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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투라 불좌상.> |
사진설명: 마투라박물관 전시관에 전시중인 불좌상. 오른손 바닥에 법륜(천폭륜상)이 새겨져 있다. |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한 곳인 마투라는 특히 불교에게 의미 있는 장소다. 동인도 불교가 북서인도로 확산될 때 '포교거점'이었고, 북서인도의 간다라와 더불어 '불상이 탄생된 곳'이기 때문이다. 2세기 전반 불상을 조상(造像)하기 시작, 무수한 '마투라불'을 만든 중심지였고, 부파(部派) 가운데 설일체유부가 이곳에서 번창했다. 때문에 철로가 승원(僧院) 유적을 가로질러 달릴 정도로 지금도 도시 곳곳에 불교유적이 산재돼 있다.
경전엔 마하캇차나(가전연) 존자가 마투라에서 전도했다는 구절은 있으나, 부처님이 이곳을 직접 방문했다는 부분은 없다. 부처님은 "마투라에는 다섯 가지 화(禍)가 있다"며 가지 않았다 한다. 힌두교 주신(主神) 중 비쉬누의 화신인 크리쉬나신의 탄생지라는 점에서 힌두교와도 물론 인연 깊은 장소다.
뭄바이(봄베이)를 통해 인도 대륙에 들어선 지 9일 만인 2002년 3월13일 밤 8시. 타지마할로 유명한 아그라에 도착했다. 관광도시 아그라는 그때까지 본 인도의 다른 곳과 달리 깨끗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타지마할에 갔다. 새벽인데도 무척이나 사람들이 붐볐다. 1인당 500루피 짜리 티켓을 구입해 타지마할에 들어선 순간, 입이 딱 벌어졌다. 타지마할의 위용에 절로 벌어진 것이다. 거대한 건축물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마투라 위치도> |
5세기 초 마투라를 방문한 중국 동진의 고승 법현스님은 <불국기>에서 "여러 곳을 지나 한 나라에 도착하니 마두라였다. 요포방나(야무나 강)를 지났는데, 강 좌우의 언덕에 30의 승가람이 있고, 스님은 거의 3000명이나 돼 불법은 매우 성했다. 무릇 사하(沙河. 고비사막) 서쪽의 인도제국은 국왕들이 모두 불교를 독신하고 있었다. 왕이 승중(僧衆)을 공양할 때는 천관(天冠)을 벗고 여러 종친·군신과 더불어 손수 음식을 대접하고, 공양이 끝나면 융단(絨緞)을 땅에 깔고 스님들을 윗자리에 앉게 한 뒤 아랫자리에서 스님들을 향해 앉는데, 스님들 앞에서는 감히 상(床)에 앉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200년 뒤 현장스님이 마투라를 방문했을 때에도 불교는 살아있었다. "말토라 국의 둘레는 5천여 리이고,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다. 토지는 비옥하고 농사짓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 집집마다 암몰라과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고 있다. …(중략)… 기후는 무더우며 풍속은 선하고 순박하다. 내세의 덕 빌기를 좋아하며, 덕과 학문을 숭상한다. 가람은 20여 곳 있으며, 승도는 2000여 명 있는데, 대·소승을 겸하고 익히고 있다.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스투파는 셋 있는데, 무우왕(아육왕)이 세운 것이다. 과거 네 분의 부처님의 유적이 참으로 많다."
자세히 보면 법현스님과 현장스님의 기술(記述)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찰 수는 10개나 줄고, 스님들 숫자도 1000명이나 적다. 현장스님이 인도에 갔을 때 불교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고, 마투라 불교도 서서히 힌두교에 길을 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마투라 불입상> |
사진설명: 5세기경 조성된 후기 마투라불을 대표하는 걸작. 적정과 약동, 정신성과 세속성이 탄력있는 몸매와 속이 훤히 비치는 가사에 잘 표현돼 있다. |
사실 마투라 하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불상의 기원지다. 오랫동안 금기로 여겨졌던 불상 조성이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 정확히 알려지진 않았지만, '마투라 기원설'과 '간다라 기원설'로 대별된다. 간다라 불상에 그리스적 영향이 보인다면, 마투라 불상엔 인도의 독특한 특징이 나타난다고 평가된다.
마투라불상은 젖꼭지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등 육체의 아름다움을 대담하게 표현하는데, 가사로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육체를 보여준다. 간다라불의 영향으로 옷 입은 마투라불이 후기엔 등장하지만, 그럴 경우에도 가사 속 육체의 아름다움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이 마투라불의 특징이다. 4세기부터 6세기까지의 굽타 왕조 시절에도 마투라는 불상조성의 중심적 지위에 있었다.
박물관엔 참으로 명품들이 많았다. 너무 많아 관리를 제대로 못할 정도였다. 기원 후 1·2세기에 조성된, 우리나라에 있었으면 무조건 국보가 됐을 유물들이 회랑에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불상 조각 이전부터 마투라에서 많이 만들어졌다는 약시상도 많았다. 약시상은 풍만한 몸매를 자랑하고, 굴곡 심한 요염한 포즈를 취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전시실과 회랑을 보고 나도 어딘지 허전했다. 마투라박물관이 발행한 도록 표지에 있는, 5세기경 조성된 세계적인 불입상(佛立像)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박물관 직원에게 가볍게 항의하니, 창고 속에 있다고 했다. 여기까지 와 그냥 갈 순 없는 법. 몇 번씩 졸랐다. 박물관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안내하는 지르라즈 프라사드씨가 와서야 볼 수 있었다.
지르라즈씨의 안내로 창고에 갔다. 창고 안에는 국보급 불상들이 가득했다. 너무 많아 관리를 제대로 못하는지 여기 저기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우리가 보고싶다고 말했던 그 불상은 모포에 가리운 채 바닥에 누워있었다. 모포를 걷어내는 순간 - 타지마할을 보고 입이 벌어졌듯 -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지르라즈씨의 말처럼 마투라 박물관 최고의 명품이 그곳에 있었다. 5세기 조성된 불입상은 과연 보는 이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물결치는 파도 모양의 U자형 가사, 탄력있는 몸매, 생각에 잠긴 듯 감은 눈,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는 광배 등 모든 것이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너무나 잘 생긴 상호에 반해 한 참을 쳐다보았다.
<유적 사이에 놓인 철로> |
사진설명: 마투라 시내엔 많은 불교유적들이 있다. 불교유적 사이에 놓인 철로. |
법현스님이나 현장스님이 보았다는 2000 ∼ 3000명의 스님들은 어디로 다 가버렸을까. 마투라엔 여전히 종교적 분위기가 물씬 나는데, 거리엔 불교는 왜 없을까. 인도불교 흥망성쇠의 원인은 무엇일까. 유적지에서만 느껴지는 이런 저런 잡념이 머리 속에 갑자기 떠올랐다. 마투라에 불교가 다시 일어나기를 마음 속으로 기원하고 떠나야만 하는 순례 객.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마투라 불교의 부흥자 만싱씨
<마투라불교 부흥자 만싱씨> |
사진설명: 마투라불교 부흥운동을 펼치고 있는 만싱씨가 자신이 건립중인 우파굽타사를 가리키고 있다. 우파굽타는 마투라에서 태어나 후일 아쇼카왕의 스승이 된 스님이다. |
<아육왕전>에 보면 아쇼카왕의 스승인 '우파굽타'(優波掘多)라는 스님이 나온다. 스님은 아쇼카왕을 교화해 불교유적지를 순례하고, 석주를 세우게 만든 인물. 바로 그 우파굽타 스님의 고향이 마투라. 만싱씨는 현재 우파굽다 스님의 이름을 딴 '우파굽타사(寺)'를 마투라 교외에 건립하고 있다.
한편으로 만싱씨는 마투라 주변 유적지를 무분별하게 발굴하지 못하게 하는 운동도 벌이고 있다. 발굴이라는 미명 하에 불교유적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불교는 인도 사회를 이끌 훌륭한 사상"이라고 밝힌 만씽씨는 "불교가 성했을 때 인도도 마투라도 발전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