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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싸리에 멧돼지/萩に猪(いのしし)
싸리에 종이/萩に短冊
싸리/萩(はぎ) 대신에 붉은 팥/赤豆(あかまめ)이라고도 합니다.
왜 싸리와 멧돼지가 세트일까요?
그럼 이 두 개의 조합을 풀기 전에 각각의 특징 등을 보고 갑시다.
싸리 하면 콩과의 식물로 가을의 일곱 가지 화초/秋の七草(あきのななくさ)의 하나로도 유명합니다.
또 "만엽집(万葉集/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에서 가장 많이 읊어진 테마의 꽃"이며, 후세에 지어진 와카(和歌/일본 고유 형식의 시)와 하이쿠(俳句/일본의 5·7·5의 3구 17음으로 되는 단형시)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합니다.
게다가 "뿌리에 뿌리혹 세균이 있어서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란다" 등 일본인이 친근하게 느끼는 꽃으로 사랑받아 왔습니다.
그것에, 별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사기(邪気 나쁜 기운)를 없애는 마귀를 쫓는 식물로 여겨지고, 싸리 나무줄기( 굵은 부분)을 사용해 젓가락을 만들어 궁중 행사의 음력 정월 대보름(十五の節句) 등에도 사용됐다고 합니다.
성장기의 싸리의 가지는 보들보들하지만, 마른 상태가 되면 딱딱하게 되고 젓가락으로도 충분한 강도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한편, 멧돼지는 "마리지천(摩利支天/무가에서 숭배하는 싸움의 신)이 사용=승부에서 이김"으로서 마리지천과 마찬가지로 소중히 했습니다.
전국 시대,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와 야마모토 간스케(山本勘助)도 신앙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또,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가마쿠라 시대의 무장)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도 막부의 초대 장군 1542-1616)는 마리지천의 초상을 자신의 투구 안에 넣고 출진했다고 합니다.
또 "저돌적 맹진=하나의 일에 대하여 몰두하고 맹렬한 기세로 돌진하는 일"에서 기세를 좋게 하는 직업이나 도박 등에도 재수 좋은 동물로서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멧돼지는 다산으로 재수가 좋다=자손 번영 " 등 재수가 좋은 동물로서 예전부터 알려져 왔습니다.
이처럼 싸리와 멧돼지를 세트로 하는 것은, 화가들의 세계와 와카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패턴으로서 상식처럼 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화투의 도안을 고안한 사람이, 이러한 모양이 있는 구도로 그린 것이 아닌가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화투 중의 멧돼지는 싸리 속에 웅크리고 몸을 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8월
참억새에 달/芒に月(つき)
참억새에 기러기/芒に雁(かり)
8월짜리 참억새에 보름달(芒に満月) 화투는 무늬적으로 가장 유명할지도 모릅니다.
참억새라는 식물은 가을의 일곱 가지 화초 중 하나로도 유명하고, 주렁주렁한 이삭이 은빛으로 빛나며, 바람에 술렁술렁 흔들이는 풍경이 정말로 운치가 있습니다.
억새는 한 개만이라면 수수하고 그냥 마른 풀 같지만,군생한 고원 등에서 온통 억새가 무성하여 바람이 불면 그것에 맞게 흐르는 강처럼, 또는 땅을 기어가는 동물처럼 변화무쌍한 모습은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습니다.
고원 이외에도 근처의 고수부지나 학교 주변 등, 생활 속에서 조용히 생육하고 있는 서민적 식물입니다.
옛날에는 이 억새풀과 사초(莎草) 등의 볏과 식물을 총칭해서 "카야(萱かや)"라고 부르며 집의 지붕 자재로서 일반적으로 어느 집에서나 사용하여 왔습니다.
벼나 보리는,
같은 볏과 곡물이지만 수분을 흡수하는 것에 비해, 억새나 사초는 적당한 유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발수 효과가 높고 빗물이나 적설 시에도 침수하지 않고, 또한 높은 보온성으로부터 겨울철 실내의 온기를 유지하며, 여름철에는 햇빛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시골 풍경의 대명사 "초가지붕의 촌락" 등은 이러한 억새 등의 식물이 있어서 가능합니다.
또 가축의 사료로도 유용하고 틀림없이 일본의 생활에 밀접한 꽃입니다.
화투 속에 있는 그림은 참억새의 산에 보름달이 떠오른 광경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구도가 상당히 멋스럽고, 일부러 왼쪽의 달도 참억새의 산도 가까이 모이게 한 안 길이나 높이 등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참억새와 산의 인쇄 색을 검정, 속의 밑바탕 색깔은 그레이로 인쇄하고 있는 것에서 일반적으로 "산(山)", " 방주(坊主)"로 불리는 화투장입니다.
9월
국화에 술잔/菊に盃(さかずき)
국화에 청단/菊に青短
왜 국화에 술잔일까?
예로부터 일본에는 다섯 명절이라는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年 ~ 1185年)부터의 풍습이 있습니다.
1월 7일 인일 /人日(じんじつ)の節句
3월3일 삼짇날 /上巳(じょうし)の節句
5월5일 단오 /端午(たんご)の節句
7월7일 칠석 /七夕(しちせき)の節句
9월9일 중양 /重陽(ちょうよう)の節句
절(節)은 중국 당나라 때, 역법(暦法)으로 정한 환절기를 가리킵니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홀수는 길한 숫자로 여겨 왔습니다.
그리고 홀수에서도 가장 큰 숫자의 9가 겹친 9월 9일을 "중양(重陽)'으로서 명절을 지내 왔습니다.
(달력에서 홀수 날(양)이 겹쳐서 짝수 날(음)이 되는 날, 예를 들면 9월 9일은 9홀수 + 9홀수 = 18짝수로 음의 수가 됩니다.)
음의 날은 재수가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한 피사(避邪 마귀를 쫓는 일)의 행사가 열리는 것에서 부터, 계절의 적기의 제철 식물로 부터 생명력을 받아 사기(邪気 나쁜 기운)를 없애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중국의 역법과 일본의 농경을 하는 사람들의 풍습이 합쳐져, 정해진 날에 궁중에서 사기를 없애는 연회가 개최되게 되고 "명절"이라고 불리게 됐다고 합니다.
이 중양절/重陽(ちょうよう)の節句(せっく) 9월 9일의 딴 이름에 "국화의 명절/키쿠노셋쿠(菊の節句)"가 있습니다.
실제로는 음력에 열리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 9월 말~10월경 행사였던 것 같습니다.
국화는 예로부터 불로장수의 약효가 있는 꽃으로 귀중하게 여기고, 헤이안 시대에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졌습니다.
국화의 꽃잎에 쌓인 아침 이슬을 먹으면 불로불사(不老不死)가 됐다는 중국의 왕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실제, 국화꽃의 진액에는 세포의 항산화 작용, 해독 작용 기능이 있는 물질 글루타티온(Glutathion) 의 재생을 높이는 유효 성분이 포함된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냥 전승과 의식이 아니라 실제 효과도 있었던 행사였던 것입니다.
이들 이야기에서 9월(음력)= 국화 = 불로장수의 약효 = 재수 좋은 꽃 = 국화꽃을 술에 담가 마신다 = 불로장수, 액을 물리친다는 관계에서, "국화에 술잔"이라고 하는 조합이 태어난 것입니다.
실제로 술잔 속에 적힌 한자는 장수하다의 수 "寿"입니다.
10월
단풍에 사슴/紅葉に鹿(しか)
단풍에 청단/紅葉に青短
무시하거나 하는 것을 뜻하는 은어의 "시카토(しかと)"는, 이 그림 패의 어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0월의 패는 사슴이 옆을 향하고 있으므로 "鹿十(しかとお) "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사슴과 단풍의 조합이 된 것도 역사적 일화가 있습니다.
옛날에 어느 절에서 소년 (열세 살)이 글씨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마당으로 한 마리의 사슴이 다가와서, 툇마루에 들어가 놓아둔 소중한 붓글씨 연습장을 먹어 치웠습니다.
소년은 쫓아버릴 생각으로 문진(붓이라는 설도 있음)을 던지자, 공교롭게도 사슴의 급소에 맞았습니다.
불쌍하게도 사슴은 죽어 버렸습니다.
신사의 사슴을 죽인 자는 사형(いしこづめ[石子詰め] 죄인을 구덩이에 넣고, 위에서 자갈을 채워서 죽임)에 처하는 것이 옛날부터 정해져 있고, 어린아이라도 신사 경내에서 키우는 사슴을 죽인 죄는 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 소년을 일장 삼척(약 삼 미터. 나이로 구멍의 깊이가 정해졌습니다)의 깊은 구덩이 속에 죽은 사슴과 서로 껴안게 하여 넣고,
머리 위에서 멍석을 덮고, 위에서 돌멩이와 자갈을 넣고 생매장했습니다.
어머니와 아이, 둘만의 생활이었던 소년의 어머니는 미칠 듯이 슬퍼하고 용서를 구했지만, 용서되지 않고, 소년은 죽었습니다.
그 후 소년의 어머니는 죽은 자식의 공양으로 단풍나무를 심고, 소년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오전 4시와 오후 6시에 종을 치는 공양을 한 결과 49일 만에 관음보살(어린이 관세음 보살)이 나타났습니다.
자식을 가진 부모의 심정과 그 시대의 풍습의 참혹함 등, 옛이야기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는 이야기가 에도의 거리에서 대인기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화투의 도안을 생각했던 카드 공장들의 영감으로 10월의 대표적인 아름다운 꽃에 "사슴과 단풍"이 번뜩였는지도 모릅니다.
10월짜리 화투의 그림을 보면 다른 쪽을 향한 새침한 사슴의 얼굴이 소년의 명복을 비는 온화한 얼굴로도 보입니다.
11월
버드나무에 오노 노 미찌카제(토후)/柳に小野道風(おの の みちかぜ/とうふう)
버드나무에 제비/柳に燕(つばめ)
버드나무에 종이/柳に短冊
버드나무 /柳(やなぎ)대신에 비/ 雨(あめ)라고도 말합니다.
옛날에는 "버드나무에 우산" 또는 "버드나무에 우산을 쓰고 달리는 오노 사다쿠로/斧定九郎(おのさだくろう)"였습니다.
메이지 시대에 디자인이 바뀌어 "버드나무에 오노 노 미치카제(오노 노 토후)"가 됐습니다.
우리가 흔히 "비광"이라고 말하는 11월에 해당하는 광 화투장은 "개구리에 오노 노 미치카제 / 蛙に小野道風" , "버드나무에 개구리 / 柳に蛙"라고도 합니다.
버드나무(일본어: 야나기)는 원래 나라 시대(奈良時代)부터 나기라(奈伎良)라 불리며 습기가 많은 것을 좋아하고,
강인하면서 잘 견디는 뿌리를 가졌고, 쓰려져 매몰되어도 다시 발아하는 강인한 생명력이 있는 것으로부터 수해를 방지하기 위해 강가 등에 많이 심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버드나무의 꽃은 봄에 핍니다.
신록의 계절이나 한여름의 파릇파릇한 잎의 계절도 아닙니다.
개구리도 11월은 동면하고 있어 계절과 벗어났습니다.
올챙이의 모습을 보는 것이 봄부터 초여름, 개구리가 나오는 것은 여름입니다.
왜 11월의 화투장이 됐는가?
오노 사다쿠로는 가부키(歌舞伎)에 등장하는 악역 낭인(浪人)입니다.
몇 명의 가부키 배우가 이 낭인을 연기해 왔지만, 초대 나카무라 나카조/初代 中村仲蔵(しょだい なかむら なかぞう)가 맡은 사다쿠로는,
이때까지 낭인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꿀 정도의 요염하고 아름다운 사무라이 이미지로 거리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이후 오노 사다쿠로 이미지의 기준이 된 것 같습니다.
관객들이 도시락을 먹고 있을 때에 휙하고 우산을 오므리고 나타나서,
무대에서 확하고 우산을 열어 허세를 부리고 사라지는 장면.
게다가, 후세의 연출에서는 하얀 손이 불쑥 나와서 돈을 훔치는 등 다양한 연출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다쿠로의 스타일로 초대 나카무라 나카조가 초연한 것이 에도 시대(江戸時代 1603年 ~ 1868年).
화투의 그림으로 사용되게 되고, 오노 노 미치카제의 그림으로 바뀐 것이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1868年 ~ 1912年)입니다.
바뀌게 된 이유는 교육적 효과를 생각한 것입니다. 산적인 오노 사다쿠로보다 서예가 오노 노 미치카제가 훨씬 교육적이고, 오노 사타쿠로의 오노(斧)와 오노 노 미치카제의 오노(小野)가 발음이 같은 것이 최대의 이유입니다.
그나저나 11월의 화투를 통칭 "비/雨"라고 부릅니다.
왜 비일까요?
그래도 11월짜리 화투장이고 버드 나무도 푸르고 벼락의 그림도 들어 있습니다.
오노 사다쿠로가 나오는 계절은 6월.
11월은 아닙니다.
게다가 화투 룰 속에서도, 5장 있는 광 화투장 중에서, 이 비광 만이 특별 취급되고 있습니다.
사광은 이 비광을 제외한 4장의 광 화투장입니다. 비광을 넣으면 비사광(雨四光(あめしこう)으로 이름도 바뀝니다.
비광을 자세히 보면 오노 노 미치카제가 우산을 받쳐들고 버드 나무에 달려드는 개구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열끗짜리 화투에는 버드 나무에 제비가 날고 있고, 피 화투에는 기와에 천둥과 북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들은 11월의 풍경이 아닙니다. 버드 나무와 제비는 봄, 우산과 개구리는 장마, 천둥은 여름을 상기합니다.
12월의 화투도 오동 나무와 중국의 상상의 동물 봉황입니다. 12월이 아닙니다.
이런 이유에서 11월과 12월은 조커설이 유력합니다.
다른 지방 화투를 보면 4인용 화투에 13월짜리 광 화투에 용과 연꽃, 14월 열끗짜리에 대나무에 호랑이도 그려진 것이 있습니다. 6광과 용호(용과 호랑이)가 추가된 룰입니다.
12월
오동나무에 봉황/桐に鳳凰(ほうおう)
오동나무는 왜 겨울에 꽃이 피지 않는데 12월의 화투장에 됐을까요?
오동나무는 일본에서 채취할 수 있는 나무로는 가장 가벼운 나무로 ,습기를 통하게 하지 않고 균열이 적은 나무로 예로부터 소중히 여겨 왔습니다.
또 오동나무는 성장이 매우 빠른 식물이라서 옛 사람들은, 여자가 태어나면 오동을 뜰에 심고, 그 애가 결혼할 때 그 오동나무로 장롱을 만들어 혼수품으로 한다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동은 발화하기 어렵고 벌레를 막는다는 특징에서 옷과 허리 띠 등, 중요한 의류를 넣는 가구는 물론, 골동품이나 편지, 금고의 재료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현실적으로 뛰어난 나무였기 때문에 특별시되어 왔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오동이 특별시된 이유는 역사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원래 중국에서 오동이란, 모든 조류의 시조:전설의 영조(霊鳥) 봉황(鳳凰)이 머무는 나무로서 신성한 식물로 여겨졌습니다.
중국의 전설에 훌륭한 왕(천자)가 즉위할 때 길조인 봉황이 나타난다고 하여, 이 일이 일본에 전래되어 왕에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국화 무늬보다 옛날부터 궁가에서도 계속 사용되어 왔습니다.
국화에 이어 가장 고귀한 꽃(식물)이라 생각하여, 궁가의 부문(副紋)으로서 오래 전부터 사용되던 것을 정치를 맡긴 무가의 사람에게 포상의 하나로 하사한 것 같습니다.
그때는 궁가에 실권은 거의 없던 듯하고, 조정의 정통성만이 무기였습니다.
그래서, 유서깊은 혈통의 가문이나 지위가 높은 관직을 주고 조정의 위신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하나에, 궁가의 무늬인 오칠동화문(五七桐花紋)을 하사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무가의 세계에서 포상으로 쌀이나 금, 은, 영토, 비싼 찻그릇, 명마 등을 가신에게 주는 것과 같은 의미, 아니 그 이상의 정치적 효과가 있는 포상이었습니다.
받은 측은 이 오동의 가문을 사용함으로써 타인에게 궁가에 인정 받고 있다라고 어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신분이 낮은 집안의 사람은 동경하는 디자인이었던 것입니다.
이 "오동의 가문(家紋)" 사용 허가를 받은 것은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등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현재는 일본 정부의 국장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의장의 오칠동/五七桐(ごしちのきり・ごしちぎり)과 화투 12월은 많이 닮았습니다.
원래는 같은 의장을 참고로 하여 조금 바꾸어 완성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신분이 높은 물건을 도박에 사용하여,
막부의 압정과 신분 차별 등에 대하여 억제된 서민의 불만의 배출구로, 권력자가 갈망하는 오칠동, 오삼동을 무단 사용하고 흉내를 내어 무언의 저항, 기분 전환을 했다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 일본의 옛날 화투
● 닌텐도 사이트 내에 있는 룰의 예 - 코이코이(こいこい)
광/일본어: 光札(ひかりふだ) 에 해당하는 화투장은
소나무에 학(1월), 벚꽃에 막(3월), 참억새에 달 (8월,) 버드나무에 오노 노 미치카제(11월), 오동나무에 봉황(12월).
이렇게 다섯 장이며, 통칭 "오(5) 광"/일본어: 五光(ごこう)"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비광을 제외하고 3장을 모으면 삼광 / 일본어 :三光(さんこう),
4장을 모으면 사광 / 일본어 : 四光(しこう)이라고 하고,
비광에 다른 광 3장을 모으면 비사광 / 일본어: 雨四光 (あめしこう)이라고 부릅니다.
꽃놀이에 술 한 잔/花見で一杯
달구경에 술 한 잔/月見で一杯
멧돼지 사슴 나비/이노시카초 猪鹿蝶
적단/赤短
청단/青短
열끗/たね
띠/たん
피/かす
この記事は 検証可能 な 参考文献や出典 が全く示されていないか、不十分です。 出典を追加 して記事の信頼性向上にご協力ください。 ( 2011年2月 ) こいこいの遊び方で並べられた花札 花札 (はなふだ)は、 日本 の かるた の一種であり「 花かるた 」とも呼ばれた。今では一般に花札といえば 八八花 のことで、一組48枚に、12か月折々の花が4枚ずつに書き込まれている。 48枚の由来は、一組48枚だったころの ポルトガル の トランプ が伝来した名残である。2人で遊ぶ こいこい 、3人で遊ぶ 花合わせ 、という遊び方が一般的だが、愛好家の中では 八八 という遊び方に人気がある。同じ遊び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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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西園 松鶴遐齢図 橋本コレクション 方 西園 (ほう せいえん、 乾隆 元年( 1736年 ) - 卒年不詳 [1] )は 清 の商人・画家。 江戸時代 中期、日本に渡来し画技を伝える。 名 は濟、 字 は巨濟・巨川、西園と 号 した。 安徽省 旌徳県 の生まれ [2] 。 略伝 [ 編集 ] 周西山 を画の師とし、 花卉図 ・翎毛鳥獣図・ 山水図 などの 水墨 を得意とした。初来日は 明和 元年(1764年)とも 安永 元年(1772年)ともいう。安永3年(1774年)の来日記録ははっきりしている。安永9年(1780年)、45歳の時、元順号の副船主として渡海したが 5月2日 に房総沖で難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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桐紋 この記事は 検証可能 な 参考文献や出典 が全く示されていないか、不十分です。 出典を追加 して記事の信頼性向上にご協力ください。 ( 2017年1月 ) 桐紋 (きりもん)とは、 ゴマノハグサ科 の キリ の葉や花を図案化した 家紋 の総称である。 桐花紋 (とうかもん)とも呼ばれる。 室町幕府 では小判などの貨幣に刻印され、これ以来 皇室 や 室町幕府 や 豊臣政権 など様々な政府が用いており、現在では 日本国政府 の 紋章 として用いられている。 「 キリ 」も参照 図案 [ 編集 ] 3本の直立する 花序 と3枚の 葉 から構成されているものが基本的図案である。花序につく花の数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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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代 中村仲蔵(しょだい なかむら なかぞ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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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村仲蔵 (初代) 初代中村仲蔵の斧定九郎。 勝川春章 画。 初代 中村仲蔵 (しょだい なかむら なかぞう、 元文 元年〈 1736年 〉 - 寛政 2年 4月23日 〈 1790年 6月5日 〉)は、 江戸時代 中期の 歌舞伎 役者。 俳名 は秀鶴、 屋号 は堺屋(のちに榮屋)。紋は中車紋・三つの人の紋。「名人仲蔵」とよばれた名優。 妻は長唄の 7代目杵屋喜三郎 の娘のお岸。 経歴 [ 編集 ] 浪人斉藤某の子として生まれる(江戸平井村渡し守の子の説あり)。4歳の時に 舞踊 の師匠 志賀山お俊 の養子となり、お俊の夫 長唄 の師匠六代目 中山小十郎 の名をもらって中山万蔵と名乗る。はじめ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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