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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가꾸는 우리 말 글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나
2007. 11. 13
삶을 가꾸는 말 글 교육은 어떻게 가능한가?
말과 글은 사상을 담는 그릇이요 소통의 도구다. 언어가 없다면 인류가 멸종했거나 짐승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언어는 인류 발전의 바탕이자 길잡이였다. 한 개인의 삶도 언어와 함께 한다. 그러므로 말과 글을 배우고 익히며 제대로 쓰는 일은 삶의 문제이지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말 글 교육은 삶을 깨우치고 가꾸는 교육이다. 삶을 가꾸는 우리 말 글 공부는 철저하게 실제 삶을 바탕으로 할 때 가능한 일이다. 정보와 지식의 나열이나 재구성 따위로는 도무지 삶을 가꿀 수 없다. 전문분야의 주장 글이나 이론을 밝히는 논리 글들은 실제 삶을 벗어나는 경우가 있지만 보통의 말 글 공부에서는 실제 삶이 바탕일 수밖에 없다.
삶을 가꾸는 우리 말 글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첫째는 정직한 말하기와 글쓰기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세상에 정직할 때 배움이 일어난다. 정직하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 관찰, 책이나 언론에서 얻은 지식을 자기 삶을 바탕으로 생각과 느낌을 뚜렷하게 밝히는 일이다. 정직한 말 글 교육은 본 대로 들은 대로 느낀 대로 말하고 쓰는 일이다. 관념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에 바탕을 두고 삶을 섬세하게 성찰하는 일이다. 어떤 일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점만 강조하거나, 부분 사실을 확대 해석해 진실을 왜곡하는 궤변, 현실에 근거를 두지 않고 논리 순서만 따르는 관념의 글 따위는 정직하지 못한 글쓰기의 예이다. 정직한 글쓰기는 본질을 밝히는 것이다. 이것이 살아 있는 글쓰기의 기본 뼈대이다. 더구나 삶을 배우고 깨우쳐가는 어린이와 청소년 때의 정직한 글쓰기는 삶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것이다.
둘째는 관념을 벗어나고 따져보는 말 글 공부여야 한다. 관념은 대체로 사회에서 주입된 것이다. 주입되는 관념은 거짓일 때가 있으며 주류 세력들의 이익을 위한 것일 때가 많고 자기 가치관에 맞지 않을 때가 많다. 추상 관념이나 낱말을 하나씩 따져보고 자신에게 알맞게 써야 한다. 그러는 가운데 배움이 일어나고 삶이 가꾸어진다. 아주 단순한 예를 들면 까마귀가 ‘까악 까악’ 운다고 표현하는 것은 사회에서 주어진 관념이지 자신이 들은 실제가 아니다. 듣는 사람에 따라 까마귀 울음이 ‘아악 아악’이나 다른 것으로 들릴 수 있다. 까악 까악만 생각하고 실제 들리는 소리에 귀를 열어 놓지 않는다면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관념에서 벗어나는 일이 관념을 없애자는 것은 아니다. 까마귀가 까악 까악 운다는 말은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이 모여서 사회 일반에 굳어진 것임은 틀림없다. 까마귀 울음이 여러 소리로 들릴 수 있지만 보편으로는 ‘까악 까악’이라 한다는 사실을 알 때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보편성을 갖춘다. 까마귀의 울음에 자신만의 감정과 색깔을 씌울 수 있다. 삶을 깨우칠 수 있다.
관념을 따져보는 예로 대안학교에서도 보통으로 쓰고 있는 말 ‘방학(放學)’을 들 수 있다. 이때 ‘방(放)’자가 ‘놓다, 내치다’의 뜻인데, 이 말을 대안학교에서 써도 되는 것일까? 공부를 놓거나 내친다니! 삶과 배움을 일치시키려는 대안교육에서 이게 말이 되는가. 학교를 쉰다는 뜻이라면 그에 맞는 말을 찾아 써야 한다. 하다 못해 사회 일반의 뜻은 무시하고 쓰자면 ‘휴교(休校)’가 더 뚜렷한 말 아닌가. 학교는 쉬지만 집에서 스스로 공부하는 기간이라면 흔히 쓰는 ‘가정학습 기간’이나 ‘자습(自習) 기간’ 따위가 올바르지 않을까? 아이들도 ‘방학’ ‘방과후’의 정확한 뜻을 모른다. 그저 생활에서 현상을 알 뿐이다. 이 ‘방학’이라는 말은 공부가 생활과 동떨어져 있는 현실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대안교육의 정신에 맞는 말을 찾아 쓰는 것이 삶을 가꾸는 공부다.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 생각한 것을 가지고 관념의 낱말들을 하나씩 따져 새롭게 해석하고 다가갈 때 삶이 풍요로워진다. 그래야 관념의 언어, 죽은 언어가 아니라 생생한 삶의 언어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쓰는 낱말 하나 토씨 하나 허투루 여기지 않고 하나씩 자기의 것으로 성찰하며 깨우쳐가기 위한 우리 말 글 교육. 이것이 우리 말 글 교육의 기본 정신이라 여긴다.(‘방학’은 대안학교 선생이 되고 나서 대안교육에 아주 걸맞지 않는 말로 느낀 것 가운데 하나여서 일부러 예를 들었다. 좀 지나치게 이야기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알맞은 말을 찾아 쓰면 좋겠고, 좋은 생각이 있으면 알려주면 좋겠다.)
셋째는 쉬운 우리 말과 글로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해야 한다. 어린이든 누구든 알아들을 수 있는 말과 글을 쓸 때 삶을 가꿀 수 있다. 이는 ‘소통’을 위해서도 반드시 그래야 한다. 입말과 백성들의 말과 글을 살려 쓰려는 것은 그런 노력이다. 도저히 입말로는 글의 맥락과 뜻을 표현할 수 없는 경우야 어려운 글말이나 외국말을 쓸 수 있겠지만 (그런 경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생각도 안 해보고 쓰거나 일부러 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런 예는 우리 둘레에서 너무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다. 입말로는 거의 쓰지 않고 글로도 잘 쓰지 않는 말들, 예를 들면 ‘익사위험’ ‘반출금지’ ‘낙석주의’ 따위는 너무나 흔해서 이제 보통일이 되어 버렸다. 온 국민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써야 하는 공문에도 얼마나 어려운 말 글이 많은가. 어린이와 청소년이 주로 다니는 박물관이나 체험장에 선생들도 알 수 없는 말이 얼마나 많은가. 이래서야 삶이 가꾸어지겠는가? 쓰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익숙한 말이라 그냥 썼다 하더라도 상대방의 처지를 살피지 않는 것이니 어찌 삶이 있겠는가. 어려운 말과 글을 듣거나 읽는 사람도 처음에는 따져서 새겨보려고 할 것이나 워낙 많은 글에서 이런 말들이 쓰이고 있으니 대충 이해하고 넘어가거나 몰라도 아는 체 하고 만다. 하나씩 따져보며 깨우치며 살기보다 어림짐작이나 얼버무리며 넘어가면 삶도 그 모양이 되고 만다. 삶을 가꾸는 말과 글이라면 누구나 뜻을 또렷이 알 수 있도록 하는 일은 기본 가운데 기본이다. 그래야 자기 줏대도 또렷해진다.
학교마다, 사람마다 중요점을 달리 할 수 있으나 분명한 것은 언어가 삶을 가꾸는 근본 도구라는 점이다. 삶을 가꾸는 우리 말 글 교육의 논의가 깊어지기를 바란다. 그런 점에서 말 글 교육의 한 예로 우리 학교 규칙을 소개하려고 한다. 우리 학교는 앞에서 말한 내용을 바탕으로 꼭 지켜야 할 것들을 정해서 실천하고 있다. 어린이와 선생, 부모 모두가 함께 실천하는 것들이다. ‘~를 하지 말자’ 식이고 학교의 규칙이다 보니 우리가 바라는 말 글 교육의 내용을 다 담을 수는 없다. 그래도 자기가 내뱉는 말을 한 번 더 생각해서 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의 처지를 살피며 말하는 버릇이 들게 되어 아이들 삶이 자연스레 가꾸어진다고 자부한다. 그 결과 우리 학교에서 정성을 들이는 ‘글쓰기’ ‘일기쓰기’ 공부에서 교육의 성과가 있다고 여긴다.
삶을 가꾸는 말 글 교육을 위해 우리 학교에서 실천하는 것들
첫째, 애기말을 쓰지 않는다. 애기말은 어린이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데 방해가 된다. 어린이도 더 자라야 하고 보살핌을 받아야 하지만, 마냥 어른에게 기댄다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자랄 수 없다. 애기말을 쓸수록 어른의 힘을 빌리려는 생각을 더 갖게 된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은 사회를 더 많이 알게 되고 사람 관계가 더 넓어지고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더 많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환경변화와 성장에 따라 스스로 힘을 기르고 주인으로 살려고 애쓴다. 애기말을 쓰지 않으면 주인으로 살려는 마음이 더 자라게 된다. 가장 많이 쓰는 애기말은 사람을 부르는 말이나 몸에 관한 낱말, 먹고 자고 싸는 일과 같은 생활의 밑바탕 말들이다. 정확한 발음이 되지 않는 아기 때도 이 말은 꼭 필요하기에 애기말이 생긴다. ‘엄마’ ‘아빠’ ‘형아’ ‘똥꼬’ ‘고추’ ‘맘마’ ‘응가’ ‘쉬’ 따위다. 이 가운데 엄마, 아빠는 청소년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말이다. 어머니 아버지라 부르면 다정스럽지 못하고 거리감을 느낀다든지, 아버지 중심의 봉건성이 떠오른다든지 하는 까닭으로 쉽게 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어머니, 아버지로 고쳐서 쓰게 해보라. 자기 존재에 대한 생각이 뚜렷해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엄마, 아빠에게 보호받는 나에서 어머니 아버지한테서 독립된 나로 나가게 하는 힘이 있다. 봉건성의 문제나 친밀감이 모자라는 점은 그런 경험을 한 어른들의 생각일 뿐이다. 어머니, 아버지 말에 그런 뜻이 배이지 않도록 어른들이 바르게 살면 된다. 어머니 아버지를 부르기가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으나 그것은 잠시다. 더구나 부모의 과잉보호로 아이들을 망쳐놓은 경우가 적지 않은 요즘 사회에서 어머니 아버지 말은 부모와 아이 모두가 주인으로 살아가도록 도움을 준다.
둘째, 줄임말을 쓰지 않는다. 줄임말은 흔히 쓰는 말 가운데 긴 말을 줄여서 편하게 쓰는 말이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와 같이 모임 이름을 줄여서 부르는 게 가장 흔하다. 그러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줄여서 하는 말은 대체로 상대를 무시하고 놀리고 욕할 때 쓰거나 자기들끼리만 비밀스런 이야기를 할 때 쓴다. ‘짱나’ ‘열나’ ‘방가’ 따위가 그 예이다. 이런 말들이 생기고 퍼진 것은 인터넷 탓이 크지만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일상에서 이런 단어를 쓰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줄임말은 설명이나 자세히 이야기할 까닭이 없다는 말투다. 상대방에게 짜증이 났을 때 ‘짜증이 난다’고 뚜렷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짱나!’ 하고 내뱉음으로써 상대를 무시하고, 관계나 상황을 끝내버리는 것이다. 상대방과 소통할 뜻이 전혀 없고 상황을 외면해버린다. 욕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나쁠 때가 있다. 차분하게 말하고 소통하는 버릇을 들이지 못하게 한다. 줄임말이 꼭 필요할 때도 있을 것이나 이런 식의 줄임말을 안 쓰게 하는 것이 옳다. 풀어서 이야기할 때 상대에게 차분하게 설명하고 소통하는 마음이 생기는 법이다. 긴 이름을 줄여서 말하거나, 좀더 나은 관계를 위해 일부러 줄인 말(적절한 예일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샘 따위)을 쓸 때도 아주 조심해야 한다. 본디 말뜻을 해치지 말아야 하고, 소통이 넓어져야 하고, 상황과 처지에 맞게 써야 하는 법이다. 아주 불편하지 않다면 줄여서 쓰는 말은 옳지 않다.
셋째, 외국말(영어말, 중국말, 일본말 따위)이나 외국 말법을 쓰지 않는다. 외국말은 외국인과 소통을 위한 말이다. 우리끼리 외국말을 쓸 까닭이 없다. 외국말이 들어와서 우리 말로 굳어진 말들(아파트, 컴퓨터, 텔레비전, 라디오 따위)은 쓸 수 있겠지만 그 밖의 경우야 쓸 까닭이 있겠는가. 외국말을 쓰지 않는 것은 겨레와 나라를 생각하도록 가르치려는 점도 있지만 그것이 중심은 아니다. 말과 글은 자기 생각과 감정을 섬세하게 성장시키는 도구다. 자기에게 익숙한 말로도 자기 감정과 생각을 다 표현하고 다듬기 어려운 마당에 어눌한 외국말로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또 외국 낱말을 섞어서 쓰는 사람들은 자기 감정과 생각이 자기 스스로도 뚜렷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을 때가 많고 자기중심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더구나 외국말은 우리 말법에도 안 맞고 우리 정신마저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현병호 선생님도 이야기한 '~에 있어서’나 ‘~적(的)’ ‘~의’ 따위가 그렇고, 서양 말법의 ‘있었었다, 했어야 했다’가 그렇고, 쓸데없는 겹말들이 그렇고, 일본말투의 입음꼴(피동사)로 쓰는 일이 그렇다. 입음꼴은 ‘생각되어졌습니다’와 같이 ‘되다+지다’ 식이나, 자기 생각이나 뜻을 뚜렷이 내보이기보다 말 뒤에 숨거나 감추는 아주 비겁한 말이다. 우리 말법에는 이런 경우가 거의 없다. 다만 이런 점을 충분히 동의해서 외국말을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자말의 경우는 논란이 많다. 한자말이 어떤 상황을 추상화하는데 도움이 되고, 한자말이 우리말 속에 아주 많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한자말을 아주 쓰지 말자가 아니다. 한자말을 되도록 쓰지 말아야 하며 쓰더라도 그 뜻을 분명히 알고 써야 한다.
넷째, 욕을 하지 않는다. 욕만이 아니라 사람을 놀리거나, 업신 여기는 말들을 하지 않는다. 욕이나 놀림말은 다른 이를 힘들게 할 뿐 아니라 자기 마음도 병들게 한다. 마음을 병들게 하는 말은 아주 엄하게 못하게 한다.
다섯째, 우리말을 살려 쓰고 바로 쓴다. 우리말을 살려 쓰는 것은 없는 말을 억지로 만들고, 죽어 없어진 말을 되살려 쓰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선은 우리말이 외국말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식물을) 채취한다’를 쓰지 않고 상황에 알맞은 말을 골라서 쓰는 일이다(이것은 이오덕 선생님이 힘주어 한 말씀이고 그 가운데 하나의 예다). 채취한다는 ‘(고사리를) 꺽는다’ ‘(고구마를) 캔다’ ‘(상추를) 뜯는다’ ‘(부추를) 자른다’ ‘(배추를) 뽑는다’ ‘(오이를) 딴다’ 따위의 우리말을 잡아먹는다. 상황에 맞게 우리말을 써야 현실의 삶을 제대로 표현하고 말 속에서 일과 삶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식물이 아니라 식물 전체를 거둬들이는 것으로 ‘채취한다’를 썼다 해도 올바르지 않다. 그때는 ‘거둬들인다’로 쓰면 된다. 또 같은 뜻을 가진 말이 두 가지 이상의 낱말로 쓰일 때 그 가운데 우리의 생각과 삶에 맞는 말을 살려 쓴다. 예를 들면 ‘뒷간-변소-화장실’이 그렇다. 모두가 느끼듯이 뒷간은 똥과 오줌을 자연 속에 눈다는 뜻이 크다. 똥과 오줌을 모아 둘 곳이 따로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까지 포함한다. 뒷간이라는 말에는 똥과 오줌을 자연의 순환체계에 놓아둔다는 뜻이 크게 담겨 있다. 변소는 똥과 오줌을 한 곳에 모아서 거름으로 쓴다는 뜻이 녹아 있다. 뒷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집집마다 뒷간을 마련하여 그 집안의 거름으로 쓴다는 뜻이 더 담겨 있다. 화장실은 집집마다 똥, 오줌 누는 곳이 있지만 그것을 개인이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수처리관으로 흘려보내는 것이다. 내가 눈 똥오줌을 내가 자연에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사람이 만든 기계 장치들로 처리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아파트와 연립주택들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하수처리관으로 내보내기만 하니 똥오줌 누는 곳에서 씻기도 하고 화장을 하기도 해서 화장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똥오줌을 누는 곳을 생각에 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학교는 뒷간 또는 변소라고 부른다. 도시 생활을 하고 있으니 화장실이라는 말이 더 알맞을지 모르지만 똥오줌이 훌륭한 거름이며 사람도 자연과 함께 순환체계를 이루어야 함을 새기기 위해서 쓴다. 뒷간과 변소에 녹아 있는 정신을 배운다. 우리말을 살려 쓰는 것은 이런 뜻을 담고 있다.
위에서 우리 말 글 교육은 삶을 가꾸는 공부여야 하고, 우리 학교에서는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에 대해 밝혔다. 아이들과 만나는 학교 현장에서 꼭 생각해야 할 것과 그 예들로 이야기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구체로 뚜렷하게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한자말과 ‘-적(的)’에 대한 것이다. 이 '적'은 보통으로 쓰고 있는 말인데, 이것이 우리 말 글을 바로쓰고 살려쓰는데 아주 큰 걸림돌이다. 그래서 한자말과 '적'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 한다. 먼저 이오덕 선생님이 말씀하신 한자말과 '적'자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 말 글을 살려쓰고 바로 쓰려는 이오덕 선생님의 뜻을 우리학교는 새기고 실천하려고 한다.
한자말에 대해서 이오덕 선생님은 “중국글자말은 천 년 동안 우리의 삶에 깊이 스며들어 있어, 이제는 그것을 모조리 없앨 수가 없고, 모조리 없앨 필요도 없다. 우리가 몰아내어야 할 중국글자말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글자로 썼을 때나 입으로 말했을 때 그 뜻을 알 수 없거나, 이내 알아차릴 수 없는 말이다. 이런 말은 우리 말이 될 수 없다고 보고, 쉬운 우리 말로 바꿔 써야 한다.”『우리 글 바로 쓰기』 1권, 18쪽, 한길사, 1992)고 했고, “우리말을 너무 지나치게 고집하여 중국글자말이면 무엇이든지 배척하고 싶어하는 이들도 우리말 살리는 일을 도리어 더 꼬이고 뒤틀리게 한다”고 지적했다. 한자말에 대한 이야기는 이오덕 선생님의 뜻을 새기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적(的)’ 이라는 말을 살펴보자. 이 말은 사회에서 너무나 흔히 쓰고 있는 말이며 우리 말글을 어지럽히는 데 으뜸이 되는 말이다. 이오덕 선생님은 『우리 말 살려 쓰기』 둘째 권에서 ‘적’자를 쓰지 말아야 할 까닭으로 열 가지를 들고, ‘적’을 쓰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말하고 있다. 그 열 가지를 좀 간추려서 옮겨본다.
이 말을 안 써야 우리 말을 살릴 수 있고, 우리 말을 살리려면 우선 이 말부터 몰아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째서 이 말을 안 써야 되나? 그 까닭이 참 여러 가지로 많다.
첫째, 우리 말이 아니다. 아무리 흔하게 써도 어른들이 쓰는 말이고, 머릿속에 ‘글’이 들어 있는 사람들이 쓰는 말이다. 시골에서 옛날처럼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무식한’ 사람들은 이 ‘-적’이란 말을 할 줄 모른다. 그리고 아이들, 초등학생들도 안 쓴다. 5, 6학년쯤 되면 어쩌다가 어른들 흉내낸다고 쓰는 아이가 있을 것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끊임없이 학교에서 가르치고 어른들이 써왔는데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쓰지 않는 말이고, 더구나 방 안에서 식구들끼리, 골목에서 이웃들끼리 주고받는 나날의 말로 되어 있지 않다면 이것은 우리 말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둘째, 이 ‘-적’이 들어가면 그 말이 어려워지고 말이 말로 안 되고 어려운 글이 된다.
셋째, 이 ‘-적’은 일본말이다. 본래 일본말에는 우리 말에서 받침에 해당되는 말소리가 없어서 부드럽고 곱기만 하지 힘찬 소리를 낼 수 없다. 그래서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힘차게 내세우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매김씨(관형사)로 만드는 토씨(조사) ‘노(の)’만을 자꾸 써서 이름씨(명사)를 줄줄이 꿰어 놓자니 답답할 밖에 없다. 이러던 터에 무슨 무슨 ‘적(的 )’이란 말이 나오니까 이 말소리 ‘테끼’, ‘테끼’가 힘찬 받침소리 효과가 나서 ‘の’ 대신에 이 말을 너도나도 하고 다투어 쓰게 되었다. 그러니까 일본사람들은 이 ‘테끼(的)’란 말이 자기들 말에서 모자란 점을 채워주는 말로 꼭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말에는 예사소리와 된소리, 열린소리와 닫힌소리, 부드러운 소리와 힘찬 소리가 고루 있기 때문에 조금도 이런 말을 꾸어다가 쓸 필요가 없다. 이런 말을 쓰면 도리어 우리 말에서 닫힌소리나 거친소리가 더 많아져서 말이 사납고 어설프게 되고 만다.
넷째, 이 ‘-적’을 쓰면 말이 부드럽지 못하게 된다. 아름다운 우리 말이 이 ‘-적’ 때문에 그만 어설프기 짝이 없는 말의 질서로 바뀌고 마는 것이다.
다섯째, 앞뒤에 한자말을 불러와서 어려운 한자말의 틀을 만든다. 이 ‘-적’은 깨끗한 우리 말에는 붙지 않는다. 거의 모두가 한자말에만 붙는다.
여섯째, 도무지 아무런 필요도 없이 아무 데나 ‘적’을 자꾸 붙여서 쓰는 꼴이 참 가관이다.
일곱째, 따져 보면 이 ‘-적’은 정확하지 않는 말이다. ‘사대주의적 사상’이 할 때 이것은 사대주의에 가까운 사상이거나 사대주의와 비슷한 사상이라 할 밖에 없다. 그렇다면 아주 그렇게 ‘사대주의에 가까운 사상’이라 하든지 ‘사대주의와 비슷한 사상’이라고 해야 옳은 말이 된다. ‘-적’을 붙인 모든 말이 이렇다. 이러니 이 ‘-적’은 정확하게 쓴 말이 아니다. 적당하게 얼버무리는 말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래서 우리 말 우리 글 우리 생각 우리 행동이 어떻게 바르게 설 수 있겠는가?
여덟째, 이 ‘-적’은 외국 말법을 끌어들인다. ‘-적’이란 말 자체가 우리 말이 아니고 외국말이니 당연한 결과로 이렇게 되는 것이다. ‘생태적 삶으로서의 농사와 도농공동체,… ’ 이 글에서 나오는 ‘-으로서의’, ‘-로서의’, ‘-에서의’는 ‘생태적’ ‘사회윤리적’ ‘사회적’이란 말들과 잘 호응해서 외국말 직역투의 어설픈 문장을 만들고 있다.
아홉째, 문법에 맞지 않게 쓰게도 된다. ‘-적’ 자체가 흐리멍덩한 뜻으로 마구 쓰는 말이 되고 보니 말법이고 문법 같은 것도 무시하게 된다. ‘생태학적 고백하기’ 이것은 말이 안 된다. '생태학적’에서 ‘적’을 없애고 ‘으로’란 토씨를 써서 ‘생태학으로 고백하기’라고 해야 말이 될 것이다. 쉬운 우리 말 토씨를 안 쓰고 어려운 일본 한자말 ‘-적’을 쓰니 그만 말법에 대한 느낌조차 마비되고 마는 꼴이다.
열째, 벌써 입으로 하는 말에서도 예사로 나와서 우리 말을 오염하는 정도가 아주 엄청나다. “모두가 입말로 쓰는 말이니 우리 말이 되었다고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말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쓰는 것이 아니다. 글을 읽지 않는 사람이나 어린이들은 안 쓴다. 그리고 지식인들도 글을 쓸 때나 연설을 할 때, 또는 여러 사람 앞에서 어떤 생각을 내세울 때에 주로 쓴다. 설령 모든 사람이 쓴다고 하더라도 우리 말을 죄다 병들게 하는 말이라면 마땅히 내몰아 없애야 할 것이다.
이 ‘-적’은 우리 말로 살아가는 길에서 가장 먼저 싸워서 쳐부숴야 할 적이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글 속에 갇혀서 잘못된 글쓰기와 말하기로 살아온 사람들이라도 이 말만 안 쓰게 되면, 그때는 지금까지 자신을 덮치고 있던 한자말과 외국말법이 짜 놓은 그물에서 시원스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말이 환하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릴 것이고, 그래서 다른 나머지 잘못된 모든 말들을 쉽게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말 살려 쓰기』 둘 197~220쪽, 아리랑나라)
‘-적’이라는 말을 이래서 써서는 안 된다. ‘적’이라는 말이 삶에 끼치는 영향이 너무 커서 하나씩 따져 봐야 한다. ‘적’자는 이오덕 선생님이 이야기한 무엇과 ‘비슷하다’의 뜻과 어떤 것의 ‘부분이다’라는 뜻으로 보통 쓴다. 이런 말을 쓰는 마음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주장을 감추거나, 자신을 숨기려는 마음이 있을 때 쓴다. ‘뚜렷하게 하기보다 비슷한 것으로, 여러 부분 가운데 한 부분일 뿐이다’는 식으로 쓰는 말이다. 이런 마음은 비겁하다. 책임을 지지 않는 마음이다. ‘적’자를 쓰지 않고는 소통이 되지 않거나 어렵다고 한다면 모르겠으나 그런 경우는 없다고 본다. 어린이들은 자기 생각을 아주 뚜렷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적’자를 쓰지 않는다고 본다. 이 비겁한 말을 어찌 어린이들이나 청소년 삶에 쓸 수 있는가.
‘적’자를 쓸 수 있는 예로 '구체적'을 들면서 ‘구체적’ 대신 ‘구체’라고 쓰면 소통이 어렵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적’이라는 말이 안 들어가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구체’라는 말이 어려운 한자말이고 이 한자말을 뚜렷이 해석하거나 느끼지 못한 채 쓰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구체적이라고 흔히 쓰니까 그 말이 해석된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구체적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구체와 비슷하다’ ‘구체의 일부분이다’ 뜻으로 쓴다면 잘못된 말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 한다’는 어떤 일을 실제 상황에 알맞게 낱낱이 이야기한다는 뜻인데, 그 자체가 구체이다. 낱낱이 이야기하면서 그 낱낱과 비슷하거나 일부분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구체적’라는 말은 맞지 않는 것이다. ‘적’이라는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모르고 쓰고, 말이 되지 않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또, 구체적이라고 쓸 수 있다 하더라도 ‘구체’라는 말을 뚜렷이 느낀다면 ‘구체’나 ‘구체적’이나 어려운 말이 아니다. 구체의 반대말인 추상이 어렵지 않으면 추상이든 추상적이든 어렵지 않은 것이다. 구체가 어렵다면, 말이 안 되는 ‘구체적’을 쓸 것이 아니라 ‘낱낱이’ ‘뚜렷이’ ‘하나하나’ ‘예를 들어’ 따위로 쓰면 되고 그게 더 올바른 말이다. “‘구체적으로’라는 표현 대신 ‘구체로’라고 쓰도록 배운 아이들은 나중에 사회생활을 하면서 언어소통에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사고가 선명해지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민들레> 52호. 59쪽)는 현병호 선생님의 주장은 지나치다.
시의 운율을 비롯한 형식이나, 문체는 더 생각해볼 것들이다. “언어의 문제와 문체의 문제는 별개로 봐야 한다. 생활글이나 수필이 아닌 논리적인 글의 문체는 문어체가 더 적절한 경우가 많고 글마다 문체가 다를 수도 있다. 글은 말과 달리 억양이나 목소리의 느낌을 살릴 수 없기 때문에 그 나름으로 표현기법을 발달시킨 것이 바로 문체다. 말투와 음성에 저마다의 색깔이 있듯이 글도 쓰는 사람들에 따라 또 그 내용에 따라 저마다 다른 형식과 색깔을 갖고 있다”<민들레>52호. 50쪽)는 현병호 선생님의 이야기를 충분히 공감한다. 문제는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형식과 문체에 얽매어 자기의 생각이나 느낌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경우이다. 실제 글쓰기 공부를 해보면 이것이 핵심 문제이다. 관념에 찌들리고, 형식을 따지면서 쓰려고 하는 아이들일수록 자기 생각이나 느낌이 없다. 삶을 가꾸는 글쓰기, 정직한 글쓰기가 바탕이 되는 아이들이 주장 글, 설명 글, 시 따위를 쓸 때 형식을 갖추기 위해 애를 쓴다면 더 좋은 글이 되고 더 많은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오덕 선생님이나 한국글쓰기연구회도 그런 노력을 힘주어 해왔다. 한국글쓰기연구회 회원들이 펴낸 『갈래별 글쓰기』(우리교육, 2001)’나 여러 글에서 형식과 문체만 흉내 내는 거짓 글쓰기를 호되게 꾸짖고 형식에 알맞게 글을 쓰도록 이끌고 있다.
대안교육에서 우리 말 글 교육은 삶을 가꾸는 교육이어야 한다. 삶을 가꾸는 우리 말 글 교육에 대한 방법과, 현실에서 아이들이 말 글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되면 좋겠다. 그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 글쓰기에서 문체와 형식, 소통을 위한 방법들이 자연스레 이야기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