 성자께서는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시어 구원을 이루시고, 성령님께서는 그 이루신 구원을 각인에게 시행하시는 까닭이다(요1:16; 엡2:8; 벧전1:2). (3) 이 계약은 영원 불변한 것이며(창17:9; 삼하23:5; 행4:12; 히13:8, 20), 또한 제한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모든 인생 전부를 위한 것이 아니요 택한 자들만을 위한 것이다.”
결국, 박윤선은 은혜의 방편(말씀과 성례) 없이 성령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한 주관주의적 열광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성령의 역사 없이 은혜의 방편만을 강조하는 율법주의, 가령 성례 자체가 자동적으로 효과를 발생시킨다는 사효론(事效論, ex opere operato)을 주장한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면서, 성령과 “은혜의 방편” 사이의 밀접한 관계성을 강조하면서도, 성령의 자유와 우월성을 인정하였다. 왜냐하면 특별한 경우, 성령께서는 은혜의 방편 없이도 역사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3) 성령의 은사
앞에서 이미 말했다시피, 비록 박윤선이 이해한 성령의 은사는 구원론과도 밀접한 관계 속에 있지만, 그의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이해는 그의 교회 이해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교회론은 삼위일체론적 교회론인 동시에, 성령론적 교회론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특별히 고린도전서 12:4-31절에 대한 주석을 근거로 성령의 은사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설립과 양육을 위하여 성령을 보내주셨다. 또한 “신자들에게 각각 다른 은사를 주시는 이가 동일하신 성령”이신데, 성령의 은사가 주어진 목적은 두 가지, 즉 교회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유익하게”, 다시 말하면, “공동적 유익을 위하여”(for the common good)”이다. 박윤선은 고린도전서 12장 31절을 주석하면서 “은사를 구하는 동기도 사랑이고 은사를 사용하는 방법도 사랑”이라는 점을 역설한다.
“지혜의 말씀”은 “이 세상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아니고, 하나님을 알게 하는 영적 지혜”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기본적 진리, 곧 복음이며,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도적 기록인데 후대에 “전승된 신약성경”(딤후3:15)이다.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은 사도들에게만 국한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지혜의 말씀”을 다루는 자가 목사인데, 목사는 사도의 권위를 가지지는 못하였으나, 사도의 복음을 가지고 전파하며, 가르친다.
“지식의 말씀”에서 “지식”은 “세속적” 지식이 아니라, 복음을 지식적으로 잘 가르치는 은사(재능)이다. 이 은사를 가진 자는 “세속적 지식까지도 성화하여” 복음전달에 활용한다. 이 직분을 가진 자가 구약의 에스라, 신약의 아볼로, 오늘날에는 교사인데, “목사 곧 교사”이다. 교사는 기존의 복음지식을 밝혀서 전달하는 영적 직능을 가지지만,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사도처럼 원천적으로 계시를 받는 직분은 아니다.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이라는 구절에 대하여 박형룡은 어떤 곳에서는 능력 행함과는 별도로 “영력 있는 믿음”으로 이해하여, 세례요한이 여기에 해당되며, 이로 인해 “성역에 많은 열매를” 맺게 한다고 해석하고, 다른 곳에서는 여기서 의미하는 “믿음”은 신자가 개종할 때의 결신한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할 수 있는 생산력 있는 믿음”을(살전1:3; 살후1:1; 요6:29; 갈5:6; 히6:10; 약2:22)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병고치는 은사”는 하나님에 의해 주권적으로 주어지는데,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 은사는 “특별 섭리의 형태(사도적 이적과는 다름)로 계속 존재한다.” 이것은 한 사람의 영광이나 사욕을 위한 것이 아니고(약4:3), “남(교회)을 돕기 위한 것이다.” 병고치는 은사가 있는 성도는 자신의 자유로 그것을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의 여부를 알아보고 기다려야 한다(요일4:1)고 말함으로써, 박윤선은 신유(神癒)의 은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사용의 목적과 방법에서 신중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취급한 병자들은 모두 치료되어 재발하지 않았으나, 오늘날 교회시대의 신유는 병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될 때도 있지만, 재발되는 경우도 있다.
“능력 행함”은 “이적(異蹟)”을 가리키는데,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에게만 국한되어 주어지며, 이적은 하나님께서 흔하게 행하시지 않는 “희적(稀蹟)”이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혹시 어떤 신자에게”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시지만, 이 이적은 성경에 기록된 계시적 이적과 같은 것이 아니고, “특수 섭리(보통 섭리가 아님)”에 속하며, “교회 이적”(Church miracle)으로 불리기도 한다.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의 구절을 해석하는 가운데, 박윤선은 어떤 곳에서는 “예언함”의 헬라어의 의미는 ‘미리 말함’이 아니고, ‘선포함’(proclamation)인데, 신의 대리자가 신의 뜻을 해명하는 것으로써, “예언” 곧, 대언의 은사는 미래의 될 일을 예고하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일반적으로 알려주는 사역인데, 오늘날의 설교자가 이 사역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다른 곳에서는 “예언함”의 헬라어의 의미는 ‘미리 말함’에 국한되지 않고, ‘대언함’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대리자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해명하는 것이며, 그러나 여기서는 어떤 사건에 대한 선견(先見)의 영감을 가리키는 바, 바울과 빌립의 딸의 예언(행11:28; 21:9-11)이 여기에 해당되며, 오늘날에는 신구약으로 계시사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이 같은 예언은 전혀 없고, “구원사와 계시사의 궤도”를 떠나 조작한 것이나 윤리적이지 아닌 것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해석한다. “선지자”(고전12:28)는 신약시대(사도시대)에 예언한 자를 가리킨다. “예언하는 자”는 “대언(代言) 자”로서 사람에게 덕을 세우며, 권위하며, 안위하였는데(고전14:3),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계시를 받아 대언하였고(롬12:6),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어떤 특별한 사건을 예고하기도 하였다.(행11:28; 21:11) 그러므로 그들의 사역도 사도들의 사역과 함께 신약교회의 기초를 이루었다.(고전12:28; 엡2:20) 그러나 오늘날 교회시대에는 계시로서의 예언은 존속하지 않고, 다만 사도와 선지자의 말씀의 전달자인 성경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성경은 설교자에 의하여 설교로 전파된다. 대언이 건덕, 권면, 안위를 그 기능으로 한 것인 만큼(고전14:3) 설교도 그러하다. 다만 대언자의 경우, 하나님의 말씀이 초자연적으로 그에게 찾아왔으나, 설교자의 경우,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성경)께로 나아가야 한다. 곧 설교자는 말씀의 수종자이다.
오늘날의 교회에도 사도시대와 같이 미래의 일을 계시 받아 말하는 예언자가 나타났다고 할 경우, 그 예언이 맞지 않을 경우에는 배척하고, 맞을 경우는 거부하기는 곤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언을 “받아들여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박윤선은 주장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대의 예언보다 권위 있는 성경을 가졌으며, 또한 그것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롬14:5)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들 분별함을”의 구절에 대한 주석에서 박윤선은 바울의 사역과 초대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예를 들면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곳에 마귀도 한편으로 유익한 일을 하는 체하면서 역사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열매에 따라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분별되기 때문에(마7:16), 성경에서 영들 분별에 관한 말씀을 명심할 것을(고전14:29; 요일4:1) 박윤선은 우리에게 촉구한다.
방언의 정의와 관련하여, 박윤선은 칼뱅의 견해와 흐로세이드(F.W. Grosheide)의 견해를 소개한 뒤에 그들의 해석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방언은 “이적적으로 되는 말”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공통점이 있으며, 또한 고린도전서 14장 22절에도 “표적”(σημειον)은 “이적”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오늘날 교회의 시대에는 사도의 증표를 보여주는 이적은 없다고 할지라도, “특별섭리 정도의 이적”이 있는데, ‘병고치는 은사’처럼 방언은 계시 사건에 속하지는 않지만, “특별 섭리”에 기초한 하나님의 “특별 간섭”이라고 박윤선은 말한다.
박윤선은 사도시대의 방언과 오늘날 교회시대의 방언을 상호 구별시키면서 방언을 제한적으로, 즉 공적으로는 금지시키되, 사적으로는 허용한다.
“우리는 오늘날의 방언을 사도시대 곧 계시시대에 나타났던 방언과 같은 수준의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현대의 방언운동에 많은 그릇된 것들이 드러난다. 그런 것들은 조직적이고 번쇠(번쇄, 필자)하고 심지어 기만적인 것이다. 이런 방언들은 물론 금지되어야 한다. 다만 방언을 함이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 줄 알고 방언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고전 14장의 교훈을 지켜야 할 것이다. 그것은 ① 공적 자리에서는 방언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고전14:19), ② 이와 같이 합당하게 방언하는 이가 있을 경우에 그것은 사적인 행위(privacy)이므로 금할 것까지는 없다(고전14:39).”
교회시대에 방언이 있을 수 없다는 학설에 대하여, 박윤선은 신약에 기록된 방언도 성령의 은사이며(행2:4; 10:45-46; 19:6; 고전12:10), 교회시대에 나타난 방언들 중에 거짓된 것들도 있지만, 성령의 역사로 된 참된 방언이 전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라고 반문하면서, 이것은 아직도 논쟁의 문제라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목회상담적 측면에서 목회자들은 참 방언에 대한 찬․반 양론이 있다는 것을 알고, 방언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4장에 위반되지 않도록 권면할 것을 박윤선은 답변한다. 특히 그는 고린도전서 14:6-40절을 주석하면서 방언사용의 원리에 대하여 7 가지를 제시한다.
“서로 돕는 것”, 이 은사는 “다른 사람들을 단단히 붙들고 돕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서 12장 6-8절에 이 은사가 강조되어 ‘섬기는 일’(7절), ‘구제하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8절)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다스리는 것”, 이 은사는 다른 사람들을 올바로 인도하여 바른 길에 행하도록 도와주는 안내자와 같은 봉사하는 은사이다. 이 은사를 받은 지도자는 지배자의 자세가 아니라, 함께 참여자의 자세를 취하면서 돕는다.(눅22:26). 이 은사는 신약교회의 ‘감독’ 혹은 ‘장로’의 직분을 감당 할 수 있는 것이다.
4) 성령의 열매
박윤선은 “성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과실을 맺어야 된다.” 고 말하면서, 성령의 열매를 매우 강조한다. “신자의 모든 덕행은 성령의 열매이다.(갈5:22-23)” “사랑”은 인간 자신의 소유에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을 밑천으로하고”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랑에는 “죄인 사랑”과 “원수 사랑”이 중요한다. “희락”은 사랑의 열매이며, 사랑이 있는 곳에 희락이 있고, 희락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으며, 희락이 있어야 신앙이 자라고 감사가 일어난다. “화평”은 비진리에 대한 타협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사랑의 열매로서의 화평은 남의 죄를 용서함으로써 오는 것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인내”를 중심으로, 소극적인 인내는 어려움을 당할 때, 기다리는 것이며, 적극적인 인내는 수많은 실패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약속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다. “자비와 양선”은 서로 대동소이한데, 자비는 내적인 마음의 친절이라면, 양선은 “질적 선미(質的善美)를 가진 외부적 사업”이다. “충성”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함이며, 변절이 아니기 때문에, 진실하게 주님의 부탁을 지키는 것이다. “온유”는 특별히 대적(對敵)에게 복수하지 않고, 부드러운 인격으로 이기는 것이다. 박윤선은 신자에게 “절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절제는 “자기 파악(把握), 곧 자기 조절(調節)”이다.
5) 성령세례, 성령충만, 성령 훼방죄 그리고 입신
(1)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박윤선은 “오순절 운동(運動)과 선교(宣敎)”라는 논문의 제 4장의 제목을 “Ⅳ. 오순절 성령 강림은 성령세례임(행1:5)”이라고 단정함으로써, 성령세례는 오순절 성령강림임을 주장한다. “이런 긴장을 가지고 기다렸던 ‘아버지의 약속’ 내용은 위에 벌써 관설된 바와 같이 성령의 세례이다.” 그는 “성령세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질문한 후에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성령세례란 것은 언약에 참가함을 말함이다. 고전12:13에 말하기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아도 성령의 세례는 불신자로서 회개하고 믿어 계약 백성의 단체(그리스도의 몸)에 속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말함이다. 스토트(Stott)는 말하기를,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누구든지 구원계약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 그러므로 성령의 세례는 반드시 성령 충만에 국한된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바울은, 성령의 세례를 받은(고전12:13) 고린도 교인들을 肉에 속한 자라고까지 말했다.”
결국 박윤선은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성령 세례로 이해하고, 오늘날 교회시대에 그리스도인이 이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임 받는 것을 성령 세례로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암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성령세례로 규정하면서, 우리들에게는 성령 충만으로 적용하고 설교하였다. 그의 사도행전 2장 주석에 ‘성령 충만’에 대한 설교를 4편이나 수록하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 때 성령 충만이란 개인이 받는 성령의 충만을 의미하지 않고 성령의 신약적 성격을 의미한다고 정암은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요한의 물 세례에 대조하여 언약의 영적 축복에 참가하는 것을 말한다.”
박윤선이 이해하는 “성령 충만”은 “성령의 신약적 의미”도 있지만, 그리스도인 각자의 영적인 삶과 연계되어 다양하게 이해된다.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이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는 것은 “영적 지혜가 충만”하다는 것이며, “‘성령이 충만하다’ 함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사의 분량이 풍부함’을 의미한다.” “바울이 이때에 ‘성령이 충만’하였으니 그것은 그 때(원수가 진리를 대적할 때)에 필요한 은혜였다.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적절한 은혜를 주신다(히4:16).” “성령을 충만히 받는다 함은, (1) 술에 취한 자의 전신에 술이 감염된 것처럼, 성령님의 감화력이 신자의 심신(心身)에 가득한 것이겠으며, (2) 술에 취한 자의 생각과 행위를 주관하듯이, 성령님께서 그 신자의 생각과 행위를 주관하시는 것이다.”
비록 어떤 사람은 방언의 은사를 성령 세례나 성령 충만과 직접적으로 불가분리의 관계로 이해하지만, 박윤선은 성령 세례는 반드시 성령 충만에 국한된 표현도 아니며, 또한 방언의 은사를 받지 않아도, 성령 충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방언하는 자만이 성령 충만을 받았다고 하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하지만 이적에 관한 이와 같은 언급은 역시 복음 선교의 세계적 전개를 상징하기도 한다. … 교회 역사상에는 성령 충만을 받은 신자들 가운데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례들이 많다.”
(2) 성령 훼방죄
박윤선에 의하면, 알고 짓는 죄 중에서 가장 악한 종류의 죄인 성령 훼방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한다. 성령 훼방죄가 언급된 성경 구절들(마12:31-32; 눅12:10; 히6:4-6; 히10:26-27; 요일5:16) 중에서, 누가복음 12장 10절에서 말하는 성령 훼방죄는 “하나님의 뜻(성령의 역사나 복음)을 미움(하나님께 대한 증오)으로 대적”하는 것이다. 박윤선은 성령 훼방죄에 대한 흐레이다누스(S. Greijdanus)와 바빙크의 주장을 소개한다.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신성은 숨겨진 측면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되는 성령의 역사는 매우 명확히 나타나는데, 명확히 나타난 성령의 역사의 사실을 마귀의 역사로 방해하는 바리새인들은 성령 훼방죄를 지은 것이다. 또한 성령 훼방죄는 단순한 불신앙이나, 성령에 대한 일반적인 저항이나, 성령의 신성의 부인이나, 율법의 범함이 아니라, “최대한도로 밝혀진 복음을 거스림”인데, 곧 성령 훼방죄는 하나님을 사탄이라 하고, 사탄을 하나님이라 하는 것이며, 이 죄의 성격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고, 마귀적인 것이다.
(3) 입신
박윤선은 입신(入神)의 문제는 성경에 근거하여 판단해야 되는데, 입신은 비성경적이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성경에 나타난 몇 가지 사례들과 오늘날의 입신의 사례들을 비교분석하여 결론을 내린다. 바울이 “셋째 하늘”에 갔던 체험은(고후12:2) 오늘날의 소위 입신이 아니다. 바울이 셋째 하늘(삼층천)에 간 것은 뜻밖에 한 번 체험한 것이었고(고후12:5), 소위 오늘날의 입신을 위주로 하지 않았고,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그렇게 되게 하신 것이었다.(고후12:2-3) 그러나 오늘날의 입신체험자들은 자신의 어떤 체험을 남에게 장려한다. 성경에는 입신이라는 것을 주장한 바가 없는데, 소위 오늘날의 입신을 위주 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따름이 아니다. 또한 그들은 자기가 뜻을 정하고 인위적으로 조작한다. 박윤선은 고린도후서 외에도 성경 다른 곳(행10:10; 계1:12-17; 단8:16-18)에서 요한과 다니엘은 정상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에서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입신을 계시를 보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소위 오늘날의 입신을 매우 부정적으로 판단한다.
Ⅳ. 성령과 종말
박윤선의 “말세(末世)”, 즉 “종말(終末)”에 대한 용어풀이가 요엘서 2:28절과 사도행전 2장 17절에 대한 주석을 중심으로 언급되어 있다. 요엘서 2장 28절의 “그 후에”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아카레 켄”인데, 한글번역처럼 자구적 의미를 취하는 것보다는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 의역하여 인용했던 “말세”(ἐν ταις ἐσχάις ἡμάραις)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 그는 해석한다. 왜냐하면 이 말이 바로 구약의 “말세론 술어”, 즉 종말론의 용어 “아카리드 하야밈”(“후일에”-창49:1; “말일에”-사2:2; “끝날에”-렘30:24; “끝 날에”-겔38:16; “그 후에”-호3:5; “끝날에”-미4:1; “마지막 날에”-단10:14)이라는 뜻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요엘이 말한 바 “아카레 켄”을 다른 선지자들의 “말세론 술어”, 즉 종말론의 용어였던 “아카리드 하야밈”과 동일시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구약의 “말세론적 술어 아카리드 하야밈”의 의미, 즉 “말일”은 글자 그대로 “날들의 최후부”(the farthermost parts of the days)이다.
박윤선은 히브리서 1장 2절과 사도행전 2장 17절과 보스(G. Vos)의 말을 근거로, 종말은 “선지자들이 멀리 바라볼 수 있었던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시작된 신약시대의 전폭(全幅)”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세의 말단(末端)을 지나서 있을 세계, 곧, 무궁세계이다. 우리는 아직 이 복된 세계에 들어가지 않았으나 거기에 매우 접근(接近)해 있다.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 아멘.”
요엘서 2장 28절의 “그 후에”라는 말은 “선지자가 위에서 말한 사건들의 직후(直後)를 가리킴이 아니고 요원(遼遠)한 장래 곧, 그리스도 예수의 초림으로 시작된 신약의 시대를 가리킨다. 이 말이 먼 장래 곧, 메시야시대(우리 기독신자들에게는 신약시대)를 가리킨다는 견해는 유대인 주석가들도 일치한다.”
박윤선은 종말을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시작된 신약시대의 “전폭(全幅)”을 가리키며, 이 메시아의 시대를 지나서 최종적으로 완성될 “무궁의 세계”, “복된 세계”를 학수고대하면서 “마라나타”라고 기도하고 있다. 박윤선의 경우, 이 메시아가 성령과 불가분리의 관계 속에 있듯이, 메시아의 시대 곧 신약시대에도 성령과 불가분리의 관계 속에 있다. “‘내 신’, ‘신’은 물론 하나님의 성령을 이름이다.” 남종들과 여종들에게 부음 바 될 성령은 신약시대에는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에 “차별 없이 내리실 비범한 영은(靈恩)”이다.
무엇보다도 오순절 성령강림을 중심으로 성령론적 관점에서 이해된 박윤선의 종말 사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박윤선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을 “단회적” 사건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해한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새 시대의 진입이요, 교회 시대의 시작의 성격을 나타낸다.” “이것이(오순절 성령 강림, 필자)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구원운동의 원천적 출발”이며, 개핀(Richard Gaffin)은 “이 사건이 종말론적 구원의 의미가 있는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에 포함된다는 점에서 역시 종말론적 성격을 지녔고 따라서 단회적 사건이라고 한다.”
“다락방에 모임 그들(제자들, 필자)은 멀지 않아 新天新地를 볼 듯한 긴박감을 가지고 모였던 것이다. 그것이 실상 모든 주관주의를 떠나 순연히 객관적인 약속 신앙에 붙들린 擧事였다. 그들의 대망하던 아버지의 약속성취라는 것은 종말관적 성격을 띤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약속이 바로 베드로가 해석한 것과 같이, 욜2:28이하의 말씀은 명백한 종말관적 성격을 띤 예언이다. 거기 ‘말세에’란 말의 헬라 원어(ἐν ταις ἐσχάις ἡμάραις)는, 바로 종말 시대를 의미하는 전문 술어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약속 성취로 임한 성령강림을 종말 시대에 속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던(행1:4) 그들의 심정은, 종말관적 긴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박윤선은 장차 신약시대에 나타날 메시아의 초림과 성령 강림에 대한 구약의 예언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사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종말론적 관점에서 성령과 관련하여 이해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완성될 “무궁의 세계”에 대한 이해에서는 성령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대한 언급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이며, “오순절 성령 강림은 선교운동”이라는 그의 주장을 근거로, 교회의 근본적이며, 중심적인 활동인 선교운동인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전파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구현된다고 볼 때, 박윤선은 성령을 하나님의 나라와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개인종말과 성령과 관련하여 앞에서 우리는 “구원론”에서 그리스도인의 “영화”를 다루었다. 박윤선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통해서 이미 이 땅에서 천국의 예기적(豫期的) 성취를 맛본다. 우리가 현세에서 받은 성령이 “처음 익은 열매”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성령을 받은 생활이 “천국”을 완전히 누리기 전에 벌써 “천국”의 첫 맛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세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자녀들과 피조물이 탄식할 뿐만 아니라, 성령도 하나님의 자녀들과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기도하신다.
Ⅴ. 결론
우리는 본고를 박윤선의 간단한 생애, 그의 성령신학에 대한 필자의 논술 방법, 범위 등을 밝히면서 시작하였다. 박윤선의 성령론을 크게, 두 가지, 곧 성령의 위격과 사역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종말과 관계하여 마지막에 다루었고, 성령의 사역을 일반 사역과 특별 사역으로 나누어 논의했다. 박윤선의 성령신학을 다음과 같이 요약․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의 성령신학은 신구약성경과 종교개혁전통, 특히 개혁신학 전통에 아주 근접해 있다. 그러나 방언의 문제에서는 교회 안에서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다.
둘째, 그의 성령신학은 “삼위일체(론)적” 성령신학이다.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시며, 삼위들 중에 제3의 위격이시며, 자신의 고유성과 관련하여 경륜적 사역으로서 구원의 “실시”, “성화” 등의 사역을 하신다.
셋째, 그의 성령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적․인식론적” 성령신학이다.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는 내재적․경륜적으로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이중적(二重的)이다.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성령으로 사역하시고, 성령에 의해서 부활하셨다. 또한 부활․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앉아계시는 고양(승귀)된 예수 그리스도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며,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 부활․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현재 그리스도인과 교회에게 인식되시고, 현존하신다.
넷째, 그의 성령신학에서 성령의 사역은 크게 두 가지다. 창조질서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 역사하시는 창조와 섭리의 사역으로서 일반 사역과, 구속질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중심으로 선택론과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의 영역에서 역사하시는 특별 사역이 있다.
다섯째, 그의 성령신학에서 성령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불러서 중생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일생동안 그와 함께 계시면서, 성령의 은사를 주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여섯째, 그의 성령신학에서 교회는 성령의 은사공동체이다. 성령은 교회의 설립과 양육을 위하여 오셨으며,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통일성과 유익을 위하여 주어졌다. 성령이 사용하시는 중요한 도구는 성경말씀과 두 가지 성례(세례와 성찬)이다. 성령에 의하여 성경말씀과 성례는 효력을 발생한다. 교회의 직분은 성령의 은사를 동반해야 한다.
일곱째, 그의 성령신학에서 성령은 메시아의 영이며, “말세”, 즉 종말의 영이다. 그리스도인은 장차 완성될 “천국”의 맛을 지금 이미 보고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중심으로 전 피조 세계도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우주론적 대망을 하시며, 이를 위해서 탄식하시며, 기도하시는 영이시다.
여덟째, 그의 성령신학에서 특이한 점은 역사적(歷史的)으로 일부 개혁파 정통주의에서 가끔 간과되거나 소홀히 여겨졌던 성령의 은사가 매우 강조되면서도, 일부 열광주의적 성령운동에서 자주 나타나는 특정한 입신이나 특정한 은사의 절대화에 대해 그가 매우 경계하고 있는 점이다. 이 같이 균형 잡힌 주장은 성경주석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아홉째, 서론에서 밝혔다시피, 박윤선의 방대한 분량의 대부분의 작품들을 활용하지 못하고, 주로 그의 『개혁주의 교리학』을 중심으로 논문이 전개된 바, 앞으로 석사나 박사학위 논문 등에서 더욱 심도 있는 그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를 기대한다. 그러나 본 연구가 박윤선의 성령론 연구에 물꼬를 터 주었다는 점에서 연구의 보람을 가지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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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ey Word: ① 박윤선(Yune Sun Park, 1905-1988) ② 성령신학(the theology of the Holy Spirit) ③ 성령(the Holy Spirit) ④ 종교개혁(the Reformation) ⑤ 개혁신학(the Reformed theology) ⑥ 삼위일체론적 성령론(the Trinitarian pneumatology)
ABSTRACT
“The Theology of the Holy Spirit by Yune Sun Park,”
Yoon-Bae Choi, Dr. theol. (Associate Professor of Systematic Theology, Presbyterian College and Theological Seminary, Seoul, Korea)
This study which is made up of five chapters, deals with the theology of the Holy Spirit by Rev. D.D. Yune Sun Park who was born in a farming village in Pyonbuk Province in Korea on December 11, 1905. On June 30, 1988, this Calvinist joined the Lord in heaven. He was a teacher and leader of the Korean Church, as well as a servant who ministered the Word of God with much prayer.
Chapter 2 deals with the Trinitarian pneumatology and the Christocentric-applied pneumatology taught by Yune Sun Park. His pneumatology is anchored in his teaching on the Trinity. In his teaching on the Trinity, he holds fast to Scriptures and the traditional formula ‘one Substance, three Persons.’(una substantia, tres personae) He opposed the antitrinitarians(Sabellius and Arius). There is the double relation between the Holy Spirit and Jesus Christ. He describes the Holy Spirit as having divine priority over against Jesus and Jesus as the bearer of the Spirit. In Paul and John, however, another relation between the Holy Spirit and Christ is dominant. Here Jesus is not so much the bearer of the Spirit as he is the sender of the Spirit.
Chapter 3 deals with two works of the Holy Spirit. Yune Sun Park makes a distinction between the general work and the specific work of the Holy Spirit. For him the Holy Spirit is the ‘effector’ of Creation, of providence and of redemption(Christians and Church).
Chapter 4 deals with the relation between the Holy Spirit and the consummation seen by Yune sun Park. In the work of the Holy Spirit the consummation begins. The Holy Spirit makes us long for the consummation. The Holy Spirit is the first fruits and the guarantee of the future. We know that the whole creation has been groaning in travail together now. And not only the creation, but we ourselves, who the first fruits of the Spirit, groan inwardly as we wait for adoption as sons, the redemption of our bodies. For in this hope we were saved.
The theology of the Holy Spirit seen by Yune Sun Park is rooted in Scriptures and the Reformed though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